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애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391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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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휴관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 거였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가 이리 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란 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넌 내 곁을 떠나 붉게 물든 침대보 같은 석양으로 걸어가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12쪽

날마다 설날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 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定義)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뜻한 바는 뺨에서 흘러내리고
뜻 없이 목 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무모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셔보자고 다시 쓴다-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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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2 23: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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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2 2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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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CUS 과학

제 1889 호/2013-06-17

[FUTURE]미래의 에너지, 절약과 효율이 대세!

 

2013년 KISTI의 과학향기에서는 올 한 해 동안 매월 1편씩 [FUTURE]라는 주제로 미래기술을 소개하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칼럼에서 언급된 미래기술은 KISTI에서 발간한 <미래기술백서 2013>의 자료를 토대로 실제 개발 중이며 10년 이내에 실현 가능한 미래기술들을 선정한 것입니다.
미래기술이 상용화 된 10년 이후 우리의 생활이 어떨지, 또 이 기술들로 인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를 이야기로 꾸며 매월 셋째 주 월요일에 서비스할 예정입니다. 과학향기 독자 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2023년 6월 17일. 봄이 잠시 머무르나 싶더니 연일 섭씨 30도를 웃도는 찜통더위가 유월을 점령해 버렸다. 새내기 신입사원 김새경 씨는 가장 먼저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전 인식장치로 사무실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조명도 알아서 켜지더니 친근한 안내음이 들린다.

“실내 온도를 몇 도로 유지할까요?”
“오늘 하루 26도 유지하면 좋겠지.”
“네, 알겠습니다.”

이제 가정은 물론 사무실과 공장에선 지능형 에너지 관리시스템 기술¹⁾이 활용돼 쾌적한 실내 환경 유지는 물론 에너지 소비도 자동으로 최적화되고 있다. 하루 중 출퇴근 시 온도와 가장 더운 온도를 파악해 냉방시스템이 가동되고 있으며 기적으로는 계절별 온도 조절도 가능하다. 그리고 직원들이 가장 집중력이 떨어지고 피곤한 시간을 파악해 알아서 공기청정도 해준다. 빅데이터와 스마트 기능이 결합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무실과 공장에 전면적으로 이런 시스템을 설치한 것은 에너지 절약과 효율을 위해서다. 에너지가 부족한 곳이 없도록 에너지 공급에 만반의 준비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원칙이지만 이산화탄소 배출 등의 문제로 발전소를 무한정 지을 수는 없는 게 고민거리다. 그래서 정부는 에너지 절약과 효율화로 정책 방향을 선회했다. 현실적으로 발전소를 계속 짓는 것이 더 이상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2011년 일본에서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2013년에 국내에서 일어난 원전 비리 사건이 문제였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전 세계에 원자력 발전의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 고조됐다. 사실 원자력 발전은 화석 연료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지구온난화가 심화돼 가고 국제유가의 불안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이 가능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관리를 잘못했을 경우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불상사가 발생한다는 것을 목격했다. 원자력 발전이야 말로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절대 안전의 영역이다.

그런데 2013년 국내에서 이러한 원전 안전성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일부 원자력 관계자와 납품 업체들이 야합해 수년 동안 불량 부품을 납품하고 또 부품에 대한 시험 성적서를 위조하는 등 구조적인 비리가 발각됐다. 그로 인해 원전이 무더기로 가동 중단되는 지경에 이르러 그해 전력수급에 큰 차질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발 빠른 수사와 관련자 전원을 처벌해 이후 원전 비리를 뿌리 뽑을 수 있었지만 하마터면 작은 구멍이 큰 둑을 허물 듯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의 원전 건설은 국민들의 합의가 어려워 진행이 어렵게 된 것이다.

에너지의 수급이 한정되자 초점은 에너지 절약과 효율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과학자와 엔지니어들도 최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해 적은 에너지로 큰 효율을 낼 수 있는 시스템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먼저 가정에서는 에너지제로하우스 건축 기술²⁾이 도입됐다. 이 기술로 인해 자연에너지만으로 난방, 급탕, 취사 및 각종 전기에너지원을 자체적으로 충당하는 주택이 만들어지고 전면적으로 보급됐다. 우리나라는 아파트의 거주 비중이 높기 때문에 아파트를 재건축하거나 리모델링할 때 이 기술을 엄격히 적용해 에너지의 절약과 효율을 극대화했다. 이로 인해 가정에서 나오는 온실가스를 제로로 줄일 수 있었으며 주택관리비를 많이 줄여 가계에 도움이 되고 있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김새경 씨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다이어트와 몸매 관리를 위해 에어로빅을 등록했는데 7시까지 학원에 도착해야 한다. 어? 그런데 세경 씨가 장만한 차는 청정 경유차도 아니고 수소연료차도 아니고 전기자동차도 아닌 색다른 스타일. 다연료(Multi-fuel)엔진 기술³⁾로 만든 신개념의 자동차. 하나의 엔진 시스템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의 연료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한마디로 연료 융합형 자동차다.

2023년이 됐지만 자동차는 전기자동차, 수소자동차, 청정디젤차 등 어느 한 기술로 천하 통일되지 못했다. 어느 한쪽으로 통일되는 순간 관련 에너지 공급에 부하가 걸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기자동차로 모든 자동차가 재편됐을 때 연료 충전을 위해 너도나도 플러그를 꽂는다면 전력 대란이 일어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다연료(Multi-fuel) 엔진 자동차는 현실적으로 에너지를 가장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대안이 되고 있다.

퇴근시간 차가 밀리는 바람에 에어로빅 학원에 조금 늦게 도착한 새경 씨는 헐레벌떡 옷을 갈아입고 에어로빅실로 들어갔지만 이미 음악소리에 맞춰 격렬한 에어로빅이 진행되고 있었다. 몸에 붙어있는 살이라는 살은 모두 빼겠다는 기세로 몸을 흔들어대는 수강생들. 어떻게 보면 무의미한 몸짓과 에너지 낭비처럼 보이지만 이 학원은 에어로빅을 하면서 생기는 열, 진동, 소음 등을 전기에너지로 재생산하는 에너지 하베스팅 기술⁴⁾을 활용해 모든 전기를 자체 충당하고 있다. 쿵쾅거리는 격렬한 에어로빅의 운동에너지는 에너지 하베스팅 소자 기술로 특수 설치된 바닥에 그대로 흡수돼 전기에너지로 변환되고 있다. 이렇게 아껴진 관리비로 이 에어로빅 학원은 수강생들에게 훨씬 저렴한 수강료를 받고 있다. 도랑 치고 가제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2023년 미래의 에너지의 키워드는 ‘절약과 효율’이다. 모든 사무실이나 집, 공장, 자동차도 허투루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 계단에서도 에너지를 모은다. 그래서 꼭 필요한 만큼만 에너지를 생산하니 더 이상의 발전소를 세울 필요가 없어 상대적으로 설치에 필요한 비용도 감소되고 그만큼 위험도 감소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새경 씨는 조건 좋고 능력 많은 남자보다 연봉은 많지 않지만 돈을 아낄 줄 알고 효율적으로 쓸 줄 아는 남자한테 더 눈길이 간다. 그런 남자가 훨씬 미래가 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 : 정영훈 과학칼럼니스트

[각주-미래 기술]
1) 건물, 공장 등의 지능형 에너지 관리시스템 기술(BEMS, Building Energy Management System) : 실내 환경과 에너지 성능을 최적화하기 위한 건물관리시스템. 에너지의 소비량과 장비나 시스템의 운전상태 등을 모니터링한 후 적절한 평가를 거쳐 다양한 에너지 소비량 분석, 비효율적인 장비 및 시스템의 파악, 최적의 자동제어시스템 구축 등 궁극적으로 쾌적한 실내 환경을 조성하면서 에너지 소비는 최소화 시키는 시스템. 3~4년 후 기술 실현 예정.

2) 에너지 제로하우스 건축 기술 :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에너지만을 이용해 난방, 급탕, 취사 및 각종 에너지원을 자체적으로 충당하는 주택. 2020년을 목표로 주택 유지비가 현저히 낮출 수 있고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적인 에너지 제로하우스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음. 7~8년 후 기술 실현 예정.

3) 다연료(Multi-fuel) 엔진 기술 : 하나의 엔진 시스템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의 연료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엔진. 다연료 엔진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관건은 각 연료에 맞는 엔진 변화를 최적화할 수 있는 기술의 개발뿐만 아니라 내구성, 편의성 측면에서 전혀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 이미 다연료 엔진 기술을 사용한 제품들이 출시돼 있으며 최적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질 전망. 3~4년 후 기술 실현 예정.

4) 버려지는 열, 진동, 소음 등을 전기에너지로 재생산하는 에너지 하베스팅 기술 : 자연의 빛에너지, 인간 신체 또는 연소형 엔진으로부터의 저온 폐열에너지, 휴대용 기기 탑재/부착장치의 미세 진동에너지, 인간의 신체활동으로 인한 소산에너지 등을 흡수해 에너지 하베스팅 소자 기술을 통해 전기에너지로 변환, 전자기기의 전력으로 사용하는 환경에너지 재생형 에너지원. 1~2년 후 기술 실현 예정.

참고 : <KISTI 미래백서 2013>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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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숲, 조선왕릉 (한글판)
국립문화재연구소 엮음 / 눌와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북한에 있는 왕릉 2기를 제외하고 서울 시내와 근교에 있는 왕릉 40기를 역사성과 문화재 관리의 행정적 편의에 따라 개별 능역을 포함한 왕릉군의 개념으로 나누면, 왕릉지구 18곳이 된다.
다시 서울 시내와 서울 동쪽, 서울 서쪽으로 나눌 수가 있다.
왕릉을 조성할 당시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반경 4km 밖 40km 안에 왕실의 능역을 두도록 정한 국법이 있었다.
영월에 조성된 단종의 능은 예외로 하자.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물며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성역이라는 개념 아래 성과 속, 신분이라는 유교적 이념상의 위계질서가 반영되도록 능역을 조성하였다.
능역은 크게 능침(성역)-제향(성역과 속세가 만나는 공간)-진입(속세)의 세 공간으로 나뉜다.
능역 그 자체가 자연 환경의 일부라 생각되도록 전통적인 풍수사상에 따른, 능역의 자연 친화적인 조영 방식은 같은 동양권인 중국과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다.

왕릉의 가장 핵심인 능침 공간은 오직 죽은 자를 위한 신성한 곳으로 산 자의 접근이 엄격히 제한되므로,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조성하여 다른 공간과 구별되게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침 공간은 제향 공간인 홍살문 등에서 보면 시선이 차단되어 완전히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반면, 홍살문에서 참도로 이어지는 정자각에서는 능침 공간이 열려 보이도록 처리되었다. 능침 공간의 성역성과 신비감이 드러나도록 건축적으로 처리한, 조선왕릉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시각적 즐거움이다.

제1대 태조 건원릉
태조 원비 신의왕후는 제릉(북한 개성), 계비 신덕왕후는 정릉(서울 성북구)에 각각 모셔졌다.

건원릉은 고려왕릉 중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제도를 따랐으나, 석물의 배치 등에 변화를 주고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등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여, 조선 능제의 표본이 되었다.

건원릉 봉분은 푸른 잔디가 아니라 억새를 사초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죽기 전 유독 고향을 그리워하였기에 태종이 고향인 함흥 땅에서 가져오도록 했다.
건원릉의 봉분은 조선왕릉 가운데 가장 높게 조성되었다.

제5대 문종 현릉
문종과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현릉은 두 개의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이 각각 자리한 동원이강릉이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다음 날, 24세 나이에 산후병으로 죽어 경기도 안산의 소릉에 묻혀 있다가 문종 사후 합장되면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단종이 죽임을 당하면서 생모의 유해가 파헤쳐져 안산 바닷가에 방치되었다가 중종 때 복위되면서 다시 현릉으로 모셔졌다.

제14새 선조 목릉

선조,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일정한 거리를 둔 세 개의 언덕에 따로 모셔진 동원삼강릉으로, 유일한 형식이다.
'남우여좌'에 따라 제일 오른쪽이 선조, 가운데가 의인왕후, 왼쪽이 인목왕후 능이다.

살아서 금슬이 좋았더라면 모르지만, 살아서 내내 소 닭 보듯 한 부부라면, 죽어서 합장되거나 곁에 묻히는 건 어떤 기분일까. 과연 망자가 좋아할지 의문이다.

제 16대 인조왕비(장렬왕후) 휘릉

장렬왕후(1624~1688)는 원비 인렬왕후가 4남인 용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15세의 어린 나이로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려 계비가 되었다.
인조 생전에는 임금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인조 사후에는 15년에 걸친 두 차례의 예송 논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임금의 명이 길지 않은 왕실에서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 노릇을 했으나 개인적인 삶은 무척 외롭지 않았나 싶다.
눈보라 치는 왕릉의 모습이 장렬왕후의 마음을 대변하는 느낌이다.

제 18대 현종 숭릉

현종과 명성왕후의 쌍릉으로 조성된 숭릉이다. 홍살문 안쪽에서 정자각까지 곧게 뻗은 참도가 잘 드러나 있다.

참도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박석을 깐 보도인데 높낮이가 다른 두 가닥으로 나뉜다. 높이가 한 단 높은 쪽이 신도이고, 낮은 쪽이 어도이다. 신도는 홍살문을 통과한 영혼이 들어오는 길이고, 어도는 왕 또는 제관이 영혼을 맞이하여 들어가는 길이다. 참도의 바닥이 거친 이유는 참도를 걸으면서 고개를 숙여 아래를 살핌으로써, 선왕의 영혼에 존경을 표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현종은 후궁도 없이 왕비 하나만 조강지처로 둔 임금이었다.
죽어서도 부부는 꼭 붙어 있다.
어쩐지 애처가보다는 공처가의 느낌이 강하다.
숙종은 아무래도 아버지보다 엄마 성격 닮았을 듯!

제21대 영조 원릉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원릉이다. 역시 쌍릉 형식으로 되어 있다.
원릉 앞으로 흐르는 금천과 곡장의 꽃담 장식이다.
엷게 굽이쳐 흐르는 금천과 그 위에 쌓인 눈이 아름답고, 꽃담의 자연스런 문양도 아름답기만 하다.
절대로 오버하지 않는 절제된 미의식이 수준 높아 보인다.

제24대 헌종 경릉

헌종은 효명세자(추존 문조)의 맏아들로, 아버지 효명세자가 요절함에 따라 순조의 뒤를 이어 8세에 왕위에 올랐다.
효현왕후와 계비 효정왕후 두 왕비를 얻었으나 슬하에 자손이 없었고, 궁인 김씨에게서 딸을 하나 얻었는데 그마저 일찍이 죽었다.
경릉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세 능이 한 언덕에 나란히 있는 삼연릉으로,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한 형식이다. '남우여좌'의 형식에 따라 제일 오른쪽이 헌종의 능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왼쪽이 계비 효저오앙후의 능이다.
병풍석 없이 난간석을 터서 연결한 것은 한방을 쓰는 부부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제26대 고종황제 홍릉

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릉이다.
홍릉과 순종황제 유릉은 다른 능과 달리 황제 능의 격으로 조영되어, 상설의 규모와 종류, 배치와 구조 등이 기존 왕릉과 다르다. 능을 조성함에 있어서는 명나라 황제 태조 효릉의 제도를 따랐다.

문,무석인외에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등 석물이 사열하듯 참도를 따라 홍살문까지 줄지어 서 있다.
여기서 등장한 사자도 기린이나 해태와 마찬가지로 상상의 동물이다.

제7대 세조 광릉

광릉은 조선왕조 최초의 동원이강릉 형식이다. 본래 세조 능이 단릉으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정희왕후가 승하한 뒤 능을 새로 만들면서 세조 능의 정자각을 중간 지점으로 옮겨 동원이강릉이 되었다. 능제를 간소히 하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광릉은 참도가 생략된 유일한 조선왕릉이기도 하다.
세조는 능 주변의 나무를 잘 가꾸라는 당부도 하였는데, 덕분에 광릉 일대의 숲은 조선왕조 내내 풀 한 포기도 뽑지 못하게 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현재 동식물의 낙원이자 천연 그대로 살아 있는 자연 박물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왼쪽의 사진은 지세를 따라 자연스러운 높낮이를 갖는 곡장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은 위에서 보니 기다란 모양의 하트처럼도 보인다.

제6대 단종왕비(정순왕후) 사릉

사릉은 유난히 많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 소나무 숲은 문화재 지역으로 생태자원의 영속성과 유전적 보전을 위해 조선시대 왕궁과 능원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묘 포장이다.

초록의 싱그러운 색과, 능을 감싸고 있는 안개 낀 여운이 이곳을 보다 영적인 공간으로 느끼게 만든다.

제6대 단종 장릉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 영월에 위치해 있다.
영월의 하급 관리인 엄흥도가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이후 숙종 때인 1698년 복위되면서 왕릉으로 추봉되었다.
단종의 사연을 모른다 하여도 왕릉의 분위기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을씨년스럽고 쓸쓸하다.
측면과 반대편에서 보면 이 정도는 아닌데 유독 정면에서 보는 풍경이 서럽게 보인다.

제13대 명종 강릉

강릉은 한 언덕에 명종과 인순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한 쌍릉이다. 열두 면의 병풍석과 열두 칸의 난간석을 둘렀는데, 난간석을 터서 두 봉분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눈오는 날과 마찬가지로 비오는 날의 왕릉 풍경도, 특유의 분위기에 걸맞아서 더 신령스러운 느낌을 만들어준다.
홀로 우산 하나 쓰고 저 안에 놓여 있다면 그 고요한 시간에 흠뻑 젖을 것만 같다.

제19대 숙종왕비 인경왕후 익릉

숙종 원비 인경왕후의 단릉인 익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가는 참도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붉은 칠을 한 홍살문은 신성한 장소임을 알림은 물론 부정을 막는 역할을 한다. 홍살문 중앙에는 홍살을 꼬아 삼지창을 만들고 태극으로 단청을 한다. 태극은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한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대조가 눈에 띈다.

제11대 중종왕비(장경왕후) 희릉

희릉은 장경왕후 단릉이나, 중종 사후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중종과 함께 안장되어 정릉이라 불린 적이 있다.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가 중종 능만을 현재 서울시 강남구 정릉으로 옮기면서 능호가 다시 희릉이 되었다.

정자각의 뒤로 나지막한 언덕이 보인다. 언덕 위에 장경왕후의 봉분이 있다.
가을날의 능도 무척 운치가 있다. 사실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공간이다.
자연이 가득하고 사람 손은 최대한 덜 탔기에 그런 게 아닐까?

제11대 중종왕비(단경왕후) 온릉

중종왕비 단경왕후가 홀로 잠든 온릉이다. 중종을 왕위에 올려놓은 반정 세력에 의해 친정아버지인 신수근이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왕비 책봉 7일 만에 사가로 쫓겨났다. 1739년 영조 때 복위되면서 왕비 능으로 추봉되었기에 상설이 간소하다.
살아서도 신산스러웠지만 죽어서도 스산한 느낌. 초라한 것은 둘째 치고 참으로 외로워 보이는 봉분이다.

제9대 성종왕비(공혜왕후) 순릉

성종 원비 공혜왕후의 단릉인 순릉이다. 12세에 자을산군과 혼인하여 14세에 왕비로 책봉되나 19세에 왕비로 책봉되나 19세에 슬하에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났다.

한명회는 살아서 큰 권세를 누렸으나 왕비가 된 두 딸이 모두 명이 짧았다.
그것도 일종의 업보였을까? 글쎄다...

제22대 정조 건릉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이다.
도심 속에서 왕릉은 도시민의 휴식 공간이 되어주고 모처럼 눈을 정화시켜 주는 자연을 한껏 보여준다.
눈으로 보지만 낙엽 밟히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왕실에서는 국상을 당하면 장례를 담당하는 임시기구인 3도감을 설치하고, 3개월에서 5개월 정도의 국장 기간 동안 왕릉이 들어설 터를 가려 골랐다. 왕릉 터는 풍수지리를 기반으로 한양에서 10리 밖 100리 이내에서 정했으며, 해자나 화소(능 바깥에서 발생한 불길이 능 구역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방화벽), 주변의 산이나 지형지물로써 경계를 삼았다.

조선왕릉은 유형문화재인 능에서 주기적, 지속적으로 무형의 문화재인 산릉제례를 치르고 있는 점에서 세계의 여느 왕릉과 뚜렷하게 차별된다.
태조 건원릉 산릉제례(기신제)는 매년 양력 6월 27일 태조 건원릉에서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주최로 관계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봉행되고 있으며, 일반인도 누구나 참관할 수 있다.
태조 건원릉 산릉제례 이외에도 '종묘제례'를 비롯하여 역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 지내는 산릉제가 전국 50여 곳에서 매년 봉행되고 있다.

2007년 6월 27일에 있었던 태조 건원릉 산릉제례 모습이다.
준비부터 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장면까지를 담았다.
사진들이 훌륭하고, 다양한 각도와 사계절의 모습을 함께 담아내어서 눈이 즐거운 책이다.
간략하게나마 이곳에 잠든 왕과 왕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어 나름의 역사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다만 오타가 좀 있고, 조사가 많이 생략되어 있어 편집에서 좀 허술한 면이 보인다.
심지어 74쪽과 75쪽은 하얗게 비어 있다. 인쇄 오류지 싶다.
99쪽에는 경혜공주가 정순왕후의 묘를 집안 묘역에 모신 것처럼 기술했는데 경혜공주는 정순왕후보다 무려 50여 년 전에 죽었다.
134쪽에는 문정왕후를 문종왕후라고 기술했다.
233쪽에는 성종과 예종을 형제지간으로 기술했다. 둘은 삼촌 조카 사이다.

자잘한 것들을 뺀다면 책을 본 소감은 만족스럽다. 보고 싶었던 책인데 비싸서 선뜻 구입하지 못하던 차에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냉큼 빌려왔다. 무겁지만 전혀 무겁지 않았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이제 반납해야겠다.


역사의숲, 조선왕릉, 왕릉, 조선, , , 왕비, 무덤, 동원이강릉, 쌍릉, 단릉, 능역, 능침, 성역, 제향, 속세, 진입, 풍수사상, 홍살문, 참도, 정자각, 건축, 제례, 태조, 건원릉, 신의왕후, 제릉, 신덕왕후, 정릉, 공민왕, 노국공주, 현정릉, 석물, 봉분, 곡장, 억새, 함흥, 문종, 현릉, 산후병, 소릉, 합장, 선조, 목릉, 의인왕후, 원비, 계비, 인목왕후, 동원삼강릉, 남우여좌, 인조, 장렬왕후, 휘릉, 용성대군, 가례, 예송논쟁, 효종, 현종, 숙종, 숭릉, 명성왕후, 박석, 신도, 어도, 공처가, 애처가, 릉조, 원릉, 정순왕후, 금천, 꽃담, 절제미, 헌종, 경릉, 효명세자, 문조, 순조, 효현왕후, 효정왕후, 삼연릉, 고종, 순종, 홍릉, 유릉, 명성황후, 황릉, 명나라, 효릉,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 상상의동물, 세조, 광릉, 정희왕후, 하트, 봉종, 사릉, 소나무숲, 문화재, 생태자원, 장릉, 강원도, 영월, 엄흥도, 동강, 복위, 추봉, 명종, 강릉, 인순왕후, 병풍석, 난간석, 인경왕후, 익릉, 삼지창, 태극, 단청, 하늘, , 사람, 후경왕후, 희릉, 문정왕후, 강남구정릉, 단경왕후, 온릉, 중종반정, 연산군, 신수근, 영조, 성종, 공혜왕후, 순릉, 자을산군, 한명회, 정조, 건릉, 사도세자, 효의왕후, 도감, 국장, 해자, 화소, 산릉제례, 종묘제례, 국립문화재연구소, 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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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6-17 0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눌와에서 나왔네요.
이런 책은 도서관에 꼭 소장해야겠군요. 궁궐의 우리나무와 더불어~

마노아 2013-06-17 23:35   좋아요 0 | URL
도서관 책들은 겉표지가 없어서 눌와 책인 걸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리뷰 쓰면서 알았어요.
어쩐지 더 반갑더라구요. 눌와 책들은 소장했을 때 유독 '뽀대'가 나요.^^ㅎㅎㅎ

oren 2013-06-17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왕과 왕비의 무덤인들 후세인들의 심금을 건드리지 않는 게 없겠지만, 저는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과 정순왕후 사릉이 특히 애닯다는 생각이 드네요.

몇 년 전에 영월에서 단종의 무덤에 제향을 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http://blog.aladin.co.kr/oren/4108126),
산릉제례가 다른 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문화재인만큼 소중하게 간직되었으면 싶네요.
마노아님께서 빌린 책으로 여러 장의 사진까지 올려 주신 정성 덕분에 고맙게 잘 봤습니다.

마노아 2013-06-17 23:36   좋아요 0 | URL
예, 저도 그렇더라구요. 아무래도 감정이입이 되어서 그런가 봐요.
영월을 가보지 못했는데 관광으로도 훌륭해 보이지만 유적지로도 훌륭한 답사지가 될 것 같아요.
소개해주신 페이퍼 글 저도 읽어볼게요. 고유 문화가 아름답게 전승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늘 있지요~
 
마지막 이벤트 높새바람 24
유은실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일흔 아홉, 딱 죽기 좋다던 나이라 하셨던 할아버지. 한 해 전에는 일흔 여덟, 딱 죽기 좋은 나이라고 역시 말하셨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방 쓰던 손자 영욱이더러 손 꼭 잡아달라던 할아버지. 곧 죽을 것 같다며 자식 손주들 모두 몇 차례나 집합 시켰다가 양치기 소년이 된 할아버지는, 정작 당신 가실 때 모두들 와보라고 연락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언제나 같은 편 들어주던 손자 영욱이만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물론, 영욱이도 할아버지가 그렇게 가실 줄 몰랐다. 그저 체기가 있을 거라고 여겼고, 습관처럼 많이 드시던 활명수, 3병 사달라는 것 한병만 사다 드린 게 못내 미안하기만 하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사고뭉치였다. 젊어서는 성격 나쁜 남편이었고, 사기도 많이 당해서 자식들 고생도 많이 시켰다. 할머니는 고모가 시집가자마자 이혼을 요구하셨고, 일본 남자와 재혼을 해서 일본 땅으로 가셨다. 사기로 집까지 날린 할아버지를 아버지가 모셔왔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싫어했다. 자신이 어려서 미워하던 그 아버지의 모습으로 자신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도 모른 채.

 

식구들은 얼굴 가득 검버섯 덮인 할아버지 얼굴을 불편해해서 같이 밥먹는 것도 피했고, 할아버지 냄새 심하다고 역시 꺼려 했다. 축농증이 있는 영욱이는 할아버지 냄새 따위 상관 없이 할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냈다. 무섭고 싫은 아빠한테는 존댓말을 써도 할아버지와는 반말을 사용했다. 친밀감의 표시였다. 할아버지 검버섯 핀 얼굴을 보물찾기로 상상하고, 할아버지 벗겨진 이마를 만지며 잠드는 버릇도 있었다. 휴대폰 단축번호 1번은 할아버지였고, 바탕화면도 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할아버지의 진심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고,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었고,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도 역시 할아버지였다.

 

어린 영욱이는 할아버지와 십수년을 알고 지냈지만 다른 식구들은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 겪었다. 영욱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세월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가족이라고 쉽게 용서할 수 없는, 가족이기에 더 힘든 은원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얽혀진 실타래를 할아버지는 풀고 가고 싶어하셨다. 그렇게 해서 준비한 마지막 이벤트. 그러나 이 엉뚱한 이벤트가 유족들을 심난하게 만들었다. 영욱이로서는 할아버지의 유언인데 왜 안 지키려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할아버지의 진심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 그만큼 드물었던 것이다.

 

작품은 할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에도, 또 장례식장에 계실 때에도 시종 진지함과 유머의 경계를 잘 지켰다. 뻔뻔한 밉상 스타일의 진상 어른을 잘 표현한 큰 고모부와 여성 호르몬이 많을 것 같은 작은 고모부의 대조와 큰 고모와 작은 고모의 성격 차이가 보이고, 또 엄마와 큰 고모-그러니까 며느리와 딸의 신경전도 볼 만 했다. 뿐인가. 장례식장이라는 작은 공간을 통해서 문화와 정서, 그리고 사람을 모두 보여주었다. 언제나 재미를 주지만 그 속에 늘 사람이 있고 감동이 있던 유은실 작가님 솜씨다웠다.

 

할아버지 마지막 가는 길을 끝까지 배웅한 영욱이, 그리고 그 영욱이가 마지막에 발견한 할아버지와의 추억과 선물은 끝까지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이후로도 영욱이에겐 그 노래가, 그 하얀 쪽배와 토끼가 오래오래 곁에 머물 것이다. 서로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 더 큰 이벤트가 있을까.

 

하필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남겨준 문자 메시지는 '치사한 표영욱ㅠㅠ'이었다. 활명수 3병 대신 1병만 사서 그리 되었다. 마지막 메시지일 줄 알았더라면, 또 마지막 심부름이 될 줄 알았더라면 당연히 그러지 않았겠지만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 앞에 준비되지 않은 인사는 허망한 흔적을 남겨버렸다. 할아버지 떠나보내며 받을 수 없는 긴 메시지를 남기는 영욱이를 보며 역시 같이 울었다. 나도 그랬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꼬박 한 달 동안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보낼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눈물 상자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작품 속 할아버지와 우리 아빠는 닮았다. 여기 할아버지처럼 사고를 치신 건 아니지만 그만큼 무시 당하고 대접받지 못하셨다. 나하고만 친하게 지낸 것도 비슷하다. 그래서 더, 이 책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으로 오래 남아야겠다는, 당연하고도 늘 생각해오던 결론에 또 도달한다. 그리고 평소에 잘하자!란 다짐도 또 해본다. 헤어지고 나서, 다시 만나기 어려울 때 후회하지 말고. 서로에게 늘 반가운, 그래서 이벤트 같은 사람도 되어보자고 또 생각해 본다. 적어도 누구에게는 꼭 '좋은 사람'으로 남기를... 이 책의 큰 고모부 같은 뻔뻔하고 욕심사나운 어른으로는 늙지 말아야지. 불끈!

 

우리 할아버지는 옛날에 나쁜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할아버지를 미워합니다. 나한테도 언제나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아빠.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한테 말합니다. "넌 진짜 좋은 애야." 할아버지도 나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입니다. 사우나에 갈 때도, 만화책 빌리러 갈 때도, 박물관에 갈 때도 언제나 이벤트라고 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이제, 할아버지가 준비한 마지막 이벤트가 시작됩니다. -뒷표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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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처럼 살고 싶어 (CD 2장 + 손악보책 1권) - 이오덕 노래상자
이오덕 시, 백창우 곡 / 보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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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우 아저씨네 노래 창고 중 이오덕 노래 상자 "노래처럼 살고 싶어"다.
양팔을 벌리고 한쪽 무릎만 세워 앉은 듯한 사람 모양새가 보기 좋다.
언뜻 떠오른 것은 '애도하는 사람'의 애도하는 자세랄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가사집이면서 시집인 책 한 권과 두 장의 시디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반복해서 노래를 듣고 있는데 모처럼 싱그러운 노래를 들으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참 해맑은 웃음을 지으시는 선생님. 가식도 없고 욕심도 없는 그런 표정이다.
선생님의 표정은 선생님의 글을 닮았다. 아니, 글이 선생님의 얼굴을 닮은 것일까?

선생님은 어린이들 글쓰기가 어려운 '공부'로 되는 것을 걱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글은 쓰고 싶어서 씁니다. 쓰고 싶어서 써야 됩니다. 그래야만 좋은 글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말을 할 때, 하고 싶은 말이라야 저절로 술술 얘기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쓰기 싫은 글, 상 타고 점수 따기 위한 글은 쓰지 말고 쓰고 싶은 얘기들을 진정에서 나온 말로 쓰십시오." (<글쓰기 이 좋은 공부>에서) -9쪽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사회의 현실을 보면 악한 것이 언제나 착한 것을 이기는 것 같다. 그러나 긴 역사를 통해서 보면 마지막에는 결국 착한 것이 이긴다. 무기를 만들어 내고, 사람을 해쳐서 제 욕심만 채우려고 온갖 궁리를 하는 인간들을ㄴ 결국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만다." (<산 넘고 물 건너>에서) -10쪽

이 부분에서 참으로 위로를 얻는다. 뉴스를 피해가지 못하지만, 뉴스를 들을 때마다 괴롭다. 이 놈의 세상, 콱! 망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을 만큼 사악한 세상에 분노를 느끼는데, 선생님은 길게 보면 그래도 결국 착한 것이 이긴다고 하셨다. 지금 포기하고, 지금 실망해서 좌절하지 말자고 다시 마음 잡게 된다. 긴 역사를 생각하자. 그 과정이다. 그 일부분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누가 그렸을꼬? 짙은 눈썹의 선생님 얼굴이 강렬하다.
머리 숱도 많다. 이만하면 훈남 중의 훈남 선생님이다.^^

이주영 씨가 전한 일화에는 선생님이 과일 껍질을 따로 모아 말리고 계셨다고 한다. 선생님 계신 집에서 쓸 데가 없는 데도 말이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충주)무너미에 갖고 가 밭에 버릴 때도 있고, 산에 갖다 버려도 돼요. 누가 그렇게 많이 갖다 버리는 것도 아니고, 겨울에 산에 갖다 두면 작은 짐승들이 먹잖아요. 겨울에는 먹을 것도 잘 없을 텐데."

아아, 산에 사는 작은 짐승들의 겨우살이까지 신경 쓰는 이 마음씀이라니!!!
그러나 도시 속 무더운 내 방에선 아까 먹은 감기 시럽약을 바로 버리지 않았더니 달달한 냄새를 맡고 벌써 개미가 달려왔다. 죄송해요. 개미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냐만은... 전 개미랑 같이 살기 싫었어요. 흑흑...ㅜ.ㅜ

또 이주영 씨의 일화다. 흙으로 빚은 물 잔에 죽을 담아서 드시는 게 안타까웠다고.
하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런데-음, 이게 참 편리해요. 한 끼에 딱 요만큼 먹으면 속이 편해요. 나한테 딱 맞아요. 그리고 이렇게 들고 있기도 좋고, 손으로 감싸면 손 안에 쏙 들어와요. 참 편하고 좋아요. 이게 예술이지요. 안 그래요? 이게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지요. 청자가 예술이 아니에요. 보고 구경하는 청자보다 이렇게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그릇이 진짜 예술이에요." -15쪽

며칠 전에 어느 분이 올려준 사진에 돌멩이 세개를 포개어서 만든 아기 부처가 생각난다. 근사한 사찰 풍경보다도 더 시선을 끌던, 그 자체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가졌던 그 소박한 돌멩이들이 진짜 예술이었지...

우와아, 책들의 무덤이라고 해야 하나, 일기들의 낙원이라고 해야 하나, 자료들의 천국이라고 해야 하나?
공간과 가구의 부재로 다소 어지러워 보이긴 하지만 꽤 꼼꼼하게 정리하고 분류해 두신 것 같다.
하나하나 저 글단지들을 손으로 빚었을 테지.
부지런하고 부지런한 선생님. 일기도 40년 이상을 쓰셨다. 아주 자세하게.
살아오신 삶의 여정이 모두 그렇게 기록이 되었다.
참 많은 것을 주고 가신 선생님.

바보라도 좋아.
바보라도 좋아.
죽을 때까지 하늘 위에서
노래처럼 나는 살고 싶어.

-이 부분이 오래 가슴에 남는다. 지난 달에 보고서 완전 반했던 "닭들의 꿈 날다"가 떠올랐다. 거기선 다리 잃은 독수리가 날지 못하는 닭과 함께 '닭수리'가 되어 비행을 한다.
비무장지대를 넘어 평화를 향해 달려가던 닭수리.

또 한 곡이 떠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이승환의 '내가 바라는 나'라는 제목의 노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살 수 있는 나
아무것 없이도 살아 갈 수 있는 나
내 주위 고마운 사람들 행복을 빌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낼 수 있는 나
아마 웃을거야 철없던 날의 내 턱없는 바램
아주 오랜 후에 부끄럽진 않을런지
내 부족함을 알고 욕심을 알며
내가 가진 것들에 으시대지 않는 나
이해와 용서로 미움없는 나
사랑의 놀라운 힘을 믿어갈 수 있는 나
마지막 내 진정 바라는 나
더 이상 너때문에 아파하지 않는 나


이런 노래처럼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 어떤 노래가 있을까. 많이 떠오르지만... 다 적지는 못하겠다.
나도, 노래처럼 살고 싶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말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 중 하나가 이토록 발달한 의성어와 의태어다.
리듬감도 느껴지고 그대로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조주희 작가님의 '키친' 5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자신을 기다리는 저녁 밥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장면이 퍼뜩 떠오른다.
그런 기억으로 남기에 가장 좋은 것이 바로 된장찌개.
구수한 엄마 냄새다.

'벌레소리'의 마지막 부분이다.
벌레소리를 지구의 숨소리라고 했고 평화의 소리라고 했다.
기억나는 벌레 소리라면, 여름의 매미 소리, 가을날 귀뚜라미 소리.
또 뭐가 있나? 파리와 모기의 이잉~ 소리를 싫고, 개구리 소리 잘 못 듣지만 좋게 여기지도 않았는데, 이 글을 보니 쪼오금 반성이 된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들려주신 신춘문예 당선작의 제목은 하느님의 발자국 소리였다.
그 작품에서 하느님의 발자국 소리는 눈이 내리는 소리였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가 눈 내리는 날에 외쳤던 그 한마디가, 내가 직접 보지 못한 글임에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림도 참으로 순수하고 정겹구나.

내가 고래라면-

이 장면을 보니 안치환이 떠올랐다.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들고 싶어
붉게 물든 저녁 저 노을처럼 나 그대 뺨에 물들고 싶어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그댈 위해 노래하겠어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나 행복하게 노래하고 싶어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댈 위해 되고 싶어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아니
워- 이런 나의 마음을

내가 만일 구름이라면 그댈 위해 비가 되겠어
더운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나 시원하게 내리고 싶어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댈 위해 되고 싶어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아니
워- 이런 나의 마음을
워- 이런 나의 마음을

//내가 만일--라면... 하고 빈칸을 채워본다.
지나치게 세속적인 것부터 떠올라서 살짝 부끄럽다.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이 퍼뜩 생각난다.
추운 겨울날 봄을 기다리다 지친 친구들에게 노래와 햇살을 선물할 수 있는 시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 세 문단이 아주아주 마음에 든다.
오늘은 여러모로 '욕심 없는'에 자꾸 눈길이 간다.
그게 참 쉽지 않아서,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하늘을 내 집으로 만드는 비밀이니 어려운 게 당연한가보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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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6-14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오덕 선생님!
이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차오르는 분이어요.

마노아 2013-06-14 13:02   좋아요 0 | URL
그렇죠? 먹먹하게 하고 뭉클하게도 하시는 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