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 1] 은 치앙마이 가는 비행기 안에서 다 읽었다. 과연 읽었다고 말해도 될지... 도대체 제임스 조이스는 왜 이런 책을 썼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율리시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는만큼 이게 뭔가 어마어마한 소설인것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네.. 휴.. 힘겹게 1권을 읽어내고 오늘 2권을 펼쳤는데, 고작 8페이지에서 이런 문장을 본다.
보편적으로 지혜를 타고난 사람들이 아주 유익한 연구대상으로 삼는 어떤 일에서건 통찰력이 저평가되는 사람은 원리에 가장 밝고 따라서 분명히 존경받아 마땅한 고매한 심성이라는 장식품을 갖춘 이들이 끊임없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바를 알지 못하거니와, 그 주장이란 여타의 사정이 같다고 전제할 때 한 국가의 번성을 효과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외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종족의 증식적인 존속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찬미하는 경지가 얼마나 높은 수준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으로서, 이 현상이 악의 근원을 보이지 않은 채 다행히 뚜렷하게 드러난다면 이는 막강한 국가의 선행이 건전하다는 확실한 징후를 이룬다는 것이로다. -2권, p.8
율리시스는 언어의 실험적 소설이라고 하는데, 하아- 나는 그 실험 모르겠다. 저 문장 재차 읽어보지만 어느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이게 어떻게 한 문장이란 말입니까. 어떤 번역 소설들을 읽다가 '아, 이건 원문에선 어떨까' 궁금해져서 읽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위 문장은 보자마자 율리시스 원서는 읽을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문장 접하자마자 책을 집어던질 것 같다. 오, 신이시여.. 아니, 제임스 조이스여. 왜죠?
그리고 51페이지.

나는 '하갈'에 대한 저 각주에서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알기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임신을 하지 못해 아브라함에게 하녀 하갈과 잠자리를 갖게 권유했고 그렇게 하갈이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 후에 사라가 임신을 하게 되자 아브라함의 아이를 가진 하갈을 내쫓는것이었다. 그렇게 쫓겨난 하갈은 방황하고 힘들어하다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사막 어느 곳에 정착한다, 정도의 내용이었는데 하갈이 '임신 후 오만해져서' 쫓겨난다고? 흐음.
내가 모르는 다른 해석이 있는건가? 그러니까 나는 기독교도 아니고 성경을 파고들어 연구한 사람도 아니고 고작 성경책을 한 번 읽어봤으니 내가 알면 뭘 얼마나 알겠는가. 그러니까 어느 종파에서는, 종파라고 해야하나 어느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하갈이 오만해져서 쫓겨난 걸로 해석이 되기도 하는거야? 나는 모르겠다. 그래서 챗지피티 한테 물어보았다.


챗지피티에서도 하갈이 오만해서 쫓겨났다고는 안하는데, 이게 무슨 새로운 연구 결과 이런건가? 하갈이 오만해서 쫓겨났다고? 나는 이 주석이 좀 불쾌했는데, 그건 어쩌면 하갈의 입장에서 얘기한 '이승우'의 [사랑이 한 일]을 읽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승우가 접근한 관점에서도 하갈은 오만해져서 쫓겨난게 아니었다. 오히려 챗지피티가 말한 것처럼 '억압받는 존재'의 입장으로 접근했단 말이다. 그런데 오만해져서 쫓겨났다니.. 흐음.
하여간 2권의 100페이지 까지 읽었다. 아 힘들다.. 도대체 무슨 말이지도 모르겠고, 왜 바닷가에서 자위행위 했던 블룸이 산부인과에 와있었던건지 이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렇게 잘 모르겠는데 이 책을 읽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의미가 있기는 있는걸까?
여하튼 끝까지 보기는 하겠다. 아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