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결국은 남자(!)다,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한대수가 쓴 < 영원한 록의 신화 비틀즈  vs 살아있는 포크의 전설 밥 딜런>을 읽으면서도 여지없이 든 생각이다.

연예인들이 낸 책 중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 두 권을 꼽으라면 한대수의 <물 좀 주소. 목마르요>와  이장호 감독의 친필글씨 일기장 <나는 고백한다> 이다. 난 이렇게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재능있는 인간들을 보지 못했다. 일단 책으로 자신을 표현한 사람들 중에서는......

옛날 옛날 부산 남포동을 얼큰하게 술이 취해 지나다가 내 발길을 묶었던 노래가 있다. 큰길 가 레코드가게에서 흘러나온 존 바에즈의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피닉스 호텔 옆, 나는 그 레코드 가게 진열장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또 한 곡은 어느 가을날 식빵을 사러 동네 빵집에 가다 듣고 붙박혔던 노래 심수봉의 '날이 갈수록'.

그런데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이 한때 연인 관계였다는 걸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이 정도면 세기의 만남이 아닌가! 그런데 밥 딜런은 존 바에즈를 외면하고 플레이보이 클럽에서 버니로 일하고 있던 여인 세라 로운즈에게 반해 그녀와 전격적으로 결혼한다.

 



사진이 많이 흔들렸다. 아무튼 나는 존 바에즈의 심정으로 밥 딜런의 새로운 연애를 보았다. 세라는 그의 첫 아내. 아이를 다섯이나 낳고 잘 살던 이 부부, 밥 딜런은 결국 자신의 바람기로 인해 기나긴 법정 싸움 끝에 아내와 아이들, 재산을 거의 잃는데......

영원한 관계, 절대적인 관계는 없는 것일까?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의 깨어진 관계가 이상하게 오늘 내 마음을 묵직하게 한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릴케 현상 2005-04-07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은 남자(!)다'란 바람을 핀다는 뜻인가요? 그런 얘기는 동의할 수 없음-,.-
아무튼 새벽별님에게 책 전달하라면 주소라도 올려놓으셔야죠~

숨은아이 2005-04-07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그런 게 아니고... 그도 별수없는 남자로구나, 싶을 때가 있어요. 별수없는 한국사람이구나, 별수없는 촌년이구나 할 때처럼. 음, 로드무비님 서재에서 제가 멋대로 대답을... ^^

로드무비 2005-04-07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3 산책님도 남자라고.^^
오늘 저의 심사가 좀 꼬였음.
주소 올릴게요.

로드무비 2005-04-07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쪽집게.^^

릴케 현상 2005-04-07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그놈도 인간이구나로 해요^^ 님들은 뭐 여자라고^^ 그러면서

水巖 2005-04-07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좋은 존 바에즈의 노래가 들려오는듯 싶은데 왜 싸우고들 그래요.
쉿 조용히 ㅡ .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 들리지 않나요? 난 저 노래 가슴 아프다고요.

어룸 2005-04-07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말로 전혀 딴얘기)음, 잘생긴 제이콥 딜런은 저 토끼아가씨의 아들이로군요...ㅎㅎ절대 연결이 안되어서요^^;;;;

비로그인 2005-04-07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딴 얘기) 저는 밥 딜런 보다 루 리드를 훠얼씬, 훠얼씬 더 좋아해요!

날개 2005-04-0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딴 얘기 할랍니다) 제 책은 무사히 잘 성재손에 도착했어요.. 벌써 두권 다 읽고 재탕 삼탕 중입니다..^^* 푹 빠졌네요~

urblue 2005-04-08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딴 얘기) 존 바에즈 LP가 한 장 있는데, 그걸 어찌 처리할까 생각 중...

마냐 2005-04-0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헹....결국은 남자다! 너무 명료하지 않나요? 짝짝...근데, 결국은 남자라는게...일종의 면죄부 같아요.

릴케 현상 2005-04-08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면죄부 함부로 남발하면 안 되죠 루터가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안했남=3=3=3

로드무비 2005-04-08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 그 노래가 '오버 앤 오버'였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니......
아무튼 좋은 노래 앞에서 티격태격해서 죄송해요.^^
딴 얘기하신 님들, 님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자명한 산책님, 면죄부가 어쨌다고요?^^;;;
 
나의 사직동 보림 창작 그림책
한성옥 그림, 김서정 글 / 보림 / 2003년 6월
장바구니담기


새문안교회 옆골목 사직동 129번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가 사진과 그림을 절묘하게 조합하여 그 골목과 그 사람들을 한 권의 그림동화책에 담았다.

이 책이야말로 포토리뷰로 올리기에 딱 적합한 책이다. 몇 장의 사진에 내가 어릴 적 살았던 부산시 동래구 연산동 이야기를 풀어넣어도 무리가 없으렷다.

몇 해 전 요절한 문학평론가 이성욱 씨가 브니엘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그의 책을 읽다 알고서 깜짝 놀랐다. 그가 고등학생일 때 나도 단발머리 여학생이었다. 게다가 브니엘고등학교에는 짝사랑하던 남학생 박모 군도 있었으니......
브니엘고등학교는 테니스부로 유명했는데 우리 집이 바로 그 테니스 코트 위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어 담장 안으로 날아온 테니스볼을 돌려달라고 까까머리들이 걸핏하면 벨을 눌렀다.
테니스 코치 중 장선생이란 이는 멋장이 여자 택시운전사인 우리 막내고모를 짝사랑하여 퇴근 무렵이면 똥 마려운 강아지모양 우리 집 앞을 서성였다.

'빠마'를 '야매'로 하는 골목.
나도 '빠마'를 '야매'로 한 적이 있다. 나는 항상 짧은 단발 아니면 상고머리였는데 어느 날 친구의 꾐에 빠져 모르는 아줌마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친구의 집, 머리가 완성되는 동안 심심하다고 친구가 김치전을 부쳐왔다. 피어리스 '피어니' 로션과 스킨 산 걸 자랑해대서 뚜껑을 열어 그 향기를 맡아보며 부러워했던 기억. 나는 내 몫의 로션이 없었고 엄마 로션을 아침마다 조금씩 얻어서 발랐다.
내 친구 머리는 근사하게 잘 나왔는데 내 머리는 이상하게 나와 울고 싶었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이 '피기'라고 놀렸다.

조그만 책방을 열어놓고 하루종일 책이나 읽으며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도서대여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비디오 대여점도...... 책이나 비디오를 연체하고 떼먹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지라 내 성격에 그런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언젠가 도서대여점을 하며 만난 사람들에 대해 논픽션 같은 걸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요즘도 신동아에서 논픽션을 공모하는가 모르겠다.

나는 끝내 나만의 방은 가져보지 못했다. 방, 하면 여동생과 함께 쓰던 다락방이 제일 생각난다. 앉은뱅이 책상과 그 위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책들. 이중섭의 '달과 까마귀' 나무액자와 루오의 예수님 얼굴 그림을 잡지에서 오려 바람벽에 붙여놓았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분위기 있다고 했던 방. 그 방이 가끔 그립다.


댓글(21)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엔리꼬 2005-04-06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니엘고 - 부산의 몇 안되는 남녀공학... 부산 남고생들의 선망과 질투의 대상 (리뷰 댓글이 뭐 이래..)

로드무비 2005-04-06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사직동에 나의 연산동 시절을 써넣었다.
너무너무 재밌다. 님들도 사진 퍼가서 해보시기를......

날개 2005-04-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다닐때 빠마를 하셨단 말여요? +.+ 사진 남아있는거 혹시 없나요?^^

로드무비 2005-04-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서림님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지요?
혹시 고향 까마귄가요?

로드무비 2005-04-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대학 막 들어가서요.^^

릴케 현상 2005-04-06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니엘이라^^ 우리 누나는 데레사 여고 다녔는데

로드무비 2005-04-06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레사, 오오, 그 자주색 교복.^^

2005-04-06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4-06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5-04-06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데레사 나온 여자와 사귄 적이 있어요

로드무비 2005-04-06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거기가 가톨릭 계통인데 교복이 자줏빛이었어요.
언제 연애하셨는데요? 궁금.^^

숨은아이 2005-04-06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분위기 있는 글... /전 교복을 입어보지 못했는데, 제가 다니던 여고의 옛날 교복과 지금 교복도 자주색이에요. 자주색으로 교복을 입는 신기한 학교가 부산에도 있군요. ^^

로드무비 2005-04-0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위기 있는 글 알아보는 숨은아이님.^^

하루(春) 2005-04-06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멋지구리합니다. 사진보다는 님의 글이 더 제 눈에 꽂혀서 떠나기 싫어요.

내가없는 이 안 2005-04-07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추천해요. 빠마를 야매로 하는 골목, 가보고 싶어요. 전 백조미용실이라는 허름한 곳에서 늘 머리를 맡겼더랬죠. ㅎㅎㅎ

icaru 2005-04-07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나 비디오를 연체하고 떼먹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지라 내 성격에 그런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ㅎㅎ...

로드무비 2005-04-07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조미용실은 동네 골목마다 하나씩 있지요.
이안님, 추천 고마워요.
하루님도 멋지구리한 댓글 감사.^^
복순이 언니님, 속에 천불나서 저 장사는 못해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새벽별님, 거기가 어딘데요? 자주색교복?

플레져 2005-04-07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참 부지런하십니다. 저는 요새 리뷰와 담쌓고 사는데...^^ 저두 추천할거에요~~

로드무비 2005-04-07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저도 요즘 포토리뷰나 설렁설렁 올려요.
2,30분이면 되거든요.^^

balmas 2005-04-08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똥 마려운 강아지모양 우리 집 앞을 서성였다."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추천 하나~~

로드무비 2005-04-09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언제나 추천에 후하신 분.
그런데 님도 똥마려운 강아지 꼴로 어느 집 대문 앞을 서성인 적이 있으신가요?
그래보지 않은 인간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로드무비^^
 
나는 사진이다 - 김홍희의 사진 노트
김홍희 글.사진 / 다빈치 / 2005년 1월
절판


사진은 내게 삶이 뭐냐고 물어온다.

2003. 네팔 카트만두의 몽키사원에서
몸과 몸 사이의 거리. 기도와 기도 사이의 거리. 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 그 사이사이의 맨발들.

"프로는 사진을 자랑하고, 아마추어는 카메라를 자랑한다."는 말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는 지금 당신의 수중에 있는 카메라이다.

2003. 몽고 울란바토르 가는 길.
(저 간이매점에서 담배 한 갑 혹은 과자 한 봉지 사고 싶다- 로드무비)

2003. 몽골 아르바이헤르 가는 길.

한눈에 내가 반한 아저씨. 이 책을 선물받았을 때 제일 먼저 이 사진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적당한 통속, 적당한 허풍, 적당한 바람기를 모두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얼굴.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제대로의 이해까지......

2003. 인도 캘커타 시장.

남루하고 어슴푸레한 골목 풍경에 이상하게 가슴이 에인다. 저 지붕들, 저 창문들, 저 빨래들, 그리고 저 찌그러진 가로등......며칠 전 페이퍼로도 올린 사진이다.

2003. 범어사.

이 책을 쓴 사진작가 김홍희는 정말 카메라로 시를 쓰는 시인인가보다. 그가 사진으로 소개하는 내 고향 부산 곳곳의 풍경은 내가 처음 보는 풍경들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모두 가보았던 곳. 부산 수영공원 푸조나무나 성지곡수원지의 나무와 물을 보고는 기절할 뻔했다. 그곳에 꼭 다시 가보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는 골목과 멋진 풍경 사진들과 곁들인 진솔한 에세이들. 좋은 사진을 어떻게 찍는가 하는 간략한 해설까지 첨부하고 있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05-04-03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무비님!...저를 자꾸 자극하시는군요..ㅡ.ㅡ;;
맨마지막 사진....전 저 사진에 반해버렸어요....ㅠ.ㅠ

로드무비 2005-04-03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장의 사진을 더 올리면 좋았겠지만 책을 사보실
분들을 위하여 자제했답니다.
책읽는 나무님, 저도 저 사진 무지 마음에 들어요.
추천 고맙습니다.^^

하루(春) 2005-04-03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더 캘커타 시장과 범어사 좋군요. 이따 나갈 건데, 구경해야 겠어요.

플레져 2005-04-03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좋은 사진기 만큼 멋진 풍경을 잡아내는 시선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시선이 없다면 그 어떤 카메라라해도 소용없겠지요...

날개 2005-04-03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왠지 첫번째 사진이 맘에 듭니다..^^*

로드무비 2005-04-03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저도 저 사진 좋아요. 함께 실린 짧은 글도...^^
플레져님, 작가가 그 이야길 여러 번 해요 책 속에서...^^
하루님, 범어사...비오는 아침 범어사, 언젠가 참 좋았어요.^^

2005-04-04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ika 2005-04-04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가서 충동적으로 사려고 했는데, 책이 없었어요!
아마 로드무비님께 땡스투해야 하는거여서 그랬나봐요. (근데 너무하지 않나요? 조선희 사진작가의 책도 없더라구요!!)

로드무비 2005-04-05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사진집은 참 좋은데 책값이 비싸서 말이죠.
누가 님께 선물했으면 좋으련만......
(알라딘 서재활동하면서 머리가 점점 벗겨지고 있음^^;)

2005-04-05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5-03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좋아하는 녀석에게.. 선물해주면 좋을까요?? 어떤 책이 좋은지, 이 책은 또 어떤지 전혀 모르겠어요..;;
 

지지난주 주말 부산에 갔던 건 수술 후 퇴원한 여동생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동생은 1989년인가 90년에 결혼하여 중 1, 초등 6학년의 남매를 두고 있다.

수술 후 몸이 많이 쇠약해져 동생은 다니던 학교에 1년 휴직을 신청했다. 내 편한 대로 별일 아닐거야, 라고 생각하며 부산에 가는 걸 계속 미루었는데 사실을 말하면 마음 한구석에 거대한 돌덩이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동생은 다행히 경과가 좋아서 1년 치료 받으며 푹 쉬면 문제가 없단다.

동생 부부와 아이들 해서 여섯 명이 들이닥치니 온 집안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돼지 앞다리를 삶았다나? 이상하게 내 여동생은 요리, 그러니까 본격적인 요리를 잘한다. 오향장육이니 양장피 같은 것. 나는 쪼잔하고 허름한  요리랄 것 없는 음식을 잘하는 편이고. 동생이 직접 삶은 '도ㅐ지고기 요리'는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내가 먹어본 것 중 제일 부드럽고 고소하고 맛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술을 한잔 하다가 제부가 맛있는 동동주집이 있다고 하여 모두 그리로 몰려갔다. 아이들을 재워야 하니 여동생과 우리 올케는 남고. 남아서 여자들끼리 요런조런 얘기라도 나누는 것이 좋았겠으나 난 동동주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남자들 편에 붙었다. 아파트 단지 진입로에 해당하는 오르막길에 '초막'이라는 등을 단 전통주점이 있었다.

운좋게 막 나가는 손님들이 있어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는데 동네 단골들로 복작복작했다. 이상한 건 시금털털한 막걸리 냄새가 조금도 안 나는 것. 전을 부치는 고소한 냄새만 맡아지는 것이 아늑해서 너무 좋았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동동주를 한잔 따르며 나는 제부에게 늦은 인사를 차렸다. 우리 제부, 싱글벙글이다. "저는 고생한 거 하나도 없습니더. 그리고 정말로 100퍼센트 만족합니더."

1년을 휴직하고 앞으로도 신경써서 치료를 받아야 되고 하는 상황을 너무나 고맙게 받아들인다는 우리 제부. (그는 교회에도 절에도 나가지 않는다.  참고로 그는 정신과 의사다.) 수술을 앞두고 병원 계단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제부. 그리고 자신이 기도한 대로의 결과여서 아무런 불만이 없고 행복하다는......

우리는 그집 동동주 단지를 동을 낼 기세로 기분좋게 마셨다. 집에 전화해 봤더니 큰아이들이 안 자고 내가 가지고 간 만화에 푹 빠져 있어서 아이들 좀 보라 하고 동생과 올케보고 나오라고 했다.

'초막'이란 술집에서 나는 오랜만에 행복을 맛보았다. 행복은 별것 아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웃으며 떠들며 맛있는 동동주와 도토리묵을 먹는 순간이 바로 행복인 것이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urblue 2005-03-30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술 경과 좋다니 다행입니다. 곧 일어나시겠지요.

로드무비 2005-03-3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고마워요. 그럴 겁니다.^^

물만두 2005-03-30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쾌차하실 겁니다. 빨리 건강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반딧불,, 2005-03-30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이지요.
그리고 그 돌덩이라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로드무비 2005-03-3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나이가 이 정도 되고보니 인생이 고해라는 말이
왜 이리 와닿는지 모르겠어요.
물만두님, 정말 고마워요.^^

숨은아이 2005-03-30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자리 축하합니다. 얼른 완쾌하시기를...

2005-03-30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3-30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야단맞을까봐 최대한 드라이하게 썼답니다. 아시죠?
전화할게요.ㅎㅎ
숨은아이님, 고맙습니다.^^

울보 2005-03-3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분이 수술도 잘되고 휴식만 취하면 좋아진다니 참 다행입니다,
빨리 나아서 님과 수다를떨고 웃고 이야기 할수 있는 시간이 올겁니다,

마태우스 2005-03-30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년 휴직해야 한다면 좀 큰병인가봐요? 어찌되었건 수술 잘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님 글 읽고나니 동동주가 당겨요....

아영엄마 2005-03-30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술보다 맛있게 요리한 고기가..(요즘 영양부족이라서..^^;;) 동생분의 수술경과가 좋아서 다행이옵고 1년 잘 쉬시고 건강하게 일선에 복귀하실 기원할께요~

로드무비 2005-03-30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삼겹살이라도 좀 구워 드세요.
인사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마태우스님, 다행히 얼굴을 보니 말짱하더라고요.
그집 동동주 진짜 맛있던데...안주도...^^
울보님, 요즘 그러잖아도 전화로 자주 수다떨고 있습니다.
고마워요.^^

starrysky 2005-03-30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동생분께서 수술 받으시던 날 아침에 로드무비님께서 올리셨던 굉장히 짠한 페이퍼가 기억나는데,
수술 후 경과가 좋으시다니 너무 다행입니다. ^^
동생 남편분의 긍정적인 모습도 정말 보기 좋고요..
빨리 쾌차하셔서 예전의 건강하신 모습 되찾으시길 바랍니다. ^^ (동동주에 부침개. 꼴깍..)

로드무비 2005-03-30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정한 스타리스카이님.
그땐 정말 그냥 가벼운 수술로 알았어요.
아무튼 지금은 많이 좋아졌으니 다행이죠.
인사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여동생도 보고 고맙게 생각할 거예요.
(오늘 이 페이퍼 보고 댓글 남겼더군요.^^)

하얀마녀 2005-04-14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편한대로 별 일 아닐거야에서 참 마음이 많이 뜨끔했습니다만 뒤로 갈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맛있는 동동주의 유혹, 그거 뿌리치기 참 어렵죠. 그런데 요리에 대한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
 
왜관 촌년 조선희, 카메라와 질기게 사랑하기 - 조선희사진이야기
조선희 지음 / 민음인 / 2004년 2월
품절


제목 한번 촌스럽게 지었다고 생각한 책이었는데 책을 받아들고 몇 장 휘리릭 열어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사진들도 괜찮고 글도 아주 진솔하고 재미있어서......
사진도 글도 내용이 아주 풍성한 책이다.

'ㅇㅇ상회'라는 가게 이름은 언제나 나로 하여금 셔터를 누르게 한다. (1997 강경)

'강경 간다'라는 제목의 시가 있었는데...장정일 詩였던가?

프라하 구시가 광장(2003 프라하)

난 감히 내가 순수하다고 말하고 싶다.왜냐고? 이 바닥에서 8년을 굴러먹으며 느낀 사실이다. 이 바닥은 사람의 진심을 진심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스부르크의 비내리는 조용한 아침(2003 인스부르크)

난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 그보다 비온 후에 사진찍기를 더 좋아한다.
젖은 바닥의 그 섹시함을 사랑한다.

류승범, 그는 범상치 않은 아이다.
처음부터 그랬고, 그를 알아갈수록 그 생각은 더욱 진해졌다. 어느 날 그는 사적인 자리에 레게머리를 방금 풀어 떡이 된
머리를 하고 노숙자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의 아름다운 피사체'라고 하여 직접 찍어 소개한 조선희의 친구들 이야기도 재밌다.

(......)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울보 2005-03-2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희 이여자의 삶이 더 멋져요,,
전 그렇게 느꼈어요,,대찬 여자라고,,,,,

릴케 현상 2005-03-2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인상이 안 좋았어요... 제 동료여직원이 티뷔에서 보고는 무척 싫어하던데(것도 인상이 안좋아서인가?)

로드무비 2005-03-29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저도 평소 인터뷰하는 모습 보고 겉멋이 좀 심하다고 느꼈는데
이 책에서 만난 조선희는 솔직하고 박진감이 있네요.
아무튼 인상 때문에 무지 손해보고 살았을 것 같죠?
울보님, 맨손으로 저만큼 우뚝 선 여자, 그 사실만으로도
멋지죠, 뭐. 사진들이 생각보다 괜찮네요.^^

하루(春) 2005-03-2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맨 위의 사진 '사과나무'에서 봤죠. 독특한 개성을 가진 여성이에요. 그쵸?

2005-03-29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3-29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저도 사과나무 봤는데...
그때가 결혼하기 직전이었잖아요.
솔직해서 좋아보였어요.^^

낯선바람 2005-03-30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서점에 찜해두고 아주 가끔씩 이 책 봐요. 정말 매력 있단 말야^^

히나 2005-03-30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의 시 제목은 '강정 간다'가 맞는 거 같네요 ^^;

인터라겐 2005-04-01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조선희라는 사진 작가는 선입견때문에 피해보는 인물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 이은주 사진을 보니깐 괜히 짠해집니다

로드무비 2005-04-05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저도 저 사진 보고 짜안했어요.
스노드롭님, '강정 간다' 맞죠?
사수자리니임, 그때 싸게 사버리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