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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의 1955년 출간 작품. 책 뒤에 실린 뒤라스의 연표 상 1958년에 출판하는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바로 앞 작품이다.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마르그리트 튀라스는 <모데라토 칸타빌레>를 기점으로 작품이 많이 바뀌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바로 직전 발표작인 <동네 공원>도 읽기에 그리 쉽지 않다.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역자 김정아는 연세대 영문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까지 하고, 비교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이후 전문 역자로 활약하고 있는 듯하다. 제인 오스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에밀리 브론테, DH 로렌스, 버지니아 울프 등 주로 영어 작가의 작품을 번역했다. 그런데 올해 4월, 발터 벤야민의 독일어 작품과 더불어 뒤라스가 프랑스 말로 쓴 <동네 공원>도 출간했다. 그러면 김정아가 영어, 불어, 독어, 그리고 우리말, 이렇게 네 개 언어를 상호 번역할 정도로 언어의 천재가 있을까, 아니면 불어(또는 독어)-영어-우리말 중역일까? 이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서울대 노문과와 미국에서 러시아어 박사를 하고 우리나라에서 특히 도스토옙스키 번역에 이름을 낸 김정아도 있다. 이 김정아와 그 김정아는 다른 사람이다.)
이렇게 까탈을 잡는 건, 번역에 약간의 불만이 있어서 그렇다.
작품의 98퍼센트는 공원에서 우연히 같은 벤치에 앉은 여자와 남자의 대화로 되어 있다. 여자는 보름 전에 스무 살이 된 젊은이이고 남자는 마흔, 적어도 삼십대 후반인데, 두 등장인물의 대화가 서로 존칭을 쓴다. 그러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그쪽 분”이라 호칭한다. 우리말의 경우 서로 존칭을 쓰더라도 나이 차이에 따라 적절하게 어울리는 존칭이 조금 다르다. 세계 다른 어느 나라와도 구별이 가능한 섬세한 디테일이 있을 것이지만, 김정아의 번역문에서는 이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는 여자가 하는 말인지, 남자가 하는 말인지 구별이 힘들 때가 잦다. 물론 외국어를 직역하면 이런 현상이 벌어질 수 있겠다. 그들의 존칭은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투박하니까. 대신 우리말에 투박한 것이 그쪽에서는 섬세할 수 있으니 이런 것을 적절하게/매끈하게 보완해주는 것도 역자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아직 뒤라스를 읽는 내공이 부족해서 초중기작품임에도 읽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아 괜히 까탈을 잡고 있는 지도 모르니 역자나 역자 주위에 계신 분이 이 어쭙잖은 독후감을 읽더라도 그냥 웃고 지나가면 좋겠다.
1955년 작품이지만 책을 열면 1989년 겨울에 뒤라스가 쓴 서문이 제일 앞에 실려 있다.
파리역. 하차한 가정부들. 수천명의 브르타뉴 여자들과 행상이 역을 가득 메운다. 이들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살아가는 것이란다. 굶어 죽지 않는 것. 지붕이 있는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고, 이들도 가끔 무작정,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 말을 나누기도 한단다.
뒤라스는 1989년 겨울, 세상을 뜨기 6년 반 전에 이렇게 서문을 달았다. 나는 1989년에도 숱한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로망의 도시 프랑스 파리가 이런 세월을 겪었다는 말인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 1955년 이전에 그랬다는 말이다.
1955년 이전의 파리. 역에서 내린 브르타뉴 출신 스무 살 여자는 남의 집 하녀로 들어갔고, 늙어 자기 힘으로 일어나지 못해 침대에서 지내며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건만 성질은 더러운 노파의 시중도 들고, 집안의 잡일도 하고, 무엇보다 오후에 아이 도시락을 싸서 함께 공원에 가서 누가 아이한테 해코지하지 않는 지 감시도 해야 한다. 목요일, 이날도 여자는 아이가 먹을 샌드위치를 싸서 공원에 나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뒤라스의 말대로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 무작정 말을 나누기도 하는데, 마흔 또는 마흔에 육박한 삼십대 후반의 미혼 남자이자 좋은 말로 세일즈맨, 낮춤말로 행상을 해 먹고 사는 뜨내기였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3.8 따라지들끼리 만나 뜻이 통해 말까지 통하는 순간이다.
네 시 반. 아이 간식시간이다. 잼 바른 빵 두 조각을 자크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아이는 빵을 대충 먹어 치우고 다시 모래밭으로 뛰어가 놀기 시작한다. 같은 벤치에 앉은 남자가 여자의 아이는 아니지요, 묻는다.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자기 애로 보는 사람도 많이 있다고 대답한다.
남자는 아이가 없다. 가질 수도 있었지만 이대로 만족한단다.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하니까. 쉴 때를 빼고 늘 여행중이란다. 심지어 국경을 넘어까지 기차를 타고 떠났다가 돌아온다. 행상이다. 품목도 매번 바뀐다. 물건을 떼다 노천시장을 떠돌며 좌판을 펴 놓고 판다. 중간 크기의 짐가방에 다 들어갈 정도만 취급하니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가끔은 조금 빠듯하지만 불평할 정도는 아닌 수입이라고 생각한다.
여자가 묻는다. 쭉 그렇게 여행을 다니면서 살 생각인지, 아니면 언젠가 그만 두게 될 거라 생각하는지. 남자는 모르겠다고 대답하는데 진심이다. 언젠가는 멈추고 싶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 직업을 왜 버려야 하는지 의문이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살게 됐을 뿐인 것을. 남들과 다름없이 별 수 없이 이 직업을 선택하고 굳이 다른 직업으로 바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싫증 났다고까지 말하면 지나치겠지만 (직업을 바꿀)의욕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자기 생각으로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란다. 사람들 가운데 변하는 거 없이 사는 데 적응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그런 거 같다고.
여자는 다르다. 계속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생활은 당연하게도 조만간 끝나야 한다. 여자 팔자 뒤웅박이다. 결혼을 기다리고 있다. 남들도 다 하는 결혼을 나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 결혼하면 이런 하녀 처지와는 영영 이별이다. 여자는 앞에서도, 뒤에서도 스무 살이다. 91쪽에 스물한 살이라고 주장하는 걸 빼면. 젊고 건강한 여자는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대부분의 남자가 마다하지 않는 스타일의 여자 가운데 한 명이다. 즉 이 여자가 마음먹고 유혹하면 많은 남자가 당장은 아니더라도 넘어간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유전자 속에는 가장 조건이 좋은 남자를 선택하는 인자가 들어 있다. 그런 남자를 고르기 위하여 일요일마다 열리는 공원의 야외 댄스 파티에 참석하고 있다.
이들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남자는 직업이 너무나 보잘것없고, 하찮고, 제대로 된 직업도 아니어서 일인분, 반인분도 못하는 걸 알다 보니 삶이 그런 식으로 단번에 개선되리라는 건 한 순간도 상상이 안 된다. 시간이 없다는 건 앞 일을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일 뿐, 다른 것을 생각할 시간은 있다. 직업을 바꿀 기회가 생긴다면 즉시 그 기회를 잡겠지만 적극적으로 전직을 도모할 생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늘 여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보따리 행상이 좋기도 하다. 여행과 행상 일을 통해 예전에 비해 사리에 좀 더 밝아진 느낌도 든다.
여자는 이 처지에서 벗어나려면 벗어날 생각을 항상, 계속해서, 전심전력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언젠가는 누군가 나를 위해 울어줄 것이다. 늘 혼자라서 외롭지만 이런 (하녀)직업을 가지면 적어도 굶을 일 없고, 굶기는커녕 좋은 먹거리를 많이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통통하고 튼튼해지면 좋겠다. 더 괜찮은 여자로 보일 테니까. 더 나은 조건의 남자가 접근해올 확률이 높으니까.
우연히 같은 벤치에 앉아 맹목적으로 대화를 이어가던 3.8 따라지들.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어느 새 땅거미가 지고 여자가 돌보는 아이 자크도 놀다 지쳐 돌아와 어서 집에 가자고 조른다. 이제 여자와 남자는 헤어져야 마땅하다. 근데 은근히 그 새 정이 든 거 같다.
일요일 댄스 파티에 오실 수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갈 수 있으면 갈게요.
여자도 알고 남자도 안다. 오지 않을 것임을. 그러나 혹시 모른다. 벌써 아이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많이 지났다. 둘은 길을 나누어 떠난다. 여자가 걷다가 뒤를 돌아본다. 남자는 그냥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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