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빈 라덴이 아니에요! 가로세로그림책 2
베르나르 샹바즈 지음, 바루 그림, 양진희 옮김 / 초록개구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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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집트 출신 낫시르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할머니의 고향 이집트보다 낫시르는 미국에 더 익숙한 미국 소년이다. 갈색 피부를 가진.

 

존은 낫시르의 단짝 친구다. 존의 부모님이 휴가를 보내는 펜실베이니아의 한 호숫가에서 낫시르는 2001년의 여름을 지냈다.

 

존은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야 했다. 존의 부모님은 침례교도이고 낫시르의 부모님은 이슬람교를 믿지만, 존과 낫시르는 모두 종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둘은 그보다 야구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개구쟁이 단짝 친구일 뿐이다.

 

9월 11일은 새 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견학을 가는 날이었다. 게다가 이날은 글렌 축일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탄 버스는 동물원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한 것은 악어들의 첫 식사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수첩에 견학한 내용을 적는 것은 쉬웠지만, 보이는 동물을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낫시르는 낙타 앞에서 피라미드 이야기를 꺼냈다.

스핑크스가 있는 피라미드에 가려면 낙타를 타야 하는데, 그러면 보트를 탈 때처럼 몸이 앞뒤로 흔들린다고 설명해 주었다.

스핑크스 앞에서는 구경만 했고, 나중에 아스완에서 낙타를 탔을 때 정말 어찌나 흔들리던지 아주아주 무서웠다는 기억을 보태 본다.

 

아이들이 열심히 견학을 하고 있을 때 선생님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선생님은 숨이 멎는 듯한 소리를 내뱉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셨다. 선생님은 사고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승객을 태운 비행기가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을 들이받았고, 빌딩에 화재가 났다.

낫시르의 친구 바리의 삼촌이 쌍둥이 빌딩에서 일하고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무시무시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상벨이 울리는 가운데 흩날리는 재와 함께 사방에는 탄내가 진동했다.

방어벽을 치는 경찰들과 놀라서 사방으로 달려가는 사람들로 인해 광장 근처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낫시르의 가족들은 모두 무사했다. 연락이 두절되었던 누나도 체육관에 대피해 있었다.

낫시르는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며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꿈을 꾸다가 깨었다.

화재 때문에 뛰어내렸던 사람들이 바닥에 부딪쳐 으스러지기 직전에 눈을 떴지만 이 때의 충격은 낫시르에게서 쉽게 사라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 일을 직접 겪은 사람이건, 간접적으로 당한 사람이건 모두에게 말이다.

 

바리의 삼촌은 쌍둥이 빌딩에서 돌아가셨다.

존은 침울해 보였고 무척 짜증이 나 있었다.

존은 영웅 놀이를 할 때도 악당 역할은 더 이상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9.11 테러의 주범과 동일시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존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를 걸면 존의 엄마는 쌀쌀하게 말씀하셨다.

편지도 보내봤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탄저균 감염 우편물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제대로 전달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누나는 빨간 폴로 티셔츠와 파란 치마를 입고 학교에 갔다. 성조기를 연상시키는 옷을 입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전한 것이다.

낫시르는 피라미드가 그려진 초록 티셔츠를 좋아하지만, 부모님은 입지 않는 게 좋다고 하셨다.

미국 연방 수사국이 새로운 법에 따라 알카에다의 테러범들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조사하게 되었다고. 그러니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록색은 조심하는 게 좋다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그 무렵 존은 학교를 옮기게 된다. 침례교단에서 운영하는 사립 학교로.

그 학교에는 낫시르와 같은 이슬람교도 학생은 없을 것이고, 그것이 안전한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또 시간이 흘러 10월 31일 할로윈 데이. 낫시르는 드디어 존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존은 낫시르와 친구들을 피했다.

부모님 때문에 낫시르와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페드로도 되고 첸도 괜찮지만 낫시르는 안 된다고 했다. 낫시르의 아빠가 이슬람교도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낫시르는 얼어붙고 말았다. 내 이름은 낫시르라고, 빈 라덴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지만 이후로도 존은 낫시르를 피했다.

그렇게, 가장 절친한 친구를 잃어버렸다. 끔찍한 테러와, 그로 인한 보복 전쟁과 무분별한 몰아세우기로.

 

다시 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1년 5월 1일. 스무살 생일 파티에 참석했던 날 저녁, 낫시르는 빈 라덴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한결 마음이 놓이면서 기뻐했지만, 그가 죽었다고 해서 이미 죽은 바리 삼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때 죽었던 무수한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낫시르와 친구들은 다시 광장으로 나갔다. 혹시라도 그곳에서 존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빈 라덴이 죽었으니, 이제 존도 낫시르를 다시 친구로 받아줄 수 있을까? 부모님의 강요 때문이었지만 필시 후회했을 존의 마음에 이제는 어떤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괜히 작품의 뒷이야기를 궁금해 해본다.

 

 

어려운 주제인데도 제법 절제가 되어 있고,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장점이 있는 책이다. 걸프 전쟁 이후 국제 사회에서 입김이 세진 미국이 여러 분쟁 지역에서 갈등을 부추겼던 일들, 알 카에다의 만행과 이어지는 9.11 테러. 그리고 테러 이후 폭주해 버린 미국의 오만한 전쟁들. 그것들이 그림 속 사진으로 책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개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전쟁을 반대하던 목소리도 함께 소개했다. 이슬람교도들이 그들의 적이 아님을, 전쟁이 답이 아님을 외치는 구호들이 가슴에 박힌다. 시간과 장소를 바꾸면 저런 메시지는 어디에서도 울려퍼질 수 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후세인이 죽었고, 빈 라덴도 죽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후유증과 9.11 테러의 상처로 힘들어 하고 있다. 그 때를 이용해서 부시는 연임에 성공했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누군가는 악의 축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부추기는 입김 속에서 누군가는 전쟁 무기를 팔아서 돈을 벌었다. 독재자의 손자와 독재자의 딸이 지도자가 되어버린 한반도와 극우 성향의 일본 새총리, 이렇게 급속도로 얼어붙는 동아시아의 판세 속에서 이 책이 어린이 책의 무게로 읽히지가 않는다.

 

'내 이름은 칸'이란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의 낫시르와 같은 고민이 나올 것이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이란 책도 함께 떠오른다. 영화도 만들어졌는데 우리 나라에는 언제 개봉하려는지?

 

길지 않은 내용 안에 역사와 전쟁과 갈등, 인권과 상처의 치유에 대해서 복합적으로 다뤘다. 어려운 주제인데 솜씨 좋게 구성했다. 독특한 설정의 그림들도 인상적이다. 평화를 갈망하며 더불어 읽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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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가 온 첫날 밤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226
에이미 헤스트 글, 헬린 옥슨버리 그림, 홍연미 옮김 / 시공주니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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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던 날, 헨리는 길에서 강아지 한마리와 마주칩니다.
얼마나 눈속에 버려져 있었는지 알 수 없었던, 추워보이던 강아지.
강아지는 헨리와 함께 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졌지요.
헨리는 기꺼이 강아지와 함께 돌아가기로 결정했어요.
아기 때 쓰던 낡은 담요를 가져와서 강아지를 감싸 안았죠.
헨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강아지는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렸을 거예요.
그리고 헨리가 돌아온 것을 알았을 때 아주 기뻤겠지요.
헨리는 강아지를 안은 채 미끄러질까 봐 조심조심 걸어갔어요.
그리고 어떤 이름을 지으면 좋을까 고민을 했지요.
자신의 이름은 헨리 콘. 그래서 헨리는 강아지의 이름을 '찰리'라고 지었어요.
찰리 콘! 근사한 이름이었어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헨리는 찰리에게 집안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었어요.
자신의 방과 비밀 장소도 기꺼이요.
그리고 이곳이 앞으로 찰리가 살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자꾸만 얘기해 주었지요.
헨리는 찰리가 다시 또 버려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지 않게 배려하고 또 배려했던 거예요.
엄마와 아빠는 찰리가 온 것을 싫어하지 않는 눈치예요.
헨리가 산책을 시켜 주고 먹이를 제때 챙겨줘야 한다고 알려주셨지요.
찰리와 함께 산책을 하고 먹이를 챙겨주는 일은 헨리가 해주고 싶었던 일이에요.
앞으로 언제까지나요~

엄마와 아빠는 찰리가 부엌에서 자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는 식탁 아래에 커다란 베개를 놓고 찰리의 잠자리를 만들었지요.
그곳은 보일러에서 따스한 기운이 나오는 곳이거든요.
찰리의 잠자리로 그다지 나쁘지 않을 거예요.
헨리는 낡은 곰 인형 보보를 찰리 옆에 놓아주었어요.
어릴 때 함께 자던 보보가 이제는 찰리를 지켜줄 거예요.
찰리와 보보 사이에 조그만 빨간 시계도 놓아 주었어요.
한밤중에 똑딱똑딱 시계 소리가 울리면 콩닥콩닥 가슴이 뛰는 소리처럼 들리거든요.
그 심장 박동 비슷한 소리를 들으며 안정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헨리는 참으로 다정한 아이, 그리고 찰리는 참으로 운이 좋은 강아지지요.
헨리는 자신의 엄마와 아빠가 그랬듯이, 찰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려 주었어요.
찰리는 쌔근쌔근 숨소리를 냈고, 그 소리를 들으니 헨리도 솔솔 잠이 왔지요.

헨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창밖을 내다보며 상상했어요.
눈쌓인 언덕 위에서 찰리와 함께 뛰어노는 모습을요. 아주 재밌는 시간일 거예요.
찰리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깜깜한 한밤중이었어요.
헨리는 그 소리가 찰리의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죠.
헨리는 서둘러 찰리에게로 달려갔어요.
얼른 달려가 찰리를 안아주고 안심시켜줘야 했거든요.

헨리는 찰리를 안은 채 천천히 집안을 돌아다녔어요.
다시금 자신의 방과 침대를 보여주었고,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계신 엄마와 아빠도 보여 주었죠.
찰리는 차차 안정을 찾아갔어요.
헨리는 찰리의 배를 쓰다듬어 주면서 다정히 말했어요.
"우리 언제까지나 친구로 지내자!"
친구라는 이 다정한 말을 찰리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잠이 들었던 찰리는 다시금 울면서 깨어버렸어요.
귀찮아하지 않고 다시 또 부리나케 달려가 찰리를 안아준 헨리.
찰리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어요. 어쩌면 꿈을 꾸었을지도 몰라요.
다시 또 버려지는 서러운 꿈을 꾸었을지도요.
헨리는 찰리를 안은 채 부엌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여주었어요.
"달님이 너를 위해서 달빛을 비춰 주는 거야."
헨리의 속삭임에 찰리는 행복해졌을 거예요.
다시 천천히 집 안을 보여주며 방으로 돌아온 헨리.
그런데 찰리가 침대 위에 앉자 그 자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보이네요.
엄마 아빠의 말씀이 떠올랐지만 헨리는 이대로 잠자리에 들고 말았어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키며, 그렇게 사랑을 나누다가 헨리와 찰리는 모두 잠이 들고 말았어요.
그렇게 헨리와 찰리는 깊고도 단, 그리고 따뜻한 잠에 빠져들었어요.
찰리가 우리 집에 온 첫날에 말입니다.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시종 이야기해주는 것도 반갑고요.
반려 동물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아이의 정서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게 몹시 좋을 것 같아요. 책임감도 가질 것이고, 체온의 따뜻함도 기억할 것이고요.
외국에서는 노숙자들이 춥기 때문에 강아지를 키우면서 많이 끌어안고 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친구이면서 큰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될 테지요.
트위터를 보면 유기견 관련해서 도움 요청하는 글이 자주 보여요.
버려지는 생명들이 안타깝고, 그들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고 또 그 손 잡아주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지요. 개인의 마음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정책적으로 이 분야에 대한 개선이 있었으면 합니다. 찰리에게 헨리가 나눠준 그런 온정이 곳곳에서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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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아르고

 

1979년 테헤란에 있는 미 대사관이 성난 시위대에게 점령당하자 6명의 직원들은 캐나다 대사 관저로 은밀히 피신한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CIA의 구출전문요원 토니 멘데즈(벤 애플렉)가 투입된다. 토니는 '아르고'라는 제목의 가짜 SF 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사를 세워 인질을 구출하는 작전을 세운다. 헐리우드 제작자들과 협력해 가짜 시나리오를 만들고 배우를 캐스팅해 기자 회견까지 열었다. 그리고 장소 헌팅이라는 명목으로 테헤란에 잠입한다.

**

영화 소개란의 줄거리를 다시 조금 줄였다. 이 사건은 실화였으며, 이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의 배경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역시 영화사 소개를 좀 더 옮겨 보자면

 

1950년 이란 국민들이 선출한 모사데크 민주총리가 미국과 영국 소유의 정유시설을 국유화해 국민에게 돌려주자, 미국과 영국은 쿠데타를 음모해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리자 팔레비를 그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이 젊은 통치자는 국민들의 굶주림은 아랑곳 하지 않고 파리에서 점심을 공수해 올 정도로 사치를 일삼았으며 그의 아내는 우유로 목욕을 했다. 1979년 분노한 국민들은 기어코 그를 몰아냈다. 그가 미국으로 망명하자 성난 시민들은 미국대사관으로 몰려갔다.

 

영화 도입부에 이 영화의 배경, 그러니까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미리 설명을 하는데,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와 비슷한 설정의 역사적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대체 미국은 전 세계를 상대로 얼마나 많은 범죄를 저지른 것인가. 그 죄값은 과연 치를 수 있는 것인가. 뭐 그런 생각들.

 

뭐, 그건 그렇고, 그렇다 해도 대사관 직원들을 목숨 걸고 구출해 낸 토니 멘데즈의 활약은 충분히 감탄할 만하다. 성공한 작전이라는 것을 알고서 영화를 봤는데도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영화는 조지 클루니가 제작했고, 주인공 벤 애플렉이 연출도 맡았다. 아, 다재다능하여라! 

 

 

 

저 멀끔한 배우가 저렇게 수염으로 덮어버리니 인상이 확 바뀐다.

 

이 작품에서 미국이 폐기한 문서들을 양탄자 만들던 솜씨로 조각조각 모두 이어서 복원했다는 내용을 보았는데, 정말 영화 속에서 그런 장면이 나왔다. 분쇄해버린 대사관 직원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맞추며 대조하는 모습. 어린 아이들의 고사리 손을 빌리긴 했지만 아무튼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을 사놓고 못 봤구나....  뭔가 좀 겹치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데 아님 말고!

 

 

 

 

 

 

 

 

 

 

 

 

 

 

영화 속에서 무사히 구출된 대사관 직원들이다. 영화 말미에 실제로 구출된 진짜 직원들의 장면들이 나왔는데 어찌나 똑같이 분장을 시켰던지, 이 사람들이 진짜 그 사람들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역시 영화를 핑계로 댈 만해!

 

★★★★

 

72. 내가 살인범이다.

 

15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쇄살인사건은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 채 공소시효가 끝났다. 사건 담당 형사 최형구는 자책감과 분노로 15년간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2년 후, 자신을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라고 밝힌 이두석이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자서전을 출간한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이두석은 참회 퍼포먼스를 하면서 일약 스타로 자리매김한다. 최형구는 마지막에 발견되지 않은 실종자를 미끼로 던져 이두석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공소시효는 끝났지만, 유가족의 고통은 당연히 멈추지 않았고, 특히나 마지막 희생자는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사적 복수를 꿈꾸고 있다. 어찌 보면 '친절한 금자씨'와 비슷하게 보이는데,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어지는 반전들에 금자씨와 다른 설정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배우들도 연기를 잘했고, 특히나 초반의 액션씬과 차 위에서의 추격전은 무척 강렬해서 긴장감이 가득했다. 물론, 관성이나 중력 같은 물리학적 법칙들은 간단히 무시해 주지만 영화는 원래 그런 데에는 너그러워야 하는 법! 

 

 

이두석으로 분한 박시후의 수영장 씬이다. 아, 옷을 입혀도 벗겨도 훌륭해요!

 

 

촬영 도중 화장 손보는 장면일까. 공주 거울과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손가락이 넘흐 잘 어울려주신다. 예뽀라~

 

 

박시후의 머리 스타일이 멋져부러~ 하고 사진을 가져왔는데 지금 보니 옆얼굴 라인도 예술이다. 눈이 호강하네~

 

 

도가니 이후 무척 잘 나가주시는 장광 배우님.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닥 좀재감이 없었다. 이분의 확실한 자취는 영화 26년에서 두둥!!!

 

영화 보고 돌아온 언니가 박시후 팬클럽에 가입을 하겠다는 둥 며칠을 설레발을 쳤다. 물론, 말뿐이긴 했지만 동감할 만큼 예쁘게 잘 나왔다. 다만, 그걸 너무 강조하다 보니 연쇄살인범 팬클럽 역할을 하는 중고생과 대변인 역을 했던 여변호사 등의 과장된 연기는 다소 불편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겠는데 이건 좀 촌스럽잖아!

 

이 영화 보고 나서 청담동 앨리스를 무척 기대했던 언니는 거기서 박시후가 찌질하게 나온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안 봐서 모르겠지만, 그런 캐릭터라고 하니 오히려 더 궁금해진다.  

 

★★★☆

 

73. 브레이킹 던 part 2

 

드디어 대망의 마지막회다. 파트 1에 해당했던 작년 개봉작에서 벨라는 딸을 낳으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고, 에드워드의 노력으로 뱀파이어로 다시 태어나면서 끝이 났다. 그리고 이번 완결편에서는 그렇게 뱀파이어로 제2의 삶을 살게 된 벨라와 그녀의 가족, 친구들이 볼투리 군대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내용이 전개된다.

 

 

 

 

 

 

 

 

 

사실 원작을 다 읽긴 했는데, 매해 개봉을 기다리는 사이 벌써 수년이 지나서 영화의 일정 부분이 원작을 그대로 옮긴 것인지 아니면 영화에서 바꾼 것인지 확신이 가질 않는다. 친구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만났을 때는 홀랑 까먹어서 물어보질 못했다. 아쉽아쉽.... 그러니까 그 부분이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총체적 부정? 이런 설정은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선택'에서도 보았고, 강풀의 '타이밍'에서도 이미 만났지만, 극적 효과는 여전히 꽤 컸다.

 

볼투리가와의 전투는 기대보다 박진감 있었다. 중간에 저렇게 바뀌었어? 라고 비명을 지를 만큼!  아로 역의 마이클 쉰은 왜 그리 귀엽던지... ㅎㅎㅎ 테이큰에서 딸 역할을 했던 배우가 뱀파이어로 나왔는데 비중이 무척 작았다. 이 영화 출연할 당시에는 그닥 유명하지 않았던 것일까? 

 

 

소설이나 영화니까 가능한 설정이긴 하지만, 뱀파이어의 삶은 무척 매력적이다. 늙지도 않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죽지도 않는다. 아주 강하고 빠르며, 독특한 자신만의 능력도 갖고 있다. 늑대로 변신하는 늑대소년에 비할 수가 없다. 게다가 외모는 또 얼마나 출중해 지던지... 그렇지만 피를 보면 갈증을 느끼는 삶이라니, 그건 끔찍하다. 나름의 '채식'으로 연명하긴 하지만 먹는 즐거움이 고작 그거라니 그것 또한 비극이다. 아무튼, 뱀파이어로 거듭난 벨라는 몹시 예뻤다. 깡말랐지만 그게 흉해 보이지 않고 아주 예뻤다. 어휴 부러워... 딸로 나온 르네즈미도 인형같이 예뻤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저 단아한 이마라니! 옆에 르네즈미 역의 배우는 눈이 참 예쁘다. 똘망똘망~

얼마 전에 로버트 패틴슨과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결혼한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이미 했다는 건가 할 거라는 건가. 둘 다 나이가 많지 않은데 헐리우드에선 결혼도 일찍 하고, 헤어지기도 잘 하고, 다시 합치기도 잘 하고... 그야말로 연애 천국인가???

 

 

(아마존 스타일이지만 '아바타' 스타일로 보인다. ㅎㅎㅎ)

 

하여간 영화는 끝났다. 그리고 이제 호빗이 3부작 중 1부를 개봉했다. 시리즈 영화를 시작하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지만 커다란 스케일은 보는 즐거움이 있다. 다음 편 나올 때는 앞의 이야기를 까먹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

 

74. 26년

 

영화 26년은 제작이 여러 차례 무산되면서 시민들의 참여로 제작비를 모아 드디어 개봉하게 되었다. 이때 후원금을 보낸 사람들을 시사회에 초대해 주었는데, 그 자리를 언니와 함께 다녀왔다.

 

원작이 2006에 연재되었기 때문에 80년 광주로부터 26년이 지난 시점을 의미한다. 연재 당시 있었던 에피소드들은 강풀 북콘서트 후기를 참조하시라~

 

지금은 이미 2012년이니 80년부터 따지면 32년이 맞겠지만, 영화는 26년이라는 제목을 고수했다. 그러니 사실상 이 사건도 과거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현재'의 이야기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대체한다.

 

광주의 학살범은 여전히 통장 잔고 29만원으로도 호의호식하며 얼굴 빳빳이 들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영화 속 김갑세처럼 용서를 빌라는 말이, 이제는 무의미하게 들린다. 심미진의 대사처럼 우린 그 사람한테 사과할 기회, 충분히 주었으니까. 자그마치 26년, 그리고 또 6년이 흘러버렸으니 말이다. 혹시라도 대선 결과가 좋았다면 뭔가 변화가 있었을까? 추징금 기한이 내년이면 끝나는데, 그는 또 다시 그렇게 자유를 찾는 것일까? 다시 또, 한없이 한숨이 솟는다. 이런 파렴치한 사람들에게는 '명예'란 애당초 아웃 오브 안중. 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돈을 빼앗기는 것일 텐데, 이거 법이 좀 바껴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후우....

 

초반 광주의 장면은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했다. 감독 인터뷰를 보니 제작비 때문이라고 했다. 실사로 찍으면 어마어마한 물량이 투입되어야 했을 것이다. 애니는 무척 잘 빠졌고(심지어 배우들도 똑같이 생겼고!) 시각적 효과도 컸다. 영화 초반부터 어찌나 놀랐던지...ㅜ.ㅜ

 

 

이전 캐스팅 류승범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서 진구에 대한 기대가 그다지 없었는데, 그는 200% 연기로 답을 주었다. 배역도 잘 소화해 내었고, 울림도 컸다. 심미진 역의 한혜진도 다시 보였다. 소속사에서는 CF도 끊길 거라며 말렸다던데, 한혜진은 그래도 괜찮다며 출연을 결정했다. 개념 배우다.

 

장광 씨는 '그 사람' 역에 아주 잘 어울렸다. 이전에도 드라마에서 동 배역을 맡았던 적이 있다고 하신다. 흐음, 처음이 아니었구나.

 

이 영화의 탄생에는 강풀 작가뿐 아니라 이상호 기자의 활약도 큰몫을 했다. 그가 취재해서 고발한 많은 것들이 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나한테 감정이 좋질 않아.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서... 껄껄껄~

 

이 장면이 그가 실제로 방송에서 말한 거라는 걸 알아차리고 뒤늦게 충격을 받았다. 영화 속 대사라고 해도 섬뜩한데 실제로 이런 말을 뱉었다니. 당시 그 방송을 본 광주의 유족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시 또 대선으로 돌아가서, 이번에 전라도, 특히 광주 분들께 많이 미안하다. 그분들의 상처는 언제 보듬어지려나.... 깝깝하다.  

 

 

영화가 끝나면 헨델의 '울게 하소서'가 울려퍼지고, 제작 두레에 참여한 깨시민들의 이름이 자막으로 올라간다. 저거 다 보는 데 대략 10분 정도 걸린다. 느긋이 음악 감상하며 이름 보는 재미가 컸다. 누군가 '미안합니다'라는 이름으로 입금을 했던데 마음이 짜안했다. 근데 저 이름들은 후원금 5만원 이상만 올라간 것이다. 2만원 후원금 보낸 사람들 이름은 지못미였다.ㅜ.ㅜ

 

 

영화의 1호 투자자이면서 ost '꽃'의 뮤직비디오를 담당한 울 공장장님의 귀여운 V자가 눈에 띈다.(라고 썼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ㅜ.ㅜ) 임슬옹 군은 교통사고를 당했던가. 하여간 아파서 휠체어 투혼!을 보여줌.

  

 

울 보스의 A8 이어폰이 갖고 싶다. 비싸서 엄두가 안 난다. 보스는 저 이어폰을 노래할 때 '모니터링' 용으로 쓴다.

 

영화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작전이 실패로 끝나면서 끝이 난다. 처음 원작을 읽었을 때는 그게 불만이었다. 현실과는 다르지만, 그렇게라도 그 사람이 '심판' 받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다. 그랬다면 '카타르시스'는 느낄 수 있겠지만 그걸로 끝일 테니까.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가려면 우리는 현실을 돌아봐야 한다. 이 영화의 엔딩에서 청와대가 멀리 보이는 광화문을 정면으로 보여준 것처럼.  

 

★★★★

 

75. 남영동 1985

 

이 영화는 보고 싶었던 영화이기보다 봐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보는 게 꽤 힘들 거라고 여겼는데 확실히 힘들었다. 이 영화는 엄마를 모시고 언니와 함께 봤다. 나중에 엄마와 함께 26년도 보았는데, 이 모든 건 나름 투표를 위한 포석이었다. 힘들게 쟁취한 민주주의의 고마움, 그리고 그것을 탄압한 독재 세력에 대한 반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 두 배우는 영화 26년에도 같이 나온다. 배우 이경영은 26년의 김갑세보다 이 작품에서 맡은 이두한(고문기술자) 역이 더 잘 어울렸다. 미안하게도.

 

영화는 두시간 내내 김종태가 무참하게 고문받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사실 이 영화를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고 김근태 씨의 삶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고, 반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울 엄니처럼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온 경우도 일부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소화하기에 이 영화의 적나라한 고문들은 그야말로 관람 자체가 고문이 될 것만 같다. 물론 고문 당사자가 겪은 수십 년의 고통에 비하면 두달 동안 고생한 배우와, 두 시간짜리 고통에 참여한 관객으로서 불만을 내놓는 게 미안하기는 하다. 다만 이걸 좀 더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소화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근태는 유언으로 2012년을 점령하라고 했는데, 영화를 볼 당시에는 그 첫발자국을 잘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한숨만 푹푹 나온다. 죄송합니다.ㅜ.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얼마 뒤 손석희의 시선 집중 '토요일에 만난 사람'에 방배추(방동규) 씨가 출연했다. 2주에 걸쳐 방송이 나왔는데, 이분 말씀이 당시 김근태 씨가 끌려갔을 때 말 안 들으면 방배추처럼 맞을 수 있다고 협박을 받았더랜다. 방배추가 받은 고문은 이보다 더 가혹했다는 이야기. 그런데도 방배추는 수십 년 뒤 길에서 마주친 이근안이 도망가는 것을 붙잡아서 기어이 고기를 사주셨다고 한다. 근데 염치 없게도 이근안이 너무 많이 먹었다고....;;;; 해서 돈이 모자라서 집사람에게 돈 들고 오라고 연락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해 주셨다. 이것 참 웃을 수도 없고....;;;;;

 

 

 

 

 

 

 

 

 

 

 

 

★★★

 

76. 비지터

 

광화문 씨네큐브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 상업영화 일색으로 바뀔까 봐 걱정이었다. 다행히 그후로도 씨네큐브는 비상업적인 좋은 영화들을 많이 소개해 주었다. 이 작품도 그렇게 만났다.

 

20년째 같은 시간, 같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단조로운 삶을 살던 월터 베일 교수. 논문 발표를 위해 뉴욕으로 간 그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예상치 못한 불법 이민자 ‘타렉’ 커플과 마주친다. 월터는 갈 곳 없는 그들을 잠시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고, 타렉은 감사의 뜻으로 그에게 젬베를 가르쳐 준다. 밝고 경쾌한 젬베의 리듬은 경직된 그의 삶을 살며시 두드리고, 클래식만 듣던 노교수의 건조한 삶에는 서서히 활기가 찾아온다. 그렇게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의 서먹한 관계와 경계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던 어느 날, 타렉이 불법 이민자 단속에 걸려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는데…

 

단조로운 삶에 젬베라는 악기를 통해 변화를 준 것도 월터에게는 큰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집에 무단거주를 한 이민자들을 머물게 해준 것은 신사적인 매너의 자연스런 발현이었을 테지만, 그가 불법 단속에 걸린 타렉을 위해 동분서주한 것은 그 자신의 마음을 움직인 보다 뜨거운 감정 덕분이었을 것이다. 아닌 척 포장하고 근엄을 떨기도 했지만, 그가 스스로 까발린 자신의 모습, 그리하여 자신이 마주친 제 모습과의 조우가 영화 속에서 참 좋았다. 해피엔딩으로 정리하기 위한 무리수를 두지 않은 잔잔함도 좋았다. 그런데 마음에 안 든 것은 제목이다. 꼭 '비지터'라고 영어 발음 그대로 써야 했을까? 이런 영화 제목은 비단 이 작품뿐 아니라 여러 작품 들에서 보여주는 추세이긴 한데 참 못나 보인다. 우리말로 번역해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것들을 굳이 영어 제목으로 표현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냥 '방문객' 혹은 '방문자'라고 해도 중의적으로 여러 의미들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

 

77. 돈 크라이 마미

 

사실 이 영화는 26년과 남영동 1985를 보고 난 직후였다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감정적으로 힘든 영화만 연달아 보는 것이 될 테니까. 하지만 다행히 그 사이에 '비지터'를 보면서 감정의 순화 과정이 있었다. 해서 보았는데,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든다. 줄거리 이상을 보여주지 않은 영화였다.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단지 미성년자라는 이유만으로 법의 심판을 비켜가는 이야기는 많이 접했다. 만화 속에서, 소설 속에서, 그리고 영화 속에서도... 또 '내가 살인범이다'와 마찬가지로 유가족의 사적 복수에 대한 것도 이미 많이 접했다. 대표적인 게 친절한 금자씨와 세븐 데이즈. 그런데 이 영화는 뭔가 다 어설프다. 당연히 이 작품에 나온 범죄 사실은 공분을 일으키기 충분하지만 그걸 소재로 삼아 영화 속에 녹여내기엔 여러모로 부족해 보였다. 특히나 여기 출연한 동호는 심하게 연기를 못했다. 제목을 치니 연관검색어에 동호 발연기가 뜬다. 누구나 그렇게 보였나 보다. 드라마 로열 패밀리에서도 연기 참 못했는데 여전히 별로네. 남보라가 분한 피해자 학생이 어리기도 했고, 이 사건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도움의 대상이 마땅히 없기도 했지만, 두번째 사건은 답답해서 많이 화가 났다. 마지막에 유오성은 왜 총을 다리나 팔에 쏘지 않았는지도 좀 납득이 가질 않고... 여러모로 많이 부족했다.

 

 

 

 

 

 

 

 

 

 

 

★★☆

 

11월의 첫째 주에는 항상 정모가 있었다. 그러니까 십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우리가 좋아하는 배우의 생일 주간이기 때문이다. 외국 사람이기 때문에 늘 우리끼리의 모임이지만 그래도 꾸준히 이어지는 우리만의 모임이다. 이날도 어김 없이 멀티방을 예약해서 다섯 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2차로 떡볶이를 먹고, 3차로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이어졌다. 난 3차는 가지 않고 돌아오긴 했지만, 아무튼 몹시 재밌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애정도 10년 이상 훌쩍 지나가면 '빠'가 '까'가 되는 것은 순식간의 일! 우리는 초은준 얘기는 케이크에 촛불 끌 때와 그가 출연한 방송을 볼 때 정도로 대략 1시간이 못 되는 시간만큼만 쏟고, 나머지 네 시간은 오로지 이민호 얘기로 보냈던 것 같다. 때마침 드라마 '신의'가 끝난 시점이었고, 우리는 김희선의 연기 변화와 이민호의 미모 찬양에 열을 올렸다. 당시 우리가 가장 환호했던 사진은 이거다. 

 

 

드라마 1회의 한컷이다. 현재 내 핸드폰 바탕화면이기도 하다. ㅎㅎㅎ 푸른색이 잘 어울리네~ 신의는 송지나 각본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허술하긴 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재밌게 보았다. 그 덕분에 뒤늦게 '시티헌터'를 챙겨보았는데, 원작 만화 시티헌터와는 너무 무관했지만, 불의를 응징하는 로빈훗이나 임꺽정 같은 캐릭터가 시원한 맛이 있었다. 그 안에서 묘사된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의 나쁜 행태는 피를 끓게 했는데, 아마도 현실에서는 그보다 나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또 속이 부글부글... 역시나 선거 결과를 떠올리며 부글부글.....;;;;;;;

 

 

 

 

 

 

 

 

 

11월 16일에는 시청 광장에서 있었던 '26년 콘서트'에 다녀왔다. 비가 몹시 많이 오는 날이었고, 그래서 우비를 입고 우산을 쓰고도 온통 다 젖었던 악조건이었지만 몹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당시의 후기는 요것!

 

이날 집에 가려고 돌아나오려던 찰나, 누군가 나를 불렀다. 학생 둘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서 나에게 잠시 인터뷰를 해도 되겠냐고 묻는다. 서울대학고 영상제작 동아리 생틀(생각을 담는 틀)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이들은 '제5공화국'에 대한 다큐를 제작 중이라고 했다. 여전히 비가 많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서 인터뷰에 응했다. 내게 던진 질문든 대략 이랬다.  5.18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얼마 전에 있었던 육사 사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런 사건들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과,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등등등....

 

5.18과 전두환에 대한 이야기는 다소 흥분하며 이야기를 했고, 추징금 꼭 받아내야 한다며 역시 광분했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선거에서 일단 이기는 거라고 못 박았고...(ㅜ.ㅜ)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바른 사회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 했다. 그러기 위해서 언론이 바로 서야 하고 역사 교육 제대로 시켜야 한다고. 그리고 그를 위한 작은 실천의 일환으로 이 영화가 잘 되어야 한다고(막간을 이용한 홍보!) 강조했다. 질문을 더 던져 주었더라면 이 왜곡된 현대사의 뿌리는 전두환 박정희를 거슬러 올라가 이승만이 제일 문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 친구들이 생각보다 질문을 많이 안 던졌다. 자체 상영하는 작품이라서 내가 볼 기회는 없겠지만, 아무튼 그 학생들의 작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1월에는 뮤지컬을 두편 보았다. 황태자 루돌프와 맨 오브 라만차. 두 작품은 같은 날 예매했다. 같이 보기로 한 언니가 멀리 진주에서 왔는데, 차비가 부담스러운지라 하루에 몰아서 보기로 했다. 먼저 오후 두시에 충무아트홀에서 '황태자 루돌프'를 임태경 버전으로 보았다.  

 

 

그 자체로 황태자스런 임태경이었지만, 작품은 많이 재미 없었다. 꽤 졸다가 나왔다. 내 돈...ㅜ.ㅜ 어제 만난 내 친구는 안재욱 버전으로 보았다던데 그 친구도 무척 지루했다고 한다. 배우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루돌프의 엄마를 주인공으로 한 '엘리자벳'를 무척 인상 깊게 보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작품인 이 뮤지컬을 꽤 기대했었다. 그런데 기대에 많이 못 미쳤다. 작품은 '자살'로 루돌프의 죽음을 다뤘지만, 프로그램을 읽어보니 '타살' 쪽으로 더 기운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이어 밥먹을 새도 없이 부랴부랴 잠실로 이동해서 샤롯데 씨어터에서 '맨 오브 라만차'를 보았다. 류정한 주연이었는데, 이 작품은 류정한 팬클럼 '건승정한'의 전관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전체 좌석을 류정한 팬들이 통으로 예약해서 본 것이다. 그 덕분에 40% 할인을 받아서, 루돌프보다 저렴하게 표를 끊고 더 좋은 좌석에서 볼 수 있었다. 가족석이 4자리 있었는데, 류정한은 할인 안 된 가격으로 전액 텔레뱅킹을 했더라. 그것 보고서 괜히 더 좋아함. ㅎㅎㅎㅎ

 

작품은 세르반테스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자신의 작품 속 돈키호테를 연기해 내는 액자식 구성이었는데, 내내 괴롭히던 졸음을 단번에 쫓아내는, 강렬하고도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뮤지컬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출연 배우들이 나왔고, 무대 뒷이야기와 작품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내가 저 배우라면 이 시간이 얼마나 벅찰까, 괜히 감정이입이 되어서 더 뜨거웠다. 

 

 

팬클럽에서 준비한 티켓 봉투와 이벤트 선물이다. 예쁘다! 

 

 

정말 함께 해서 더 좋았다.  

 

   

프로그램을 배우 별로 따로 팔았다고 하던데, 나는 사지는 않았다. 지출이 많은 하루였으므로 자제 모드!

  

  

라만차 로고가 마음에 든다. 돈키호테스럽다. 자유롭고 당당하다.

 

그밖에 11월에 있었던 특별한 일이라면 역시 운전 면허증을 딴 일! 비록 자동차가 폐차장으로 직행해서 면허는 바로 장농행이 되었지만, 자가 운전할 어떤 날이 언젠간 오겠지. 그러면 지방으로 공연을 보러 다닐지도 몰라... 후후후...

 

펼친 부분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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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12-23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살인범이다, 26년, 남영동 1985~ 3편 겹쳐요.
바쁜 와중에도 많이 보고 정리도 꼼꼼하게 잘하는 친절한 마노아님!^^

마노아 2012-12-23 23:52   좋아요 1 | URL
중간에 딴짓을 하긴 했지만 다 쓰는데 몇 시간이 걸렸는지... 초반에 약간 날려서 다시 쓰기도 하면서 10시 넘어 올렸어요. 하루가 다 갔네요. ㅎㅎㅎ

라로 2012-12-24 0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건승정한 팬클럽 대단한걸요!!
암튼 저는 뮤지컬이 쥐약이라 이상하게 뮤지컬만 보면 졸;;
예전에 노클담의 곱추,,그 비싼 표,,,생각하면 속 쓰려요,,,근데 이 페이퍼 읽으니 그때 생각이;;;ㅎㅎㅎㅎ
암튼 26년의 진구,,,연기 정말 200%로 보답이라는 말씀에 추천요!!!

부지런한 마노아님~~~
2013년엔 꼭 민호닮은 멋진 남친을 위해 멀리서 빌어드립니다,
카드는 못 보내지만 댓글로 인사대신할께요.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이어~~~~~.

마노아 2012-12-24 12:21   좋아요 0 | URL
뮤지컬을 좋아하고, 제가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는데도 가끔 저도 보다가 졸아요.
엇그제는 연극이 너무 지루해서 역시 보다가 졸았어요.ㅎㅎㅎ
노틀담의 곱추를 보지 못했는데 넘넘 보고 싶어요. 뮤지컬 노래는 아주 좋더라구요.^^

아아아, 크리스마스 2부인 오늘, 영화 한편 볼까 하다가 혼자 보는 것 너무 처량해서 오늘은 자제할까봐요.
내년엔 나비님의 기도발이 꼭꼭 먹히기를 소망해요.^^
나비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이어~
우리 따뜻한 시간 보내도록 해요~

프레이야 2012-12-24 0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리스트에요. 마노아님표 영화 페이퍼^^ 비지터 보셨군요. 전 그걸 놓쳤어요. 너무 힘든 영화들 사이에 잘 보셨네요. 류승범보다 진구요! 전 류승범 자체가 힘들더라구요ㅎㅎ

마노아 2012-12-24 12:22   좋아요 0 | URL
비지터 주옥같은 영화였어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지요.
류승범은 확실히 캐릭터가 너무 강해서 그 자체로 힘든 면이 있는 강렬한 배우예요.
프레이야님 메리 크리스마스~ ^^
 
왕의 하루 - 실록과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 하루 시리즈
이한우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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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하루’라는 제목이 흥미를 돋운다. 조선의 지존이지만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그 왕의 하루가 어떠할지 관심이 갔다. 왕의 공적인 하루와 왕의 사적인 하루 역시도.

 

책은 세 개의 주제를 담아냈다. 1부는 ‘역사를 바꾼 운명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태조 이성계, 연산군 이융, 광해군 이혼, 소현세자 이왕과 정조 이산의 하루가 펼쳐졌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하루를 소개했다. 태조 이성계의 입을 빌려 저자는 그가 조선을 개국하던 그날까지도 고려의 중흥을 기대했고, 위화도 회군 역시 그가 새 왕조를 열 목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었고 백성의 바람이었다고. 글쎄다. 그다지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저자 스스로도 위화도 회군은 왕명을 어긴 정도가 아니라 반역이라고 말을 했으니.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문을 열었던 그날이 역사를 바꾼 운명의 하루였다는 것에는 물론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그 순간까지도 고려의 중흥을 바랐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고려의 충신으로 시작을 했을지언정 그는 분명 새 왕조를 열었다. 그것도 주도적으로. 주변에서 팔 걷어붙이고 밀어붙였다 해도 그가 한사코 만류했다면 그는 고려의 마지막 신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조선의 태조가 되었다고 해서 사적 탐욕으로 인한 결과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만큼 당시 고려가 썩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내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고 말을 하는 것은 어째 덜 당당해 보인다.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린 연산군 부부상이다.)

 

연산군 이융의 파멸은 그가 당한 것이 아니라 ‘자초’한 것이라고 그의 입술을 빌려 설명했다. 연산군이 아니니 장담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왕위에서 쫓겨날 무렵의 언행은 실로 비정상이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향응을 누리며 아주 퇴폐적으로 살았는데, 영화 ‘왕의 남자’에서 그려진 모습처럼 그는 행복해 보이기보다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니 소제목 ‘허무가 불러온 파멸’이란 제목도 잘 어울린다.

 

광해군 이혼의 하루는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던 날을 묘사했다. 저자는 광해군의 입을 빌려 요사이 추켜세워지고 있는 그의 ‘중립외교정책’이 호도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과장된 재평가라는 것이다. 이 부분도 글쎄, 나는 너무 깎아내린 것이 아닌가 싶다. 과대평가된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잘 짚어낸 부분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불필요한 전쟁을 두 번이나 일어나게 한 인조에 비한다면 그가 받아온 평가들은 그의 죄업보다 늘 가혹해 보였다. 그래서

 

내성외왕(內聖外王)에 다가가려 했던 선조의 꿈은 아들 광해군에 의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119쪽

 

와 같은 표현은 동의할 수가 없다. 오히려 광해군에게 이런 불우한 업보를 남겨준 원죄는 선조에게 있다고 믿고 있다. 늦은 나이에 계비에게서 아들을 본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솔직히 어쩔 수 없었다고 여기지도 않지만) 자신의 적자 콤플렉스로 후왕의 불안감을 부추겨서는 안 되었다. 선조의 행실이 영창대군의 비극을 불러왔고, 이어서 광해군의 비극도 낳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서 이미 병자호란의 오욕이 싹튼 거라고.

 

 

(선조의 글씨와 그림이다.)

 

 

소현세자 이왕의 하루는 그가 죽던 날의 하루였다. 알려졌다시피 소현세자는 독살된 흔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저자는 인조의 방조로 소현세자가 죽었다고 묘사했지만, ‘방조’는 좀 약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인조의 주도로 진행되었지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다는 게 맞지 않을까? 세자가 죽은 뒤 이루어진 뒤처리를 본다면 말이다. 사실 인조가 직접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아들을 죽인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말은 안 되지만, 권력이란 부자 사이에서도 나눌 수 없는 무서운 습성을 지녔으니. 저자는 숙종 대에 가서야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이 신원되는 것을 두고 소현세자 이후 왕실의 아들이 귀해진 것을 ‘저주’로 보고 그것을 풀려고 한 노력이라고 보았다. 조선 왕조 내내 적자로 왕위가 계승된 사례가 그다지 없기도 하지만 확실히 후기로 가서는 아들이 무척 귀해진다. 그래도 숙종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는 표현은 너무 단정적인 게 아닐까 싶다. 강빈의 신원에 대한 이야기는 숙종 이전에도 나왔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것이고, 숙종 때에 가서는 보다 자유로워진 까닭이지 싶다. 왕권도 그만큼 강해졌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정조 이산의 하루에 대해서 묘사했다. 역시 숨을 거두던 날의 하루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수많은 의혹을 부정하며 노론 벽파에 의한 타살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직접적인 타살은 아니어도 그가 받은 스트레스가 사인이 되었을 수는 있다고 여기지만.

 

다섯 군주의 역사적 하루에 대해서 묘사한 부분은 길지 않다. 나머지는 그 임금들의 역사적 하루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길게 설명했다. 역사적 맥락이 있어야 그 극적인 하루도 설명이 될 테니 말이다. 이 부분에서 나로서는 기존에 읽었던 여러 역사책들과 내용이 많이 중첩되어서 다소 지루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을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2부는 ‘군신이 격돌한 전쟁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전개된다. 이방원과 정도전 편에서는 혁명 동지들의 비극적 결별을 다루었고, 수양과 김종서 그리고 한명회 편에서는 군신 대립의 뿌리를 찾았다. 성종이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한명회에 맞서 대립하는 장면에서 잠시 응원하는 마음도 생겼지만, 결국 한명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아서 애석함을 느꼈다. 자유로울 수 없는 권력의 뿌리였던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태종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혁명 동지를 베어버림으로써 후세에 남을 빚을 스스로 갚아버렸으니 그 결단력이 대단해 보인다. 그에게 희생된 사람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명회가 등장했으니 수양대군의 계유정난도 같이 소개되는 게 마땅하다. 똑같이 작전이 사전에 세어나가서 위기를 맞았는데, 뽑은 칼을 휘두른 세조는 왕이 되었고, 계획을 뒤로 미룬 단종 복위 세력은 사육신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죽었다. 후세에 이름은 남겼지만 중대한 결정 앞에서 문신의 머뭇거림과 무신의 결단력이 대조되는 순간이라 안타까웠다.

 

이런 대조성은 중종과 조광조 편에서도 소개된다. 성리학적 이상 세계를 꿈꾼 조광조와 왕권 강화를 꿈꾸며 그의 손을 빌린 중종의 길은 어긋날 수밖에 없다. 속전속결로 덤벼야 할 일도 있지만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이고 인내를 키워야 하는 일도 분명히 있다. 서둘러 왕권을 강화하려던 예종이 의문스럽게 죽었고, 서둘러 훈구파에 대항해 사림파를 키우려 했던 조광조도 기묘사화와 함께 스러졌다. 그러나 또 오묘하게도, 조광조는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 내내 추앙받았고, 제자리걸음으로 왕위를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중종은 사관으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5성(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으로부터 공문십철(공자의 뛰어난 열 제자)과 송나라 때의 주자학자 6명을 기리면서, 동시에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에서 고려의 안향과 정몽주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따라서 서인들은 종묘보다는 문묘에 배향되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고, 당파의 문묘 배향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거는 적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268쪽

 

유교의 나라 조선이니 문묘 배향이 민감한 것은 당연했다. 저자는 서인과 문묘 배향 편에서 군주를 초월한 공자의 권위에 대해서 다뤘는데 이 부분이 가장 재밌게 읽혔다. 종묘에 배향되는 것보다 문묘에 배향되는 것을 더 영예롭게 여겼던 서인들이니 군권보다 신권을 더 위에 놓았다는 평가가 적절해 보인다. 그러니 그들의 권력욕이 의문사를 의심케 하는 임금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관점들도 지나치게 보이지 않는다. 신하들은 종묘 배향을 두고 싸웠고, 그들이 여기에 목숨을 거니 그걸 이용해서 줄다리기를 하는 임금도 당연히 나왔다. 인조와 숙종이 그랬다. 확실히 남의 손으로 왕이 된 중종의 반정과 제 손으로 왕위를 차지한 인조의 반정은 격이 달랐다. 주도권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인조는 적절히 밀당을 하면서 제 권력을 지켰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을 허락하지 않았다. 반면 숙종은 배향을 허락하되, 정권이 바뀌면 제 말과 행동을 뒤집었다. 왕권을 높일 수만 있다면 언사를 뒤집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숙종이었다. 그의 왕권은 높아갔지만 정치질서는 무너졌고, 그가 부추기거나 방조했던 탓에 서인과 남인은 죽고 죽이는 관계로 정착되어갔다. 인조만큼이나 나쁜 임금이다.

 

마지막으로 왕과 실록 편에서는 역사를 두고 벌이는 전쟁을 담아냈다. 역사전쟁!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기록 유산에도 등재된 만큼,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치열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사관들이 왕권에 맞서 지켜낸 그 결기도 존경스럽다. 그리고 그 가치 앞에서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은 태종의 결정도 멋졌다. 좋은 선례가 이후 조선왕조의 역사 줄기를 바로 잡아준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선 결과가 나오자마자 5.16이 쿠데타에서 ‘혁명’으로 둔갑하는 작금의 사태가 심란하기 짝이 없다. ≪월간 박정희≫가 복간되는 판이니 앞으로 놀라고 한숨 쉴 일은 꽤 많을 테지만.

 

3부는 ‘하루’라는 의미에서 가장 이 책의 주제에 잘 맞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왕의 첫날이 되는 ‘즉위식’과 왕으로 다듬어 가는 제왕학 수련, 그리고 정치 행위의 결정체로 꼽힐 ‘왕의 결혼’, 그리고 묘호에 담긴 정치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 내용들은 모두 조선 전체 임금에 대해서 짧게나마 언급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통사이자 주제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권력 앞에 선 아버지와 아들들’이라는 제목으로 부자 사이의 권력 다툼에 대해서 다뤘다. 영조와 사도세자, 태조와 태종과 달리 효심이 깊었던 세종과 문종의 이야기도 소개되었다. 세조 역시 세종에게는 효를 다했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세조만큼 큰 불효자가 있나 싶다. 역시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공효와 사효가 충돌한 정조에 대해서 소개하고 책이 끝났는데 마무리가 좀 급작스럽게 느껴졌다. 뭔가 좀 더 뒷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말이다.

 

책을 다 읽는데 꽤 오래 걸렸다. 제목은 무척 흥미로웠는데 기존에 읽었던 역사서와 중첩되는 부분들이 많아서 진도가 조금 더뎠고, 이번 한주는 얼마나 폭풍같은 날들이었던가. (하아, 잠시 한숨 좀 쉬고 지나가자....) 때로 저자의 의견에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은 각자 생각이 다른 것이니 얼마든지 서로 이야기할 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아쉬운 대목들이 있는데 좀 옮겨보겠다.

 

72

성균관에 입학하게 될 경우 외부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에 관해 어떤 식으로건 듣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성균관에 입학을 해도 형식적인 것일 뿐, 등하교를 하는 게 아닐 것 같은데 좀 이상하다.

274

숙종 대 말인 1712년 유생 1,000여 명이 상소해 청하면서 김장생의 문묘 배향 운동이 시작됐다. 이때는 숙종이 친왕적인 소론을 물리치고 노론과의 타협을 시도할 때였다. 결국 운동을 시작한 지 5년 만인 1717년 상소가 받아들여져 문묘의 동무에 배향됐다. 동무란 문묘의 정면을 바라보고 오른쪽을 말한다. 왼쪽보다 더 권위 있는 자리다.

>>>문묘 입장에서 왼쪽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나 싶다. 조선에선 왼쪽이 더 권위 있는 자리이니까.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은 것처럼.

304

단종의 경우 역시 눈물의 즉위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양과 안평대군 등 권좌를 노리는 숙부들이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 안평대군도 수양과 마찬가지로 권좌를 노렸던 것일까?

309

정조가 영조의 유언을 무시하고 폐묘를 쓴 것을 생각한다면

>>> 폐묘를 썼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329

≪대학≫보다 ≪소학≫을 중시한다는 것은 왕권보다는 신권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유가 궁금하다.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343

그 후 신씨(연산군의 비)는 중종의 배려 속에 편안한 삶을 살다가 1537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부적절한 표현 같다. 편안한 삶이었을 리가. 그냥 천수를 누렸다 정도가 맞아 보인다.

363

왕위는 사실상 세자 역할을 해왔던 후궁 소생 광해군이 이었다.

>>> 사실상 세자 역할이라니, 실제로 세자였지 않은가. 무려 17년이나.

364

그나마 (광해군은) 67세까지 천수를 누렸다는 점에서 곧바로 죽임을 당한 연산군과는 차이가 있었다.

>>>연산군은 병사가 아니었나? 타살이었나?

365

한마디로 영조 이후의 묘호는 엉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따른 왕실 권위의 추락과도 무관하지 않다.

>>>영종이 영조가 되고 정종이 정조가 된 것은 고종이 황제가 됨으로서 추존하여 바뀐 게 아니었던가?

383

왕위는 이복동생 적자 명종에게 넘어간다.

>>>인종도 적자였는데 굳이 명종 앞에 ‘적자’라고 붙이는 건 적절치 않아 보인다.

 

외삼촌 윤원형의 폭정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효자라고 평하기는 곤란하다.

>>>윤원형 폭정 시대는 일부러 연 것이 아니고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그리 된 게 아닌가? 열 두살 명종이 어머니를 어떻게 거스르나? 그로 인해 불효자가 된다는 건 좀 납득이 안 된다.

383

선조의 길이 아닌, 성종의 길을 따른 것이다.

>>인조가 선조의 길이 아닌 성종의 길을 따랐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수정했으면 하는 부분들이 있다.

 

51

홍산에서 대승를 거둔>>> 대승을 거둔

70

연산군의 ‘친모’ 역할을 했던 정혜왕후 윤씨>>정현왕후

99

신성군과 신립은 둘 다 임진왜란이 터지던 해에 세상을 떠나지만이 혼인은>>>떠나지만 이 혼인은

136

1636년 조선 조정은 군왕의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을 청의 수도 심양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1637년

153

이조판서이나 병조판서를>>>이조판서나

172

밖에서는 둘째 형님인 익안공 이방의와 셋째 형님인 회안공 이방간이>>>셋째 형님과 넷째 형님으로 수정

207

군권을 통괄하는 중외병마 도통사>>>내외병마로 검색이 되던데 어느 게 맞는지 모르겠다.

222

예종의 분경 엄단 지시는 구체적으로 ‘종친, 재추, 공신’를 찍어서 >>>공신을 찍어서

233

한명회가 그만큼 중국 사신 정동와 밀착해 >>> 정동과

286

전주에는 실록뿐 아니라 경기전에서 태조의 어진도 모신 경기전도 있었다.>>> 경기전 중복

287

1599년 마침내 7년 전쟁은 끝났다. >> 1598년이 아니라?

299

원상 제도는 어린 성종이 즉위할 때 수렴청정의 보완 방식으로 설치된 임시 제도다.

>>> 예종 때부터라고 알고 있다. 제도로 확립되기 전에는 단종 때의 김종서가 해당되기도 하고...

304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1455년 윤6월 11일 경복궁 사정전에서 노산군을 알현한 후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갖는다.

>>>이때는 노산군이 아니라 ‘상왕’

323

세조는 당시의 석학들을 불러모아 함께 ≪주역≫을 읽고 읽기 편하도록 >>> 읽고의 중복. 쉼표가 들어가거나 다듬을 필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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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하루 - 실록과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 하루 시리즈
이한우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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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루에 물시계와 함께 큰 종이나 쇠북을 걸어놓고 밤 10시경에 종을 스물여덟 번을 쳐서 인정을 알리면 도성의 8문이 닫히고 통행금지가 시작되며, 새벽 4시경인 오경삼점에 종을 서른세 번 쳐서 파루를 알리면 도성의 8문이 열리고 통행금지가 해제됐다. 이 제도가 언제부터 실시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학계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하고 도성 구축을 완료한 후부터로 추정한다. 인정에 스물여덟 번의 종을 울리는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 28수에 고하여 밤사이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고, 파루 때 종을 서른세 번 치는 것은 제석천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 고하여 그날 하루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불교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인정이 울린 후 도성 안에서는 통행이 금지됐는데 이를 어기는 사람을 범순자라 했고 이들을 단속하는 사람을 순작군이라 했다. 범순자는 경수소에 구금했다가 그 다음 날 위반한 시간에 따라 10도, 20도, 30도 등 차등 있게 곤장형을 집행했다.
-10쪽

즉위와 함께 선조는 궁중 법도에 따라 명종의 양자로 입적됐기 때문에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혼인을 할 수 없었다. 인순왕후를 비롯해 주변 신하들은 선조가 여자 문제에 대해 좀 더 인내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정비에 앞서 후궁을 들일 경우 훗날 후사 문제가 복잡하게 뒤얽힐 수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당시 혈기를 참기 힘든 십대 후반이었고, 방계승통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지존은 지존이었다. 제도적으로 혼인은 금지돼 있었지만 남녀 문제는 사생활이었고 제3자가 왕의 사생활을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선조는 정식 혼인에 앞서 궁중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 나인을 가까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바로 임해군과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다. 실록에는 ≪선조수정실록≫에만 공빈 김씨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단 한 건 실려 있을 뿐이다.
-85쪽

성패의 갈림길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수양은 결심했다.
"저들이 알았다 하더라도 회의하는 데 3일, 계획을 세우는 데 3일 약속하는 데 3일로 쳐도 족히 8,9일은 걸릴 것이다. 우리가 정한 10일의 기한만 어기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말이 자꾸 입에서 나오면 비록 사람은 알지 못하더라도 귀신이 알고, 귀신이 알면 결국 사람이 아는 것이다. 혹시라도 입밖에 내지 말고 더욱 조심해 기다리거라. 그리고 다시는 와서 의논하지 말라."
-219쪽

겸재 정선의 그림 중에서 <압구정도>를 보면 압구정의 모습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 후 이 정자는 박영효의 소유가 되었다가 갑신정변이 일어나 박영효가 국적(國賊)으로 일체의 재산이 몰수될 때 헐렸다고 한다.
-228쪽

17세 안팎의 나이였던 조광조는 ‘소학 동자’ 김굉필로부터 학문보다는 인격적인 면에 깊은 감화를 받았을 것이다. 물론 조광조 자신에게도 그런 면모가 내재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시대적으로는 연산군의 폭정과 난행이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폭정과 도덕절대주의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244쪽

1515년 2월 하순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 윤씨가 그토록 기다리던 원자(훗날의 인종)를 낳은 후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3월 1일 장경왕후 윤씨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들자 중종은 궁 밖으로 ‘피병’을 하겠다고 했다가 승정원으로부터 일종의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전염병이 아니라 산후의 질병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에 앞선 1월 3일에는 "아직 국본이 세워지지 않았다"며 후궁을 들이라는 어머니의 권고를 신하들에게 밝혔다가, 우의정 김응기의 거센 반론에 부딪힌 바 있었다. 장경왕후가 만삭일 때에 이런 논의를 했던 것이다.
-249쪽

장경왕후가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조정은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장경왕후 윤씨의 아버지는 윤여필, 어머니는 병조판서를 지낸 박중선의 딸이었다. 당시 조정은 반정공신 트리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그중 박원종이 바로 박중선의 아들이다. 반정 직후 중종의 부인이었던 단경왕후 신씨를 강제 폐비시키고, 조카딸을 후궁으로 밀어넣어 제1계비의 자리에 앉힌 것도 다름 아닌 박원종이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일까? 성종 즉위 초 한명회가 했던 역할을 중종 초에는 박원종이 하고 있었다.
-249쪽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5성(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으로부터 공문십철(공자의 뛰어난 열 제자)과 송나라 때의 주자학자 6명을 기리면서, 동시에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에서 고려의 안향과 정몽주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따라서 서인들은 종묘보다는 문묘에 배향되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고, 당파의 문묘 배향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거는 적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268쪽

특이하게도 수정의 범위가 가장 미미했던 ≪숙종보궐정오≫를 제외한다면 역대로 수정, 개수, 수정 등의 작업을 추진한 세력은 서인과 노론이었다. 그들은 역사를 장악해야 당대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권력을 쥘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284쪽

조선에서 즉위식은 기본적으로는 상중에 치러지기 때문에 길례가 아닌 흉례로 분류된다. 지금 보았듯이 세상을 떠나고 정상적으로 성장한 세자가 왕위를 이었을 때 즉위식 현장은 눈물바다가 될 수밖에 없었다.
-302쪽

정희왕후 윤씨가 왕비가 되면서 파평은 하루아침에 파주목으로 승격된다.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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