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전주의가 일관된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서, 미술사에서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좁게는 19세기 초 신고전주의의 차가운 형식에 대한 반동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개인의 상상력을 중시하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태도에 바탕을 둔 좀 더 광범위한 예술운동입니다. 18세기부터 유행한 신고전주의 역시 시간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고대를 동경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한 양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낭만주의는 18세기말부터 몰아닥친 질풍노도의 혁명의 시대를 반영하는 정신적인 사조였으며 신고전주의는 낭만주의를 여는 그의 전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
 |
|
 |
 | |
|
 |
 |
도3에서 보듯 들라크르와의 회화는 격렬한 동세, 파격적인 색채의 사용, 그리고 휘몰아치는 붓놀림으로 신고전주의에 도전하였던 낭만주의 미술사조를 대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적인 구분으로 낭만주의라는 광범위한 미술사조를 다 포괄할 수는 없겠습니다. 도4에서 보듯, 신고전주의를 끝까지 고수하였던 앵그르의 신화적인 상상력이나 자연에 대한 관찰을 중시하였던 영국의 컨스터블(도5), 그리고 영혼이 깃 든 듯한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도6) 역시 이러한 낭만주의와 맥을 같이 합니다. |
 |
|
 |
 |
도3 들라크르와 <사자사냥> 1854년, 유화스케치 |
86×115 cm |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
|
| |
|
 |
 |
도4 앵그르 <안젤리카를 구하는 뤼지에르> |
1893년, 캔바스에 유채 |
런던, 국립미술관 |
|
| | |
 |
|
 |
 |
도5 컨스터블 <찰즈베리 대성당> |
1831년, 캔바스에 유채 |
런던, 국립미술관 |
| |
|
|
 |
도6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위의 방랑자> |
1818년경, 캔바스에 유채, 34.8×74.8 cm |
 |
함부르그, 국립박물관 |
| | |
|
|
 |
 | |
|
 |
 |
낭만주의, 즉 로맨티시즘이라는 용어는 중세의 모험담을 일컫는 로맨스에서 나왔습니다. 18세기에는 고대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고딕시대의 중세적인 상상력도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1757-1827)는 단테의 『지옥편』의 한 장면을 그린 <쾌락의 원형>(도7)에서 남녀의 결합을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때 남녀들의 왜곡된 인체는 중세 고딕성당의 그로테스크한 조각상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런가 하면 『유럽: 예언자』라는 시집의 표지였던 <태고>(도8)에 등장하는 창조주의 모습은 그 영웅적인 신체에서 미켈란젤로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빛의 컴퍼스로 세상을 재단하는 창조자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어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습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꿈에서 독특한 장면의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내면의 무의식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미술가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
 |
|
 |
 |
도7 윌리암 블레이크 <쾌락의 원형> 단테의 『지옥편』 |
중 제 5편, 1824년 경종이위에 펜, 연필, 수채화, |
46×58 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
| |
|
 |
 |
도8 윌리암 블레이크 <태고> 1794년, 에칭에 수채, |
23.3×16.8 cm |
런던, 대영박물관 |
| | |
|
 |
 | |
|
 |
 |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난폭함과 잔인함, 이성의 본 모습에 대해 고야처럼 놀라운 작품을 제작한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프랑스의 다비드가 혁명의 신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면,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고야 는 그 혁명의 광기로 인한 비극적인 그림자를 표출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다비드에 대해서는 15주의 주제1을 참조). 두 화가 모두 일국의 공식화가로서 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다비드의 차갑고 매끈한 화면이 관객의 감정이 극적으로 쏠리는 것을 막고 시대의 도덕적인 명분을 생각하게 하는 반면, 고야의 음울한 화면에서는 감정이 넘쳐나고 폭발하는 것 같습니다. |
 |
|
 |
 | |
|
|
|
 |
 |
고야의 판화집『카프리쵸스 Los Caprichos: 변덕』에는 18세기말 불안정한 시대를 사는 스페인 민초들의 모습과 인간의 무의식을 사로잡는 불안, 광기, 폭력, 잔혹함에 대한 어두운 시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거리의 뚜장이, 부랑자, 주정뱅이와 같은 어리석은 인간들과 마녀들이 등장하여 만들어내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1870년대 스페인 왕가의 시대를 우울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도13,14). 도13에서는 당나귀를 등에 메고 힘겨워하는 농민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두 마리의 당나귀는 '왕실'과 '교회'를 상징합니다. 혁명전야에 교회와 왕권에 눌려 신음하는 민중의 자화상이라 할 만합니다. 또한 도14에서 보듯 고야는 마녀나 정신병자들을 주제로 삼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같은 주제는 피라네지의 <감옥>시리즈(14주 주제3, 도19 참조)나, 호가스의 <베들럼>(14주 주제2참조)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계몽주의 시대에 사회적인 규율이나 정상에서 배제된 것들에 공통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
 |
|
 |
 |
도13 고야 <너는 그것을 하지 못한다> |
변덕연작, 42번, 1799년, 에칭과 아쿼틴트 |
|
| |
|
 |
 |
도14 고야 <그들은 실을 잘 잣고 있다> |
카프리치오소 제 44번 |
1797-98년, 동판화, 21.4×15 cm |
| | |
|
 |
 | |
|
|
|
|
 |
 |
그로와 마찬가지로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 1791-1824)역시 짧은 생애동안 줄곧 죽음과 폭력, 절망과 같은 극적인 장면에 몰두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질은 고야의 음울한 상상력과도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도19의 <메두사의 뗏목>은 그가 몇 년을 두고 몰두하였던 야심작으로, 낭만주의의 선언이 되었던 작품입니다. 나중에 들라크르와는 후일 <단테의 배>(도20)를 통해 제리코의 죽음에 경의를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제리코가 그린 이 장면은 1816년 당시 있었던 사건을 기초로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범선 메두사호는 군인과 이주민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승객을 태우고 세네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배는 아프리카의 해안에서 난파되어 12일 동안의 표류 끝에 겨우 15명만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 사고는 프랑스 정부의 무능과 부조리 때문이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제리코가 이사건을 장엄한 역사화의 스케일로 제작한 것에는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수대교의 붕괴와 같은 부패형 참사를 기록한 다큐멘타리 사진 전시회 같은 것을 상상해보면 수긍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
 |
|
 |
 |
도19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1819년 |
캔바스에 유채, 491×716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
|
| |
|
 |
 |
도20 들라크르와 <단테의 배>, 1822년 |
캔바스에 유채, 189×242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
|
| | |
물론 이 작품에는 해부학적인 인체의 묘사라든가, 안정된 삼각형 구도와 같은 신고전주의적인 요소가 분명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낭만주의의 선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고전주의처럼 도덕적인 교훈을 중시하기보다는 기아와 풍랑에 휩쓸리며 희망을 잃은 인간들의 참상 그 자체에 주제를 맞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
|
 |
 | |
|
|
|
|
 |
 |
신고전주의에 뒤이어 전개되는 열정과 상상력과 광기가 곁들어진 미술운동은 유럽과 신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정치적인 격정과 그로 인한 긴장이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괴테는 이러한 19세기를 일컬어 "질풍노도의 시대"라고 하였습니다. 한편으로 블레이크, 그로, 고야, 제리코 등등의 작가에게서는 상상력과 자신들의 개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새로운 미술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창조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선물로 여겼는데 우리가 미술가에 대해 생각하는 고독한 천재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생각은 20세기 전위미술을 거쳐 지금도 상당부분 믿어지고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