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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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미쳤다. 내가 지금 지구에서 사는 건지 태양에서 사는 건지 모르겠다. 당장 다음 주가 입추인데 이제서야 열대야라니. 갑자기 어항 속 구피들이 넘나 부럽더라. 니들은 땀이 뭔지도 모를 테니까. 이렇게 더울 때는 스릴러소설이 제격인데 왜 빌려온 건 죄다 어두컴컴한 사회소설뿐이지? 진짜 더위를 먹긴 먹었나 보다. 그래 곧 죽더라도 못다 쓴 리뷰는 남기고 죽어야겠음. 그나마 이 작품 배경이 겨울 왕국 러시아라서 시원하고 좋았는데 그냥 플라시보 효과겠지. 근데 재난 소설이라니 완전 의외였음. 느낌상 정유정의 ‘28‘과 영화 ‘설국열차‘를 섞은 듯한 분위기랄까. 대충 감이 오리라 믿겠다. 자 그럼 관자놀이에 나사 쪼이고 시작해볼란다.


세계는 지금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져서 줄줄이 사망하는 등 난리도 아니다. 도리 자매가 살고 있는 러시아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병으로 가족들이 죽었고 거처를 잃었으며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온 마을이 고통받았다. 안식처를 찾아 정처 없이 떠돌다 피난 중인 탑차에 얻어 탄 도리는 지나와 절친이 된다. 그러나 식량을 구하러 간 곳마다 강도들에게 습격을 받았고 생존자는 점점 줄어든다. 온 사방 천지에 죽음이 가득했고, 산 자들에게는 가족도 동료도 다 적이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마을마다 식량을 휩쓸고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가 노예를 삼았고, 도리와 지나 일행도 예외 없이 잡혀갔다. 탈출도 불가능하지만 도망친다 해도 갈 곳이 없다. 차라리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은 이 상황.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여 이들을 이토록 미궁에 몰아넣는가.


보다시피 엄청 무겁고 우울한 줄거리이다. 게다가 재난물의 뻔한 절차를 그대로 밟고 있다. 이런 장르의 결말은 대부분 정해져있는데 대체 어떤 기승전결을 보여줄건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 책은 ‘생존‘에 포커스가 맞춰져있지 않았다. 읽다 보면 그건 금방 눈치채는데, 그럼 진짜 포커스가 뭔지 봐도 봐도 모르겠다가 도리와 지나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작가의 퍼즐은 하나씩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잘 가다가 생뚱맞게 웬 동성애물인가 싶었는데 그 이후로도 쭉 등장인물들의 죽어있던 사랑 감정들이 눈을 뜬다. 결국 작가는 이 ‘사랑‘에다 포커스를 두었고, 진부할 수도 있는 이 소재 덕에 더 진부할 수 있었던 장르를 그럴싸하게 완성시켰다. 이야기와 메시지, 두 마리 치킨을 잡은 것이다. 


아무리 포커스가 생존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기본 베이스가 재난물인데 바이러스 원인도 없고, 탈출 장면도 없고, 구원도 희망도 없어 끝까지 진퇴양난이다. 어째 내용이 너무 건너뛴다 싶었는데 그게 다 의도된 거란다. 근데 그것과 상관없이 흐름은 어색함을 못 느꼈고, 작가가 강조하려던 것들은 누락된 것 없이 다 보여진 듯하다. 자, 그러면 대체 이 책의 사랑들은 뭐가 다른가. 비상사태에도 주연들은 각자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고 사랑을 찾는다. 눈앞에서 살인과 강간, 전쟁과 약탈이 일어나는데도, 그 가운데 피어나는 사랑으로 다 참고 이겨내고 있었다. 여기서 독자들은 나와 정반대 성향의 사람과, 나 아닌 다른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과, 내가 지켜줘야만 하는 사람과 하는 독특한 모양의 사랑을 보게 된다. 재미있는 건 이들의 사랑이 서로를 소유하는 일반적인 사랑이 아닌, 서로를 잘 모른 채 최소한의 관계로 맺어진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단순히 썸 아니냐 할 텐데 그거랑은 또 다르다. 여튼 이런 것도 사랑인가 싶은 것들도 이들에게는 강렬한 감정이 되었고, 그것이 죽고 사는 일보다도 더 귀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삶의 이유도 의미도 없는 이들에게 있어 사랑은 모든 질문의 해답이 되어주었다.


인류 멸망의 순간에도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을 작가는 강조한다. 남편에 대한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과거형 사랑의 류, 사랑의 감정에 눈을 뜬 현재진행형 사랑의 도리와 지나, 헤어진 지나와 재회를 소망하는 미래형 사랑의 건지, 그리고 곁에서 언니를 잠잠히 사랑하는 제자리걸음형 사랑의 미소. 죽음이 오늘내일하는 마당에 이 감정은 희미해지긴커녕 그 형태가 갈수록 뚜렷해졌다. 그래서 다들 처음에는 이 사치스러운 감정을 애써 외면하고 뿌리쳤다. 그러나 사랑은 내 마음대로 잘라낼 수가 없었고, 오히려 그것에 기대어 숨을 쉬고 서로를 지탱해주는 등, 이 형국에 그거라도 없었으면 어쩌나 싶을 만큼 사랑은 위대했다. 지금은 사랑이 죽고 시들은 세상이다. 비연애, 비결혼, 남녀 혐오 등등 사랑이 부재된 지 이미 오래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 같은 거 없어도 잘만 산다고 말한다. 그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생각은 없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사랑은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꼭 서로의 몸과 마음을 가져야만 사랑이 되는 게 아니므로.


지나는 똑같이 겪는 고난 속에서도 유독 다르게 행동했다.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화장품을 식료품보다 좋아했고, 조급하고 불안해하는 내색 없이 느긋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유지했다. 도리는 이런 재앙 속에도 웃을 수 있는 지나가 부러웠고 닮아보려고도 했으나 자신의 처지는 그럴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도리에게 있어 어린 동생은 살아남아야 할 이유이자 삶의 목표였고 버팀의 원동력이었는데, 겨우 사랑 감정에 흔들려 잠시나마 동생을 소홀히 했던 자신이 미웠고 지나도 미워했다. 분명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에 계속 노출되어온 사람들은 그 불행이 당연하단 듯이 여겨지고, 불행을 바라지 않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건 줄 안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불행은 두려움으로 이어져 나쁜 시나리오를 만들어내고 사소한 행동에도 벌벌 떨게 한다. 이윽고 부정정인 생각이 본인을 지배하여 ‘나‘라는 존재의 의미까지 부정해버린다. 이런 사람들의 심경을 압축한 대사가 있다. ‘하루하루 살아남는 게 기적이면서도 기적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 마지막까지도 기적은 없었다.


이성이 없는 좀비와 이성을 잃은 인간 중 뭐가 더 무서울까? 인간은 좀비에게 물리지 않고도 좀비처럼 포악해질 수 있었다. 바이러스보다 위험한 건 붕괴된 인간성이었다. 지나의 가족은 일원이 죽을 때마다 괜히 도리 자매를 원망해댔고 그녀들은 이유 없이 욕받이가 되었다. 지나 가족의 남자들은 돌아가면서 지나를 성폭행 했고, 지나의 아빠는 그걸 모르쇠 했다. 군인들은 마을을 약탈했고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 노예로 부려먹었으며, 모기 잡듯이 사람들을 죽였다. 어린이의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괴담으로 전 세계는 장기 매매에 혈안이 되어있다. 보다시피 어디에서도 인간다움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게 희망마저 기대할 수 없을 때 사람은 목숨을 버리거나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하긴 세상이 엉망진창인데 제정신이면 그것도 비정상이겠다. 학대와 폭력을 일삼던 자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던 자도, 짐승의 탈을 쓴 자도,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자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도 그것에 이유 따윈 없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눈 감고 영원한 겨울잠을 자는 게 나을 정도니까. 그래서 사랑의 작은 불씨는 그렇게나 따뜻하고 강렬했던 건가 보다.


왜 제목은 해가 뜨는 곳이 아니라 지는 곳인가. 해지는 곳은 금세 밤이 찾아올 것 같은 적막한 곳이 연상되는데, 반대로 이 작품은 해가 지는 그곳에 여름 같은 빛의 기운이 있는 곳을 뜻했다. 그럼 도리 자매가 가고자 했던 곳은 사랑이 깃든 곳을 의미한 게 아니었을까. 작가는 매듭짓지 않은 결말처럼 아무것도 정답을 내리지 않는다. 그래 뭐 독자에게 맡기는 건 좋은데 요즘 이런 작품이 너무 많은 듯. 난 그냥 전부 답을 알려줬으면 좋겠어. 더워서 그런지 요새 전두엽이 잘 안 돌아가거든. 여튼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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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08 10:43   좋아요 1 | URL
재난 서사의 엔딩은 작가에게 딜레머가
아닐까 싶습니다.

좀비보다 위험한 건 아작난 인간성이라
는 점에 대한 지적은 정말 멋졌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인간의 살을 먹겠다고
덤벼드는 좀비보다 나만 살겠다는 이기
가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물감 2019-08-08 11:0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어쩌면 뻔한 엔딩이 싫어서 똥싸다 만 결말을 택한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재난가운데 나는 과연 인간성을 잃지 않을수 있을지 장담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아이의 간 빼먹을 정도는 안되겠지만요. 인간의 이기심이 좀비를 능가함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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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었던 2015년 당시, 네이버 파워블로거 중에 ‘까칠한 비토씨‘라는 닉네임의 서평가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독서광들은 누구나 아는 유명인이었다. 나 또한 비토씨의 리뷰를 열심히도 읽었었는데, 그의 엄청난 글빨과 날카로운 분석력과 닉네임답게 까칠함으로 무장된 비평은 정말이지 완벽한 내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비토씨의 스타일은 어느새 나의 롤모델이 되었고 그 느낌을 담아서 수차례 리뷰를 써온 결과 몇몇 이웃들에게 비토씨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의 희열은 진짜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리뷰로 글쓰기를 공부하던 차에 비토씨는 이 책을 써내고서 작가로 등단했고 블로그는 문을 닫았다. 그건 마치 맨날 가던 야동 사이트가 갑자기 막혔을 때 오는 충격과 견줄 정도였다. 여하튼 비토씨의 광팬인 내가 이 책이 나온 지 2년도 더 된 지금에야 읽은 것은, 적어도 쪼렙일때 리뷰를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레벨이 어디쯤인진 모르지만 때만 기다리다가 영영 못 읽을까 봐 그냥 읽기로 했다. 그럼 이제 작가 도선우가 아닌 블로거 비토씨를 생각하며 리뷰를 써본다.


보육원 출신의 장태주는 불행이란 불행을 전부 짊어지고서 이 험한 세상 꾸역꾸역 살아간다. 이 왕따 소년은 자신이 돌보던 새를 죽인 동급생을 혼내주면서 잠재돼있던 전투능력이 각성하였고, 그 힘은 왕따에서 문제아라는 타이틀로 바꿔주었다. 이후 선도부에게 잘못 걸려 들어간 소년원에서 만난 담당 선생의 권유로 권투를 배우게 되었고, 타고난 재능과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으로 그 실력은 어느새 국가대표를 넘어 프로 선수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그는 동양인 최초로 세계 챔프까지 되었지만 소중한 것들을 잃은 공허함으로 결국 자신이 정해놓은 선을 넘고 만다. 그 많던 팬들은 하루아침에 적이 되어 그를 비난하였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군중을 보며 괴물이 되기로 결심한 주인공. 이제 그는 종점을 향하여 최후의 주먹을 뻗는다.


이야, 역시는 역시나였다. 스토리, 필력, 분위기, 속도감, 메시지 등등 완성도가 죽여준다. 과거 리뷰왕 비토씨께서 줄곧 강조하시던 게 바로 ‘페이소스‘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왕따 소년의 단순한 개과천선 이야기가 아닐 줄은 짐작했지만 이렇게나 심오했을 줄이야. 시작부터 끝까지 쌈질하는 내용은 맞는데 액션 장면은 한 3% 나올까 말까 한다. 줄거리만 보면 정통 액션물이지만 그쪽의 소재만 빌린 성장소설 겸 사회파 소설이었다. 거기에 연민, 슬픔, 고뇌 같은 페이소스를 유발하는 요소도 잔뜩 넣어서 진짜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조건은 다 갖추었는데 말야, 작품도 작가도 많이 안 알려진 게 참 아쉽다. 암튼 읽어보면 매우 와일드하고 묵직한 문체가 시종일관 유지되고 있는데 대충 작가가 어떤 캐릭터인지 감 오지 않는가? 느낌 그대로 도선우 작가는 헬스장 관장님 같은 그랜드 바디를 소유하고 있다. 블로그에서 본인이 싸움 잘한다고 했으니까 잘못 걸리면 큰일 난다. 아무튼 상남자 캐릭터라 글이 하드해 보이지만, 비토씨의 리뷰를 읽어본 분들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안다. 오랜만에 파워블로거 시절 비토씨가 새록새록 떠올라서 좋더군.


폭력에 노출된 한 아이를 마침내 괴물로 바꿔버린 배경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악‘이다. 태생부터 악한 자들과, 그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악에 눈을 뜬 자.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종이지만 사람들 눈에는 도긴개긴이었다. 후자가 전자를 응징해 정의를 구현한들, 후자도 그저 폭력을 휘두른 또 하나의 악일뿐이다. 스스로 정해둔 선을 넘은 사람만 잡는 주인공도 남들에게는 똑같은 일진이고 양아치였다. 악을 응징했다고 선이 되는게 아니었고, 선의 가면을 쓴 악은 더이상 악이 아니었다. 이렇게 세상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했고, 태주는 정의란 것에 회의가 든다. 힘의 유리함을 택한 소년의 양심은 점점 사라지고 못된 친구들을 마땅히 응징하는 단계를 넘어서 끝내 선에도 발 한 짝, 악에도 발 한 짝씩 담그고 살아간다. 왜 세상은 태주에게 생존의 선택지를 악인이 되는 것 하나밖에 주지 않았는가. 모두가 나를 괴물이라고 부른다면 까짓거 진짜 괴물이 되어주겠다던 소년의 외침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작가 인터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삥 뜯기던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피해자는 도망가고 어느새 자신은 시비를 건 가해자가 되어있었다고. 분명 사건은 일어났는데 피해자가 없으니 가해자도 없는 이런 상황. 이와 같은 정의의 부재, 정의의 이중성을 선도연합회한테서 볼 수 있다. 질서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학생들의 돈을 걷는 선도연합회는 학교폭력을 폭력으로 근절하고 있었다. 누구는 이 제도에 안정감을 느끼고, 누구는 회의감이 들었지만 이미 잡혀있는 질서에 반대해봤자 혼자만 튕겨나갈 뿐이다. 그래서 이 시스템은 자기가 피해자인 줄 모르는 학생들이 스스로 유지하는 꼴이었고, 여기에 가해자는 없는 실로 희한한 상황이었다. 정의가 있어야 할 곳에 부조리가 있었고 다들 그것이 정의라 여겼다. 권위 앞에서 정의는 묵살당했고 그러므로 냉혹한 현실은 더 이상 정의 추구가 불가능했다. 세상에 피해자를 걸러내기 위한 정의도 다 있는가? 과반수가 지지하면 틀린 답도 정답이 되는가? 대체 정의가 책임져야 할 범위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소년은 커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태주는 남들이 자신을 프레임에 가두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정의당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정의하였고, 만든 질서대로 묵묵히 달려나갔다. 시합을 이길수록 선수 장태주는 진짜가 되었지만, 인간 장태주는 점점 가짜로 드러나고 있었다. 남들이 정한 타이틀에 맞추다 보면 결국 본인을 잃어버리게 됨을 알고 있었으나 한번 폭주해버린 기관차는 멈출 수가 없었고 그런 태주를 사람들은 괴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태주가 생각하는 진짜 괴물은 불공정한 질서를 만들고 뒤에 앉아 씹고 뜯고 즐기는 자들이었다. 보육원 후원자들이 그러했고, 학교에 선도연합회가 그러했고, 권투연맹이 그러했다. 그들은 본인이 직접 한 게 아니니 일관 잘못 없다는 태도로 세상을 주름잡고 있었다. 그런 부류가 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썼건만 자신도 그런 불공정한 질서를 세운 똑같은 괴물이었다. 아이고, 태주야...


장태주는 작가의 삶이나 인생관이 아주 잘 반영된 캐릭터이다. 태주가 체고를 가지 않고 일반고에서 선수가 된 것은, 문학 쪽에 연줄 없는 작가가 노력으로 상을 타낸 것과 같다. 그리고 작가가 사업으로 쓰라린 고비를 겪고 재기한 것도 태주의 인생 굴곡 안에 그대로 담겨있으며, 수상하고도 남들에게 알리지 않은 작가의 성격 또한 챔피언이 되고도 과시하지 않는 주인공과 닮아있다. 하여간 대단한 사람이다. 비록 리뷰와 작품의 글 스타일이 많이 달랐지만 나의 롤모델을 만나서 너무 즐거웠다. 지금의 내 글들은 이 분에게 받은 영향이 8할쯤 된다. 그 옛날, 많은 글쟁이들이 하루키의 문체를 닮으려 했듯이 나는 비토씨를 닮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여하튼 선우 행님, 제가 이렇게나 행님 빠돌이입니다. 행여 이 글을 보신다면 쓴소리든 잡소리든 뭐든 댓글 하나만 달아주셔요. 솔직히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ㅎㅎㅎ 언젠간 저도 행님처럼 리뷰왕이 될 거니까 기다려주이소. 아, 그리고 늦었지만 상 탄 거 축하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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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8-16 11:32   좋아요 1 | URL
롤모델이 있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이죠.
물감 님은 꾸준하게 열심히 쓰고 계시기 때문에 언젠가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이미 좋은 글을 쓰고 계십니다. 조지 오웰도 서평을 많이 썼죠. ‘어느 서평가의 고백‘이라는
에세이를 쓴 적도 있어요. 아마 <나는 왜 쓰는가>에서 제가 봤을 듯합니다.

꾸준히 그리고 절실히,를 이길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파이팅!!! 응원하겠습니다.

물감 2019-08-16 13:59   좋아요 0 | URL
응원 감사합니다! 꾸준함과 절실함... 그렇군요. 어디에나 중요하지만 글쟁이에게는 절대 필요 조건이에요.. 분발해야겠습니다^^
말씀하신 조지 오웰의 책도 언젠가 찾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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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싫다는 사람들도 이름은 들어봤다는 그 유명한 개츠비를 드디어 읽었다. 계속 고전 읽기를 시도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나에게 부담스러운 분야이다. 그래서 이렇게 독서모임을 만들고 의무적으로라도 읽게 해야 손이 간다. 안 그러면 평생을 다 바쳐도 못 읽을 책들 때문에 자꾸만 뒤로 밀려날 테니. 이 책은 그 자체로도 그렇지만 김영하 작가가 번역한 것 때문에 더 유명하다. 어떤 포스팅에서 각 출판사별로 이 책의 번역 스타일을 비교 분석한 걸 봤었는데 그중 김영하 작가의 번역이 가장 간결하고 깔끔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번역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고, 지금의 한국 문화와 시대를 고려하여 탄생한 문학동네 버전의 개츠비는 확실히 부담 없긴 하더라. 하지만 이렇게 더운 시기에 집은 건 잘못된 선택이었어. 털썩.


과거 군인시절 개츠비는 데이지와 짧은 사랑을 했지만 가난과 신분 격차의 이유로 이별하였다. 이후 군대를 전역하고 엄청난 부를 거머쥔 그는 궁궐 같은 자신의 저택에서 날마다 파티를 열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놔두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연락이 끊긴 옛사랑이 자신의 소식을 듣고 집을 방문해주길 바란 것이었다. 그는 옆집 남자가 데이지와 친분이 있음을 알고, 그 남자를 통해 데이지와 재회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남편도 있고 자녀도 있었지만 개츠비는 상관치 않고 적극 대시했다. 그녀의 어중간한 태도를 보고도 오래오래 간직해온 자신만의 환상에 갇혀서 오지게 북 치고 장구치는 개츠비. 힘을 내요, 슈퍼 파워.


고전 문학은 접근하는 방식이 따로 있는 걸까? 내용도, 주제 파악도 어렵고 뭣보다 몰입이 너무 안된다. 그래도 다른 책들은 뭐를 고민해야 할지가 나름 보이는데 이 책은 그런 것도 안 보여서 더 힘들었다. 이 짧은 분량을 간신히 소화하는 동안 뒤쪽의 작가 해설이 얼마나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번역자인 김영하 작가는 가난했던 개츠비가 부자 되어 화려한 인생을 얻은 것이, 1차 세계대전 후 급 성장해 강대국이 된 미국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이 신흥 국가 미국을 경멸했던 것을, 올드 머니인 데이지 부부가 뉴 머니인 개츠비를 경멸했다는 내용으로 해석했다. 미국에서 이 책을 걸작이라 부르는 건 수많은 멸시 가운데 부흥을 일궈낸 미국을 표상해서라는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역시 김영하는 해설도 재밌게 잘 씀.


개츠비는 어떤 작자인가? 일반 사람들은 한없이 부러워하거나 루머를 퍼뜨려 시기 질투를 했다. 나름 가까운 사람들도 그와 마음을 깊게 섞지는 못했는데 그게 다 개츠비 머릿속에 데이지 생각으로 꽉 차있었기 때문이다. 데이지 일 외에는 진정성을 가지지 않았고, 그것에 실망한 사람들은 일제히 거리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장례식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개츠비를 ‘인간‘으로써 좋아해 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불쌍하다고 생각했다가 이 모든 게 뿌린 대로 거둔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개츠비에게서 어떠한 인간미도 느끼지 못했다. 개츠비 지인들도 나의 감정을 똑같이 느껴서 공적인 관계만 유지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개츠비의 위대함은 역사에 남을 업적을 세워서가 아니었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대상을 끝까지 사랑하고, 버림받으면서도 묵묵히 받아들인 데에서 붙은 수식이었다. 누가 봐도 데이지는 개츠비와 맞지 않을뿐더러 그녀가 사랑한 대상은 욕망을 채워줄 ‘무언가‘였다. 게다가 상류층 신분인 그녀는 자신을 ‘부양해줄‘ 남자를 원했다. 과거 개츠비는 그렇게 해줄 수도 없는 데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녀는 허전함을 사교계로 달래다가 완벽한 신분의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 사이 개츠비는 그녀에게 걸맞은 신분을 갖추어놨다. 그래서 재회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남편과 헤어지지 않는 그녀에게 상처를 받아버렸다. 알고 보니 데이지의 골키퍼는 남편이 아니라 속물근성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개츠비보다 그가 입은 비싼 셔츠만 보였고, 개츠비는 그런 속물을 열렬히도 선망했다. 그의 일방통행 사랑은 겉으론 순수해 보여도 속은 실체 없는 환상의 여인을 쫓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츠비의 위대함은 ‘대단하다‘와 ‘대~단하다‘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셈이다. 앞으로 개츠비는 촛불이 아름다워서 뛰어들은 불나방으로 기억 남을 듯하다. Rest In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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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ion 2019-07-30 00:58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건 열정 · 욕망 · 본능 같은 거라는 의미로 읽히네요. 열정 · 욕망 같은 건 인간만의 채색이 들어간 개념이랄 수 있겠죠. 그렇다면 결국 그건 생물적 본능에 뿌리가 닿아 있는 게 아닐까요? 개츠비의 허무한 사랑이 뼈아픈 감정으로 전이돼 다가오기도 합니다. 열정과 욕망을 불사를 수만 있다면 사랑이 허무하더라도 영원히 사랑하고 싶으니까요. ^^

물감 2019-07-30 07:17   좋아요 1 | URL
댓글 감사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갈구하는게 뚜렷한 작품이라 그 점에서는 확실히 인간미 있긴 하네요. 아무튼 남자들이 눈에 콩깍지가 끼면 이렇게 무섭습니다ㅎㅎ

나비종 2019-07-30 11:39   좋아요 1 | URL
네번째 단락에 의견을 첨가하자면, 장례식에 오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저는 인간 관계의 적나라한 속성을 보았습니다. 가리고 있던 살 다 발라내고 뼈다귀만 남은 생선도막 같은 거요.
간혹 가고 싶지 않은 장소에 어쩔 수 없이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가야 할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이라면 소설 속에서처럼 비정한 상황이 연출되겠다 싶어요.
저는 필요에 의해 개츠비의 부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의 뻔뻔함에 화가 났습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만나려하는 최종 목적으로 파티를 열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얼떨결에 파티를 즐길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뒷담화만 신나게 했을 뿐 개츠비에게 해준 것은 개뿔도 없었으니까요.

˝털썩, 오지게 북 치고 장구치는, 몰입이 너무 안된다, 골키퍼는 속물근성, 실체 없는 환상의 여인, 대~단하다, 촛불이 아름다워서 뛰어들은 불나방˝
격하게 공감한 7종 세트입니다~ㅎㅎ 역시 물감님의 리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즐거웠습니다.^^

물감 2019-07-30 13:05   좋아요 1 | URL
ㅎㅎㅎ이번에도 성공한 서로에게 축하를!! 생각해보니 남들이 개츠비를 인간으로서 좋아하지 않은건 그의 진정성 부족이 전부가 아니긴 했네요. 어느시대나 인간의 이중성은 존재하는데 그 가운데 중립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하겠어요.

재미는 없었지만 이렇게 서로 얻는게 있어 즐겁습니다ㅎㅎ
8월도 파이팅입니다^^

Gothgirl 2019-08-01 09:15   좋아요 1 | URL
개츠비의 사랑도 순수하지만은 않습니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목표지점의 깃대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신분상승을 이루었다는 마침표죠 그가 유일하게 실패한것, 없을때 갖고싶었던것 중 가지지 못한것, 그런데 그런 데이지를 얻을 방법으로 생각한것도 돈이죠 돈으로는 뭐든지 살수있고 어디까지든 올라갈수 있다고 생각하는 개츠비는 철저한 배금주의자고 그 주변에 모이는 이들도 당연히 그런 사람들이겠죠

저는 이 책을 좀 더 배금주의와 그 허무함, 가련함 쪽에 맞춰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물감 2019-08-01 09:33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해설에서도 개츠비가 사랑한 대상은 데이지가 아니었다고 나오더군요. 가난하여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을테니 돈으로 사랑을 극복하려고만 하는 것도 이해는 가네요. 그리고 다들 말씀하시는게 허무함이었어요. 등장인물 전체가 다 허무한 결과를 보여주었는데 독자로서 마음이 아팠다기보단 이젠 편히 쉬길 바랬어요.
왠지 개츠비가 작가와 겹쳐보여서요.

레삭매냐 2019-08-08 10:41   좋아요 1 | URL
개츠비는 어쩌면 데이지를 사랑한 게
아니라 데이지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했던 게 아닌지...

속물근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데드 엔드에 기다리고 있던 운명도
피할 수 없었을 것 같네요.

물감 2019-08-08 17:07   좋아요 1 | URL
역자해설에도 같은 말이 있었어요. 개츠비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했다는. 과연 데이지랑 잘됬다면 개츠비는 변치않는 사랑을 보여줄지 의문입니다.
 
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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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리즈는 분량도 길지 않은 데다 가독성도 좋아서 읽기가 좋다. 다만 머리 식힐 겸 읽을 용도라면 비추한다. 한 권 한 권이 하나같이 묵직한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요즘 같은 휴가철에 읽기엔 맞지 않을 듯하다. 물론 독서가 생활인 분들은 제외하고. 이번 책도 인간이란 무엇이며, 산다는 건 무엇인지 자꾸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제목만 봐도 가족에 관한 내용인데,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치고 멀쩡한 집안의 이야기가 없듯이 이번에도 그러하다. 가족 소설은 보통 남자들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폭력적인 가장, 사고 치는 아들 같은 집안의 문제적 남자들이 주된 내용인데 이 책에서는 남자들이 전부 부재중이다. 구성원이 여자들만 있는 상황과 배경 가운데, 어떤 고난이 와도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러면 작가가 말하는 딸과 엄마에 대해 들어보자.


요양원에서 봉사하는 엄마는 어려운 집안을 혼자 책임지느라 언제나 근심 걱정뿐이다. 다 쓰러져가는 2층 건물의 주인이지만 경제사정으로 방을 전세 놔야 할 판이다. 어느 날 시간 강사로 일하는 삼십 대 딸이 돈 문제로 엄마 집에 얹혀살게 된다. 문제는 딸이 7년이나 같이 살아온 여자를 데려온 것이다. 동성애자에다 제대로 된 벌이도 못하고 여자 애인까지 데려와서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딸이 점점 미워지는 엄마. 안 그래도 담당 환자의 치매 증상으로 머리 아픈데, 동성애 문제로 해고된 딸이 시위를 하다가 크게 다친다. 부당한 일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엄마와 끝까지 저항하는 딸. 물러날 생각이 없는 두 모녀는 끝까지 마음 문을 닫은 채로 지낼 것인가.


어후. 뭐부터 풀어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하다. 보면 볼수록 이 시리즈는 과제를 산더미같이 내주는 악덕 교수님 같다. 일단 리뷰를 자주 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중립을 지키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솔직히 딸보단 엄마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하나부터 열까지 딸이 다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마의 간섭이 과잉보호라는 생각은 안 든다. 혹여나 아들들은 절대 이해 못 할 거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말 그대로 나는 남자라서 딸들의 속 사정은 모릅니다만, 내 자식이 이 책의 딸처럼 동성애자에다 사서 고생하며 산다면 나 또한 억장이 무너질 것 같다. 엄마 눈에는 딸의 모든 것이 불만이었고 이해 안 되는 것 투성이었다. 남자를 만나도 부족할 시기에 여자랑 가족을 만들질 않나, 실컷 공부시켜줬건만 제대로 된 직장도 없이 불안정한 일을 하고, 사소한 문제도 크게 키워야만 속이 시원한 건지, 왜 그렇게 귀중한 시간들을 쓸데없는 일들로 낭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그 찬란한 시간들을 아까워하지 않는 딸이 너무나 야속했다.


딸은 성인이 된 후로 유학도 독립도 부모 동의 없이 홀라당 진행해버렸다. 그렇게 강단 있고 독립심 강한 애가 어째서 멀쩡하게 살려고 하지 않을까, 머리도 좋은 애가 왜 저렇게 이상한 길만을 고집할까. 책임도 본인에게 있고 바로잡을 사람도 본인뿐이라 생각하는 엄마와, 자신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엄마를 상종도 하기 싫은 딸. 그런 딸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자신도 싫고, 자식을 부정하게 만드는 딸도 미웠지만 딸과 함께 온 여자애가 더 미웠다. 나 대신 딸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그 애가, 나보다 딸을 더 잘 알고 이해한다는 그 애가 더 싫었다. 그래서 엄마는 딸에 대한 화를 그 애에게 표출했다. 그런 엄마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덤덤히 제 할 일을 하며 오히려 엄마를 챙겨주었던 딸의 애인. 설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신을 친딸보다 더 챙겨주는 그 애를 보며 엄마는 수용과 체념 사이에서 긴긴 방황을 한다. 딸은 엄마를 밀어내기만 했으나, 그 애는 딸 편이면서도 속상해하는 엄마를 이해해주었다. 고충을 털어놓을 곳도, 들어주는 이도 없는 엄마에게 있어 그 애는 어쩌면 유일한 구원이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딸 때문에 괴롭고 요양원에서는 담당 환자 때문에 괴롭다. 그럼에도 환자를 가족처럼 돌보는 엄마한테 예산이 부족하니 적당히 간호하라며 나무라는 병원. 일을 더 크게 키우느니, 침묵을 지키는 게 나은 걸까. 틀린 답도 다수가 맞다고 하면 정답이 되는 걸까. 병원 입장은 알겠지만 엄마는 감정 없는 기계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어르신을 상의도 없이 내쫓은 인간미 없는 병원에게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면서, 부당한 일에 참지 않았던 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딸은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외치는 반항 기질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자신이 믿고 정한 선택과 길이 부정당할 때 이기든 지든 맞서 싸울 뿐이었던 것이다. 매번 져주기만 하던 엄마가 부당함에 소리쳤을 때 그제야 비로소 딸을 알아가기 시작하고 기나긴 방황에서 탈출한다. 그리고 딸을 향하던 손가락질이 나에게 하던 것이었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정녕 엄마와 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을 의외로 쉽게 찾았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성향을 타고난 거였다. 그걸 눈치채고도 애써 외면하는 엄마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내가 낳은 자식이 나와 전혀 다른 성정을 가졌다는 게 불만이었을 것이다. 어째 엄마만 편 드는 거 같기도 한데, 내 아이가 부모를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면 당연히 속상하지 않을까. 아 물론 콩가루 집안에서 자라나 ‘난 절대 엄마 아빠처럼 안 살 거야‘하는 친구들은 예외다. 아무튼 이건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거나 그 사람을 바꿔줄 수 있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마치 사자가 풀 좀 씹는다고 초식동물이 될 수 없고, 곰이 수영 좀 한다고 수중동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 하고 싶어도 엄마니까 딸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거다. 딸이 7년이나 같이 산 애인을 진짜 가족이라 하니 엄마는 당연히 기가 차지. 그러나 자신이 매일매일 돌보는 환자가 병원을 떠났을 때 엄마는 간호인으로써가 아닌 가족으로써의 책임감을 느꼈고, 어르신을 집으로 모시면서 그 애의 말처럼 피를 나누지 않고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사람 간에 이해관계를 이렇게 풀어내다니, 이 책, 진짜 젊은 작가가 쓴 거 맞음? 인생의 산전수전을 겪지 않고서야 이런 내공은 도저히 불가능한데. 


자녀가 성인이 되고 독립까지 하면 부모의 도움은 점점 필요 없어진다. 요즘 세대는 그 시기가 더 빨리 찾아오고 마음만 먹으면 부모보다 더 잘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적어도 한두 가지쯤은 부모님보다 못한 상태로 나를 내버려 둔다. 예를 들면 아버지는 언제나 나보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으로, 어머니는 언제나 요리를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드린다. 부모로서 더 이상 자식에게 해줄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만큼 서운한 게 없을 것만 같아서. 인생의 반도 못 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무리 아껴 써도 낭비되는 게 시간이다. 20대의 시간은 20km로, 30대의 시간은 30km 속도로 간다더니 과연 그 말이 진짜더라. 아 갑자기 우울해지네. 이 책은 리뷰 쓰는 게 뭐 이리 힘드냐. 처음으로 글 쓰다 탈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독서로 생긴 갈증은 무엇으로 해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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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9-07-30 14:01   좋아요 1 | URL
‘평범한 가족, 평범한 일상‘이란 말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 평.범.이란 게 얼마나 안간힘을 써야 얻어질 수 있는 건지 종종 생각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평.범.이 정말 어려운 것 같거든요.

딸이 동성애자라면 막상 엄마의 입장에서 어떨지 지금으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평소 동성애를 바라보는 제 시각은 거부감이 없거든요. 여자로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인 거니까요. 사랑이 느껴지는 건 성별을 뛰어넘는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당한 일 앞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던 엄마가 지고 있었을 삶의 무게를 상상해보았습니다. 딸의 인생도 스스로 선택한 삶이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는 딸도, 그 딸의 모습을 속상해하는 엄마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딸의 애인은 그런 면에서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군요. 딸의 입장을 혹은 엄마의 입장에 더 공감이 갈 독자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독자의 시각을 대변하고 있으니까요.

얼마전 본 드라마 <검블유>에서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사람들이 그런 입장에 서면 포털이 정치적이 된다고 주인공을 말리니, 주인공이 말을 해요. ˝정의를 지키는 일에 정치적 입장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 말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거든요. 딸의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한 엄마의 상황을 보니 이 장면이 생각나네요.

˝사자가 풀 좀 씹는다고˝에서 빵터졌습니다.ㅎㅎ 대체 이런 표현은 어디서 나오시는 건지 감탄하면서요.

부모님에 대한 물감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부모로서 더 이상 자식에게 해줄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서운해하실 것이라는 부분이요. 그래서 저는 무척 기뻐하면서 일단 마구 마구 받습니다. 나중에 용돈을 더욱 듬뿍 드리면 되니까요. 결국 제가 드린 돈이 부모님을 거져 제게 다시 오는 것이지만, 그게 엄청난 차이이거든요.ㅎㅎ

50대의 시간은...음...아자!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독서로 생긴 갈증은 공감하는 댓글로 해소!ㅎㅎㅎ

물감 2019-07-30 14:42   좋아요 2 | URL
맞아요. 저도 어떤 리뷰에 썼는데요, 평범하다는게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축복인지 다들 잘 모릅니다. 이런 책을 읽으면 나는 정상 범위안에 속해있는지 되돌아보게 되더군요. 저는 동성애에 대한 생각은 깊게 해보질 않아서 잘 모르지만, 이 책의 엄마 입장에서 과몰입되다보니 썩 찬성하기가 어렵네요. 남이야 그러던지 말던지 하겠지만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보면... 음...

말씀하신 드라마 대사도 꽤 파격적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입장은 현실엔 없다는 생각에 암담하네요. 비록 실천은 못하더라도 자각은 할 수 있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하하하...

생각보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서먹한 분들이 많더라고요. 살다보면 점점 더 그렇게 되가구요. 아쉬운 맘에 쓴 글을 공감해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열정만 간직하시면 어떤 나이에도 청춘입니다! 덕분에 갈증해소 많이되었어요! 나비종님 짱 ㅎㅎㅎ
 
고스트라이터즈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김호연 작가의 책 도장 깨기도 벌써 세 권째다. 알면 알수록 이 사람은 진짜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소설은 역시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글쟁이들은 이 스토리텔링에 따라서 글만 잘 쓰는 작가가 되기도 하고, 글도 잘 쓰는 작가가 되기도 한다. 김호연은 명백한 후자에 속한다. (전자는 개인적으로 하루키 센세...) 이 책은 스토리도 좋았지만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이모저모가 소설의 형식을 빌려 디테일하게 소개되니 글쓰기로 돈 버실 분들은 참고해도 좋을 듯. 한때 잠깐이나마 소설을 내고 대박이 터져 영화계까지 진출하는 김칫국을 마셨던 적이 있었는데 후후후 내가 단단히 미쳤던 게지, 후후후 작가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난 그냥 이대로 파워 병맛 리뷰어로 사는 것에 만족하게쓰. 


주인공 김시영은 문학상까지 받고 등단한 작가지만 잘 풀리지 않아 유명 작가의 글을 대필해주며 생계를 유지하는 고스트 라이터다. 어느 날 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땐 한참 자숙 중인 여배우가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한 시나리오 대본을 써달라 했고 가난한 주인공은 자본주의 앞에 당당히 굴복한다. 본인의 고스트 라이팅으로 여배우의 삶이 바뀌는 것을 보고서 이 특수한 능력에 눈이 횟가닥 뒤집히려 할 때쯤 웬 조폭들에게 납치되는 비운의 주인공. 조직의 대빵은 그를 글 감옥에 가두고 자신을 위한 글을 쓰도록 협박한다. 이제야 대필 인생에서 좀 벗어나는가 했더니 어째서 운명의 신은 그를 내버려 두질 않는가. 과연 주인공은 배드엔딩을 피할 수 있을는지?


자신이 쓴 글대로 이루어진다? 어딘가 만화 ‘데스노트‘와 비슷한데, 이건 고스트가 쓴 대로 타인의 미래를 바꾸는 거라 스케일 차원에서 완전히 다르다. ‘파우스터‘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작가가 신의 영역을 넘보는 소재를 참 좋아하는 듯. 근데 또 잘 소화해내는 걸 보면 역시 시나리오 작가 출신 답다고나 할까. 작중에 말하길 유령작가는 푼돈에 창작력과 주체성을 파는 직업이라 정의했다. 그들은 글 쓰는 재능밖에 없어서 대필을 접고 다른 일을 구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한번 대리인간이 되면 이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본인 작품을 쓰고 대박이 터져야 고스트를 그만둘 텐데, 내 작품을 쓸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도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 당장 입에 풀칠하게 생겼는데 돈만 준다면 전업작가든 유령작가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누구나 궁핍해지면 돈 앞에 장사 없는 거다. 이렇게 작품이 허구성을 벗어나 현실적인 그림이 될 때 독자는 주인공의 직업을, 배경을,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망원동 브라더스‘에서도 그렇고 이번 작품에서도 주인공 직업이 작가이다. 아직 못 읽은 ‘연적‘도 주인공이 작가란다. 이렇게 주인공을 계속 작가로 내세우는 이유가 뭘까. 작가들이 이만큼 고달프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걸까. 예체능이 원래 1등밖에 모른다지만 그래도 운동선수는 경기장에서, 음악가는 무대에서 볼 수라도 있지,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은 작가를 평생 모를 테니 존재감 부분에서 너무 약하긴 하다. 여하튼 유명해지기 전까지 쭉 가난하고, 책을 쓰는 내내 쭉 가난한 직업이 작가이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유령작가로 전향하는 그들이 이해가 된다. 근데 힘들고 가난한 게 어디 작가뿐인가? sky 나와도 힘들고, 알바생도 힘들고, 백수도 힘들고, 우리 집 바둑이도 힘들어한다. 내가 나온 군부대가 제일 힘든 곳이 아니라 모든 군부대가 빡세니까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뭐.


무조건 쓰는 대로 삶을 바꾸는 능력이라. 소재만 다를 뿐 흔한 설정이라서 솔직히 식상하다고 느꼈다. 거기에다 전형적인 소년만화 스타일의 전개 방식이었다. 주인공이 특수한 능력에 기고만장하다가 적에게 된통 당하고 복수에 성공하는 스토리. 재미는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구멍 난 퍼즐 조각이 계속 맞춰지지 않아 아쉬웠다. 아마도 김호연 작가에게 기대치가 높아서 그랬던 것 같다. 소년만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거기서 거기인 소년만화가 대부분 재미있는 이유는 뭐 때문일까. 차별화된 세계관? 화려한 전투 씬? 캐릭터들의 간지? 이런 요소들은 사실 안구 정화해주는 쪽에 가깝고, 필수 요소는 동료나 세상을 구해내는 희생에서 오는 감동이 아닐까. 이 책의 주인공도 납치된 구여친을 구하기 위해 각성하였고 나름 훈훈한 엔딩을 맞는다. 또한 주인공이 지난 잘못 들을 반성하고 회개함으로 오랫동안 틀어졌던 관계를 회복하고, 오만했던 스스로를 뜯어고쳐서 바르게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끝이라면 굉장히 실망했을 텐데 다행히도 연장전이 있었고, 적당한 반전과 교훈과 감동으로 부실했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아무래도 남자 캐릭터들이 주로 스토리를 이끌어가다 보니 여자 캐릭터들은 비중이 약해 보이긴 하다. 초반부터 등장한 여배우도 그렇고, 같이 대필 작업했던 여자 동료도 그렇고, 거의 안 나오지만 계속 언급되던 구여친도 그렇고. 그런데 이 책의 진짜 액기스는 오히려 비중 없는 그녀들이었다. 남자들이 큰 사건들을 풀어나가는 역할이라면, 여자들은 주인공의 내면을 바꿔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여배우는 슬럼프에 빠져있던 주인공에게 의욕을 심어주었고, 여자 동료는 자신의 고스트가 돼주어 주인공이 본격적인 작품을 쓰게 만들었고, 구여친은 정신 못 차리던 주인공에게 확실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이러므로 사건은 사건대로 잘 해결되었고, 철없던 주인공이 성숙해져가는 과정도 흐름에 맞게 잘 표현되었다. 이런 자잘한 디테일들이 식상한 이야기를 식상하지 않게 해준다. 분명 글 잘 쓰는 작가는 많지만, ‘글이란 이렇게 쓰는 것이다‘를 보여주는 작가는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김호연은 국내에 몇 안되는 사기 캐릭터가 분명하다. 만약 내가 이 책의 고스트 라이터가 된다면, 이 작가가 1년에 한 권씩 책을 써내는 글을 쓸 것이다. 여하튼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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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9-07-15 10:18   좋아요 1 | URL
저도 요즘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소설이든 수필이든 시이든 ‘이야기‘가 핵심이라는 것을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해요. 사람들은 가만히 보면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거든요.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데 동시에 타인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이유는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은 게 아닐까 라고요.
소설쓰기... 접으신 건가요?^^

물감 2019-07-15 11:00   좋아요 1 | URL
역시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남다르신 나비종님이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저절로 배우는 것 같아요. 그래서 듣기보다 말하는걸 더 좋아하나봅니다ㅎㅎ
아 그리고 소설쓰는건요, 유명한 작품과 컨셉이 겹쳐서 결국 접었어요ㅠㅠ 나중에 좋은 소재가 생기면 다시 도전해봐야겠어요ㅎㅎㅎ

나비종 2019-07-16 00:01   좋아요 1 | URL
하아~ 인생은 타이밍이라더니! 조금만 빨랐어도 유명해지실뻔 하신 건가요? ‘컨셉이 겹쳐서‘에서 빵터졌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아름다운 뮤즈를 만나시길 바랄게요. 물감님, 화이팅!! 도전은 투비컨티뉴드..이신거죠?ㅎㅎ

물감 2019-07-16 08:44   좋아요 2 | URL
ㅎㅎㅎ전체가 겹친게 아니어서 유명해졌을거란 보장이 없네요^^ 그래도 진짜 나의 글을 쓴다는 기분을 느낄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좋은 뮤즈를 만나면 알려드릴게요ㅎㅎ그전까진 리뷰나 열심히 쓰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