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0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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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하지만 형제들이 찾는 말이 <브루넬로>가 분명하다면 이놈은 내가 방금 말한 곳에 있을 것이오."
"<브루넬로>라고 하셨는데... 말 이름이 <브루넬로>라고 하는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윌리엄 수도사는 명민한 통찰력을 가졌으나 겸손은 약간 부족해 보인다. 덕성을 갖추었으나 자신의 통찰력을 드러내 자랑하고픈 약간의 허영심은 애교로 봐줘야 할까? 천재라고 해서 다 겸손할 필요는 없으니...
윌리엄 수도사와 아르소, 이 두 사람의 조합은 셜록홈즈와 왓슨을 연상 시킨다. 윌리엄 수도사는 이제 막 도착한 수도원에 잊지못할 첫 인상을 남겼다. 이 역시도 셜록 홈즈와 마찬가지로 사소한 것 하나 조차도 놓치지 않는 관찰력 덕분! 그의 이러한 재능이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에 어떻게 빛을 발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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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박노해 사진에세이 2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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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삶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남겨주는 것이다.
삶은, 이야기를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이다.

나만의 이야기. 내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물려줄 나만의 이야기는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어려움 앞에 어떤 힘이 되어줄까? 훗날 내가 세상에 없을때에 그 어떤 값진 유산보다도 아이들이 의지하고 힘이 되어줄 그런 이야기를 남겨주고 싶은데...
영광스럽거나 모두가 우러를 그런 이야기는 없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고 열심히 너희들을 사랑했노라고, 그것만은 자랑스럽게 말해줄 수 있는데.
아이들의 기억속에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언제나 나의 아이들이 목마를때 목을 적실 수 있는 그런 부모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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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은 방 박노해 사진에세이 4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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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원로 어르신이 평상과 의자를 놓아둔 이곳은
카페이자 회관으로 마을의 중심 장소가 되었다.
(중략)
방은 작아도 공용의 터가 있기에 삶은 힘차다.

요즘은 동네 놀이터에 나가봐도 아이들이 없다. 딱히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에도 그랬다.
어린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대다수의 집집마다 놀이터에 있어야 할 미끄럼틀과 그네가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이터가 집으로 들어가자 집은 점점 더 비좁아지고 사람이 주인이어야할 집은 물건들이 주인행세를 한다.
마을의 공용 장소는 허울로만 남았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우리의 요즘, 공용의 장소에서 나눌 정은 어디로 가서 찾아야 할까. 한 집의 아이가 동네 모두의 아이이던 시절, 그때가 가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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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은 방 박노해 사진에세이 4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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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미소는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힘이니
서로에게 다정한 눈빛 한번, 해맑은 미소 한번,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가 눈부시다.

가슴에 잔잔하게 와닿아 깊이 박히는 행복은 일상에서 오는 소소한 행복감인 경우가 많다.
높은 나무만 올려다보느라 이름모를 풀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멀리있는 달빛만을 쫒느라 작은 반딧불이의 빛을 놓치진 않았을까.
오늘은 사랑하는 이에게 한번 더 웃어주고 한번 더 안아주는 그런 하루를 보내봐야겠다. 그리고 내일도 그렇게 하루를 새롭게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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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당신에게 - 내 몫이 아닌 비합리적 죄책감과 이별하기
일자 샌드 지음, 정지현 옮김 / 타인의사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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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당신에게

일자 샌드 (지음) | 정지현 (옮김) | 타인의사유 (펴냄)

불필요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당신에게 필요한 심리학 수업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당신에게> 표지글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도를 넘는 반성이 자기 비하로 이어지는 사람도 있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타인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자해로 이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비난을 겸손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죄책감은 자신이 행했거나 행하지 않은 행동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우리"라는 공동 연대의식의 문화가 깊은 우리에게는 타인의 잘못도 함께 죄책감을 느끼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위로와 응원이면 충분한 문제에도 내 몫이 아닌 죄책감까지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본인의 책임이 분명한데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남탓을 하거나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되려 더 큰소리를 치고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도 있다. 분노라는 감정은 분명히 표출되어야 하는 인간의 정상적인 감정이지만 잘못된 방법과 방향은 분노조절장애와 자기 비판이 되기 쉽다.

생각해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나는 내 잘못이 아니었거나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조차도 내 탓으로 돌려 죄책감과 자기 비난을 해왔다. 그러면서 자존감은 낮아지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벗어나기 힘든 악순환을 해왔던 것 같다. 이런 나의 감정, 죄책감을 이용한 가스라이팅은 기대서는 안될 사람에게 기대고 의지하게 되는 또 하나의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자칫 혼동하기 쉽지만 전혀 다르다. 죄책감은 행동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고 수치심은 부끄럽거나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유대인 학살과 세계대전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사죄하는 독일이 죄책감의 문화라면, 그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을 들키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일본의 문화는 수치심의 문화라 할 수 있다. 죄책감은 잘못이 있는 사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양심이 있는 자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필요이상의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 자신은 책임과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이루어지는 가스라이팅은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을 상대로 하면 생각만해도 끔찍만 뫼비우스의 띠가 되고 만다. 아마도 가장 흔한 케이스가 부모자식간에 이루어지는 가스라이팅이 아닐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해준게 뭐가 있는데..." 은근 슬쩍 피해자, 약자로 자신을 둔갑시키고 상대에게 죄책감을 씌우고 마는.

느껴야할 내 몫의 죄책감마저 내려놓으란 얘기가 아니다. 내 몫이 아닌 죄책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비합리적 죄책감으로 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말이다. 긍정적인 삶의 원칙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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