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결국 내 자신의 판단이고 결정이었다. 그간 가장 두려웠던 점은 월급이 나오는 안정적인 생활을 그만두면 후회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퇴사 후에 하고 싶은 공부가 분명했지만 그 길에 들어설 용기를 내는 것이 어려웠다. 소속 없는 삶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와 달려나갈 트랙이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선택을 하는 데만 해도 몇 년이 걸렸다. - P21
퇴사를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언젠가 퇴사할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지금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과연 합당한지 내가 내게 물어야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고민, 아니 유일한 고민은 돈이었다.
내가 좋은 회사에서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는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돈을 벌고 있는 것일텐데, 그걸 그만두는 것이 과연 옳은것일까? 그런데 그 돈 때문에 관두지 못한다면 나의 퇴사는 내년이 되고 또 다음이 되고 그 다음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퇴사해야만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미룬채로 나이만 먹는건 아닐까. 그러면, 결국 못하는거 아닌가. 인생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돈을 포기하는 건 후회가 아닐까?
묻고 또 물었지만 그래도 답은 퇴사였다.
나는 급여생활자로 살아가야 하고 그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어쨌든 내 삶에 있어서 나를 먹여살릴 사람은 나이고 그러니 노동은 계속해야하고 내가 노동을 하지 않은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지금 이 일을 관두고 나중에 다시 취업을 한다고 하면 아마 그 때는 월급이 지금의 반토막이 날터였다. 좋은 학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것도 아니니 받아들여야 했다. 나이도 있으니만큼 회사 관리직으로 입사하기는 힘들 터. 나는 마트의 캐셔와 물류센터의 직원과 생산직을 생각했다. 편의점 알바일도 생각했다. 주어지는 일자리는 그것뿐일거라고 생각했고 지금보다 확 줄어든 급여를 감당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는수없지, 그래도 돈을 벌지 않는 것보다는 한달에 이백만원이라도 버는게 낫지. 일단 지금은 중단하자.
자, 이제는 회사에 통보를 해야했다.
오래 일한만큼 말하기까지 너무 무서웠다. 어떤 반응일지 상상도 안됐다. 내가 나가고 나면 빈자리에 사람 뽑고 가르치기 힘들어 그만두지 말라고 잡을까봐 두려웠다. 내 선택에 대해 비아냥대면 어떡하지? 뭐 그래도 하는수없지. 누가 뭐라든 내 길을 가자!
그러나 회사에서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여줬다.
나의 퇴사와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다들 수긍하고 격려해줬다. 이렇게나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응원해줄줄은 몰랐다. 너무 용기있다, 잘했다, 즐겨라고 다들 얘기해주었다. 사실 가장 어려운 사람은 보쓰였는데, 두려운 면담의 시간이 왔고 오히려 보쓰는 그래, 알았다, 너가 가면 내가 불편하겠지만, 그런데 네 뜻이 그렇다면 네가 얼마나 생각을 잘했겠니, 네가 알아서 잘했겠지, 해주셨다. 그래서 퇴사를 통보한 후 나는 한결 가볍고 여유로워졌다. 그래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갔다.
일단 5월말에 관둔 뒤로는 아무 생각 말고 시간을 내 마음대로 여유롭게 보내자, 하고 잽싸게 치앙마이 티켓을 끊어두었다. 비수기에 유럽을 가고 싶었는데 그건 내년 3월로 미뤄야지, 그렇지만 비수기에 좀 먼 데를 다녀오는건 포기할 수 없어! 6월 셋째주에는 뉴질랜드에 다녀올거다. 둘째주에는 경주에 갈거다. 나는 아주 바쁠 예정이다.
시간은 잘도 흘러갔고 퇴사를 통보한 것이 바로 현실이 되었다.
퇴사를 앞두고 하루 전날 보쓰는 나를 불러 '이게 내 인사다' 라시며 금일봉을 주셨다. 임원1도 임원2도 맛있는 것 사 먹으라며 역시 금일봉을 주셨다. 내가 뭐라고 다들 이러는거야 ㅠㅠ
게다가 회사에서는 퇴사하는 내게 감사패를 주었다. ㅠㅠ
직원들은 박수를 쳐주며 퇴사하는데 감사패 받는거 처음 본다고 했다.

여동생과 남동생이 꽃바구니를 보내왔다.

성실한 그대 그동안 애쓰셨습니다, 라는 리본을 보는데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동료들도 조용히 내 자리로 와 선물을 주고 갔다.

어서와 헤네시는 처음이지? 이 위스키는 받은 그 날 집에 가서 한 잔 마셔보았다. 훗. 두고두고 마셔야지.

이 직원은 퇴사할 때는 양말을 선물하는 거라고 들어 런닝 양말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낯선 서울에서 내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내가 명랑하고 밝은 모습으로 대해주어서. 이 직원은 나처럼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동료와 친구들이 보내준 도서상품권이 있고 또 와인도 있다.
내가 먹고 살려고 일했는데 다들 내가 성실했다고 선물을 준다. 나는 자꾸 눈물이 났다. 뭐야 다들 왜이래. 남을 위해 일한게 아니라 나를 위해 일했을 뿐인데, 왜 다들 그런 내게 고생했다고 말해주는거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리고 보쓰의 아들인 임원이 나를 불러 내 계획이 끝나고 다른 일이 없다면, 꼭 다른 일이 하고 싶은게 아니라면, 그러면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나는 이 제안에 깜짝 놀랐다. 이런 제안이 들어올 줄 몰라서 정말 놀랐다. 그리고 좀 안심이 되었다. 내가 퇴사한다는 소식에 사실 몇몇 가까운 이들은, 그 다음은 어떡하려고, 앞으로는 어떡하려고, 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고, 나 역시도 걱정이 되지 않았던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어쨌든 뭐든 할 사람이지만, 그런데 괜찮을까? 그렇지만 돌아오라고 말해주는 회사가 있다.
게다가 회사에 돌아가는게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겠지만, 네가 돈 욕심이 좀 덜하다면 우리 회사에 오는 것도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고 스타트업에 다니는 친구가 제안해주었다. 성실히 글 쓰는 나를 보아왔고 자신의 회사에서도 글을 쓰는 일을 줄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살아왔던게 아닌데 그냥 매일 일찍 일어나 회사를 다녔더니, 그리고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썼더니, 그리고 이렇게 꾸준히 오래 해왔더니, 다들 나를 성실하다면서 좋은 일꾼으로 여겨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퇴사하면서 자꾸 눈물이 났다. 무엇보다 내가 성실한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다닌게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아주고 있어서 내가 잘 살았다는 생각에 내 스스로가 뿌듯해졌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 말이 드러내는게 아니라 내 태도가 드러내는 거라는 신념이 결국 이렇게 증명되는 셈이다.
떠나기 전날 임원이 돌아오는 날짜를 확정지어달라고 말했다.
과연 내가 그걸 말해도 될까, 미래는 예측불허인데, 내가 말해놓아도 될까, 그것이 나를 구속하게 되는건 아닐까, 일단 답을 하지 못하고 생각해본다고 하다가 결국 회사에 돌아오는 날짜를 통보했다. 2026년 6월 1일 , 나는 복귀할 예정이다.
임원도 보쓰도 안식년 보내고 돌아오라 해주셨다.
마지막 날 부서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고, 어떤 직원이 우는 걸 달래기도 했고, 그렇게 인사하고 내 자리로 돌아왔는데, 자리를 비워 미처 인사하지 못한 임원분께서 내가 있는 층으로 올라오셔서 인사를 해주셨다. 잘 지내고 다시 와요, 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돌아갈 곳이 생겼다.
물론 돌아오라는 제안은 너무나 감사한 것이고 그것이 아마도 내가 앞으로 급여생활자로 살아가는데 가장 좋은 선택지일 것이다. 그런 한편, 나는 나에게 그 외에도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한다. 사실 승무원에 도전하고 싶긴 했는데, 다이어트 하기도 빡세고 영어가 과연.. 게다가 최근에 알게된건데 승무원은 수영도 해야 한다네요? 치앙마이에 오는 비행기를 타려고 인천공항에 갔는데,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공항에서도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일 년후의 나는 어쩌면 다시 캐나다뷰를 가진 양재천 앞 회사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뭐가 됐든 내가 지금 퇴사를 결정한 일이 실수도 실패도 아니다. 나는 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격려를 받으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인생 진짜 너무 잘살았다. 너무 잘살아서 너무 뿌듯하다.
일요일에 출국하기 위해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보안검사를 마치고 라운지로 가서 가방을 부려놓고 뷔페 음식을 가져다 먹으면서 율리시스를 읽는데, 내게서 성공의 냄새가 났다. 재벌이 된 그런 성공이 아니라, 뭐랄까, 졸라 후회없이 잘 살아온 그런 성공의 냄새? 그래서 아주, 아주 좋았다. 게다가 지금은 낯선 도시에 와서 글을 쓰고 있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쨌든 1년간 수입이 없을 예정이고 나는 어떻게든 돈벌이를 좀 해보고 싶은데, 이왕이면 퇴사 이후의 일상을 글로 써서 연재해 돈을 좀 벌고 싶단 말이지. 사실 그동안의 나를 보아온 알라딘에 쓰는게 제일 좋을 것 같긴한데 알라딘은 돈이 안되잖아요.. 투비.. 도 돈이 안되더라고요. 거긴 이미 웹툰과 웹소설이.. ㅠㅠ 나 따위.. 브런치에 가면 돈이 될까.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커피값이라도 좀 벌어볼 수 있을까. 내가 일년간 아무런 수입이 없다면 술을 줄여야 되는데... (먼 산)
아무튼 내게는 돌아갈 곳이 있다.
그곳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나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한 번 살아볼 예정이다.
내게 다가올 미레가 아주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