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섹스사전 - 상식과 편견의 벽을 허물다
강준막 지음 / 북카라반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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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문제, 아니 입으로 말하거나 글로 쓰기에는 조금 쑥스럽기는 하지만 섹스 문제는 사실 나에게 있어 친숙하거나 적극적인 문제가 아니었고 그런 주제를 놓고 속 시원히 대화할 만한 환경도 접해보지 못했기에 이 책을 읽는 것도 조심스러웠다.(적극적이 아니라 해서 내가 이성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책을 읽을 때는 옆에 누가 있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는데 이 책은 혼자서 편히 볼 수 있는 자리가 필요했다. 이런 나의 행동 역시 오래도록 왜곡된 성 문화로 인해 보이지 않게 강요된 학습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서구사회가 성에 대해 더 개방적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성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으로 인해 문제가 빚어져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류사회가 지속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삶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또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하면서 할 건 다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리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취해왔는지, 특히 성 문화와 관련한 우리나라의 모순적인 현실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억압되어온 본능은 오늘날 미디어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엄청난 폭발력을 보이고 있다. 자연스러운 것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려고 했기 때문에 음지에서 파괴적이고 병적인 모습으로 성장해왔던 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이제 더 이상 몸을 숨기지 않고 사람들의 약해진 주체성을 이용해 각종 이상행동과 범죄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나도 거부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찌감치 매춘을 합법화한 국가들의 사례를 보면 비단 성 문제 뿐만이 아닌 우리가 금기시하고 숨겨왔던, 숨기고 싶었던 인간의 이면을 하루라도 빨리 공론화하고 제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게 있어 시공간과 문화를 초월하여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들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가 정상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생활양식이나 가치관들 중에 대부분이 인류의 역사로 보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관념이나 관습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성 문제 역시 이것이 정답이라고 할 만한 법칙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이미 길들여져 있어서 편하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번거로울 뿐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보기 좋은 것들은 드러내고 일차적으로 꺼려지는 것들은 감추기 시작하면 그 문명과 문화는 훗날 큰 재앙의 씨앗을 품고 가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다 열린 마음이 필요함을 느낀다. 


   ‘재미있는 섹스사전’은 역사와 문화, 사회, 경제 등의 다양한 부분을 통해 성에 대한 흥미롭고 의미 있는 사실들을 전하는 꽤 두꺼운 책이긴 하지만 채워져야 할 내용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책에 나와 있지 않은 성과 관련된 무수히 많은 새로운 단어들과 농담들이 넘쳐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대중문화의 코드가 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원치 않아도 섹스와 관련한 보편화된 담론이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성에 대한 탐욕이 너무 지나쳤거나 반대로 인위적으로 억압해왔기 때문에 문제가 커졌다면, 현재는 누구나 성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풍부한(?) 지식이 강요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주관적인 성 가치관을 갖도록 해야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만은 안정된 문화를 이루고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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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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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왕원슈안과 청수성은 교육사업을 통해 미래에 대한 큰 희망을 품고 있었다.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에다가 전쟁의 피바람까지 몰아친 1940년대 중국의 현실 속에서 그들의 꿈은 힘없이 허물어졌고 가장 기본적인 인간다운 생활조차 힘겨울 만큼 피폐한 삶을 살아간다. 낡은 가치관에 얽매인 어머니와 신교육을 받은 여성인 아내와의 고부갈등은 희망이 꺾인 채 몸까지 쇠약해진 왕원슈안을 더욱 괴로운 상태로 몰고 간다. 

   이미 소설을 접해본 독자들이나 앞으로 이 소설을 읽을 분들에게서 가장 많이 나올 탄식은 ‘아, 저 할매가...!’일 것이고 가장 많이 느낄 감정은 답답함일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상황이 아무리 최악의 상태일지라도 가족은 서로를 지키고 힘을 북돋워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삶을 위한 원동력이다. 하지만 끝까지 구시대의 관습과 노인 특유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간 가장 큰 책임은 주인공의 어머니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며느리이자 아내인 청수성은 마지막까지 마음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남편을 생각했고 비록 깊은 애정은 주지 못했을지라도 아들에 대해서도 염려의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힘들더라도 교육의 중요성을 생각해 무리해서라도 학비가 많이 드는 학교로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소설 간간이 시어머니에게 마음을 열기 위해 애쓰는 흔적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시어머니에게서는 전혀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어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이 와중에 마음 약하고 우유뷰단한 모습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만 하는 왕원쉬안의 몸과 마음의 병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결국 아내는 현실의 암담함을 견디지 못하고 마음의 짐을 진 채로 가족을 떠나게 된다. 마침내 전쟁은 일본의 항복으로 일단락되어가는 상황으로 갔으나 피폐하고 궁핍한 현실은 변함이 없다. 아들이 가끔 집으로 돌아와 조금이나마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날을 제외하고는 항상 어머니와 둘이서 황량한 삶을 살아가던 왕원쉬안은 청수성의 아내로서의 결별 편지와 유일한 자기편이라 할 수 있었던 지인의 죽음으로 삶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병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죽음을 맞는다. 

   표면적으로는 고부간의 갈등이나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갈등,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실질적인 힘을 전혀 내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결국 이러한 다양한 인간사의 비극을 이끌어내는 것은 더욱 거대한 어떠한 힘과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전쟁과 같이 민중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상태로 내모는 세상의 법칙 내지는 지도자들의 탐욕이며, 작가는 이를 한 가족의 파국을 통해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 말미에 나오는 길가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 중 “승리는 그들의 승리지, 우리의 승린가.”(p.316)란 말이 이 소설을 가장 잘 압축해주는 표현 같았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희로애락은 어느 시대에나 볼 수 있는 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희로애락이라는 것의 알맹이가, 이 시대에는 겉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더욱 비인간화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갈수록 황량하게 만드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그 누군가가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우주의 법칙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역사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아귀를 가진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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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북투로 가는 길 - 서아프리카 전설 속 황금도시를 찾아가는 1,000킬로미터 여행!
키라 살락 지음, 박종윤 옮김 / 터치아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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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비야 씨를 비롯한 여행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지탐험이나 도보여행에 관한 환상에 충만해 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마음만큼 용기와 실천이 따라주지 않아 실제로 내가 한 여행은 도보여행으로 두 번 정도뿐이다. 한번은 경산 진량이란 곳에서 안동까지 1박 2일로 약 60Km 되는 코스였고 다른 한번은 구미 외곽에서 대구 지하철 2호선의 한쪽 끝인 문양이란 곳까지 역시 1박 2일로 대략 40Km 정도 되는 코스였다. 별것 아닌 흔적이라 하더라도 내게는 꽤 추억이 많았던 여행이었다. 지금도 항상 나 자신과만 동행하는 여행에 대한 열망이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지만 언제 다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지 미지수라 안타깝다. 대신 이런 내 마음을 조금이나 달래주는 게 있다면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모험 관련 다큐멘터리나 지금 이 글에서 소개할 책 ‘팀북투로 가는 길’과 같은 오지여행기일 것이다. 

   서아프리카 말리의 올드 세고우에서 팀북투까지 1,000Km의 여정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우선 내셔널지오그래픽이라는 로고를 표지에 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평범한 부모의 밑에서 성장했지만 본능적으로 틀에 박힌 삶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여행의 영혼을 지녔던, 모험가이자 책의 저자이기도 한 키라 살락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글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작가이다. 자연환경은 물론이고 치안까지 불안한 서아프리카 말리의 여행길은 단순한 여정이 아니라 고무카약을 타고 바다 같은 끝도 없이 이어진 강을 따라 목적지까지 노를 저어 느릿느릿 전진해가는, 그야말로 미치지 않고서는 시도할 수 없는 행위라 할 수 있다. 행복한 순간도 있었고 위기의 순간도 많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팀북투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용두사미’라는 그녀의 표현처럼 사람들의 환상과 기대에 부응하는 아프리카의 엘도라도가 아닌 퇴락한 현실이었다. 진정 소중한 것은 목적지에서 얻게 될 보상이 아니라 그곳에 이르는 여행의 과정을 통해 그녀가 몸과 마음으로 느꼈던 자연과 인간, 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신적인 가이드라 할 수 있는, 18세기 후반 무렵 이미 그곳을 처음으로 여행했던 멍고 파크라는 탐험가의 흔적을 따라 현재도 별반 다르지 않은 비슷한 감상을 느끼면서 여정을 이어가는 저자의 경험과 느낌이 신기했다. 200년의 시차를 두고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그곳은 과연 어떤 곳일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여행 도중에 아프리카의 열악한 정치적, 사회적 환경과 여성문제 등에 대한 저자의 시선도 볼 수 있어 단순한 여행기라 하기 아깝다. 눈으로 보는 다큐멘터리에서는 놓치고 지나칠 수 있는 세밀한 부분까지 직접 느끼듯 읽을 수 있는 ‘팀북투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묘한 매력을 가진 21세기의 탐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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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시간 - 전 세계를 감동시킨 아론 랠스톤의 위대한 생존 실화
아론 랠스톤 지음, 이순영 옮김 / 한언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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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존재 이유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러나 정작 이 ‘왜’에 대한 질문은 세상이 종말에 이를 때까지 결코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일찍 파악한 지혜로운 사람들은 ‘어떻게’라는 측면으로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수없이 많은 불후의 명작과 후대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의 이야기들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죽음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 영웅적인 사례들은 특히 더한 감동을 준다. ‘127시간’이라는 책 역시 그러한 희망의 흔적들 중 하나다. 삶이 보다 즐겁고 행복하기 위하여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아론 랠스톤이 택한 방법은 끊임없이 행동하고 삶 속에서 새로운 모험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라온 그였기에 더욱 그러한 성향이 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날의 풍요로운 경험과 현재의 안정적인 삶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물질적으로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영혼이 자유로운 삶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의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천을 해야 한다’(p.256)는 책에 인용된 괴테의 말처럼 자신이 생각했을 때 가장 자유롭고 행복할 때가 언제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고 그 답을 알고 있었으며 실천의 단계까지 나아간 사람이었다. 이토록 멋진 사람에게 하늘은 이상한 시험을 치르게 하셨다. 모험 도중 협곡에서 떨어진 돌에 오른팔이 끼여 자칫하면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결국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자르고 나올 수밖에 없음을 곧 알게 되지만 그런 결심을 하고 실천을 하기까지 그의 내면의 혼란과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지 감히 상상하기가 힘들다. 마음의 고통은 물론이고 당장 현실적으로 남아 있는 음식과 물은 얼마 남지 않았고 처한 상황 그대로는 며칠 버티지도 못할 최악의 상황이었다. 보통 사람이 만에 하나 그와 비슷한 상황에 빠졌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과 함께 지난 시절의 추억들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진정 그의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또한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했던 가족과 친구들의 소중함을 떠올리면서 용기를 얻어 마침내 자신의 팔을 절단하고 탈출하여 구조되기에 이른다. 자유에 대한 새로운 차원에서의 강렬함을 경험한 그의 이야기는 이후 절망에 빠진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가 이 사건을 아름다운 영적 경험이었다고 표현하면서 그 자신의 삶을 축복으로 여기고, 남은 자신의 삶 앞에 펼쳐진 무수한 기회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함께 희망을 나누는데 쓰기로 한 마음가짐, 그 여유는 무엇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을까?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인 ‘작별을 고하는 일은 용감하고 감동적인 시작이 되기도 한다’(p.370)는 말은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가 과감히 잘라내기로 한 오른팔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분이 아니라 인간을 짓누르는, 굳이 지고 가지 않아도 될 짐을 상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127시간’은 그저 내려놓기만 하면(그것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훨씬 자유로울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삶의 비밀을 아론 랠스톤이라는 사람의 경험을 통해 내게 알려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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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나 데이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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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국민의 DNA 정보를 국가가 관리하면서 범죄가 발생할 경우 즉시 용의자를 색출해 낼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다테시나 소키라는 천재 여성수학자에 의해 개발되었다. 비약적인 검거율의 상승과 함께 새로운 수사 시스템에 대한 거부감도 점점 가라앉으려 할 즈음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관련 시스템을 개발한 다테시나 소키와 그의 오빠가 죽은 채로 발견된 것이다. 이 사건에 앞서 DNA 수사기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살인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이는 과학을 앞세운 최신식 수사시스템에 치명적인 허점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과연 치밀하고 논리적인 과학의 토대 위에서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할 만큼 세련된 수사시스템에 무슨 약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관련 수사시스템의 주요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1+1은 2라는 명쾌함만 가지고도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안정될 수 있다고 믿었던 한 젊은 과학자, 가구라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한편 이 젊은 과학자는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 안에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에 도예가였던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이후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냉정한 태도로 자란 그는 그 사건으로 인해 생긴 또 다른 인격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자기 자신을 상대로 인간 심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모든 인간의 정보를 데이터화하여 빈틈없이 관리한다면 인간사회는 보다 효과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신념으로 살아온 그였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다테시나 남매의 살인 용의자 몽타주에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즉각 그는 자신의 또 다른 인격, 류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음을 직감하고 류와의 대화를 시도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도망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요등장인물인 아사마 형사는 최신의 과학수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로서 새로운 수사 시스템이 보편화되는 상황을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중에 DNA 수사 시스템으로 해결되지 않는 연쇄살인사건과 다테시나 남매 피살 사건이 단순한 시스템의 오류 문제가 아닌 더 큰 무엇인가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플래티나 데이터란 일종의 면죄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누구를 위한 면죄부이고 어떤 이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 소설은 완전한 세상을 위한 인간의 노력이 바로 그 인간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문제가 아니라면 본성이라고 해야 할까)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데 온 인류가 힘을 써야 하는 것 아닐까? 완전함을 추구했던 그 어떤 방법이나 수단도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사회를 무결점의 시스템으로 관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수단을 자신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지키고 강화하는데 이용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이는 결국 전체 집단의 멸망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플래티나 데이터’는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경고, 현대사회에서 다중인격이라는 현상이 가지는 의미, 예술의 진정한 가치, 건강한 인간사회를 위해서 인류가 가져야 할 자세 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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