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주에 수영을 할 때였다. 배영을 하다가 벽에 머리를 쾅 부딪혔다. 너무 아파서 잠시 주행을 멈추고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쌤이 오시더니 부딪쳤냐고 해서, 너무 열심히 한 까닭이라고 말했더니, 근데 왜 배영을 하는데 팔이 먼저 안 닿고 머리가 닿았냐고 하신다. 듣고 보니 그러네... 왜 그랬을까? 민망해서 언능 출발했다...;;;;; 

2. 또 지난 주였는데 잠영의 비법을 알려주셨다. 일단 깊이 들어가서 최대한 바닥에 붙어서 진행하고, 숨을 내뱉지 말고 멈춘 재로 진행하다가 끄트머리에 가서야 뱉어내라고 했다. 오리발을 낀 날이었는데, 얘기해주신대로 했더니 처음으로 25미터를 중간에서 일어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었다. 아, 나 아무래도 수영에 소질이 있나봐! 자화자찬하며 자축 세리머니! 그리고 이틀 뒤 오리발 없이 잠영을 시도해보다가  숨이 막혀 꼬르륵 거리며 위로 올라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절반도 가지 못했다. 오리발 덕분이었구나...;;;; 

3. 그리고 오늘, 오리발 끼는 날이었는데 집에 두고 갔다는 사실을 버스 안에서 깨달았다. 지난 주에는 오리발만 들고 가고 수영가방을 안 가져갔지만, 버스 타기 직전에 알아서 집에 되돌아가 가방을 챙길 수 있었지만 오늘은 이미 탑승하고 나서야 안 일. 선생님께 남는 것 있냐고 물으니 남자 사이즈로 하나 있다고 한다. 받아보니 41-42사이즈다. 이게 대체 우리 사이즈로 얼마라는겨? 암튼 엄청 컸다. 벗겨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게 수영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그래도 끝까지 안 벗겨지고 버텼다. 다행히 오늘은 오리발을 좀 일찍 끝내줬다. 휴우... 

4. 요새 옷 쇼핑을 많이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0kg이상을 감량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옷들이 맞지 않는다. 예전에 작았던 옷들이라면 지금 잘 맞지만, 예전에 잘 맞았던 옷들은 거의 안 맞는다.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그래도 살 쪄서 재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살 빠져서 쇼핑하는 거니까 돈 써도 좀 행복했달까. 아무튼 차마 비싼 것들은 못 사고 저렴한 것들을 주로 구매했는데 싼 게 비지떡인 사례까 속출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청바지를 하나 구입했다. 생각해보니 살면서 내가 청바지를 산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언젠가 얘기했지만, 여름 청바지만 60벌 갖고 있는 언니랑 거의 평생을 살았던 나니, 내가 청바지 구입할 일이 뭐 있었겠는가. 내가 사고 싶었던 것은 스키니진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좁은 폭의 청바지였다. 모델착용컷이 예뻐서 샀는데, 받고 보니 기장이 너무 길어서 남자 옷이 잘못 배달된 줄 알았다. 쇼핑몰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니 원래 기장이 104cm. 허거걱, 너무 길다. 바지통도 넓고, 허리만 맞는다. 게다가 색도 촌스럽다. 모니터로 확인되던 그 색상이 아니다. 완전 속았다는 기분! 하지만 9800원 주고 산 청바지를 반품하는 것도 거시기해서 그냥 기장을 줄여 입기로 했다. 그 가격이 그 가격이다...;;; 최근에 둘째 언니가 미싱을 샀으니, 밑단 박는 것 한 번 부탁해 보련다. 한 달 더 되었으니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안 해봐서 얼마나 어려운 건지, 쉬운 건지 전혀 모름..;;;) 

5. 얼마 전에 샀던 양말이 새 건데 구멍이 세 개나 뚫려 있었더라는 버럭스런 얘기를 내가 했던가?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암튼, 그때 같이 샀던 레깅스를 날씨 추워져서 입어보려고 신어봤더니 너무 짧아서 무릎 바로 위까지밖에 오질 않았다. 구멍난 양말까진 참으려고 했는데 올라가지 않는 레깅스를 보니 분노 폭발! 결국 불량제품 환불을 요구했는데 구매한지 시간이 좀 지나서 잘 처리될 지 모르겠다. 일단 내일 업체가 회수해 가기로 했다. 며칠 뒤 알라딘에서 진행하는 특가 레깅스를 기다리고 있다. -_-;;;; 

 

6. 토요일에 친구가 삼총사 티켓이 있다고 했는데 이미 본 거라서 리얼스틸을 함께 보았다. SF를 안 좋아하는 친구인지라 걱정했는데, 가족영화에 더 맞는 영화였다. 기대보다 재밌었고 더 따뜻한 영화였다. 미래 사회를 표방하지만 훨씬 아날로그적인 느낌이었다. 리뷰 쓸 짬이 생기려나? 안 생기면 40자 평으로.... 가만.... 그렇게 넘어간 영화가 하나 더 있다. 언피니시드.... 어쩜 좋아....;;;;  

 

7. 어제는 문학동네에서 주관한 고궁답사를 다녀왔다. 정확히는 '한중록의 공간을 거닐다'가 맞는 표현이겠다. 현재 문동 카페에 연재중이신 정병설 교수님과 함께 창경궁과 창덕궁을 돌아보는 게 이번 행사였는데, 같은 공간에 연재 중이신 정민 교수님과 안대회 교수님도 동참하셨다. 모두 한학과 역사에 조예가 깊으신 분들이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많은 얘기들을 들려주셨다. 행운 중의 행운이다.    



 

 

 

차분하게 후기를 작성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서 짬이 안 나고 있다. 일단 검박한 사진 한 장만 올려본다.^^ 

 

 

 

 

8.어제의 날씨란 정말 겁나 추운 것이어서, 해가 지자마자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손도 막 곱아서 행사 끝나고 먹기로 되어 있는 칼국수 생각이 간절했지만, 난 저녁에 뮤지컬을 예매해둔 게 있었다. 사실 행사 당첨될 줄 알았더라면 뮤지컬 날짜를 바꿨을 텐데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행사도 경쟁률이 셌는데 한중록 모니터링 했던 인연을 콕! 찝어 쓴 터라 뽑아준 것 같다. ㅎㅎㅎ 

암튼, 뮤지컬을 보러 충무아트홀로 고고씽.  

  

뮤지컬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추가해야겠다. 워낙 애정하는 작품이니까 패스할 수 없지. 사진은 사인회 하기 직전의 포토존인데, 저것만 찍고서 나와버렸다. 애정하는 배우가 출연한 게 아니므로 사인은 패쓰. 프로그램은 샀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9. 모레는 학부모 공개수업이 있는 날이어서 사실 마음이 좀 급했는데 바쁘냐는 친구의 문자에 좌르륵 소식을 전하고 사라지련다.  

10. 삽질이 적어서 혹시 서운하려나? 창덕궁 거닐다가 카메라를 떨어뜨렸다. ;;; 어제는 인식이 됐는데 오늘은 컴퓨터 연결했을 때 인식을 못하고 있다. 11만원에 사서 이집트 갔다가 사막에서 모래 들어가 6만원 주고 고쳤던 똑딱이 디카. 이번에도 고장이라면, 나는 너를 과감히 포기하리...ㅜ.ㅜ 일단 직장에서 다시 한 번 확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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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10-18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삽질이 적어도 즐거웠어요~~ ^^
창경궁과 창덕궁을 못 가봐서 후기를 기다릴게요~~~~~

마노아 2011-10-18 21:33   좋아요 0 | URL
으헤헷, 아주 가끔은 삽질을 패스하기도 해야 해요. 그치만 사실 오늘 삽질 많이 했다능...ㅜ.ㅜ
창경궁과 창덕궁 후기는 늦더라도 꼭 쓸게요.^^

전호인 2011-10-18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영ㅋㅋ
저도 수영꽤나 합니다. 전코스를 다 마스터했기 때문에 주로 자유수영을 하지요.
올림픽수영장이 저의 활동무대죠.
일주일에 2~3번은 하려고 하는 데 술약속 등이 있으면 그것도 쉽질 않네요.
과거 코치가 돌릴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자유수영시엔 오리발은 가능하면 착용하지 않습니다.
착용전후의 느낌이 너무 확연해서요.ㅋㅋ
10킬로나 감량을 하셨다니 이젠 마노아님의 정체를 확인하기 쉽지 않겠는걸요.ㅋㅋ

마노아 2011-10-18 21:34   좋아요 0 | URL
자전거도 타시고, 운동 마니아 전호인님! 아주 딴딴하다니까요.^^
오, 10kg으로 정체 확인이 불분명해지다니, 제가 짐승에서 인간이 되었나요.ㅎㅎㅎ

카스피 2011-10-18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10킬로 감량하셨다니 넘 부럽습니당^^

마노아 2011-10-18 21:34   좋아요 0 | URL
돈을 쓰면 누구나 가능하답니다. 쿨럭...;;;;;;

pjy 2011-10-18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살빼서 새옷사는거 완전 부러워요!!! 진짜 좋으시겠다*^^*
찰칵느린 삼성꺼땜에 빈정상한지 오래되서요, 전 이제는 디카에 대한 미련을 버렸어요~ 요즘 쓰는건 비교우위잡티전문 올림푸스 삼백이ㅋㅋㅋ 잘찍힙니다~

마노아 2011-10-18 21:35   좋아요 0 | URL
제가 바로 그 느린 삼성 디카 쓰는 유저랍니다. 아, 찰칵 하고 기다리는 일이 참으로 민망하다니까요.
올림푸스는 가격이 어떤가 검색해봐야겠습니다.
코닥 디카 오늘까지 세일한다고 여겼는데 아닌가봐요. 티몬이었던 것 같은데 어제 끝났나? ㅡ.ㅜ

blanca 2011-10-18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십킬로요?! 우아, 수영이 정말 좋은 운동이군요. 고궁답사, 저런 좋은 행사가 있었다니, 아쉽네요. 청바지는 꼭 입어보고 사야 하는 것 같아요. 심지어 입어보고 사도 집에서 다시 입어보면 후회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바람의 나라, 뮤지컬도 넘 근사할 것 같아요. 여기 음악감독이 하얀거탑 음악했다는 얘기 들은 것도 같은데....

마노아 2011-10-18 21:36   좋아요 0 | URL
아아, 아닙니다. 수영으로는 단 1kg도 빠지지 않았어요. 저 한약 먹었다고 몇 번 얘기했는데 다들 글을 드문드문 읽으셨다능..ㅎㅎㅎ
바람의 나라랑 하얀거탑 음악감독은 이름이 이시우였던가... 2006년, 2007, 2009년 버전이고요. 이번엔 버전이 또 바뀌었어요. 바람의 나라는 총 세차례 뮤지컬로 올려졌는데, 사실 노래는 이번이 가장 약했답니다.^^;;;;

책가방 2011-10-1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어떻게하면 10kg을 뺄 수가 있어요??????
하긴 부지런히 사시는 거 보면 저절로 빠질 것 같기도 하공... 부러버용~~

제 디카도 왔다갔다 합니다.
둘째아이가 한효주 디카에 빠져서리 그거 사자고 조르고 있답니다.
전교등수 50등 안에 들면 사준다고 했는뎅..ㅋ

마노아 2011-10-18 21:37   좋아요 0 | URL
일단 살을 빼려면 좀 적게 먹어야 합니다. 이게 맨정신으로 안 되기 때문에 저는 한약을 먹었어요.
적게 먹어서 위를 좀 줄여서 그 상태를 유지하는 원리인데, 다이어트 끝내고 방심 풀리면 금세 1kg정도는 찌고 또 그런답니다.
한효주 디카! 아, 저도 사고 싶어요.ㅋㅋㅋ

BRINY 2011-10-18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킬로 감량이라니, 눈이 번쩍! 저는 2킬로 감량도 힘들어요 흑흑.

마노아 2011-10-18 21:38   좋아요 0 | URL
저도 약 안 먹었음 택도 없어요. 그 옛날 허벌라이프 한 달 먹고도 단 1kg도 빼지 못했던 1인이랍니다..ㅜ.ㅜ

이매지 2011-10-1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저도 모르게 살 어떻게 빼셨냐는 질문이 튀어나왔던!
오랜만에 뵈어서 더 반가웠던 마노아님 추우신데 고생 많으셨어요 ㅠㅠㅠㅠ

마노아 2011-10-18 21:38   좋아요 0 | URL
저 요새 한의원 소개해주느라 바쁘답니다.ㅎㅎㅎ
이매지님이야말로 휴일에 고생이 많았어요. 매지님 계셔서 제가 외롭지 않았습니다. 고마워요.^^

비로그인 2011-10-1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알찬 일주일을 보내셨네요. 지난 일주일을 떠올려보면 아무 생각 안 나고 그저 피곤했다, 요 단어만 떠오르는데 말이에요. 수영도 하시고 고궁도 다녀오시고... 그래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삽질이군요! 오늘은 다소 평타지만 ^^ㅋ

마노아 2011-10-18 21:40   좋아요 0 | URL
삽질은 오늘 더 많이 했지만, 길 못 찾은 삽질은 너무 많이 얘기했으니 패쓰하겠습니다.^^;;;
요새 버스나 지하철에서 고개 떨어뜨리며 조는 게 일이 되어버렸어요. 아, 너무 졸려요..ㅜ.ㅜ

진주 2011-10-18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영하다가 팔보다 머리가 먼저 벽에 부딪힌 이유는 마노아님 속도가 엄청 빨랐다는 증거예요 ㅎㅎ 오리발 신고 배영하다보면 흔히 있는 일인데.... 그리고..잠영 오리발 없이도 끝까지 가려면 숨을 참았다가 막판에 다 내쉬면 안 돼요.그렇게 한꺼번에 다 내쉬면 몸이 붕 떠올라요~ 숨을 절반까지는 참다가 절반 이후부터는 야금야금 아주 조금씩 아끼면서 내뿜어야 하구염,,,근데 잠영25m는 호흡 조절만으론 힘들긴 해요. 그야말로 잠영-영법으로 물 속에서 팔과 다리 동작을 해야 되지요. 대개 평형을 하는데 저는 팔만 평형 영법으로 젓고요 다리는 접영 발차기를 해요. 아..그리고, 배우셨겠지만 물 속에선 머리가 방향키랍니다. 턱을 당기면 몸이 밑으로 내려가지요. 머리로는 물에 떠오르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야 하고, 팔 다리도 물 속에서 개구리처럼 물을 당기며 헤엄쳐 나가야 하고 호흡은...죽기 직전까지 참는거지요 ㅎㅎㅎ가오리처럼 바닥에 딱 붙어서 위에서 텀벙텀벙 가는 사람들 추월해 나가는 것도 재밌....ㅋ

마노아 2011-10-18 21:42   좋아요 0 | URL
오오오, 빨라서 그랬던 겁니까? 그러고 보니 그날 오리발 신은 날이었네요. 사실, 선생님 보느라 고개 좀 들었다다 쾅! 박았던 것 같아요.6^ㅎㅎㅎ
오리발 없이 잠영했을 때도 나름 멀리 간 다음에 숨을 뱉었다고 여겼는데 그래도 반밖에 못 갔어요..;;;;
참, 저 오리발 끼고 잠영했던날, 너무 바닥으로 붙어서 무릎 부딪혔답니다...;;;;
접영 발차기에 평영 손동작을 다음에 시도해보겠어요.(>_<)
오, 턱을 당기면 몸이 내려가나요? 처음 알았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hnine 2011-10-1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 레깅스 상품 사진인가요? 내용 읽기 전에 저 사진 보고 이건 누구의 무슨 추상 작품인가 한참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ㅋㅋ

마노아 2011-10-18 21:42   좋아요 0 | URL
아하하핫, 말씀 듣고 보니 정말 무슨 작품 같아요. ㅋㅋㅋ
 

제 1457 호/2011-10-17
 

윌리엄은 숨을 들이켰다. 저 앞에 선 소년이 똑같은 동작을 취하는 것이 보였다.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으리라.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 앞에서 느긋하게 귀나 후비고 있을 인간은 없다. 목숨을 위협하는 상대가 설령 혈육이라 할지라도.

“왜 활을 들지도 않는 거지? 너무 겁먹어서 다리가 풀린 거 아냐?”

낄낄대며 말을 거는 관리 놈의 더운 입김이 몹시 거슬렸다. 내기고 뭐고, 저 놈의 심장부터 꿰뚫어 버리고 싶다.

“네놈이 지껄여대는 바람에 마음의 평정이 풀린 것뿐이다. 입 닥치고 기다리시지.”
“거 참, 말 험하게 하는군. 내 말 한마디면 네놈의 그 잘난 가족도, 마을도 모두 박살나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좀 더 공손하게 구는 게 어때?”

윌리엄은 한 번 더 숨을 들이켰다. 활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말마따나 마을의 존망이 자신에게 걸려 있었다. 세금으로 마을을 괴롭힌 건 관리지만, 홧김에 활쏘기 내기를 걸어 관리의 성질을 돋운 건 자신이다. 성격대로 굴다가는 가족 뿐 아니라 모두의 목숨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옆에 있는 건 관리고 뭐고 그냥 소음 덩어리다. 신경을 끄자. 자신에게 한 번 더 주입시킨 윌리엄은 온 몸의 감각을 활을 잡은 손끝으로 모았다. 과녁은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과 한 알. 그리고 과녁이 올라가 있는 곳은 사랑해 마지않는 외아들의 머리 위. 수 밀리미터의 어긋남 만으로도 아들의 이마를 꿰뚫을지 모른다. 침착해. 자신을 믿고 쏘는 거다. 우린, 괜찮아.

“쏘겠습니다.”

거울처럼 잔잔해진 마음이 활로 향했다. 길게 당긴 활시위가 팽팽한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가늘게 떨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화살은 곧게 날아가 바닥으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중앙이 멋지게 꿰뚫린 사과와 함께.

“오오!”
“역시 윌리엄이 해냈어!!”
“우리의 승리야! 잘했네, 윌리엄!”

뒤에서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의 환호가 울렸다. 굳었던 어깨가, 그리고 심장이 조용히 풀려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윌리엄은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은 채 조용히 활을 내려놓았다. 아직도 활시위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이유는 멋대로 떨리기 시작한 그의 손 근육 때문이리라.

“자, 제 차례는 끝났습니다. 이제 관리님 측 분께서 쏘실 차례입니다만.”
“아, 알고 있어! 재촉 안 해도 알아서 해!”

입만 딱 벌린 채 - 설마 그 거리에서 명중시킬 줄은 몰랐던 게지 - 멍하니 서 있던 관리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 와중에도 성질 다 드러내며 큰 소리만 치는 건 천성이 그런 건지, 자리가 그렇게 만든 건지. 겨우 돌아온 여유가 불러온 헛생각을 휘휘 날리며 윌리엄은 다시 소년 쪽을 바라봤다. 역시 여유가 생긴 건지 희미하게 웃고 있던 소년의 입꼬리가, 그러나 차츰 굳어져 갔다. 그의 머리 위에 사과 하나를 더 올리는 손길 때문이다. 오자마자 급히 떠나는 여유의 날갯짓 소리, 풀리자마자 다시 굳어가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아프게 때렸다.

“어쩌겠느냐. 겁 없이 내기를 건 내 업보인 것을….”
“뭘 그렇게 구시렁대고 있는 게냐, 시간이 없으니 빨리 진행하자고! 우리 쪽 명사수 대령이시다~.”

어느새 자신만만한 본모습을 찾은 관리의 음성과는 걸맞지 않은 중늙은이 하나가 등장했다. 느릿하게 발을 끄는 폼이 아무리 봐도 ‘명사수’로는 보이지 않는다. 윌리엄은 다시 돌아오려는 여유를 애써 밀어냈다.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활을 가르친 스승도 남 보기에는 그저 그런 노인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명사수’의 어깨에 당연히 걸쳐져 있어야 할 물건이 없는 것이다. 활과 화살 말이다.

“활…은?”
“나는 활을 쏘는 사람이 아니오.”

대신 이걸 쓸 거요. 사수가 주머니를 뒤져 꺼낸 물건은 손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시커먼 덩어리였다. 눈이 동그래진 윌리엄의 마음을 읽은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 그는 손바닥을 넓게 펼쳐 물건의 전체 형상을 드러냈다. 언뜻 보기엔 작은 통 두 개를 붙인 형태다. 앞에는 스위치? 옆에서 고개를 길게 빼고 들여다보던 관리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 이상한 물건은 뭐지?”
“내게 활이 없으니 쏠 물건이 필요하지 않겠소?”
“아니, 그건 아는데…. 그 허접한 물건을 갖고 무얼 하려는 겐가?”
“보면 아오.”

다른 쪽 주머니를 뒤적이던 사수는 투명한 액체가 든 작은 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강하게 올라오는 냄새에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관리도 마찬가지였다.

“으, 술 냄새. 네 놈, 이 신성한 자리에 술을 마시고 오다니 정신이 있는 게냐?!”
“내가 술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오늘은 마시지 않았소. 닥치고 보기나 하시오.”

검은 물체의 뚜껑을 열고 병을 신중하게 기울여 액체 한 방울을 조심스레 떨어뜨린 사수는 재빨리 물체의 뚜껑을 닫았다. 뚜껑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하자마자 조금 흔들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휘휘 저어 주변 사람을 물린 사수는 자세를 바로 펴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두 발짝 뒤로 물러선 윌리엄은 그 눈빛에 순간 숨을 들이켰다. 이 내기, 자신이 질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들의 목숨이 함께 져버릴 지도 모른다. 그 순간, 부정(父情)이 공명정대한 마을 대표자로서의 마음을 이겼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공중에 뿌려질 정도의 속도로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려던 순간, 사수의 손가락은 인정사정없이 스위치를 눌렀다.

‘펑!’

굉음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윌리엄도 예외는 아니었다. 머리에 사과를 얹고 서 있어야 하는 소년만이 온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고막을 희생했을 뿐이다. 한동안 먹먹한 정적과 싸한 ‘술 냄새’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머리를 징징 울리는 소음의 잔해를 떼어내고 겨우 몸을 일으키던 윌리엄의 귓가에 나지막하고 따듯한 목소리가 흘렀다.

“걱정 마시오. 당신의 아들은 멀쩡하오.”
“무슨…?!”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윌리엄의 눈에 아까와 같은 포즈로 서 있는 소년이 들어왔다. 아까의 소리 때문인지 표정이 조금 멍한 걸 빼면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머리 위의 사과도 형태가 조금 변했을 뿐 그대로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던 윌리엄의 귓가에 아까와 비슷한, 그러나 좀 더 크고 좀 더 냉정한 목소리가 다시 흘렀다.

“내가 넣은 건 술이 아니라 알코올이외다.”
“알코올? 술 만들 때 쓰는 그것 말인가요?”
알코올은 끓는점이 매우 낮기 때문에 기화가 잘 되오. 게다가 내가 넣은 알코올은 단 한 방울. 이 통을 이렇게 살짝 흔들기만 해도 금세 기체로 변해 통을 꽉 메우게 되지. 액체보다 기체의 부피가 훨씬 크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외다.
“허어, 그럼 그 알코올 기체가 통 뚜껑을 밀어냈다는 이야깁니까? 그만한 힘이 있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데?”
“물론 이 정도 양으로 통 뚜껑을 그렇게 강력하게 날릴 순 없소이다. 그렇기에 장치 하나를 더 해뒀소. 여기 보이시오?”

자연스레 시작된 설명에 또 자연스레 끌려간 윌리엄은 사수의 손길에 따라 통 안쪽을 들여다봤다. 눈에 익은 물체 두 개가 정답게 마주하고 있었다. 옆에서 귀를 계속 문지르던 관리도 아닌 척 이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다. 역시 아닌 척 자리를 양보해 준 윌리엄에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척척 끼어든 관리는 걸걸한 목소리로 물체의 이름을 뱉었다.

“못?”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못이지만, 또 그렇게 흔하지만은 않은 못이라오. 정확히 말하면 전선을 연결해 둔 철 못이오. 전선의 끝은, 보시오. 스위치가 달린 압전기에 연결돼 있지 않소. 이 스위치를 누르면….

목을 길게 빼고 통 안을 들여다보던 관리가 순간 풀쩍 뛰어 올랐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엉덩방아를 찧은 그의 몸 밑에서 낙엽 먼지가 자욱하게 올랐다. 함께 공기 중으로 뻗어간 마을 사람의 박장대소가 체면도 뭐도 버리고 부들부들 떨어대는 몸짓과 정확한 박자로 울렸다.

“어이쿠, 아까 쓴 알코올 기체가 조금 남아있었나 보오. 스위치를 누르면 이렇게 나사 두 개 사이에 불꽃이 일어나거든. 알코올 기체가 남아 있으면 당연히 아까처럼 불이 붙겠지. 그러게 좀 조심하시지 그러셨소. 머리카락 괜찮으시오?”
“네 이놈, 일부러 그랬지?”
“남의 설명을 끝까지 안 듣고 위험한 짓을 한 사람이 나쁜 거요. 아니면, 뭐 지금이라도 내기를 무르고….”
“아니, 아니다! 그 같잖은 설명인지 뭔지나 얼른 끝내!”

귓구멍을 후벼대며 관리를 ‘놀리는’ 사수의 모습은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다.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의 설명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였다.

불꽃 때문에 알코올이 폭발하게 되고, 그 압력으로 통 뚜껑이 날아가는 거요. 알코올의 인화점, 즉 불이 붙는 온도는 약 섭씨 12도. 즉 통 안의 온도가 12도 이상이면 알코올에 불이 붙어 폭발하게 된다는 이야기요. 사람 체온이 36.5도 인 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낮은 온도에서 타오르는 거지. 폭발력의 크기는 뭐, 아까 보셨듯이 꽤 크오. 절대 사람을 향해 날리면 안 되는 물건이지.”

댁에게는 참 미안한 짓을 했소. 뒤에 붙은 말은 윌리엄의 귀에나 들릴 정도로 나지막했다. 아닙니다, 애초에 아들의 목숨을 건 건 저니까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삼키며 윌리엄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봤는지 못 봤는지, 반응 없이 돌아선 사수는 손을 저었다.

“여기까지 하겠소. 저쪽은 사과를 꿰뚫었고 나는 떨어뜨리지도 못했으니 저쪽이 이겼소.”
“아니! 그것의 위력이라면 충분히 사과를 날릴 수 있지 않은가! 왜!”
“알코올이 한 방울 밖에 없었소. 그 뿐이오.”
“한 방울은 무슨! 아까 병으로 있지 않…, 으악?!”

침을 튀기며 흥분하던 관리의 옷이 순식간에 얼룩졌다. 싸한 알코올 냄새가 아까보다 훨씬 강하게, 하지만 훨씬 친근하게 퍼져갔다. 아까 ‘인화점’ 이야기에 지레 겁먹은 건지 손을 마구 휘저어 옷을 말리며 펄쩍펄쩍 뛰는 관리를 지나쳐 가던 사수가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확실히 한 방울만 있었지. 그렇지 않나?”
“…그렇군요.”

윌리엄도 마주 웃었다. 관리의 다른 능력은 인정 못해도, 사람 뽑는 능력 하나는 인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저 모양, 어쩐지 보기 좋지 않으오?”

난 가리다, 뜻 모를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사내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입을 딱 벌린 채 그 쪽을 바라보는 관리와, 의미도 모른 채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과, 바닥에 놓인 활로 차례차례 돌아가던 윌리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향했다. 역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의 머리 위에는 사과 하나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 놓았던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단지 아까와 다른 점은 한쪽이 둥글게 베어져 나간 채, 맑고 달콤한 즙을 흘리고 있다는 것. 마치 딱 한 입 베어 낸 형태로,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글 :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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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10-17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브 잡스 헌정 과학향기랄까...

후애(厚愛) 2011-10-1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만들어봤으면 좋겠당~ ㅎㅎㅎ
주말은 잘 보내셨어요?
날씨가 많이 살살하지요? 감기조심하세요.^^

마노아 2011-10-17 23:07   좋아요 0 | URL
어휴, 여기 엄청 추워졌어요. 내일은 아침 기온이 4도라는데, 이 정도면 체감온도는 영하거든요. 감기 단단히 조심해야겠어요. 후애님도 찬바람들지 않게 건강 주의하세요.^^

카스피 2011-10-18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만들면 재미있을것 같은데요^^

마노아 2011-10-18 21:42   좋아요 0 | URL
강도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퐁! 하고 발사되게요.^^
 
그리운 메이 아줌마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13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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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그리움을 한껏 담은 책이다. 작품은 첫 소절부터 제목의 메이 아줌마의 죽음을 고했다. 남겨진 사람이 그리움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서머에게 메이 아줌마는 각별한 사람이었다.  

오하이오에서는,항상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숙제 같은 신세였던 그 곳에서는 먹는 일이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내가 잠깐씩 지냈던 집들은 하나같이 음식에 대해 몹시 까다로웠고,내가 먹을 음식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랬다. 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쨌든 나는 어느 단추를 눌러야 컵 속에 먹을 것이 떨어질지 몰라 허둥대는 실험실 속의 생쥐가 된 심정이었다. 우리에 갇힌 채 먹이를 구걸하는 생쥐. 바로 그런 심정이었다. -14쪽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이곳저곳을 전전긍긍했던 서머를, 메이 아줌마와 오브 아저씨가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두 분은 친척집을 방문했다가 서머를 보았는데 우유 한 잔 더 달라는 말도 하지 못하는 이 가엾은 아이를 보는 순간 아이들 데려가기로 바로 결정했다. 두사람은 이미 나이도 많았고 건강하지도 않았지만, 누구보다 간절하게 아이를 원했다. 그리고 이 아이에게도 자신들에게도 그때가 베스트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한때는 왜 하느님이 너를 이제야 주셨을까 의아해하기도 했지. 왜 이렇게 다 늙어서야 너를 만났을까? 나는 집 안이 좁을 만큼 뚱뚱한데다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고,아저씨는 해골처럼 삐쩍 마르고 관절염까지 앓고 있으니 말이야. 3,40년 전에 너를 만났다면 쉽게 해줄 수 있었던 일들을 이제는 해주지 못하잖니.
하지만 그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니, 어느 날 답이 떠오르더구나.
하느님은 우리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길 기다리신 거야. 아저씨와 내가 젊고 튼튼했으면 넌 아마도 네가 우리한테 얼마나 필요한 아이인지 깨닫지 못했을 테지. 넌 우리가 너 없이도 잘살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늙어서 너한테 많이 의지하고, 그런 우리를 보면서 너도 마음 편하게 우리한테 의지할 수 있게 해주신 거야. 우리는 모두 가족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꼭 붙잡고 하나가 되었지. 그렇게 단순한 거였단다. -124쪽 

'간절함'과 '절실함'이란 단어가 눈으로 파고든다.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났다. 고마운 일이다. 서로 애틋하게 사랑하는 메이 아줌마와 오브 아저씨를 건강하게 받아들인 것은 서머가 어려서 받은 사랑에 기인한다. 아주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었음에도 서머는 엄마가 자신에게 주고 간 사랑의 크기를 알고 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도 그렇게 사랑받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날 밤 오브 아저씨와 메이 아줌마를 보면서 둘 사이에 흐르던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 엄마는 살아 계셨을 때 윤기나는 내 머리카락을 빗겨 주고,존슨즈 베이비 로션을 내 팔에 골고루 발라 주고,나를 포근하게 감싼 채 밤새도록 안고 또 안아 주었던 게 틀림없다. 엄마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그래서 다른 엄마들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나를 안아 주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때 받은 넉넉한사랑 덕분에 나는 다시 그러한사탕을 보거나 느낄 때 바로 사랑인 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9쪽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서머의 짐작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사랑을 주는 아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빨강머리 앤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렇게 애틋하고 절절한, 고마운 메이 아줌마가 밭일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반려를 잃은 오브 아저씨도, 그리고 소중한 보호자를 잃은 서머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스러워했다. 북받치는 설움과 아픔이 있음에도 서머는 울지 못했다. 지금 무너져 내리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열두 살이 된 아이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오브 아저씨의 슬픔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더 불안해할 서머를 위해서 좀 더 일찍 털고 일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만큼 메이 아줌마의 자리가 컸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야기의 전환은 친구 클리터스의 등장으로 이뤄진다. 꽤나 괴짜인 이 녀석이 오브 아저씨와 제법 통했던 것이다. 새침한 서머는 클리터스를 경계했다. 더구나 죽은 메이 아줌마가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는 오브 아저씨에게 심령교회 얘기까지 꺼낸 것은 서머에게 있어서 화가 날 일이다. 흔히 우리가 하는 얘기로, 죽은 사람이 우리 곁에서 지켜줄 거란 말을 정신적인 의미가 아닌 물리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누구라도 난감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확인까지 하려고 한다면 말이다. 이때부터 이들의 이야기는 로드무비처럼 흘러간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예기치 못한 반전과, 다시 재반전 등이 찡하면서 짠하게 진행된다. 그래도 오브 아저씨가 어른의 입장으로서 제 몫을 다해서 고마웠고, 거기엔 필시 메이 아줌마가 힘을 준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작품의 말미에 옮긴이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일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던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부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재인 동시에 한 공간 속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나'의 부재를 뜻한다. 곧 그 존재의 상실과 더불어 '나'의 상실이 초래되는 셈이다. 그 상실과 부재의 공간을 메우고, 살아남고, 살아가는 것은 이제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는 부재와 상실의 아픔과 화해해야 한다. 작가는 그 화해의 열쇠를 '사랑'에서 찾는다. -131쪽 

부재와 상실, 그리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사랑이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된 책이었다. 어려운 주제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었고, 성장하고 자라는 아이와 어른의 모습이 모두 조화롭게 어울렸다. 뉴베리 상에 빛나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언뜻 '홀리스 우즈의 그림들'과도 무척 통하는 소재였는데, 그 작품도 '뉴베리상'을 탔다는 것은 역시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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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메이 아줌마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13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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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도 그렇게 사랑받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날 밤 오브 아저씨와 메이 아줌마를 보면서 둘 사이에 흐르던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 엄마는 살아 계셨을 때 윤기나는 내 머리카락을 빗겨 주고,존슨즈 베이비 로션을 내 팔에 골고루 발라 주고,나를 포근하게 감싼 채 밤새도록 안고 또 안아 주었던 게 틀림없다. 엄마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그래서 다른 엄마들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나를 안아 주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때 받은 넉넉한사랑 덕분에 나는 다시 그러한사탕을 보거나 느낄 때 바로 사랑인 줄 알 수 있었던 것이다.-9쪽

오하이오에서는,항상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숙제 같은 신세였던 그 곳에서는 먹는 일이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내가 잠깐씩 지냈던 집들은 하나같이 음식에 대해 몹시 까다로웠고,내가 먹을 음식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랬다. 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쨌든 나는 어느 단추를 눌러야 컵 속에 먹을 것이 떨어질지 몰라 허둥대는 실험실 속의 생쥐가 된 심정이었다. 우리에 갇힌 채 먹이를 구걸하는 생쥐. 바로 그런 심정이었다.-14쪽

클리터스가 왜 나를 자기 집에 데려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클리터스네 부모님 때문인 줄만 알았다. 자기 부모님이 부끄러워서 내게 보여 주기 싫은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상냥한 두 분을 만나고 보니,클리터스는 부모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바로 나였다. 클리터스는 나라는 아이를,쌀쌀맞은 내 태도를 부끄러워했고, 자신의 특이한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 드리기 싫었던 것이다. 자기를 벌레 보듯 하는 나를 차마 보여 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88쪽

한때는 왜 하느님이 너를 이제야 주셨을까 의아해하기도 했지. 왜 이렇게 다 늙어서야 너를 만났을까? 나는 집 안이 좁을 만큼 뚱뚱한데다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고,아저씨는 해골처럼 삐쩍 마르고 관절염까지 앓고 있으니 말이야. 3,40년 전에 너를 만났다면 쉽게 해줄 수 있었던 일들을 이제는 해주지 못하잖니.
하지만 그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니, 어느 날 답이 떠오르더구나.
하느님은 우리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길 기다리신 거야. 아저씨와 내가 젊고 튼튼했으면 넌 아마도 네가 우리한테 얼마나 필요한 아이인지 깨닫지 못했을 테지. 넌 우리가 너 없이도 잘살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늙어서 너한테 많이 의지하고, 그런 우리를 보면서 너도 마음 편하게 우리한테 의지할 수 있게 해주신 거야. 우리는 모두 가족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꼭 붙잡고 하나가 되었지. 그렇게 단순한 거였단다.-124쪽

일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던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부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재인 동시에 한 공간 속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나'의 부재를 뜻한다. 곧 그 존재의 상실과 더불어 '나'의 상실이 초래되는 셈이다. 그 상실과 부재의 공간을 메우고, 살아남고, 살아가는 것은 이제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는 부재와 상실의 아픔과 화해해야 한다. 작가는 그 화해의 열쇠를 '사랑'에서 찾는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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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구판절판


한 가지 분명한 차이라면 구제금융 상여금은 납세자에게서 나왔고, 잘나가던 시절에 받은 상여금은 회사 수익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분노가 상여금이 부당하게 지급되었다는 확신에서 나왔다면, 상여금의 출처는 도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들어 있다. 상여금이 납세자에게서 나오는 이유는 회사가 망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불만의 핵심이다. 미국인이 사여금과 구제 금융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탐욕을 포상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실패를 포상했다는 사실이다.

-29쪽

사람들이 실패에 지급된 상여금에 분노하자 최고경영자들은 금융 수익은 전적으로 자기들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통제 불능의 힘에도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잘나갈 때 지나치게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행위에도 얼마든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냉전종식, 무역과 자본시장의 국제화,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 그 외에 수많은 요인이 1990년대와 21세기 초 금융 산업 성공에 기여하지 않았던가.

-32쪽

아이를 출산하는 행위와 전쟁을 수행하는 행위만큼이나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행위도 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인도의 대리 출산과 앤드루 카네기가 남북전쟁에서 자기 대신 싸울 군인을 고용한 사례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다. 이 상황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생각하다 보면, 정의의 개념을 서로 다르게 규정하게 하는 두 가지 질문에 직면한다. 자유시장에서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세상에는 시장이 존중하지 않는,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과연 존재할까?

-143쪽

소수집단우대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책의 요지가 불리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는 것이라면, 인종이 아니라 계층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종별 우대정책의 목적이 노예제와 인종차별정책이라는 역사적 부당함을 보상하려는 것이라면, 그 부당 행위에 가담하지도 않은 홉우드 같은 사람에게서 보상을 끌어내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지지하는 보상 논리가 이 반박에 답할 수 있을까? 이는 집단적 책임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달렸다. 우리는 과거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보상할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도덕적 의무가 어떻게 생기는지부터 자세히 알아봐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의무만 다하면 되는가, 아니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과거 역사에도 책임을 느껴야 하는가?
-239쪽

모든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찬양하는 시민권을 누리지는 못했다. 여성은 자격이 없었고 노예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여성과 노예의 본성은 시민이 되기에 적절치 않다. 지금 생각하면 누가 봐도 부당한 일이다. 그런데 이 부당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주장을 한 뒤로도 2000년 이상 지속되었다. 미국에서도 노예제는 1865년까지 폐지되지 않았고, 여성은 1920년에야 비로소 투표권을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당함이 끈질기게 이어졌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부당함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용서되지는 않는다.

-280쪽

애국심은 논란이 많은 도덕 감정이다. 이를 반박의 여지가 없는 미덕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 없는 복종, 국가 우ㅜ얼주의 발상, 전쟁의 근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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