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보경심 1
동화 지음, 전정은 옮김 / 파란썸(파란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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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은 기록된 역사자료를 고증하여 한 편의 역사드라마로 만들어지면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들 간의 갈등과 번민,우정과 사랑 등이 관객들의 시선을 모으기도 한다.얼마 전 중국에서 방영된 '뿌뿌징신'은 청나라 강희제 왕조를 중심으로 궁궐내에서 벌어지는 정치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자와 한 궁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맥틱한 이야기가 제법 볼 만했다.특히나 궁궐의 좁은 공간 안에서 왕자와 궁녀가 밀고 당기는 사랑 이야기는 작가 통화의 세심한 고찰과 탄탄한 스토리가 가미되어 가독성마저 안겨 주었다.

 

청태조 훙타이지의 동생인 강희제는 60여 년을 왕위에 재직한 장수형 황제이다.17세기 후반 무렵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청나라의 정치,문화,문물의 틀을 확고히 다지고 이웃 나라인 몽고와의 친선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인물이다.그에게는 열 명이 넘는 황자가 있다.그들은 호위하고 보살피고 시중을 드는 궁녀,시녀,태감만 해도 엄청난 숫자임에 틀림이 없다.황제의 정사와 기거가 그 유명한 자금성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니 기회가 닿으면 자금성을 가지 않고서는 안 될 것 같다.

 

주인공 장효(짱샤오)는 회사원으로서 퇴근 후 귀가 도중 교통사고를 당하고 깨어 나면서 그녀의 신분은 청조 강희제 시대로 타임스립을 한다.장효는 기마민족인 만주족 소녀 마이태약희로 변신을 하게 된다.강희제가 정실부인,후첩으로부터 낳은 황자들이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그중에 언니의 남편인 팔황자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는데 그녀는 미모보다는 활달하고 예의가 바르며 사귐성이 있다는 점에서 팔황자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다.팔황자는 약희의 언니를 강희제가 맺어주는 데로 엉겹결에 혼인을 했는지 모르지만 살아가면서 속궁합이 맞지 않은지 늘 속마음은 약희에게로 쏠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당시는 교통수단이 말이었기 때문에 드넓은 초원을 말을 타고 거닐기도 하고 황제에게 변방에 일이 있으면 약희는 뒤에서 시중을 들게 되는데 팔황자,십삼황자,십사황자,사황자(뒷날 옹정제)들로부터 추파를 받곤 한다.예를 들어 사황자는 몸에 관료적인 면이 배어서인지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는 고지식한 면이 있다.반면 팔황자와 십삼황자,십사황자는 그와 비교하면 매우 직접적으로 솔직한 표현을 내뱉곤 한다.그러나 약희는 팔황자의 추파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거들떠 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끌어 간다.

 

한 편 조정에서는 태자를 둘러싸고 황자들이 폐위되고 유폐되는 등 긴장감이 팽배하게 돌아간다.이황자 윤잉은 황자들 사이에서 알력다툼,골육상쟁의 희생자가 되었다.부모와 자식간에는 권력을 함부로 주고 받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강희제 시절은 사회가 안정되어 태평성세를 이어가지만 궁녀로 들어 온 약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특히 조정에서 세력이 커진 팔황자의 간절한 구애에도 약희는 화답을 미룬다.다만 강희제의 눈에 약희는 영약하면서도 처세를 잘하기에 황자 중에 누구를 그녀의 남편감으로 지목할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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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멍의 쾌활한 장자 읽기
왕멍 지음, 허유영 옮김 / 들녘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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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과 같이 스펙,스토리텔링에 신경을 써야 취업에 도움이 되는 예비사회인 및 생존과 먹고 살기에 급급한 시대에 중국 고대 철학사상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입신 출세주의와 명예,권력이 우선이고 존중받는 세태이다 보니 대부분이 무엇이 되고자 하는 문제에만 급급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나아가 서구 문물이 사회전반에 깊숙이 천착을 하고 첨단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고대 동양철학 등은 도외시하는 편이다.나 역시 현실적으로 가슴에 와닿지 않는 면이 있어서인지 이와 관련한 도서를 거의 읽지를 못했다.일종의 정신수양이 덜 되어서인지 사람과 세상,사물을 보는 안목도 좁기만 하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장자에 관한 지식은 일천하다.다만 이 글을 읽어 가면서 느끼는 점은 장자 2,000여 년 전에 쓴 <내편>과 그 제자들이 쓴 <외편>의 내용들이 오늘날 살아 가는 현대인의 생각과 사유를 뛰어 넘는 탁월한 식견과 통찰력이 담긴 내용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가 남긴 논리와 문장은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듯 아름답고 화려하다고 저자 왕멍은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장자가 말하는 근본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에 준하여 세상을 살아 가되 너무 지나치면 아니한 만도 못하다는 과유불급의 중용 정신도 내포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본래 유가의 사상인 인의예지,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비롯하여 노자의 자연과 일체하는 무위사상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장자의 논리이고 주장이다.인간의 본성은 착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데 사회환경이 인간을 교화시키고 욕망과 탐욕을 부추긴다는 것이다.도와 덕을 아무리 강조하고 계몽을 하더라도 당사자가 자신의 작은 이익을 탐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인의도덕은 사라지고 부도덕과 반도덕이 사회의 근간을 흔들게 될 것이다.나아가 대다수 국민들은 공직에 있는 이들이 이러한 부도덕하고 반도덕적인 행위를 일삼게 된다면 과연 위정자를 따르겠는가.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국민들 마음 속에는 인의도덕은 장롱 속에 집어 넣어야 하고 머리와 손에는 편법과 줄타기라는 수단.도구만이 있을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시대는 돈과 물질이 우선이다 보니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폐해가 매우 심각하다.겉으로는 사회정의 구현을 외치지만 비슷한 부류,계층끼리 어울려 그들만의 세상,집단,교조,이념을 만들어 간다.한 쪽은 돈과 물질,권력의 혜택을 톡톡이 받는 수혜자라면 한 쪽은 억울하고 분하지만 차별,경쟁,위선,음모,절도,왜곡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자신이 갖고 있는 내면의 착한 본성인 양심과 꼭 지켜야 할 도덕률도 차츰 떨어지면서 사회악은 점차 커져만 가는 것이다.

 

특히 장자는 인간의 눈에 보이는 물건만 훔칠 수 있는 것이 아닌 정신,이념,개념,부호,토템,칭호 그리고 나아가 도리와 가르침까지도 모두 훔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이러한 사상과 이념,이데올로기를 만든 이는 단연 성인이다.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답고 완벽에 가깝더라도 완전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이러한 약간의 틈을 악이용하여 민족 감정,민족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극단적인 민족주의,파시즘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역사는 증명해 주고 있다.

 

인상적인 부분은 이 글의 내용이 2천 년 전에 성인이나 권력자,이른바 주류 계층만이 도덕과 인의예지신,진선미를 논하고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도둑에게도 도둑 나름대로의 도와 인의,지혜와 용기가 있다는 것을 장자는 말해 주고 있다.그 대표적인 도둑이 조정의 부패에 맞서고 백성들의 편에 섰던 양산박이다.

 

장자는 인간의 현실적인 처세방법 등을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는 가운데 인간의 지혜아 과학기술이 자연계와 인류 사회에 재앙을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그런데 유가사상에 깊이 젖어 있는 중국인들의 문화습성 및 성향상 과학경시 풍조를 낳고 이는 중국문명의 후퇴를 가져 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며,한국도 중국의 유가사상,성리학 사상 등이 개화,문명발전을 더디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아닌가 생각한다.

 

장자는 자신의 몸과 명예,존엄을 지키려면 위기가 닥쳤을 때 몸을 숨길 수 있는 피난처가 있어야 하고 시비와 무의미한 논쟁,추악한 싸움에서 발을 빼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화를 자초하지 않는다고 한다.그리고 염담무위(恬淡無爲) 즉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는 무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이것은 일의 리듬을 조절하고 보충하는 역할을 할 수 있고,휴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예측 불가능한 재앙을 미리 예방할 수 있게 해주며,나아감과 물러남,공격과 방어를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게 해주기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도덕과 윤리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 이득과 너무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면 일반인들의 뇌리와 시선은 이 문제에 대해 흐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다만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도덕과 윤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장자의 내편과 외편 중에 오늘날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다양한 요소,문제,상황과 잘 접목시키고 해박하게 해설해 주고 있는 왕멍저자의 풍부한 식견은 대학자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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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후예 3 - 지리산 뱀사골
박찬두 지음 / 작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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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후예 2권에 이어 장군의 후예 3권은 황의지의 빨치산 운동 중에서 회문산 퇴각에서 시작된다.국군에 의해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위기를 모면하려 탈출을 시도하기도 한다.당시 금산,완주,진안당부에서 대원을 보강받고 활동지역은 주로 운장산,덕유산,장안산,성수로 일대로 정한다.한편 그는 사단장으로서 소련 볼셰비키 혁명당사와 사회발전사를 강의하면서 동족끼리 왜 피를 흘리면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해 강의를 한다.이러한 강의를 통해 의식적인 혁명투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인다.

 

황의지가 거느렸던 조직은 도당부를 비롯하여 인민위원회.농맹.여맹.직맹,신문사.연예대.통신대.당학교.후방부요원 등이 있다.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에서 넘어온 북한 인민군 일부도 빨치산에 합류를 하면서 민족민주 통일독립을 위해 국군,경찰과 대치하고 싸워 나간다.그런데 같은 빨치산 동지이라든지 우호적인 사람일지라도 방심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이들이 일종의 밀고자 일수도 있고 배신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사람들로 인해 온갖 고초와 희생을 치뤄야 했기 때문이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에 나라를 팔아 먹은 5적들과 해방을 맞이하면서 친미를 등에 업은 친일세력들은 오늘날까지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점에 비춰어 본다면 빨치산의 숭고한 뜻은 잊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그들이 조국의 통일독립과 전체 인민의 참다운 해방을 원했지만 이승만정권은 모두 불순분자,공산주의자,빨갱이로 모두 하나로 치부하여 처단하려 했던 것이다.빨치산 운동을 했든 안했든 해방 직후부터 1955년경에 이르기까지 군경에 의해 희생된 양민의 수는 셀 수도 없다.반면 빨치산 유격대들을 처단하고 몰아냈던 이들에게는 혁혁한 공을 내세워 기념탑까지 세우는 등 이승만정권을 찬동한 세력끼리의 잔치만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불공정하고 불균형적인 처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아가 황의지는 빨치산 유격대에서 혼란스러운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사찰 유격대를 지원하면서 재생의 길을 걷고 전북 고위자로부터 공로상도 수상하게 된다.그러나 전두환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황의지는 빨치산 유격대 전력으로 인해 '삼청교육대'에 끌려 가게 되면서 육신은 반병신이 되어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빨치산(Partisan) 유격대가 갖고 있는 취지는 매우 건설적이고 이상적이었지만 실질적인 정권을 쥔 자들에겐 눈에 가시이고 정권유지에 방해가 되었던 것이었기에 어쩌면 군경과 유격대가 싸우는 모양은 중과부적이었을 수도 있다.그들이 흘린 피가 언제가는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기를 나 또한 간절히 기원한다.

 

지금도 선거철만 되면 일부 세력들은 진보세력에 대해 빨갱이,좌빨 등의 용어를 서슴치 않는다.이념과 사상이 사라진 오늘날 교육수준,의식수준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들로 몽매한 유권자들을 현혹하고 이간질하려 든다.그들의 의식은 늘 갖은 자,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자에 빌붙어 살아 오고 있는 비양심적이고 비민족적인 사람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짙다.일제강점기로부터 권력의 그늘에 힘겹게 살아와야 했던 세력들이 주체적으로 통일독립을 원해 유격대를 조직하고 활동했던 그 뜻만은 제대로 인식하고 공감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이념과 사상의 대립보다는 타자의 사상과 이념을 포용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려는 자세와 태도가 한국사회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황의지 가문에 황진장군,황희정승,황현의사가 있어 황의지는 고매한 인품과 나라를 위하는 우국충정이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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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후예 2 - 강제징병과 빨치산 사단장
박찬두 지음 / 작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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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장군의 13대 후손 황의지는 장군의 후예로서 그를 직계조상이라는 점을 커다란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된다.그는 1923년 순창 주월리생으로서 일제강점기에는 조부로부터 엄격한 예의범절,인격 함양 등을 체득하게 된다.당시 황국신민화 정책에 의해 조선어가 말살되고 일본어를 강제 학습해야 하는 상황에서 황의지는 일본어교육을 받지 않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게 된다.조선의 정신과 혼을 잃지 않으려는 자세와 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장군의 후예 1권이 황진장군의 족적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고 하면 장군의 후예 2권에서는 황의지가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세세하게 소개하고 있다.일제가 조선인을 2류민으로 취급하여 인적,물적으로 맘대로 부리고 맘대로 빼앗아 가는 전횡이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다.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일본의 잔학상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특히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한반도를 비롯하여 중국,남양군도까지 먹어 삼키려는 야욕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을 비롯하여 대만의 청년들은 강제징용화하게 되며 젊은 여성들마저 위안부로 그들의 목마른 성욕을 채우려 했던 것이다.

 

황의지는 어쩔 수 없이 일본 만주 관동군에 징용되고 만주,남경 다시 만주 등지를 거치게 된다.그의 복장이 일본군 복장이어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 탄광으로 끌려 가게 되고 그곳에서 강제노역이라는 인간이하의 수모와 고통을 겪게 된다.그리고 조선이 해방을 맞이하게 되면서 그는 진정으로 자유를 만끽하는가 싶었지만 3년 간 소련군에 의해 포로 생활을 하게 된다.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국을 하게 되지만 그를 비롯한 포로 출신은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경찰서 및 사복경찰에 의해 감시와 구타,폭행이 이어지게 된다.해방직후 남한은 미군이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잠정 통치하는 상황이고 북한은 소련이 통치하는 상황이라 이념과 사상의 대립이 매우 심했던 시절이었다.

 

또한 미국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잡으려 하는 이승만세력과 친일세력들에 의해 정국이 흘러가게 되면서 이승만이 추구하는 이념과 사상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 세우면서 심한 취조와 감시,극형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당시 그러한 상황에서 이념에 반하는 세력들을 하나라도 색출하려 국민보도연맹이 나왔던 것이며,황의지는 지하조직 투쟁전선에 뛰어 들어 본격적으로 이승만정권에 맞서 싸우려 했던 것이다.그는 국군,경찰 등의 정규군과는 별도로 그들의 배후에서 통신.교통수단을 파괴하거나,무기와 물자를 탈취하거나 파괴하고,인원을 살상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빨치산의 활동은 자발적으로 궐기한 민주민족 통일독립을 위한 조직이요,인민을 위한 유격대였다.

 

그는 군경과 쫓고 쫓기는 지리한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후일 빨치산 사단장으로 임명된다.해방후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던 제주 4.3항쟁,여수반란 사건은 너무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실상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거나 관심을 갖으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지긋지긋한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미국과 소련을 몰아내고 민족민주 통일독립을 이루고자 분연히 일어섰던 것인데 이승만정권은 이들은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면서 한치의 관용과 용서,타협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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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후예 1 - 비운의 패장
박찬두 지음 / 작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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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역사의 큰줄기 속에는 늘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그러나 불공평하고 안타깝지만 결과론만 내세워 패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승자만 버젓하게 후대에 면면이 이어지고 만다.현대사회에서도 그렇고 미래사회에서도 그럴 것이지만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한목숨 기꺼이 바치고 산화해 간 인물들에 대해서도 역사의 기록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을 든다.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들이 어디 한 두 명이겠냐마는 그 숭고한 뜻과 이념이 기리 기억할 만한 가치와 교훈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기억을 해야 하고 기록으로 남겨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과 맞서 싸운 인물들 속에는 흔히 이순신,김시민,권율,곽재우,원균 등의 인물이 등장하고 내치와 행정관료 중에는 선조를 비롯하여 유성룡,이율곡 등의 인물을 상기하게 된다.주지하다시피 이순신장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순신에 대해서는 한산도대첩을 비롯하여 그가 왜군과 맞서 남긴 승전보와 난중일기,인간성 등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 주고 있다.그가 해상에서 왜군과 맞서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기울어 가는 나라를 살려 보겠다는 일념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임진왜란 당시 내륙에서 왜군과 맞서 탁월한 공을 치뤄냈지만 패장으로 끝나 버린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황진(黃進)장군이다.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조선 내부는 정권다툼과 내치의 허술함,그리고 국방의 견고하지 못함에 있었다.당시 병조판서로 재직하고 있던 이율곡은 일란(一亂)의 시대로 진단한다.조선이 개국하고 법과 제도에 폐단이 생겨나고 인심이 해이해지기에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던 것이다.그것은 시무육조(時務六條)에 잘 나타나 있고 역사의 변동 단계를 창업,수성,경장으로 나눈다면 그 시대는 경장의 단게로 보고 있다.

 

이러한 틈을 타고 일본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조선과 거짓 화친 요구,대마도주를 통한 통신사 파견요청을 하는데 그 일행에 황진도 포함되었다.도요토미히데요시를 접견한 통신사 일행은 그들의 말과 행동 등을 통해 그들이 장차 조선을 통해 명나라를 침범하려는 야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정사 황윤길,황진 등은 몇 년 안에 일본이 조선을 침범하리라는 것을 알고 당시 선조에게 장계를 올리지만 동인의 영수인 김성일의 안이한 보고만 믿고 방어대책을 소홀히 하고 말았던 것이다.결국 선조는 몽진을 가야 하고 치욕스러운 군주로 남게 되고 만 것이다.황진 역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일본의 계략을 올리려 했으나 후환을 두려워하는 종친들의 만류로 인해 애석케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황진장군은 호남의 전주성 등을 방어하기도 하면서 내륙에서의 혁혁한 공을 세운다.의병으로서는 김천일이 중심이 된다.한 편 일본은 명나라 심유경과 화친 교섭에 응하는 척하면서 호남 공략에 나서게 되는 전략을 세우게 되는데 호남 길목의 요충지가 진주였던 것이다.진주성을 사수하기 위해 김시민,최경희 장군 등과 황진장군은 합세하여 왜군에 맞서 저항을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소총과 재래식 무기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결국 진주성은 왜군에 의해 함락이 되고 황진장군도 안타깝게 왜군에 의해 희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의병장으로 죽을 각오로 왜군에 맞서 싸웠던 황진장군은 <정충록(旌忠錄)>을 남기면서 그의 13대 후손 황의지에 의해 세상에 그의 이름과 업적이 발현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그는 비록 패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역사의 기록은 승자든 패자든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집필해서 후세들에게 그들의 면모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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