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는 시점이다.

초조해 하지 말자. 꾸준히,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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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속 자연- 정선의 진경산수화로 배우는
최석조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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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세계사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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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색은 다 달라요- 다인종.다문화를 이해하는 그림책
캐런 카츠 글.그림,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11년 7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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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10
시미즈 레이코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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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미술관 -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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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학자 이영림 교수 "루이 14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귀족들의 먹이사슬의 포로에 불과하다. 절대군주의 상징인 루이 14세의 최대 비밀은 그가 절대군주가 아니라는 점이다. 화려한 베르사유와 엄격한 궁정의례의 비밀도 여기서 드러난다. 절대군주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루이 14세는 절대군주로서의 이미지에 집착했던 것이다."

-56쪽

절대군주정은 성격상 호전적일 수밖에 없다. 절대군주의 영광은 예술과 예법 등의 상징적 수단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루이 14세는 전쟁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잘 과시할 수 있는 위대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전쟁은 신민의 불만과 귀족의 음모를 억누를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했다. 이렇게 전쟁을 좋아하다보니 결국 그는 당대의 유럽인들에게 가혹하고 잔인한 전쟁광으로 인식되었다.

-66쪽

섬나라여서 해군이 막강하고 해군이 모든 군사력의 중심이다 보니 영국 육군은 해군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다. 배가 쉽게 드나들지 못하면 영국군의 공포감은 급격히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이에 더해 잔 다르크가 영국군과 싸울 때 본진을 공격하는 것보다 주위의 작은 요새를 점령해감으로써 결국 본진을 무너뜨린 것도 참고했다. 이런 지식이 한순간에 머릿속에서 이어지면서 누구도 생각지 못한 레귀예트 점령의 아이디어로 전개되었다. 전략적 직관은 이처럼 두뇌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지식이나 경험이 순식간에 조합되어 가장 확실한 문제 해결책으로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출중했던 나폴레옹은 툴롱 전투 이후 3년 만에 대위에서 장군이 되었다.

-79쪽

나폴레옹은 예술가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나폴레옹은 예술가들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하고 그들의 재능을 인정해 자부심을 극도로 높여줌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연극배우 탈마에게 모자를 벗어 최고의 경의를 표한 적이 있는데, 황제 스스로 이를 떠벌리고 다니며 자랑함으로써 배우의 자부심을 한껏 높여주었다. 나폴레옹은 다비드의 작품에 대해서도 늘 공공연히 경의를 표했다. 이런 황제를 그리는 화가의 붓 끝에 열정이 실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87쪽

‘임금님’이나 ‘나라님’ 같은 호칭과 달리 차르는 매우 잔혹하고 억압적인 군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농노제에 기초한 후진적인 사회체제 위에 국가 자체가 최고의 봉건 지주로 군림하다보니 그 정점에 선 차르는 그만큼 무서운 압제자로 인식되곤 했다.
차르는 삼권을 장악하고 러시아 정교회 수장을 겸한 전제자로, 헌법과 제도화된 내각, 선출된 입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늘은 높다. 그러나 차르는 더 높고 멀다"는 러시아 속담이 보여주듯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다. 이에 따라 이반 뇌제뿐 아니라 많은 차르들이 억압적이고 냉혹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히는 표트르 대제의 별명도 ‘처형관 차르’였다. 표트르 대제의 사후에는 75년 동안 무려 열 차례의 권력 변동이 발생해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부인 사이에 죽고 죽이는 혈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피의 니콜라이’라는 별명을 얻은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혁명세력에게 무참히 살해된 것도 변화하는 시대와 담쌓고 전제주의를 고집한 데 따른 것이었다.
-111쪽

흥미롭게도 이 희대의 독재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러시아인이 아직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2008년 러시아의 한 TV 토크쇼에서 벌인 여론조사에 따르면, 스탈린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다는 응답자가 무려 54%에 이르렀다(스탈린을 우상이라고 평한 응답자는 16%에 그쳤다). 최근 고등학교의 역사 교과서에는 그의 지도력을 칭송하는 글들이 실리고 있고, 그의 동상이 새로이 세워지다 못해 상품과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까지 등장하고 있다. 무엇이 많은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아직도 스탈린에 대해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일까?

-115쪽

근현대사에서 독재자로 지탄받은 지도자들이 그들의 사후 상당수 혹은 일부 국민들로부터 그리움과 향수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과거의 고통스럽고 두려웠던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독재자가 고무한 자부심과 비전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116쪽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 그루지야의 시골 마을 고리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다(권좌에 오른 후 스탈린은 자신의 생일을 1879년 12월 21일로 바꿨다).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스탈린이라는 이름은 강철을 뜻하는 러시아어 스탈에서 나온 것이다. 레닌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116쪽

화가들이 레닌과 스탈린의 관계를 끈끈하게 묘사했던 것과는 달리 말년의 레닌은 스탈린을 경계했다. 레닌은 유서에 덧붙인 글에서 스탈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은 너무 난폭한 인간이다. 그의 이런 결점은 서기장의 직책에 합당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그 지위로부터 제외시키는 방법을 찾도록 여러 동지들에게 제안한다."
자신의 사후 당이 분열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레닌은 동지들에게 집단지도체제를 권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당 간부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스탈린에게 넘어갔고, 권력의 화신 스탈린은 레닌의 우려를 끝내 현실로 만들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소련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스탈린은 소련 사회를 전면적으로 개조했다. 20세기 빅브라더의 가장 공포스러운 전형을 창조한 것이다.
-122쪽

로마인들이 간과한 것은 남매 사이의 결혼은 종교적 함의에 더해 권력의 유지와 배분을 위한 정치적 고려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이게 가능했던 것은 그리스나 로마와 달리 여성 왕족의 통치를 인정하는 유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나 로마에서 태어났으면 여성이라서 받지 못했을 고급 교육(왕자들과 동일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훗날 이것이 그녀에게 큰 정치적 자산이 되어주었다.

-142쪽

미모와 관능만으로 따지면 클레오파트라보다 우월한 여인들이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주변에는 많았다. 고대 동전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심지어 이마가 좁고 턱이 뾰족하고 입술이 얇아 결코 미인형이 아니었다고 한다. 영웅들이 사랑한 게 단순한 미모나 관능이 아니었음을 유추하게 하는 대목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지성은 그녀가 마케도니아어뿐 아니라 그리스어, 민간 이집트어, 라틴어에도 능통했고, 아랍인, 히브리인, 메데스인과 그들의 언어로 직접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에서 또렷이 확인할 수 있다. 또 독약의 종류와 효과에 대해 깊이 연구했고(사형수에게 독을 주입하는 끔찍한 실험을 행했다고 한다), 미용법과 화장술에 대한 글을 썼다는 기록도 그녀의 지적인 면모를 일깨워준다.

-144쪽

고대 그리스에서는 매춘이 경제활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사람들은 윤락문화를 후대 사람들만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런 관용적인 시각이 그리스 미술가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윤락문화를 표현하게 만들었다. 로마의 화가들 또한 유곽을 소재로 한 그림을 적잖이 그렸다. 이런 그림들을 통해 우리는 로마 사람들도 그리스 사람들과 유사한 태도로 윤락문화를 대했음을 알 수 있다.

-171쪽

하렘은 본래 이슬람권에서 가까운 친척 외에 일반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간을 지칭한다. 한마디로 ‘금남의 구역’이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오스만 제국 술탄의 하렘이다. 톱카프 궁전에 있던 이 하렘에는 술탄의 아내와 여인들, 술탄의 어머니, 술탄의 누이들, 딸들, 가까운 여성 친척들, 환관, 여성 노예들이 거주했다. 세월이 흐르면서는 16세 미만인 술탄의 아들들도 하렘에서 함께 살았다. 하렘을 만든 것은 술탄의 성적 욕망을 위한 게 아니라, 이처럼 내외를 따지는 문화에서 기능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공간적 성격과,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서 술탄의 어머니나 아내, 누이들이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하렘이 환락의 장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제국의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으리라는 사실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3쪽

14C의 흑사병 외에 유럽의 진로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BC430년경 아테네에서 창궐한 장티푸스다. 4년 만에 아테네의 군인과 민간인 1/4 정도가 세상을 떠났다. 병의 독성이 얼마나 강했던지 감염자들이 워낙 빨리 죽는 바람에 병이 더 이상 퍼지지 않는 역설적인 결과가 초래되었다. 당시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치르던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은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스파르타의 펠레폰네소스 동맹에 패하고 말았다.

-222쪽

페스트는 이후에도 18C까지 유럽을 주기적으로 위협했고 유럽의 상황을 크게 변화시켰다. 페스트로 인구가 줄어들자 귀족들의 부와 권력 또한 줄어들게 되었고 농노들은 영지를 떠나 소작농이나 장인 등으로 변모한다. 또한 페스트를 퇴치하는 데 실패한 교회가 민심을 잃으면서 기독교의 힘도 약화되었다. 이렇듯 페스트는 중세시대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228쪽

헨리8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사후 왕위 계승권자는 헨리 8세의 맏딸이자 에드워드의 누나인 메리였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죽으면서 왕위를 누나가 아니라 아버지의 여동생인 메리 튜더의 상속자들에게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측근인 노섬벌랜드 공작의 설득에 따른 것으로, 그렇게 하면 메리 튜더의 외손녀인 제인 그레이에게 왕권이 넘어갈 수 있었다. 에드워드의 왕위를 가톨릭교도인 메리가 아니라 신교도인 제인이 계승함으로써 기존의 신교 권력이 변함없이 유지되도록 하려는 노섬벌랜드 공작의 책략이었다(제인은 노섬벌랜드 공작의 며느리이기도 했다). 에드워드는 영국 국교회의 창설자인 아버지 헨리8세의 유지를 잇고 가톨릭의 복고를 막기 위해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231쪽

‘피의 메리’가 아닌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1542-1587)는 자신의 왕국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영국에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처형되었다. 메리의 불행은, 프랑스 왕비가 된 그녀가 첫 남편 프랑수아 2세의 이른 사망으로 스코틀랜드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두 번에 이은 재혼이 문제였는데, 이 잘못된 혼인들로 스코틀랜드 군주로서 그녀의 통치력은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에게 도움을 청해 영국으로 망명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게 영국 내의 가톨릭 세력들로 하여금 메리를 영국 여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와 반란을 획책하게 만들었다.-235쪽

모반 음모가 없더라도 후사가 없는 엘리자베스가 죽으면 왕위는 메리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신교도 세력에게 이보다 더한 재앙은 없었다. 메리는 오랜 유폐생활 중에도 줄기차게 모반에 연루되었는데, 결국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되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참수형에 처했다. 1587년 2월 7일 그녀는 그렇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메리는 끝내 영국 여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그녀의 아들 제임스 1세는 엘리자베스 사후 적법하게 영국의 왕위까지 계승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가 청교도혁명의 와중에 처형됨으로써 메리의 불행은 손자 대에 다시 반복되었다.
-235쪽

절단된 왕의 머리는 군중에게 전시되었다. 반역죄로 죽은 모든 죄수에게 가해지는 수치였다. 하지만 크롬웰은 그 머리를 다시 왕의 몸에 꿰매어 붙이도록 하는 전례 없는 조처를 내렸다. 유족들이 주검에 예를 표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려 깊은 크롬웰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40쪽

헨리8세가 죽자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가 낳은 에드워드 6세가 그 뒤를 이었다. 그가 어린 나이에 결핵으로 죽자 헨리7세으 증손녀인 제인 그레이(1537-1554)가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그녀는 메리에 의해 9일 만에 폐위되어 처형된다. 실질적으로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이 된 메리(1516-1558)는 교황과 화해하고 수장령을 폐지했다. 그녀는 신교도를 박해하면서 수많은 이들을 처형했기 때문에 ‘피의 메리’로 불렸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었고 재임 5년 만에 난소암으로 사망했다. 이후 즉위한 이복여동생 엘리자베스1세(1533-1603)는 가톨릭과 신교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절대왕정을 완성했다. 그녀는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1566-1625)가 그 뒤를 이어 스튜어트 왕조를 열었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한 그는 국교회를 절대주의의 보루로 삼아 가톨릭과 청교도를 모두 박해했다.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대립하는 일은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찰스1세(1600-1649) 때 더욱 빈번했다.

-247쪽

서양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전쟁은 일반적으로 일차세계대전이 꼽힌다.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받은 심리적 충격이 그 어느 전쟁보다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차세계대전을 ‘the Great War'라는 고유명사로 부르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 단어는 일차세계대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249쪽

일차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전쟁 자체가 준 충격도 컸지만, 이후의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독일 제국을 비롯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등 네 개의 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쟁 끝물에 퍼지기 시작해 최소한 250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추산되는 스페인 독감은 전쟁으로 위생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번져 그 위력이 대단했다.

-259쪽

다만 전쟁이 총력전으로 치러진 까닭에 전쟁 중에 인력난을 해소하고자 여성들을 대규모로 후방의 공장에 채용한 것은 여성에게 노동시장의 문을 열어준 긍정적인 변화였다. 특히 ‘총알 아가씨’로 불리며 군수 공장에서 일한 여성들은 지위 변화의 상징이 되어 여성들의 정치 사회적 권리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1918년 영국에서, 그리고 1920년 미국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것은 이 같은 시대의 흐름이 반영된 결과였다.

-259쪽

제1차 세계대전은 막대한 인명과 재정의 피해를 가져와 유럽을 후퇴시켰고 세계의 주도권을 미국에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266쪽

카리스마라는 그리스어가 처음 문자화되어 나타난 것은 서기 50~62년 사이의 일이다.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카리스마를 은사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기독교에서 은사란 하느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카리스마의 어원이 된 카리스charis가 은혜나 호의를 뜻한다는 점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의미 전개라 할 수 있다.

-273쪽

이 기독교적인 카리스마 관념은 교회가 유럽 문명에 안착하고 제도화되기 시작하는 서기 3세기 이후 급속히 약해진다. 바울의 카리스마 관념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특권을 부인하고 평등주의적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어서 헬레니즘 사회의 계층적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측면이 있었다. 제도화된 교회의 입장에서는 이런 급진적 가치와 이상주의가 교권을 약화시킬 수 있는 까닭에 이를 적극적으로 통제할 필요를 느꼈다. 이후 교회는 경전과 종교 규약, 전례, 성직자 조직, 리더십을 카리스마, 곧 은사보다 더 중요한 공동체 활동의 중심으로 삼게 된다.

-279쪽

오랜 세월, 교회에서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심지어 사라진 듯 보였던 카리스마라는 용어(물론 그 개념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가 오늘날 일상에서 빈번히 오르내리는 단어가 된 것은 전적으로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 덕이다. 막스 베버는 카리스마라는 용어를 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과학 분야에서 재활용했을 뿐 아니라 개념 자체를 재창조했다. 베버가 재창조한 카리스마의 개념은 고대의 기독교적 의미와는 거리가 먼, 철저히 세속적으로 변형된 것이었다.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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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미술관 -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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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 루이 14세(이아생트 리고, 1701,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아가야, 너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건축에 빠졌던 나의 취향을 닮지 마라. 전쟁을 좋아하는 것도 닮지 마라. 반대로 이웃나라와 화친하도록 노력해라. 신의 은혜에 보답해라. 신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말거라. 백성으로 하여금 신을 경배하게 해라. 늘 좋은 충고를 따르도록 해라. 백성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라. 애통하게도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구나.”
태왕왕 루이 14세(1638-1715)가 영면을 앞두고 다섯 살짜리 후계자에게 남긴 유언이다. 자신의 통치 전반에 대한 반성과 함께 후계자에게 주는 진솔한 당부가 담겨 있다.
루이 14세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영광에 대한 그의 지나친 집착에서 비롯되었다. -51쪽

고작 다섯살짜리 후계자에게 남기기에는 지나치게 심각하고 무거운 이야기이다. 그만큼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뼈에 사무쳤다는 얘기일 것이다. 어려서 임금이 된 루이 14세의 재위 기간은 조선의 인조, 효종, 현종, 숙종까지 겹친다. 절제의 미가 있었던 조선의 궁궐을 떠올리면 화려한 베르사유궁은 무척 대조적이다.
그림 또한 마찬가지다. 그림 속 루이 14세는 아래쪽을 내려다 보고 있고, 그 바람에 그림을 보는 이들은 그를 우러러 보게 되어 있다. 모델과 관객 사이의 우열 관계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다.
매끈한 루이 14세의 다리를 보니 영화 '왕의 춤'이 떠오른다. 앞부분 보다가 잠들었는데 다시 도전해야겠다.^^

 

 

자파의 페스트 병원을 방문한 나폴레옹(앙투안 장 그로, 1804,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 원정 당시 나폴레옹의 부대는 페스트로 인해 병사들이 쓰러지는 곤경을 겪었다. 시리아의 자파에 있던 모스크를 병원으로 개조한 뒤 거기에 환자들을 수용했는데, 그림은 바로 그 병원을 찾은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이 인상적인 것은 화가가 나폴레옹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렸다는 것이다. -85쪽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기 직전에 공개되었다. 미술사적 평가와 별개로 이 그림이 얼마나 세심하게 전략적으로 쓰였는지를 알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견되는 나폴레옹의 등장이라니... 한편으로는 아찔하고, 한편으로는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자크 루이 다비드, 1805-1807,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 그림 역시 나폴레옹의 홍보 전략이 빛을 발하는 그림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린 황제의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교황이 관을 씌워주는 관례를 거부하고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에 관을 씌웠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황제라는 듯이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다비드는 애초에 이 장면을 나폴레옹이 직접 자기 머리에 관을 씌우는 모습으로 그리려 했으나, 구성상으로 또 기록적인 측면에서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을 썼던 황제가 그것을 벗어 다시 황후에게 씌우려는 장면으로 구성을 바꿨는데, 문제는 황제를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화가는 조제핀에게 황제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고 자신이 황제와 더불어 그림의 실질적인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 조제핀은 이 일에 적극 나서 마침내 지금의 그림이 탄생했다. -93쪽

화가도 나폴레옹만큼이나 영리했다. ^^
번호를 소개하겠다.
1. 나폴레옹 황제
2. 조제핀 황후
3. 어머니 마리아
4. 형 조제프
5. 동생 루이
6. 여동생들 카롤린, 폴린, 엘리사
7. 조카 루이 나폴레옹
8. 샤를 프랑수아 르브룅
9. 장 자크 레기 드 캉바세레스
10. 루이 알렉상드르 벨티에
11. 탈레랑
12. 뮈라
13. 교황 피우스 7세(비오 7세)
14. 화가 다비드
15. '카이사르의 유령'으로 불리는 인물

각각의 인물들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다.^^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일리야 레핀, 1885,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좋아하는 일리야 레핀의 그림이다. 제 손으로 아들을 죽인 이반 뇌제의 충격어린 눈빛이 강렬하다. 사건은 사소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며느리인 태자비가 입고 있던 옷이 차르가 보기에 정숙하지 않았다. 임신 중이던 태자비는 몸을 움직이기에 좀더 편한 옷을 입고 있다가 갑자기 행차한 시아버지를 맞으러 나갔다가 진노한 차르에게 걷어차이고 말았다. 놀란 태자가 아버지를 말리려다가 더욱 격분한 차르의 지팡이에 관자놀이를 맞고 닷새 뒤 사망한 것이다. 태자비도 유산 끝에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능하고 강력한 통치자이기도 했지만 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은 그를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군주의 한사람으로도 만들었다. 그의 생은 영광 뒤에 겹쳐진 고독과 자기 혐오, 그리고 외로움으로 뒤덮였을 것만 같다. 그림 속 저 표정처럼...

 

사형수들에게 독약을 시험하는 클레오파트라(알렉상드르 카바넬,1887,개인 소장)
클레오파트라의 연회(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742-1743년경,파리,코냐크 제 박물관)

그리스인의 피를 이어 받은 라지드 왕가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는 전형적인 이집트인의 인종적 특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라지드 왕가 사람들은 이집트어를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일상에서 그리스어를 쓰고 그리스 풍의 옷을 입고 그리스 식으로 살았다. 다만 클레오파트라는 민간 이집트어를 배워 말할 줄 알았고 이집트의 종교와 전통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그럼에도 두 개의 그림 중 첫번째 그림이 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두번째 그림은 제목을 보지 않고는 좀처럼 클레오파트라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 그림은 거금을 들여 정찬을 차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클레오파트라가 식초 항아리에 자신의 값비싼 진주귀고리를 집어 넣고는 녹여서 마신 일화를 담은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그녀의 대범함에 놀랐음은 당연하다.

그나저나, 그 진주 귀고리.... 아깝네...^^

 

 

퐁파두르 부인(모리스 켕탱 드 라투르, 1755, 파리, 루브르 박물관)
퐁파두르 부인(프랑수아 부셰, 1756,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똑같은 모델을 비슷한 구도로 그렸지만 두번째 부셰의 작품이 더 마음에 든다.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로 이미 홀딱 반했기 때문일 것이다.(이 책 최근에 개정판 나왔다!)

교양과 지성미로 통하는 퐁파두르 부인인 만큼 주변 소품들도 그런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책과 악보, 악기, 그림에 지구본까지...

과거 유럽에서는 퐁파두르 부인처럼 왕이나 귀족, 권력자의 정부가 된 사람을 코티잔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일반적인 정부와 달랐고 창부들과도 구별된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높은 지위의 후원자들과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그 관계가 사회적으로 공인된 이들이었다.

고급 코티잔이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용모뿐 아니라 교양과 재능, 품성, 센스, 위트를 두루 갖춰야 했다. 따라서 높은 지위의 후원자에게 선택될 때 그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은 결국 그녀가 어떻게 양육되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고급 코티잔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유부녀인 경우도 많았는데, 어차피 코티잔이 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익을 따라 한 남자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므로, 심지어 자기 남편의 신분 상승 혹은 지위 상승을 위해서도 다른 남자의 코티잔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바라는 이득을 얻으면 상호 양해하에 후원자와 깨끗이 헤어졌다. 후원자들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코티잔에게 헤어질 때 이처럼 원하는 보상을 해주거나, 다른 유력한 후원자를 소개하거나 경제적인 보상을 해주곤 했다.
이처럼 유럽에서 코티잔 문화가 발달한 것은 정략결혼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권력자들이나 귀족의 경우 가문과 혈통, 재산을 잇기 위해 정략적으로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정서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을 이렇듯 혼외의 파트너에게 찾게 된 것이다. 이것이 궁정문화와 귀족문화에 녹아들어 공식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코티잔이었다. -169쪽

아아아, 두번째 드레스 참 예쁘다. 곱구나....!

 

 

일출(프랑수아 부셰, 1753, 런던, 월리스 컬렉션)
일몰(프랑수아 부셰, 1752, 런던, 월리스 컬렉션)

두 장의 그림을 함께 보아야 제맛인 작품이다. 태양의 신 아폴로가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바다의 요정들을 떠나는 장면과 돌아와 그들의 환영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아폴로는 루이 15세를 상징하고, 테티스 여신은 퐁파두르 부인을 상징한다. 해가 바다에서 떠오르고 바다로 돌아가는 영원한 숙명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정부'라는 단어로 설명하기엔 너무 부족한, 두 사람의 우정을 담은 인생의 여정이 느껴진다.

 

운명의 여신에게 퐁파두르 부인의 목숨을 연장해달라고 호소하는 예술들(카를 방로, 1764, 포틀랜드 미술관)

퐁파두르 부인은 1764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부인의 죽음은 루이 15세 뿐아니라 프랑스의 예술가들도 슬프게 만들었다. 그만큼 그녀가 예술계에 보낸 후원과 지원이 큰 격려가 되었던 것이다. 너무 이른 그녀의 퇴장에 대한 슬픔을 카를 방로는 이렇게 멋진 그림으로 표현했다. 운명의 여신이 가위를 들어 부인의 명줄을 끊으려 하자 아폴로와 주위의 조각, 회화, 건축, 음악이 간절한 자세로 그러지 말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한 시대 문화예술의 토3대를 다진 이에게 보내는 감사이자 그 업적에 대한 극진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불후의 명곡에서 임태경이 패티김에게 보냈던 경의가 떠오른다.

 

하렘의 빛(프레더릭 레이턴 경, 1880년경, 개인 소장)
노예시장(장 레옹 제롬, 1871, 신시내티 미술관)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기원전 26세기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쿠푸는 피라미드를 세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딸에게 몸을 팔게 했다고 한다. 기원전 18세기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창부를 포함한 여성의 상속권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법조문에 등장하는 창부에 관한 언급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하겠다. 기원전 7세기 바빌로니아에서는 부유한 시민들의 주요 수입원 가운데 하나가 여자노예를 통한 윤락사업이었다. -171쪽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여인의 모습이 무척 관능적이다.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취한 듯 몽롱한 얼굴이다. 눈부신 느낌으로 처리한 빛도 그 미모를 더욱 빛나게 한다.

두번째 그림에는 비참한 제 모습에 절망에 빠진 노예와, 자신의 관능을 부각시키기 위해 거의 모델 포스로 서 있는 여인을 함께 볼 수 있다. 노예시장에 매물로 나온 노예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신이 팔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노예는 상인의 기분에 따라 강간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알고 나니 여인의 도발적인 포즈가 쉽게 이해가 간다. 제국주의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 서구 앞의 동양은 마치 이 여인같은 재물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울컥하게 만든다. 

 

흑사병(아르놀트 뵈클린, 1898, 바젤 미술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이 있는 자화상(아르놀트 뵈클린, 1872, 베를린, 국립 고전 미술관)

흑사병에 대한 유럽인들의 오랜 공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림이다.

흑사병이 심하게 돈 14세기에는 심지어 당시 유럽 인구의 1/3이 제물로 사라지기도 했다. 1348년 평균수명이 25세였던 영국인들은 1376년 평균수명이 17세로 내려갔다. 그 공포스러운 현실 앞에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지옥의 목구멍까지 들여다본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더 이상 과거의 관습과 문화를 그대로 유지해갈 수 없었다. -213쪽

같은 사람이 그렸는데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똑같이 죽음이 지배하는 그림이긴 하지만...
전염병으로 자녀를 잃은 화가의 우울함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에게 영감을 준 존재는 뮤즈가 아니라 이처럼 죽음이었다. 화가의 귓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죽음이라니, 섬뜩하면서 어쩐지 시적이다.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죽음을 한 사람의 배우로 표현한 부분이 떠오른다.

작곡가 말러는 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교향곡 4번, G장조'의 스케르초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림 속 죽음의 느낌을 음악에서 그대로 살리기 위해 말러는 바이올린 솔로이스트로 하여금 바이올린을 부적절하게 튜닝해 연주하도록 했다고 한다. 찾아서 들어봐야겠다.

 

사치를 조심하라(얀 스테인, 1663, 빈 미술사 박물관)

 

제목이 아주 적나라하다. 어수선해 보이는 집에서 한 여인이 졸고 있꼬, 그 사이에 집안이 온통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다. 식탁 위의 음식은 개가 먹어치우고 있고, 아기는 값비싼 목걸이를 갖고 놀고 있다. 집안에서 돼지가 활개를 치고 다니고 손님으로 온 이들도 어지럽게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부유한 집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막 살면 순식간에 쫄딱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직접적으로 보여준 그림이라 하겠다. ^^

 

마라의 죽음(자크 루이 다비드, 1791, 브뤼셀, 벨기에 왕립 미술관)

 

김영하의 책에서 이 그림을 표지로 쓴 것을 봤던 것 같은데 제목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읽었던 게 아니라 그 책의 표지를 보고 친구가 이 그림 아냐고 질문을 했던 것으로 묶여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그림은 익숙하다. ^^ 고대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그림을 많이 그린 다비드는 프랑스 대혁명 당대를 살면서 해당 시대의 역사화도 그렸다. 그림의 주인공 마라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뱅당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피부가 좋지 않았던 그는 욕조에서 업무를 볼 때가 많았는데, 업무 중에 지롱드당 지지자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당했다. 마라와 다비드의 이름이 오른쪽 아래쪽에 선명하게 보인다. 이 그림을 보니 오래 전에 읽은 김혜린 작가의 '테르미도르'가 떠오른다.^^

 

'역사의 미술관'은 역사와 '미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영리하게 잡은 책이다. 그림 속의 역사와 역사 속의 그림이 잘 만났다. 그림에 얽힌 이야기 뿐 아니라 그 시대를 조명하는 역사적 흐름을 잡아주는 것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 덕분에 책 한권을 읽었는데 통사로서의 역사책도 보고 미술책도 보고 풍속사로서의 면면을 본 충족감이 든다. 이제껏 읽은 이주헌 씨의 책 중에서 만족도가 가장 컸다. 모처럼 맛있게, 그리고 영양가 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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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1 0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1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12-06-0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퐁파두르 부인이, 그 닥터 후 에피소드의 그 우주선 이름이었던 기억이 -_-;;;

마노아 2012-06-01 16:14   좋아요 0 | URL
닥터 후를 보지 못해서 전혀 모르는 얘기인데, 아무튼 우주선 이름이란 말이죠?
전 율리시스 만화에서 오디세이 우주선이 떠올라요.^^

별족 2012-06-01 16:29   좋아요 0 | URL
저도 어쩌다 본 건데 그 때. 퐁파두르 부인은 누굴까,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마노아 2012-06-02 10:39   좋아요 0 | URL
베르사이유의 장미 때문에 뒤바리 부인이 더 먼저 떠오르긴 했는데 아무래도 퐁파두르 부인이 더 유명하긴 하죠.^^
 
나에게도 사랑을 주세요 고 녀석 맛있겠다 시리즈 5
미야니시 타츠야 글.그림, 허경실 옮김 / 달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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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센 공룡의 대표명사 티라노사우루스!
공룡이라면 자신처럼 힘이 세야 한다고, 그게 최고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티라노사우르스!
약한 이들은 겁쟁이라고 놀렸고, 자기 힘만 믿고 친구들을 거침 없이 괴롭혀 왔다.

모두들 티라노사우르스를 멀리 하고 두려워 했다.
하지만 티라노 역시 시간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하는 법!
나이 먹고 힘이 떨어지자 작은 공룡들에게도 조롱을 받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꼬리를 덥석 물리고 말아 아팠지만 늙고 힘빠진 티라노사우르스를 이제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더 이상 무리 속에 있지 못하게 된 티라노사우르스는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났다.
외롭고 슬프고, 물린 꼬리가 아프기까지 했지만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지쳐 잠이 들었던 티라노사우르스를 누군가가 깨웠다.
세상에나! 평소 맛있게 먹어치웠던 트라케라톱스가 아닌가!
습관대로 냉큼! 삼키고 싶었지만 새빨갛게 부어오른 꼬리 때문에 비명부터 나왔다.

작고 어린 트라케라톱스는 다쳐서 낑낑 대는 이 커다란 공룡의 정체도 모른 채 귀여움을 떨었다. 상처난 꼬리를 어루만져 주기도 했다. 커다란 공룡 아저씨가 안아 주니 신이 난 트라케라톱스는 친구들에게 새롭게 사귄 이 아저씨를 소개해주기로 했다.
어린 트라케라톱스들은 이 낯선 공룡을 환대해 주었다. 한꺼번에 포식할 수 있다고 좋아했던 티라노사우르스는 졸지에 작고 어린 친구들이 한꺼번에 많이 생기고 말았다.

어린 트라케라톱스들은 상처 입은 공룡 아저씨에게 자신들이 좋아하는 빨간 열매를 따주기 위해서 작은 머리를 나무에 콩콩 박았다. 하지만 나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힘센 티라노사우르스가 머리를 쾅 박자 열매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파서 눈물이 났지만 좋아서 환호하는 어린 친구들 앞에서 티라노사우르스는 아픈 내색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픈 몸과 달리 마음은 감동으로 따뜻하게 차올랐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런데 이때! 불청객들이 등장했다. 기가노토사우루스 두 마리가 눈을 번뜩이며 다가온 것이다. 처음에 티라노사우르스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트라케라톱스들을 맛좋은 먹잇감으로 보면서 말이다.
졸지에 티라노사우루스는 트리케라톱스들을 지키기 위해서 온몸을 바쳐 싸우게 되었다.
힘이 최고라고 믿어온 일생을 뒤집는, 숭고한 자기 희생의 순간이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야 티라노사우루스는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시간이 흘렀다. 어린 트라케라톱스는 어엿한 아빠가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숲에서 빨간 열매를 먹고 있을 때 기가노토사우루스 두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자신보다 체격이 큰 공룡들이었지만 어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트라케라톱스는 온 힘을 다해 버텨냈다. 그 옛날 티라노사우루스 아저씨가 자기와 친구들을 지켜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이어지고 전염이 되고 계승되었다.

트라케라톱스는 어린 아이들에게 힘이 최고가 아니라 사랑이 최고로 중요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아이들도 자라가면서 그 사랑을 몸으로, 마음으로 돌려줄 것이다. 그 싹이 이미 자라고 있다. 아이가 말했던 것이다.
"저에게도 그 사랑을 주세요."

'고녀석 맛있겠다' 시리즈 다섯 번째 이야기다. 첫번째 이야기가 가장 감동 깊었지만 이어지는 시리즈도 모두 메시지가 훌륭해서 여러 차례 읽게 된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말해주곤 하는 미야니시 타츠야의 작업에 늘 박수를 보낸다. 사람은 등장하지 않지만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힘주어 이야기한다. 그 깊은 울림을 오래오래 되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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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럭’하는 성질, 증조할아버지 때문이라고?

 

제 1615 호 / 2012-05-28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큰 일도 대범하게 넘기거나 사소한 일에도 크게 반응하는 등 사람마다 반응이 다른 까닭은 성격과 스트레스를 견디는 정도(역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작은 일에 화를 내며 참을성 없는 태도를 드러내는 성격이 증조할아버지 대에서 무심코 사용한 농약 때문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오스틴 텍사스대 데이비드 크류 박사와 워싱턴주립대 마이클 스키너 박사 공동연구팀은 농약에 노출된 쥐들의 3세대 뒤인 증손자 쥐들의 행동과 성격을 분석했다. 그 결과, 스트레스를 잘 받고 화를 잘 내는 이상 성격이 발현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연구진이 사용한 농약은 딸기와 오이 같은 과일 및 채소에 생기는 잿빛곰팡이병을 방제하기 위해 흔하게 사용되는 ‘빈클로졸린’이라는 방제약. 이 농약은 특히 호르몬과 관련한 내분비계 장애를 일으킨다고 해서 환경호르몬 농약으로 분류돼 있다.

연구진은 빈클로졸린 성분이 후대의 성격과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새끼를 밴 암컷 쥐들에게 빈클로졸린을 노출시킨 뒤, 이 쥐들의 3세대 뒤 증손자 쥐들을 대상으로 행동테스트를 실시했다. 그 결과 빈클로졸린에 노출된 쥐들의 증손자 쥐들이 일반 쥐보다 스트레스에 약하고 화를 잘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연구진은 뇌 영상을 통해 빈클로졸린이 유입된 쥐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반응하는 뇌 영역이 일반 쥐보다 활발하게 반응한다는 것도 추가 확인했다. 증손자 쥐들이 스트레스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 물리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데이비드 크류 박사는 “쥐 실험을 통해 인류가 지난 세대에 사용한 환경호르몬 농약이 현재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며 “이전 세대보다 현대인들에게서 조울증이나 자폐 같은 정신 질환이 많이 발견되는 이유도 선대에서 유입된 화학적 합성물질이 일으킨 영향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결과는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2012년 5월 21일자에 발표됐다.

 

출처 : 과학향기

 

술 마신 사람은 모기의 표적?  

제 1617 호/2012-05-28

모기는 사람의 땀 냄새와 호흡할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 냄새를 맡고 달려든다. 그런데 술 마신 사람을 유독 좋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술이나 단백질이 체내에서 분해될 때 요산과 암모니아가 생기는데, 이 냄새도 모기를 끌어들인다. 고신대학교 보건환경학과 이동규 교수는 “술을 마신 뒤 입이나 피부에서 나오는 요산 등의 대사물질이 표적이 되기 쉽다”며 “나이 든 사람보다 젊은 사람이 잘 물리는 것도 대사활동이 활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모기를 되도록 피하기 위해선 술냄새, 땀냄새를 없애기 위해 잠들기 전 씻는 것이 좋다. 그렇더라도 입 안에 남아 있는 유인 성분을 모기가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모기 퇴치제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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