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SION 과학

제 1798 호/2013-02-06

[이달의 역사]모르는 사람이 내 머릿속에? 영화 속 ‘다중인격’

고대 중국의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것이라는 ‘성선설’을 주장했다. 반대로 순자는 사람의 성품은 본래 악하다고 반박하며 ‘성악설’을 내세웠다. 기독교에서는 선과 악을 구별하게 만드는 열매를 따먹는 바람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본다. 중동 지역에서는 “세상은 선과 악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이원론 중심의 마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 때로는 착하고 때로는 악한 다면적인 인간의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흥미로운 소재다.

의학이 발달하면 사람의 마음에서 선한 부분만 남기고 악한 부분은 말끔히 없애는 약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영국의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은 이러한 상상력에서 출발해 1886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해적 선장 존 실버를 따라 항해를 떠난 꼬마 짐 호킨스의 다채로운 모험이 담긴 ‘보물섬(Treasure Island)’의 성공 이후 다시 한 번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법학박사이자 의학박사인 지킬 박사는 인간을 ‘여러 개의 모순되면서도 독립적인 인자들이 모인 부조리한 집합체’로 규정하고 각 특성을 분리해내는 초록색의 약물을 발명한다. 선과 악이라는 대립되는 본성을 분리하고 하나만을 선택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낮에는 점잖고 학식 있는 지킬 박사로 살아가다가 밤이 되면 약물을 마시고 하이드 씨로 변해 억압된 스트레스를 분출한다. 후에 발견된 유서에는 “저항도 못하는 상대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한 대 한 대 칠 때마다 환희를 맛보았다”는 고백이 적혀 있었다.

∎ 한 인물 안에 담긴 두 개의 인격

[그림 1]영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이중인격의 대표적인 캐릭터다. 1880년대 포스터. 사진 출처 : 위키미디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변신이 반복되면서 시도 때도 없이 하이드 씨로 변하는 일이 잦아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거리로 나가 살인과 폭행을 일삼았고 약을 먹어도 지킬 박사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교수형이 무서워 자살하려 하면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하이드 씨가 튀어나와 난동을 부렸다. 지킬 박사는 결국 스스로를 집안에 감금하다 흉측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처럼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교대로 나타나는 현상을 흔히 ‘이중인격’이라 부른다. 겉보기에는 착하고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보일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선과 악이라는 대립되는 측면을 모두 지닌 인간의 극단적인 본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중인격의 대표적인 사례인 지킬 박사의 이야기는 1920년 무성영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Dr. Jekyll and Mr. Hyde)’로 처음 만들어져 문학과 연극에 이어 영화계까지 점령했다. 이후 1931년과 1941년에도 리메이크 돼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에도 비슷한 소재를 다룬 작품들이 끊이지 않고 발표됐다.

∎ 지금도 계속되는 지킬 박사의 이야기
대표적으로는 공포 스릴러 영화로 유명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43년 작품 ‘의혹의 그림자(Shadow of a Doubt)’를 꼽을 수 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찰리 삼촌이 사실은 정체를 감춘 엽기적인 연쇄 살인마라는 설정으로 호평을 받았다.

1962년에는 심리적, 육체적 충격을 받으면 초록색 괴물로 변신하는 만화 주인공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Incredible Hulk)’가 선을 보였다. 지킬 박사와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헐크는 1970년대 TV영화부터 2012년 ‘어벤져스(Avengers)’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해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림 2] 영화 ‘호빗’에 등장하는 다중인격 캐릭터 ‘골룸’. 사진 출처 :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1996년에는 ‘이중인격 전문 연기자’라는 별명을 지닌 에드워드 노튼(Edward Norton) 주연의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가 화제를 모았다. 정신질환을 가장해 법원에서 무죄를 받아낸 살인자의 이야기다. 노튼은 1999년 ‘파이트 클럽(Fight Club)’에서도 유사한 역할을 맡았다. 무료한 생활에 지친 주인공이 친구의 권유로 격투 클럽에 가입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이중인격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는 내용이다.

2003년에는 프랑스 영화 ‘엑스텐션(Switchblade Romance)’와 미국 영화 ‘아이덴티티(Identity)’가 이중인격을 다뤘다. 영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에서 아라곤 역할을 맡았던 배우 비고 모텐슨(Viggo Mortensen)이 명연기를 펼친 2005년 작품 ‘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에 ‘두 얼굴의 여친’과 ‘뷰티풀 선데이’가 비슷한 소재를 다루었다. 최근에는 영화 ‘호빗:뜻밖의 여정’에서 착한 ‘스미골’과 사악한 ‘골룸’이 등장하는 등 다중인격 캐릭터는 영화 속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독특한 캐릭터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 24개의 인격을 가지고 사는 빌리 밀리건
이중인격으로 소재로 한 영화는 배우의 능력에 따라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뉜다. 하나의 인물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인격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중인격 환자들도 혹시 연기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는 것은 아닐까?

두 개 이상의 자아가 번갈아 나타나는 현상을 흔히들 ‘이중인격’ 또는 ‘다중인격’이라 부른다. 정식 명칭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DID)’다. 자아가 여럿으로 분리되고 따로 떨어지는 바람에 단일한 정체성을 보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증상을 가리킨다. 정신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빙의(Possession)’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다중인격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20개가 넘는 인격을 가지고 사는 윌리엄 스탠리 밀리건(William Stanley Milligan, 1955~)이다. 열 살 때인 1964년부터 계부 챌머 밀리건(Chalmer Milligan)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하면서 다중인격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면 본래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인격이 등장하는 식이다.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등 커다란 사건을 겪을 때마다 하나씩 새로운 인물이 윌리엄의 몸을 지배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격은 핵심 인격인 빌리(Billy)를 중심으로 아서, 레이건, 앨런, 타미, 대니, 데이비드, 크리스틴, 필립, 케빈, 월터 등 총 24개에 달한다. 강간, 폭행, 절도 등 수많은 범죄로 법원과 정신병원을 수시로 드나들던 1978년 미국 최초로 ‘다중인격 장애와 정신이상’을 이유로 무죄가   선고된다.

가짜 연기를 펼친다고 의심한 수사관과 의사들이 갖가지 검사와 취조를 실시했지만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발견돼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윌리엄은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이었지만 아서라는 인격이 지배하면 아랍어와 아프리카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수학, 물리학, 의학을 전문가 수준으로 뽐낸다. 레이건일 때는 크로아티아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타미로 변신하면 전자제품을 능숙하게 다룬다. 단순한 연기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능력들이다.

다중인격이 발생하는 원리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환자의 90% 이상이 어린 시절 심각한 학대와 폭력을 겪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주체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기에는 스스로를 보

 

 

호하기 위해 자아를 바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다중인격은 잠재적 범죄자라기보다 사회가 보호하지 못한 약자이며 피해자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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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3-02-07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리 밀리건이 궁금하다. 프라이멀 피어 무척 재밌게 봤는데...

후애(厚愛) 2013-02-08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향향기는 여전히 재밌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연휴 잘 보내셔요.^^
감기조심하시구요.

마노아 2013-02-09 12:32   좋아요 0 | URL
장수하는 과학향기에요. 일주일에 두번, 반짝반짝 재미를 느껴요.
후애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연휴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보내셔요~
저는 이미 감기에 걸렸어요. 흑흑....후애님은 감기 조심이에요~
 

 

아, 완전 빵 터지네. 러셀 크로우도 리트윗했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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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2-0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나 재미있으면서도 완전 공감합니다.

마노아 2013-02-07 16:18   좋아요 0 | URL
첫번째 곡의 '제설'에서 완잔 빵빵 터졌어요. 저도 지금 근무하는 곳에서 눈이 오면 다들 장비들고 주차장 집결이거든요. 그러니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분노의 공감을 느낄 거예요.^^

saint236 2013-02-08 11:39   좋아요 0 | URL
하늘에서 하얀 폐기물이 내린다, 스레기가 내린다, 똥이 내린다. 이렇게 표현을 하죠.^^

마노아 2013-02-08 12:46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가사 보고서 저렇게 표현하는구나 싶었어요. 하얀 폐기물... 완전 슬퍼요.^^;;;

BRINY 2013-02-07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 마노아님, 그 학교는 교사들에게 제설을 시켜요? 정말 상상초월!
저희는 뭐...행정실 직원분들에게 감사를...

이 동영상은 그냥 뭐 상상이상이더라구요. 가사 완전 잘 썼고, 노래들은 왜 이리 잘하는지요!

마노아 2013-02-08 12:47   좋아요 0 | URL
밤새 내리면 주간 샘들이 삽들고 집결이구요. 오후에 내리면 야간 샘들이 삽들고 집결이에요.
여긴 뭐 교장이 회의 소집하면 수업도 뒤로 밀려요...;;;;;

동영상 최고죠. 외국에서도 한국적 특수한 상황을 잘 이해하려나 모르겠어요. 유튜브 들어가니까 메인에 걸려 있더라구요.ㅎㅎㅎ

무스탕 2013-02-07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뉴스에서 이런게 있다는건 들었는데 여기서 보네요.
아, 어쩌나.. ^^;;
근데 노래 참 잘한다, 들.. +_+

마노아 2013-02-08 12:47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오랜만이에요!!!!
다들 노래도 잘하죠? 이렇게 슬프고 웃기다니...^^ㅎㅎㅎㅎ

같은하늘 2013-02-0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아까 뉴스에 나오는거 얼핏봤는데...
다시 잘 봐야겠당~~ㅎㅎ

마노아 2013-02-08 12:47   좋아요 0 | URL
뉴스까지 타고~ 완전 대박 동영상이에요. 13분이 전혀 길지 않아요.6^^ㅎㅎㅎ

비연 2013-02-08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대박...ㅎㅎㅎㅎㅎㅎ

마노아 2013-02-08 12:47   좋아요 0 | URL
누구 아이디어인지 진짜 대박이에요. ㅋㅋㅋㅋㅋ

순오기 2013-02-0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한국 공군이 이런 것도 만들었군요. 멋져요~ ^^

마노아 2013-02-08 12:48   좋아요 0 | URL
아아디어 창고들이에요. 어휴, 서 있는 자세랑 각도까지도 똑같아요. ㅋㅋㅋ

세실 2013-02-0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뉴스에서 봤는데 나름 잘 짜여졌더라구요~~~
전체 보니 재밌네요. 기발한 아이디어^^
립싱크인가? 노래 참 잘하네요~~

마노아 2013-02-08 12:48   좋아요 0 | URL
입모양이 조금 안 맞는 것 같은데, 또 동시 녹음까지 똑같이 했나 싶기도 하고요.
하여간에 이 영상 보고 오랜만에 신나게 웃었어요.^^

세실 2013-02-08 13:58   좋아요 0 | URL
좀 전에 신문에서 봤는데 실제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장발장도 경감도 성악전공이랍니다. 매우 훌륭해~~
백만원으로 탄생한 작품이랍니다.

마노아 2013-02-09 22:58   좋아요 0 | URL
직접 부른 것은 알겠는데 동시 녹음인 지가 궁금해요. 입 모양이 맞을 때도 있고 안 맞을 때도 있더라구요.
암튼 다들 참 대단해요.^^
백만원으로 가능한 것은 군대이기 때문이겠지요. ㅎㅎㅎ
 

 

 

 

 

 

 

 

 

 

 

 

 

 

오늘의 유머는 이렇게 써야지...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bestofbest&no=98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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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3-02-06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 겉표면이 나무무늬 시트지 같은거 맞나요? 상을 포기하실 꺼면 그저 잡아 뜯는 방법밖에는 없을듯한데요.

마노아 2013-02-06 20:08   좋아요 0 | URL
어이쿠, 제가 그림을 덜 올렸네요. 앞에 그림 네개가 더 있는데 마지막 것만 올린 것 있죠.
이 사람 저 상 어떻게 해결했나 궁금해요.^^ㅎㅎㅎ

꿈꾸는섬 2013-02-06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세워뒀다가 뚝배기가 어느순간 떨어지면 어쩌지 걱정하는데, 저게 결국 떨어졌을까요? 궁금해요.

마노아 2013-02-07 00:58   좋아요 0 | URL
밑에 수건이라도 받쳐놔야겠어요. 전날 산 뚝배기가 깨지면 어떡하나요. ㅎㅎㅎ

마태우스 2013-02-06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저럴 수도 있군요!! 내일이면 떨어지지 않을까요 안된다면...미끄덩미끄덩한 기생충을 소개해드릴까요?

마노아 2013-02-07 00:59   좋아요 0 | URL
아주 강력한 접착력이에요. 뭔가 고온과 압력과 상의 코팅지까지 결합된 조화가 아닐가 싶어요. 기생충이라니, 놀라운 방법이에요!!!

무스탕 2013-02-07 23:25   좋아요 0 | URL
하하하~~ 해결책으로 기생충을 거론하는 마태님. 정말 기가막히네요. ㅎㅎㅎ

마노아 2013-02-08 12:48   좋아요 0 | URL
역시 훌륭한 연구자시라니까요.^^

같은하늘 2013-02-08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어쩌나~~~ 상과 뚝배기를 모두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뭘까나?
뚝배기보다 상이 더 비쌀것 같은데...

마노아 2013-02-08 12:49   좋아요 0 | URL
저 상황에서 저렇게 철저하게 설거지를 한 것도 놀라워요. 대단한 자취생!!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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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겐토는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다. 평생 연구에 전념한 대학교수였던 아버지는 겐토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일에 부정적이었고 어른으로서 실패한 인생을 산 것처럼 보였다. 대학원에서 약학부에 있는 겐토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아직도 확신이 없다. 잘 한 선택인지 알 수가 없고, 자신도 없다. 어느덧 겐토는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보았던 무기력한 패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런 겐토가, 이메일을 한통 받았다. 죽은 아버지가 보낸 이메일이었다. 자동발신된 이메일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아버지는 겐토에게 특수한 임무를 맡겼고, 이제부터 그가 사용하는 모든 통신이 감시될 거라고 경고했다.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현실로 벌어졌고, 어느새 겐토는 아버지가 하려고 했지만 채 하지 못했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말이다.

 

이야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백악관에 있는 미 대통령이 조간 브리핑을 받고 있고, 이라크에 파견 가 있는 용병 예거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들의 치료비를 위해 뭔가 껄끄럽지만 보수가 어마어마한 임무를 수락한다. 예거가 리더로 움직이게 된 특수부대는 네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뭔가 비뚤어진 것처럼 보이는 일본인 믹과 통신 담당 개럿, 의료 담당 마이어스가 합류했다.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한참 진행 중인 콩고에서 누군가를 사살하는 임무를 맡았다. 치명적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고, 그것을 막기 위한 명목으로 그곳 피그미 부족원들과 거기 살고 있는 인류학자를 없애는 게 이들의 임무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 달리 이들에게 떨어진 임무는 바이러스 퇴치가 아니고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지도 모를 어떤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작가는 끊임없이 전쟁에 대해서 얘기했다. 인류의 역사 속에 포함된 무수한 전쟁과, 그 속에서 인간이 보인 광기, 그리하여 자행된 대학살에 대해서. 특히 아프리카 콩고에서 벌어진 전쟁을 가리켜 '스폰서가 붙은 전쟁'이라고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군사 강국은 반군과 정부군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그 땅의 주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스스로를 지옥에 빠뜨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대규모의 지하자원들이 대기업의 안주머니로 흘러들어간다.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바로 떠오른다. 이 작품에서도 그 영화에서처럼 비참한 소년병들이 등장한다. 가진 것이 많아 더 가난할 수밖에 없는 땅 아프리카가 주요 무대니까.

 

첫 씬이 백악관이었던 것처럼 미 대통령 번즈는 중요 인물이다. 초 거대국의 수뇌부이고, 이 국가의 인격을 몸으로 나타낼 수 있는 최고 의사 결정권자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중요한 인물은 다분히 폭력적이었다. 제 나라의 안전과 이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자신의 권력과 만족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내칠 수 있고 버릴 수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지난 날, 돈 잘 벌 수만 있다면 뭐든 괜찮다며 가장 탐욕스러운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은 우리의 천박한 선택이 떠오른다. 그후로도 우리는 얼마나 신중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무서운 것은 지력이 아니고, 하물며 무력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인격입니다. -415쪽

 

고대로 올라갈수록 전쟁은 근접 거리에서 이뤄졌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근거리에서 적 병사와 마주친 미군 병사가 총의 방아쇠를 당긴 비율은 20%라고 했다. 무척 적은 비율로 보인다. 남은 80%는 탄약 보급 등의 구실을 삼아 살인을 기피했다고 한다. 최전선의 병사들은 자신이 죽으리라는 공포보다 적을 죽이는 스트레스를 더 강하게 느끼고 있다고. 그런데 베트남 전에서 발포율은 무려 95%까지 상승했다. 사격 훈련 시 표적을 원형 표적에서 인간형 표적으로 바꾸고 사격 성적에 따라 가벼운 징계를 내리거나 보수를 주었다는 것이다. 반사적으로 발포할 수 있는 훈련을 갖춘 그 병사들은 그러나 살아남고서 더 큰 지옥을 만나야 했다. 반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군인은 그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지 목격하지 못했다. 그의 심리 상태는 베트남전에서 사람을 죽인 군인보다 훨씬 편안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가장 먼 거리, 그리고 가장 안전한 백악관 안에서 공격 명령을 내리는 미 대통령이야말로 가장 살인에 따른 정신적 부담을 갖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그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서 이 지구의 평화는 상당 부분 좌우된다. 이 책에서는 노골적으로 부시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을 대입시켜 놓았다. 매스컴을 이용한 민심 조작에, 배불리기 바쁜 군산복합체까지.

 

작가는 공정하게도 미국에 대한 비판만 일삼지 않는다. 관동 대지진과 난징대학살 때 일본인이 보인 만행과 끔찍한 학살도 과감없이 전했다. 자국의 역사를 반성할 줄 알고 사죄할 줄 아는 지식인이 있다는 사실에, 피해 당사자국의 국민으로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작품에는 겐토의 동료로서 중요한 몫을 해내는 한국인 청년도 등장한다. 그의 입을 통해 한국적 '정'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데, 이게 그렇게 특별한 것인가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작가가 직접 언급하고 싶을 만큼 각별하게 다가왔던 것이 분명하리라.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용병 대장 '예거'다. 병든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위험한 선택을 내린 그였지만, 자신의 선택에 따른 대가를 변명하지 않고 지불하려고 하는 모습이 좋았다. 자신의 손에 묻힌 피와 그로 인한 심적 부담을 외면하지 않았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감수했고, 사죄와 반성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로서, 또 '어른'으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 모두 충실함을 보였다. 목숨을 걸고 아들을 살리려고 했고, 누스가 세상에 대해서 과장된 증오를 품지 않게, 또 세상의 소중한 대의를 우습게 여기지 않게 정리해주는 모습이 믿음직했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설키는 진짜 이유가 등장한 것은 작품의 1/3이 지나고 나서였다. 마침내 등장한 하이즈먼 리포트의 내용에 독자는 휘파람을 불고 싶었다. 오호라, 이 대단한 상상력이라니!!! 그리고 엄청난 사건의 동요 속에서 더 큰 반전이 나온 것은 587쪽이었다. 이 작품이 686쪽에서 끝나니 슬슬 마무리지어야 할 때에 커다란 한 방을 먹인 것이다. 그제서야 궁금했던 많은 부분들의 조각이 맞아 떨어지면서 퍼즐이 완성되었다. 작품 속 중 소재처럼 그야말로 독자에게는 큰 '선물'이었다.

 

기술이 발달하고 과학이 진화할수록, 인류는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가난해진 마음처럼. 진정 인류는 공멸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 자신들이 가진 핵무기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다른 나라들이 추가로 만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하는 초강대국들의 행태를 보면 너무나 소원한 일이다. 존 레논이 노래했듯 나라도 없고 종교도 없이 평화를 노래할 그 날이 오려면, 이 책의 누스 같은 존재가 있어야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이즈먼 박사님이 얘기한 것처럼, 가끔은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사악하고 이렇게 탐욕스럽고, 이렇게 지저분한 인간들이 점령을 했는데, 이 지구가 살아남는 것은 타당한 일인가 하고... 물론, 그러니까 다 같이 망하고 싶은 건 절대 아니지만...

 

현생인류는 탄생한 지 20만 년이나 지나도 서로 죽이는 걸 멈출 수 없는 딱하디 딱한 지적 생명체네. 살육 병기를 모아서 서로를 위협하지 않으면 공존할 수 없는 이 현재 상황이야말로 인류가 가진 윤리의 한계였던 거지. 슬슬 다음 존재에게 이 행성을 넘겨줘도 좋을 때라고 생각하네. -475쪽

 

작품이 무척 방대하다. 메시지도 분명하고, 재미도 크다. 잠시 지나친 이야기를 조금도 흘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모두 챙겨서 알뜰하게 사용해버렸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불신했던 과거들을 정리하고 새출발하기에 700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은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여러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줬고, 그들의 악과 선을 모두 제시했다. 끔찍한 절망도 보였지만, 벅찬 희망도 같이 노래했다.  메시지가 대놓고 적나라해서 때로 불편하기도 하지만 원래 진실은 가혹하고 불편한 법.

 

쓴소리도 해야겠다. 번역이 한숨 나올 지경이다. 문장이 너무 어색하다. 주어가 안 맞는 게 많았고, 사용하는 단어도 부드럽게 읽히지 않는다. 편집은 또 어떻던가. 오타와 비문이 아주아주, 정말 환장할 정도로 많았다. 재밌게 읽다가 툭툭 끊겨서 어찌나 화가 나던지, 때로 책을 던지고 싶을 정도였다.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더 많았지만, 요만큼만 옮겨보았다. 이것도 시간 오래 걸렸다..;;;

 

특수부대가 사용하는 모든 시간이 네자리로 표시되어 있다. 1800시는 정각이라 좀 나아 보이는데 2205시는 너무 우습지 않은가.

51

모두가 공수 부대 기장은 모두 갖고 있다. >>>모두의 중복

149

내용이었데 >>>내용이었는데

154

최저한의 화력은 >>> 최소한의 화력은(문장이 매끄럽지 않음)

160

예거가 물음에 마이어스의 목소리가 답했다. >>> 예거의 물음에 마이어스가 답했다.

170

가지고 놀다다가 살해하는 것으로 >>> 놀다가 살해하는 것으로

204

용병 일행에서 기묘한 동요가 퍼졌다. >>> 용병 일행에게서

213

눈에 보이지 않은 커다란 힘이 >>>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236

일류 멸망의 연구가 >>> 인류

269

결과가 인류는 고도의 언어 능력을 얻었다. >>> 그 결과 인류는

305

멸망한 인류종에게는 마지막이 하나 남은 개체가 있었을 터였다. >>> 마지막에

417

남은 20메가의 정보 >>> 앞에서 15메가 중 3메가를 쓰고 남은 거라고 했으니 12메가가 맞다.

422

모든 대응책은 네메시스 작전의 발동되기 전에 >> 작전이 발동되기 전에

436

대답을 듣던 에시모의 표정이 절망적인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 표정에

바로 이어지는 문장이다.

시선을 떨어뜨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윽고 결심했다는 그러면 자기 혼자 돌아가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 아 욕 나와..;;;;

443

현지 조사를 위해 머물하고 있었다. >>> 머무르고

491

피어스가 손가락으로 손가락으로 >>> 손가락 중복

494

손전등를 >>> 손전등을

500

첫줄 끄트머리 문장이 아주 희미하게 인쇄되어 있다.

501

수갑에 다른 한쪽은 >>> 수갑의

502

중국의 사이버전 부대라면 그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겁니다. >>> 문맥상 가지고 있다고 해야 맞아 보인다.

503

붉은색을 띄었다. >>> 띠었다.

511

루벤스는 자세를 바로하고 대답하자>>>루벤스가

515

같은 건물을 두고 뒷장까지 계속해서 ‘성당’과 ‘교회’가 교차되어 나온다. 통일을 해줘야겠다.

그 자체가 거대한 빨간 벽돌 같은 모양의 건물이 평평한 옥상이어도 >>> 건물은

예거가 벽에 붙여서 창으로 내부를 들여다보았지만 >>> 붙어서

517

예거를 죽이러 돌진했다. >>> 죽이려

522

빨간 벽돌 건물로 향해 돌격 대형을 섰다. >>> 건물을

529

평화 유지군이 기지로 돌아가기 시작하니 이쪽으로 오고 있네. >>> 뭐라는 건지...;;;;

532

예거가 물음에 마이어스가 대답했다. >>> 예거의 물음에

558

수수께끼를 풀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 풀려면

561

겐토는 차에 내려서 >>> 차에서 내려서

564

마지막 한 주 동안이었나. >>> 동안이었네.

577

누스는 어째서 북적도해류의 데이터를 필요했을까? >>> 데이터가

600

손전등를 >>> 손전등을

601

빛의 다말이 전자화된 기기들을 비췄다. >>> 다발의 오타인 듯

603

예거는 외침과 동시에 마이어스가 조종간을 앞으로 당겼다. >>> 예거의 외침과

610

첫 줄 끄트머리가 또 다시 희미하게 인쇄되어 있다.

621

공학 도착에서 >>> 공항

629

겐토는 고바야시 마이카의 생존을 빌며 뒷문을 접수 창구에 말을 걸었다. >>> 아, 욕나온다.

633

전화가 서둘러 전화 전원을 켰다. >>> 인공지능이야?

644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혼란 외침이었다. >>> 혼란스런

647

공중에 비산한 파편을 >>> 비상한

650

신호로 예거가 훤히 열린 문간으로 두 팔을 뻗었다. >>> 누구의 신호라는 거야?

650

일순 자취를 남기고 수평 꼬리 날개에 머리 위를 스치고 날아갔다. >>> 주어는 누구? 여긴 어디?

656

눈을 빛내는 리디아가 흘러넘칠 것 같은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 눈을 빛내는.... 이 문장으로 감격에 겨운 인물의 심사가 느껴지는지...

657

중환자실를 >>> 중환자실을

664

물 분자에 갇힌 상태에 있는 상태입니다. >>> 상태 중복. 상태 심각!!!!

666

이 시선에서 도망칠 수 없었을 거리라고 생각했다. >>> 거라고

667

창밖에 햇살을 바라보며 >>> 창밖의

671

‘서로 돕는 사람’으로서의 면복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 명목을

671

먹구름이 잔뜩 사이로 >>> 낀

 

내 책은 1쇄인데, 작년에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중 하나이니 지금은 물론 많이 수정되어 있겠지?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해...

작가 소개에서 보고 '6시간 후 너는 죽는다'가 무척 궁금해졌는데, 같은 번역가여서 망설여진다. 읽으신 분들 계시면 번역 어떤지 정보 좀 주세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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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3-02-06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84에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전쟁터 주변에 사는 사람들-직접적으로 전쟁을 겪어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식의 글귀가 기억납니다. 여러곳의 리뷰가 좋아서 보관함에 넣어 두었는데 번역이 이렇게 성의 없나요 허허..

마노아 2013-02-06 16:24   좋아요 0 | URL
분단 국가에 사는 국민으로서 더더더 입맛이 써요. 이 책 많이 팔린 것 같은데 지금쯤은 좀 수정이 되지 않았을까요? 아직도 그대로라면 정말 실망이구요. ^^

다락방 2013-02-0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도 이랬어요, 마노아님. 1쇄인지는 확인해보지 못했지만요. 희미하게 인쇄된것 까지 똑같네요. 흐음.

마노아 2013-02-06 16:24   좋아요 0 | URL
별 하나 깎아먹을 만큼 분노했지만, 그래도 '대의'를 생각하며 참았어요. ㅎㅎㅎ

icaru 2013-02-0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번역가 보다는 편집의 흠인거 같아요. 편집자들이 이 책 작업할 때 과로에 시달렸거나,,, 책임의식이 덜했거나요. 보니까 이 번역가의 도쿄섬을 읽었더라고요. 그땐 번역 무람없었어요!

마노아 2013-02-06 16:25   좋아요 0 | URL
다른 책은 달랐다니 다행이에요. 근데 이 책은 번역도 좀 자연스럽지 않다 느꼈는데, 대체로 번역서는 그렇게 나오고 그걸 편집해서 다듬는 걸까요? 하여간 이 책은 묶어서 욕 좀 먹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에요.;;;;;

Mephistopheles 2013-02-0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BS에서 영화로 만들었으면 하는 소설에 이 책이 거론되더군요.
단 일본제작이 아니라 미국 헐리우드 블럭버스터로 제작. 이란 단서를 붙였지만요.

마노아 2013-02-06 16:39   좋아요 0 | URL
스케일이 어마어마해요. 헐리우드 블럭버스터급으로 만들어야 그림이 좀 나올 것 같긴 해요.
미국에서 만드는 미국 제대로 '까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

마태우스 2013-02-06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저는 이거 무지 재미나게 읽었는데, 번역 이상한 건 전혀 몰랐어요. 책에 매몰되면 오타가 안보이는 건가요...

마노아 2013-02-07 01:00   좋아요 0 | URL
혹시 줄거리 위주로 읽으세요? 직장 동료가 수학 전공인데 줄거리만 읽어서 아주 빨리 읽는다고 하더라구요. 이과의 특성인가 궁금했어요. 저는 무척 느리게 정독하는 편이어서 저런 게 잘 보이나봐요.^^;;;

마태우스 2013-02-07 13:18   좋아요 0 | URL
어 정말 이과의 특성일 수도 있겠네요. 근데 책이 재미없으면 오타가 눈에 들어오고 빨간 줄을 치게 되는 걸 보면, 재미있는 책에 한정된 이과의 특성이라 할 수도 있겠어요

마노아 2013-02-07 16:17   좋아요 0 | URL
저는 이렇게 편집이 엉망인데 다른 분들이 별말 없이 칭찬만 해서 그게 좀 놀라웠어요. 책의 내용은 훌륭하지만 편집이 너무 불성실해서 읽으면서 많이 화났거든요.^^

스노우볼 2014-03-11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노사이드를 구입할려다가 어느 게시글에서 제노사이드 번역구리다고 이걸 고대로 퍼온걸 봤는데
전자책으로 보니 오류 다 수정되어있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마노아 2014-03-11 05:57   좋아요 0 | URL
오류 수정 다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책이 여러 쇄 찍혔으니 금세 수정될 것 같았어요. 재밌는 책에 이런 오점을 남기면 안 되죠.^^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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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적 병사를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병사를 백안시하는 한편, 적기를 10기나 격추한 파일럿은 영웅으로 추앙했다.

-254쪽

살육 병기의 개발은 적을 얼마나 멀리, 보다 간단하게 대량의 희생자를 내느냐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 맨손으로 때려죽이는 것보다는 날붙이를, 그리고 총기류를, 포탄을, 폭격기를, 결국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이런 식으로. 거기다 미국의 경우 이건 나라를 지키는 기간산업 중에 하나가 되었어. 그래서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거야.
전쟁 당사자 중에서 가장 잔인한 의사를 가진 인간, 즉 전쟁 개시를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만큼 적으로부터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었다. 백악관에서 만찬회에 출석하고 있는 대통령은 적이 흩뿌린 피를 뒤집어쓰지도, 육체를 파괴당한 전우가 내뱉는 단말마의 외침을 듣지도 않는다. 살인에 뒤따르는 정신적 부담을 거의 받지 않는 환경에 있기에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잔학성을 더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군대 조직이 이러한 형태로 진화하고 과학 기술 덕에 병기가 개선되고 있는 이상, 근접전에서 살육이 격렬해지는 것이 당연했지만 전쟁의 의사결정자는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대규모 공중 폭격을 명령할 수 있는 셈이다.
-255쪽

전쟁의 심리학은 권력자의 심리학이라고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사람은 어째서 전쟁을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명령하는 인간의 정신 병리를 먼저 해명해야 했다.

-256쪽

반대 의견의 문제점은 꼬치꼬치 따지면서 배제하고, 찬성하는 사람들만 주위에 가득하게 채워 가는 것. 민주적인 결정으로 보이는 독재였다. 번즈 정권은 이렇게 해서 이라크 국민들의 살육도 주도했던 것이다.

-276쪽

예거는 드디어 전투의 대의를 손에 넣었다. 조국을 위해서도, 이데올로기를 위해서도, 아니면 돈을 위해서도 아닌,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304쪽

이라크군과 합동으로 8000명의 병력을 조직하여 반미 세력의 거점이 되었던 이 지방 도시에 총공격을 개시했다. 격렬한 시가전이 전개된 결과, 네 사람의 보복을 위해 1800명의 병사와 시민이 사망했다. 게다가 미군이 많은 열화우라늄 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방사성 물질에 의해 오염된 이 지역에서는 암 환자나 기형아가 증가하고 있을 터였다. 전부 이 행성에서 최고의 지성을 가졌다고 자부하고 있는 생물들이 한 일이었다.

-313쪽

무서운 것은 지력이 아니고, 하물며 무력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인격입니다.

-415쪽

군산 복합체의 중심에 있다 보면 지배 논리란 것이 굉장히 단순하다는 사실에 놀라고는 했다. ‘공포’였다. 전쟁으로 돈을 벌고 싶은 정책 결정자는 다른 나라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민에게 크게 퍼뜨리기만 하면 됐다. 판단의 근거를 국가 기밀이란 벽으로 감춰 버리면 매스컴도 확인 없이 이 위협론에 올라탔다. 그저 그것만으로 막대한 자금이 세금에서 국방 예산으로 흘러들어 군수 기업 경영자들에게 갈 대가가 순식간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심어진 공포는 국경 밖으로 전파되어 다른 나라도 미국을 따라서 군사 예산을 늘렸다. 이런 국가 간의 긴장은 의심 때문에 현실에 비해 훨씬 고조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진짜 전쟁으로 이어져 특정인만 이득을 얻는 무한한 금맥이 형성됐다. 게다가 위정자로서는 외적을 만들면 덤으로 지지율이 오른다는 이익이 생겼다. 이 사태를 예견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으로서의 마지막 연설에서 군산 복합체의 위험성을 국민에게 경고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세계 각국에 전쟁으로 이윤을 얻는 기업이 존재하는 이상, 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질 일은 없을 터였다.

-462쪽

인간에게 선한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네. 하지만 선행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행위이기에 미덕이라고 하는 걸세.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행동이라면 칭찬 받을 일도 아니지 않은가. 국가의 선은 다른 국민을 죽이지 않는 행위로밖에 드러나기 어렵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한 것이 지금의 인간이야.

-475쪽

현생인류는 탄생한 지 20만 년이나 지나도 서로 죽이는 걸 멈출 수 없는 딱하디 딱한 지적 생명체네. 살육 병기를 모아서 서로를 위협하지 않으면 공존할 수 없는 이 현재 상황이야말로 인류가 가진 윤리의 한계였던 거지. 슬슬 다음 존재에게 이 행성을 넘겨줘도 좋을 때라고 생각하네.

-475쪽

역사학만은 배우지 말게. 지배욕에 사로잡힌 멍청한 인간이 저지른 살육을 영웅담으로 바꿔서 미화하니까 말이야.

-481쪽

네오나치나 백인 지상주의자 등 자신의 폭력 행동을 정치사상으로 탈바꿈하는 가짜 우익에는 공통적인 심성이 있었다. 비뚤어진 자존심의 발로였다. 그들은 자란 환경 등의 문제로 자신을 직접 긍정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속된 집단을 무턱대고 긍정하며 그 집단의 구성원인 스스로가 훌륭하다는 논법을 취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 밖에 향하지 않는 것이 명백했다. 그 증거로 가짜 우익의 공격은 자신들의 주장에 이의를 다는 동포들, 심지어 그들의 의견에 무턱대고 긍정했던 구성원에게도 향할 수 있다.

-503쪽

루벤스는 이라크 전쟁을 모의할 때마다 신에게 기도를 해 왔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경건한 기독교인. 천상에서 내려오는 빛을 받고 있는 그의 발치에 불관용이라는 이름의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번즈가 내세우는 것이 이상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전지전능한 존재를 꿈꾸며 이교도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널리 보이는 습성이었다. 피부색이나 언어의 차이뿐만 아니라 어떤 신을 믿는지도 적과 아군을 식별하는 장치로써 기능했다. 그리고 신은 회개했다고 말하기만 하면 대학살의 죄악도 사라지게 해 주는 편리한 존재였다.

-506쪽

과거 20만 년에 걸쳐 서로 죽이는 것을 되풀이해 온 인류는 항상 다른 집단의 침략에 떨었고 그 공포심이 더 큰 두려움을 초래하여 피해망상 직전의 상태를 유지하다가 국가라는 방위 체제를 만들어 현재에 이르렀다. 이 이상한 심리 상태는 인류 전체가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이 아니라 정상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상태’였다. 그리고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위험하다는 확고한 증거를 서로가 이미 자신의 내면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모두 다른 사람을 상처 입혀서라도 식량이나 자원, 영토를 빼앗고 싶어 했다. 이 본능을 적에게 투영하여 공포를 느끼고 공격하려고 했다. 그리고 죽음을 초래하는 폭력의 행사에는 국가나 종교라는 세력이 면죄부가 되었다. 그 궤도 바깥에 있는 것은 에일리언, 즉 적이기 때문이었다.

-5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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