--세잔은 생트 빅투아르 산을 20년간 그렸다.
한 사람의 화가가 하나의 산을 20년간 그렸을 때,
그런 경우 그가 '산'을 그렸다는 표현이나
"자연에 대한 철저한 탐구"라고 한 말은 적당하지 않다.
그는 '산'을 '살았다'고 해야 한다.
(오규원, <날이미지와 시>, 66쪽)
제3회 EBS 다큐 축제가 어제로 끝났다.
특히 '존 앨퍼트 감독의 회고전'으로 틀어준 두 편을 이틀 연속 아주 재밌게 시청했는데,
<파파>와 <마지막 카우보이>였다.
<파파>는 감독이 여든 살 자신의 아버지 밥 알퍼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것.
사업가였고 운동선수였고 밴드의 리더이기도 했던 밥 알퍼트는
생의 마지막 10년, 신경 계통 이상으로 거동이 불편했는데 78세에 병원에서 만난
꽤 젊은 물리치료사 여성과 펜팔이 된다.
비교적 건강한 존의 어머니는 살짝 핑크빛이 맴도는 남편의 그녀를 향한 연정을
조소와 연민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데......
80세에 아내와 함께 자신의 젊은 여자친구를 방문하며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를
존 알퍼트 감독의 카메라는 짓궂게 따라다닌다.

영화배우같이 잘생긴 밥 알퍼트의 젊은 시절.
몇십 년 전 젊은 시절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 그가 누구라도 가슴 뭉클하다.

여든 살의 생일케이크의 불을 끄고 자신의 아들이 이 다큐를 완성한 직후
2002년 6월 세상을 떠났다.
또 한 편의 다큐, <라스트 카우보이>는 존 알퍼트 감독이 1980년부터 2003년까지
24년간 기록한 한 카우보이의 삶이다.
미국 사우스 다코타의 대평원, 아내마저 지긋지긋하다며 아들네가 사는 소도시로 떠나버리고
혼자 남은 늙은 카우보이 번 세이거.
그의 어린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고 결혼하고 또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카메라는 고스란히 보여준다.
번 세이거가 정말 이 지상의 마지막 카우보이이건 아니건 간에 무려 이십몇 년을 그의 뒤를 좇은
감독의 시선에 생각이 미치면 문득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 성실함과 한결같음과 집요함이라니!

라스트 카우보이 번 세이거
두 할아버지의 그 여유와 유머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세잔도 자신이 사는 동네의 언덕에 올라 생트 빅투아르 산을 20년간 줄기차게 그렸다고 한다.
그렇게 남긴 산의 그림만 88편에 이른다니.
<날이미지와 시>를 읽다가, 지난주 다큐로 만난 두 할아버지가 큰 맥락 없이 떠오르고,
또 시인 오규원의 방 벽에 붙어 있다는 세잔의 복제품 그림(그 나라에서 인쇄한)
'작은 산'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오전이 홀랑 가버렸다.
책 읽다가 자꾸 이렇게 딴짓하면 안 되는데......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