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한자카드 500 - 한자능력검정시험 8~5급 만점 획득 학습카드
손바닥공간 편집부 지음 / 은파윈쓰리(손바닥공간) / 2011년 6월
절판


한때는 한자 공부에 무척 열중했던 조카가 근래에는 관심이 많이 시들해졌다. 기껏 익힌 글자도 다 잊을까 봐 조바심이 났는지 언니가 이 책을 주문했다.

한자능력검정시험 8~5급 대비자 및 유아 및 초등 대상 한문 학습자를 위한 한자카드로 총 50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8급 한자 50字, 7급 한자 100字, 6급 한자 150字, 5급 한자 200字로 되어 있다.

상자를 열어 보면 저렇게 여러 개의 묶음이 들어 있다.
명함 카드 정도의 크기다.

한자의 획수와, 쓰는 순서가 알아보기 쉽게 그려져 있는 것이 마음에 든다.
뒷면에는 한자의 의미가 가리키는 바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검을 흑인데, 멀리서 보면 꼭 한 마리 벌레 같다..;;;;

비교하기 쉽게 마법천자문의 부록 카드 사진도 같이 올려본다.
아이들 취향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많이 조잡해 보인다.
색도 여러가지고 내용도 여러가지가 섞여 있어서 한눈에 들어오기보다 좀 어지럽게 보이는 편이다.
조카 공부하는 것 보면서 나도 틈틈이 카드를 뒤적이며 한자 공부 좀 해야겠다.
조카가 문제 낸다며 한자 들이밀면 크게 당황할 수가 있으니 대비가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2)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USION 과학

제 1623 호/2012-06-06

건축물에 자연의 숨을 불어넣다, 가우디

‘신이 지상에 머물 유일한 거처’, ‘미완성인 상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건축물’. 이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교회(사그라다 마필리아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ilia)를 가리키는 말이다. 1882년 착공해 130여 년째인 2012년 올해도 여전히 공사 중이고 언제 완공될 지 기약도 없다.

이 건축물을 설계한 이는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Antoni Gaudi y Cornet, 1852.06.25 ~ 1926.06.10)다. 1883년 성가족 교회 공사 총 감독에 취임한 가우디는 일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는데 말년엔 교회에서 먹고 자며 일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 1926년 6월 10일, 자신의 일터이자 작품인 성가족 성당 바로 앞길에서 전차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그의 생은 불행하게 끝났지만, 성가족 교회를 비롯한 그의 건축물 중 7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있다. 그는 현재 20세기가 낳은 가장 독특하고 천재적인 건축가로 추앙 받고 있다.

밀가루로 반죽한 듯한 구불구불한 외형과 척추동물의 몸속에 들어온 듯한 실내. 직선으로 이루어진 반듯한 건축물에 익숙한 이들에겐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의 건축물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가우디의 건축물에는 직선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괴테 자연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떤 건축사조에도 속하지 않았던 가우디에게 스승이 있다면 그건 자연이었다.

사실 과학기술은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자연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왔다. 자연은 단순한 재료, 단순한 방식으로 가장 효과적인 결과물을 얻어낸다. 최근 과학계에선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 생체모사(bioinspiration)와 자연을 모방하는 바이오미메틱스(biomemetics)에 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소리를 내지 않고 하늘을 나는 외양간올빼미, 깊은 바닷속에서 소통하는 돌고래, 어둠 속에서 청각을 이용해 길을 찾는 박쥐, 물방울을 이용해 표면 오염을 제거하는 연꽃잎 등은 수많은 공학품에 영감을 주고, 해결책을 알려주고 있다. 가우디는 이러한 생체모사, 모방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가우디의 건물 내부에는 동물의 뼈, 야자수, 곤충, 해골을 연상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성가족 교회 본당 회중석 천장은 식물 줄기를 지지하는 잎사귀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타일로 장식된 화려한 외관은 짚을 지은 뒤 조개껍질로 인테리어를 하는 정원사 새를 닮았다. 그는 아무리 아름다운 돔이라도 해골의 내부에 비할 수 없고, 산이 가진 완벽한 안정성을 따라갈 건물은 없다고 여겼다.

가우디 건축은 인간이 만든 어떤 기하학적인 건축보다 동물의 건축에 가까워 보인다. [생물의 건축학]의 저자 하세가와 다카시는 가우디 건축과 동물의 둥지가 연결 되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한다. 하나는 동물의 둥지를 닮은 내부와 외부다. 동물의 둥지는 자연에서 재료를 끌어보아 조립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옹색하고 기이한 모양이지만, 내부는 둥지 주인의 생활과 재난 대비에 알맞은 공간이다. 가우디의 건축물 역시 겉모습이 낯설고 기이한 것과는 달리 내부는 온화하고 쾌적한 느낌을 준다.

[그림 1] 130여 년 째 공사가 진행 중인 성가족 교회. 사진 제공 : 위키미디어

공학적으로 더욱 중요한 또 하나의 특징은 가우디의 거대 건축물에 적용된 중력에 대한 고민이다. 인류가 만들어온 건축물은 다양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 땅을 다지고 기둥을 세운 뒤 지붕을 얹는 방법이다. 하지만 동물의 건축은 이렇게 일으켜 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아래로 늘어뜨리는’ 방법을 택한다. 야자수와 바나나에서 섬유를 빼내 집을 뜨개질하는 베짜기새의 둥지가 대표적인 예. 가우디의 건축물에도 이런 늘어뜨리기 기술이 적용돼 있다.

가우디는 구엘 성지 교회의 매달린 사슬 형태를 만들기 위해 설계에만 10여 년의 시간을 바쳤다. 강철이나 시멘트 등의 공업화된 건축재료와 복잡한 구조학 계산 방식도, 컴퓨터를 통한 시뮬레이션도 가능하지 않았던 시대, 가우디가 거대한 건축물을 만든 힘은 모형을 이용한 구조실험에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물에는 아치형 다리가 거꾸로 매달린 듯한 형태가 보인다. 그는 쇠사슬을 묶는 고정점과 길이, 무게라는 3가지 요소를 고려해 가장 능률적인 아치 형태를 거꾸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천장에 매달린 쇠사슬이 늘어지고 서로 연결돼 하중을 버티도록 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해결책은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모형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찾았다.

가우디는 긴 와이어로프의 마디마디에 모래자루를 달아 옆으로 당겨 그 견디는 힘의 구조를 계산했다. 그리고 그 모양을 건물 디자인에 그대로 적용했다. 모래 자루의 무게로 인해 로프가 늘어지는 모양에 따라 건물 전체의 구조가 결정됐고, 그 형태에 대한 압력과 하중을 계산해 기둥의 위치와 숫자를 정해 나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험 모델을 180도 돌려보면 이 구축물의 윤곽선은 가우디가 그린 구엘 교회 스케치와 유사하다.


[그림 2] 가우디의 늘어뜨린 모델을 재현한 것. 성가족 교회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의 실제 작업 모델은 스페인 내전 중 소실됐다. 사진 제공 : 위키미디어

이렇게 늘어뜨린 기법(현수선 기법)은 스페인 카탈로니아 지방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돼 오던 건축 기법이었다. 계단 등 건축물의 일부 구조에만 사용되던 것을 가우디가 건축물 내부와 외부 전체로 확장한 것이다.

가우디 건축의 비밀을 풀기 위해 현대 과학자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 MIT공대 건축학과 악셀 킬리언 교수와 존 오웬도르프 교수는 지난 2006년 가우디 설계의 기법을 응용한 컴퓨터 설계 툴을 세상에 내놨다. ‘파티클 스프링 시스템(Particle-spring system)’이라 명명된 이 소프트웨어는 외관에 실리는 하중을 계산하는데 쓰이는데, 쇠사슬의 길이와 무게, 고정점의 위치 등을 데이터로 입력하면 구조물의 가장 효율적인 형태를 추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MIT 공대의 프로젝트인 ‘현수선CAD(Catenary CAD, CADenary)’라는 건축 디자인 툴은 가우디 건축 기법을 이용하는데 더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 간단한 동영상을 통해 가우디의 늘어뜨리기 기법이 어떻게 다채로운 모양의 건축물 디자인으로 완성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http://vimeo.com/9662024)

“모든 것은 자연이 써 놓은 위대한 책을 공부하는 데서 태어난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작품은 모두 이 위대한 책에 쓰여 있다. 이 책은 전 인류에게 주어져 있으나, 이것을 읽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며 또 노력을 기울이기에 합당한 책이다.”

가우디가 남긴 말이다. 우리의 손에도 그 위대한 책이 주어졌음은 물론이다.

<가우디의 작품들>



[그림 3]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구엘 공원 입구, 성가족교회의 내부 석조 기둥, 구엘 공원 전경. 사진 제공 : 위키미디어



글 :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노아 2012-06-1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찬가지로 직선을 거부한 훈데르트 바서도 떠오른다.
http://blog.aladin.co.kr/manoa/4590359
 

   FOCUS 과학

제 1619 호/2012-06-04

서울서 부산까지 90분…‘해무’가 온다!

“자, 이제 차세대 고속열차 ‘해무’가 등장합니다!”

2012년 5월 16일 경남 창원중앙역에 날렵한 모양을 한 열차가 등장했다. 지난 2007년부터 5년간 50여 기관의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해무(HEMU-430X)다. 최고 시속 430km까지 달릴 수 있는 이 열차를 타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1시간 30분 만에 갈 수 있다. 현재 KTX보다 1시간 정도 단축된 시간이다.

이 날 해무는 권도엽 국토해양부 장관 등 20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창원중앙역 근처 28km를 달렸다. 좌석 사이의 간격을 넓혀 KTX에 비해 눈에 띄게 넓어진 공간과 무엇보다 안락하고 편리한 승차감이 승객들을 사로잡았다.

해무는 KTX 일반좌석에 비해 좌석 앞에 공간이 많아 발을 앞으로 뻗을 수 있고, 비행기처럼 좌석마다 액정표시장치(LCD) 화면도 설치됐다. 덕분에 영화와 뉴스를 보는 것은 물론 다양한 서비스도 즐길 수 있다. 가령, LCD 화면에 있는 ‘호출’ 버튼을 누르면 승무원을 부를 수 있고, 전자태그(RFID)에 열차표를 인식시키면 도착역이 근처에서 “도착 5분 남았습니다” 하는 알람도 가능하다.

지능형 스마트 센서를 달아 객실공기나 화장실 긴급 상황 등도 자동으로 감시해줘 여행을 더 편리하게 돕는다. 이런 서비스 덕분에 해무를 ‘선로 위의 항공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항공기 기내 서비스처럼 편하고 만족스럽다는 뜻이다.

해무를 선로 위의 항공기로 부르는 진짜 이유는 빠른 속도에 있다. 겉으로 보면 조금 더 날렵하고 세련된 정도인 이 열차는 KTX보다 무려 시속 100km 이상 빨리 달린다. 덕분에 해무가 상용화되는 2015년 이후에는 전국 어느 곳이든 1시간 30분대에 도착할 수 있다. 승객 입장에선 항공기만큼 빠른 교통수단을 타는 셈이다.


[그림 1] 차세대 고속열차 ‘해무’ 시제차량. 사진 제공 : 한국철도기술연구원


KTX보다 세련된 모습이기는 해도 똑같은 기차 모양인데 시속 100km나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첫 번째 비결은 바로 해무의 영어 이름인 HEMU-430X에 숨어 있다. HEMU-430X는 ‘동력분산식 차량(High-speed Electric Multiple Unit 430km/h eXperiment)에서 한 글자씩 따 온 것인데, 이는 열차를 이루는 개별 차량마다 엔진을 달아 힘을 내는 방식이다. 기차의 모든 차량이 함께 앞으로 달리니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데,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기차 속도에도 적용된 셈이다.

우리가 주로 봤던 고속열차 KTX와 KTX-산천은 열차 맨 앞과 뒤에 있는 기관차가 전체 차량을 끌어가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을 ‘동력집중식’이라고 하는데, 시속 300km 이상 빠른 속도를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을 비롯한 연구진은 각 차량마다 엔진을 붙이기로 했다. 기존 KTX-산천은 1100kW짜리 엔진 8대(8800kW)가 열차 앞뒤에서 힘을 내지만, 해무는 410kW짜리 엔진 20대(8400kW)가 각 차량에서 제각각 힘을 낸다. 전체 힘의 크기는 비슷하지만 힘을 모으느냐 나누느냐만 달라진 것이다.

방식만 조금 달라졌을 뿐이지만 속도 면에서는 큰 차이가 났다. 해무의 최고 속도는 시속 430km로 KTX-산천보다 시속 130km나 빠르다. 속도를 높이거나 낮추기도 쉬워졌다. 기존 고속열차가 시속 300km까지 속도를 내는 데 걸린 시간은 4분 정도였지만 해무는 233초(약 2분)면 이 속도에 도달할 수 있다. 역과 역 사이의 거리가 짧아 자주 서야 하는 우리나라 철도 시스템에는 가속과 감속이 유리한 해무가 훨씬 더 잘 맞는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앞뒤에 기관차 대신 일반 차량을 붙여도 돼 승객이 탈 수 있는 공간도 많아졌다. 동력분산식 열차의 경우 엔진을 작게 만들어 아래쪽에 배치하기 때문에 사람이나 화물을 많이 실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해무의 전체 좌석 수도 KTX-산천보다 16% 정도 많아졌다.

열차 고장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기관차 한 대나 두 대로 운행하는 동력집중식 열차들은 기관차에 문제가 생기면 전체 열차가 꼼짝 없이 멈춰야 한다. 하지만 동력분산식의 경우는 한 두 대의 차량이 고장 나도 전체가 움직이는 데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다음 비결은 날렵한 열차 머리 모양에 있다. 해무의 머리는 열차가 빠르게 달릴 때 받을 수 있는 공기 저항 등을 계산해 만들었다. 덕분에 시속 300km로 달릴 때 공기 저항을 약 10% 정도 줄일 수 있다. 이는 곧 연료를 적게 쓰는 것으로도 이어져 에너지 효율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림 2] 해무의 머리 모양은 열차가 빠르게 달릴 때 받을 수 있는 공기 저항 등을 계산해 만들어졌다. 사진 제공 :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열차를 가볍게 만든 것도 속도에 영향을 주었다. 해무는 단단하지만 두께가 얇은 ‘알루미늄 압출재’로 만들었다. 덕분에 KTX-산천보다 5% 정도 가벼워졌다. 이렇게 가벼워진 열차는 철도 노선에도 무리를 덜 주어 노선수리비를 줄이는 데도 한 몫 할 수 있다.

하지만 동력분산식 열차도 몇 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다. 아무래도 각 차량마다 엔진을 붙이다보니 그만큼 제작비가 많이 든다. 또 부품 수가 늘어나고 구조가 복잡하다 보니 유지 보수가 까다롭고, 각 차량마다 들어가 있는 엔진 때문에 소음과 진동이 심할 수 있다.

해무는 오는 하반기까지 최고 시속 430km까지 높이는 시험을 계속하며 소음과 진동을 더 줄이는 등 기술을 보완할 예정이다. 10만km 주행시험이 완료되는 2015년 이후에는 일반인도 해무를 타고 여행할 수 있을 전망이다.

시속 430km로 달릴 수 있는 차세대 고속열차 해무의 개발로 우리나라는 관련 기술의 약 83.7%를 국산화했다. 우리만의 독특한 기술을 활용해 싸게 만들 수 있고 에너지 효율도 높은 시속 500km급 ‘바퀴식 고속열차’ 개발도 눈앞으로 다고오고 있다.

이미 1988년에 시속 407km로 달리는 열차를 개발한 독일과 1996년 시속 443km급 열차를 만든 일본, 2007년 시속 575km까지 속도를 내는 열차를 가진 프랑스, 2010년 시속 486km로 주행하는 데 성공한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빠른 열차 해무를 개발한 한국. 우리나라가 세계 고속철도 시장에 당당히 서는 날을 기대해 본다.

글 : 박태진 과학칼럼니스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석가탄신일은 휴일이었고, 모처럼 집에 있던 날이었다. 되도록 약속을 잡아서 나가려고 했던 것은, 집에 있으면 이래 저래 부딪히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좁은 공간에 갑자기 늘어난 식구, 높아진 소음 등이 저절로 그렇게 만들었다. 언니네가 들어오고 한달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는데 기어이 충돌이 있었다. 엄마랑 언니랑 대판 싸웠는데 불똥은 나한테 튀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경우다. 잠 못 이루는 며칠을 보내야 했다.

 

2. 화요일에는 월요일이 휴일이어서 하지 못한 전체 교직원 회의를 수요일에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아아, 한주도 건너 뛰지를 않는구나. 둘째를 출산한 친구에게 가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했는데, 개화산 역에서 회의가 잡혔으니 친구에게 가보기로 결심했다. 회의 시작은 7시 반, 나는 5시 반에 기상해서 6시에 집에서 출발했다. 회의는 8시 40분에 끝났다. 전날 늦게 퇴근하고 다음날 일찍 출발했으니 선물 살 시간이 없었다. 시간도 많이 떴고, 선물도 사기 위해서 김포공항 역으로 갔다. 그 시간에 맞춰 볼 수 있는 영화는 '스노우 화이트 앤더 헌츠맨' 정도였다. 별 기대 없이 보았지만, 역시 별로 볼 것 없이 끝났다.(이 영화는 왜 만든 걸까?)

 

3. 배가 고팠다. 전날 롯데리아 콤보 세트를 구입해둔 게 있어서 공항에 있는 롯데리아를 가려고 쿠폰을 꺼내봤는데, 제외 매장에 떡하니 '공항'이라고 적혀 있다. 끄응..... 그래서 옥탑방 왕세자를 추억하며 오무라이스를 시켰다. 아, 기름만 좔좔 흐르고 맛은 없다. 느끼해...;;;;; 공항 쇼핑몰에서 아기 내복을 구입하고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개화산 역으로 갔다. 내가 검색해 본 네이년 길찾기에서 개화산 역 1번 출구로 나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한 시간 안에 도착할 것 같다고 알렸다. 전화를 끊고 보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굽이 있는 샌들이어서 조심조심 걸었다. 1번 출구에서 235미터를 걸어가란다. 허걱, 뭐가 이렇게 멀어? 한참을 걸었는데 하필 내가 간 방향이 아니다. '방화도시개발11단지'라고 했는데 내가 가본 방향은 12단지였다. 그래서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500미터는 걸었겠지? 멀리 도로가 보이고 그 앞에 질러갈 수 있는 주차장이 보인다. 힘들어서 주차장 안으로 가로질러 가는데, 반대편에 출구가 없다. 하아... 다시 돌아 나와야 해....

 

4. 힘겹게 찾은 버스 정거장은 개화산역 2번 출구였다. 뭐 이래? 처음부터 2번 출구로 나가라고 할 것이지..;;; 투덜거리며 버스를 탔다. 세상에, 이 버스가 김포공항역을 지나간다. 게다가 몇 정거장 더 가니까 처음 타라고 했던 '방화도시개발11단지'도 나온다. 아니 그럼 개화산역에서 이 먼데까지 걸어오란 소리였어???? 여러모로 잔망스런 네이년이었다.

 

비가 점점 더 많이 온다. 김포 시청 앞에서 내렸다. 친구랑 지난 주에 통화했을 때 서울 여성 병원에 있다고 했다. 병원은 길 건너에 있었고, 육교를 건너면서 몇 호실이냐고 전화를 했다. 친구가 이렇게 대답한다. 어머 어떡하니. 난 산후조리원에 있는데... 조리원은 병원이랑 붙어 있질 않아. 하아...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비는 오고, 가방은 무거웠고, 신발도 불편했고.... 다시 육교를 되돌아 나오며 여기서 몇 번을 타면 되냐고 물으니 길 건너가서 택시 타라고 한다. 하아... 건너다가 되돌아왔는데 다시 돌아가야 해.....ㅠ.ㅠ

 

5. 다시 길을 건너서 택시를 잡았는데 승차 거부 당했다. 서울 나가는 택시란다. 멀지 않으니 마을 버스 타라고 길을 알려주신다. 마을버스는 좀 돌아가는 편이었지만, 어쨌든 친구가 있는 조리원에 도착했다. 나와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인데, 그곳에는 친구의 중학교 동창 두 명도 와 있었다. 대화하다가 알게 된 일인데, 그곳은 '계양역'에서 가까웠고, 계양역은 공항철도를 이용하면 김포공항 역에서 한 정거장이라고...ㅜ.ㅜ

 

6. 내 친구만 출산을 했지만, 그 친구의 두 친구들도 결혼은 이미 했다. 주로 부인과 질병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고, 3년 만에 만난 친구의 근황도 듣게 되었다. 친구는 결혼을 하고서 친정과 아래 위층 아파트를 살았다. 큰 애가 태어나고 둘째를 가지면서 집을 옮겨서 살림을 합쳤다고 한다. 넓은 집이었고, 친구 신랑도 사업이 잘 나가고 있었고, 여러모로 우리집 상황과는 대조적인 이야기였다. 우울한 날에 더 우울해지는 순간이었다.

 

7. 하일라이트는 학교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그곳에서 1002번 버스를 타면 송정역까지 가고, 송정역에서 화곡까지는 4정거장이다. 하여 나는 버스를 타고 피곤한 눈을 잠시 붙였다. 30분쯤 달렸을까. 방송에서 이번 역은 이 버스의 종점이라고 알려온다. 뭐라고라???? 기사님께 이 버스 송정역 가지 않냐고 물으니, 1002번이 맞기는 하지만 이 버스는 반대 방향이라고 한다. 하하하하... 이젠 눈물도 나지 않아. 오히려 웃음이 나오고.... 해서, 나는 그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반대 방향으로 한 시간을 달려야 했다. 기사님이 내가 내리기도 전에 단말기 꺼버리셔서 환승 할인도 못 받았다. 5월 달에 나는 좌석 버스도 타지 않고 택시도 타지 않고 순전히 지하철과 버스만 타고 이동했지만 교통비가 9만원이 넘게 나왔다. 먼 거리를 통근해서이기도 하지만, 과도한 삽질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슬프다.

 

8. 헬쓰를 등록했다. 그 첫날이 지난 금요일이었다. 오전 중에 신발장 주문한 것이 온다고 해서 예상보다 한 시간 일찍 센터로 이동했다. 스트레칭을 30분 하고, 인바디 체크를 하고 런닝 머신 10분을 걸었을 뿐인데 벌써 집에 갈 시간이다. 샤워도 못했다. 헌데 언니한테 연락이 왔다. 신발장이 오후에 온다고. 그래서 다시 런닝 머신을 걷다가 뛰다가 걷다가 했다. 내가 뛴 거리는 모두 4km 정도였고, 소비한 칼로리는 대략 400kcal정도? 소보루 빵 하나면 무너질 수치구나. 인바디 체크 결과 내 신체 대사는 하루에 1300 정도를 소비할 수 있다고 한다. 당연히 그 이상 먹고 산다. 근육아 근육아 잭의 콩나무처럼 자라 주렴!

 

9. 토요일에는 6개월 만에 약속이 잡힌 친구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 대략 두 시간이 남았고, 나는 그 시간에 영화 '컬러풀'을 보기로 했다. 우리 동네의 지역 도서관이자 영화관인, 맨날 나 혼자 영화 보고 나오던 바로 그곳에서 말이다. 이 극장은 해마다 5월 31일에 모든 포인트가 사라진다. 심지어 그 달에 적립한 것도 모두 사라진다. 영화를 보지 못하고 교환권으로 포인트를 바꾸고도 2900점이 날아갔다. 언니는 6900점이 날아갔다.(7000원부터 사용 가능하다.) 교환한 영화 관람권으로 컬러풀을 보러 갔는데(현장 예매만 쓸 수 있다.) 상영관 영사기 고장으로 독립 영화가 모두 상영 불가라고 한다. 난 집에서 이미 나왔고, 약속 시간까지 2시간 반이 남았고, 날은 더웠고!!!

 

그래서 전에 표를 구입해 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시회를 갔다. 세종문화회관이다. 결정적 순간의 5가지 순간이란 제목으로 구획이 나뉘어 있다. '찰나의 미학', '내면적 공감', '거자으이 얼굴', '시대의 진실', '휴머니즘'으로 구분되어 있고,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그와 관련된 각종 인쇄물과 사진, 기자증, 편지와 원고 등도 전시되어 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고, 훨씬 더 충만한 시간이었다. 다리가 좀 아팠지만 기꺼이 감수할 만한 시간이었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주말엔 도슨트가 없어서 아쉬웠다.

 

평일 오후 4시, 큐레이터의 전시설명이 있습니다.

주말은 도슨트가 없으며, 오디오 가이드로 이용 가능하십니다.
*오디오가이드 대여료 3,000원

------------------------------------------------------------------------------------

특별 추가 도슨트! (6/7~7/21)

1. 직장인을 위한 추가 도슨트: 목/금 PM7
2. 초중생을 위한 도슨트: 토 AM11

 

 

 

<국민당 최후의 날, 중국 1948>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유로크레온

 

 

<스리나가르, 카슈미르 1948>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유로크레온

여러 책자를 함께 팔고 있는데 가장 탐나는 책은 무려 99,000원이었다. 내가 산 프로그램은 만원.^^

사진은 적고 설명이 좀 더 많다. 사진이 적은 것은 아쉽지만, 원본 크기로 보고 왔으니 그걸로 만족하련다.

 

 

 

감정이 버거운 한 주를 보냈지만, 그래도 한 주의 마무리는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고마워요, 앙리! 

 

펼친 부분 접기 ▲

 

10. 오늘 아침에 전체 문자가 왔다. 내일 아침 7시 반에 회의가 있다고... 다행히 30분 뒤에 회의 취소 문자가 왔다. 최소된 회의가 그 언저리에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쨌든 내일 아침은 회의가 없다. 내일 오전엔 다시 열심히 헬쓰를!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2-06-0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삽질과 힘든 나날이지만 충만한 날이 있음에 감사를!^^
삽질을 줄이는 방법은 길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 꼭 부탁해요!!

마노아 2012-06-04 01:19   좋아요 0 | URL
저게 엄청 검색하고 지도 전부 출력하고 난 다음의 결과랍니다.ㅜ.ㅜ
제 친구는 조리원이 병원이랑 같이 안 있다고 왜 말을 안 해주 줬는지...;;;;;
암튼, 확인에 또 확인은 필수예요.^^;;

turnleft 2012-06-04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요즘 좀 글이 뜸한 것 같아요. 삽질을 전보다 좀 덜 해서 그런거라면 용서해 드릴께요.

마노아 2012-06-04 16:22   좋아요 0 | URL
삽질로 인해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닐까요. :)

울보 2012-06-04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고생많으셨네요,,
그런날 있어서 모든일이 자꾸 꼬이는날,,,,

마노아 2012-06-04 16:22   좋아요 0 | URL
제대로 머피의 법칙이었어요...;;;;;

nada 2012-06-04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브레송 사진 정말 좋네요!
가고 싶긴 하지만, 도서관에서 사진집이나 찾아봐야겠어요.

마노아님의 여름 버전 삽질은 더 안타까워요!
얼마나 힘드셨을고..

마노아 2012-06-05 14:03   좋아요 0 | URL
브레송, 정말 위대한 작가로 보여요. 사진에 영혼이 깃들어 있어요.^^
여름 버전 삽질! 아아아... 오늘도 회의가 있었어요. 삽질할까 봐 오늘은 일단 집으로 들어왔어요. 다시 출근해야 해요...;;;;

rosa 2012-06-0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마노아님의 내비게이션이 되고 싶군요.^^;
내비 사기 전까지.. 울 사무실의 내비게이션이 저였거든요.
마노아님, 더위에 지치지 마시고~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향기 좋은 커피 한 잔 나눌 수 있기를 바랄께요.^^

마노아 2012-06-05 14:03   좋아요 0 | URL
아아아, 인간 내비게이션이 절실한 저랍니다.
운동 마치고 집에 와서 밥 먹고, 녹차 마루 하나 먹었어요.
피곤이 쫙 깔렸는데 이제 출근해야 해요.^^;;;;
언제고 우리 향 좋은 커피 꼭 나누도록 해요. 달달한 케이크도 곁들여요~

다락방 2012-06-07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회사 직원이 에그 쓰는데 이거 방전이 빨리되구요 인터넷도 잘 안잡힌대요. 그리고 항상 휴대하고 다녀야 하는거라서 많이 불편할거라네요. 대부분 자가용 가진 사람들이 자가용안에 두고 쓴다구요. 물론 많이 생각해보시고 하시는 거겠지만 좀 더 잘 알아보세요. 괜히 더 피곤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마노아 2012-06-08 18:08   좋아요 0 | URL
약정2년을 걸어야 금액이 반값 할인인데 고민이 좀 되네요. 현재로서는 그냥 지하철 안에서만 와이파이 잡아서 쓰고 있어요. 이거 언니가 신청해줘야 하는데 바쁘다고 안 해주고 있거든요. 정보 고마워요. :)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 류시화 제3시집
류시화 지음 / 문학의숲 / 2012년 4월
구판절판


옹이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 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한 부분이라고
한때는 이것도 여리디여렸으니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 번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12쪽

낙타의 생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24쪽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 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가슴에 있는 노래를 배우는 것’-작자 미상
-32쪽

다르질링에서 온 편지

지금 지구는 외롭고 바람 부네
사람이 그리워 사람의 마을로 간 것을 파계라 하던가
여기는 별이 너무 많아
더러는 인간의 집을 찾아들어
몇 점 흐린 불이 되기도 하네
히말라야의 돌은 수억 년 전의 조개를 품고 있다지
이 생의 일인데도 어떤 일들은 아득한
전생의 일처럼 여겨져
꽃 같은 기억, 돌 같은 기억이 너무 많아
세상이 나를 잊기 전에 내가 나를 잊었구나
농담을 하듯이 살았네
해발 2억 광년의 고산을 넘어와
밤마다 소문 없이 파계하는 별들 보며
전생의 내가 내생의 나에게 편지를 써서
거꾸로 읽어 보네
여인숙 옆 사원에서 들려오는 주문인 듯
네부람바고롭외......
-53쪽

얼음 나무

첫해부터 후회가 되었다
집 가까이
그 나무를 심은 것이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밤마다 창을 두드린다
첫 시월부터 마지막 여름까지
가지마다 비와 얼음을 매달고서
나의 부재를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
바람에 갇힌 영혼같이
상처 입은 불같이

겨울이 떠나면서 덧문을 열어 놓고 갔을 때는
잠 속까지 걸어 들어와
꽃으로 내 삶을 두드린다

나는 그 나무로부터 너무
가까운 거리에 살았다

떨어지는 잎사귀 하나마저도
심장을 건드리는
-72쪽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1
달 표면 오른쪽으로 거미가 기어간다
월식의 흰 이마 쪽으로
어느 날 그런 일이 일어난다 밤늦은 시각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흰 빗금을 그으며
산목련이 떨어지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거미가 달의 뒷면으로 사라지기 전이었을 것이다
텅 비고 깊고 버려진 목소리
망각의 정원에 핀 환영의 꽃 같고
육체를 이탈한 새의 영혼 같고
얼마큼의 광기 같은
당신 거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은요?
전화는 연결 상태가 좋지 않다
당신 아직도 거기 있어요?
당신도 아직 거기 있어요?

2
지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매화는 피었나요 소복이
삼월의 마지막 눈도 내렸나요 지난번
가시에 찔린 상처는 아물었나요
그 꽃가지 꺾지 말아요
아무리 아름답기로
그 꽃은
눈꽃이니까

천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그곳에도 매화가 피었나요 촉촉이
초봄의 매우도 내렸나요 혹시
육체를 잃어서 슬픈가요
그 꽃가지 꺾지 말아요
아무리 신비하기로
그 꽃은
환생의 꽃이니
-74쪽

3
어느 날 너는 경계선 밖에서 전화를 걸 것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幻(환) 속에서
이미 재가 되어 버린 손가락으로
수신자 부담 전화를
네가 있는 여기
봄 그리고 끝없이 얼굴을 바꾸며
너와 함께 이동해 준 여러 번의 계절들
해마다 날짜가 변하는 기억들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만큼 살지 않았을 뿐
어느 날 갑자기 너는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질문과 회피로 일관하던 삶을 떠나
이미 떨어진 산목련 꽃잎들 위에
또 한 장의 꽃잎이 떨어지듯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생물들에
또 하나의 생을 보태며

*바르도-‘둘 사이’라는 뜻의 티베트 어로, 사람이 죽어 일정 기간 머무는 곳
**매우(梅雨)-매화 질 때 내리는 비
-76쪽

살아 있는 것 아프다

밤고양이가 나를 깨웠다
가을 장맛비 속에
귀뚜라미가 운다
살아 있는 것 다 아프다
다시 잠들었는데
꿈속에서 내가 죽었다

그날 밤 별똥별 하나가 내 심장에 박혀
나는 낯선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나는 알았다
그것이 시라는 것을
-79쪽



나를 치유해 준 것은 언제나 너였다
상처만이 장신구인 생으로부터
엉겅퀴 사랑으로부터
신이 내린 처방은 너였다
옆으로 돌아누운 너에게 눌린
내 귀, 세상의 소음을 잊고
두 개의 눈꺼풀에 입 맞춰
망각의 눈동자를 봉인하는
너, 잠이여

나는 다시 밤으로 돌아와 있다
밤에서 밤으로
부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얼굴의 윤곽을 소멸시키는 어둠 속으로
나라고 하는 타인은
불안한 예각을 가지고 있다
잠이 얕은 혼을

내가 숨을 곳은 언제나 너였다
가장 큰 형벌은 너 없이 지새는 밤
네가 베개를 뺄 때
나는 아직도 내가 깨어 있는 이곳이 낯설다
때로는 다음 생에 눈뜨게도 하는
너, 잠이여
-80쪽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신발 뒷굽이 닳아 있는 걸 보면
그는 새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거리를 걸을 때면 나무의 우듬지를 살피는 걸 보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다 주머니에 기도밖에 들어 있지 않은 걸 보면
그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슬픔을 아는 사람이다 가끔 생의 남루를 바라보는 걸 보면
그는 밤을 견디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샤갈의 밤하늘을 염소를 안고 날아다니는 걸 보면
그는 이따금 적막을 들키는 사람이다 눈도 가난하게 내린 겨울 그가 걸어간 긴 발자국을 보면
그는 자주 참회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거절한 모든 것들에 대해 아파하는 걸 보면
그는 나귀를 닮은 사람이다 자신의 고독 정도는 자신이 이겨내는 걸 보면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많은 흉터들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숙이 가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걸 보면
-84쪽

그는 홀로 돌밭에 씨앗을 뿌린 적 있는 사람이다 오월의 바람을 편애하고 외로울 때는 사월의 노래를 부르는 걸 보면
그는 동행을 잃은 사람이다 때로 소금 대신 눈물을 뿌려 뜨거운 국을 먹는 걸 보면
그는 고래도 놀랄 정도로 절망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삶이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걸 보면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그의 부재가 봄의 대지에서 맥박 치는 걸 보면
그는 타인의 둥지에서 살다 간 사람이다 그의 뒤에 그가 사랑했으나 소유하지 않은 것들만 남은 걸 보면
-85쪽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꽃눈 틔워 겨울의 종지부를 찍는
산수유 아래서
애인아, 슬픔을 겨우 끝맺자
비탈밭 이랑마다 새겨진 우리 부주의한 발자국을 덮자
아이 낳을 수 없어 모란을 낳던
고독한 사랑 마침표를 찍자
잠깐 봄을 폐쇄시키자
이 생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있는 것 같았던
지난겨울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가끔 눈 녹아 길이 질었다는 것 외에는
젖은 흙에 거듭 발이 미끄러졌다는 것 외에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곁방살이하던 애인아
종이 가면을 쓰고 울던 사랑아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삶이라는 것이 언제~마모시키는 삶’-옥타비오 빠스 <태양의 돌>에서
-110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2-06-04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으네요~ 언제봐도 류시화 모음 글들은!

마노아 2012-06-04 01:19   좋아요 0 | URL
시인의 영혼은 악마라도 탐을 내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어요. 시인의 언어라고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