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다시 재미있는 시기가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서재에 들어가 사두고 안 읽었던 책들을 훑어보다가 꽂히면 읽기 시작하고 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도 그렇게 꺼내 들었다. 이걸 몇 해 전에 사두었더라? 문학동네에서 신간 나온 걸 샀으니 꽤 지난 셈이다(2018년). 당시에도 영화로 하도 유명한 작품이라 안 읽었지만 읽은 것 같은 책인데, 읽을까 말까 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읽기를 마친 지금, 그냥 읽은 듯한 책으로 남겨둘 걸 하는 후회도 조금 밀려오지만, 실체(?)를 알고 나니 좀 후련한 기분도 든다. 안 그랬으면 영화 포스터에 속아 유리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이 천년의 사랑인 줄 알고 죽었을 거 아냐? 그런 대(大) 오해가!
문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아무 문학이나 닥치는 대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가 좀 싫어하는 종류의 문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작가 본인의 삶을 투영했는데 작가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거나 변명하는 느낌이 강한 작품(차라리 부코스키처럼 자기를 개차반으로 그리는 게 낫다), 둘째, 작가가 작품에 툭툭 개입해서 설교조(교장선생님 훈화말씀!)로 이야기하는 작품(내 기준엔 톨스토이와 루쉰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작가의 판타지가 투영된 것이 분명한 작품(마찬가지로 내 기준엔 하루키가 여기에 속한다.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어떤 의미로든 소년에서 자라지 않은 초식남에게 여자들이 육탄공세하면서 달려든다..... 하루키의 판타지 겸 한풀이로 읽힌다). 나는 이런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는 1과 3 모두에 해당한다. 그래서 <닥터 지바고>를 좋게 볼 수 없었다. 1, 2권으로 분권된 문학동네 버전 <닥터 지바고>를 1권까지 읽었을 때는 별 다섯을 주었다. 괜찮았다. 일단 뜻밖으로 문장이나 배경 묘사 등이 아름다웠다. 서정미의 극치. 게다가 그 유명한 천년의 사랑, 세기의 사랑 유리와 라라의 관계가 영화 속 포스터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예상 밖이었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둘 다 처음부터 서로에게 반해 사랑에 빠져서 이런저런 역사적 격동기를 겪으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서로만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그런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단 둘 다 각각 아내와 남편이 있다(오, 놀라워라!). 유리는 유리대로 어린 시절 입양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집에서 함께 자란 여자 친구에게 사춘기를 지나면서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 그러니까 ‘토냐’와 당연하다는 듯이 결혼한다. 유리도, 토냐도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다. 결혼생활도 행복하게 흘러간다.
라라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 아름다운 라라, 숨 막힐 듯한 미모를 자랑하는 라라를 숭배한 ‘파샤’와 당연하다는 듯이 결혼한다. 라라와 파샤 또한 서로 엄청나게 사랑한다. 이 뜻밖의 전개에 일단 놀란 나. 그런데 내가 1권에서 매혹된 점은 ‘라라’의 성격이다. 라라는 앞서 말했듯 팜파탈적 미모를 지니고 있다(생각해보니 이 여자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는 남자가 몇이냐....). 헌데 일찌감치 아버지를 잃고 혼자 라라와 라라의 남동생을 부양하며 살아야하는 어머니가 독립적이지 못하다. 남자한테 의존적인 성격인 데다가 남자에 기대어 사는 게 아주 익숙하다. 그런 때 이 엄마를 돕는답시고 옆에 붙어 있는 인간이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닥터 지바고>의 유일한 악인이라고 하는데, 그가 ‘악인인가?’라는 질문에는 의문이 든다. 그저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간일 뿐) 변호사 ‘코마롭스키’이다. 아버지가 부재한 집, 아버지 역할을 한답시고 엄마 옆에 붙어 있는 돈 많고, 권력 있고, 힘 있고 뻔뻔한 이 중년의 남자. 그 집에는 엄마만 있는 게 아니라 어여쁘디 어여쁜, 이제 미모가 한창 피어오르기 시작한 십 대의 딸이 있다. 결국 라라와 코마롭스키 사이에는 독자 모두가 예상하는 바로 그 일이 일어난다. 코마롭스키는 라라의 엄마로도 모자라 라라를 자기의 여자로 삼는다.
그런데 여기엔 좀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라라의 마음이다. 나는 코마롭스키가 라라를 ‘강간’했다거나 ‘능욕’했다거나 등등의 표현을 쓰지 않았다. 이건 너무 라라에겐 수동적인 표현이다. 라라는 일찌감치 코마롭스키가 자신을 부적절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안다. 불쾌해한다.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으로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자기가 코마롭스키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영악한 소녀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라라는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면, 무능력한 엄마 밑에서 보호받지 못할 것이라면 내가 자발적으로 나의 힘을 이용하자, 싶어진다. 그래서 코마롭스키의 연인이 되어 그에게 몸을 허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린다. 원하는 것을 갖는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토록 어린 나이에 타락했다고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번뇌하고 이 삶을 청산해야 한다고 거듭 마음먹는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자 코마롭스키를 벗어나고 싶지만 이 막강한 남자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적적으로 자력으로, 그를 떠나는 데 성공한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십대 시절 라라의 성격이, 그녀에 관한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 권력을 가진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게 아니라 (비록 잘못된 판단에서 시작했지만) 능동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를 쥐락펴락했다는 점. 그리고 거기에서 도덕적 윤리적으로 번뇌한다는 점….
‘파샤’와의 결혼도 ‘유리’와의 만남도 모두 이 코마롭스키 이후에 이뤄진다. 그런데 문제는 파샤는 어린 시절부터 라라를 숭배하다시피 했고, 라라 또한 이 사실을 안다는 것. 유리와 라라는 어린 시절에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우연히(이놈의 우연! 이 작품에는 우연이 남발한다. 그 넓은 러시아 땅에서 늘 우연히 만나는 인물들.....) 유리가 라라의 어떤 모습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하필이면 코마롭스키로부터 벗어나려고 기를 쓰던 중 라라가 그에게 총을 쏘는 장면(!)을 본 것이다. 이토록 강렬한 만남, 아니 그 무엇보다 저토록 강렬한 미모의 소유자...... 유리는 이때 어린 라라와 코마롭스키가 그렇고 그런, 부적절한 사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총을 쏜 저 아름다운 소녀의 인생이 기구해지겠거니 안타까이 생각하면서도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러나 그녀에 대한 기억은 오랫동안 유리의 머릿속에서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유리는 유리대로, 라라는 라라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시련은 라라에게 먼저 닥친다. 그러니까 저 순진무구한 파샤가 자기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해 방황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라는 결혼 전 코마롭스키와의 관계를 파샤에게 모두 털어놓는다. 이상적인 성격의 파샤는 그런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닌 듯 쿨하게 받아들이고 결혼 생활을 시작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어디 그러한가. 아내의 과거는 언뜻언뜻 파샤에게 떠올라 그를 괴롭힌다. 그들의 생활은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파샤는 갑자기 전쟁터로 떠나버린다. 그렇게 홀로 남은 라라는 이러구러 어찌어찌 유리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친밀해지고 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 라라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부정한다. 도리어 아내인 토냐가 남편이 라라라는 여자에게 끌리고 있다는 걸 유리 본인보다 먼저 알아차린다. 그렇게 시작되는 불륜이 두 사람.... 세기의 사랑의 전말은 이러하다.
그래, 불륜도 세기의 사랑이 될 수는 있지. 왜 아니겠는가. 그런데 잠깐만 이거 좀 이상하다. 작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실제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여자는 모두 셋이다. 파스테르나크는 당시로서는 조금 늦은 나이였을지 모를 서른이 넘은 나이에 첫 번째 결혼을 한다(‘예브게니 루리에’). 이 결혼에서 아들을 하나 둔다. 그런데 그 이후 마흔 즈음에 ‘지나이다’라는 여자에게 반해 무작정 집을 나와 이 여자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이때 첫 번째 부인과 아들은 해외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면 이 ‘지나이다’가 ‘라라’의 모델인가 싶어지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지나이다와 두 번째 결혼을 한 후로 그럭저럭 사는 것 같더니, 파스테르나크가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서른넷의 ‘올가 이빈스카야’를 만난 것이다.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로 만났던 두 사람은 파스테르나크가 죽기 전까지 그 관계를 이어나갔다고 하는데 두 사람의 관계를 두 번째 아내인 지나이다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파스테르나크는 지나이다를 떠나기 거부한 채 계속 이 관계를 유지했다고. 대환장파티가 아닐 수 없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자. 작품 속 유리는 토냐와 결혼한 상태로 라라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 모두 유부남/유부녀이다(실제로 라라의 모델이 된 ‘올가’는 남편을 잃고 혼자 자식을 키우고 살던 싱글맘이었다). 유리는 토냐를 사랑한다. 절대 그녀를 떠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이 토냐는 파스테르나크의 두 번째 부인인 지나이다를 본뜬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닥터 지바고>에서 참 신기한 점이 하나 있다. 토나도 라라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질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토냐가 임신해서 애를 낳을 때 라라가 출산을 돕............ 그런 데다가 토냐는 토냐대로, 라라는 라라대로 유리 지바고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간 중의 하나이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에게 그토록 상처를 줘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구구절절 말한다(제발, 그만!). 파스테르나크 자체도 자기 분신인 유리를 그렇게 그린다. 이것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의사인 유리는 의사라는 직업 자체가 쓸모가 있어서 파르티잔(빨치산)에게 붙잡혀가 몇 년 동안 탈출도 못하고 생고생을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탈출에 성공해 라라와 감격에 겨운 재회를 한다. 두 사람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둘만의 낙원(은 아니다 라라와 파샤 사이에 난 딸 카챠가 함께 한다)에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지낸다. 그런데 유리는 그러는 한편으로는 토냐의 소식이 궁금하다. 토냐가 모스크바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가족들과의 재회를 꿈꾸기도 한다. 그럴 수 있다. 인간이란 모순적인 존재이니까, 그런데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은, 그토록 사랑한다는 라라를 결국 코마롭스키! 이놈과 함께 떠나도록 방관한다는 점이다. 아아아아니, 이게 말이 되는가? 말로는 결국 그것이 라라를 위하는 가장 최선의 길이라는데, 진짜 그래? 난 이 사랑 도무지 이해 못하겠네. 게다가 이 천년의 사랑, 라라를 코마롭스키와 떠나도록 종용하고는, 유리는 세 번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야’- ........ 말잇못.
파스테르나크도, 작품 속 유리도 인간 개인의 감정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혁명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사업도 사랑과 같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부정하면 아무 의미 없노라 설파한다. 그것을 유리 그 자신의 삶으로 몸소 보여준다. 시를 쓰며 이 시대가 애달프기만 한 부르주아지여! 그런데 의아하다. 그토록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마음을 으뜸으로 쳤던 작가나 작가의 분신(‘유리’)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어쩌면 그렇게 게으르기 짝이 없었을까?
토냐와 라라는 서로 질투하지 않는다. 유리를 미워하지조차 않는다. 라라의 남편 파샤도 아내의 과거가 괴로울 뿐 나중에 유리와 라라의 관계를 알고 나서도 질투하지 않는다. 고통받지 않는다. 아내가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다는 걸 알고 나름 기꺼워할 뿐. 유리 또한 라라가 자신의 남편 ‘파샤’만큼 숭고한 남자는 없다고 그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할 때 질투하지 않는다. 고통받지 않는다. 자기는 자기보다 훌륭한 존재는 질투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코마롭스키 같은 저열한 인간한테 질투를 느낄 뿐이라고.....(말해놓고 그에게 라라를 보내는 유리 지바고여....) 파스테르나크는 공산주의 혁명을 비판하면서도 아내 공유, 자식 공유 등 처자 공유를 내세웠던 플라톤의 공산주의는 따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기의 삶이 그러했으므로 정당화하거나 또는 면죄부를 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름다움도 의미가 있을 때 아름답다. 파스테르나크의 이 징그러운 마스터베이션에 1권에서 느낀 아름다움마저 공허하게 느껴진다. 태생이 부르주아였던 파스테르나크라면 아마도 몹시 싫어했을 작품임에 틀림없을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그 투박함이, 촌스러움이 오히려 아름답게 여겨질 정도이다. 이 작품은 그래도 뜨겁기라도 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