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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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이라니! 앞부분에 실린 소말리아 소녀의 사진에 대한 설명이다. 한 끼를 굶어도 속 쓰림이 못내 괴로워 신경이 날카로워지건만. 소녀의 얼굴과 사진 밑에 있는 작은 글씨를 번갈아 바라본다. 감히 상상할 수도, 공감조차 할 수 없는 먹먹함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날 저녁은 함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생생하게 떠오른 사진 한 장에 밥알이 까슬까슬했다. 넘기다 사례 들러 켁켁 거리기도 했다. ‘먹는 인간을 읽었는데,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차례를 훑어볼 때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한국이라는 소제목만 언뜻 보고 내용을 엉뚱하게 재단해버렸다. 세상의 다양한 음식들을 소개하는 책이구나, 독특한 음식을 소개받으면 혹시 여행갈 일이 있을 때 한 번 먹어보자.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든 책이었는데.

 

표지를 보고 의아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먹는인간에 대한 책인데, 세상에는 화려하고 다양한 먹거리가 넘쳐나는데 왜 잿빛 숟가락 하나만 덩그러니 그렸을까. 더 컬러풀하고 입맛 당기는 먹거리가 떠억 하니 표지에 등장해야 맞지 않나. 책을 다 읽고서야 표지가 의미하는 것이 무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숟가락 하나가 상징하는 것은 수많은 삶 속에서 묵직하게 매달려있었다. 그 무게는 생각보다 징하게 나를 잡아당겼다.

 

언젠가부터 습관적으로 먹어왔고, 곁에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은 주변의 풍경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어떤 얼굴로 먹고 있을까(p21)’잊고 있었다. ‘먹는인간보다 먹지 못하는인간이 더욱 많다는 사실을. 메뉴의 선택지를 고르는 5지선다보다 먹느냐 먹지 못하느냐를 선택 당하는 O, X 문제가 훨씬 많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러시아를 지나 한국에 이르기까지 쭉 펼쳐지던 (食)’의 이야기는 음식이라는 포장지 안에 둘러싸인 삶이었고 사람이었다.

 

먹다 남은 음식을 파는 나라, 사람이 먹는 음식이 짐승이 먹는 먹이와 다를 바 없는 나라, 인육을 먹던 군인, 고양이를 위해 통조림을 만드는 노동자. 방글라데시, 필리핀, 타이, 베트남 등 가난한 아시아의 음식 이야기 앞에서 사람과 동물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콜라를 마시며 해맑게 미소 짓던 북극곰이 다큐멘터리에서 지상 최대의 포식자로 등극하며 반달무늬물범을 잡아 두개골을 이빨로 뽀개는 장면에 전율이 일던 기억이 생생하다. 먹는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므로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는 먹이사슬의 장면이다. 생태계는 냉정하다. 차별의 실마리가 되는 행위(p118),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꾸역꾸역 위장을 채우는 상황. 독일, 폴란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등 갈등하는 유럽의 이야기에서는 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먹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찰한다. 생태계 이상으로 냉정한 인간계에 화가 난다. 인류가 직면한 식량 문제는 먹거리의 총량이 아니라 적절한 분배의 불균형에서 오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데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현실에 속이 상했다.

 

아프리카는 뜨거웠다. ‘먹지 못함이 공기를 호흡하듯 자연스러운 나라, 달리 먹일 게 없어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먹일 수밖에 없는 모유는 에이즈를 수직감염 시키는 원인이다.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우간다의 음식 이야기 앞에서 인류의 기원이 시작되었다는 아프리카를 상상하며 한동안 허탈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박노해, 2007)라는 책의 제목처럼 그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하다. <세계를 보는 새로운 책 W>(MBC W제작팀, 2008)에서 가장 충격적이던 아이티 공화국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먹을 것이 없어 진흙으로 구운 쿠키를 저렴한 가격으로 사먹는 사람들. 땅속에 있던 기생충에 감염된 아이의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꿰매고 있는 사람들, 방사능 수치가 현저하게 높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달리 갈 곳이 없어 다시 돌아와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음식 이야기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생명들을 담고 있다.

 

한국이 등장한 것은 의외였다. 외국인들에게서 흔히 언급되는 불고기나 김치, 비빔밥 이야기가 아니라 청학동, 재일 한국인 3세인 2군 투수, 위안부 할머니들에게서 음식이야기를 끌어낸 저자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한다. 일본인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에 같은 국민으로서 무덤덤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가는 곳마다 먹는 인간이 있고, 지금 그 음식을 먹는 데는 넘치도록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둘러싸고 알려지지 않은 드라마가 펼쳐진다.(p346, 맺음말)’, ‘국가 단위로 사물을 생각하면 안 된다.(p348~349, 문고판 맺음말)’,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아라.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어라.(p352, 문고판 맺음말)’ 감동적인 다큐멘터리의 엔딩 크레디트에서 정점을 찍는 장면처럼, 이 책에 적힌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 저자의 맺음말이 가장 좋았다. ‘마이크로의 슬픔(p353)’을 보는 섬세함과 낮고 어두운 곳을 바라보는 시선에 숙연해졌다.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를 보도한 언론을 향해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기타노 다케시가 했다는 외침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이것은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한 사람이 죽은 2만 개의 사건이다.”(p362)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어죽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8억 가까이 된다는 생명을, 8억 개의 삶들을 상상하는 순간 무심코 흘린 밥풀조차 조심스러웠다.

영화 <굿모닝 베트남>에서 가장 인상 깊던 장면은 ‘What a wonderful world’라는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가 흘러나오던 순간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노랫말은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스러진 수많은 죽음들을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15억 명이 비만인 인간들과 충분한 식량을 얻지 못하는 8억 명의 인간들이 공존하는 세상. 아이러니와 같은 사실을 되뇌며 영화 속 한 장면과 겹쳐지는 기시감을 느꼈다. 한 번뿐인 삶을 간절하게 붙들고 있는 생명들이 존재하는 세상 안에서는 커피 한 잔을 편안히 마시는 시간조차 미안해지는 일이었다.

 

 

*p245 : 혼돈의맛혼돈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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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식당 북멘토 가치동화 23
박현숙 지음, 장서영 그림 / 북멘토(도서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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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 먹고 싶다. 비빔밥에 화룡점정처럼 맨 위에 찍히던 노란 동그라미도 사라지고, 노르스름한 옷을 입은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도 급식 메뉴에서 자취를 감췄다. 나야 반백년 가까이 살았으니 슬금슬금 먹어도 상관없지만, 아이에게 먹이는 것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다보니 덩달아 못 먹게 되었다. 계란찜, 계란프라이, 계란말이, 삶은 계란, 계란 옷 입혀 부치거나 튀기는 무궁무진한 재료들. 몇 안 되는 요리 아이템 중 요직을 차지하던 이 소중한 것들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허탈감이라니!

 

음식을 만드는 이의 양심을 요리사를 꿈꾸는 아이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말하는 동화이다. ‘제대로 된 맛을 찾아라라는 TV프로그램에서 선정한 17호점 식당 금보 일식’. 하지만 이 식당은 유통기한이 지난 밀가루와 간장, 된장, 접촉 불량인 냉장고 안에서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는 고기, MSG가 첨가된 우동 국물 소스를 몰래 쓰고 있다. 친구 아빠가 운영하는 이곳이 비양심적인 비밀을 감춘 채 운영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주인공 여진이는 이를 바로잡기 위한 작전을 세운다.

 

처음으로 접하는 저자의 글이다. 천연재료로 우려낸 따끈따끈한 우동 국물을 마신 것처럼 개운하다.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이 따뜻했다. 이 동화가 지닌 장점은 등장인물 중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성력에 있다. 비양심적으로 음식을 만들었던 식당의 주인조차도 감싸 안는다.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참 좋다.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호기심을 유발하는 전개도 신선하다. 중간 중간 소금처럼 살짝 뿌려지는 약간의 유머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러면서 나타내려고 하는 주제 의식이 분명하다. 공간적 배경이 되는 일식집의 초밥처럼 깔끔한 글이다.

 

어릴 때 가장 맛있게 먹던 음식은 구운 김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반찬 그릇은 분홍색 둥그스름한 김 통이다. 안방에 신문지를 깔고 들기름을 솔로 바른 후 맛소금을 솔솔 뿌리는 것은 우리 형제들의 몫이었다. 우리가 번갈아가며 미션을 수행하면 엄마는 네모난 석쇠를 정성스레 뒤집어가며 연탄불에 김을 구우셨다. 바삭 구워져 살짝 갈색테두리가 생긴 김은 여덟 등분으로 나뉘어 김 통에 담겼다. 아직도 가끔 입맛을 다시면 그 때 먹던 김 맛이 생각난다. 도시락 김이나 8장 들어있는 A4 김이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음식은 어린 내게 그저 허기를 면하는 기능 이외의 의미를 갖지는 못했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절, 습관적으로 하루 세 끼를 먹었다. 엄마가 되어 직접 요리를 하게 된 지금에서야 조금씩 깨닫는다. 내가 먹던 김 맛이 왜 그리 특별했는지를, 나의 세 끼에 들어있던 최고의 재료가 무엇이었는지를. ‘음식의 최고 재료는 정성스러운 마음이래요.(p64)’ 나는 엄마의 정성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왔던 거다.

 

내가 먹는 것이 내 몸을 만든다. 비슷한 내용의 문장은 많은 책에서 언급된다. 음식의 기능은 에너지를 내고 몸을 구성하고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기능을 조절한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등 영양소를 검출하는 내용을 수업에서 가르치면서 습관적으로 말하는 내용이다. 가르칠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말했는데,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보니,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확 와 닿았다. 아이가 먹는 것이 아이의 몸을 만든다고 생각하니, 나는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흡입할지언정 아이에게는 어떤 재료든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실전은 달랐지만 정말 마음은 그랬다는 얘기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참치 캔이나 비엔나소시지, 베이컨, 도시락 김을 상습적으로 들이밀었고, 원 푸드 반찬을 제공한 적도 많았다.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겨준 지가 언제였더라. 둘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저녁까지 학교에서 해결해준다며 좋아라했던 불량 엄마는 최근의 행동을 반성하며 앞으로는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이리라 다짐한다.

 

계란을 사기가 조심스러워지기 몇 달 전, 계란말이를 하다가 처절하게 캬라멜 빛으로 변한 계란을 탄생시켰다. 음식은 할수록 숙련되기 마련이건만 계란말이는 갈수록 실패를 자주 한다. ‘처음 시작할 때 먹은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거라고 했어.(p187)’ 처음으로 계란말이를 해보았을 때가 언제였더라. 그 때는 처음인데 너무 잘했다며 좋아했는데. 뒤집개에 온 에너지를 집중하여 조심스레 말았던 기억이 마음 깊은 곳에 있다. 초심을 잃었던 걸까. 책 속에 나온 문장을 보면서 음식을 향했던 초심을 생각한다.

 

살충제 파동이 일었을 때, 계란에 무슨 벌레가 있길 래 살충제를 뿌릴까 의아했다.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보고서야 이유를 알았다. 자유롭게 몸을 가눌 수 없는 좁아터진 닭장. 그 안에 갇힌 닭들에게 생기는 진드기를 제거하려고 직접 몸에 뿌린다고 했다. 밤에도 알을 낳게 하려고 조명을 계속 켜놓는다고 들었다. 책 속에 등장한 일식집의 비리도, 살충제 계란도 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부른 결과이다. 광우병이 이슈가 되었을 때, 소는 초식 동물인데 왜? 라며 의문을 가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인간의 욕심이 가지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생명을 지닌 존재는 또 다른 생명을 취해 그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먹는 음식이란 한 때 또 다른 생명이었던 존재 아닌가. 어찌할 수 없는 먹이사슬이지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최고의 재료를 담아 처음으로 음식을 만들던 때를 기억하는 마음이라면, 음식과 관련된 사람들도 양심적으로 정직하게 일을 하지 않을까.

나 역시 초심을 잃지 않고 음식마다 최고의 재료를 담아내리라. 이런 마음이라면 다음에는 노르끼리하고 반들반들한, 예술혼이 담긴 계란말이가 나올 것 같은데, 언제쯤이면 편안하게 뒤집개를 휘두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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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뜨거워지는 일인가. 직지. 어학사전에서 의미를 찾아볼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관련 자료를 하나 둘 펼쳐볼수록 다가오는 의미가 이토록 묵직해질 줄은. 감동적인 소설이라도 읽은 양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북극 빙하에서 치즈 스틱 닮은 미생물을 발견하고, 우리 은하 너머에서 지구 닮은 행성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 과학계가 왜 그리 들썩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무심코 흘려듣던 용어였다. 시험 문제의 단골 메뉴였다. 정식 명칭인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직지심체요절은 그리 생소하지 않았다. 국교가 불교였던 고려 시대에 등장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이구나 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지금까지 나는 앞부분이 의미하는 중요한 가치를 놓치고 있었다. 방점은 금속 활자로 간행한에 찍혀 있었다. 금속 활자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을 때라면 금속이든 나무든 무슨 상관이냐 했을 거다. 바다 위로 드러난 빙산의 꼭대기만을 본 듯, 물 밑에 잠긴 방대한 의미를 모르고 지났을 거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소중한 가치 하나를 마음에 한껏 품게 되었으므로.

 

기록에 대한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도달한다. 물론 그 이전에 동굴 벽에 그려진 요상한 그림들도 존재하지만, 읽을 만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파피루스나 페르가몬의 양피지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기록된 지식은 일부 특권층만이 보유할 수 있었다. 손으로 일일이 베끼는 방식과 종이의 기능을 하는 재료들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은 곤충의 탈피처럼 획기적인 도약이었다. 그런데 갈라지고 휘어지는 나무는 보관이 어려울 뿐 아니라 한가지 밖에 인쇄할 수 없다는 난관에 봉착한다. 드디어 등장한 금속활자. 단단한 금속은 오래 보관할 수도 있고 정보의 대량 전달을 가능하게 한다. 더 이상 몇몇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손쉽게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지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금속 활자에는 나눔이라는 소중한 가치가 담겨있다.

 

1455,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금속 활자를 발명했다. 미국의 시사 잡지 라이프1998년에 발표한지난 1,000년 동안 인류 역사를 바꾼 100대 사건1위를 차지한 사건이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 내용을 본 순간, 답답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 200년 이상 앞서 금속 활자에 의한 인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생각나서이다.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증거가 필요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구텐베르크의 그것보다 78년이나 앞선 1377,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되었다는 직지의 존재이다. 활용 면에서는 구텐베르크가 많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되지만, 나는 최초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최초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나는 과학 교사이다. 수업 시간에 과학 관련 시사 뉴스를 소개해주고 학생들의 의견을 발표시킬 때가 있다. 순간적으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학생들이 갑자기 집단으로 겸손해진다. 혹시라도 선생님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 때,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든다. 발표 내용은 특별하지 않지만, 그 후로 발표자의 수가 갑자기 불어난다. 심지어 뒤로 갈수록 발표 내용은 더욱 업그레이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초로 발표한 학생을 주목한다. 최초가 갖는 무게감을 알기 때문이다. 그 무게를 이겨낸 용기는 발표 내용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가열된 물은 100에서 수증기로 변한다. 100는 액체와 기체가 공존하는 온도이다. 지니고 있는 에너지의 양으로 볼 때, 100보다는 200의 물에 더 많은 에너지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100에 큰 의미를 둔다. 자유로운 수증기로 출발하는 최초의 온도이기 때문이다.

 

전자책이 흔한 세상이지만 아직까지 종이로 된 책을 좋아한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새 책이 도착하면 코끝을 바싹 들이대며 킁킁 냄새를 맡을 때가 있다. 종이 이전의 나무를 상상하면 책의 내용을 떠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언제든 어디서든 틈날 때마다 펼쳐서 그 안에 담긴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책은 경이로운 기록물이다.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누는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같은 책을 읽었지만 사람들마다 느낌은 제각기 다르다. 이러한 사실을 느끼는 것은 매우 색다른 경험이다. 독서 모임을 하고 나면 생각의 나이테가 한 줄씩 늘어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 이유를 거슬러 올라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 직지를 만난다.

 

지구 최저 온도인 영하 88가 측정된 남극 대륙의 보스토크 기지’ 4km의 두터운 빙하 아래에 있다는 호수. 빙하의 하부가 지열에 의해 녹아 형성된,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대한 호수라 한다. 이런 곳에 생명체가 존재할까? 과학자들의 관심 대상은 그 생명체가 곰팡이냐 바이러스냐가 아니라 존재 자체이다. 1960년대에 호수의 존재가 확인된 이후, 생명체를 찾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문득 존재만으로 의미를 갖는 직지가 떠오른다.

 

백운화상이 직지를 만든 1372, 그로부터 600년이 흘러 박병선 박사에 의해 파리국립도서관에 있던 직지하권이 세상에 알려진 1972, 발굴조사팀에 의해 직지의 발상지인 청주 흥덕사지가 발견된 1985, 흥덕사지 남쪽에 자리 잡은 청주 고인쇄박물관에서 직지찾기 전담반에 의해 직지상권 찾기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8.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최초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에는 찡함이 있다.

조금 조금씩 직지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모습들을 상상한다. 가슴이 뛴다. 점점 뜨거워진다. 의미 있는 존재를 발견한다는 것은 뭉클한 일이다. 그것이 최초의 무엇이라면 더더욱.

 

 

* 2017. 8. J백일장 공모,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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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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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던 걸까, 무엇을 잃어버렸나를. ‘상실에 관한 7편의 소설을 접하면서 잃어왔던 것들을 생각한다.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던 것처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출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 어찌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된다. 무의식적으로 덮어왔는지도 모른다. 아린 감정이 소설 속 인물을 향한 건지, 이야기가 끄집어낸 기억 속의 나를 향한 건지 모호하다.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면 안경에는 뿌연 김이 서린다.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나는 경계에서도 전선이 형성되면서 비가 내린다. 상실도 마찬가지인걸까. 상실 전의 기억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시간과의 경계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은. 고통은 경계에 서게 된 이들이 통과해야 할 숙명인 것 같기도 하고.

 

마시다 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바라보면 가끔 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그것을 담고 있는 플라스틱 컵 때문이다. 컵은 경계이다. 안에는 차가운 얼음이, 바깥에는 그보다 따뜻한 공기가 있다. 온도차로 인해 컵 표면에는 점점 물방울이 맺히다 시간이 지나면 주르르 흘러내린다. 그 모습이 간혹 컵이 흘리는 눈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물방울이 차가운 얼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따뜻한 공기 안에 있던 수증기라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평범하게 보이는 소설집의 제목 바깥은 여름이라는 한 글자를 주목하는 순간, 의미가 많아진다. 바깥여름이라면, 안과 밖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바깥여름이라 한다면, 시선이 밖으로만 향하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들어가면 시야가 달라진다. 안과 밖을 다 생각하게 된다. 바깥여름이라는 말은 안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스노볼을 보고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p182)’한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p182)’ 그리고 경계에 놓여있는 이들에게 다가올 상실과 뒤따라오는 고통을 묵묵히 그려낸다.

 

가장 무거운 상실감 중 하나는 죽음에서 비롯되는 그것이다. 이 책에 실린 7편의 작품 중 <건너편>을 제외한 6편에서는 죽음이 등장한다. 섣불리 접근해서 풀어나가기 어려운 주제이다. <침묵의 미래>에서는 소수언어박물관에서 마지막 언어를 사용하던 이들의 죽음과 남아있는 이들이 안고 있는 상실이, <풍경의 쓸모>에서는 직장에서 상사와의 관계와 아버지로 인해 느끼게 되는 더블폴트, <입동>에서는 사고로 아이를 잃은 이후 부모가 겪게 되는 고통이,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는 학생을 구하려다 죽은 교사 남편을 생각하는 아내의 아픔이, <건너편>에서는 신뢰와 사랑을 잃어버린 커플의 상실감이, <노찬성과 에반>에서는 반려견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아이의 먹먹함이, <가리는 손>에서는 믿고 있던 아들에게서 낯선 모습을 발견하는 엄마의 철렁함이 담겨있다. 작가가 풀어나가는 죽음 이후의 상실에는 담담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김애란의 글이 지닌 힘일까.

 

종종 그녀의 사유에 감탄한다. ‘해상도 낮은 미소(p151)’라는 문장에서 호흡을 잠시 멈춘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해낼까. 상상하기도 어려운 문장들의 조합이 군데군데 보석처럼 박힌 채 빛난다.

문장은 깔끔하고 담백하며 내용은 해양심층수를 마주한 느낌이다. 묵직하고 진한 슬픔에 번번이 압도당한다. 너무 시려 외면하고 싶은데 눈을 떼기 어렵다.

커다란 서예 붓에 먹물을 묻혀 휘두르다보면 마지막 획의 끄트머리에는 안간힘을 쓰고 지나간 붓의 흔적이 남는다. 붓글씨의 삐침처럼 여운이 많이 묻어나는 소설이다. 그 여운은 마음을 묶어 책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처음에는 등장인물을 바라보았는데 어느 순간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나를 발견한다. 대부분 아린 맛이 있어 눈시울이 뜨겁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이 생각난다.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라는 다섯 가지 감정이 등장한, 당시 보았던 그 어떤 영화보다 받은 감동이 컸던 작품이다. 애니매이션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는 쉽지 않은데 영화 중간에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잊고 있던 동심과 내게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새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진짜 나를 만날 시간이라는 부제답게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다준 영화이다. ‘슬픔이에 관한 내용이 한동안 기억에 남는다. 온전히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밝은 감정뿐 아니라 외면하고 싶은 어두운 감정들도 마주해야함을 깨닫는다.

이 책은 슬픔이를 연상시킨다. 상실에 흠뻑 젖은 모습들을 보며 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지다보니, 내 안의 상실과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슬픔은 충분히 슬퍼한 후에야 극복이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실컷 울고 난 후에 느껴지는 말간 개운감에 속이 후련해진다.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 그런 건 모두 어디로 가나.(p45)’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내게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던 일들을 떠올린다.

어떤 종류의 상실이 나를 아프게 하는가. 대부분 관계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느꼈던 상실감이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한 문장 속에서 답을 찾는다.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p214)’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p259)’ 곱씹을수록 간절한 질문을 조용히 발음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가고 싶은 곳이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시차만큼 뭉클해진다. 집어던진 모자를 다시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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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09-01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공유한다는 게 이런점이 좋은 것 같아요. 인사이드 아웃을 생각지 못했는데 이렇게 읽으니 영화도, 이 소설집도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나비종 2017-09-02 00:24   좋아요 0 | URL
잘 읽으셨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감성의 파장이 비슷한 분을 알게 된 것 같아서요.^^*
 
토끼의 아리아
곽재식 지음 / 아작 / 2017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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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그림에 불과했다. 두 팔, 두 다리 활짝 벌리고 맨몸으로 서있는 남성이라니!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시선은 중심으로 모아졌다. 그런데 가장자리로 눈길이 옮겨지면서 살짝 갸우뚱한다. 원과 정사각형은 왜 그린 걸까.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인체 비례도>를 처음 보던 순간의 기억이다. 책의 뒷부분에는 각종 뼈, 근육, 장기들의 스케치도 있었는데 그것이 매우 정교해서 놀랐다. 메디컬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그림으로 제시되는 것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린 이가 그 유명한 <모나리자>를 그린 화가라는 사실을 알고 또 한 번 놀랐다. 도대체 화가야, 과학자야?

 

SF를 중심으로 글을 써온 작가라는 소개를 읽기는 했지만, 상상과는 너무나 다른 글들이 펼쳐졌다. 무릇 내게 SF라 함은 우주선에서 뿅뿅 광선 줄기차게 나와 주거나, 매우 커다란 괴 생명체가 드럽고 걸쭉한 침 같은 거 질질 흘리면서 인간이건 동물이건 홀딱 먹어버리거나, 미래나 과거로 이리 저리 옮겨 다니거나, 붕대 풀어 질질 끌고 다니며 바닥 청소하는 미라가 등장하거나, 땅 속 깊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건더기 하나 서로 먼저 찾으려고 용을 쓰는 부류 정도였다. 곽재식의 소설은 이러한 고정관점을 단숨에 없애주었다. 생소하고 신선했다. 의식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겉표지 안쪽에 적힌 저자의 소개만으로 그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했다. 도대체 과학자야, 소설가야? 소설 안에 담긴 과학적인 내용들이 심오했기에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인가 궁금했다. 저자에 대하여 조금 더 찾아보고 나서야 그의 소설이 왜 이토록 전문적인지 이해가 되었다. KAIST와 동대학원을 거쳐 현직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과학자였다.

 

2006년에서 2016년까지 썼던 단편들 중 9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토끼의 아리아>,<흡혈귀의 여러 측면>은 대기업의 언론 플레이, 국가 예산을 연구비로 따내기 위한 연구소 설립 관련 비리, 연구원의 연구비 횡령, 언론에 의해 내몰려지는 약자, 군중심리로 무심코 저지르기 쉬운 폭력 등 과학 분야에서의 현실적인 사회 문제를 다룬다. <숲 속의 컴퓨터>,<4차원 얼굴>,<로봇복지법 위반>에서는 인공지능과 로봇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조용하게 퇴장하기>는 지구 멸망을 86년 앞둔 인간들의 심리를 다뤘고, <박승휴 망해라>,<빤히 보이는 생각>은 인간의 뇌와 우주적으로 확장되는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읽은 <박흥보 특급>흥보가SF의 기발한 콜라보이다.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부터였나, 요즘은 소설집을 읽을 때 발표 순서대로 읽는다. 각 단편의 끝부분과 저자의 말에서 소설의 발표 시기가 소개되었기에, 시간의 순서대로 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읽었다. ‘, 이 때부터는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가졌구나.’ 상상하며 읽어가는 묘미가 있었다.

 

작년 11, 요리하는 로봇에 대한 과학 뉴스를 수업 시간에 소개해주었다. 아이들은 동영상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싱크대에 설치된 두 개의 로봇 팔이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끝내는 홍보 영상은 상상과 현실과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 후로 로봇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더니 올해 3월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등장한 로봇 바리스타, 실리콘밸리에 등장한 로봇 피자 체인점, 로봇 바텐더에 대한 기사가 등장했다. 로봇으로 인해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내용과 함께 로봇에게도 사람처럼 세금을 매겨야 한다는 것이 뉴스의 요지였다. ! 굉장하다! 의 차원을 이미 넘어섰다. 애완견 대신 강아지 로봇이 등장하는 세상이다. 로봇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급속도로 넓어질 것이다.

올해 초, 웹 소설의 드넓은 세계를 알게 되었다. 요일별로 매일 1030분에 업로드가 되는데, 이게 은근 순정만화 같기도 하고 재미가 쏠쏠하다.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는 소설은 <모두 너였다>인데 여기에 로봇이 등장한다. 인공지능을 가진 클론과 클론테스터와의 이야기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도무지 다음 편이 상상이 안 되는 작품이다. 곽재식의 소설들이 그랬다. 마지막까지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한 작품을 읽으면 결론이 궁금해서 중간에 호흡을 끊을 수가 없었다.

9편의 작품 중에서는 <로봇복지법 위반>이 가장 인상 깊었고 공감이 갔다. 근래 로봇 관련 과학뉴스를 많이 접하고 그런 내용의 웹 소설에 빠져있기 때문일까.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로봇이 일상화되는 세상, 로봇의 권리, 로봇과 인간과의 관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접점이 존재한다. 인간과 거의 비슷한 로봇, 감정을 공유할 수도 있는 로봇, 그런 로봇들이 폐기되는 과정, 로봇의 할렘 가를 묘사한 부분에서는 마음이 아팠다. 작가가 그린 세상이 전혀 황당무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닐 거다. 이제 로봇은 더 이상 상상 속 대상이 아니므로. SF가 현실화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만일 이 거장이 소설을 썼더라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상상했다. 이토록 과학적이면서 예술적인 인물은 어떤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릴까 궁금했다. 11을 더해서 2 이상의 효과를 내는 경우를 메디치 효과라고 한다. 화가이면서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그림이 과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듯이, 과학자가 쓴 소설은 과학적으로 좀 더 깊이 있고 훨씬 더 넓은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독특한 상상력, 기발한 반전에 유머가 살짝 얹힌 소설. 읽고 상상하고 읽고 상상하다보니 내 상상력도 한결 풍부해진 느낌이다. 상상의 나이테가 넓어졌다. 따뜻해서 세포분열 속도가 빠른 봄과 여름에 나무가 확 자라는 것처럼, 책을 읽으면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p40, 1째줄, 더는 더 철저히 저는 ~

p284, 3번째 단락 5째줄, 어떻게 갖고 어떻게 다를지를 ~ 같고 ~

p328, 밑에서 2째줄, 감각을 방해하기는 일을 ~ 방해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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