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 : 북한 아이들 이야기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
이은서 지음, 강춘혁 그림, (사)북한인권시민연합 감수 / 국민출판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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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목 메어 부르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정부 차원에서 이미 '통일'에 대한 의지가 의심스럽고, 저 마다의 삶이 고단한 소시민들은 이웃의 삶을 돌아보기도 힘든 터, 동족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는 북한 주민들의 어려움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어린 학생들에게 북한과 북한 어린이들의 인권이란 또 얼마나 멀고도 먼 존재일까. 

당위로는 인정하지만 선뜻 무얼 어떻게 해야할지 알기 어려운 북한과 통일, 평화와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얘기해주는 책이 나왔다. 글을 쓴 분은 남한 작가이지만, 이야기의 결을 따라가보면 무수한 탈북주민들과의 인터뷰가 뒷받침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 분은 실제로 탈북주민으로 현재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계시다 한다. 그림의 숨결 하나하나에 얼마나 진심을 담았을지 역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모두 여섯 개의 짧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 그 이야기들마다 북한 어린이들과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실상이 절절하게 녹아 있다. 제목부터 보자. 

1. 도둑질을 해서라도 학교에 가고 싶어요
2. 죽어서라도 수용소에서 나가고 싶어요
3. "모두 다 김매기 전투에로!"
4. 단 하루만이라도 실컷 먹고 싶어요
5. 우리는 언제까지 유령으로 살아야 할까요?
6.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여행을 떠나요 

제목만 보더라도 마음이 무너진다. 도둑질을 해서라도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아이의 열망이, 죽어서라도 탈출하고 싶은 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삶이, 단 하루만이라도 실컷 먹고 싶은 간절한 열망에 글을 읽으면서도 몸둘 바를 모르게 한다.  

의무교육 연한이 남한보다 더 길다고 자랑하는 북한이지만, 그 실제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교과서도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고, 학생들에게는 '과제'라는 명목으로 땔감을 구해오게 한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업을 들을 수 없고, 배우고 싶어 목마른 아이들은 도둑질을 해서라도 목표량을 채우고자 발을 동동 구른다. 그 과정에서 몸 상하는 일은 다반사. 또 무엇을 훔쳐야 할지 막막한 이 아이들 앞에서 입시 교육에 찌들고, 조기교육 열풍에 내몰리는 남한 아이들의 삶을 겹쳐보니 답답한 한숨이 목구멍을 콱 막아버린다.  

수용소에서의 삶은 더 기가 막히다. 굶주린 아이가 들쥐를 발견하고 그걸 잡아 먹기 위해 몸을 던지는 장면은 어찌나 필사적인지 아찔할 지경이다. 

 

아이는 들쥐를 잡았지만 선생님에게 들켜서 몰매를 맞았고, 아이가 속한 조원이 단체 징계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수용소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는 금만이가 숨이 끊어졌다. 시체를 치우는 녀석에겐 강냉이죽을 한그릇 주겠다는 선생님의 얘기에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주춤주춤 앞으로 나온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는 선생이라는 작자의 행태에 울분이 끓어오른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제 주린 배를 앞서 걱정해야 하는 이들의 비참함을 이용해 그들에게 더 큰 모멸감을 주는 인간이 아이들 앞에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그 멸시의 눈초리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아이들은 죽은 아이의 호주머니를 뒤지고 입은 옷과 신발을 벗겨내어 헐벗은 제 몸에 두른다. 서둘러 묻힌 죽은 아이의 부모는 하루아침에 아이를 잃었다는 소리를 뒤늦게 들을 것이고, 아이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찾지 못할 것이다. 이토록 비극적인 일들이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북한 사회라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쪽의 삶과 비교한다면, 누구라도 앓는 소리를 쉽게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이 아니다. 또 다른 울음 섞인 목소리들도 들어보자.  

네번째 이야기에서 '꽃제비'가 등장한다. 엄마와 아빠를 연달아 잃은 명섭이는 어린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서 꽃제비 노릇을 한다. 꽃제비는 어린 노숙자라고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굶주리는 사람이 너무 많은 터라 동정과 구걸에 기대는 것도 쉽지 않은 일, 이제 아이는 도둑질을 해서라도 동생을 먹이고 싶다. 하지만 그런 꽃제비들이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장시장의 상인도, 손님도 이제는 그런 손길들에 대비를 하고 있고, 명섭이는 밥완자를 훔치려다가 죽도록 얻어맞는다. 

   
 

 “형, 많이 아프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붉게 얼룩졌어요.
동생이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어요.
“형, 우리 이다음에는 부자로 태어나자. 부자로 태어나서 먹고 싶은 거 다~ 먹자.”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동생을 보며 설핏 웃었어요.
“명환아 …….”
“응?”
목구멍이 울컥하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 냈어요.
‘우리 다시는 이런 세상에 태어나지 말자.’   -109쪽

 
   

고작 열 살 짜리 어린 아이가 다시는 이런 세상에 태어나지 말자고 이를 악물게 만드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이 아이에게 이미 지옥이다. 그런 사회가 버젓이 버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수치이고 그런 체제를 조장하고 유지하는 독재자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탈북자 이야기도 이어진다. 어렵게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해도 불법체류자로 낙인 찍힌 그들은 공안에게 잡히는 순간 북으로 송환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하기로 결심까지 했다. 만일을 대비해서 수중에 독약까지 지니고 있는 그 불안한 모습에 함께 두 주먹을 쥐어본다. 아이는 중국 땅도 북한 입장에서는 낙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에서 남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곳이야말로 지상 낙원이라고 상상한다. 단순 비교한다면 분명 북한의 굶주리는 삶에 비해서 남한은 지나칠 정도로 풍요로운 곳이다. 그 안에서도 지옥같은 삶이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탈북주민에게 있어서 그 다음의 문제는 아직 피부로 느낄 차례가 아니니까.  

글의 사이사이에는 북한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토막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상의 유일 낙원을 표방하는 북한의 수도 평양에는 장애인을 모두 내쫓았다는 것에 히틀러가 바로 떠올랐고,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과 같은 이름은 쓸 수 없어서 먼저 태어났더라도 이름을 무조건 바꿔야 한다는 얘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조선의 임금들은 같은 이름이 겹쳐서 끼칠 수 있는 피해를 줄이고자 외자 이름을 썼고 한자도 어려운 것을 골라 썼지만, 지극히 평범한 이름을 가진 이들 독재자 부자들은 최소한의 배려도 양심도 없다. 하긴, 그런 걸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통일의 당위성과 북한 주민들의 인권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이 책 한 권을 읽어보라고 내미는 것이 더 큰 교육적 효과와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낼 것 같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눈두덩이가 뜨거워져서 숨을 골라야 했다. 학교에서는 단체로 읽을 수 있게 학급의 학생 수만큼 도서관에서 구입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반드시 4교시에 읽혔으면 한다. 오늘 받은 급식의 소중함과, 밥알 한알한알의 귀중함을 제발 깨달았으면. 버려지는 잔반을 보며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제발 느꼈으면 한다. 그리고 그건 비단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가슴으로 읽어야 할 책이다. 미룰 수 없고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인간된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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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1-10-30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학급의 아이 수만큼 학교 도서관에서 도서를 확보하여 점심 시간 전에 다함께 읽기! 너무 좋은 생각이네요. 책도 가슴 찡했지만, 리뷰는 한 번 더 가슴을 울리네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마노아 2011-10-30 17:40   좋아요 0 | URL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울컥했는지 몰라요. 그러고 나서 급식을 먹었는데 어느 선생님이 지나치게 반찬을 많이 가져와서 다른 선생님이 너무 많이 가져온 것 아니냐, 다 먹겠냐 하시니, 어차피 남는 거라며 배부르면 먹고 남기겠다고 하더라구요. 그 순간 버럭! 화를 내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눈을 흘겼답니다.ㅜ.ㅜ
이런 책은 학교 차원에서 많이 구비해서 모두가 읽게 해야 해요. 그게 곧 평화교육 통일교육이 될 거예요.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 : 북한 아이들 이야기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아니
이은서 지음, 강춘혁 그림, (사)북한인권시민연합 감수 / 국민출판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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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여기는 사람이 죽어도 동정하거나 울 수 없는 곳이에요. 수감자들 사이에 동요가 일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식이나 부모 형제가 죽어도 마음껏 울 수조차 없어요.-55쪽

곧 금만이네 엄마 아빠도 금만이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하지만 금만이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평생 모를 거예요. 수용소에선 사람이 죽으면 늘 이렇게 처리하니까요.
수용소를 지키는 군견이 잘못을 하면, 군견재판을 한 다음 총살을 한 대요. 나이가 들어 군견이 죽게 되더라도 고기로 먹지 않고 묻어 준대요. 그런데 우리는 수용소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서조차 개만도 못한 취급을 당해요.-58쪽

누가 엿듣기라도 하면 큰일이에요. 북한에서는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는 날엔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가요. 혹시라도 불만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늘 감시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가족이나 동무들 사이에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북한이에요.-73쪽

그런데 언젠가부턴가는 도둑을 잡고도 눈감아 주는 군인들이 늘어났어요.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그냥 놓아주는 거예요. 군인들도 굶주리기는 마찬가지다 보니 그렇게 해서라도 배를 채우는 거지요. 몰래 빼돌리는 양은 점점 늘어나고 그 때문에 당에 바쳐야 할 수확량은 계속 미달되었어요. 수확량을 채워야 하니까 해마다 일은 더 많아지고 굶주리는 사람들 역시 늘어났지요.-76쪽

꽃제비치고 이와 벼룩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근지러워 손을 대면 어김없이 이가 잡히고, 옷 솔기마다 벼룩이 득실득실해요. 심한 아이들은 머리가 노인처럼 하얘요. 이가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알을 깐 거예요.-96쪽

방금 전까지도 죽은 사람이 그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거나, 죽은 사람이 먹던 음식이었다는 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발견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죽은 사람이 꽃제비일 때는 경쟁자가 하나 줄었다고 생각할 정도지요. 잔인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건 꽃제비 생활에서 흔히 있는 일이에요. -99쪽

처음엔 붙잡힐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는데, 몇 번 덮치고 나니 무서울 게 없어요. 세상에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요? 그것도 어린 동생을 혼자 두고 말이에요.-104쪽

"형, 많이 아프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붉게 얼룩졌어요.
동생이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어요.
"형, 우리 이다음에는 부자로 태어나자. 부자로 태어나서 먹고 싶은 거 다~ 먹자."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동생을 보며 설핏 웃었어요.
"명환아 ……."
"응?"
목구멍이 울컥하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 냈어요.
‘우리 다시는 이런 세상에 태어나지 말자.’-109쪽

우리는 불법체류자로 분류되면서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되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고,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119쪽

엄마와 나는 공안에게 붙들리면 그 즉시 먹으려고 주머니에 늘 독약을 넣고 다녀요. 다시 북한에 끌려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거든요. -120쪽

우리는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잘 때도 꼭 신발을 신고 자요. 대대적으로 단속이 뜰 때는 뒷산으로 올라가 찬 바닥에 비닐박막을 깔고 자요. 언제 발각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매 순간을 사는 거예요. 우리에게 미래 같은 건 없어요. 그저 오늘도 무사히 넘기기만을 바랄 뿐이랍니다.-122쪽

중국에 와서 놀란 건 흰 쌀밥도, 으리으리하게 높은 건물도 아니에요. 나를 정말 놀라게 한 건 길가에 서 있는 가로수들이었어요. 북한에는 산에도 나무가 없는데 여긴 눈만 돌리면 어디에든 나무가 있었으니까요.-147쪽

할아버지는 북한에 남겠다고 했어요. 불편한 몸으로 가다 붙잡히면 나까지 곤혹을 치른다며 거듭 안 가겠다고 했어요. 아무리 떼를 써도 이번에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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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60 호/2011-10-24


노트북 배터리를 완전히 방전시키지 않고 중간 중간 충전하면 수명과 충전용량이 줄어들까?

과거의 노트북은 일반적으로 니켈-카드뮴 전지를 사용했다. 이 배터리의 경우 완전히 방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충전하면 충전용량이 줄어든다. 이를 메모리 효과(memory effect)라 한다.

하지만 최근의 노트북은 리튬 이온 전지나 리튬 폴리머 전지를 사용한다. 리튬 이온 전지는 완전 방전 시키면 오히려 배터리 수명과 충전용량이 단축된다. 하지만 완전 방전이 필요할 때도 있다. 바로 배터리 잔량을 측정하는 내장 디지털 연료계가 장기간의 사용이나 거친 사용으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다. 일부 제품은 이에 대비한 교정 기기가 채용돼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배터리를 완충시킨 후 잔여전력을 끝까지 다 사용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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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2011-10-2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마노아 2011-10-28 11:23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었다면 저도 기뻐요.^^
 



제 1462 호/2011-10-21

호르몬으로 미래 직업까지 알 수 있다고?

모둠숙제를 한답시고 친구 다섯 명을 집으로 집결시킨 태연, 숙제는 열어보지도 않고 신나게 노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인형놀이와 종이접기에 푹 빠진 친구들과는 달리, 태연은 장난감 총과 칼로 얌전한 친구들을 방해하는데 여념이 없다. 한참 동안이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빠, 급기야 태연과 친구들을 일렬로 앉혀놓고 잣대로 얼굴 사이즈와 손가락 길이를 재기 시작한다. 태연과 친구들, 아빠의 돌발 행동에 어리둥절하다.

“아빠,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흠…, 역시 생각했던 대로야. 친구들에 비해 얼굴이 너부데데하고 약지도 길쭉한 것이, 태연이 너한테 미약한 CAH(선천성부신과형성증) 증상이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구나. 정확한 건 병원에 가서 직접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말야.”

“네에??!! 그게 뭔데요! 혹시 불치병에라도 걸린 건가요? 몇 개월이나 살 수 있대요? 흑흑~. 그동안 불효했던 저를 용서해주세요, 아빠….”

“불효녀라는 걸 알고 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네가 불치병에 걸린 비련의 연속극 주인공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구나. CAH는 부신과 성선의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부족해지는 유전질환이란다. 엄마 뱃속에 있는 여아가 안드로겐(androgen), 즉 남성호르몬에 지나치게 노출된 경우에는 남자 같은 성향을 보이고 반대로 남아가 여성호르몬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여자 같은 성향을 보이는 증상을 말하지. 또 태아는 남성호르몬에 많이 노출되면 될수록 얼굴이 좌우로 넓고, 검지에 비해 약지가 길다는 특징을 갖게 된단다. 그런데 태연이 넌 놀 때도 남자애들처럼 총이나 칼을 좋아하고, 얼굴은 넓으며, 약지는 긴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CAH가 약간 있는 게 아닌가 싶다는 얘기야.”

“네에? 그럼 곧 남자가 돼 버리는 건가요? 흑흑, 몇 개월이나 남았어요? 얼마나 여자로 살 수 있을까요?”

“아이고, 오버 좀 하지 마! CAH는 심할 경우 스테로이드 호르몬 부족 때문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약한 CAH를 보이는 사람은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어요. 남성적인 점을 잘 살려서 오히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경우도 많고 말이야.

“휴우~~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시지, 완전 겁먹었잖아요!!”

“얼마 전에는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학교의 한 연구진이 9~26세의 남녀 125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는데, CAH가 있는 여성은 엔지니어나 제트기 조종사처럼 일반적으로 남성들이 선호하는 직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사회복지사나 교사와 같은 직업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단다. 실제로 커서 남성적인 직업을 갖는 경우도 많고 말이야. 다시 말해 호르몬만 가지고도 그 아이가 커서 어떤 직업을 갖게 될 것인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다는 거지. 연구진은 여자 아이들이 CAH가 있는지 없는지를 일찌감치 파악해서, CAH가 있는 아이에게는 어릴 때부터 과학·기술·공학·의학(STEM)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단다. 아이의 특성을 빨리 파악해 맞춤형 교육을 해주는 거니까 그만큼 성취도도 높을 거라는 얘기지.”

“아, 그러니까 아빠는 제 적성을 미리 파악해서 능력을 키워주려는 것이었군요. 홍홍홍! 역시 아빠는 나만 사랑한다니깐~~.”

이때 이야기를 듣던 말자가 끼어든다.

“그런데요, 정말로 궁금했던 게 있어요. 검지에 비해 약지가 긴 사람은 남성호르몬에 많이 노출된 경우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약지가 긴 사람이 돈도 잘 번다는데 진짜예요?

“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야. 남성호르몬이 많은 사람들은 승부욕이 강하고 공격적이며 매우 적극적인 경우가 많단다. 아무래도 그런 사람들이 승부욕이 적고 수동적인 사람들 보다는 성공하거나 돈을 많이 벌 가능성이 높지 않겠니?

“그럼 얼굴이 널찍한 사람들도 부자가 많겠네요?”

실제로 미국 밀워키캠퍼스의 한 연구진이 미국 최대기업 55개사의 CEO 얼굴을 분석해 본 결과, 널찍한 얼굴의 CEO가 이끄는 회사는 뾰족한 얼굴의 CEO가 경영하는 회사에 비해 재무적으로 훨씬 뛰어난 실적을 거둔 것으로 확인됐단다. 또 복싱 같은 격렬한 스포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넓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어. 남성호르몬이 치열한 승부세계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들이지. 또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도 호르몬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이해가 된단다. 용감한 자 즉, 남성호르몬이 많은 자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미인에게 구애를 할 수 있으니 미인의 사랑을 얻을 가능성도 훨씬 높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반대로 남성호르몬이 많은 사람들은 지나친 승부욕으로 인해 반칙을 하거나 무모한 위험을 무릅쓴다는 연구결과도 많단다.

“그럼 어차피 저는 남성호르몬 과다 분비자랑 결혼할 수밖에 없겠네요. 남성호르몬이 적은 사람은 저 같은 미인에게 감히 도전하지도 못 할 테니까요. 그런데 태연이 아버지는 어떤 쪽이세요? 남성호르몬이 많은 쪽? 적은 쪽? 태연이 어머니가 미인인 걸로 봐선 많은 쪽이신 거 같아요. 얼굴도 태연이처럼 너부데데하시잖아요.”

“허허, 참. 나의 남성미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모양이구나.”

아빠와 말자의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태연이 아빠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소근거린다. 순간 아빠의 얼굴이 허옇게 뜨더니만 급히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태연에게 준다.

“뜻밖의 용돈 완전 감솨! 아빠가 원래는 뾰족 턱인데 넘치는 턱살 때문에 넓적해 보인다는 진실, 그리고 아빠의 찌질한 모습이 불쌍해 보여 모성애를 발휘한 엄마가 그냥 결혼해주기로 결심했다는 진실, 이 두 가지 불편한 진실을 제 친구들에게 영원히 비밀로 해드립죠. 헤헤헤”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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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63 호/2011-10-21

은행알은 왜 고약한 냄새가 날까?
해마다 가을을 알리는 냄새가 있다. 도심의 가로수 길을 걷다보면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바쁜 출근길 직장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지그재그로 걷고 있다. 바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알 때문이다. 자칫 바닥에 떨어진 은행나무(Ginkgo biloba)의 종자를 밟으면 과육질이 구두에 묻어 회사 사무실에서 불쾌한 냄새를 풍길 수 있다. 은행알에서는 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일까?

개나리나 목련, 진달래와 같은 나무는 수꽃과 암꽃이 한 그루에서 피기 때문에 모든 나무마다 열매가 열린다. 반면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자라서 암나무에서만 종자가 난다. 우리가 흔히 은행나무 열매라고 알고 있는 은행알은 실은 열매가 아니라 은행나무 종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학문적으로 은행나무는 침엽수(나자식물)에 속하고 자방(종자가 들어있는 방)이 노출돼 있어 열매가 생기지 않고 종자만 생긴다.

은행알 특유의 고약한 냄새는 암나무에 열리는 종자의 겉껍질에서 난다. 겉껍질을 감싸고 있는 과육질에 ‘빌로볼(Bilobol)’과 ‘은행산(ginkgoic acid)’이 함유돼 있기 때문이다. 수컷 은행나무만 골라 가로수로 심으면 도심에서 고약한 냄새를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


[그림 1]은행알은 암나무에서만 열리며 특유의 고약한 냄새는 종자의 겉껍질에서 난다. 사진 출처 : 동아일보그러나 은행나무는 어른으로 자라나 종자를 맺기 전까지 암수를 구별할 방법이 없다. 어린 은행나무는 심은 지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야 종자를 맺을 수 있는데, 다 자란 다음에 암수를 구별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이처럼 은행나무는 손자대에 가서야 종자를 얻을 수 있다고 해 ‘공손수(公孫樹)’란 별칭이 있다. 수명이 긴데다 종자의 결실도 매우 늦다는 데서 얻어진 이름이다.

그런데 2011년 6월 국립산림과학원이 은행나무 잎을 이용해 암수를 식별하는 ‘DNA 성감별법’을 개발했다. 은행나무 수나무에만 특이적으로 존재하는 DNA 부위를 검색할 수 있는 ‘SCAR-GBM 표지’를 찾아낸 것이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1년생 이하의 어린 은행나무도 암, 수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

은행나무는 지구에서 살아온 온 역사가 길다. 식물학자들은 은행나무가 약 3억 5,000만 년 전인 고생대 석탄기 초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살았던 은행나무 가운데 일부는 땅속에 묻혔다가 오늘날 석탄 혹은 석유 형태로 쓰이고 있다.

은행나무는 중생대 쥐라기 때 가장 번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룡들과 함께 지구상에 군림했던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공룡들도 뜨거운 태양을 피하려면 키가 큰 은행나무의 그늘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은행나무가 아니라 ‘바이에라 은행나무(Ginkgo baiera)’가 번성했다. 바이에라 은행나무는 현재의 은행나무와 비교하면 잎이 더 많이 갈라진 모양을 하고 있고 키도 훨씬 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바이에라 은행나무는 멸종돼 지금은 화석으로만 볼 수 있다. 중생대 말 백악기가 도래하면서 현재의 은행나무가 번성하기 시작해 1억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변함없는 모습으로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 은행나무도 인간의 꼬리뼈처럼 진화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진 못했다. 과연 그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태초에 생명체는 물속에 살고 있었는데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식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육상 환경에 맞도록 자신의 신체를 변화시켰다. 은행나무도 여기에 동참했다. 물속식물은 수컷의 정자와 암컷의 난자를 물속에 뿌려 수분을 맺도록 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식물의 꽃가루에 해당하는 것이 정자다. 물속에서는 꽃가루를 운반해줄 바람이 불지 않는다. 물고기가 벌과 나비를 대신해 꽃가루를 옮겨다 주지도 않는다. 때문에 정자는 여러 개의 꼬리를 달고 물속을 헤엄쳐 난자를 찾아다녀야 했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는 육상에서 자손을 남길 수 없었다. 결국 암컷의 난자는 세포 안에서 수컷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난자는 다른 세포로 둘러싸인 깊숙한 곳에 있으면서 정자가 찾아오길 기다린 것이다.

오늘날 육상식물은 바람과 벌, 나비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운동성을 지닌 꼬리가 필요 없다.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그런데 은행나무만은 여전히 정자에 꼬리를 달고 있다. 꼬리가 없다면 꽃가루라 불러야 마땅하지만 스스로 움직이면서 운동할 수 있어 ‘정충’이라 부른다. 1895년 일본인 히라세 교수가 정충을 처음 발견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정충이 스스로 움직여 이동할 수 있다는 표현을,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혹은 한 가지에서 이웃가지로 나무껍질을 타고 이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오해다. 암꽃의 안쪽에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우물이 있고, 이 우물의 표면에 떨어진 정충이 짧은 거리를 헤엄쳐 난자 쪽으로 이동하는데 꼬리를 쓰는 것이다. 은행나무 종자는 원시시절 물속식물이 지녔던 흔적인 것이다.

이제껏 식물학자들은 지구 어딘가에 야생 상태로 자라는 은행나무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중국 쓰촨성과 윈난성 같은 오지를 답사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데 중국 양쯔강 하류 절강성과 안휘성의 경계를 이루는 톈무산맥의 해발 약 2,000m 지점에서 야생지를 발견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자라는 은행나무도 과거 중국에서 들어온 외국수종이란 얘기다.

신기한 것은 깊은 산속에서는 은행나무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경기도 양평 용문산에 있는 은행나무도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듯 깊은 산 속에 자라더라도 인간이 옮겨다 심은 것이 대부분이다. 왜 그럴까?

은행나무 종자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바람에 의해 산 위로 이동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하지만 참나무류 열매인 도토리는 크고 무거워도 다람쥐가 겨울철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산꼭대기까지 옮겨다 땅에 묻는다. 이 가운데 일부는 매년 봄 싹이 돋아나 나무로 자라난다. 그렇다면 은행나무를 옮겨다 심어주는 동물은 없을까?

아쉽게도 종자를 덮고 있는 과육질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만지면 피부가 가렵기 때문에 다른 동물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은행알을 먹으며, 다른 곳에 종자를 퍼트려 준다. 인간이 사는 곳 부근에서만 은행나무를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은행알의 고약한 냄새는 은행나무가 인간에게만 보내는 비밀 신호는 아닐까?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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