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 철학 논고 비트겐슈타인 선집 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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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도 번역된 데이비드 에드먼즈, 존 에이디노의『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책은 철학적 문제는 정말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칼 포퍼와 존재하는 것은 오직 수수께끼 뿐이라고 주장하는 비트겐슈타인 사이에 벌어진 논쟁으로 시작한다. 이 논쟁은 급기야 비트겐슈타인이 포퍼를 향해 부지깽이를 휘두르는 '사태'로 번지면서 당시 지식인 사회에 논란을 불러일으키는데, 캠브리지 강의실에서 시작된 이때의 논란은 두 철학자의 사후까지 이어지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를 휘둘렀다고 일러바친 사람은 다름 아닌 포퍼다.
이것이 내가 제일 처음 만난 비트겐슈타인이었다. 그리고 다시, 정식으로 만난 비트겐슈타인은 예쁜 인디언핑크색 장정을 입고 나타났다.
『논리-철학 논고』의 지면은 고작 180여 페이지. 손가락 한 마디도 못 채우는 얇은 두께 속에 자리하고 있는 내용의 무게는 참으로 두껍고 무겁다. 한 줄, 한 줄은 어렵지 않다. 모르는 단어도 없다. 내가 배운 단어, 익히 알고 있는 의미이고 게다가 단문이다. 그런데도 어렵다. 문장의 확장을 인식의 확장이 좇아가지 못해 괴롭다. 롤랑 바르트의『텍스트의 즐거움』을 읽으면서 장정일이 그랬다는 것처럼 '아~ 아~' 황새를 쫓아가는 뱁새의 가랑이를 여실히 느낀다. 예전에 한 선배가 1년 동안 쓴 일기장을 넘겨 보는데 하루 하루는 별 차이가 없더니 1월1일과 12월 31일은 다르더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다는 얘기다.
글 한 줄, 단어 하나가 가지는 무게는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 따라 천양지차를 보인다. 대출하거나 빌려서 읽을 책이 아니다. 돈을 지불하고 책장에 꽂아놓고 인내심을 갖고 반복해서 거듭 읽어야 할 책.

철학은 어떤 점에선 종교보다도 더 관념적이다. 그러니 이런 종류의 철학 서적은 능력이 된다면 원서로 보는 것이 오히려 이해하기가 낫다. 해당 전공자가 참 부러워지는 부분이다. 

아직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별 세 개는 미완성 평점.  

 

- 이 세상에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걸 나는 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정말로 경험한 몇 안 되는 진실들 중의 하나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 큰 인물들은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칼 포퍼) 

출처.『비트겐슈타인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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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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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문학상을 받았다는 건 알았는데 1/3쯤 읽고서야 창비 '청소년'문학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장소설답게 기승전결이 단선적이고 교과서적이다.
성장소설인만큼 대상 연령대를 벗어나면 자칫 소설이 쉽고 만만해질 수 있겠는데 이런 부분은 청소년이라는 대상의 문제라기 보다는 성장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 전개상)교조적 방식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아쉬운 점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서 굳이 기승전결을 모두 설명하는 친절이 필요한가, 라는 것. 요즘 10대는 논술세대라 상당히 똑똑하고 이해도 빠르다. 꼭 그런 것이 아니라도 대상이 어릴수록 오히려 은유와 복선을 통해 스스로 체득하는 2차적 독서 혹은 사회적 독서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솝우화』나『어린왕자』등은 전 연령대가 읽지만 연령대마다 읽는 느낌이 제각각 다르다.

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완득이를 중심으로 사회적 약자들과 사회적 강자들로 이분한다. 우선 완득이는 동남아 계통의 특징이 또렷한 혼혈아이고, 신체적 장애를 가진 아버지, 베트남인 어머니,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말더듬 증세를 가진 혈연 관계는 없는 삼촌이 등장한다. 이들에 대비되는 인물군으로는 완득의 담임 동주, 같은 반 친구인 윤하가 등장하는데 담임 동주의 아버지는 비서를 대동하고 다니는 사장님이고, 윤하는 반에서 1,2등을 다투는 모범생이면서 역시 부잣집 딸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단순하고 직설적인 나누기가 미국이 자국의 영화에서 제 3세계와 유색인종을 다루는 방식, 그러니까 미국에 의한 미국식 지배의 전형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사회적 약자인 완득이네는 사회적 강자의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진보적 사상을 가진 담임 동주의 도움으로 갈등을 해결해 나간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도에선 전개상 '대결' 아니면 '화해'로 결론을 지어야 하는데 청소년 대상 소설답게 작가는 화해를 선택한다.

이 소설을 읽고 좋았다면 혹은 반대로 부족하다고 느꼈다면『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이성과 힘) 추천. 둘 다 주제의식이나 플롯에서 유사한 점을 보이지만 풀어나가는 작가의 방식과 힘의 차이만큼이나 독서 끝에 오는 감동의 무게가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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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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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 p.150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굉장히 압축적이고 함축적인 문장이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소설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스물다섯...'에 덧붙여, 스물다섯 살인 시몽이 사랑하는 그녀 폴은 서른아홉 살이다. 
 

일단 나를 사강에게 이끈 것은 '조제'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마지막에 오는 감동은 잘 쓴 소설의 힘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의 한 때, 시몽은 폴에게 그 시절을 의미하는 듯. 시몽을 떠나 보낸 것은 청춘이란 영원히 머물 수 없는 한 때임을 청춘을 지나온 서른 아홉의 그녀는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즉, 폴은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는 의미를 이해하는 나이인 것이다. - 굵은 글씨의 출처는 김연수『청춘의 문장들』 
읽는 내내 생각 많은 여자의 혼잣말을 듣는 기분이 든다. 읽을 땐 밋밋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묘한 울림이 있다. 썩 괜찮은 소설이다. 그녀의 다른 소설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소설은 작가가 속한 배경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작가가 쓰는 언어 탓이 아닌가 싶다. 소설이 1959년에 쓰여진 만큼 대사, 상황, 에피소드에서 올드하고 때론 진부하게 느껴지는 소설적 장치들이 눈에 띈다. 마치 60년대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멋이 있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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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백석 - 문학동네 글과 길 2
김자야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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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백석』은 자야 여사가 기생 신분으로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백석을 추억하며 써내려간 에세이다.
자야가 백석을 만난 것은 백석이 스물 다섯, 자야 여사가 스물 하나. (1936년)
잠시동안일 줄 알았으나 영원이 되고 만 이별을 한 것은 백석이 스물 여덟, 자야 여사 스물 넷. (1939년)
그리고 두어 차례 입원의 위기를 넘기며 4년여에 걸쳐 틈틈이 그녀가 직접 작성한 원고가『내 사랑 백석』이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온 것이 자야 여사 나이 팔순 때 일이다. (1995년)

마치 어제 일처럼 소상하게 백석을 추억하는 그녀의 글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무려 60여년이라는 긴 시간이 거짓말 같다. 그러니 자야 여사가 펼쳐놓는 백석 시인과의 사랑이 어떠했을지 능히 짐작할만 하다. 실제로 두 사람의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로맨스를 좇다보면 '참으로 낭만적이구나' 소리가 절로 나온다. 두 사람의 만남부터가 그러하다.
졸업을 앞두고 자신의 유학을 후원한 해관 신윤복 선생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자야 여사는 해관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귀국, 무작정 해관 선생이 투옥된 감옥이 있는 함흥으로 향한다. 마침 함흥의 영생고보에는 서울의 조선일보사를 그만 둔 백석이 영어 교사로 부임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함흥에서 우연히 만난다. '자야'는 함흥 시절 백석이 직접 지어준 아호.
백석은 굳이 구분하자면 재북작가로 불려야 마땅하지만 해방 직후의 경직되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 여타 월북작가들과 함께 오랫동안 남한 사회에서 이름을 들을 수 없는 문인이었다. 그러다 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해금되어 뒤늦게 그와 그의 작품이 빛을 보게 되었으니 늦었지만 참 다행한 일이다.

당시 경성에서도 손꼽히는 잘생긴 모던보이 시인이었던 백석은 남아 있는 흑백사진만으로도 굉장히 세련되고 멋진 인물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기껏해야 3년 남짓한 짧은 인연이지만 자야 여사와 사랑에 빠진 그는 참으로 낭만적이고 귀엽기까지 하다.
주위에 사랑에 빠진 친구가 있어본 사람은 다 안다. 그들이 질리는 줄도 모르고 끝도 없이 하고 또 하는 사랑 얘기가 얼마나 유치한지. 자야 여사와 백석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그래도 부럽기는 마찬가지다. 기어이 부러운 한숨을 내쉬게 한다.

집안의 명령으로 세 번 결혼하였으나 세 번 모두 자야 여사에게로 도망쳐 오는 백석. 신분과 시대의 한계를 실감하며 툭하면 백석에게서 달아나 숨는 자야. 그러면 또 귀신같이 그녀가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는 백석.
한 번은 또 다시 달아나 숨은 자야를 찾아낸 백석이 그녀에게 詩 한 편을 던져주고 가는데 그 詩가 바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비록 자야 여사가 확신하는 것처럼 詩 속의 나타샤가 자야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는 백석 본인만 알겠지만 그러나 나 역시 나타샤가 자야 여사일 거라고 믿고 싶은 것은 그만큼 자야 여사가 추억하는 그들의 사랑이 예쁜 탓이다.

『내 사랑 백석』은 갑작스런 집안의 몰락으로 기생이 되지 않았더라면 훌륭한 문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자야 여사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당대의 멋쟁이 모던보이 문학청년과 나누는 예쁜 사랑 얘기 외에도 자야 여사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 20세기 초 우리나라 근대의 풍속을 엿보는 재미가 제법 실하다. 또한 책 중간 중간 그리고 책의 말미에 백석의 詩가 실려 있어 백석을 모르는 이들에게 그의 시를 알리고자 하는 자야 여사의 배려를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시인과 시집에 수여하는 백석문학상은 자야 여사가 백석을 기리기 위해 사재를 들여 제정했다.

물론 이들에겐 아직 남아 있는 얘기들이 더 많지만 그러나 자야 여사의 백석으로만 기억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장국영, 매염방 주연의 영화<인지구>는 영원한 사랑의 맹세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영화에서 사랑에 빠진 부잣집 도련님과 기생 여화는 현세에선 그들의 사랑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고 내세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음독으로 동반자살한다. 그런데 그렇게 끝나고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세에서 도련님을 기다리던 여화는 도련님이 오지 않자 인간 세상으로 왔다가 사실은 도련님이 살아 남았으며 뿐만 아니라 칠순의 초라한 노구를 이끌고 지금껏 목숨을 연명해 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어떤 인연은 미완인 채로 끝나서 더 아름다울 수 있다. 피천득 시인이「인연」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아니 만났으면 더 좋았을 '세번째 만남'도 있는 것이다.

백석을 따라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며 평생을 연인을 그리워하면서 혼자 살았던 자야 여사. 비록 사랑하는 연인을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의 아름다운 추억만 가지고 갈 수 있었던 그녀는 한편으로는 행복한 사람이다. 

* 다음은 백석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에피소드  

- 당시 말 한 필이 오원 이었는데 백석의 시집「사슴」이 이원 하였다 한다.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는 이 책의 필사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다. 백석의 시「흰 바람벽이 있어」와 동주의 시「별 헤는 밤」을 살펴보면 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 인데 프란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조사의 차이가 주는 감상이 이렇게나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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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고 - 역사적 오류에 얽힌 이야기 혹은 우리 가슴속에 묻어둔 희망을 두드리는 이야기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삼우반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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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저자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나 읽다 보면 껄껄껄 웃게 되는 장면이 두엇 있다.
지동설이 천동설을 완전히 밀어낸 그 시절, 유럽인의 관심은 온통 황금과 꿀이 넘치는 지상의 낙원인 인도에 '보다 빨리 가는 길'의 개척에 쏠려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항로가 발견되던 시절에 가장 인정받던 항해사 콜럼버스도 큰 소리 탕탕 치고 뱃길에 오른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알려진 동쪽 항로로 향하던 때, 영리하게도 서쪽 항로를 선택한 콜럼버스는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육지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곳은 황금도 꿀도 없는 황량한 대지일 뿐이다. 실망하여 돌아온 콜럼버스, 역시 기쁜 소식을 기다리다 실망하는 사람들.
나를 웃게 한 부분이 여기서 등장한다. 콜럼버스가 새로 발견한 대륙이 인도의 어느 한 자락이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세계 지도의 크기가 확 줄어든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한 개가 통째로 사라졌으니 당연한 결과다. 생각보다 작은 지구의 크기에 실망했을 사람들의 표정이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책은, 신대륙의 최초 발견자는 콜럼버스인데 어쩌다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이 대륙을 차지하게 되었는가 하는 해프닝의 전말을 들려준다. 내용 중 심히 공감이 갔던 부분은, '당시의 아메리카를 오늘의 아메리카와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부분.
사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땅에 누구의 이름을 붙이든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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