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관심이 많았었다. 주기적으로 나를 질문하고 검토하며 알아가기를 즐겨 했다. 나와의 시간을 가질수록 성향과 취향은 확고해지고, 그 방식들은 여러모로 퍽퍽한 삶에 윤활제가 되어주었다. 아무튼 이만하면 나는 자신을 잘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확고했던 모든 게 조금씩 변하면서 적잖은 당황에 빠졌다. 심경에 어떤 변화가 온 것도 아닌데 어느새 싫어했던 것들을 좋아하게 되고, 좋아했던 것들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그럼 이전까지의 내 모습은 허울뿐이었던 걸까. 나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지만 늘 하던 대로 다시 나를 알아갔고, 다행히 지금은 잘 살곤 있다. 아무튼 난 이런 사람이야, 하고 정의했던 내가 틀렸음을 마주할 때에 겪는 혼돈은 정체성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나의 믿음과 신념이 흔들릴 때, 나의 정의가 금이 갈 때, 나의 존재가 거부당할 때 어떻게 해야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뭐 그리 피곤하게 사냐고 하시겠다면... 그래, 니 똥 굵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죄인이 되어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소송을 걸었고 그래서 법원의 감시를 받아야 한단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법정에 불려가고, 변호사를 선임하고, 청원서를 작성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법원 사람들은 도통 알 수 없는 말이나 해대고, 법은 갈수록 그의 죄를 선명하게 비추었다. 그냥 죄를 인정하고 목숨을 부지하는 편이 최선일까. 아니면 죽더라도 끝까지 떳떳하고 당당한 게 맞는 걸까.


법학 전공자답게 카프카는 법에 대한 글과 작품을 많이 썼다. 하지만 전공보다도 종교가 그의 삶에 더 큰 영향을 주었음을 텍스트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비롯하여 카프카의 작품들은 독자마다 다른 해석을 품게 만드는데, 그것은 카프카가 해석을 거부하는 글을 쓰기 때문이란다. <소송>의 경우 사건의 인과관계가 명확히 설명되어있지 않고 곳곳에 구멍을 의도적으로 파두었다. 누군가에게 고소를 당하고 소송에 휘말리지만 고소인이 누군지, 소송의 사유는 무엇인지 나와있지 않다. 마치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는듯이. 그리고 비워둔 구멍에 기독교 관점을 개입하여 더욱 해석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카프카의 작품은 도덕, 종교, 철학 어떤 시각으로 보든 간에 그럴싸한 이해를 가져다주는데 정작 저자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세상을 떠났으니 뭐가 맞는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다. 게다가 미완작으로 출간되었으니 참된 해석을 가지지 못한 쪽이 더 신비스럽고 좋지 않나 싶다.


카프카의 작품들은 그가 죽은 후에 출간되었다 보니 미흡한 부분이 많다. 우리가 읽는 것들은 저자의 미완성 원고라서 교정이 안된 부분이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구간이 수두룩하다. 그 구멍들을 독자의 상상과 짐작으로 채워 넣기 나름인데,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작품 색이 크게 달라지곤 한다는 점이 매력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카프카의 책이 과연 고전문학으로 불릴만 한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많은 고전들이 다 다른 해석과 관점을 낳더라도 결국에는 비슷한 깨달음에 도달하는데, 카프카의 작품은 그렇지가 않다. 여러 갈래로 해석이 나뉘는 데다 해석을 거부하는 글이라니, 내가 무엇을 느끼고 판단하든 아니라고 한다면 고전을 읽는 의미가 있긴 할까. 어떤 감상이든 간에 독자만의 것으로 남아야 하는데 그것조차 거부당하는 기분이 든다. 많은 비평가들이 카프카를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일의적 시점이니, 체험 화법이니 하는 다양한 수식어를 갖다 붙이는데, 안 그래도 난해한 작품을 그런 복잡한 말들로 설명해줘야만 겨우 알아먹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추앙받을만한가 싶은 거지. 혹자는 내 독해력의 문제 아니냐 할지 모르겠는데, 꼭 머리가 좋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고전보다 전공서로 분류되어야 하지 않을까. 몇 권 더 읽다 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고.


성당에서 신부가 말한다. 동일한 사안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과 잘못 이해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지 않다고. 그러니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답도 되고 오답도 될 수 있단 말인데, 그걸 명확히 하려고 법이 존재하는 게 아니던가? 이 책은 법원과 연관된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어째 하나같이 중의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주인공은 만나는 이마다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결국 법을 이길 수 없을 거란 내용이었다. 이게 참 주인공 입장에서 보자면 법원은 온통 부조리뿐이고 그저 권력으로 행사하는 부패 집단이나 마찬가지이다. 여기에는 저자의 노골적인 의도가 느껴지는데, 오랜 시간 속에서 법이 지닌 허점을 카프카는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이 책에서 법은 선이 되었다가 악이 되기도 하고 중립도 되었다가 이도 저도 아닌 존재로 비춰진다. 이것은 물론 인간에게도 해당되나, 불완전한 인간과 달리 완전무결해야 할 법이 완전치 못할 수도 있다는 의심을 들게 해 독자의 고정관념을 뒤집고 있다. 인간을 보호해주는 신성한 법이 가면을 쓰고서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는 아이러니함이란.


본문에는 죄목이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그만큼 주인공이 중죄를 범한 게 아니냐는 말도 더러 있다. 그러면 어떻게 잡혀가지도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생활하도록 놔두는가 하는 모순이 붙는다. 그러니 법 대 인간이라는 일차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어떤 이의 서평대로 세상은 원래 부조리하고 인생은 원래 억울하게끔 설계되어있다는 쪽으로 확장해서 보는 게 맞겠다. 법원은 주인공의 자유를 끝없이 억압하려 하고 주인공은 그 강제성에 계속해서 저항한다. 끝내 처참히 패배하고 말았지만. 이 같은 인물과 시스템(조직)의 대결 구도는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 부조리함에 굴복하는 자와 맞서는 자 중 누가 맞고 틀렸는지를 콕 집어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인간의 정체성이 저항과 극복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카프카는 강조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에 이 정도 매달렸으면 됐지 뭐.


댓글(30) 먼댓글(0) 좋아요(6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1-10-18 22:50   좋아요 4 | URL
누가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정체성을 발견한다...이런 생각을 하셨군요.
저보다 훨씬 나으시네요.ㅎ
저는 너무너무 답답한 상황 속에서 무력한 K의 모습이 무섭고 이상했어요. 마지막 K의 대사도 안 잊혀요. ˝개 같은 결말이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답답한 곳이지...이런 생각만 했더랬죵

물감 2021-10-19 07:13   좋아요 2 | URL
저도 뭐 이리 엿맥이는 야기만 하는지 의아했는데요, 대놓고 삐딱하게 쓴 저자를 생각하다보니 다른 시각들이 열리긴 하네요ㅋㅋㅋ결말도 참 인상적이고요😎

붕붕툐툐 2021-10-18 22:57   좋아요 3 | URL
오~ 완전 관심 가는 책입니다~ 물감님, 자신에 대해 관심 많은 거 저랑 비슷하셔용~ 동질감~ 물감님이 좋아하시는 건 냥이들!!🐱🐱

물감 2021-10-19 07:15   좋아요 2 | URL
저랑 비슷하신 툐툐님도 카프카에 도전하세요ㅋㅋ

참, 저는 동물키우기에 질색하던 사람이었어요. 이거또한 바뀐 점이군요 허허헣

붕붕툐툐 2021-10-19 21:15   좋아요 1 | URL
오~ 고양이들 입양 계기도 궁금하네용!! 다음 고양이 페이퍼에서 다뤄주심 안될까요?ㅎㅎㅎㅎㅎ

물감 2021-10-20 18:36   좋아요 1 | URL
ㅋㅋㅋ네, 기회되면 3탄에 써볼게요

그레이스 2021-10-18 23:33   좋아요 5 | URL
이 소설 인상적이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변신보다 더 좋았던 것 같아요
더 직설적인듯 보이지만 많은 함의가 있다는 생각.
마치 꿈을 꾸듯 벌어진 법정!
잠에서 깨어났다지만
혹시 이 법정을 꿈꾸고 깨어난 주인공이 잠자가 아닐까요?
카프카가 패소한 인간의 부조리에 대항하기 위해 변신하는!

물감 2021-10-19 07:22   좋아요 3 | URL
변신은 아직 안봐서 모르겠는데 말씀하신걸로 봐선 변신도 난해할 것 같네요 ㅎㅎ 카프카의 글은 수능시험처럼 어려운데 풀어야만 할 것같은 인상을 줘요^^;
부조리에 대항하려 변신한다라? 의미심장한 발상같습니다!

새파랑 2021-10-19 08:30   좋아요 2 | URL
이 책 읽으려고 리커버리판으로 구매했는데 물감님의 평을 보니 어려워 보이네요 😅 카프카의 작품은 다 어려운거 같아요~!

물감 2021-10-19 08:55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은 어려운 책들도 잘 읽고 리뷰하시니까 걱정안하셔도 됩니다 ㅋㅋㅋ
도끼형님 작품들을 타파하실 정도면 카프카 작품도 타파할 수 있으실 거에요 ^^

나비종 2021-10-20 20:14   좋아요 3 | URL
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저에게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맞춰주는 삶을 주로 살았어요. 예전을 생각하면 제가 빠져있던 순간들이 많았죠. 크고 작은 요소들이 변화를 만들어냈겠지만 저를 더욱 귀하게 여기게 된 계기 중 책이 많은 비율을 차지했어요. 좋고 싫음이 점점 뚜렷해집니다. 인생 뭐 있나 싶어서 좋아하는 걸 많이 하게 되구요. 싫은 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놓아버리구요.
취향이 변하더군요. 그 변화를 먹을 거에서 가장 많이 실감합니다.ㅎㅎ 어렸을 때 엄마께서 바밤바, 비비빅, 단팥빵 등 팥 시리즈를 좋아하시는 걸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저런 걸 왜 드시나, 줘도 안 먹을 거라며. 올 여름에는 비비빅과 바밤바만 냉동실에 꽉 차 있었거든요.ㅎㅎ
정신적인 면에 대해서는... 믿음, 신념, 정의 같은 건 조금씩 변화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몸이 변화하듯 정신도 성숙되니까 조금씩 깊어지면서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닐까요?^^

죄의 인정과 죽음의 선택지에서 누구도 다른 이의 선택을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생명의 무게만큼 묵직한 선택일 거니까요. 가치관에 따라 선택지가 달라질 테니. 가치관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추구하는 방향의 차이니까요. 대부분의 인간들이 비난하는 상황조차도 그게 100%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몇몇 극단적인 극악무도한 사회 범죄자들은 인간이 아니므로 우리랑 종이 다르니 논외의 대상이구요.ㅎㅎ

카프카가 해석을 거부하는 글을 썼다면 사후 자신의 작품을 태워버리라고 했다던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도덕, 종교, 철학의 3종 세트에 드높은 경지에 이른 자만이 그의 책을 그나마 독해할 수 있겠군요. 저같은 평범인은 음... 어렵습니다~ㅋ
‘머리가 좋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고전보다 전공서로 분류되어야 하지 않을까.‘ 후련한 멘트~~ 물감님께 엄지척!!!ㅎㅎ

법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라고 본다면 도구는 사용하는 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니까요. 칼만 해도 음식을 만드는 데 쓰이기도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기도 하니까. 꽃도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도 정신을 교란시키는 마약이 되기도 하니까. 저는 이런 맥락에서 법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에서 ‘항상성‘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주변 환경이 변하더라도 항상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요. 체온을 유지하고 혈당량을 유지하는 식으로요. 인간의 정체성이란 얼마나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항상성을 유지하느냐로 정의될 수도 있겠다 싶네요. 음, 생각이 깊어져야 하는데 잡다해진다는 느낌이 강해지는 저녁입니다~^^;;

물감 2021-10-22 15:05   좋아요 3 | URL
오, 저도 남한테 맞춰주기 바쁜 타입이었어요. 지금도 그건 크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타인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거? 그래서 저는 지금의 제가 너무도 좋습니다. 안그래도 힘든 세상인데 뭘 일부러 피곤하게 살아왔나 싶어요 ㅎㅎㅎ

음식 취향의 변화를 말하시니 저도 여러가지가 떠올라요~ 특히 특정 음식보다는 입맛의 변화인데요, 자극적인 맛보다 삼삼한 맛의 음식들이 잘 들어갑니다. 팥이 들어간 것들도 물론 잘 먹고요 ㅎㅎ 정신적인 면의 변화는 좋고 나쁨을 가르기보다 어느 쪽이든 그럴 수 있다...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더 편하기도 하고요. 무수히 많은 ‘다름‘을 최대한 인정하며 살려고 하거든요 ^^;

생명의 가치나 무게에 대해서는 누구나 쉽게 얘기하지만, 죽음은 그럴 수 없는 것 같아요. 당사자가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를 타인이 알면 뭐 얼마나 알겠나 싶고요. 그래서 요제프가 저항을 서서히 관두는 걸 보면서도 크게 아쉽거나 슬프지 않았던 거였나 생각이 드네요.

그나저나 정말 궁금합니다. 카프카는 미완성이라도 꽤 많은 글과 작품을 썼던데, 왜 없애버리고 싶었을까. 집필할 때는 분명 남들이 읽어주길 바라며 썼을텐데요. 여튼 지난번 보니것 작품의 난해함과는 결이 달라서 좋았어요. 나름 해석하는 재미도 있고요 ㅋㅋㅋ

그러고보니 사용자가 문제일 뿐 도구는 정말 아무 잘못이 없네요! 다만 ‘법‘이라는 단어가 지닌 이미지 때문에 법은 좀 다르게 생각했나봐요. 그런데 넓은 의미로 보면 법도 인간의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하구나 싶어요~

항상성. 좋은 거 배웠습니다 ㅎㅎ 나비종님의 과학적인 접근과 사고가 참 좋아요. 저에겐 전혀 없는 것이라^^ 이런 걸 보면 나비종님, 평범인이 아닌데요? 자부심 가지셔도 됩니다 ㅋㅋㅋㅋ 10월도 수고하셨습니다~~

scott 2021-11-05 16:19   좋아요 2 | URL
물감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11월 가을
귀요미 냥이군들 3탄 페이퍼 올려 주삼 3333

물감 2021-11-05 18:17   좋아요 2 | URL
아하 당선이 되었군요ㅋㅋ감삽니다. 3탄은 내년에~~~

그레이스 2021-11-05 16:53   좋아요 1 | URL
저도 축하드려요~

물감 2021-11-06 06: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

독서괭 2021-11-05 16:56   좋아요 2 | URL
물감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냥이 페이퍼 언제나 환영입니다 ㅋ

물감 2021-11-06 06:54   좋아요 2 | URL
ㅋㅋㅋ책리뷰보다 냥이페이퍼가 더 힘드러유ㅋㅋ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11-05 17:29   좋아요 2 | URL
물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물감 2021-11-06 06:5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11월도 파이팅 하세요!

서니데이 2021-11-05 18:14   좋아요 2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물감 2021-11-06 06:5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새파랑 2021-11-05 18:24   좋아요 2 | URL
멋진 리뷰 였는데 역시나~!! 물감님 축하드려요 ~!!

물감 2021-11-06 06:58   좋아요 2 | URL
그랬나요ㅋㅋㅋ강한 인상을 남긴 걸 보니 애쓴 보람이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

초딩 2021-11-07 11:23   좋아요 2 | URL
아 소송으로 당선! 멋지네요!~~~~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물감 2021-11-07 18:5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초딩님ㅎㅎ

러블리땡 2021-11-07 22:27   좋아요 2 | URL
물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물감 2021-11-07 22:37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당선이라 그런지 기분 좋네요ㅎㅎ 부족한 글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럽땡님🙂

다락방 2021-11-09 14:05   좋아요 3 | URL
저 물감님 리뷰 읽고 필립 로스 네메시스 읽고 너무 좋았는데 어쩐지 이 책도 물감님은 별 셋 주셨지만 저는 읽고 넘나 좋아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입니다..

물감 2021-11-09 16:58   좋아요 1 | URL
제가 별점 짠돌이라 그렇지, 재미는 있었어요. 가독성도 나쁘지 않았고요. 특히 해석하는 맛이 아주그만입니다🌝
 
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모 연예인이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뉴스 기사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어떤 피해자들은 이제라도 진심 어린 사과를 받으면 가해자를 용서해줄 모양이던데, 나는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트라우마가 피해자의 인생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가해자들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트라우마 극복을 하기 위해 가해자를 용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근데 사실 학교폭력보다 심각한 것이 가정폭력이다. 학대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은 단지 보호자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충성해야만 한다. 그 아이들은 훗날 성인이 되고도 공포에 발목 잡혀서 평생을 살아간다. 이 책은 그런 어른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똥꼬발랄한 겉표지에 속지들 마시라. 단맛 1%와 쓴맛 99%의 카카오 초콜릿 같은 작품이시다.


멀쩡한 집 놔두고 자동차 트렁크에서 주무시는 인간들을 트렁커라고 부른다. 낮에는 멀쩡하게 있다가 잘 때만 트렁크에 들어간다. 트렁커가 된 배경과 사연들은 다 고만고만하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두려움에서 도망치다 찾아낸 장소가 트렁크였던 것이다. 그 공간은 피난처이자 안식처였고, 세상과 단절되어 철저히 혼자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세상에 상처 입은 트렁커 두 남녀가 만났다. 둘은 보드게임을 하며 친해지고, 벌칙으로 과거를 얘기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담담히 고백하는 남자와 달리 솔직하지 못했던 여자는 제 과거를 지어내거나 바꿔서 말해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자의 기억들은 흩어지고 자아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보드게임을 통해서 현재와 과거의 시점이 자연스럽게 교차되나 공백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눈은 과거를 보고 있어도 머리는 지금의 모습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사연들이 두 사람을 트렁커로 만들었겠구나 하는 짐작과 동시에 트라우마에서 해방되는 힌트가 과거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준다. 과거 시점으로 점프하는 플롯을 썩 좋아하지 않는데 이 작품은 끊김 없이 푹 빠져서 읽었다. 이 작가님도 내 스타일이심.


남자답지 못하단 이유로 부친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온 남자는, 자신이 겪었던 그대로 부친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줄 계획이다. 반면 그의 옛이야기를 듣던 여자는 뒤죽박죽된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한 노파에게 길리운 고아들 중 하나였던 여자는 그 사육장에서 더럽고 추잡한 일들을 보고 겪으며 살았다. 이 과정에서 자아가 분열되었고 그래서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온통 나쁜 기억들 뿐이니 이대로 다 잊고 살면 좋으련만,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이 속을 뒤집어대니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었고, 그들만의 안식처도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남자는 기울어진 건물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하고, 여자는 유모차를 판매하는 베테랑 직원이다. 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볼 때 상당히 아이러니한 그림이다. 남자의 가족들은 부친의 폭력을 보고도 모른척했다. 그야말로 균형이 깨진 집안에서 자란 남자는 세상 어디에도 균형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여자 또한 부모에게 버림받고 동네 똥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생명에 대한 가치를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얼마든지 삐뚤어질만한 삶을 걸어왔지만 이들은 타인의 안전을 책임지는 직업을 삼았다. 어쩌다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는 설명이 없었지만, 내 눈엔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트라우마에 대항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트렁크는 여전히 그들의 성소였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세상과 소통할 날을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두 사람 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다. 폭력은 욕하고 때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아픈 기억을 들춰내는 것 또한 폭력이다. 그렇기에 언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를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는 건 평생을 폭력에 시달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트렁커들끼리도 마냥 솔직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 보는 내내 가슴 아프게 했다. 그래도 자신을 알아주는 누군가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을 조금씩이나마 통제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피해자들이 언제까지고 그런 아픔 속에 지내서는 아니 될 일이다. 다들 좋은 사람 만나 아픔에서 해방되어 건강한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산이 울렸다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읽은 할레드 호세이니의 작품이다. 아프간인의 비탄과 절규를 노래하는 작가만의 먹먹한 감성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호세이니의 글은 가슴 깊숙이 후벼파서 늘 읽기가 힘들다. 그래서 재독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읽고 있으면 인물들의 아픔이 내 것처럼 느껴져 숨이 막혀온다. 이 책은 연작소설이라서 전작들보다 더 많은 아픔을 다루고 있다. 가족과의 이별, 빼앗긴 고향 땅, 전쟁과 죽음, 버려진 생명 등. 온갖 ‘부재‘로 인해 생긴 아픔들을 총망라해서 보여주는, 반드시 독자를 울려보겠다고 작정한 듯한 작품이었다.


여러 중단편들을 엮어놓은 거라 요약은 생략한다. 어린 남매의 생이별로 시작하여 먼 훗날의 재회로 끝이 나지만 그들과 연관된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있다. 그 많은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핵심 내용은 누군가의 부재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이들의 상실감. 또는 멀리 떠나와 뿌리를 잃어버린 이들의 공허함. 이것들을 무엇으로 달랠 수가 있을까.


아무래도 부모와 자식에 대한 내용이 많다. 자식에게 따듯한 부모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부모도 있다. 반대로 자식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부재는 곧 불화를 낳는다. 오해는 서로를 멀어지게 만들었고, 시기는 상대방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자신의 삶을 인정받기 위해 가족에게서 해방되었지만 마음 한 켠은 여전히 괴롭고 불편했던 사람들. 왜 있을 때 더 사랑해주지 못했을까. 왜 항상 지나고서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걸까.


그립고 보고픈 이를 마음으로 외치면 그것이 산을 울리고 메아리로 돌아온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존재가 산이라니.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사는 기분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현재 코로나로 전 세계인이 고립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경우에 따라선 혼자의 시간이 편한 것도 있겠으나, 자주 보던 사람들의 부재가 갈수록 우울하고 지치게 만든다. 이 책을 읽고 난 후로 그런 감정이 더 크게 자라난다. 어째 서평이라기보다 감상문이 돼버렸지만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하자. 아고고 힘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스트 라이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9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9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가마다 원픽 장르가 있을 텐데 내 경우는 스릴러소설이었다. 지금은 과거형이지만 그것만 미친 듯이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질리도록 보고 나니까 장르문학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에 공감해버렸다. 주인공의 직업도 한정돼있고, 기승전결도 비슷비슷하고, 범행 동기도 별게 없어서 어떤 감동, 감화를 기대할만한 장르는 못된다. 정크푸드만 먹으면 건강을 버리듯, 장르문학만 읽으면 정신건강에 해로우니 어쩌다 읽어주는 게 좋다. 이건 순수 내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둔다. 내 독서 패턴은 강약 중강약이라서 묵직한 작품 뒤에는 스릴러소설로 머리를 식혀주는데, 이런 식으로 슬럼프 없는 독서 생활을 꽤 오래 유지하고 있다. 여튼 기분전환을 위한 책도 나름 신중하게 골라야 하는데 그것마저 귀찮을 때는 이렇게 코넬리옹의 작품을 집어 든다. 


1편에서 해리 보슈의 나이가 무려 마흔이었다. 시리즈물의 주인공이 마흔으로 시작하다니 좀 그렇다 싶던 기억이 난다. 어느덧 그의 나이는 오십 줄에 들어섰다. 28년의 형사 생활을 끝으로 은퇴한 보슈. 이제는 조용히 지내도 되겠고만 지독한 직업병이 그를 가만두질 않는다. 남는 게 시간뿐인 그는 수년 전의 미제 사건을 해결하고자 한다. 아직까지도 발목이 붙잡혀있는 기분이라며 고뇌에 빠졌지만 이번 건 솔직히 그냥 몸이 근질근질한 걸로 밖에 안보인다. 


당시 사건은 이러했다. 한 영화제작사가 은행에서 거액의 현찰을 빌렸고, 촬영 현장에서 강도들이 나타나 총격전을 벌이며 현찰 가방을 들고 튀었다. 원래는 보슈의 담당 사건이었지만 다른 곳으로 넘겨졌고, 끝내 풀지 못한 채 여태껏 방치되어왔다. 그 사건이 있기 전, 성폭행을 당한 것처럼 연출된 영화사 직원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보슈는 두 사건이 연결돼있다고 직감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수사를 해야 하는 보슈. 돈의 행방을 쫓던 중 미제 사건을 담당했던 FBI 요원의 실종 소식을 듣게 되고, 그 사건이 테러리스트와 연관돼있다는 사실도 알아낸다. 이것은 똥밭에서 지뢰 밟은 남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


형사 소설의 주인공을 은퇴시키고도 멀쩡히 시리즈를 이어나가는 작가의 능력이 사기급이다. 이번 작품은 제 맘대로 사건을 수사하려는 은퇴 형사와, 사건에서 손 떼라고 협박하는 경찰국과 FBI의 기싸움이라고 보면 된다. 경찰국의 경고를 무시한 보슈는 FBI에게 붙잡혀서 혼쭐이 난다. 그러나 FBI의 약점을 가지고 그들을 휘어잡는 보슈. 경찰 배지는 반납했어도 여전히 그는 만렙이다. 캐릭터가 코요테에서 능구렁이로 바뀌긴 했지만.


이 시리즈의 액기스는 역시 주인공의 고독과 심연에 있다. 경찰에서 빠져나온 보슈가 드디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현역 시절의 자만심을 인정했고, 공권력이 없는 현재의 초라함을 뼈져리게 느꼈다. 또 누군가의 말대로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행동했던 보슈는, 이제서야 피해자의 관점으로 사건을 볼 수 있게 변했다. 나이를 먹더니 드디어 철이 든 걸까, 아니면 경찰을 관둔 뒤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걸까. 여튼 지날수록 인간미는 숙성되고, 방황은 점점 줄어드는 게 느껴진다. 물론 작가는 또 다른 고뇌를 보슈에게 선물할 예정이다. 히에로니머스 보슈란 이름은 곧 저주의 운명이니까. 마지막 장면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행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슈의 생애에서 가장 기쁘고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니었을지. 삶의 지표를 만났으니 은퇴하고도 열심히 사셔야겠군. 난 은퇴하면 흔들의자에서 느긋하게 독서와 커피를 즐길 겁니다. 내가 그때까지 과로사 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댓글(9) 먼댓글(0) 좋아요(5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1-09-26 12:24   좋아요 2 | URL
과로사하지마세요..

물감 2021-09-26 13:09   좋아요 1 | URL
제 글이 한 달이상 안올라오면 의심해주세요ㅋㅋㅋㅋ

다락방 2021-09-26 13:17   좋아요 2 | URL
그러지마요 ㅜㅜ

scott 2021-09-26 12:58   좋아요 2 | URL
물감님 과로사 하시면 안됨!

냥이들 집사!
건강 잘 챙기셔야함요 ฅ^•ﻌ•^ฅ

물감 2021-09-26 13:16   좋아요 2 | URL
ㅋㅋㅋ그래야죠, 스캇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ㅜㅜ

붕붕툐툐 2021-09-26 21:33   좋아요 3 | URL
물감님, 언제 한번 스릴러 소설 대추천 해주세요!!(과로사 걱정하는 분에게 넘 무리한 부탁이었나용?ㅎㅎ)

물감 2021-09-26 22:04   좋아요 0 | URL
ㅋㅋㅋ그래볼까요? 워낙 고수들이 많아서 자신없지만 준비해보겠습니다^^;

- 2021-10-25 17:24   좋아요 1 | URL
저는 스릴러 소설 다락방님 때문에 처음 읽어봤는데요… 인생 재미를 위해 좀 취미 붙여볼까 싶습니다ㅋㅋㅋ 해리보슈가 시리즈가 9까지 나온 것이라면 9까지 누군가는 다 읽어왔다는 뜻일테니 눈에 담아둬야것어요 ㅎㅎㅎ 물감님 페이퍼는 정말 제가 안읽어온(?) 장르의 책들로 가득해서 새로운 독서세계를 열어주십니다 ㅋㅋㅋ 쭉 잘읽었습니다!!

물감 2021-10-25 18:19   좋아요 1 | URL
의도치 않게 영업에 성공했군요ㅋㅋㅋ알라딘 분들은 장르소설을 잘 안읽으시더라고요...잘 만든 스릴러소설은 웬만한 스테디셀러보다 재밌답니다😀 기분전환은 스릴러소설이 쵝오에오!
 
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커트 보니것은 내가 가장 취약한 SF를 즐겨 쓰는 작가이다. 그런고로 이번 책은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한다.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저자가 쓴 전쟁 소설인데 솔직히 전쟁 테마의 작품들은 커다란 틀 안에서 스토리만 살짝씩 다를 뿐이라 대단한 감동을 입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제는 다 알려진 역사를 이 사람은 어떻게 각색했을지가 궁금할 따름. <제5도살장>은 전쟁소설이면서 참혹함이 느껴지지 않는 특이 케이스다. 불규칙하게 과거와 미래를 이동하는데다, 시공간을 벗어난 사차원의 배경까지 다루며, 나사가 몇 군데 빠진듯한 문체를 써서 결코 읽기가 쉽지 않다. 전쟁 영화나 책들이 끝없는 전쟁을 부추긴다는 말에,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글을 쓰다 보니 이런 정신 사나운 작품이 탄생한 게 아닌가 한다. 여튼 읽노라면 전쟁은커녕 전의를 상실케 하므로 반전 소설답다고 하겠다. 


워낙 시점이 뒤죽박죽이고 별별 내용이 다 나오지만 생각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대학을 다니다 군인으로 차출된 주인공은 전쟁터에서 독일군에 잡혀간다. 이후 독일 드레스덴의 수용소에서 머물던 중 폭격이 쏟아진다. 운 좋게 생존해서 어찌어찌 잘 살다가 훗날에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이야기에 두서가 없는 것은 아마도 트라우마 설정 때문일 듯. 그는 작중에서 외계인들에게 잡혀간 뒤로부터 인생의 어느 시점들을 랜덤으로 시간여행한다. 결혼 직후로 갔다가 대학시절로 오고, 수용소에 있다가 전쟁터로 오는 등. 그렇게 한 개인의 길고 긴 삶을 순환하며 소개해준다. 나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구성을 좋아하지 않아서 대체 언제 끝나나 하면서 읽었다. 후딱 끝내고 얼른 작품 해설이나 읽고 싶었다. 근데 해설도 딱히 볼 건 없었다. 뭐 그런 거지.


평소 보니것의 글은 풍자와 유머로 유명하단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도 유머 코드가 곳곳에 튀어나온다. 저자는 무수히 많은 죽음 앞에서 연민으로 화답하지 않았다. 배고프면 냉장고 문을 여는 것처럼 죽음이 다 그런 거라며 자연스럽게 넘긴다. 살육과 사망이 난무하는 전쟁소설에서 유머라니, 쪼까 대단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고. 지금은 몰라도 출간 당시에는 욕 꽤나 먹었을 거 같은디.


살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된 주인공. 시간순의 작품이 아니므로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쟁이 터지고 나서가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듯하다. 시공간을 수차례 이동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바꿔볼 법도 한데 어떤 시도조차 안 했다는 것은 그런 거다. 정해진 결말대로 흘러간다는 인생의 진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가 외계인에게 잡혀갔을 때 왜 하필 자신이냐고 묻자, 외계인은 호박 안에 갇힌 벌처럼 아무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모든 건 그저 일어난 상황이고 그 순간 그 자리에 내가 있었을 뿐. 따라서 죽으면 죽은 거고 살았으면 그저 생존한 것이니, 생존의 의지가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다는 뜻일 터. 역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분들의 세계관은 범접할 수가 없다. 난 그냥 모르고 살란다.


이 작품의 핵심과 의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타 전쟁소설과 다를 바 없는 대답만 나올 것 같다. 심지어 읽기도 어려운 방식을 택했으니 전쟁의 교훈을 말하려는 건 아닐 테다. 단순히 반 전쟁과 반 영웅주의를 주장함에도 어딘가 알 수 없는 시시함이 있다. 가해자의 국가란 이유로 죄 없는 독일 시민을 몰살한 비인간적인 행위도 그 당시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암튼 이 작품의 참 목적을 알고 싶어 많은 리뷰를 읽다가 딱 꽂힌 평을 발견했다. 서두에서는 이 내용들이 실제 일어났다지만 외계인이나 시간여행에 대한 내용은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진짜 말도 안 되는 건 왜 치러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인생도 하나의 전쟁이고, 그것 또한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다. 내가 개미로 살든 베짱이로 살든 정해진 결말대로 가고 있는 중이라면 좀 허무할 것 같다. 하긴 인생의 허무함은 우리 집 고영희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뭐. 아무튼 전쟁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SF는 더더욱 아니올시다. 커트 보니것을 다시 볼 날이 올지는 잘 모르겄읍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5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종 2021-09-23 00:47   좋아요 1 | URL
무심코 툭툭 내뱉는 듯한 촌철살인의 문장들에 매번 유쾌합니다.ㅎㅎ ‘이런 정신 사나운 작품, 전쟁은커녕 전의를 상실케 하므로 반전소설답다.‘ 같은 문장들이요. 이 책을 읽고 나니까 공감이 확 되거든요.ㅎㅎ
객관적인 내용만 보면 무척 끔찍한 사건인데 물감님 말씀대로 ‘전쟁소설이면서 참혹함이 느껴지지 않는 특이 케이스‘였어요. 비현실적인 외계인의 등장과 시간을 넘나드는 구성 때문인 것 같기도 하구요.

‘근데 해설도 딱히 볼 건 없었다. 뭐 그런 거지.‘ 이런 문장 센스는 대체 어느 순간에 튀어나오는 건가요. ㅋㅋㅋ ‘뭐 그런 거지‘가 이 문장 뒤에 붙을 줄 몰랐습니다~ㅎㅎ

풍자는 감이 오는데 유머는 공감하기가 어렵더군요. 물감님은 어떠셨는지요?^^

전쟁처럼 생사가 갈리는 사건을 문장만으로 접한 사람으로서는 직접 겪은 사람의 감성을 따라가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공감 능력이 발달한 사람이라도 전쟁의 테두리 안에 갇혀있던 사람의 심리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겠구나 싶었어요.

전쟁만큼 가치관의 차이나 인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수많은 생명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죠.
저도 전쟁은 제 취향이 아니구요, SF는 스펙터클한 로맨틱이 가미된다면 가끔은 제 취향이 되기도 합니다. 파워 오브 러브~ㅎㅎ 커트 보니것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여기서 그만 커트시킵시다!!ㅎ

물감 2021-09-23 19:19   좋아요 1 | URL
진지해질만 하면 ‘뭐 그런거지‘가 나오던데요 ㅋㅋㅋ 저한테는 그게 유머였어요. 좀 남발해서 나중에는 시큰둥해졌지만요 ㅋㅋ 그나마 재미없는 작품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다쳐본 사람만이 다친 사람을 이해하듯, 죽음이란 것도 마찬가지겠죠?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알고싶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싶지 않네요^^;

고전을 계속 읽다보니 전쟁, 종교, 철학 같은 다소 민감한 분야가 꽤 자주 나오는 것 같아요. 여튼 이 책으로 인해 전쟁 장면이 나올 때마다 지지배배뱃이 생각나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그래도 같이 읽고 리뷰를 나눈 덕분에 보니것이 막 싫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9월 마무리 잘하시고 10월에 다시 만나요!

나비종 2021-09-23 20:18   좋아요 1 | URL
지지배배뱃ㅋㅋㅋ
참! 4번째 단락에 누락된 ‘레‘ 알려드립니다~
벌, 노노!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