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왕의 고뇌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품절


척이 방귀를 뀌었다. 통이 침대에서 튕겨지듯 일어나서는 달려가 창문을 열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가 언제나 경탄스러웠다. 캄보디아에서 그런 끔찍한 일들을 겪고도 어떻게 방귀 따위에 분개할 수 있단 말인가.
-100쪽

나는 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그게 도움이라는 것을 그가 눈치 챌 수 없는 범위 안에서.
-119쪽

나는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연 단위의 세월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달이나 주 같은 시간들 역시 중요하니까 말이다.
-123쪽

"난 독일 점령기에도 노래를 불렀어요. 그래서 나중에 노래를 그만둬야 했답니다."
-141쪽

"네가, 그러는 건 멀어지기 위해서야.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고."
"무슨 뜻이야?"
"감동을 주거나 두렵게 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멀어지기 위해, 감정으로부터 너 자신을 떼어놓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그건 일종의 자기방어라고 할 수 있어. 네가 고뇌에 시달린다고 하자. 너는 네 고뇌를 사전 속에 있는 건조한 상태로 환원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는 거야. 감정을 차갑게 식히는 거지. 눈물이 나나고 해보자. 너는 그 눈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서 사전에서 눈물이라는 단어를 찾는 거라고."
-181쪽

"셈법을 다시 배워야 해, 니콜라. 넌 열일곱 살이야. 새로운 수학을 배워야 해. 이 세상에 혼자라는 건 옛날 셈법이야. 새로운 수학을 모르기 때문에 네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잊지 말고 전화해, 니콜라. 전화 기다릴게. 내가 네 전화를 기다린다는 걸 잊지 마, 니콜라. 널 믿는다, 잊지 마."
전화를 기다린다고 사람들이 믿게 하는 건 중요했다. 의기소침해 있을 때, 전화선 저편에서 누군가 당신에게 관심을 두고 당신의 소식을 간절히 기다린다고 느끼는 것은 중요하다. 누군가 자신의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가스 밸브를 열어 자살하지 않는다.
-205쪽

솔로몬 씨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예의를 갖추고 물었다.
-218쪽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 정도로 나는 점점 더 내 말에 빠져들었다. 고뇌와의 관계는 늘 그렇다. 여러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튀어나와서는 여러분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바로 그 말을 하게 된다.
-219쪽

행복을 느낄 때, 사람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겁을 내. 그런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말이야. 내 생각엔 영리한 사람이라면 평생을 바쳐 돌처럼 불행해지기 위한 준비를 했어야 해. 그러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지금 난 잠을 잘 수가 없어. 이건 뭔가에 대한 불안이야. 좋아, 우리는 행복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뜻은 아니잖아?

"당신이 행복해한다고 해서 삶이 당신을 벌주진 않아."
"잘 모르겠어. 알다시피 삶은 눈을 갖고 있고, 행복한 사람은 눈에 띄기 마련이라서 말이야."
-239쪽

그는 파시즘에도 장점이 있다는 데 동의하는데, 그 이유는 반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285쪽

"내 친구 척 말이 맞아. 내가 타인들로부터 안식처를 찾는 건 나 자신의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거야. 나한텐 스스로를 돌보는 데 필요한 정체성이 없어. 내가 누군지, 무엇을 원하는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르는 거야. 알겠어?"
"당신 친구 척은 무엇보다도 자족적인 사람인 것 같아. 자기도취적인 사람 말이야. 내가 보기엔 그것 역시 별로 좋지 않아."
-296쪽

두세 건의 불행을 접수했고, 그러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 몫의 불행이 내 안에서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덜 불행해졌다.
-319쪽

내게 타인 강박증이 있다는 척의 말은 옳았다. 나는 안식처를 나 자신에게서 찾은 적이 없었다.
-324쪽

사 년 동안 지하실에 숨어 지냈고, 인종 말살과 나치,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 경찰을 의기양양하게 따돌렸는데, 그것은 겁쟁이처럼 시시하게 자연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의지와 결단, 계략, 신중함, 정신력, 개성으로 무장하고 승리한 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보자. 이건 그에게 늦게라도 당할 일은 당한다고 나치가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362쪽

"그 여자에겐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단 말이오."
-3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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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의 고뇌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앞서 로맹 가리를 먼저 만난 것은 '자기 앞의 생'이었다. 유명세를 알고 있었고 누군가의 극찬에 호기심이 동해 읽었던 터였다. 난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고 그래서 큰 감흥 없이 책을 덮었더랬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기대도 빼고 기름기도 빼고, 그렇게 조금은 관조적인 자세로 읽어나갔다. 천천히, 조금씩! 400쪽이 넘는 이 책은 격한 절정 없이 조용히 산을 오르는 느낌이었다. 가파른 절정이 없는 만큼 급한 추락도 없었다. 완만히 올라가서 정상에서 마무리한 느낌? 늦게 타올랐지만 그만큼 오래 가는 감동이 있었다. 로맹 가리의 마지막 작품, 그가 생을 끝내기 얼마 전에 집필한 유작다운 여운이다.

 

작품 속 화자는 '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25세 백인 청년이다. 초등학교를 중퇴했고 독학으로 공부를 했다. 그의 유일한 스승은 사전이었다. 서점에 가서 사전을 찾아보고, 적절한 때에 적당한 단어를 떠오릴 수 있는 것에서 소박한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청년이다. 그는 친구들과 교대로 택시를 몰았는데, 어느 날 솔로몬 씨를 승객으로 만나게 된다. 그는 이미 나이가 여든 넷이었는데, '기성복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산가였다. 젊어서 큰 돈을 벌었고, 이제는 노년에 접어든 그는 구조회에서 전화를 받는 자선단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솔로몬 씨는 그 업체에 장같은 젊은이가 필요하다며 그를 채용한다. 장은 솔로몬 씨를 태우기도 하고, 그의 심부름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꽃을 갖다 주기도 하고 돌봐주기도 하는 일을 시작한다. 솔로몬 씨가 큰 돈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도 장은 세상 모든 것에 연민을 품었다고 느낄 만큼 봉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사적인 동기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다. 인류의 손을 잡는 게 불가능하니 눈앞에 있는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136쪽

 

어느 날 밤에는 전철 입구에 서서 행복 승차권을 나눠주는 꿈을 꾸다가 웃으면서 잠에서 깨기도 했다. -373쪽

 

이야기는 장이 솔로몬 씨의 심부름으로 코라 라무네르에게 과일 바구니를 가져다 주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코라는 솔로몬 씨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지만, 솔로몬 씨는 그 전화를 일상적인 구조회에 건 전화로 취급했다. 의도적으로. 코라 라무네르는 오래 전에 은퇴한 샹송 가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이름을 날렸던 그녀는 이제 예순 다섯의 나이로 젊었을 적 빛나던 무대를 추억하면서 황혼의 자신을 쓸쓸해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와중이었다. 여든 넷의 솔로몬 씨를 생각한다면 코라의 나이는 스무살 정도나 어린 거지만, 그녀 역시 청춘은 아니었기에 이 작품의 주된 화두인 '늙음'을 대변하는 인물로 설정되었다. 여전히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서 초콜릿도 거부하지만, 클럽에서 마이크를 잡았다가 야유를 받는 할머니였다.

 

사람의 마음은 몸이 늙는 걸 따라가지 못하네. 몸이 늙지, 마음이 늙는 게 아니야.  -118쪽

 

“조용한 건 이제 충분해요, 자노. 난 삼십 년 동안 조용히 지냈는걸요.” -141쪽

 

그녀는 자신이 늙었기 때문에 내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사실은 반대로 그녀가 늙었기 때문에 못 버리는 건데 말이야. -232쪽

 

 

장은 그녀를 돌봐주고 가까이 지내면서 점점 더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에 발을 담근다. 마드무아젤 코라의 구원이 되고 싶었지만, 그녀가 안고 있는 고뇌의 크기와 깊이는 누군가의 연민으로 해갈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젊음과 늙음의 갈등보다 더 깊은 화해되지 않는 감정이 코라와 솔로몬 사이에 있었다. 벌써 35년도 더 전의 이야기이다. 솔로몬 씨는 비록 코라에게 아파트를 얻어주고 연금도 받게 해주는 등 경제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을 외면하였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는 제 마음 속의 울림도 무시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의 이런 태도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행복을 갉아먹는 분노라면, 이제는 좀 눌러버릴 필요도 있지 않았을까? 아직도 열정에 가득 찬 솔로몬 왕이라지만!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한 이들보다 행복하다. 자신의 불행에만 신경을 쓰면 되니까. 나는 솔로몬 왕을 생각했다. 그는 마드무아젤 코라에게 가혹했다. 용서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것 아닌가.  -352쪽

 

여기서 솔로몬 '왕'이라고 지칭한 것은 장과 한 방을 쓰는 미국인 유학생 친구 척의 말을 빌릴 필요가 있다.

 

"그건 권력의지에서 나온 거야. 자선가들에겐 언제나 지배하려는 욕구가 있지. 오랫동안 바지의 왕이었던 그는 이제 자신을 왕으로 여기는 거라고. 솔로몬 왕이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성서에 나오는 그 솔로몬 왕 같은 거라고."

 

척이 나간 다음, 나는 사전을 찾아보았다. 솔로몬 왕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는 성전을 건설하고, 전차 군대를 정비하고, 동맹을 확고히 했지만, 역시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無로 돌아갔다. 라루스 소사전에는 그의 지혜가 동양 전체,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전설적이었노라고 나와 있다. 그는 사치스럽고 영화를 누린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그 점이 바로 솔로몬 씨와 닮았다. 솔로몬 씨 역시 몹시 후하게 선심을 쓰지 않는가. -65쪽

 

솔로몬 왕을 닮은 솔로몬 씨.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지혜로웠다고 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작은 인간 솔로몬. 지금 자선업체를 운영하면서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지만,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솔로몬 씨이다. 가족이 없는 그는 누군가의 오래된 엽서를 수집하면서 그 안에 담긴 편지 글들을 상상하고 재현해 보며 소일 거리로 삼는다. 저물고 있는 황혼의 나이이지만, 여전히 미래는 궁금한 법! 예언가를 찾아가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뿐인가. 여든 다섯이 되는 생일 날에는 더 심한 도전(!)도 시도하였다. 그는 앞으로 50년도 더 갈 튼튼힌 직물의 양복도 맞춰 입으며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마음 속 깊은 외로움과 공허함을 견뎌내질 못한다. 그러니 그가 코라와 다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은 코라에 대한 구원일 뿐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구원이기도 하다. 그걸 위해 동분서주한 장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장의 연민에 찬 선의는 서툴렀다. 그는 지나친 동정이 오히려 상대에게 무례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숱하게 경험하게 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책으로 밤거리를 배회하기도 한다. 기름에 오염된 바다에 빠진 갈매기들에게서 거두지 못한 연민이 구조회에 걸려오는 사람들에게로 이어졌고, 종국에 그 연민은 스스로에게 향한다. 누군가의 불행을 듣고, 그 불행 속에서 자신은 보다 나은 입장임을 깨닫는 데에서 오는 자연스런 안도감. 비단 장 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만 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 정말 머리가 돌아버릴 테니까요. 캄보디아의 학살 같은 일들을 생각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 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들에 관심이 없으면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몰입하기 마련이죠, 마드무아젤 코라. -132쪽

 

두세 건의 불행을 접수했고, 그러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 몫의 불행이 내 안에서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덜 불행해졌다.  -319쪽

 

 

작품 속에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모두 입체적으로 움직인다. 노쇠함 속에서 빛나는 열정을 지닌 솔로몬 씨도, 젊은 날의 영광 속에 젖어 살지만 여전히 자존심을 지키고 제 안의 목소리에 솔직한 코라, 온갖 잘난 척은 다하지만 그래도 입바른 소리는 제대로 하는 척, 그리고 사전 때문에 인연이 닿아서 이제는 함께 살고 있는 서점 직원 알린까지. 물론, 그중 가장 내 마음에 드는 이는 역시 장이다. 서툴렀지만 그 진심만큼은 순수하고 착했던 장은 진지함과 유머를 동시에 가진 휴머니스트였다. 무학의 통찰로 빛나지만, 그래서 더 장중한 울림이 있었다. 그의 철학에는!

 

29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나를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질문에 대한 최악의 결과가 바로 대답인 경우가 종종 있다.

74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드무아젤 코라의 이름조차 알까 말까 한 그가 어떻게 그녀가 일류인지 이류인지 삼류인지 안단 말인가. 누군가를 깡그리 잊었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하지 말고 입을 닥치고 있어야 한다.

137

“맙소사, 당신이 그 사람을 어떻게 알죠? 아주 오래전,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하던 배우인데.”

“그게 그녀를 잊을 이유가 되진 않죠. 할 수만 있다면, 전 이 세상에 살다간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싶은 걸요. 그런 일 말고도 세상에는 이미 부당한 일이 많다고요.”

“그런 일이라뇨?”

“망각, 누군가를 잊는 거 말이에요.”

157

“무슨 상관이에요, 마드무아젤 코라. 우스꽝스러워질 권리가 없다면 그건 인생이 아닌걸요.”

239

당신이 행복해한다고 해서 삶이 당신을 벌주진 않아.”(알린)

“잘 모르겠어. 알다시피 삶은 눈을 갖고 있고, 행복한 사람은 눈에 띄기 마련이라서 말이야.”

381

나는 죽고 싶었다. 하지만 죽어야 할 이유가 생길 때마다 정말 죽을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394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층계에 앉아서 노래의 나머지 부분을 들었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자 침묵에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노래하는 것은 언제나 침묵이니까.

 

로맹 가리니까 쓸 수 있는 유머도 한대목 소개한다.

 

159

“드골은 여든 두 살에 프랑스의 왕, 그러니까 대통령이 되었어요. 그리고 마담 시몬느 시뇨레는 지금 당신 나이 정도에 영화 주연을 맡지 않았던가요? <자기 앞의 생>이라는 영화였어요. 그래요, <자기 앞의 생>이었어요. 예순이 다 된 나이에 오스카상까지 받았잖아요. 맞아요, 우리 모두는 자기 앞의 생을 마주하고 있어요. 나도 그렇죠. 겸손하게 말이에요.”

 

이 대목을 만나고 나니 내가 '자기 앞의 생'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살짝 일었다. 그리고 이 책과 같은 주인공을 내세운 '가면의 생'도 관심 가는 책으로 등극해 버렸다. 더불어 로맹 가리의 뮤즈 진 세버그에 대한 관심까지!

 

종이 사전을 펼쳐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들고 다니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이 벽돌 생김새의 책은,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세상에서 클릭 몇 번으로 만날 수 있는 사이버 속 존재로 대체되었다. 비록 종이 질감을 느끼며 만져본 지는 오래 되었지만, 내 책장에는 여전히 사전이 꽂혀 있다. 차마 버릴 수는 없다. 언제 만날지 알 수는 없어도. 사전에는 그런 가치가 있다. 이 작품의 배경처럼 1979년에는 사전의 아성을 무너뜨릴 존재가 없었겠지만. 장이 작품 속에서 찾아보는 단어들이 참 의미 깊었다. 각각의 단어들을 다시 새겨보며 그 단어가 적재적소에 쓰이는 상황을 상상해 보고, 또 프랑스식 유머에 감탄도 해보았다. 언어유희! 로맹 가리는 과연 천재다.

 

76쪽 불멸의immortel 죽음의 노예가 되지 않는.

191쪽 아름다운 고통, 추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겐 허락되지 않은 불멸이지만,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많은 것들은 불멸에 가까운 지위를 얻기도 한다. 문학도 그 하나일 것이다. 사랑에 대한 여러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던 중에 나온 저 설명도 마음을 울린다. 추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진정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부끄럽지 않다면...

 

1979년에 세계 인구는 40억이었다고 작품 속에 소개된다. 세계 인구는 작년 기준으로 이미 70억을 넘겼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와, 지금 막 읽기를 마친 나와의 간극을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읽으면서 궁금해진 부분도 있다.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었다. 가톨릭 신자들처럼 '다음 번'이라는 것이 없다고.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예수의 재림을 믿지 않으니 부활도 믿지 않는다는 설명일까? 궁금했지만 마땅히 물어볼 사람이 없다.

 

제일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은 사실 이부분이다.

 

거기서 알린과 나는 흑인 아이들을 가질 수도 있으리라. 흑인은 백인보다 고뇌가 적다. 그들은 덜 문명화되어 있으니까. 익히 알려진 사실 아닌가. 나는 지나치게 문명화된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삼십 분 동안 크림 타르트를 먹으며 그런 식으로 장난을 쳤다. 나를 점령한 지식의 총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288쪽

 

두 사람 모두 백인이니까 저기서 나온 흑인 아이는 두 사람이 낳은 아기는 아닐 것이다. 이 부분을 로맹 가리는 유머로서 쓴 것일까, 아님 당시 프랑스 사회는 저 정도 말은 곧잘 튀어나오던 분위기였던 것일까?

 

신기했던 부분도 있다. 작품 속에서 장은 알린의 짧은 머리를 아쉬워한다.

 

여자들의 머리는 길면 길수록 좋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짧으면 목이 더 많이 보인다는 장점이 있다. 그녀의 목이 많이 보이는 건 좋았다.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는 법. -194쪽

 

한국 남자만 여자의 긴 머리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이건 좀 충격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장은 지혜로운 사나이!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고 하지 않는가. 장과 사귀면서 알린이 스스로 머리를 기르긴 하지만....

 

솔로몬 왕의 고뇌는 인간 모두가 갖는 깊고 어두운 그림자였다. 누구도 늙음을 부정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다. 누구든 사랑의 포로가 되고 집착의 노예가 되고, 분노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망치기도 한다. 그 모두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감정들이지만 지혜로운 당신이라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사전에 모두 나오지는 않지만, 간혹 사전처럼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정답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사전이 딱딱하다면, 이렇게 문학 작품을 통해서 은유적으로 당신의 마음을 두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었다. 내리는 비만큼이나 촉촉하게 감성을 적셔 주었다. 한 잔의 커피가 간절해지는 순간이다. 등록 버튼을 누르고 모처럼 뜨거운 커피를 마시리라. 오랜 여운을 즐길 나만의 음악도 배경으로 깔아주면서...

 

몇 개의 오타가 있었다. 좋은 책이니 금방 다음 쇄를 찍고 바로 수정될 거라 믿는다.

 

145쪽

그녀가 조용히 살아온 삽십 년의 세월을 따라잡기로 문득 작정했기 때문이지>>>>삼십 년의 세월을 따라잡기로 문득 작정했기 때문인지

 

215

돌로 깍은 듯 위엄 있는 얼굴이었다. >>>깎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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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6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좋은 책에 오타, 정말 안타까워요. 책 읽다 오탈자 있으면 괜히 안타깝고 책의 가치가 좀 떨어져보이고
그래요. 노인의 눈에는 빛이!! 헤르만 헤세의 노년의 혜안이 엿보이는 '정원일의 즐거움'도 그렇게 느껴졌거든요.
노년이 되면 눈은 어두워져도 심안은 더 밝아져야할텐데 말에요, 우리도^^ 아니 저도^^

마노아 2012-07-08 12:33   좋아요 0 | URL
요새는 오타의 잔치라고 할 만큼, 오타 없이 한권을 끝까지 읽는 책이 없어 보여요. 그래도 이 책은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고 할까요..ㅜ.ㅜ
헤헤,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이 모두 밝은 우리가 되었으면 해요. 저는 라섹한 여자... ㅎㅎㅎ 이제 심안을 밝힐 차례예요.^^

라로 2012-07-0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리뷰 썼는데,,,마노아님의 리뷰를 읽자니 책 내용이 새삼 머리속에 환하네요,,
저것 말고도 저도 오타 찾았는데 몇 개 안 되어 그냥 넘겼는데
우리 마노아님은 친절도 하시지!!^^

마노아 2012-07-08 12:34   좋아요 0 | URL
뤼야켈레벡님 리뷰도 읽으려고 별찜 해놓고 바빠서 놓쳤어요. 언능 가서 읽어야겠어요.
오타를 더 찾았는데 표시를 안 해 놓고 지나쳐서 빠뜨린 게 있어요. 거기서 겹쳤을지도 몰라요. ^^ㅎㅎㅎㅎ
 

   FOCUS 과학

제 1639 호/2012-07-02

과학적으로 시원함을 입다, 쿨맵시룩

‘올 여름은 쿨비즈룩이 대세!’, ‘2012년 서울시 쿨맵시 캠페인 시작’, ‘휘들옷 입고 에너지 절약하세요’

무더운 여름이 다가오면서 언론에 자주 언급되는 말들이다. 쿨비즈, 쿨맵시, 휘들옷 등의 생소한 용어들은 ‘에너지 절약’이라는 공통된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쿨비즈는 시원하다의 ‘Cool’과 사업․업무의 약어인 ‘Biz’를 합성한 단어로, 여름철 재킷과 넥타이를 매지 않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근무하는 것을 뜻한다. 옷차림을 가볍게 해 실내온도를 섭씨 28도로 유지하도록 하는 등 에너지 절약을 위해 생겨난 용어다.

이 캠페인은 일본에서 시작됐으며, 영국에서는 ‘쿨 워크(Cool Work)’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부터 ‘쿨맵시’라는 이름으로 캠페인을 시작해, 올해 역시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2012년 서울시는 기온이 가장 높은 6월부터 8월까지 일반시민 접촉이 많은 부서를 제외하고 공무원들의 반바지, 샌들 등 자유 복장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일부 유력인사들이 솔선수범해 쿨맵시 복장을 선보여 이슈가 되기도 했다.

단지 넥타이를 푸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느낌을 받는다고 하는데, 반팔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샌들을 착용하면 실제로 체온이 떨어지는 효과가 있을까? 이 캠페인이 과연 과학적으로 어느 정도 에너지 절약 효과가 있을지 궁금증이 생긴다.

과학적 조사에 의하면 재킷을 벗은 반팔 셔츠 차림에 넥타이를 풀면 체감온도가 약 2℃ 낮아진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낮아진 체감온도가 사무실 냉방온도 조절에도 영향을 미치는 지다. 국립환경과학원은 쿨맵시 복장을 할 경우 얼마나 온도 절감 효과가 있는지 과학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은 성인남성 4명과 마네킹 1대를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일반 복장과 쿨맵시 복장을 착용하고 평균 사무실 온도인 25℃와 여름철 적정온도인 27℃에서 평균 피부온도를 측정했다. 복장별 피부온도의 변화와 더불어 국소발한량, 주관적 쾌적감 등을 측정해 이를 바탕으로 냉방에너지 절감량과 온실가스 감축잠재량도 산정했다.

실험자들은 몸에 센서를 부착하고 사무실에서의 일상적 업무인 컴퓨터 작업 또는 독서활동을 했다. 각 실험자별로 3회 반복실험을 한 결과, 평균 피부온도는 27℃ 일반 > 27℃ 쿨맵시 > 25℃ 일반 > 25℃ 쿨맵시 순으로 나타났다. 의복 내 상대습도는 27℃ 일반 > 27℃ 쿨맵시 > 25℃ 일반 > 25℃ 쿨맵시 순으로 나타났다. 국소발한율은 일반 복장 착용 시 쿨맵시 복장보다 최대 4배까지 상승했다.



[그림] 일반 복장과 쿨맵시 복장 착용 시 평균 피부온도. 자료 제공 : 국립환경과학원.

실험자들의 개인적인 느낌을 알기 위해 주관적 온열감, 습윤감, 쾌적감 등을 조사한 결과, 27℃에서 쿨맵시 복장을 한 경우 가장 쾌적하게 느꼈다. 25℃에서 쿨맵시 복장을 한 경우엔 오히려 약간 춥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같은 온도에서는 일반 복장이 쿨맵시 복장보다 덥게 느낀 것으로 나타나 주관적 온열감은 실내온도보다 의복에 의한 영향이 더 큰 것으로 분석됐다. 주관적 습윤감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일본에서 진행한 조사결과도 있다. 니케이BP 컨설팅사의 온라인설문조사에 의하면 쿨비즈를 실시하는 사무실이 그렇지 않은 사무실보다 냉방 설정 온도가 1.5℃ 높았다. 또 쿨비즈를 시행하는 사무실의 약 60%가 냉방온도를 28℃로 설정하고 있다.

냉방온도를 높이는 것은 우리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시원한 실내에서만 생활하면 더운 기후에 대한 우리 몸의 방위체력이 저하된다. 방위체력이란 체온조절능력, 면역력,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 등의 체력을 말한다. 방위체력이 저하되면 외출 시 기온변화에 대한 즉각적인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불쾌감이 증가하게 된다. 때문에 여름철 실내 온도를 26~28℃로 맞춰 실내외 온도차를 줄이면 내열성이 점차 증가하고 혈관조절에 의한 체온조절 범위가 확대돼 더위도 잘 극복할 수 있다. 또한 지나친 냉방에 의한 두통, 어지럼증, 피부 건조증 등의 냉방병 증세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된다.

만일 모든 사무실에서 쿨맵시 복장을 하고 냉방온도를 2℃ 올린다면 어떤 영향이 있을까? 에너지관리공단의 조사에 의하면 여름철 전력사용량이 약 17% 줄어 29억 kwh의 전기를 절약할 수 있다. 이는 금액으로 3천억 원, 원자력 발전소 2기분에 해당되는 양이다.

환경부는 온 국민이 쿨맵시를 착용해 전국의 실내 냉방 온도를 2℃ 높이면 연간 39만 TOE(1TOE=1,000만 kcal)의 에너지 절감이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온실가스 배출량도 연간 160~290만 톤 줄일 수 있다. 이는 약 3,000억 원의 비용 절감, 약 7억 그루의 소나무를 심는 것과 동일한 효과다.

쿨맵시 복장으로 인한 체감온도 저하 효과와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에너지 절감 효과는 과학적으로 증명됐다. 다만 이를 빌미로 과도한 노출이나 요란한 복장을 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격식을 갖춘 옷이라도 통기성이 우수하고 땀의 흡수와 건조가 빠른 기능성 소재를 통해 충분히 쿨맵시가 가능하다. 이미 쿨맵시 캠페인의 파급효과는 기능성 섬유소재 개발 등 다방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과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닐까.

※ 참고자료 : 제품․생활패턴별 온실가스배출량 산정 및 감축잠재량 평가, 국립환경과학원, 2010

글 : 유기현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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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2-07-06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쿨비즈고 쿨맵시고간데, 40명씩 들어차있는 교실의 아이들에게 정식으로 반바지와 반팔티를 허용해주면 좋겠습니다. 고참 교사들은 '그러면 아이들은 속옷 차림으로 학교 올거다!'라고 펄쩍 뛰시지만...두발 지도를 안해도 크게 문제되는 아이들이 없는 거 보면 너무 걱정 안해도 될 거 같은데 말입니다.

마노아 2012-07-08 12:32   좋아요 0 | URL
시청 공무원도 반바지를 입는 세상인데 교실도 변화가 필요해요. 에너지 절약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에어큰 끄지도 않고 체육 수업 나가는 애들이 다반사긴 하지만요..;;;;;
 

요새는 한달에 열 권 채우면 많이 읽은 셈이 되고 있다.

이젠 질도 양도 다 못 채우는 것 같다. 그렇다고 뭐 어쩌랴. 바쁠 땐 쉬엄쉬엄 읽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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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5 04: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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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5 1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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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5 1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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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6 0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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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9 2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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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9 2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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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의 계절은 곧 참고서의 계절.

방학과 휴가가 어우러지는 좋은 시절이 되었으면...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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