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막대 파란 상자 Dear 그림책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 그림, 이지원 옮김 / 사계절 / 2004년 12월
구판절판


어떤 나라에 사는 클라라라는 여자아이가 아홉 살 생일 선물로 이상한 막대기 하나를 받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파란색 막대였다.
신비롭게도, 이 막대는 이 집안의 모든 여자아이들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막대는 점점 비밀스럽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클라라는 마치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막대의 유래와 원래 쓰임새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막대에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막대를 받은 아이들이 막대를 어떤 용도로 썼는지를 기록한 공책이다.
클라라 역시 이 공책에 무언가를 쓰게 될 것이다.

이 막대에 대해서 처음으로 기록을 남겼던 이는 클레멘티나다. 막대는 그 전에도 집안의 여자들에게 전해 내려왔지만, 그 사용처에 대해서 제일 먼저 기록한 사람이 클레멘티나.
그녀는 이 막대를 생쥐 키치아를 훈련시키는 데 썼다. 막대의 도움으로 키치아는 훌륭한 곡예싸가 될 수 있었다.

클레멘티나의 딸 로잘리아는 연극을 좋아했다. 해서 감자와 헝겊으로 만든 얼굴을 막대에 꽂아 배우 인형을 만들곤 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의 얼굴은 정성껏 만들어 파란 막대에 꽂았다. 파란 막대로 만든 인형은 늘 주인공이었다.

로잘리아의 조카 테클라는 동그라미 그리기를 좋아했다. 파란 막대는 모래밭이나 눈밭 위에 여러 동그라미를 그리는 데에 쓰였다. 막대를 꽂고 실을 달아 또 다른 막대를 걸면,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었다. 멋진 아이디어다!

다음 번 주인인 발비나는 나무토막이나 종이로 배를 만들어 호수에 띄우기를 좋아했다. 발비나는 손수 만든 멋진 배에 파란 막대를 붙였다. 막대가 곧 돛대의 역할을 한 것이다. 배가 바람에 떠밀려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다행히 이웃에 사는 어부 아저씨가 배를 찾아서 돌려주셨다. 덕분에 파란막대의 역사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진정 신비로운 막대다.

얌전히 말 잘 듣는 아이가 되기 싫었던 체칠리아는 막대에 팻말을 붙여서 '싫어요!'라는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오, 이것도 멋진 걸! 진정한 1인 시위다.

라우라는 파란 막대를 마법의 막대라고 믿었다. 마치 해리포터의 마술봉처럼 파란막대를 사용한 것이다. 언젠가는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으면서. 그 믿음이 배신하지 않았기를!!

클라라의 할머니인 아델라는 태양과 구름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호기심쟁이 아델라 할머니는 그림자의 길이에 관심을 갖고는 파란 막대를 이용해 해시계를 만들었다. 진정한 과학소녀의 탄생이다!

다음 장의 주인은 클라라의 엄마 테레사다. 어린 시절의 테레사는 라우라처럼 파란 막대가 마법의 막대일 거라고 생각했다.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테레사는 막대로 하늘을 나는 마법의 빗자루를 만들었. 그리고는 날마다 빗자루를 타고 침대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마녀배달부 키키가 떠오른다. 어제 늦은 밤 귀가하면서 텔레포트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어붙은 발을 구르며 생각했다. 파란 막대가 있다면 나도 그런 상상을 했을지도...

주자 언니는 천장에 커다란 하트 무늬를 그리는 데에 파란 막대를 사용했다.
천장에 커다란 색칠을 했음에도 혼나지 않고 존중해 주었다는 그 문화가 더 감탄스럽다.

이제 클라라 차례다. 클라라 역시 이 파란 막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면 무엇으로 쓸까? 칠판 지시봉으로 쓰면 아주 예쁘지 않을까, 지극히 평범한 생각을 해보았다. 체벌용이 아닌 그야말로 지시봉 말이다. 침대 밑에 들어간 연필을 꺼내는 데에도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이고.

그런데, 이 파란 막댐가 어떤 상자에 딱 맞게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자, 이제 책을 뒤집어서 뒤에서부터 다시 읽자.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떤 나라에 사는 에릭이라는 남자아이가 아홉 살 생일 선물로 이상한 상자 하나를 받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파란색 나무 상자였다.
이 상자는 이 집안의 모든 남자아이들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상자는 비밀스럽고 특별하게 느껴졌고, 에릭은 마치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게다가 상자에는 특별 선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이 상자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그 내용을 적어놓은 공책이었다.
에릭 역시 이 공책과 상자에 흠뻑 매료될 것이다.

첫번째 기록을 남긴 사람은 레오나르도다. 그 이전 세대부터 전해져 온 상자이지만, 상자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기록을 남긴 이는 레오나르도가 처음이다.
레오나르도는 상자 속에 다섯 개의 거울을 붙여 두고 놀았다. 거울이 반사시키는 빛은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주었다. 레오나르도는 거울을 빼 버리고 상자를 물려주었지만, 공책에 거울의 크기와 거울을 상자 안에 붙이는 방법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유산은 이렇게 물려주는 법이지. 혼자만 알면 무슨 재민겨!

레오나르도의 아들 빈첸티는 상자에 희귀 튤림을 심어 키웠다. 정성껏 가꾸자 춘분날에 아름다운 튤립 꽃이 피었다 한다.

빈첸티의 조카 알프레드는 상자 덕분에 100코론을 벌었다고 했다. 상자 안에 100명의 사람을 넣을 수 있다고 내기를 한 것이다. 그 사람이란 천 명도 들어갈 수 있는 종이 인형이었다.

티모테우스는 아빠가 되어 보고 싶어서 상자 안에서 달걀을 부화시켰다. 따뜻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닭이 품지 않아도 온도만 조절되면 병아리가 깨어나는겨???

루드빅은 상자 안에 세 개의 주사위를 넣었다. 어떤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상자를 흔들어서 주사위를 쏟아낸 것이다. 나온 수를 모두 합쳐 홀수면 '네'로, 짝수면 '아니오'로 결정했다고. 흥미롭긴 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보면 어떻게 던져도 앞면만 나오는 동전이 있는데, 그쪽이 더 마음에 든다.

판크라치는 공작 솜씨가 좋았다. 상자에 구멍을 뚫지 않고도 바퀴 네 개를 달아서는 멋지게 수레로 활용했다고 한다. 오늘 나는 공구 없이 커다란 철제 선반을 맞추느라 손가락이 다 아작 났다. 내게도 그런 솜씨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에릭의 할아버지 테오도르는 모래섬 '바오바' 이야기를 좋아했다. 테오도르는 자기만의 바오바 섬을 고안해 냈다. 상자 안에 두 개의 병을 주둥이가 마주보도록 설치한 다음, 가운데에 구멍을 뚫은 코르크 마개를 끼워 모래시계를 만든 것이다. 테 오도르는 이것으로 자기만의 시간을 측정했다. 그리고 그 시간 단위의 이름을 '바오바'라 정했다. 그야말로 창의력과 창조성이 넘치는 아이였구나!

에릭의 아빠 지그문트는 도자기로 만든 코끼리 인형에게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주었다. 파란 상자 안에 은박지를 깔고 물을 부은 다음 추운 겨울에 밖에 내놓아 꽁꽁 얼렸던 것이다. 오, 은박지만으로도 방수가 되는 훌륭한 상자로군! 아무튼 지그문트의 아이디어도 훌륭하다.

에릭의 형 미코와이는 상자 안에 여러 가지 실험 재료와 도구들을 보관했다. 형은 그 도구로 섣달 그믐날 밤에 불꽃놀이 실험을 했다. 오늘이 음력으로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면 미코와이가 실험했던 그날이 될 뻔했다. 그럭저럭 재밌는 우연이다.

에릭은 공책을 덮었다. 이제 그 공책을 채울 사람은 자신이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벅찬 설렘과 감동이 따라오지 않았을까. 나라면 파란 상자를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 담아 놓고 거의 열지 않는 도구로는 쓰고 싶지 않다. 가끔, 혹은 자주 열어보고 생각을 정리할 만한 무언가를 넣었으면 좋겠다. 어이쿠, 저금통으로 만들어 저축을 하는 상상은 너무 재미가 없는 걸... ^^

근데 그거 아나? 이 파란 상자에 어떤 막대가 꼭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재밌는 책이다. 먼저 만들어진 다음에 번역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가와 편집진이 '기획'해서 만든 책이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다운 번뜩이는 재치다. 다음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어린이들이라면 더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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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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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결혼식을 마치고 피로연장에서 만난 '처음처럼'. 그 글씨를 쓰신 이가 신영복 선생님인 것으로 알고 있다. 글씨로 이름을 떨치신 분답게 본인의 글씨가 새겨진 '변방'을 찾아다니며 그 글을 묶어낸 책이다. 그림책이 아니지만 예술품을 감상하는 재미를 같이 느끼게 한다.

첫번째 방문지는 해남 땅끝이었다. 변방 중의 변방이고 게다가 분교이기도 하니 더 낙후되었을 것만 같지만, 뜻밖에도 송지초등학교 서정분교는 아주 활기찬 곳이었다. 폐교 직전까지 갔던 학교의 위기를 학부모들이 일심으로 도와 극복해낸 것이다. 그 학교의 도서관 간판이다. '꿈을 담는 도서관'이라니, 어쩐지 벅찬 이름이다. 작고 작은 분교 도서관에서 큰꿈을 키울 어린이들을 격하게 응원해주는 멋진 글씨다.

두번째는 강릉의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이다.
양반댁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태어나서 재능을 다 꽃피우지도 못했고, 심지어 요절까지 한 비운의 허난설헌은 '변방'이라는 이 책의 기본 분류에 무척 잘 어울린다. 어쩌면 혁명을 꿈꾸었을지도 모를 풍운아 허균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인물들이 남매로 태어난 것도 참 아이러니하다.
강릉하면 신사임담 오죽헌, 율곡 이이가 먼저 떠오른다. 그들이 주류라고 한다면, 허균과 허난설헌은 변방이라고 할 만하다.

충북 제천의 박달재다. 울고 넘는 박달재란 노래 제목만 들어봤을 뿐, 실제로 들어보진 못했다. 박달재에 얽힌 슬픈 사연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과거시험에 낙방한 박달은 면목이 없어 돌아오지 못하고, 기다리다 지친 금봉이는 벼랑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리고 뒤늦게 돌아온 박달 역시 금봉이를 좇아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다.

지금 이곳은 터널이 뚫려서 직접 고개를 넘어오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이조차도 슬픈 사랑 이야기가 스민 곳답게 적적하게 만든다.

충북 괴산의 벽초 홍명희 문학비와 생가도 찾아갔다.
홍명희는 그가 일궈낸 문학적 업적과, 또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월북 행적 때문에 지나치게 평가절하되었다고 본다.
북으로 가기 전 농지 17만 평을 무상으로 농민들에게 분배해주고 갔다니, 그야말로 이상적 공산주의가 아닌가. 부친께서는 경술국치를 당해서 자결까지 했다고 한다. 나라가 망했는데, 그렇게 목숨뿌리는 선비 몇이, 그래도 조선에 있었다는 것에 500년 왕조의 마지막에 일종의 헌사가 될 수 있을까.

다음 방문지는 오대산 상원사다. 문수전의 글씨를 쓰셨다. 한국 최대의 종단인 조계종 사찰에서 변방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무척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을 모신 문수전. 깨달음의 세계인 ‘지혜’에서 ‘변방성’을 어떻게 엮어낼 것인가 저자는 몹시 고민했다고 한다. '지혜’와 ‘무소유’는 ‘상품’이 되지 못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살아남아 극적인 상품이 되었다. 변방은 공간의 개념이 아니며,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변방의 존재이고, 변방이란 바로 자기 성찰이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마치 철학자의 깨달음이나 성직자의 득도를 보는 기분이다.


오대산 상원사 입구에 저자가 쓴 표석이다. 거대한 바위와 그 안에 새겨진 검은 글씨와 금색 글씨가 인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저 돌 치우면 어째 손오공이 깔려 있다가 짠하고 나타나서 변신술이라도 부릴 것만 같다.

여섯 번째 여행지는 전주 이세종 열사 추모비와 김개남 장군 추모비다.
5.18의 첫번째 희생자인 이세종 열사. 사망 장소가 도청이 아니었던 탓에 첫희생자로 인정받기까지도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라고 쓴 추모비가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고 쓴 김개남 장군 추모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대구로 썼다고 한다.
역사를 글로만 배울 것이 아니라 이런 현장을 찾아가서 그 숨소리를 들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야말로 찾아가야 마땅한 곳이다.

‘서’와 ‘울’을 각각 북악산과 한강수로 표현하고 “북악무심오천년(北岳無心五千年) 한수유정칠백리(漢水有情七百里)”를 방서로 풀어쓴 작품이다. 북악은 왕조 권력을, 한수는 민초들의 애환을 상징한다. 이 글씨는 서울시청 시장실에 걸려 있다. 덕분에 박원순 서울 시장님도 함께 등장했다.
글씨도 아름답지만, 글씨로 그림까지 표현해 냈으니 그 창조성에 감탄했다. 그 서울의 한 민초로 살아가는 오늘, 북악산 좀 바라보고 하늘 구경도 좀 해야겠다.

마지막 방문지는 봉하마을 고 노무현 대통령 묘석이다.
이 글씨도 신영복 선생님 것이었구나. 뮤비 주인과 묘비 글씨의 먹먹함만 생각했지 글씨체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다시 봐도, 역시 먹먹하다.

'우공이산'의 글씨도 역시 저자의 것이다. 이것을 '노공'으로 바꿔 부르셨다지.
우직하게 묵묵히 제 일을 하는 분들. 그런 분들 덕분에 인류가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졸업 연설에서 했던 말도 떠오른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노무현 재단 전 이사장이신 문재인 의원도 보인다. 사진 보니 또 먹먹하다.
얼마 전 새벽에 봉하마을 묘비에 가서 울고 계시더라는 기사가 생각난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아멘...이라고 해야 하나. 민주주의라는 말이 참 아프게 들린다. 김지하 시인이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썼을 때도 울었는데, 그 시를 썼던 이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

얼마 전 미권스에 올라온 글을 읽으면서도 또 울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아주 긴 글이었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울지 마라 민주주의야, 지지마라 민주주의여"

뜨겁게 되새겨 본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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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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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혁명파가 농민적 성격이 강했던 반면 온건개혁파는 지주적 성격이 강했다. 특히 신분에 있어서도 정몽주 등 온건개혁파에 비하여 역성혁명파는 대체로 서얼의 핏줄을 잇고 있어서 중심부에서 한발 비켜난, 이를테면 변방 혈통이었던 셈이다.

-29쪽

스테판 에셀은 그의 작은 책 ‘분노하라’의 마지막 구절에서 "저항이야말로 창조이며 창조야말로 저항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서정분교는 저항이었으며 창조였다.
-47쪽

벽초 가문은 지금까지도 홍 판서댁으로 불리고 있을 정도로 마을 인심을 잃지 않았는데, 특히 벽초가 북으로 가면서 농지 17만평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고 떠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79쪽

경술국치를 당하여 자결한 선친의 뜻을 명심하고 항일운동에 투신한 이래 수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특히 신간회 창립 주역으로 좌우의 민족 역량을 결집했던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
-82쪽

‘임꺽정’은 단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천민을 소설의 ‘중앙’에 앉혀 놓은 작품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캔버스의 중앙, 영화의 주연은 각광받는 자리이다. 이 중앙을 하층민이 차지한다는 것은 그것으로도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임꺽정’은 계급적 저항 소설로 읽힌다. 근대적 문학평론의 오래된 준거 틀이다.

-86쪽

물론 임꺽정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가 ‘강자’의 면모로 읽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 이미지를 입히는 주류 이데올로기도 그렇지만 우리는 사회적 약자가 최소한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대응 방식에 관해서도 무심하지 않아야 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에 결코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는 문신을 하거나 성깔 있는 눈빛을 만든다. 위악을 연출한다. 생각하면, 사회적 약자는 위악을 주 무기로 하고, 반면에 사회적 강자는 위선을 무기로 한다. 극적 대조를 보인다. 시위 현장의 소란과 법정의 정숙이 그것이기도 하다.

-89쪽

종소리는 긴 여운을 이끌고 가다가 이윽고 정적이다. 소리가 없는 것을 정(靜)이라 하고 움직임이 없는 것을 적(寂)이라 한다. 1만 문수보살은 다시 산천으로 돌아가고 세상은 적멸이다.

-100쪽

우리가 반성해야 하는 것은 깨달음마저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끊임없는 불화와 긴장 그 자체가 지혜인지도 모른다.

-105쪽

우리 시대가 잃고 있는 것이 바로 조화와 소통이 아닐까. 산수(山水)는 대우라고 한다. 산과 물은 오래된 친구라는 뜻이다. 물이 없이 어떻게 산이 수목을 키울 수 있으며 산이 없이 어찌 물이 흐를 수 있으랴. 북악과 한강이 서로 환포하듯이 서로가 서로를 감싸고 어루만져야 진정한 벗이 될 수 있는 법이다. 북악이 권력의 상징이라면 멀리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한강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소통과 화해의 상징이다. 나는 서울시청이 북악이기보다 한강수이기를 바란다. 민초들의 애환과 함께 유정하게 흘러가는 700리 도도한 강물이기를 바란다. 우리 시대가 잃고 있는 공감과 소통의 다정한 공간이기를 바란다.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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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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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쪽

진로상담을 하다보면 학생들이 지닌 목표 또는 욕망의 상당부분은 부모에게서 빌려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도 서울대에 가고도 남을 실력이 있었다. 그런데 집안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목표를 이룰 수가 없었다. 너는 할 수 있다. 공부를 위해서라면 너에게 무슨 지원이든 아끼지 않겠다.” 많은 학생들이 이런 장탄식을 듣고 자라면서 은연중에 부모의 욕망을 그대로 모방합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께 바쳐진 아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너를 두고 서원 기도를 했으니 네 진로는 이미 결정된 거라고 강요받았다. 이 지독한 세뇌교육은 의문을 품지 못하게 했고, 의문을 가졌더라도 표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신학대학을 졸업했고, 아직도 신대원을 가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살고 있다. 물론 그렇게 성직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분명 있지만, 그것이 내 서원이 아니고, 내 소원도 아니고 내 욕망도 아닌데,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부모의 '욕망' 아닌가? 요새 내 가슴에 울리는 한마디는 이거다. 나를 바꿀 수 없으면 환경을 바꿔라! 엄마 그늘 아래서는 이런 강요된 욕망과 소명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인 나의 현실!

 

 

52쪽

위기가 절정에 달해 모두가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만장일치의 폭력이 시작됩니다. 평소에는 의견이 달랐던 사람들도 누군가를 죽여 위기를 해소해야 한다는 데 쉽게 합의합니다. 마녀사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가뭄이 극심한 상황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왕의 목을 치기도 합니다. 이같은 만장일치적 폭력에는 희생자의 제자나 신하까지 배신을 통해 묵시적으로 가담합니다. 예수를 죽이는 현장에서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그런 예입니다. (...) 이런 폭발적인 폭력과 희생을 통해 사회는 질서와 평화를 되찾습니다. 희생양이 진짜로 페스트를 치유하거나 자연재해를 물리치지는 못하지만, 개인 사이에 극대화되었던 불화를 정리함으로써 위기를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르면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에 대해 신성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한 개인을 의심하여 살해하고 추방한 사람들이 이제 그 억울한 개인에 대해 과도한 숭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신화화의 과정을 거쳐서 신적인 존재로 부활합니다. 이게 바로 서양의 여러 신화에서 시작되어 예수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희생양 메커니즘’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신화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장일치의 폭력. 무섭다. 마녀사냥이라고 달리 부를 수도 있는 말.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다이애나비가 떠오른다. 다이애나비가 죽었을 때 잘 울지 않던 영국 사람들이 목놓아 울고서 묵은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기사를 보았더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단지 슬퍼하고서 스트레스를 풀 사안이 아니었지만, 희생양 매커니즘을 보며 섬뜩함을 느꼈다.

 

57쪽

신문을 보든, 책을 읽든, 학벌주의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대부분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단지 몇 개의 대학만이 있습니다. 그 안에 있어서 누리는 것은 별게 없을지 모르지만, 그 밖에 있어서 누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 많습니다. 학벌은 뜨거운 감자입니다. 누구나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해법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골칫거리입니다. 모든 사람의 모방욕망이 집중되는 핵이기 때문에 그걸 쟁취하기 위한 경쟁과 그에 따른 상처도 엄청납니다. 학벌사회에서 만들어진 과도한 자신감과 열등감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모방욕망과 과도한 경쟁 속에서 우리 내면에는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 때려죽이고 싶다는 분노가 자리잡습니다.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정신병동으로 변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벌은 일종의 폭약 덩어리입니다. 어떤 계기로든 이 폭약에 불이 붙으면 무엇이라도 태울 수 있습니다.

일베 사이트를 이용하는 사용자들은 기본적으로 '분노'를 깔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이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청소년층이라면 지나친 학벌주의로 인한 폐해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또 거기 이용자들 중에는 아주 고학력에 잘 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떠오른다. 어느 쪽으로 보든 거대한 정신병동이라는 말에 공감간다. 다들 많이 아프다.

 

89쪽

중년 남성의 내면에 남아 있는 소년은 ‘지랄총량의 법칙’으로 알려진 ‘지랄’이기도 하고, ‘에너지’이기도 하며, ‘청춘’이기도 하고,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드’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색(色)’, 즉 욕망의 영역에 속한 힘이죠. 10대 중반부터 20대 후반까지 소년은 남성의 내면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춥니다. 조물주의 설계에 따르자면 바로 그 즈음에 가장 자연스럽게 분출되어야 하는 에너지입니다. 이몽룡과 성춘향이 그랬던 것처럼 주로는 섹스를 통해서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욕망을 찍어누른 사람만이 성공이란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섹스를 통해 분출되어야 할 에너지는 엉뚱하게도 도서관, 고시원, 영어학원에서 대부분 소비됩니다. 그런 에너지 소비가 ‘건강한’ 것으로 권장되기도 합니다.

남녀 불문하고 다들 비슷한 형편이라 어차피 연애할 상대방도 시간도 공간도 찾기 어렵습니다. 취직, 고시, 유학 준비에 몰두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더욱 ‘계’에 속한 인간으로 변해갑니다. 그런 극심한 경쟁을 거쳐서 겨우 결혼할 여유를 갖게 되었을 때, 상대방을 고르는 기준도 ‘색’보다는 ‘계’에 속한 것들입니다.

자연스럽게 성검사가 떠올랐다. 가정도 있고, 잘 나가는 검사가 대체 왜 피의자와 그런 짓을!!!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이유를, 김두식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도록 설명했다. 이래서 네덜란드는 모든 음성적인 것들을 양성화시킨 것일까? 지하경제의 활성화가 아니라 양성화로? 불법 성매매 문제도 과연 단속이나 음성화로 답이 있을까 싶다. 인간이란 이렇게 나약하고 본능적인데, 이성으로 누르고 덮고 감출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혹은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해야 면이 선다는 것일까.

 

105쪽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차가운 진실입니다. 그걸 알면 세상이 스산하게 느껴지죠. 그런데 그 진실이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승환이 곧잘 얘기하던 '가르마 이론'이 있다. 가르마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꾸면 본인은 어색해서 죽을라 하지만, 남들은 아무도 못 알아본다는 것으로, 곧 세상은 너에게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관심받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기보다 그 속에서 얻는 자유로움을 누린다면, 그것도 참 괜찮은 셈법 아닌가. 착한 아이 콤플렉스 따위는 버려야 한다고 자꾸 생각하게 하는 요즘이다.

 

240쪽

악의 평범성, 진부함을 이해하지 않고 히틀러만 악마라고 생각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이 만들어 유지하고 있는 수많은 악마적 씨스템의 가면을 벗겨낼 수 없습니다.

언젠가 무슨 심리 테스트 비슷한 질문지에서 본 일이 있다. 여러 사람의 리스트를 두고서 하나씩 하나씩 배제했더니 결국 남는 사람이 히틀러였다는 것. 앞에서 어떤 하자사항이 있어서 제끼고 제꼈는데, 가장 평범하고 문제 없다고 여긴 인물이 히틀러였다는 사실에 엄청 놀랐었다. 악의 평범성과 진부함. 우리같은 소시민의 모습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어린아이들조차도 '무지'를 핑계로 얼마나 사악하고 무서워질 수 있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역시 인간은 참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성선설, 그거 믿을 수 있나?

 

247쪽

마지막 순간까지 엉터리 사법씨스템에 충성하는 사냥꾼들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공통점은 바로 ‘어떤 경우에도 법과 질서는 지켜져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출전도 찾을 수 없는 “악법도 법”이라거나 “나쁜 법도 무법보다는 잣다”는 말들은 오랜 세월 이런 믿음을 대변해왔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그런 믿음을 갖도록 교육받았습니다. 그러나 규범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싸이코패스 못지않게 위험합니다.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이 이렇지 않았나. 그가 믿는 법의 질서 안에서 장발장의 헌신과 인류애 등은 결코 소화를 시킬 수가 없었다. 자신의 신념과 부딪히는 것을 감당할 수 없던 그는 제 목숨을 버리면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영화 '26년'에서 광주 진압군 출신 경호인 역시 그랬다. 규범에 대한 과도한 신뢰의 무서움을 생각한다. 짱돌을 들어야 할 때 혹시 촛불만 들었던 것은 아닐까 불안한 생각마저도 든다.

 

260쪽

길거리 범죄가 보여주는 외형상의 폭력성 때문에 사람들은 화이트칼라 범죄보다 길거리 범죄를 훨씬 흉악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버스에서 10만원을 소매치기한 절도범은 구속되고 수백억을 빼돌린 대기업 회장은 불구속되어도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수사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폭력배가 상대방 조직의 결혼식장에 난입해 칼부림을 벌이면, 검찰이나 경찰은 붙잡힌 조직원들이 “보스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아무리 부인해도 어떻게든 조각을 맞추어 보스를 공모공동정범으로 엮어넣습니다. 그런데 대기업 범죄에서 넘버투인 고용사장이 “모두 내 책임으로 이루어졌고, 회장님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아, 그러시냐”고 고개를 끄덕이며 넘버투만 잡아넣습니다. 회장님을 잘 보호한 넘버투는 잠깐 징역살이를 마치고 나와 기업에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화이트칼라 범죄, 우리나라에서 지나치게 가볍게 다뤄지는 것 같아 갑갑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자본주의의 최극단을 달리는 미국에서도 그 자본주의의 질서를 헤치는 자들에 대한 평가는 엄정한데, 어째 미국이라면 뭐든 못 배워서 안달인 우리나라에서 그런 법은 안 배우나 모르겠다.

 

272쪽

근본주의 기독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성서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목사님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의심, 동성애가 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예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의심이 기독교 신앙과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1)만약 이런 의심 중 한가지라도 사실이라면, 즉 성서에 오류가 있거나, 목사님에게 잘못이 있거나, 동성애가 죄가 아니거나, 예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면, 2)성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고, 3)성서가 진리가 아니라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으며, 4)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구원도 있을 수 없고, 5)구원이 없다면 나는 곧 지옥으로 간다고 믿습니다. 의심이 곧 지옥행 특급열차라는 논리체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의 의심이라도 품으면, 그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고,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언제나 결론은 지옥입니다.

 

내가 이런 환경에서 줄곧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그랬기 때문에 믿어야 하고, 믿겨지지 않는 상황이 오면 힘들어 하는 악순환의 고리. 그 끝엔 무시무시한 지옥이 있기 때문에 나를 다시 다그치게 만드는 상황들. 이 책은 이 부분에서 나를 가장 열광하게 만들었다. 뭔가 답답한 와중에 한줄기 빛같은 느낌. 동 저자의 다른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것도 이 대목이다.

 

274쪽

이런 단순한 프레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은 작은 불행을 겪어도 우울, 불안, 편집증, 공황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모든 불행은 내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안은 근본주의 교회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의심할 줄 모르는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불안의 노예가 되어 이미 충분한 벌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근본주의 기독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다른 신앙의 길도 있습니다. 성서의 규범이 갖는 역사적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고도 충분히 좋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도 어차피 매일 의심하는 삶을 삽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서의 무오류성을 의심하면 기독교인이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니면 지옥 가고 이땅에서 불행을 겪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의심을 드러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걷어내고 의심을 솔직히 나누는 공동체가 오히려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결국은 불행입니다.

나를 반성해 보는 것과 이 책에서 지적한 프레임에 갇힌 사람의 불안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두려움을 걷어내고 의심을 솔직히 나누는 것이 더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옳다. 아, 그런데 이 부분을 보고 나니 다시금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생각이 꼬리표처럼 따라온다. 의혹이 있다면 걷어내고 안심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나. 결과가 뒤집힐지 안 뒤집힐지는 모를 일이고, 그것보다 의혹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인데 말이다.

 

301쪽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잘 다독이며,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고, 깊은 내면을 이웃과 나누다보면, 나도 모르는 새 주변에는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이 하나씩 늘어납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 혼자서도 행복할 줄 아는 개인, 사냥꾼의 광기 속에서 남을 지켜주려는 따뜻한 이웃,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동지 들이죠. 그런 개인들과 아주 작은 연대가 싹트고 나면, 이 험한 정글 속의 삶도 한결 견딜 만합니다.

마무리에서 위로를 얻는다. 욕망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 작은 연대의 싹이 이 험한 정글 속의 삶을 견딜 만하게 해줄거라는 것까지도. 여기저기서 '힐링'을 외친다. 힐링이 너무너무 필요할 만큼 아픈 세상에서 살고 있다. 무엇이든 힐링이 될 수 있다면, 책은 그 중에서도 참 괜찮은 힐링 도우미다. '욕망해도 괜찮아' 제목도 마음에 든다. 사실 '욕만 해도 괜찮아'로 읽고 싶을 만큼 삐뚤어진 요즘이지만, 그런 것조차도 괜찮다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자가 힐링에 적합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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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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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상담을 하다보면 학생들이 지닌 목표 또는 욕망의 상당부분은 부모에게서 빌려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도 서울대에 가고도 남을 실력이 있었다. 그런데 집안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목표를 이룰 수가 없었다. 너는 할 수 있다. 공부를 위해서라면 너에게 무슨 지원이든 아끼지 않겠다." 많은 학생들이 이런 장탄식을 듣고 자라면서 은연중에 부모의 욕망을 그대로 모방합니다. -50쪽

모방욕망은 전염병과 같아서 순식간에 사람들을 동일한 욕망으로 몰아넣습니다. 일단 동일한 욕망에 사로잡히고 나면 그 욕망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앞사람의 욕망을 따라 전진할 뿐입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을 선명하면서 동시에 그를 미워합니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다 못해 빼앗고 싶다는 욕망을 갖습니다. 방해물이 있으면 이 욕망은 더욱 강회됩니다. 경쟁자가 있으면 욕망을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욕망이 정당하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모방은 경쟁을 낳고 경쟁은 모방을 강화합니다. 무제한의 야망과 과도한 경쟁은 사회를 파괴합니다.

-50쪽

위기가 절정에 달해 모두가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만장일치의 폭력이 시작됩니다. 평소에는 의견이 달랐던 사람들도 누군가를 죽여 위기를 해소해야 한다는 데 쉽게 합의합니다. 마녀사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가뭄이 극심한 상황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왕의 목을 치기도 합니다. 이같은 만장일치적 폭력에는 희생자의 제자나 신하까지 배신을 통해 묵시적으로 가담합니다. 예수를 죽이는 현장에서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그런 예입니다.
-52쪽

이런 폭발적인 폭력과 희생을 통해 사회는 질서와 평화를 되찾습니다. 희생양이 진짜로 페스트를 치유하거나 자연재해를 물리치지는 못하지만, 개인 사이에 극대화되었던 불화를 정리함으로써 위기를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르면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에 대해 신성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한 개인을 의심하여 살해하고 추방한 사람들이 이제 그 억울한 개인에 대해 과도한 숭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신화화의 과정을 거쳐서 신적인 존재로 부활합니다. 이게 바로 서양의 여러 신화에서 시작되어 예수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희생양 메커니즘’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신화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2쪽

신문을 보든, 책을 읽든, 학벌주의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대부분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단지 몇 개의 대학만이 있습니다. 그 안에 있어서 누리는 것은 별게 없을지 모르지만, 그 밖에 있어서 누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 많습니다. 학벌은 뜨거운 감자입니다. 누구나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해법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골칫거리입니다. 모든 사람의 모방욕망이 집중되는 핵이기 때문에 그걸 쟁취하기 위한 경쟁과 그에 따른 상처도 엄청납니다. 학벌사회에서 만들어진 과도한 자신감과 열등감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모방욕망과 과도한 경쟁 속에서 우리 내면에는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 때려죽이고 싶다는 분노가 자리잡습니다.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정신병동으로 변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벌은 일종의 폭약 덩어리입니다. 어떤 계기로든 이 폭약에 불이 붙으면 무엇이라도 태울 수 있습니다.

-57쪽

무슨 일이 터지면 너나 할 것 없이 가장 먼저 ‘전화 한통’ 해줄 지인을 찾습니다. 가족 중에 판검사가 나오기를 열망하는 것도 그 뿌리를 추적해보면 ‘전화 한통’ 해줄 권력자를 주변에 갖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화 한통’의 욕망은 아무나 충족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분노와 갈등이 증폭됩니다. 내가 하면 ‘부탁’이고 남이 하면 ‘청탁’이 됩니다. 누가 청탁을 하거나 받았다고 보도되면, 우리는 그 한 사람이 마치 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맹비난합니다. 내가 숨기고 싶은 모든 어두운 면을 그 한 사람에게 투영하여 돌을 던집니다. 희생양에게 손을 얹어 우리 모두의 죄를 전가한 후, 그 희생양의 멱을 따고 불태우는 제사과정과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그를 잡음으로써 우리는 평화를 얻습니다. 참 무서운 구조입니다.

-67쪽

중년 남성의 내면에 남아 있는 소년은 ‘지랄총량의 법칙’으로 알려진 ‘지랄’이기도 하고, ‘에너지’이기도 하며, ‘청춘’이기도 하고, 프로이트가 말하는 ‘이드’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색(色)’, 즉 욕망의 영역에 속한 힘이죠. 10대 중반부터 20대 후반까지 소년은 남성의 내면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춥니다. 조물주의 설계에 따르자면 바로 그 즈음에 가장 자연스럽게 분출되어야 하는 에너지입니다. 이몽룡과 성춘향이 그랬던 것처럼 주로는 섹스를 통해서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욕망을 찍어누른 사람만이 성공이란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섹스를 통해 분출되어야 할 에너지는 엉뚱하게도 도서관, 고시원, 영어학원에서 대부분 소비됩니다. 그런 에너지 소비가 ‘건강한’ 것으로 권장되기도 합니다.
-89쪽

남녀 불문하고 다들 비슷한 형편이라 어차피 연애할 상대방도 시간도 공간도 찾기 어렵습니다. 취직, 고시, 유학 준비에 몰두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더욱 ‘계’에 속한 인간으로 변해갑니다. 그런 극심한 경쟁을 거쳐서 겨우 결혼할 여유를 갖게 되었을 때, 상대방을 고르는 기준도 ‘색’보다는 ‘계’에 속한 것들입니다.

-89쪽

이런 과정을 거친 뒤 규범적인 ‘계’의 남자들은 좋은 직장과 안정된 가정을 지닌 사회지도자로 자리잡습니다. 원래는 에너지를 충분히 사용하고 누린 다음에야 어른이 되는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만이 ‘훌륭한 어른’이 됩니다. 그저 ‘어른 행세’하는 법만 배운 소년들이 ‘훌륭한 어른’ 타이틀을 거머쥐는 셈이죠. 인간이 평생 써야 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볼 때, 지랄이라는 실탄을 거의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겉은 멀쩡한 어른인데 마음 깊은 곳 감성의 어느 한구석은 텅 빈 소년들입니다. 갈 곳을 잃은 ‘색’은 마음 한구석의 더 어두운 공간으로 숨어들어갑니다. 잠복한 것일 뿐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90쪽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차가운 진실입니다. 그걸 알면 세상이 스산하게 느껴지죠. 그런데 그 진실이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105쪽

‘헤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는 것은 상대방과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기 위치를 확보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 용기 또는 에너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전달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관계를 유연하게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관계를 끝장낼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원칙은 거의 모든 관계에 적용됩니다.

-120쪽

신학자 월터 윙크는 그의 책 『예수와 비폭력 저항』에서 여기 나오는 오른편, 왼편 뺨의 순서에 주목합니다. 먼저 얻어맞은 뺨은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 뺨입니다. 누군가 나의 오른편 뺨을 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왼편 손바닥이겠지요. 하지만 예수시대의 유대사회에서는 공적인 상황에서 왼손의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뺨을 때릴 때도 왼손은 쓸 수가 없었습니다. 마주본 상태에서 상대방을 때리려면 오른손을 써야 합니다. 오른손으로 오른편 뺨을 때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른편 손바닥이 아니라 오른편 손등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른편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때리는 것은 상해를 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남편, 노예주인, 상관 같은 윗사람이 아내, 노예, 부하 같은 하급자에게 모욕을 주면서 ‘너는 나에게 꼼짝 못하는 존재이고, 나는 네 주인’이라는 걸 일깨워줄 때 오른편 손등을 사용합니다.
-122쪽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층민중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는 왼편 뺨도 돌려대라도 가르친 것입니다. 왼편 뺨을 돌려대는 것은 나약하게 "나를 한 대 더 때려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왼편 뺨을 때리려면 주인은 오른편 손바닥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른편 손바닥으로 상대방을 때리는 것은 대등한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의미합니다. 즉 노예가 주인에게 왼편 뺨을 돌려대는 것은 때릴 때 때리더라도 나를 더 이상 노예로 보지 말고 평등한 인간으로 인정해 달라는 반항입니다. 이 순간에 필요한 것은 역시 목숨을 건 결기입니다. 노예가 되지 않고 당당한 인간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한 평화적인 저항수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22쪽

그런데 이런 결기, 눈빛, 에너지는 한순간의 결단이나 기교로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헤어질 수 있는 용기, 관계를 끝장낼 수 있는 용기는 근본적으로 ‘혼자 서는 용기’와 연결됩니다. (...) 혼자서도 행복하려면 내면이 안정되고 튼튼해야 합니다.

-124쪽

‘계’는 불편한 경계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락한 안전핀이기도 하지요. 단순히 규범이나 욕망의 문제만은 아니고 ‘중산층’이라는 삶의 기반과도 연결됩니다. 그 경계선 안에는 군필,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 기혼자, 적당히 이상주의자인 교수·변호사·주류 종교인의 안정된 삶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131쪽

형은 이렇게 말합니다. "흔히 조기교육, 영재교육이 우수한 과학자를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하잖아. 그래서 과학고도 만든 거고. 근데 그거 완전히 착각이야. 너 창의성이 뭔지 아니? 남과 다른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런데 창의성이 과학고에서 만들어질 것 같아? 전혀 아니야. 창의성이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과 다를 수 있는 용기’야. 자연과학의 세계에는 정치가 없을 것 같지? 그런데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아.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이론을 만들 때는 누구나 상상할 수 없는 저항에 부딪혀. 새로운 이론을 주장했다가 학계에서 매장당하는 경우도 많아. 『싸이언스』나 『네이처』같은 학술지도 마찬가지야. 새로운 이론에는 늘 소극적이지. 창의적이 되려면 당연히 용기가 필요해. 그런데 조기교육, 영재교육이 그런 용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경기고 출신들이 그렇게 많은 우리 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못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야."

-208쪽

악의 평범성, 진부함을 이해하지 않고 히틀러만 악마라고 생각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이 만들어 유지하고 있는 수많은 악마적 씨스템의 가면을 벗겨낼 수 없습니다.

-240쪽

마지막 순간까지 엉터리 사법씨스템에 충성하는 사냥꾼들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공통점은 바로 ‘어떤 경우에도 법과 질서는 지켜져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출전도 찾을 수 없는 "악법도 법"이라거나 "나쁜 법도 무법보다는 잣다"는 말들은 오랜 세월 이런 믿음을 대변해왔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그런 믿음을 갖도록 교육받았습니다. 그러나 규범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싸이코패스 못지않게 위험합니다.

-247쪽

길거리 범죄가 보여주는 외형상의 폭력성 때문에 사람들은 화이트칼라 범죄보다 길거리 범죄를 훨씬 흉악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버스에서 10만원을 소매치기한 절도범은 구속되고 수백억을 빼돌린 대기업 회장은 불구속되어도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수사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폭력배가 상대방 조직의 결혼식장에 난입해 칼부림을 벌이면, 검찰이나 경찰은 붙잡힌 조직원들이 "보스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아무리 부인해도 어떻게든 조각을 맞추어 보스를 공모공동정범으로 엮어넣습니다. 그런데 대기업 범죄에서 넘버투인 고용사장이 "모두 내 책임으로 이루어졌고, 회장님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아, 그러시냐"고 고개를 끄덕이며 넘버투만 잡아넣습니다. 회장님을 잘 보호한 넘버투는 잠깐 징역살이를 마치고 나와 기업에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260쪽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근본적으로 법을 만드는 사람도, 집행하는 사람도 모두 화이트칼라이기 때문입니다. 법을 만드는 데는 늘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기 마련인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의 로비력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그 친구들도 모두 화이트칼라이다보니, 일상에서 보고 듣는 게 ‘기업하는 어려움’입니다. 눈 씻고 찾아봐도 노조운동하다가 쫓겨난 블루칼라 친구가 주변에 없으니 그런 목소리는 입법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이트칼라 범죄는 법률에 규정되기도, 법에 정해진 형량을 높이기도 어렵습니다.

-261쪽

모텔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청소년 보호를 내세운 정책이나 법률 중에는 유난히 근거가 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게임, 만화, 비디오, 학생인권조례 등을 청소년문제의 주범으로 몰아붙이지만, 입시지옥이라는 죽음의 씨스템을 빼놓고는 우리 청소년문제를 설명할 수 없죠. 아이들의 눈앞에서 모텔을 모두 없애버리기에 앞서 왜 이렇게 모텔이 많은지부터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미혼의 청춘들이 사랑을 나눌 곳이 마땅치 않고, 사회경제적 원인으로 결혼 연령이 지나치게 높아졌으며, 부모에게서 빨리 독립하는 게 불가능한 현실에서 모텔만 잡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청춘들만 모텔을 찾는 게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혼외의 사랑이 넘쳐나는지, 결혼생활은 왜들 그렇게 불행한지, 제도로서의 결혼이 과연 법률이나 의무감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결혼제도만이 아이들에게 최선의 양육환경을 제공하는지, 불행한 부모 아래 성장하는 것보다 이혼했어도 책임을 다하는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더 나은 것 아닌지도 토론해볼 만하죠.-266쪽

근본주의 기독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성서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목사님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의심, 동성애가 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예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의심이 기독교 신앙과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1)만약 이런 의심 중 한가지라도 사실이라면, 즉 성서에 오류가 있거나, 목사님에게 잘못이 있거나, 동성애가 죄가 아니거나, 예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면, 2)성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고, 3)성서가 진리가 아니라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으며, 4)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구원도 있을 수 없고, 5)구원이 없다면 나는 곧 지옥으로 간다고 믿습니다. 의심이 곧 지옥행 특급열차라는 논리체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의 의심이라도 품으면, 그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고,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언제나 결론은 지옥입니다.

-272쪽

교리는 딱 한가지뿐이고 거기서 파생되는 규범은 모두 지켜져야 한다는 세계관은 상상도 못 할 불관용적 태도와 끝없는 불안을 낳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작은 불행을 만날 때마다 자기 삶 전체를 돌아보면서 혹시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불행이 닥친 게 아닌지 점검합니다. 나의 실패는 늘 나의 잘못이고, 나의 불행은 늘 의심의 결과입니다. 여기에 ‘하면 된다’는 긍적적 사고방식까지 합쳐지면 ‘안되면 모두 내 의심 탓, 잘되면 모두 하나님 은혜’라는 긍정적 태도가 만들어집니다. 물론 자기를 성찰하고 절대자에게 감사하는 태도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예기치 않은 불행이 찾아올 수 있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273쪽

이런 단순한 프레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은 작은 불행을 겪어도 우울, 불안, 편집증, 공황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모든 불행은 내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안은 근본주의 교회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의심할 줄 모르는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불안의 노예가 되어 이미 충분한 벌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근본주의 기독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다른 신앙의 길도 있습니다. 성서의 규범이 갖는 역사적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고도 충분히 좋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도 어차피 매일 의심하는 삶을 삽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서의 무오류성을 의심하면 기독교인이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니면 지옥 가고 이땅에서 불행을 겪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의심을 드러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걷어내고 의심을 솔직히 나누는 공동체가 오히려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결국은 불행입니다.

-274쪽

규범 이야기를 길게 했는데, 요약하자면 딱 한마디입니다. "의심하라!" 근엄한 얼굴을 한 수많은 규범들이 오늘도 자기 존재의 근거로 온갖 이유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허세로 가득 찬 그 가면을 벗기는 작업은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한 필수 과제입니다. 기득권층이 우리 눈을 돌리려고 만들어내는 각종 스캔들에 속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희생양이 만들어질 때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돌팔매질인지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사랑과 연대의 공동체를 일구어내는 출발점은 바로 규범에 대한 의심입니다. 의심의 도움으로 쓸데없는 규범들이 사라지고 나면, 꼭 지켜야 할 규범은 오히려 힘을 얻습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의심이 규범을 무너뜨리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의심이야말로 규범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토대입니다.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이 그랬던 것처럼, 의심이 없는 사회의 종착역은 아노미, 즉 규범의 몰락이기 때문입니다.

-275쪽

투석형에서 중요한 것은 첫 번째 돌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일단 첫 번째 돌이 날아가고 나면 군중심리에 의해 두 번째 세 번째 돌을 던지는 것은 한결 쉽습니다. 한 사람이 던진 돌멩이가 무시무시하고 엽기적인 집단폭력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이런 희생양 사냥과 만장일치적 폭력이 거의 매일처럼 벌어지는 곳이 인터넷 공간입니다.

-298쪽

조금 늦게 돌을 던진다고 큰일나지 않습니다. 이런 기다림의 정신이 녹아있는 것이 무죄추정의 원칙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우리편뿐 아니라 상대방에도 적용됩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딱 그 만큼의 책임만 지면 됩니다. 너무 빨리, 너무 자주 "저 새끼 죽여라!"를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쯤 그를 의심해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아무한테나 면죄부를 주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있을 수 있지만, 법과 정의는 원래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구현되는 겁니다.

-299쪽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잘 다독이며,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고, 깊은 내면을 이웃과 나누다보면, 나도 모르는 새 주변에는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이 하나씩 늘어납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 혼자서도 행복할 줄 아는 개인, 사냥꾼의 광기 속에서 남을 지켜주려는 따뜻한 이웃,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동지 들이죠. 그런 개인들과 아주 작은 연대가 싹트고 나면, 이 험한 정글 속의 삶도 한결 견딜 만합니다.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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