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도
윤영수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장바구니담기


누군가의 인간적 미덕을 칭찬하는 말임이 분명한 ‘착함’이 이렇듯 바로 그 인간적 미덕을 조롱하거나 얕잡는 반어적 표현으로 통용되는 현실의 이면에는 기실 우리 사회가 인간의 선의에 대해서 취하는 이중적 태도가 내재해 있다.

-255쪽

이 풍경 속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타인에 대한 선의가 바로 타인에 대한 압력으로 화학작용하는 예의 그 기묘한 현실의 역학관계이다.

-266쪽

타인에게 베푸는 인정과 관용 역시 타인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자기동일화된 지배욕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선행으로 한껏 기분이 좋아진 남편이 내민 만 원짜리로 인해 빚어진 소란은, 선행으로 고양된 도덕적 충족감이 현실적인 이해관계와 만날 때 있을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경우의 수를 매우 실감나게 전해준다.

-26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통증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배짱이 있어도 운이 없으면 안 되는 인생? 강풀은 믿고 싶지만 곽경택에겐 신뢰 부족;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1-08-3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ㅎㅎ
40자평 내용을 아예 통째로 바꿨네요. ㅋㅋ

마노아 2011-08-31 13:03   좋아요 0 | URL
설거지하다가 바꾸기로 결심했어요. 강풀 이름을 넣고 싶어서..ㅎㅎㅎ

순오기 2011-09-0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풀은 믿고 싶지만 곽경택은~~ 공감!ㅋㅋ

마노아 2011-09-01 12:01   좋아요 0 | URL
엔딩의 임재범 노래가 지나치게 좋아요. 영화의 격에 안 맞게 말이지요.^^ㅎㅎㅎ
 

1842년 1차 아편전쟁은 난징조약으로 마무리 되었고, 그 결과 홍콩은 영국에 할양되었다. 8월 29일의 일이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은 강제병합되었다. 역시 8월 29일의 일이었다.  

중국에게도 우리에게도 수치를 안겨주었던 이 날짜는 내게 아빠와 이별한 날로 기억된다.  위암 판정을 받고 9개월 만의 일이었다.  

 

난 아빠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는데 성격이나 체형 등도 아빠와 닮은 듯하다.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뵌 아빠의 친구 분은 나더러 웃는 모습도 닮았다고 하셨다. 그랬을까? 그랬을 것 같다. 아빠 딸이니까.  

연기자들은 갑작스레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되면 어떤 기억을 떠올려서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숙련된 연기자라면 그런 과정 없이도 저절로 눈물이 날 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아빠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벌써 14년이나 지나서 이제는 좀 옅어질 법도 하건만 여전히 아빠에 대한 기억들은 아프기만 하다.  

최근 몇 달 동안 다이어트 하면서 금지식품이 참 많았다. 그 중 하나가 '팥빙수'였는데, 며칠 전에는 올 여름을 팥빙수 한 번도 못 먹고 지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집앞 빵집에 가서 팥빙수를 포장해 왔다. 주문하고 보니 과일빙수의 칼로리가 더 적게 나와서 아뿔싸! 싶었지만 그래도 빙수는 팥빙수지!하며 결국 맛나게 먹었다. 팥을 좋아하는 나는 얼음도 좋아해서 팥빙수를 아주 사랑하지만, 팥빙수를 보면 아빠가 생각나서 마음이 좋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가 6학년 때였는데, 어쩌다가 집근처 제과점에서 팥빙수를 사준다고 아빠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셨다. 따라 들어가면서 나는 조그마하게 물어보았다. 아빠, 돈 있어? 

아빠가 빙수를 두 개 주문하고 마침내 빙수가 나와서 먹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두 번이나 더 물어보았다. 아빠, 돈 있어?? 

어렸던 나는 아빠가 빙수 사줄 돈이 없을까봐 여간 걱정이 된 게 아니었다. 빙수 사줄 돈이 없었으면 들어오지도 않았을 터인데,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하고 나는 아빠 주머니에 돈이 없을까봐, 나중에 빵집 사장님께 망신 당할까봐 맛있는 빙수를 먹으면서도 너무 걱정이 되었다. 아빠는 돈 있다고, 걱정 말고 먹으란 말은 해주지 않았다. 난 만약 아빠가 돈이 없으면 집까지 후다닥 뛰어가서 엄마께 돈을 타와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근데 엄마도 돈이 없으면 어쩌지? 이런 걱정을 했던 것 같다.  

그깟 빙수 하나 먹으면서 아빠 돈 있냐는 소리를 세 번이나 물었는데, 그런 질문을 받은 아빠가 얼마나 아팠을까는 나중에 생각할 수 있었다. 오래오래 생각이 났다. 그게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인데, 팥빙수를 볼 때마다, 먹을 때마다 늘 생각났다. 그때 미안했다고 이제는 말도 할 수 없는데 말이다.  

아빠는 평생 가난하셨다. 하는 일마다 실패했고, 돈 좀 벌어볼까 싶으면 사기를 당했고, 돌아가시기 몇 달 전까지도 공사장에서 일을 하셨다. 평생 밥투정 반찬 투정 하는 법 없으셨고, 너무 과묵하셔서 돌아가실 때도 자식들에게 말씀 한 마디 남기지 않으셨다.(이건 좀 심했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고 물으면 엄마가 물어도 아빠, 아빠가 물어도 아빠!라고 대답하곤 했던 나.
무려 마흔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는데도 극구 존댓말은 쓰지 않아야 더 친근한 거라고 박박 우기던 나.
그리고 무뚝뚝한 아빠에게 말 걸기가 취미였던 막내딸은, 아빠와 함께 할 수 있는 무언가가 공부라고 생각했다. 해답서 보고서 혼자 풀어보아도 될 수학문제도 아빠에게 물어보았고, 아빠는 오래 전에 공부했던 것일 텐데도 고등학교 수학문제도 척척 풀어주셨다. 아빠가 가장 신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한자였다. 한자 시험 보기 전날엔 아빠와 함께 밤을 새며 공부했다. 나 혼자 공부하는 편이 능률면에서, 또 시간 면에서 더 유익했겠지만, 자전찾기보다 아빠에게 물어보는 편이 즐거웠고, 아빠도 기꺼이 내 공부에 동참해 주셨다. 당신께서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에서 아빠도 모처럼 즐겁지 않았을까, 나는 멋대로 짐작했었다.  

그게 지나쳐서 바람직하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 아마도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시점이어서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를 뉴스에서 보았을 것이다. "아빠, 불감증이 뭐야?" 라고 질문을 했더니 아빠가 머뭇머뭇거리면서 당황해 하시더니, 몰라도 된다-하셨다. 궁금해서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아빠의 난처함이 이해되었다. 아빠 쏘리! 

어제 말고 그 전주 나는 가수다에서 인순이는 '아버지'를 불렀다.  

 

 

처음 출연한 가수가 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하고, 그게 또 인순이라면 누구나 1위를 쉽게 점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노래 제목이 '아버지'라니, 당연히 모두의 가슴을 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도 그랬다.  

인순이 "아버지" 

한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래왔는지
눈물이 말해 준다

점점 멀어져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점점 멀어져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제발 내 얘길 들어주세요
시간이 필요해요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두기만 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긴 시간이 지나고 말하지 못했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아빠가 떠나시던 그 날에 나는 학원에서 수업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지망은 떨어졌어도 2지망은 붙었는데, 합격하고도 대학을 가지 못하고 재수를 해야 했던 게 억울하고 분해서 병석에 누운 아빠를 참 미워했던 봄날이 지나고, 그래도 설마 울 아빠가 돌아가시지는 않을 거라고 바보같이 믿고 있던 여름날이었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영어 수학 강의를 들었는데, 수업 시작 직전 삐삐를 통해 82828282문자가 연달아 날아왔다. 덜컹!하고 가슴이 주저앉는다. 집에까지 어떻게 돌아왔나 모르겠다. 하필 그때 우리 집은 산꼭대기 집이었고 숨이 턱에까지 차서 문을 열었을 때 엄마가 아빠에게 외쳤다. 막내 왔어!  

그 한마디에 아빠의 고개가 내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끝이었다.
아빠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간 사람은 나였다.
너무 말라서 눈도 감지 못하고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그 눈에 담고 사연 많던 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 날이 8월 29일이었다.  

하늘나라에서 아빠가 보시기에 답답하지 않게, 안쓰럽지 않게, 애타지 않게 내가 잘 살아야 하는데, 자신있게 내 걱정 말라고 나 끄떡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만큼 잘 살지 못해서 죄송스럽다. 묵묵히 기다리고 지켜봐줄 아빠라는 것을 알기에 안심이지만. 

자전거를 잡은 손을 이미 놓은 아빠지만, 아직도 잡고 있다고 믿으며 페달을 밟는 딸처럼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련다. 내가 씽씽 달릴 때 대견함과 섭섭함을 함께 느낄 아빠를, 그리고 이제는 엄마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8-29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아버님 기일이군요. 추도예배를 드리겠네요~~
8년 전 돌아가신 울 아버지도 보고 싶어요~ ㅠㅠ

마노아 2011-08-30 07:30   좋아요 0 | URL
오전에 추도예배를 드렸는데 큰언니가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어요.
떠나신 분들은 늘 그리움을 남겨버려요..ㅜ.ㅜ

하늘바람 2011-08-30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울었네요
마노아님 토닥토닥 가서 안아드리고 싶어요

마노아 2011-08-30 07:30   좋아요 0 | URL
위로 감사해요, 하늘바람님.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

hnine 2011-08-30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이 세상에선 이미 떠나셨지만 누군가 마음에 품고 있는 한 그 분은 떠나신게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마노아님에게 힘을 주시고, 어려워보일때는 안 보이는 손으로 끌어주고 계시지 않을까요?
마노아님의 밝고 인정많고 배려심 깊은 심성 뒤에 아버지의 든든한 백이 버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울지 말고 웃기. 오늘도 더울 것 같죠?^^

마노아 2011-08-31 07:12   좋아요 0 | URL
hnine님의 얘기를 듣고 나니 보이지 않는 손이 더 선명하게 느껴져요. 고맙습니다.^^
어제는 무척 더웠는데 오늘 새벽 날씨는 어제보다는 조금 나았어요.
아직 여름이 좀 더 버틸 기세인가봐요.^^

oren 2011-08-30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의 글을 읽으니 저도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드네요. 마노아님께서 그렇게 일찍 '아빠'를 훌쩍 떠나 보내신 줄은 까맣게 몰랐는데, 마침 어제가 기일이었군요.

사진으로 뵌 모습이나 마노아님의 글만 읽어 봐도 '아빠'가 어떤 분이셨던지 짐작이 가고, 그런 '아빠'께서 너무나 일찍 마노아님 곁을 떠나가신 것 같아 정말 너무 안타깝네요. 마노아님께서 사랑했던(그리고 평생 사랑하실) '아빠'를 위해서라도 곁에 계신 어머님께 더더욱 잘 해드리시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네요.

저도 며칠 전 옛날 앨범을 뒤적거리다가 올해 봄에 돌아가신 '아버님'의 생전 모습들을 보고 많이 울었답니다. 그리고 마노아님의 글 때문에 제가 쓴 '아버님 영전에 드리는 글'도 한번 더 읽어 보게 되는군요. http://blog.aladin.co.kr/oren/4825810

마노아 2011-08-31 07:26   좋아요 0 | URL
oren님, 이신전심인가봐요. 저도 oren님 쓰신 글을 읽으니 다시 사무치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아빠가 다 못 받으신 효도를 엄마께 다 해야 하는 게 정답같아요. 잊지 않고 늘 새기겠습니다.
5월은 어버이날도 있고 부모님 결혼 기념일도 있고 해서 해마다 더 생각이 나곤 했어요.
oren님은 5월에 아버님을 떠나보내서 그 마음이 또 절절해질 테지요.
떠나신 분에 대한 아픈 기억보다, 좋았던 기억을 더 많이 떠올리며 마음을 달래야겠습니다.
그래야 눈물보다 미소로 추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개인주의 2011-08-30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이 참 많이 닮으셨네요.
마노아님도 두 분을 빼다박으셨고.
어머니의 눈이 마노아님 눈하고 같아요.+_+

마노아 2011-08-31 07:27   좋아요 0 | URL
엄마 아빠 모두 속쌍커풀인데 자녀들은 모두 겉쌍커풀이라는 게 저는 신기했어요.
눈매가 그래서 닮아보이나봐요. 부모님을 닮았다는 건 참 기분 좋은 말이에요.^^

2011-08-30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31 0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1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1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2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2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여기, 철수의 자세한 규격 설명서가 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20대 남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1년째 취업을 못하고 놀고 있는 철수는 점점 하자가 있는 상품으로 분류되어 가고 있다. 주량이 술 한 잔에 불과한 철수, 조금이라도 당황하면 금세 온몸이 붉어지는 철수, 그래서 갖은 오해에 시달리지만 제대로 된 변명 한 번 하지 못하는 우리의 철수, 사는 게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다.  

철수의 부모님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부모님 그 자체였다. 내 아이의 손이 피아노에 재능있어 보인다기에 학원에 들여보내고,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라 잠시 안 하고 있을 뿐이라고 여기고, 취업을 못하는 게 아니라 고르느라 잠시 주춤한 것 뿐이라고 애써 설명하는 그런 부모님들이었다. 서로가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 조합이 그다지 환상적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을까?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하자 피아노 선생님께 손등을 자로 맞았던 때부터, 철수는 당황해 버리면 손등에 오선지가 드러나고 열이 발생한다. 급기가 그 열은 온몸으로 퍼지고, 버스 안에서는 치한으로 몰리기에 충분한 수준으로 돌변한다. 아이가 그렇게 30년 가까이를 살았는데, 부모님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철수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사용설명서를 작성해서 그것을 보여드렸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다. 가족 안에서 철수는 소통하지 못한다.  

연애 전선은 무난했을까? 그럴 리가! 남들보다 꽤 진도가 느렸던 철수는 여자 친구들로부터 원성을 받는 일이 잦았고, 그조차도 결국 제품의 하자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첫 키스에 도달하고, 모텔 방에 입성까지 하고서도 철수의 장벽은 낮아지지 않는다. 몸에 오르는 열이 문제였다. 열을 내리고자 소주를 온 몸에 발랐더니 맨 정신으론 안 될 것 같았니? 소리나 들어야 했고, 해열제를 먹다가 들켰을 때는 더 당황스러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약 먹고도 이 정도 뿐이니?라니...  

이런 사례가 줄줄이 이어진다. 취업 전선에서, 연애 전선에서, 그리고 가족 모드에서... 사촌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온 친척들의 비교의 장에서 최고 하자품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순간, 그저 예의 없는 사촌으로 남을 것을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일이다. '철수'라는 가장 무난한 이름을 지녔지만, 무난하게 사는 일이 어디 쉽단 말인가? 남들만큼 공부해서 대학 가고, 졸업해서 취업하고, 적당한 때에 결혼해서 또 아이 낳아 기르는 그 사이클을 따르는 일, 내가 살아보니 정말 어렵던데, 철수에게 동병상련의 위로의 눈길이라도 보내줘야 하는 건지 한참 헷갈린다.  

'오늘의 작가상'이라는 멋진 상도 받은 작품이건만, 이 작품에 쏟아지는 별점들은 혹독하기 짝이 없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다 알수는 없지만, 일견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읽는 내내 너무 답답했던 것이다. 철수가 가여운 건 사실인데, 대한민국의 현실이 20대에게 포부를 주기보다 좌절부터 안겨주는 일이 많다는 것을, 오죽하면 영혼이라도 팔아서 취직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겠냐며 나 역시 침을 튀기며 철수를 위한 변명을 잔뜩 늘어놓고 싶지만 그게 되지 않는다. 철수, 왜 이렇게 답답하니! 

사람이 위를 바라보며 살기엔 너무 기가 죽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자니 또 의욕이 안 생기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철수의 제품 사용 환경이 남들보다 나쁘지는 않다. 양친 다 살아 계시고, 보아하니 경제적으로도 표나게 부족하지도 않다. 몸에 어디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연애모드 사례를 들여다 보면 그 와중에 연애 경력도 꽤 된다. 정말 치열하게 먹고 사는 일에 목숨 걸어야 하는 20대는 연애도 사치라는 것을 철수가 알고나 있는지... 면접 모드를 들여다 보면 소박한 아르바이트 한 건이라도 해보았는지 의문이다. 최소한의 사회 생활을 해보았더라면, 이 정도록 막막하지는 않을 것 같다.   

철수 스스로도 본인이 오죽 답답하겠는가. 그러니 제품사용설명서를 계속 언급할 것이다. 그런데, 모두들 그렇게 산다. 나는 사실 이래요! 내 진심은 이렇고, 나란 사람의 가치는 보이는 것보다 더 뛰어나요!라고 말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철수의 그 길고도 긴, 온갖 주의사항이 남발되는 제품 사용설명서를 대체 누구라고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147쪽의 질문은 너무 늦게 튀어나왔지만 이제라도 나와서 다행인 의문이었다. 

   
 

 사용 설명서가 완성되어 갈수록 철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읽고서도 엄마와 아버지, 누나가 철수를 선택했을까. 그녀들이나 친구들, 또 면접관들은 어땠을까. 이걸 읽고도 철수를 사용할 생각이 들었을까. 혹시 사용 설명서가 없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철수를 선택하고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철수는, 과연 철수는, 철수를 선택했을까. -147쪽

 
   

스스로에 대해서 자학을 하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서른을 앞두고 있는 나이라면, 시작은 네 잘못이 아니었을지라도 이제는 본인의 책임이 되어버린 것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의 인생, 곧 너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꾸만 열이 오르는 너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그 무수한 여자 친구들, 한 번이라도 잡아 보았던가. 잡고 싶을 만큼, 잡지 않고는 못 버틸 만큼 사랑했던 적은 있던가. 늘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할 것 같아서 적당히 사람을 만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어볼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너와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그녀를 만난 것은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이랄까. 너를 이해해줄, 그리고 너로부터 이해받을 사람의 가졌을 위안이 다행이었다. 그래, 그 속도를 유지하는 거야. 지금까지는 네 속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속도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아차리렴! 

   
  철수는 조금 더 자 두려고 눈을 감다가 문득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결국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221쪽  
   

계속되는 사용설명서 타령에 독자도 지쳐갈 무렵, 다행히도 철수도 깨닫고 만다. 자신이 작성해 온 그 긴 설명서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사람이 본인임을 말이다. 비록 그것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이긴 했지만, 그랬기에 철수의 인생은 좀 더 달라질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철수에게 하고 싶은 당부의 대부분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임도 외면하지 않겠다. 철수를 응원하는 게 곧 나 자신을 응원하는 것임을 나도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오른쪽이 껍데기 표지인데, 벗기면 왼쪽으로 나온다. 얇은 책이어서 굳이 양장본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표지도 안쪽 붉은색이 더 마음에 든다. 소심한 철수와 비교되는 악동의 표정이 혹 철수의 바람일까?  

162쪽에 철수는 하루에 약 2560칼로리 정도를 필요로 한다고 썼는데 '킬로 칼로리'로 고쳐야겠다. 철수 굶어죽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8-29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철수 사용설명서가 이런 내용이었군요. 궁금했는데...
대한민국엔 철수가 넘쳐나고 있다는 걸 우린 모두 알지요.ㅜㅜ

마노아 2011-08-29 21:39   좋아요 0 | URL
제목이 무척 흥미롭지요? 저도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는데 읽으면서 참 마음이 아팠어요..ㅜ.ㅜ

루쉰P 2011-08-29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서재에 들어왔어요. ㅋㅋ 저 책은 저도 샀는데 책을 너무 한꺼번에 지르는 바람에 사놓고 손도 못 대고 있다가 마노아님의 리뷰가 올라와 신나게 구경하고 갑니다.
결론은 어찌보면 뻔하다고 생각하지만 전 이 소설의 새로운 방식과 그리고 뻔하지만 의미 있는 지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눈 앞의 텔레비는 봐도 자신의 속눈썹은 못 보잖아요. 자신에 대한 설명서 같은 분석을 통해 자신을 바꾸어 내기 위해 근거를 잡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을 변혁해 가는 것! 그것이 어찌보면 답답하고 기회를 안 주는 세상에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스킬과 스펙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변혁하면 세상도 사회도 가족도 바꿀 수 있지 않나란 그런 생각을 이 리뷰를 보며 생각해요.
마하트마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이 얘기한 핵심도 자신을 바라 보고 변혁하는 것이니까요. ^^
저도 마치 많이 아는 것처럼 썼찌만 아직 저도 제 사용설명서를 4% 정도 밖에는 쓰지 못한 것 같아요. 흠..마노아님의 리뷰를 읽으니 저도 얼른 읽어야 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근데 대문 사진이 또 바뀌셨어요? 본인 얼굴이신가요. ㅋㅋ 만약 본인 얼굴이시라면 미인이십니다. ^^

마노아 2011-08-30 07:29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루쉰P님.^^ 책장 정리한 지 한 달 정도 지났는데, 옆으로 누운 책 없이 만들었다고 기뻐했건만, 다시 옆으로 누운 책들이 속속 속출하고 있어요. 손도 못댄 채 저를 노려보고 있는 책들 때문에 심히 마음이 찔리고 있답니다.^^
이 책은 어느 정도 결말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어요.
스스로의 사용설명서를 작성하는 일이 변명보다 반성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다짐이 된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줄 거예요. 그런데 저 자신의 사용설명서를 작성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아찔하고 아득하네요.
대문 사진은 제 사진 맞습니다. 자주자주 바꾸는 편인데, 잘 나온 사진 생기면 또 바꿀 거예요. 칭찬 고맙습니다.^^

꿈꾸는섬 2011-08-2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정말 기발한 책이죠.

마노아 2011-08-30 07:29   좋아요 0 | URL
기발하고 기가 찬 책이었어요.^^
 
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품절


급기야 엄마도 깨달았다. 냉장고를 다리미로 부른다고 냉장고가 옷을 다릴 수 없는 것처럼 철수를 피아니스트로 부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냉장고에서 열 조금 난 걸 가지고 다리미라고 착각한 것인지도 몰랐다.-44쪽

어쩌면 뉴스의 가장 큰 기능은 위로가 아닐까. 몇 가지 소식만 들어도 "내가 아니라 참 다행이야." 또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행이야." 하는 식의 위로가 가슴깊은 곳에서 진하게 우러나오곤 했다. 인생이 우울하고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뉴스를 보세요! 아마도 모든 사용 설명서의 공통 사항이 아닐까. 아버지가 계속 뉴스를 본다면 철수가 위험한 제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내 자식만 저런 건 아니구나 정도는 될 것 같았다.-114쪽

졸업하고 뭐 하느냐는 말에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하면 누구도 더는 묻지 않았다. 이미 훌륭한 완제품으로 분류된 이상, 테스트를 계속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회사 다녀요."라고만 대답하면 어떤 회사인지, 연봉은 얼마인지 질문 공세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앞으로 다 잘 될 거라는 따뜻한 덕담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건 그 제품을 위한 게 아니라 소비자의 인품을 위한 것이었다. 제대로 되지 않은 제품 앞에서는 인품을 드러내기가 더 쉬운 법이다. -119쪽

-어젯밤 지켜 줘서 고마워.
오류가 아니라 기능을 만들어 준 건가. 철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그녀의 문자를 보며 의미를 곱씹고 있는데, 그새 문자 한 통이 또 들어왔다.
-나 말고 평생 지켜 줄 수 있는 여자를 만나.
별점은 계속 깎여 나가고 있었다.-122쪽

결혼식에 다녀온 아버지와 엄마는 철수와 누나를 볼 때마다, 봄은 왔는데 벗지 못하는 겨울 코트처럼 답답하고 불편해했다. 너무 일찍 벗어 버리면 춥고 쓸쓸했고, 너무 늦게 벗어 버리면 덥고 짜증 났다. 만약 여름이 될 때까지도 벗지 못한다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128쪽

그래도 철수는 설마 사은품은 아니겠지 싶었다. 적어도 원 플러스 원 행사처럼 동등한 제품 정도는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나중에는 점점 사은품이 되어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별점조차 매기지 않는 비매품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끼워 준다 해도 선뜻 내키지 않는 제품이 될 수도 있다. 그쯤 되면 소비자도 못 쓰는 물건을 재고 처리하는 게 아닌지 하는 의심 어린 시선으로 철수를 바라볼 것이다.-136쪽

사용 설명서가 완성되어 갈수록 철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읽고서도 엄마와 아버지, 누나가 철수를 선택했을까. 그녀들이나 친구들, 또 면접관들은 어땠을까. 이걸 읽고도 철수를 사용할 생각이 들었을까. 혹시 사용 설명서가 없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철수를 선택하고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철수는, 과연 철수는, 철수를 선택했을까.-147쪽

철수는 조금 더 자 두려고 눈을 감다가 문득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결국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22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