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구판절판


죽은 자들을 묻는 것은 산 자들의 몫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언 땅을 파는 것으로 죽은 자의 마지막 주먹밥을 챙겨먹은 값을 치렀다. 얼어붙은 손으로 삽질을 하며 그들은 생각했다. 내일이면 자신들이 파고 있는 무덤 옆에 자신도 나란히 묻힐지도 모른다고.

-72쪽

전쟁은 아이들을 군인으로 만들었고, 응석받이들을 천덕꾸러기로 만들어 버렸다. 아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과묵해졌고, 완고하던 어른들은 더욱 냉정해졌다. 소년들은 지성을 갖추기도 전에 지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인간의 존엄을 깨닫기도 전에 인간의 존엄을 몽둥이로 망가뜨리는 법을 배웠다. 얼굴에 젖살이 빠지기도 전에 그들의 마음은 주름투성이 노인이 되어 버렸다.

-75쪽

내가 기댈 유일한 것은 책이었다. 책은 내가 믿는 단 하나였고 모든 것이었다. 모르는 것을 알려 주는 스승이었고 슬픔을 달래 주는 주술사였고 아픔을 치유해 주는 의사였다. 나는 곤궁할 때마다 책 속에서 길을 찾았고,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책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하지만 이 출구 없는 미궁 속 같은 형무소에서 수수께끼를 풀 책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서재에서, 하숙방에서, 은신처에서 압수한 책들이 진실을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해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책은 허술하고 미덥지 않을지 모르지만 허무맹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84쪽

공습은 점점 자주, 오래 이어졌다. 일본은 거대한 병영이었고, 후쿠오카는 미 공군의 앞마당이었다. 음산한 경계경보와 다급한 공습경보는 죽음과 파괴의 전조였다. 경보음에 이끌려 따라온 것 같은 B29 편대는 한순간에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뒤늦은 사이렌 소리는 잿더미가 된 도시와 잿더미에 깔린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이었다. 양동이를 든 여자와 불 끄는 빗자루를 치켜 든 아이들이 전선으로 간 남자들 대신 잿더미가 된 거리를 달렸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 벌 떼 같은 비행기 소리, 폭음과 비명 속에서 사람들은 한때 그 거리를 가득 메웠던 다른 소리들을 떠올렸다. 찌그러진 깡통 하나가 굴러도 까르르 터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빵빵대던 자동차 경적 소리, 레코드 상점에서 흘러나오던 재즈음악, 여자들의 반짝이던 웃음소리. 하지만 전쟁은 거리의 풍경을 잿빛으로 바꾸어 놓았다. 쥐들과 어깨뼈가 드러나 고양이들 사이로 무거운 군홧발 소리가 떠도는 거리, 문을 닫은 상점들, 무섭게 내달리는 군용 트럭. 트럭 뒤에 웅크린, 겁에 질린 젊은이들. 그들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115쪽

죽음은 일상처럼 무감각했고, 사람들은 공포라는 등짐을 지고 살았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목적인 시대였다.
-115쪽

심문실로 들어서는 동주는 얼굴에 재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하지만 심문이 시작되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는 존재하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것들과, 보이지 않지만 유추할 수 있는 것들, 사라졌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지지 못하지만 원할 수 있는 것들, 다다르지 못하지만 소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부러진 뼈와 뱉어 낸 이가 뒹구는 심문실에 마주 앉아 우리는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그를 마주볼 때 나는 더 이상 그를 감시하는 간수가 아니었으며 그 또한 죄수가 아니었다. 우리는 문장을 꿈꾸는 공모자, 사라진 작가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쫓는 추적자였다.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 철학자와 화가, 작품 속 주인공들이 우리와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133쪽

하지만 그것은 그가 마음대로 가지라 마라 할 수 없는 압수물이었다. 한때 그것은 나만의 책이었지만 이제는 나의 책도, 그의 책도 아닌 빼앗긴 책이 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책이 아니라 릴케의 영혼이라면? 누구도 영혼을 소유할 수는 없고 당연히 그 영혼을 빼앗을 권리를 가진 자도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겼다. 한때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나의 것이었던, 한 젊은 시인의 손에 이르렀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온 책. 릴케의 영혼은 그렇게 정처 없이 세상을 유랑하며 상처 입은 마음들을 보듬고 치유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아주 조금 더 성장한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143쪽

"겨울이면 흰 눈이 마을을 뒤덮고, 먹이를 찾는 노루와 멧돼지들이 손님처럼 마을로 내려왔어. 아이들은 하늘 한가득 연을 날리고, 어른들은 매사냥을 나갔지. 우리 집은 학교 정문 쪽의 큰 기와집이었어. 마당에는 자두나무가 있고, 뒤에는 살구나무 과수원이 있고, 동문 밖에는 커다란 오디나무와 깊은 우물이 있었지. 뽕나무에 열린 오디는 다디달았어.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소리를 지르다 고개를 들면 햇살이 교회당 종탑의 까마득한 십자가를 비추었지. 나는 마을길을 산책하길 좋아했어.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이는 그 길……."

-146쪽

"고흐 화집이 들어오면 연락해 주게."
나는 그 일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지 않았다. 어두운 서가 틈에서 몰래 고흐의 화집을 펼칠 때마다 가책이 책갈피를 뛰쳐나왔다. 입영 영장을 받은 날 나는 모서리가 닳은 그의 명함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고 희미하게 닳은 주소를 찾아가 그에게 내 영혼의 일부를 건네주었다. 그날 밤 나는 밀거래 식료품들로 차린 밥상을 앞에 두고 울었다. 잃어버린 내 영혼의 조각이 슬퍼서였다. 기름진 밥을 넘기지 못하고 자꾸만 내 그릇에 덜어 주시던 어머니.
"고흐는 별의 화가였어. 별을 사랑했고 별을 즐겨 그렸지.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별에 대해 썼어. 들어 봐!"
-149쪽

그는 웃었지만 나는 슬펐다. 하얀 입김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감쌌다. 숨을 쉴 때마다 그의 내부에서 차가운 영혼이 빠져 나오는 것 같았다. 먼 곳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항구의 배에서 굵고 낮은 무적이 울렸다. 풀벌레가 우는 것처럼 작은 알전구가 찌르르 울었다.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자신의 시를 외웠다. 문장들과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리기 전에.

-151쪽

간수장은 눈빛으로 내 멱살을 잡아끌고 책 무더기 앞에 팽개쳤다. 고개를 들자 죽음을 기다리는 책들의 거대한 무덤이 보였다. 고뇌하는 햄릿과, 떠도는 랭보와, 모험하는 톰 소여와,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와, 릴케와, 키르케고르……. 문장 속에서 살았고 책갈피 속에 은거했던 사람들. 나의 손에 그들을 살해할 불씨가 들려 있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 더러운 금서들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증명해야 했다. 그것만이 내가 한때 연루되었던 위험한 음모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160쪽

한 권의 책은 누군가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낱말과 조사와 구두점이 모인 문장은 누군가에게 읽히는 순간 삶을 시작한다. 책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고, 헌책방과 도서관으로 긴 여행을 한다. 누군가의 가슴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우듬지를 이루는 동안 책장은 찢어지고 표지는 낡고 글자들은 바랜다. 그리고 어느 날 먼지와 어둠 속에서 숨을 거두지만 그 영혼은 우리 가슴속에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책은 죽지 않는다.

-172쪽

방공호는 깊고 견고했지만 부끄러움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들을 죽음의 한가운데에 내버려두었다는 사실,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며 방공호로 달려와 숨었다는 사실. 비겁하다고 하기에는 부끄러웠고, 양심의 가책을 말하기에는 염치없었다. 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은 부당했다. 나의 목숨이 소중한 만큼 그들의 목숨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나는 보호받고 그들은 내팽개쳐졌을까? 그들이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에겐 죄가 없을까?

내가 폭탄 아래에 방치했던 사람들. 나는 그들을 죽음의 먹잇감으로 던졌고, 그들의 목숨을 요행의 주사위판에 걸었다. 나는 그들의 운명을 상상할 순 있었지만 그들의 고통을 내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들의 두려움에 연대하지 않았고, 그들의 운명을 동정조차 하지 않았다. 해제 경보가 울리면 간수들은 살아남아 행복하다는 듯 시시덕대며 우르르 방공호를 빠져나갔다. 짦은 숨바꼭질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처럼.
-177쪽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모든 존재는 심연의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위악은 억압된 선이 스스로를 지키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위악은 선의를 가진 자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악한 자들은 악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위선을 행할 뿐이다. 하지만 선의를 강변하는 가장 극단적인 그 방식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자신 또한 파멸시키고 만다. 그렇다면 스기야마는 선한 사람이었을까? 그에게 선의가 있었을까? 있었다면 어떤 선의였을까?

-191쪽

전쟁은 기진맥진한 채 계속되었다. 더 많은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갔고 더 많은 청년들이 죽어서 돌아왔다. 훨씬 더 많은 청년들은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남은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굶주리고 헐벗었으며 두려움에 질식당했지만 후쿠오카 형무소에는 알 수 없는 설렘이 넘실댔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음악회는 모두를 들뜨게 하는 후쿠오카 형무소 최대의 행사였다.

-193쪽

어두컴컴한 무대 뒤에 나는 있었다. 견고한 목소리는 약간의 슬픔을 담고 있었다. 소리들은 일제히 나의 어깨를 밀치며 달려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향기로, 움직임으로, 떨림으로 눈과 귀와 코와 모든 감각기관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이 꽃이라면 나는 그 향기에 숨이 막혔을 것이고, 술이었다면 엉망으로 취했을 것이고, 마약이었다면 파멸해도 좋았을 것이다. 음악은 아름답고도 슬펐다. 내가 그것을 향유할 자격이 있는지 망설여질 만큼. 모든 선의가 빛을 잃고 강렬한 사랑에도 냉담해질 만큼. 그 순간 나는 인간이라는 아름다움, 삶이라는 기쁨을 발견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 나의 삶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의 심장은 풀무처럼 헐떡거렸다. 나는 나를 달래야 했다.

-200쪽

나는 그를 잃어야 하는 것이 분했다. 그를 잃어야 할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였다. 나는 친구를 잃어야 하겠지만 조선인 죄수들은 현명한 동료를, 간수장은 용서를 빌 대상을, 간수들은 온화한 모범수를 잃을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조선인들은 위대한 스승을 잃을 것이고, 태어나지 않은 일본인들은 부끄러운 과거를 증언할 지식인을 잃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가지지 못할 순결한 시인을 잃어야 할 것이다.

-240쪽

나는 얼어붙은 형무소 뜰을 갇힌 짐승처럼 돌아다니며 시간을 견뎠다. 열흘이 지난 후 전보를 받은 그의 아버지와 숙부가 도착했다. 그들은 먼 타국에서 숨을 거둔 아들의 시신을 메고 바람 속으로 떠나갔다. 나는 형무소를 나서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의 한조각, 마지막 한마디 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한참 후에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 동주가 죽었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마지막 순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외마디 소리를 질렀어요."
나는 돌아서 걸었다. 나의 눈물이 그들에게 죄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245쪽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할 정도로 비겁하지 않지만 죽음을 무릅쓸 만큼 용감하지도 못했다. 나는 살고 싶었다. 최치수의 말처럼, 윤동주의 부탁처럼 살아남고 싶었다. 살아남는다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살아남고 싶었다.

-281쪽

나는 달아나듯 원장실을 뛰쳐나왔다. 그는 왜 내게 연구동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말했을까? 더 이상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생각대로 된 것이다. 엄청난 비밀에 압도당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비밀을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사람이 없었다. 말한다 해도 믿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믿는다 해도 분노할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설사 분노한다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에 지나지 않을까?
-282쪽

왜 아무도 말하지 않고, 드러나길 원하지 않는 일에 대해 집필했습니까?
누군가는 그것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절대 망각 속에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무, 심지어는 거짓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과거의 잘못을 다시 곱씹을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새 출발 하자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돌이켜 볼 수 있고, 돌이켜 보아야 과오를 찾을 수 있고, 과오를 찾아야 잘못을 인정할 수 있고,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를 빌 수 있으며, 용서를 빌어야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아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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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CUS 과학

제 1804 호/2013-02-18

[FUTURE]“귀하의 생체 정보를 병원에 전송 완료했습니다”

<2013년 KISTI의 과학향기에서는 올 한 해 동안 매월 1편씩 [FUTURE]라는 주제로 미래기술을 소개하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칼럼에서 언급된 미래기술은 KISTI에서 발간한 <미래기술백서 2013>의 자료를 토대로 실제 개발 중이며 10년 이내에 실현 가능한 미래기술들을 선정한 것입니다.
미래기술이 상용화 된 10년 이후 우리의 생활이 어떨지, 또 이 기술들로 인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를 이야기로 꾸며 매월 셋째 주 월요일에 서비스할 예정입니다. 과학향기 독자 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3년 2월 18일, 설 쇠고 일주일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설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이름은 유향기, 올해 떡국 한 그릇 더 먹어 35살. 화려한 싱글이다. 인간의 수명이 100세로 늘어나면서 여자의 결혼적령기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늘었다. 결혼도 이제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반평생을 함께 살 건데, 결혼 잘못해서 두고두고 후회하며 사느니 확실한 남자가 아니면 굳이 결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뭐 요즘 세태이기도 하고. 아기가 갖고 싶다면 정자은행에서 우량 정자를 구입해 아이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설 전날 찾아온 삼촌과 고모가 ‘왜 결혼 안 하느냐’, ‘여자는 때 놓치면 X값 된다’ 등 저속한 표현까지 써가며 양동작전으로 날 몰아세웠다. 틈만 나면 결혼한 걸 후회하시는 분들이 왜 나에겐 명절날만 되면 이토록 결혼 전도사 역할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간다. 선문답, 침묵, 무시 등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가며 상황을 벗어나려 해봤지만 백약이 무효. 일주일이 지난 오늘까지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은 화려한 솔로한텐 가장 비참하다는 주말 아침. 늘 그렇듯 약속이 없는 관계로 늦잠을 실컷 즐길 심산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침대가 아이돌스타도 소화하지 못하는 웨이브를 하며 송중기 목소리로 날 깨우는 것이 아닌가!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공주님! 회사 갈 시간이라고요~!”



비몽사몽간에 침대 머리맡에 있는 정지 버튼을 눌렀다. 스마트 침대¹⁾의 알람 기능을 주말 모드로 변환했어야 했는데 깜박했다. 그 바람에 잠이 확 깼다. 하지만 따뜻한 잠자리를 떨쳐버리고 일어나기가 싫었다. 벽에 걸린 TV를 향해 ‘아침 드라마’라고 말하자 대화형 스마트 TV²⁾에서 어제 보던 드라마가 이어서 나온다. 스토리가 막장 드라마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갑자기 지루해졌다. 손가락으로 TV를 가리키며 까딱거리자 다음 채널로 넘어간다.³⁾ 홈쇼핑에서 국내 최저가라며 다이어트 음료를 열심히 설명하는 MD가 갑자기 뽀글 파마를 한 엄마로 바뀌면서 잔소리를 쏟아낸다!

“아직까지 늘어져 자는겨! 엄마 시장 보고 곧 들어갈 테니 방 청소 좀 해놔잉!”

나는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떨어질 뻔 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다.

“할 말 있으면 휴대폰으로 하지, TV에 왜 나타나고 그래! 엄마는 방송 스타일이 아니라구 했잖아!”
“난들 어케 알어? 너한테 휴대폰한 것 뿐이여.”

요즘엔 통화가 안 되면 자동으로 TV나 다른 디지털 기기로 접속돼 어떻게든 상대방과 연결시킨다. 유비쿼터스가 만든 새로운 세상이다.

마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는 뭐 먹을 게 없는지 냉장고로 갔다. 냉장고 모니터에는 김치의 숙성도와 우유와 과일의 신선도가 그래프로 잘 나와 있다.

“흠, 우유 마시기 딱 좋은 상태네.”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를 꺼내려는 순간, 모니터에 엄마의 얼굴이 또 짠~ 하고 뜬다.

“이것아, 우유 먹으면 살 쪄. 옆에 채소즙 갈아놨으니 그거나 먹어! 그렇게 살 쪄서 어디 시집이라도 가겠냐! 그리고 집 청소는 해놨니? 곧 들어간다잉!”

요즘 나는 엄마의 손바닥 안이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엄마의 휴대전화에 다 나타나기 때문이다. 유비쿼터스 세상이 되면 다들 편리하고 행복할 거라고 했지만 나의 사생활은 이미 끝났다.

나는 어쨌든 엄마의 잔소리를 더 듣기 싫어 애완견 로봇 ‘부담스러우니’를 불렀다.

“부담스러우니~~”

그러자 부담스러우니가 달려와서 내 허벅지에 올라타며 부담스런(?) 애교를 부린다. 실제 애완견 보다는 못하지만 로봇 애완견도 귀엽긴 귀엽다. 나는 부담스러우니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거실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랬더니 부담스러우니가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열심히 방청소를 한다.⁴⁾ 이곳저곳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먼지란 먼지는 다 핥아먹는다. 그리고는 나에게 느끼한 미소를 한번 던지고 충전기가 설치된 자기 집으로 쏙 들어간다. 저건 필시 로봇이 아니라 요물이다.

웃! 아침부터 차가운 우유를 마셔서일까? 갑자기 배에서 신호가 왔다. 급히 화장실로 가 변기에 앉았다. 아랫배에 힘을 줬더니 시원함과 동시에 찢어질 듯한 통증이 함께 동반됐다.
이때 화장실 벽에 부착된 스피커에서 침착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변에 미량의 혈액이 섞여 나옴. 항문과 괄약근에 이상 조짐 발견. 현재 측정한 생체정보를 병원으로 보내겠습니까?”

나는 조금 놀라기도 하고 걱정이 되어 “오케이”라고 답했다. 삐~ 하는 전송음이 잠시 들리더니

“귀하의 생체정보를 병원에 전송 완료했습니다.⁵⁾”

화장실을 나와 외출 준비를 하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

“항문병원 닥터 김입니다. 귀하는 현재 초기 치질 단계가 의심됩니다. 가까운 시일 내 병원을 방문하셔서 검사를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한편으로는 창피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고 해서 작은 목소리로 그러겠다고 했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글 : 정영훈 과학칼럼니스트


[각주-미래 기술]

1) 스마트 침대 : 침대에 내장된 센서가 잠을 편하게 잘 수 있게 도와주고, 자동으로 온도를 조절하며, 아침엔 흔들어 깨워준다.
2) 대화형 스마트 TV : 인터넷과 TV시청이 동시에 가능한 미래형 TV. 휴대전화를 비롯, 여러 디지털기기와 연결돼 원하는 정보를 볼 수 있다. 표정이나 손짓으로도 동작이 가능하다. 지능형 홈 네트워크 기술
3) 제스처, 행동패턴 및 언어기반 의미추출 기술 : 오류율 1% 이내로 인간의 제스처, 행동패턴과 언어에서 의미를 추출해 인간 대 인간의 의사소통과 같이 자연스러운 인간 대 기계 간 인터페이스를 통해 컴퓨터를 사용하도록 하는 기술. 1~2년 후 기술이 실현될 예정.
4) 인지/판단 기반의 인간로봇 상호작용기술 : 로봇이 사용자 의도를 파악, 이에 적합한 반응과 행동을 수행함으로써 인간과의 의사소통 및 상호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판단-표현 기술. 5~6년 후 기술이 실현될 예정.
5) 홈 헬스케어 시스템 : 가정에서 측정한 생체정보를 병원으로 전송해 진단받고, 이상이 있을 경우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 10년 후 기술이 실현될 예정.

참고 : <KISTI 미래백서 2013>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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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9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0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3-02-1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문병원 이름 때문에 많이 웃었네요.^^ㅎㅎ
잘 지내시죠?
감기조심하세요.*^^*

마노아 2013-02-20 00:31   좋아요 0 | URL
실제로도 대장항문병원, 이런 식의 간판들이 보이더라구요. 민망해서 웃었어요.^^ㅎㅎㅎ
프로필 사진에 맑은 하늘이 있어서 좋아요. 덕분에 눈이 호강했어요.^^
 
어게인 3
강풀 글 그림 / 문학세계사 / 2010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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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했고 지켜야 했던 강한 염원이 시간 능력자의 초월적 힘을 압도했다. 사람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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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2-1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게 본 만화에요!!^^

마노아 2013-02-20 00:31   좋아요 0 | URL
이번에 두번째 본 건데 여전히 마음이 무너져요.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요...
 
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와, 일단 감탄부터 해보자. 이 작품, 대단하다. 아직 1권밖에 읽질 못해서 단언하긴 이르지만, 현재로서는 무척 좋다. 이정명 작가의 이전 소설들도 재밌었다. 뿌리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악의 추억까지 모두 재미있었다. 그런데 뒷심이 늘 부족했다. 무척 반짝이는 창의력을 가졌고, 흥미롭게 전개되었지만, 마지막 마무리에서 매번 아쉬움이 남곤 했다. 재미와 감동의 경계에서 조금 주저한 느낌. 그래서 이 작품을 시작할 때도 그렇게 기대는 하지 않고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1권만 읽은 시점에서 기대치가 무척 높아져 있다. 지금, 감동 받았다는 얘기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났다. 후쿠오카 형무소에는 전쟁 기간 동안 갇혀 있던 사람이 풀려났고, 그들을 감시했던 간수가 대신 갇혀 있다. 포로 학대로 기소된 하급 전범 와타나베가 이 책의 화자다. 그는 두 사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 사람은 시인, 한 사람은 그 시인을 감시했던 검열관이다. 그는 이곳 형무소에서 악마를 보았고, 동시에 희망도 보았다. 바로 저 두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

 

추리 소설을 자주 쓰곤 했던 그 실력을 십분 발휘해, 이 작품 역시 미스테리하게 시작했다. 작품 첫머리에서 벌써 시체가 하나 나왔던 것이다. 이 책의 화자는 고작 열일곱 살의 간수다. 우리 기준에 열일곱은 소년에 가깝지만, 전시에 열일곱은 군인의 나이다. 그는 근무하던 형무소를 옮긴지 한달 만에 살인 사건을 파헤치라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을 만난다. 하나는 이미 죽은 검열관 스기야마이고, 하나는 그의 죽음에 몹시 관계가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조선인 시인 히라누마, 조선명 윤동주다.

 

와타나베가 추적한 스기야마는 인간 백정이었다. 조선인은 물론이요, 일본인 간수들조차 그의 죽음을 가여워하기는커녕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에게 따라붙는 소문들은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인간이었는지, 악마에 가까웠는지를 증명했다. 그런데 그의 삶을 추적해 따라가 보니, 또 다른 평가가 따라온다. 피아노를 조율했던 그를 향해 한 간호사는 스기야마 도잔이 섬세한 남자라고 했다. 그를 죽인 건 미친 시대였다고. 더 많은 피를 원하는 시대. 더 많은 증오와 더 많은 죽음을 원하는 이 시대 말이다. 그는 전쟁이라는 철창 속에서 군복이라는 독방에 갇혀 죽었다고 했다. 과연 그는 섬세한 사람이었던가? 작가는 스기야마의 과거로 돌아가 그의 영혼이 섬세한 음률 위에서 춤을 추었던 시절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그가 상처받기 쉬운 가여운 영혼이었다는 것을, 그 섬세함으로 인해 더 힘들었다는 것을, 독자도 공감한다.

 

이제 와타나베는 또 다른 증언자를 찾는다. 윤동주. 창씨명 히라누마라는 이름을 가진 시인. 죽은 스기야마는 호주머니에 시가 적힌 종이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의 유품에도 윤동주의 시가 있었다. 바로 그 시를 지은 시인이 고백했다. 스기야마는 시인이었다고.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시인이었다고...

 

'인간 백정' 소리를 듣던 잔인한 검열관이 섬세한 사람이었다고, 게다가 시인이었다는 이 불합리한 고백. 여기서 독자는 심장이 떨렸다. '시인'이라는 말을 아무에게나 못붙일 것 같다. 도대체 윤동주와 이 검열관 사이에 어떤 공감이 있었던 것일까. 그 죽음에 밝혀진 사연 말고도 또 다른 게 있었던 건 아닐까, 몹시 궁금해졌다.

 

스기야마는 '시'의 힘을 믿지 않았다. 아니 '언어' 따위 믿지 않았다. 문맹이었던 그는 모두가 회피하는 검열관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딱 필요한 만큼만 글을 깨우쳤다. 형무소 안에서 조선어는 쓸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일본어로 전달되는 편지와 책들을 검열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어의 힘을, 시의 무서운 힘을 깨달았다.

 

스기야마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분명히 인식했다.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다시는 변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변해 버린 자신이 두려웠다. 어떤 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읽기 전의 사람이 아니다. 문장은 한 인간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불치의 병이다. 단어와 구두점들은 몸 여기저기에 세균과 바이러스처럼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문장들은 뼈에 새겨지고 세포 속에 스며들고 자음과 모음은 혈관을 타고 흐른다. 수많은 상징과 비유는 뇌세포를 물들이고 영혼을 재구성한다. 그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가서도 안 된다. -220쪽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시의 세계에 푹 빠져버린 스기야마는 돌이갈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병약한 시인을 지켜야 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후 시인과 검열관 사이에서 오고 간 말들과 온정은 무척 뜨거웠다. 그의 애정이 몽둥이 찜질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가 살리고자 했던 순수한 시와 그 시가 해낼 희망의 역할들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사이사이 소개되는 시들과, 이들에게 상징처럼 등장한 '연'의 역할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모국어가 금지된 형무소의 갇힌 시간. 식민지 조국의 서러움을 온 몸에 품고 살았을 윤동주를 떠올려 본다. 창씨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선택과 그로 인해 치렀을 마음의 감옥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 비참한 죽음도 기억해 본다. 그 조국에 현재 어떤 역사의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비참하게 되새겨 본다. 마음이 아프다.

 

시인과 시를 다루는 만큼 소제목도 예쁘다.

 

1부
방랑자로 왔으니 다시 방랑자로 떠나네 · 15
가슴에 맺혔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들 · 39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 · 52
심문 · 68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 79
소년은 어떻게 군인이 되는가 · 90
음모 · 102
죽음의 재구성 · 115
한 대의 피아노와 그 적들 · 136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159
문장은 어떻게 영혼을 구원하는가 · 186
고통이여! 너는 사랑하는 여인보다 다정하다 · 206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 224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 244
별 헤는 밤 · 279

 

특히나 1부의 마무리를 '별 헤는 밤'으로 끝냈는데, 정말 이 시가 쓰여졌을 것 같은 언덕 위에서 꼭 같은 그리움을 품은 채 시를 읊게 하니, 이 시를 읽으며 가슴 떨려 했던 여고 시절로 어느새 돌아가고 말았다. 설레고, 먹먹하고, 그리웠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만난 듯하다. 2권을 같이 사지 않은 게 내 실수다. 얼른 장만해서 마저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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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2-17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영화화되면 괜찮을 거 같아요.
윤동주라는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관객이 몰려올 거 같지 않나요?
사실과 진실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죠!
마노아님 선물로 잘 읽은 책~ 윤동주를 사랑하는 독서회원들이 돌려보고 있어요.^^

2013-02-17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3-02-17 13:48   좋아요 0 | URL
책 정말 괜찮지요? 영화로 만들어지면 더 재밌을 것 같아요.
이제껏 읽은 이정명 작가님 책 중에서 만족도가 가장 높아요.
2권은 아직 읽고 있지만요.
사실 이 리뷰는 1권 읽은 1월 초에 써놓은 걸 이제사 올린 거라서 그뒤 바로 2권 샀어요.
중고 기다리다가 마음이 바빠서 새책으로요.^^ㅎㅎㅎ
그 사이 리뷰대회 참가하느라 못 읽었는데 이제 언능 2권 읽으려고요. 뒷 이야기 아주 궁금해요.^^
 
악의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를 읽고 곧장 읽게 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다. 둘 모두 미스테리 분야의 거장이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일단 이 두 작품만 놓고 본다면 '악의'의 판정승이다. 먼저 속도감이 다르다. 이유는 작품의 가치는 둘째치더라도 전개 과정이 지나치게 느리고 등장인물도 과하게 많아서 지치게 만드는 감이 있었다. 반면 악의는 매우 짧고 빠르게 치고 나가면서 속도를 확확 올리는 감이 있다. 반전이라는 기법으로 치더라도 역시 악의가 더 극적으로 독자를 놀라게 만들었다. 반전을 위한 반전은 좋아하지 않지만, 거듭된 반전이라도 작품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그건 훌륭한 기술이 될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 히다카 구니히코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 위해서 짐도 모두 부쳐두었고, 이제 연재 중이던 마지막 원고만 탈고하면 모든 게 다 마무리될 시점이었다. 사체를 처음 발견한 것은 재혼 한달이 된 그의 아내와 친구이자 아동문학가인 노노구치 오사무다. 사건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사랑을 듬뿍 받는 가가 형사가 맡았다. 가가 형사는 노노구치와 같은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전력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맨 처음 발견했고, 또 그날 몇 시간 전에 고인을 만났던 노노구치가 먼저 용의자로 의심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명백한 알리바이가 있다. 더 나아가서 이날 목격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작가적 재능을 이용해서 수기로 남기기도 했다. 이 수기는 가가형사의 수사에 치명적인 힘을 실어준다. 몰랐던 사건들을 알게 했고, 그리하여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파헤치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글이라는 것은 참으로 큰 힘을 갖고 있어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진실을 바라보는 방향을 돌릴 수 있게 한다. 그걸 알아차린 가가 형사의 날카로운 감각이 대단해 보였다. 초반에 사건은 무척 간단하게 해결이 나서 이 작품이 단편인가 했다. 그런데 남은 분량이 아직 한참 있어서 뭔가 더 큰 전환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내가 짐작한 것보다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제목의 '악의'를 생각해 본다. 누군가를 향한 근거 없는 악의. 사실 우리가 지금도 많이 목격하곤 하는 사이버 상의 댓글 테러 같은 것도 그런 악의를 담은 것이 아니던가. 본인은 이유가 있다고 근거를 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비겁한 화풀이에 불과할 때가 많다. 제3자를 향한 악의도 이렇게 무서운데, 자신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는 사람을 향한 악의라면 어떨까. 게다가 상대방은 자신에게 선의를 갖고 있고 우정을 담고 있는 자라면......

 

그래서 인간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고 대단할 때도 많은 인간이지만, 이렇게 추하고 모자랄 때도 많은 이 인간들, 우리 사는 세상 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 속에서 그 악의의 씨앗을 뿌려 놓은 학교 폭력 문제가 마음을 묵직하게 한다. 그건 일본 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옛날만의 일도 아니고 늘 현재 진행형으로 움직이고 퍼져나가고 있으니까. 이 사회와, 이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함께 끌어안고 풀어나가야 할 오랜 숙제다.

 

가가 형사 시리즈가 더 있는 것으로 아는데 또 뭐가 있는지 찾아보고 싶다. 이 작품엠서 가가 형사의 활약이 컸지만 아직 그 매력을 다 드러낸 것 같지 않다. 좀 더 만나보고 싶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영화로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작품도 그렇게 만들어진다면 몹시 재밌을 것 같다. 각 배우들이 서로 다른 성향의 두 가지 얼굴을 모두 연기해야 할 테니, 연기력이 받쳐주는 출중한 배우가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그런 배우가 누가 있나 상상해 보는 것도 무척 재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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