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지음 / 도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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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에 대해선 말만 많이 들었지 제대로 읽은 책 한 권이 없었다. 근접하기 어려운 분이라 생각하고 지레 겁 먹은 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물론 이 책의 존재도 알고는 있었다. 선입견 앞에서 그저 망설이고 있었다. 다행히 지난번 원주 터득골에서 주인장의 말씀을 듣고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주인장은 직접 이 책을 기획하신 나무선이라는 분이셨다. 전국을 샅샅이 뒤지며 장일순에 대한 일화를 어렵게 수집해서 지은 책이라는 말씀에 이제는 더 이상 회피해서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래, 읽자.

 

일화로 엮은 책이다보니 생각보다 책은 쉽고 재미있다. 장일순이 어떤 분이었는지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중 몇 대목을 옮겨본다. 장일순은 민주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지만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분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합기도 도장을 운영하는 김진홍이 지학순, 장일순과 함께 치악산으로 바람을 쐬러 갔던 어느 날이었다. 가는 길에 상원사란 절이 있어 거기에 들렀는데, 대웅전 안의 불상을 향해 장일순과 지학순이 합장을 하고 공손히 절을 했다! 지학순은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고, 장일순은 평신도다. 김진홍이 이상하게 여기고 물었다.

"천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째서 불상을 보고 절을 해요?"

장일순이 껄껄 웃었다.

"이 사람아, 성인이 저기 앉아 계시는데 어찌 우리 같은 소인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3쪽

 

나는 아직 내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불상은 우상이라고 절대 그 근처에도 가지 않는 사람들을 봐왔을 뿐이다.

 

상을 받고 나서 자신을 찾아온 이형만에게 장일순은 이렇게 말했다.

"상 받았다고 껍죽대지 마. 그러면 죽어."

그 한마디뿐이었다. 다른 말이 일체 없었다.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장일순은 늘 말했다. 기어라. 겸손하라. 엎드려 살아라. 앞에 나서지 마라. 모가지 세우지 마라.     -181쪽

 

가슴이 뜨끔해지는 말씀이지 싶다.

 

그 책(논어)을 채희승은 십 년을 읽었다. 그러나 두 시간 가량에 걸친 장일순의 논어 강의에서 얻는 기쁨이 십 년 공부를 뛰어넘었다. 정말 혼자 듣기 아까운 내용이었다. 그 마음을 채희승은 이렇게 나타냈다.

"선생님, 꼭 책을 쓰십시오. 그렇게 해야 선생님의 훌륭한 말씀을 여러 사람이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장일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말이지. 엄청난 일을 해놓고도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신 분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니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183쪽

 

책을 쓰지 않고도 책으로 남아있는 사람들. 앞 선 사람들이다.

 

이화여대 교수이자 <미래에서 온 편지>의 지은이로도 유명한 정현경이 물었다.

"불교에서는 좌선을 한다거나 하고, 기독교에서는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고 그러는데, 선생님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닦습니까?"

"주로 혼자서 걸어요.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다가 돌아올 때는 대개 강가로 난 방축 길을 걸어서 돌아와요. 방축 길을 걸으며 '오늘 또 내가 허튼소리를 많이 했구나.' 하고 반성도 하고. '이 못난 사람을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 주시는구나.'하고 감사도 하고 그럽니다.

또 길가로 풀이 나서 자라는 걸 보는데, 그 풀들이 절 일깨우지요. 풀은 땅에 뿌리를 박고 밤낮으로 해와 달을 의연히 맞고 있단 말이야. 난 거기에 못 미치지요. 부끄럽지요. 이렇게 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마음을 씻는 거지요."       -226~227쪽

 

풀 한 포기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그걸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 장일순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인용만으로도 배가 부른 리뷰.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장일순은 여자 관계에서 놀랍도록 깨끗했다. 오직 아내만 알았다. 혹시 어디 숨겨진 이야기가 없을까 찾아보았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224쪽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전까지도 말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내노라 하는 남자들은 대개 여자 관계가 있고 그게 흠이 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여자 관계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시절에도 깨어있는 사람은 있었고 그 당연한 몸가짐으로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 오늘 같은 날에 좀 씁쓸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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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 ): 20세기 프랑스 조각가로 주요 작품으로는 <마망>.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태피스트리를 제조하는 부모를 도우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결혼 후 미국에서 초현실주의의 경향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판화를 전시했다. 이후 시험 삼아 시작한 조각으로 추상적인 경향이 좀 더 강하게 나타난 자전적 제품을 만들었다. 라텍스, 대리석, 석고 등 재료를 불문한 조각을 만들었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활력과 창의력을 잃지 않았다. (출처: 다음백과 )

 

 

 

 

 

 

 

 

 

 

 

 

 

 

루이즈 부르주아가 궁금해서 구입한 책. 한 예술가의 생애가 오롯하게 드러나 있는 아름다운 그림책이다. 여기저기 자료를 읽다보면 루이즈 부르주아를 흔히 '고백 예술의 창시자'라고 하는데, 작가나 예술가들은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럼에도 굳이 '고백 예술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건 군더더기 같은 설명같아 보인다. 어쨌든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생애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으니 그렇다고 치자. 다음은 그의 작품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마망>이란 작품이다.

 

 

 

'마망'은 엄마라는 뜻이란다.

 

SHE DREW,

SHE PAINTED,

SHE WOVE.

SHE MISSED HER MOTHER

SO MUCH, SHE SCULPTED

GIANT SPIDERS

MADE OF BRONZE, STEEL, AND MARBLE

SHE NAMED MAMAN.

 

 

옷감을 짜고 옷감의 헤진 부분을 수선하는 일을 했던 어머니를 커다란 거미로 형상화하면서 위로와 위안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왜 거미지?하던 마음이 그런 설명을 읽고니니 조금은 이해갈 듯도 하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작품을 책으로만 접하니 답답한 마음은 여전했다. 그러다가 또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이지유의 과학 에세이. 여행과 과학이 버무려진 책이다.

 

거미는 새끼를 잘 보살피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잘 알려진 것은 늑대거미로, 이들은 알을 거미줄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배에 매달고 다니다가,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오면 등에 태우고 다닌다. 이때 어미 늑대거미를 보면 덩치가 두 배 이상 커 보이고 등에는 반짝이는 보석을 붙인 것처럼 보인다. 등에 타고 있는 새끼들의 눈이 반짝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바로 이 거미에게 꽂혔다. 새끼들이 스스로 먹고살 수 있을 때까지 책임감 있게 돌보는 어미 늑대거미에게서 모성을 읽은 부르주아는, 어머니를 투사해 거대한 거미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우연히도 부르주아의 어머니는 베 짜는 사람으로, 언제나 부르주아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는 어머니에 대한 신뢰와 거미의 생태적인 삶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 <마망>을 제작한 것이다.    -124쪽

 

그래서 이지유 작가님은 전 세계에 있는 '<마망>을 다 보리라 결심하고, 이후 캐나다 오타와, 일본 도쿄, 영국 런던 그리고 서울에 있는 <마망>을 다 보았다'고 한다. 뭔가를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을 누빌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 삶인가.

 

과학 분야는 워낙 문외한이라 이런 책을 읽긴 읽되 머잖아 하얀 백지가 되겠지만 적어도 이것 만은 기억할 것 같다. <마망>의 거미는 늑대거미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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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7-08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즈 브르주아라는 이름은 생소해도 저 거대거미는 어딘가 낯이 익다 했더니 리움미술관에서 보았군요.
이지유님의 저 에세이도 목차를 보니 범상치 않아보이네요. 무슨 얘기를 어떻게 썼을까 궁금해지고요.

nama 2020-07-09 12:56   좋아요 0 | URL
저 에세이는 제게 과학보다는 여행서에 가깝게 느껴져요. 다 읽고나면 기억에 별로 남지 않는데, 아는만큼 보이나봐요.
 
창을 순례하다 - 건축을 넘어 문화와 도시를 잇는 창문 이야기
도쿄공업대 쓰카모토 요시하루 연구실 지음, 이정환 옮김, 이경훈 감수 / 푸른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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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찾아 떠나는 순례 같은 여행. 창문 집중 탐구. 다양한 창을 가진 집에서 살아보거나 머물진 못해도 잠시 기분전환이 될 수 있는 책. 창에 대한 관심과 안목도 키워주리라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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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3 :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 불타는 사막에 피어난 꽃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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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편3을 완독하니 중국편1, 2도 마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3이 나오기 전에 1을 먼저 읽긴했으나 이내 책을 덮고 말았다. 도서관 반납 기간이 다가오도록 책이 눈이 들어오지 않아서였다. 답사기라면 당연 현장감이 우선인데 현장감을 도무지 느낄 수 없었다. 학구적인 건 다른 책으로도 충분하다. 또 하나, 책은 내 돈주고 사봐야 잘 읽힌다는 걸 중국편3으로 확인, 새삼.

 

 

어느 답사나 마찬가지이지만 중국 답사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유적지에 대한 설명보다도 그곳의 역사를 아는 것이다.   -100쪽

 

어쩌면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인데 이렇게 꼭 집어서 말해주는 사람은 고수 중의 고수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중요한 걸 가장 쉽게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가장 필수적인 것'이 '역사를 아는 것'. 2년 전 실크로드 일대를 다녀오고도 전후좌우가 얼키고 설키면서 개념이 잡히지 않았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이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였다는 것을 위의 문장을 접하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교하고성(기원전 2세기 차사국)-고창고성(6세기 고창국)-아스타나 고분(7세기 당나라)-화염산(7세기 현장법사)-베제클리크석굴(9세기 위구르제국)-시내 소공탑(18세기 회교사원)-카레즈 전시관-투르판 박물관       -74쪽

 

위와 같은 순서로 진행했다는 부분을 읽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교하고성과 고창고성을 다녀오고 베제클리크석굴, 소공탑, 화염산, 카레즈 전시관도 봤지만 이 모두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물론 개별적으로 설명은 들었었다. 문제는 한줄기 흐름으로 꿸 수 없다는 것. 역시 유홍준 교수는 답사의 대가는 대가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건 쉽지 않다. 일반 여행사 패키지 상품도 많지 않고 모객이 되기도 쉽지 않다. 2년 전 여름에도 2~3개 여행사에서 10명이 신청해서 겨우 연합상품으로 다녀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중국이니까 소인원으로 여행이 가능했지 유럽같았으면 출발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렵게 갔었지만 실은 이 책에서 언급된 지역의 반이나마 갔을까. 쿠차, 타클라마칸사막, 호탄, 카슈가르는 그저 책으로만 접할 뿐이다. 실크로드 관련 책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곳이지만 내가 발을 딛지 못한 곳은 나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저 아쉽고 감질나고 안타까울 뿐이다. 미련이 남아서 또 꿈을 꾸게 된다.

 

신강성의 성도가 우루무치이지만 위구르인의 마음의 수도는 카슈가르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중국도 민족감정이란 그런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일찍이 신강성을 '위구르자치구'로 지정해 형식으로나마 반(半)독립적 성격을 부여했던 것이다.   -390쪽

 

우루무치만 가보고 카슈가르를 못 가봤으니 위구르인의 마음을 읽기란 더 힘들 터.

 

그러나 막상 카슈가르에서 우리가 답사할 곳은 많지 않다.    -391쪽

 

그래도 한번쯤 가볼만한 곳이 실크로드임에는 틀림없다. 히말라야가 그랬듯 실크로드 역시 여행 전보다 여행 후에 더 빠져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의 일천한 경험상.

 

젊었을 때는 모두 화려하고 발달된 문명을 경험해보고 싶어해 파리, 런던으로 떠나는 배낭여행을 선호한다. 중년으로 접어들면 유명한 박물관과 역사 유적을 찾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를 여행한다. 그러다 중늙은이가 되면 역사고 예술이고 골 아프게 따질 것 없는 중국의 장가계, 계림 등 자연관광과 일본 온천여행을 선호한다. 그러다 노년이 가까워진 인생들은 오히려 티베트, 차마고도 등 인간이 문명과 덜 부닥치며 살아가는 곳을 보고 싶어한다. 인간의 간섭을 적게 받아 자연의 원단이 살아 있는 곳에 대한 그리움이 노년에 들면서 깊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몸이 받쳐주지 못하여 그냥 로망에 머물고 말기 일쑤다. 그러므로 실크로드 답사 중 타클라마칸사막을 경험해본다는 것은 노년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큰 호강이다.    -281~282쪽

 

이 책 내용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웠던 부분. 유쾌하게 웃으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런던이나 뉴욕으로 배낭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리고 티베트, 차마고도는 20년 전에도 가보고 싶어하던 곳이다. 여행에 관한 한 나이는 먹지 않는다. 다만 몸이 받쳐주지 않을까 저어할 뿐.

 

중국어의 외래어 표기, 특히 인명 표기는 정말로 어렵다. 중국인 자신들도 어려운지 아주 유명한 사람은 아예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Shakespeare)는 사사비아(莎士比亞)라고 표기하고 줄여서 사옹(莎翁)이라고 부른다.

 

사사비아라고? 재밌어서 딸에게 퀴즈를 냈더니 단방에 셰익스피어를 맞춘다. 난 아무리 발음해도 이해할 듯 말 듯한데, 중학교에서 중국어를 조금 배운 딸은 중국어에 대한 감이 살아있나보다. 배운 것은 언젠가 드러나는 법일까.

 

 

읽고나니 목마른 책. 코로나19 종식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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