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단길로 간다 푸른숲 역사 동화 6
이현 지음, 백대승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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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때마다 좋았던 푸른숲 역사 동화 시리즈다. 게다가 제목부터 흠뻑 반하게 만들었다. '비단길'이 나오고, 작품 속 주인공은 무려 '발해' 사람이다. 이름도 예쁘다. 붉은 비단 홍라. 금씨 상단의 외동딸 금홍라. 홍라의 어머니는 금씨 상단을 이끄는 대상주다.

 

그러나 태풍에 배가 부서지고 홍라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홍라를 물에서 건져낸 것은 신라 출신 소년 비녕자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곁을 지켜준 이는 금씨 상단의 호위무사 친샤와 수습 천문생 월보였다. 어머니의 생사를 알 수 없던 홍라는 서둘러 상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여, 비녕자의 집에서 맡아 기르던 말을 제멋대로 금가락지 하나로 값을 치르고 잡아 탔다. 나름 결단력 있고, 행동도 빨랐지만 분명 무례한 결정이었다. 값을 치른다고 해서 거래가 무조건 성사되는 것이 아닐텐데, 어린 홍라는 아직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상경성에 돌아와서도 어머니의 행방은 찾지 못했다. 사람들을 보내어 사방으로 알아보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빌린 배는 난파되었고, 물품들은 모두 잃었다. 일꾼들은 품삯을 요구했고, 빚쟁이들이 날마다 찾아왔다. 특히나 상경성 제일 부자이면서 고리 이자로 비싼 섭씨 영감네 독촉이 무시무시했다. 날마다 불어나는 빚 때문에 금씨 상단이 통으로 넘어갈 판이었다. 게다가 국가에 물품을 대야 하는 날짜도 다가오고 있었다. 황실의 혼인식에 쓸 비단 오백 필이 필요했다. 여러모로 홍라에게는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홍라는 어머니께서 위기 상황에 빠지면 쓰라고 했던 묘원의 열쇠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그드 은화를 발견한다. 황실에 바칠 비단 오백 필은 너끈히 살 양으로 말이다. 그러나 홍라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짜르의 얼굴이 새겨진 특별한 은화였기 때문에 사마르칸트로 가면 더 많은 양의 돈으로 바꿀 수 있었다. 두 배라면 비단 천 필. 밀린 빚을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홍라는 결심했다. 사마르칸트는 멀어서 시간에 댈 수 없지만 솔빈의 소그드 인 마을에 가면 여기보다 나은 값으로 거래를 할 수가 있다. 솔빈에 가서 은화를 팔고, 그 돈으로 솔빈의 말을 사는 것이다. 솔빈의 말은 당나라까지 널리 알려진 명마이니, 이 말을 장안에 가져가면 훨씬 비싼 값에 팔 수 있다. 그리고 장안에서 비단을 싸게 사서 돌아오면 몇 갑절의 이문을 남길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홍라는 당장에 행동에 옮긴다. 언제까지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섭씨 영감의 이자가 불어나는 상황이다.

 

그러나 홍라에게 은화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빚쟁이들이 몰려올 터, 최대한 은밀하게 조용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리하여 호위무사 친샤와 수습 천문생 월보가 같이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홍라를 구해줬던 인연이 있던 비녕자가 부모를 잃고 이 자리에 합류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뜻밖의 감시인이 따라붙었다. 섭씨 영감의 아들이 차용 증서를 갖고 찾아온 것이다. 그리하여 반갑지 않은 혹이 붙었으니 이 소년의 이름은 쥬신타! 아버지를 닮아 셈에는 빠르지만 아버지같이 지독한 수전노는 아니다. 홍라가 그에게 마음을 열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잠시 홍라가 움직인 길을 살펴보자. 당시 발해에는 여러 개의 국제 교역로가 있었다. 발해의 수도 상경에서 부여부를 지나 거란으로 향하는 거란도, 상경에서 영주를 거쳐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이르는 영주도, 상경에서 서경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고, 거기서 서해를 건너 산동 반도에 상륙해 다시 육로로 장안까지 갈 수 있는 압록도가 있다. 여기에 동경을 거쳐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이르는 신라도가 있고, 동경을 거쳐 바다 건너 일본의 서부 해안으로 향하는 일본도가 있다. 홍라는 엄마를 따라 이 여러 길들을 다녀본 경험들이 있다. 그러나 이 먼 길을 스스로 주도해서 가는 길은 분명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그러나 배포 있게 출발했고, 시간을 다투어 말을 달렸다.

 

경험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법! 급한 마음에 서둘렀지만 그것이 도리어 발목을 잡았다. 무리한 행보로 탈이 나버린 홍라. 여러모로 시간을 지체했고, 장안까지 가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분하지만 보다 차분하고 냉정한 판단을 하는 쥬신타의 충고로 홍라는 등주까지로 길을 단축시킨다. 당나라 땅인 등주에서도 솔빈의 말은 반응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비단은 보다 값싸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홍라의 일행은 등주로 향한다. 그리고 이 책의 모든 절정과 반전은 모두 등주에서 일어난다. 짜릿한 첫 거래의 성사와 뜻밖의 일탈, 그리고 예기치 못했던 사건들까지...

 

열세살 홍라로서는 여러모로 쉽지 않은 길이었다. 상단에서 나고 자라 많은 것을 보아왔지만, 구경하던 사람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기술도 부족했고, 진심을 표현하는 것도 어리숙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겐 상처를 주었고, 본인도 약한 마음에 스스로를 베어버렸다. 여기까지 도착한 배짱은 인정해 준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홍라는 분명 부잣집 철모르는 아가씨일 뿐이었다.

 

 

힘들었던 여정이었지만 흑수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던 아버지도 만났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크고 따뜻했다. 다 정리하고 아버지와 함께 살자는 제안은 달콤하고도 위험했다. 그러나 홍라는 어머니의 강인하고도 끈질긴 핏줄도 이어받았다. 홍라는 이 거래를 스스로 마무리 짓고 싶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생각만큼 쉽지 않아 보이지만...

 

 

홍라의 호위 무사 친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친샤의 속 이야기가 나올 때 무척 슬펐다. 그녀가 말을 잃게 된 과정과, 그 후의 삶이 그림 속에서 말없이 전달되었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그림인데, '발해'라는 무척 낯선 나라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 까닭이다. 물론, 남은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 그림들을 있는 그대로 다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림을 상징적으로 잘 포착해서 옛스러우면서도 개성 강한 느낌이 잘 전달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그림만 따로 찾아서 몇 번이나 더 들여다볼 정도로 말이다.

 

이 책은 홍라가 교역길에 나서면서 여러 사건들을 접하게 되는 일종의 모험으로도 읽히지만 그것보다 '성장 소설'로 더 크게 다가온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제 생각만 할 줄 알던 철부지 아가씨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시련을 당하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꿈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책 속의 인물들은 그렇게 순리를 따라갔다. 가야할 곳으로 향했고, 갚아야 할 것들을 갚았다. 그리고 새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 책의 제목이 나온다. 홍라는 비단길을 택한 것이다.

 

 

책의 표지 그림이기도 한 이 그림은 맨 마지막에 나온다. 독자를 흐뭇하게 만들고 기대를 갖게 하는 그림이다. 그 비단길, 그 도전, 그 모험, 그 성장, 홍라뿐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독자 모두에게 갖고 싶게 만들 것이다.

 

책에서는 국사 책에서 몇 안 되게 나오는 발해에 관한 것들이 적절하게 소개된다. 말갈과 흑수를 포함한 다문화 국가 발해, 무왕 시절의 명장 장문휴, 선왕 때 해동성국이라고 불렸던 일 그리고 신라 장보고와 청해진 등등. 그리고 이 책에서 기발하게 등장한 십자가도 소개한다.

 

사진 속 불상의 가슴에 걸린 십자가가 보이는가. 조선 후기에 기독교가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미 8세기 무렵에 우리 조상들은 저 먼 서방의 종교와 교류하고 있었다. 앉아서 이방인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길을 뚫고 교역을 했던 발해다운 문화 전파다. 불교와 기독교가 자연스럽게 섞인 이 모습에서 평화로운 미소가 지어진다.

 

국제도시였던 발해의 상경성. 그곳에서 뻗어나가 세계로 향했던 우리의 조상들. 그 기개가 근사하다. 그런데 지금은 작은 한반도도 반으로 갈리어 바다를 통하지 않고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분단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조상들께도 면목이 없지만, 후손들에게도 낯부끄럽다. 얼마 전 내한한 영화 감독 라나 워쇼스키는 꿈이 뭐냐고 묻는 무릎팍 도사에게 "One Korea"라고 했다.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평화와 공존을 사랑하는 한 외국인이 분단과 단절로 가득한 이 나라에서 지극히 당연하게 말한 한마디. 원 코리아. 우리는 하나된 조국을 바라며 살고 있는가 떠올려 보니 눈물이 날만큼 속상했다. 발해의 역사마저도 도둑 맞을 위험에 처한 오늘날의 현실을 개탄하며 이 책을 보았다. 홍라와 같은 도전이 필요하다. 그 용감한 한 걸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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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0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0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1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1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조 앤 새디 vol.2 - 탐나는 주부 마조의 영근영근한 생활툰 마조 앤 새디 2
정철연 글 그림 사진 / 예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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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 같은 재미란 이런 것일 게다. 뼛속까지 직장인인 아내 새디와, 그런 아내를 내조하는 주부 작가 마조의 알콩달콩 생활 밀착형 개그 말이다.

 

 

주부가 되기 전의 마조는 영화를 보면서 관련 정보를 들려주며 폼도 재고 그랬는데, 이제는 뼛속까지 주부가 되어 정보의 장르가 확 바뀌었다.

 

 

 

마조와 새디 판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 이야기이다. 정말, 공감 간다. 미안하다고 해버리고 싸움을 끝내려고 하면 꼭 나오는 이야기. "뭐가 미안한데?" 그럼 남자는 미치지 않을까. 뭐가 미안한지, 사실 모르니까. ^^

서로 다른 유전자를 갖고 있다지만, 알면서도 좁히기 힘든 여자와 남자의 간극이다.

 

 

 

간혹 저런 경우 봤다. 묶음으로 사면 더 쌀 것 같은데, 실제로는 더 비쌌던 경우! 마트는 전쟁터이니 정신 단디 차리라는 마조의 조언을 새겨듣겠다. 옛썰!!

 

 

 

휴가로 세계 여행을 가서 각지의 맛난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새디의 이야기에 이태원 가서 맛집 기행하라고 말해버린 마조. 그런데 그 아이디어가 제법 괜찮은 거다. 독자도 오! 했다. 그리하여 정말 여름 휴가를 이태원 맛집 세계 여행으로 잡은 쿵짝 맞는 두 부부. 아, 부럽다.

 

 

집안의 갑인 새디는 여당에, 집안의 을이 되곤 하는 마조를 야당에 비교한 이 그림 재밌다. 게다가 촛불 시위에 물대포 대응이라니, 웃으면서 울어야 하나 잠시 망설망설...

 

 

마조가 가끔 이렇게 소설을 쓸 때가 무척 재밌다. 양문 냉장고가 로망이지만, 냉장고 들여갈 공간이 부족하다. 원룸 살던 시절에 5cm차이로 포기했던 양문 냉장고. 하지만 2년 지나 투룸으로 이사가려 했을 때 전세 대란이 시작됐다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크흑...ㅜ.ㅜ

 

 

 

보리차 한번 끓여 넣으려면 우유를 원샷 해야 한다는 슬픈 이야기... 이런 게 바로 생활 밀착형 개그, 생활툰이다.

 

 

 

마조군은 덕후 기질이 다분한데, 신기하거나 재밌는 자잘한 물건들 쇼핑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 모은 것들은 어느새 흥미가 떨어져 찬장 찬밥 신세가 되곤 했다. 그 찬장에 모인 이들의 뒷담화가 재밌었다. 요구르트 제조기의 이름은 요구리였다고... 물건에 이름까지 붙여주는 이런 성격이 재밌다. 이야기가 일상 속에 늘 깃들어 있는 느낌이랄까.

 

 

 

정말로 이태원으로 떠난 여름 휴가! 소셜에서 구한 UV콘서트가 열리는 호텔에 숙박을 잡고 부부가 본격적으로 맛집 세계 여행을 떠났다. 이태원이 이렇게 신기한 곳이었구나, 독자도 감탄! 호텔까지는 잡지 못하더라도 맛집 기행으로 꽤 괜찮은 생각이다. 이국적인 음식도 맛보고, 정말로 가고 싶은 나라의 예행 연습해봐도 좋고~

 

 

 

마조군이 또 소설을 썼다. 자신의 촉촉했던 감성이 메말라 버린 세태를 탄식하며 귓가에 울린 노래는 evergreen! 지하철에서 시디 8장에 만원 받는 그 추억의 팝송을 들으며 마조의 머릿 속에서 재생된 꿈이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따라서 달라지는 꿈속 각본은 나도 자주 경험한다. 마조의 감성, 역시 메마르지 않았어. 아직도 촉촉해!!!

 

 

 

워크샵을 떠나는 남편을 향해 외롭다고 말하는 새디. 그래서 아내를 위해 뽁뽁이에 자신의 옷을 걸쳐놓고 나간 센스쟁이 마조. 그리고 그 뽁뽁이 인형과 정이 들어버린 아내 새디. 정말 궁합이 잘 맞는 부부다.

 

 

 

참 잘했어요~ 스티커로 어깨 안마, 전신 안마 등등, 집안에서 화폐처럼 사용하곤 했던 부부다. 그런데 스티커가 모자르네! 그러자 대출받으라며 스티커 푸어라고 한다. 심각한 사회 문제도 두 사람에게 넘어가면 왠지 가벼운 말장난이 될 것 같다. 그리고 기꺼이 이겨낼 힘도 얻을 것 같은 느낌!

 

실제로 새디가 회사를 그만두게 되어 가계부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왔지만, 이를 계기로 새디는 회사를 차린다. 기반을 닦자면 시간이 걸릴 테지만 기꺼이 헤쳐나갈 것 같은 씩씩한 기운이 느껴진다.

 

 

2010년에 다녀온 일본 여행에 대한 사진과 감상이 책 뒤쪽에 길게 나온다. 원전 사고 나기 전에 다녀왔구나. 가보고 싶은 나라지만 여러모로 걱정이 앞서서 지금은 이태원 투어가 더 눈길이 간다.

 

냉장고 에피소드는 어쩐지 1편에서 본 느낌인데 내 착각인지, 다시 실은 건지 모르겠다. 뭐 다시 본 거라도 여전히 재밌지만.

 

어쿠스틱 라이프 때도 비슷하게 느꼈는데, 이들 젊은 부부의 사는 이야기가 몹시 부럽다. 작품에 소개하는 게 다는 분명 아닐 테지만, 천생연분이란 생각이 든다. 결혼에 관심 없는 이라도 보는 순간 결혼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매력 카툰 마조앤 새디! 3권도 깨알 개그와 알콩달콩 사는 이야기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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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1-08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조앤새디라니, 깜짝 놀랐어요. 으응? 이건 마노아님이 다룰 단어가 아닌...것 같은데? 하면서요. 쿨럭. ㅎㅎ

근데 맨 윗줄 오타요. 새디가 두번이에요. 아내도 새디 내조하는 사람도 새디. ㅎㅎ

마노아 2013-01-08 10:46   좋아요 0 | URL
으하하핫, 제목이 좀 쎄죠! 근데 저 한때 별명이 새디스트였어요. 한참 팬픽 쓸 때 "고통받는 주인공은 아름답다!"라는 가치관을 지녀서 말이죠. ㅎㅎㅎㅎ
오타 지적 감사해요. 방금 고쳤어요. 새디와 새디가 살다니, 그건 너무 폭력적이에요.^^ㅋㅋㅋ

꿈꾸는섬 2013-01-0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마조앤새디, 재밌네요. 생활에서 나온 개그, 이태원 세계맛집기행, 저도 구미가 당겨요.^^

마노아 2013-01-08 20:46   좋아요 0 | URL
오늘 버스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태원을 지났어요. 냉큼 내려서 맛집을 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집에 와야 했답니다. 나중에 누군가와 같이 가려고요. 혼자 가긴 너무 뻘쭘해요.^^ㅎㅎㅎ

2013-01-08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9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구판절판


아버지에게선 편지 한 통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편지를,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잊었다. 잊히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잊어야 했다. 1%의 기적을 기대하며 99%의 삶을 저당 잡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외롭고 나는 슬펐지만 우린 불행하지는 않았다. 책으로 지은 성채는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되는 절대적 안전지대였고 피난처였다. 그리고 만주의 전쟁터 속으로 걸어 들어간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남긴 목숨 값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다. 그것을 영원히 몰랐다면 좀 덜 슬프고, 덜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오거나, 아니면 너무 빨리 온다. 우리는 언제나 너무 빨린 만난 사랑 때문에, 너무 오래 만나지 못한 사람 때문에, 그리고 너무 늦게 알아버린 진실 때문에 아파한다.

-51쪽

간수장은 "전시 상황에서는 모든 인쇄물이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불온문서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아니라도 나는 알고 있다. 국가라는 괴물이 책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증오는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모든 국가와 체제는 책을 두려워했고 책과 불화했다. 책 때문에 나라는 망하고 군주는 쫓겨났으며 귀족들은 망명했다.

-63쪽

그때 나는 알았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모든 군인들은 문장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총탄도 포탄도 아니었다. 그것은 글이었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는 한 줄의 글로 족했다. 몇 개의 단어와 숫자, 구두점에 의해 소년들은 병사가 되고, 전장으로 이동하고,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인두처럼 달구어진 총탄에, 차가운 적의 총검에, 고막을 터뜨리는 폭발음에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 채 죽어 갔다.

-100쪽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읽는다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감각이라는 사실을. 한 줄의 문장을,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을, 혹은 그의 세계를 읽는 행위라는 것을.

-169쪽

스기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을 찾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신은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힘 있는 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신의 영광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킨다. 힘없는 자들은 신의 뜻이라는 핑계로 불의를 눈감는다. 하기야 지금 같은 시절이라면 신을 믿지 않는 자만보다 신을 믿는 어리석음이 나을지도 모를 테지.

-178쪽

사내들은 침을 튀기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가끔은 머리가 터지고 이가 부러졌다. 히라누마는 그들을 경멸하지 않았다. 그들은 경멸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폭력은 불안에 지친 그들의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시대의 쇠바퀴에 맞섰을 뿐이었다. 무식꾼은 무식한 대로, 야비한 자는 야비한 대로, 거친 자들은 거친 방식으로.

-187쪽

스기야마의 눈빛은 날이 무뎌졌다. 그는 행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약한 낭만주의자들의 지껄임이라고 외면해 왔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애써 부정해 왔던 일상의 작은 평화. 하지만 그것은 가질 수 없었기에 더욱 간절한 꿈, 꿈꾸지 못했기에 외면해야만 했던 동경은 아니었을까? 그는 한참 후에야 검열도장을 내리쳤다. 탕! 푸른 글씨가 새겨졌다. 검열 필. 엽서는 고베 항 뒷골목의 초라한 판잣집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년에게 날아갈 것이다. 소년은 프랜시스 잠을 읽을 것이다. 엽서는 소년에게 삶의 무게와 전쟁의 고통을 이길 의지를 전할 것이다. 검열은 실패했다.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212쪽

스기야마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분명히 인식했다.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다시는 변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변해 버린 자신이 두려웠다. 어떤 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읽기 전의 사람이 아니다. 문장은 한 인간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불치의 병이다. 단어와 구두점들은 몸 여기저기에 세균과 바이러스처럼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문장들은 뼈에 새겨지고 세포 속에 스며들고 자음과 모음은 혈관을 타고 흐른다. 수많은 상징과 비유는 뇌세포를 물들이고 영혼을 재구성한다. 그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가서도 안 된다.

-220쪽

동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은 스물여섯 젊은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세상이 친절하지 않으며 세월이 다정하지 않음을 알아 버린 노인의 웃음. 기대는 배반당하고, 꿈은 이룰 수 없음을 받아들인 자의 웃음.

-225쪽

스기야마는 입술을 달싹였다. 승전? 전쟁에 이긴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전쟁과 싸워 이기는 인간은 없다. 죽음과 싸워 이기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전쟁이 끝나면 모두가 패자다. 승자조차도 자신이 얻은 승리 때문에 고통 받고 파멸당한다. 그러니 이기는 자에게도 지는 자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전쟁으로 상처 입는 것은 똑같으니까.

-259쪽

스기야마는 몽둥이로 그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어 무사함을 확인했다. 자신의 몽둥이에 찢어진 이마와 부어오른 눈두덩과 터진 입술.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때로 말은 소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순간의 눈빛, 짧은 숨소리, 손가락 끝의 떨림이 말을 대신한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대화다. 스기야마의 눈빛은 수십 마디의 미안하다는 말보다 절실했다.

-269쪽

결핍은 고통스럽지만 때로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고 고양시키는 법이다. 감옥은 살기엔 고통스러웠지만 꿈꾸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그곳엔 자유가 없었기에 자유를 꿈꿀 수 있었고, 희망이 사라졌기에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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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플까봐 꿈공작소 5
올리버 제퍼스 글.그림, 이승숙 옮김 / 아름다운사람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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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바탕에 파란색 제목의 글씨가, 가운데에 자리한 초록병의 색깔 배합이 예쁘다. 그리고 얼굴이 발갛게 물든 어린 소녀도. 아직은 병이 더 크다. 소녀가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어떤 이야기인지 들여다보자.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머릿속은 온통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밤하늘의 별에 대한 생각과 바다에 대한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녀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존재는 할아버지셨다. 의자 뒤로 가득한 책이 할아버지의 입술을 거쳐서 소녀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모든 분야에 탁월했을 할아버지의 존재. 게다가 소년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얘기해주셨을 것만 같다. 참으로 다정하고 다정한 할아버지.

 

땅바닥에 누워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별자리 이야기를 해주셨을 할아버지. 수영하는 손녀를 지켜봐주는 안전한 보호자.

 

 

소녀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기쁨에 겨웠다. 아무렇게나 그려진 낙서같은 그림도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해줄 할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의자가 비어버렸다. 할아버지의 부재. 추억이 멈춰버렸다.

 

 

해는 졌고, 꽃은 시들 것이다. 의자는 비어 있고, 소녀는 마음을 다쳤다.

 

 

두려워진 소녀는 잠깐만 마음을 빈 병에 넣어두기로 했다. '마음이 아플까봐!' 그랬다.

마음을 담은 병을 목에 걸었다. 그러자 마음은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게 달라졌다. 별에 대한 생각도 바다에 대한 관심도 사라졌다. 비어진 마음은 이것들을 담아내지 못했다.

어느덧 소녀는 세상에 대한 열정도 호기심도 잊은 채 어른이 되었다.

마음은 자라지 못했고, 몸만 성장했다.

병은 점점 무거워졌고 몹시 불편했다. 그래도 소녀의 마음만은 안전했다.

두터운 벽에 갇혀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 호기심 많은 작은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소녀는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소녀도 아이의 물음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따.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마음을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갖은 방법을 썼지만 실패했다. 병은 깨지지 않았다. 그저 통통 튀어서 데굴데굴 굴러갈 뿐...

 

 

그런데 그 병이 임자를 만났다. 병에서 마음을 꺼내줄 아이에게로 간 것이다.

호기심 많은 작은 아이는 병속에서 마음을 꺼냈다. 마음에게 자유를 주었고, 주인을 찾아주었다.

이제 비었던 의자는 채워졌고, 잃었던 시간을 채워 갔다.

묻어두었던 많은 것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할아버지가 채워주셨던 그 추억이, 이제 소녀를 거쳐서 그 소녀만큼 작은 아이에게 전해질 차례다. 할아버지는 많은 것을 주셨다. 당신이 떠나셔도 사라지지 않을 많은 것을, 많은 마음을...

 

 

이제 병은 비었다. 그러나 마음은 채워졌다. 마음은 아프지도 무겁지도 않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유산이다.

 

 

책의 앞뒤 표지를 열면 나오는 속표지 모습이다. 작은 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돌봐주는 어른이 보인다. 아마도 할아버지일 테지.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아이를 보며 얼마나 사랑스러움을 느끼는지 대사 없이도 전해진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고운 책이다.

 

유아용 책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이 속에 깃든 이야기들을 어린이들이 잘 이해해줄지 모르겠다. 그보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더 크게 다가갈 것 같다.

 

마음이 아플까 봐... 혹시 외면했던 사람이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혹시 마음이 아플까 봐 좀 더 깊이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또 생각해 본다. 내 마음 아픈 것만 생각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함으로 내가 더 힘들지는 않았는지... 이제 그 병을 비워야겠다. 마음은, 아프지 않아요. 내게 돌아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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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곰 2013-01-10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 책 너무 좋아요. 전 책먹는 아이때부터 좋아했는데 이 책과 날고싶어! 도 무척 좋아요^^ 마음이 아플때마다 열어보는 책인데 마노아님이 소개해주시니 더욱 좋은걸요^^

마노아 2013-01-10 21:32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책이에요. 작가 이름으로 검색해보니 책 먹는 아이가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저는 그 책은 그냥 그랬었는데, 지금 이 감정으로 다시 보면 그때보다 더 좋게 읽힐 것 같아요. 말씀하신 책과 날고 싶어도 읽고 싶어지네요. 기대가 커졌어요. 헤헤헷^^
 

눈길 가는 책 담아 보자. 그러다가 손에 잡히면 읽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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