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지 않나?
미안하네, 이상한 소릴 지껄여서.
그냥 내가 요새 고독해서 말야.
문득 돌아보니 마누라는 뚱뚱한 아줌마가 돼 있고.
아들은 미국 갱단 흉내낸다고 애비더러 "YO!" 이러질 않나."
"말해 주겠어. 난 아버지고, 남자고, 역시 나는 나고,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사노 이니오 <이 멋진 세상> 2권, 에피소드 13편 '잘 자요' 68쪽)
"정말 싫어. 지긋지긋해! 일하는 보람도 없고, 윗대가리들은 하나같이 바보고,
보너스만 받으면 당장 때려치울 거야, 이 따위 회사."
"그래그래, 이 지랄 같은 세상 거저 준대도 안 갖는다. 그럼 우리 둘 사랑의 도피라도 할까?"
"아가씨, 가족은 안녕하십니까? ...애인은 있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2권 에피소드 14편 '달과 어묵' 중에서.)
.......................
지지난해인가 7천 원짜리 미니어처 인형을 주문했더니
어찌된 일인지 인형은 안 오고 달랑 가발(가로세로 5센티 정도)만 왔다.
그 미니어처 인형 전용의......
(당연히 나에겐 그 인형이 없었다.)
옛날옛적 처음 상경했을 때 청계천에서 "청바지 500원!"이라는 노점 상인의 말에 혹해
청바지를 하나 골라들었다가 오백 원이 아닌 오천 원임을 알고
뒤통수가 뜨끈했던 때보다 100배는 더 무안했다.
도처에 구멍이다.
시덥잖은 쇼핑에서 낭패를 보는 것 정도는 애교에 속한다.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고 엄살을 떨지만 사실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
1980년생 아사노 이니오.
필명 '이니오'는 집에 있던 보험증의 여러 기호에서 따온 것이라고.
(책날개에 그렇게 소개되어 있으니.)
함께 주문한 단편집 <빛의 거리>보다 <이 멋진 세상> 1, 2권이 더 마음에 들었다.
장래 꿈이 만화가(화가에서 만화가로 바뀌었다)인 딸아이를 위해
책값이 좀 비싸더라도 출혈을 감수하고 쟁여 두어야 한다는 생각.=3=3=3
연작도 아니고 옴니버스도 아니고 아무튼 좀 묘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만화.
예를 들어 에로 잡지 창간작업에 동원된 30대의 카스카베와
그를 불러들인 마흔 혹은 오십줄 중견 편집자의 대화(순서는 거꾸로)가
에피소드 13편 '잘 자요'라면,
에피소드 14편의 위에 소개한 장면은 거리 한 모퉁이의 라면 포장마차가 배경으로,
술이 떡이 되어 거리에서 헌팅되어 온 아가씨가 취하여 내뱉는 대사이고
라면을 말던 노인이 "그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니냐"고 한 마디 툭 던지는데.
등장인물들은 가족이나 친구, 혹은 사돈의 팔촌이거나 스치고 지나가는 행인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제법 익숙한 형식이지만 나는 늘 참신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 페이퍼를 쓰는 중요한 이유.
--문득 돌아보니 마누라는 뚱뚱한 아줌마가 돼 있고.
영악한 초등학생, 사춘기의 소년소녀, 미혼남녀, 무능한 중년,
노인의 고독과 애환이 각 에피소드로 거의 망라되어 있다면
그 뚱뚱한 아줌마의 이야기만 쏙 빠진 것이다.
아사노 이니오의 다음 작품에서 그녀를 꼭 만날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