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 이산의 책 46
사타케 야스히코 지음, 권인용 옮김 / 이산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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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안에서 천리 밖 세상의 이치를 보다
- [제왕의 스승, 장량](2008), 위리, 김영문 옮김, <더봄>, 2021.



"한 고조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와 항우가 패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참을성이 있느냐, 참을성이 없느냐의 사이일 뿐이다. 항우는 참을성이 없었기에 백전백승하면서도 그 예봉을 경솔하게 사용했다. 한 고조는 참을성이 있었기에 자신의 온전한 예봉을 기르며 항우가 피폐하기를 기다렸는데, 이는 장량이 가르친 것이다. 회음후 한신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하자 고조가 분노하여 말과 표정에 그 기색이 드러났다. 이런 점에서도 고조에게는 아직 참을성이 없고 강하게만 대처하려던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량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한 고조를 온전히 보호할 수 있었겠는가?"
- 소식, <유후론(留侯論)>, 김영문 옮김, [제왕의 스승, 장량] 부록.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후, 대가 끊긴 나머지 6국은 진시황제를 몹시도 증오했다. 불멸을 쫓던 시황제는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을 받았다. 형가와 고점리 등의 자객들의 암살시도는 실패했으나 망국의 신하들은 복수를 다짐했다. 한(韓)나라 재상 집안 출신 공자였던 장량(張良)은 동쪽을 순행 중이던 시황제를 박랑사라는 곳에서 테러하려다가 실패하고 하비로 숨어드는데 용케도 잡히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전국은 오랜 기간 대수색령이 내려진다. 훗날 한 고조 유방의 제일 참모로서 한(漢)나라 건국 '삼걸' 중 하나로 거론되는 장량이 단순한 복수의 테러리즘을 넘어 개국(開國)의 정치강령으로 무장한 시기가 바로 이 하비에 숨어살던 수배시절이다.
"장량이 있었기에 유방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고 평가한 북송시대 시인 소식은 <유후론>에서 장량(유후)이 수배시절에 만난 '황석노인'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은 [태공병법]만이 아니라 '참을성'이었으며, 이로 인해 동네건달이었던 한 고조 유방(劉邦)을 위대한 개국황제로 만들었다고 평한다.
흔한 말로, 유방이 장량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훗날 조선의 삼봉 정도전도 술에 취해 태조 이성계가 본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태조를 이용해 조선을 건국했다고 말했듯이. 
이렇게 각 시기 최고의 참모들은 '참을성'과 끈기있는 정치강령으로 당대의 '주먹들'을 '선택'했다.


장량의 자는 '자방(子房)'이다. 역대의 영웅들은 최고의 참모를 '나의 자방'이라 불렀단다. 조조가 순욱을, 주원장이 유기를 그리 불렀는데, '장자방' 장량은 역대 모사들의 대명사다. 유비의 참모 제갈량도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유했으나 천하통일 전쟁에서 늘 장자방을 롤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실로 '삼국연의'는 '초한지' 이야기가 비슷하게 반복되는 구전이 바탕인데, '삼국지' 이야기에서 '자방'은 단연 제갈량이다. 물론, 천하통일을 완수한 장량과 통일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비장하게 생을 마감한 제갈량은 비교가 안될 수도 있겠다지만, 장량의 주군이었던 유방은 '용인술'의 대가로서 소하와 한신, 장량 등 '삼걸'을 두루 기용한 반면, 제갈량은 무능한 유비 밑에서 위 '삼걸'의 일을 혼자 다 감당해야 했다. 장량은 말년에 도인이나 신선과 같은 삶을 살았던 반면,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결국 과로로 쓰러졌을 것이다.
장량은 단연 중국역사상 최고의 참모로서,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방략을 품고 계획을 구상하여 신묘한 계산으로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고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면은 짐이 장자방보다 못하오. 백성을 위무하고 나라의 재산을 잘 관리하면서 물자를 제때 공급하여 군대를 구제하는 면은 짐이 소하보다 못하오.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싸우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이기는 작전과 지휘의 본령은 짐이 한신에 미칠 수 없소. 장량, 소하, 한신 세 사람은 모두 세상에 드문 기재(奇材)요. 짐은 비록 이들보다 못하지만 이들이 나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했소. 이 점이 바로 짐이 천하를 얻은 원인이오."
- [제왕의 스승, 장량], <6장. 국가>, 위리.


기원전 202년,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고 공신들에게 분봉을 하면서 본인이 '서초패왕'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들며 건국 '삼걸(三傑)'로 소하와 한신, 그리고 장량을 꼽는 대목이다. 수도에서 국가운영을 이어가며 전선에 군량과 병력을 지원한 영원한 승상 소하, 중원의 삼진과 제나라의 동북방을 평정하며 유방에게 지원병력을 쉼없이 제공한 대장군 한신은 말할 것 없고 군막 안에서 천리 밖 전장의 계책을 마련할 뿐 아니라 중요한 시기마다 기묘한 책략으로 유방을 구한 장량이 한나라 건국에 가장 기여한 3명의 인재라는 의미다.


중국 작가 위리(본명, 바오광리)가 쓴 [장량전]은 사마천 [사기(史記)]의 <고조본기>와 <항우본기>, 장량의 열전인 <유후세가>, 한신의 열전인 <회음후열전> 등의 '원문'들을 기초로 장량의 일생을 그린 일종의 '장량 평전'이다. [사기]나 [초한지]로만 볼 수 있던 '모신' 장량의 모습을 오롯이 읽을 수 있다. 국내에 없던 '장량전'을 올해 김영문 선생이 번역했는데, 중국고전 전문가인 역자의 번역은 믿고 읽을만 하다.

처음에는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진시황에게 복수만을 다짐했던 장량은 공자의 땅에서 '예학' 즉 유학을 배우기도 했고 우리 고조선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명사인 '창해군'의 문객이 되기도 했으며 수배시절 '황석노인'으로부터 [태공병법]을 전수받은 후 '도가'의 사상까지 흡수하며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는 점차로 통일국가 건설의 프로그램을 체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유현 땅에서 우연히 마주친 유방과 친교를 맺은 장량은 본인이 깊이 수련한 방책들을 유연하게 흡수하여 실현시키던 유방의 큰 그릇에 감복하여 결국 천하쟁패의 '초한전쟁'이라는 건곤일척의 전선을 긋고 기묘한 책략으로써 유방을 승자로 만든다.
관중땅에 처음 들어가 '약법삼장'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게 한 것도, 홍문연에서 유방을 구하고 관중으로 물러가 몰래 힘을 기르게 한 것도, 역이기의 '6국 봉건제'를 깨고 '중앙집권군주제'의 대세를 설파한 것도, 홍구의 협약을 깨고 항우의 뒤를 쫓아 끝장낸 것도 모두, 장량의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을 내다본 계책이었다. 장자방이 없었다면 한 고조 유방의 대업도 불가능했다.

장량은 과연, 시대를 앞서간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이다.


"요컨대, 이 책의 목표는 역사의 다양한 시점에서 왜곡된 유방의 행적을 사료에 입각하여 재검토함으로써 역사의 실상에 접근하는 데 있다. 유방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서민황제였다. 서민이었을 때 황제인 양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비극이 기다리게 되고, 황제가 되었을 때 서민인 양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더 큰 비극이 기다리게 된다. 사회계층의 밑바닥으로부터 정점으로 치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유방은 자연스럽게 또 의식적으로 그 행동양식을 바꾸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역사서술은 그 과정에 있었던 모순을 지워 없애고 그것을 순조로운 이행과정으로 바꿔 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 [유방], <서장 - [사기]에 대하여>, 사타케 야스히코.


일본의 중국문학자 사타케 야스히코는 2005년에 한 고조 유방의 '평전'을 냈다. 이 역시 [사기]와 [초한지]의 주역으로서의 유방보다는 유방이라는 인물을 더욱 중심에 둔 책인데, 특이한 점은 [사기]의 <본기>와 <세가>, <열전> 등에서 각기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는 유방의 모습을 통해 더욱 입체적인 그만의 평전을 지은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장량은 유방 진영 최고의 참모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리 인상깊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유현 땅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면도 [장량전]에서는 장량의 입장에서 주요하게 묘사된 한편, [유방전]에는 한 페이지의 서술에 불과하다. 

사타케 야스히코는 [유방]의 <서문>에서 [사기]의 특징을 짚고 시작한다. 즉, 한나라 건국 후 역사가 육가가 [신어]를 지은 것처럼 패현의 서민건달 유방이 원래부터 기이한 풍모로 '천자'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니라, 조금씩 건국자로서의 모습을 갖추면서 변모해 가는 과정을 [사기] 특유의 씨줄과 날줄의 서술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고조본기>는 유방의 입장에서, <항우본기>는 항우를 중심으로, <회음후열전>에서는 억울하게 토사구팽 당한 대장군 한신의 관점에서 유방의 행적을 서술함으로써 인간 유방에 관한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평전'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신의 군권을 회수하던 장면은 <고조본기>에서는 담담하게, <회음후열전>에서는 처음부터 의도적인 것으로 쓰고 있다. 초한전쟁 동안에도, 한나라를 개국한 후에도 끝끝내 한신을 두려워했던 유방 입장에서 정당하던 '군권 회수'가 한신의 입장에서 보면 강도짓에 다름 없는 것이다. 
사타케 야스히코의 입체적 유방 평전인 [유방]은 역동적인 '초한(楚漢)전쟁'의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韓)나라에서 재상을 지냈다. 한나라가 멸망함에 미쳐, 만금의 재물도 아끼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강력한 진나라에 복수하려 했고, 이 일로 천하가 진동했다. 지금 세 치 혀로 '제왕의 스승'이 되었고, 만호후에 봉해졌고, 제후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는 포의(布衣)의 극한에 오른 것이다. 나 장량에게는 만족스러운 일이다. 바라건대,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 싶을 따름이다."
- [사기], <유후세가> 원문, 사마천, 김영문 옮김.


'황석노인'은 전국시대의 유세가 소진과 장의를 가르친 '귀곡자'였을 수도 있고, 수배시절 '도가'와 융합한 장량의 대전환기에 관해 후세 사람들이 갖다붙인 가공인물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시기 [태공병법] 또는 [육도삼략] 등을 통해 유가와 도가 등을 융합한 장량은 이미 천하통일의 새 시대가 오면 속세를 떠나야 끝이 아름답다는 이치를 알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하는 승상으로서 제 명대로 살았으나 황제가 되어 교만해진 한 고조 유방에 의해 감옥에 갇힌 적도 있고, '다다익선'의 대장군 한신의 숙청은 말할 것도 없다. 장량이 초한전쟁의 대전선을 긋고 유방 진영의 한편을 만들었던 구강왕 영포와 양왕 팽월도 반란의 혐의 또는 실제 반란으로 몰려 숙청 당하고 말았다. 번쾌와 조참 등은 천수를 누렸으나 함께 호의호식했던 진평은 일평생 '음모'와 속임수에 능한 '모사꾼'으로 남았다. 
한(漢)나라 공신 그 누구도 풍족한 제나라 3만호 봉읍을 거절하고 유방을 처음 만난 유현땅의 1만호에 만족하며 '적송자'를 따라 노닐다 속세를 떠난 장량에 비할 수는 없다.

이 장면이 바로,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으로 빛나는 장량이 역사 속에서 더욱 더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장량은 '장막 안에서 천리 밖 세상'의 이치를 일찍이 깨달았고, 그 장대한 책략에 따라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다간 잔잔하지만 큰 '바람'이었다.

위리의 장량 평전, [제왕의 스승, 장량]의 원제는 [장량전:풍신모사(張良傳:風神謀士)]이다.

***

1. [제왕의 스승, 장량(張良傳:風神謀士)](2008), 위리 지음, 김영문 옮김, <더봄>, 2021.
2. [유방(劉邦)](2005), 사타케 야스히코 지음, 권인용 옮김, <이산>, 2007.
3. [사기(史記)], 사마천 지음, 김원중 편역, <민음사>, 2007.
4. [원본 초한지(서한연의)], 견위 지음,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19.
5. [이문열 초한지], 이문열 지음,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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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스승 장량 더봄 평전 시리즈 2
위리 지음, 김영문 옮김 / 더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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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안에서 천리 밖 세상의 이치를 보다
- [제왕의 스승, 장량](2008), 위리, 김영문 옮김, <더봄>, 2021.



"한 고조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와 항우가 패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참을성이 있느냐, 참을성이 없느냐의 사이일 뿐이다. 항우는 참을성이 없었기에 백전백승하면서도 그 예봉을 경솔하게 사용했다. 한 고조는 참을성이 있었기에 자신의 온전한 예봉을 기르며 항우가 피폐하기를 기다렸는데, 이는 장량이 가르친 것이다. 회음후 한신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하자 고조가 분노하여 말과 표정에 그 기색이 드러났다. 이런 점에서도 고조에게는 아직 참을성이 없고 강하게만 대처하려던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량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한 고조를 온전히 보호할 수 있었겠는가?"
- 소식, <유후론(留侯論)>, 김영문 옮김, [제왕의 스승, 장량] 부록.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후, 대가 끊긴 나머지 6국은 진시황제를 몹시도 증오했다. 불멸을 쫓던 시황제는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을 받았다. 형가와 고점리 등의 자객들의 암살시도는 실패했으나 망국의 신하들은 복수를 다짐했다. 한(韓)나라 재상 집안 출신 공자였던 장량(張良)은 동쪽을 순행 중이던 시황제를 박랑사라는 곳에서 테러하려다가 실패하고 하비로 숨어드는데 용케도 잡히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전국은 오랜 기간 대수색령이 내려진다. 훗날 한 고조 유방의 제일 참모로서 한(漢)나라 건국 '삼걸' 중 하나로 거론되는 장량이 단순한 복수의 테러리즘을 넘어 개국(開國)의 정치강령으로 무장한 시기가 바로 이 하비에 숨어살던 수배시절이다.
"장량이 있었기에 유방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고 평가한 북송시대 시인 소식은 <유후론>에서 장량(유후)이 수배시절에 만난 '황석노인'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은 [태공병법]만이 아니라 '참을성'이었으며, 이로 인해 동네건달이었던 한 고조 유방(劉邦)을 위대한 개국황제로 만들었다고 평한다.
흔한 말로, 유방이 장량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훗날 조선의 삼봉 정도전도 술에 취해 태조 이성계가 본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태조를 이용해 조선을 건국했다고 말했듯이. 
이렇게 각 시기 최고의 참모들은 '참을성'과 끈기있는 정치강령으로 당대의 '주먹들'을 '선택'했다.


장량의 자는 '자방(子房)'이다. 역대의 영웅들은 최고의 참모를 '나의 자방'이라 불렀단다. 조조가 순욱을, 주원장이 유기를 그리 불렀는데, '장자방' 장량은 역대 모사들의 대명사다. 유비의 참모 제갈량도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유했으나 천하통일 전쟁에서 늘 장자방을 롤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실로 '삼국연의'는 '초한지' 이야기가 비슷하게 반복되는 구전이 바탕인데, '삼국지' 이야기에서 '자방'은 단연 제갈량이다. 물론, 천하통일을 완수한 장량과 통일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비장하게 생을 마감한 제갈량은 비교가 안될 수도 있겠다지만, 장량의 주군이었던 유방은 '용인술'의 대가로서 소하와 한신, 장량 등 '삼걸'을 두루 기용한 반면, 제갈량은 무능한 유비 밑에서 위 '삼걸'의 일을 혼자 다 감당해야 했다. 장량은 말년에 도인이나 신선과 같은 삶을 살았던 반면,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결국 과로로 쓰러졌을 것이다.
장량은 단연 중국역사상 최고의 참모로서,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방략을 품고 계획을 구상하여 신묘한 계산으로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고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면은 짐이 장자방보다 못하오. 백성을 위무하고 나라의 재산을 잘 관리하면서 물자를 제때 공급하여 군대를 구제하는 면은 짐이 소하보다 못하오.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싸우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이기는 작전과 지휘의 본령은 짐이 한신에 미칠 수 없소. 장량, 소하, 한신 세 사람은 모두 세상에 드문 기재(奇材)요. 짐은 비록 이들보다 못하지만 이들이 나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했소. 이 점이 바로 짐이 천하를 얻은 원인이오."
- [제왕의 스승, 장량], <6장. 국가>, 위리.


기원전 202년,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고 공신들에게 분봉을 하면서 본인이 '서초패왕'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들며 건국 '삼걸(三傑)'로 소하와 한신, 그리고 장량을 꼽는 대목이다. 수도에서 국가운영을 이어가며 전선에 군량과 병력을 지원한 영원한 승상 소하, 중원의 삼진과 제나라의 동북방을 평정하며 유방에게 지원병력을 쉼없이 제공한 대장군 한신은 말할 것 없고 군막 안에서 천리 밖 전장의 계책을 마련할 뿐 아니라 중요한 시기마다 기묘한 책략으로 유방을 구한 장량이 한나라 건국에 가장 기여한 3명의 인재라는 의미다.


중국 작가 위리(본명, 바오광리)가 쓴 [장량전]은 사마천 [사기(史記)]의 <고조본기>와 <항우본기>, 장량의 열전인 <유후세가>, 한신의 열전인 <회음후열전> 등의 '원문'들을 기초로 장량의 일생을 그린 일종의 '장량 평전'이다. [사기]나 [초한지]로만 볼 수 있던 '모신' 장량의 모습을 오롯이 읽을 수 있다. 국내에 없던 '장량전'을 올해 김영문 선생이 번역했는데, 중국고전 전문가인 역자의 번역은 믿고 읽을만 하다.

처음에는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진시황에게 복수만을 다짐했던 장량은 공자의 땅에서 '예학' 즉 유학을 배우기도 했고 우리 고조선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명사인 '창해군'의 문객이 되기도 했으며 수배시절 '황석노인'으로부터 [태공병법]을 전수받은 후 '도가'의 사상까지 흡수하며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는 점차로 통일국가 건설의 프로그램을 체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유현 땅에서 우연히 마주친 유방과 친교를 맺은 장량은 본인이 깊이 수련한 방책들을 유연하게 흡수하여 실현시키던 유방의 큰 그릇에 감복하여 결국 천하쟁패의 '초한전쟁'이라는 건곤일척의 전선을 긋고 기묘한 책략으로써 유방을 승자로 만든다.
관중땅에 처음 들어가 '약법삼장'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게 한 것도, 홍문연에서 유방을 구하고 관중으로 물러가 몰래 힘을 기르게 한 것도, 역이기의 '6국 봉건제'를 깨고 '중앙집권군주제'의 대세를 설파한 것도, 홍구의 협약을 깨고 항우의 뒤를 쫓아 끝장낸 것도 모두, 장량의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을 내다본 계책이었다. 장자방이 없었다면 한 고조 유방의 대업도 불가능했다.

장량은 과연, 시대를 앞서간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이다.


"요컨대, 이 책의 목표는 역사의 다양한 시점에서 왜곡된 유방의 행적을 사료에 입각하여 재검토함으로써 역사의 실상에 접근하는 데 있다. 유방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서민황제였다. 서민이었을 때 황제인 양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비극이 기다리게 되고, 황제가 되었을 때 서민인 양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더 큰 비극이 기다리게 된다. 사회계층의 밑바닥으로부터 정점으로 치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유방은 자연스럽게 또 의식적으로 그 행동양식을 바꾸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역사서술은 그 과정에 있었던 모순을 지워 없애고 그것을 순조로운 이행과정으로 바꿔 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 [유방], <서장 - [사기]에 대하여>, 사타케 야스히코.


일본의 중국문학자 사타케 야스히코는 2005년에 한 고조 유방의 '평전'을 냈다. 이 역시 [사기]와 [초한지]의 주역으로서의 유방보다는 유방이라는 인물을 더욱 중심에 둔 책인데, 특이한 점은 [사기]의 <본기>와 <세가>, <열전> 등에서 각기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는 유방의 모습을 통해 더욱 입체적인 그만의 평전을 지은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장량은 유방 진영 최고의 참모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리 인상깊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유현 땅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면도 [장량전]에서는 장량의 입장에서 주요하게 묘사된 한편, [유방전]에는 한 페이지의 서술에 불과하다. 

사타케 야스히코는 [유방]의 <서문>에서 [사기]의 특징을 짚고 시작한다. 즉, 한나라 건국 후 역사가 육가가 [신어]를 지은 것처럼 패현의 서민건달 유방이 원래부터 기이한 풍모로 '천자'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니라, 조금씩 건국자로서의 모습을 갖추면서 변모해 가는 과정을 [사기] 특유의 씨줄과 날줄의 서술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고조본기>는 유방의 입장에서, <항우본기>는 항우를 중심으로, <회음후열전>에서는 억울하게 토사구팽 당한 대장군 한신의 관점에서 유방의 행적을 서술함으로써 인간 유방에 관한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평전'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신의 군권을 회수하던 장면은 <고조본기>에서는 담담하게, <회음후열전>에서는 처음부터 의도적인 것으로 쓰고 있다. 초한전쟁 동안에도, 한나라를 개국한 후에도 끝끝내 한신을 두려워했던 유방 입장에서 정당하던 '군권 회수'가 한신의 입장에서 보면 강도짓에 다름 없는 것이다. 
사타케 야스히코의 입체적 유방 평전인 [유방]은 역동적인 '초한(楚漢)전쟁'의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韓)나라에서 재상을 지냈다. 한나라가 멸망함에 미쳐, 만금의 재물도 아끼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강력한 진나라에 복수하려 했고, 이 일로 천하가 진동했다. 지금 세 치 혀로 '제왕의 스승'이 되었고, 만호후에 봉해졌고, 제후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는 포의(布衣)의 극한에 오른 것이다. 나 장량에게는 만족스러운 일이다. 바라건대,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 싶을 따름이다."
- [사기], <유후세가> 원문, 사마천, 김영문 옮김.


'황석노인'은 전국시대의 유세가 소진과 장의를 가르친 '귀곡자'였을 수도 있고, 수배시절 '도가'와 융합한 장량의 대전환기에 관해 후세 사람들이 갖다붙인 가공인물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시기 [태공병법] 또는 [육도삼략] 등을 통해 유가와 도가 등을 융합한 장량은 이미 천하통일의 새 시대가 오면 속세를 떠나야 끝이 아름답다는 이치를 알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하는 승상으로서 제 명대로 살았으나 황제가 되어 교만해진 한 고조 유방에 의해 감옥에 갇힌 적도 있고, '다다익선'의 대장군 한신의 숙청은 말할 것도 없다. 장량이 초한전쟁의 대전선을 긋고 유방 진영의 한편을 만들었던 구강왕 영포와 양왕 팽월도 반란의 혐의 또는 실제 반란으로 몰려 숙청 당하고 말았다. 번쾌와 조참 등은 천수를 누렸으나 함께 호의호식했던 진평은 일평생 '음모'와 속임수에 능한 '모사꾼'으로 남았다. 
한(漢)나라 공신 그 누구도 풍족한 제나라 3만호 봉읍을 거절하고 유방을 처음 만난 유현땅의 1만호에 만족하며 '적송자'를 따라 노닐다 속세를 떠난 장량에 비할 수는 없다.

이 장면이 바로, '모신(謀神)' 또는 '모성(謀聖)'으로 빛나는 장량이 역사 속에서 더욱 더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장량은 '장막 안에서 천리 밖 세상'의 이치를 일찍이 깨달았고, 그 장대한 책략에 따라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다간 잔잔하지만 큰 '바람'이었다.

위리의 장량 평전, [제왕의 스승, 장량]의 원제는 [장량전:풍신모사(張良傳:風神謀士)]이다.

***

1. [제왕의 스승, 장량(張良傳:風神謀士)](2008), 위리 지음, 김영문 옮김, <더봄>, 2021.
2. [유방(劉邦)](2005), 사타케 야스히코 지음, 권인용 옮김, <이산>, 2007.
3. [사기(史記)], 사마천 지음, 김원중 편역, <민음사>, 2007.
4. [원본 초한지(서한연의)], 견위 지음,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19.
5. [이문열 초한지], 이문열 지음,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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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인권
토머스 페인 지음, 박홍규 옮김 / 필맥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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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이성보다..."
- [상식, 인권](18세기), 토머스 페인, 박홍규 옮김, <필맥>, 2004.


"시간은 이성보다 더 많은 개종자를 만들어 낸다."
- 토머스 페인, [상식], <서문>, 1776.


인류가 왕을 '정치'적으로 몰아낸 것은 1789년 근대의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그 전에도 폭군들은 쫓겨나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만 다시금 다른 왕으로 대체되었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으로 건설된 '공화정(共和政)'도 혁명 시기 국민군 장교였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면서 다시 '제정(帝政)'이 복고되었다가 1848년 '2월 혁명'으로 다시 '공화정'이 부활하고 또 다시 나폴레옹의 조카에 의해 '제정'과 '공화정'이 엎치락 뒤치락했지만, 근대에 이르러 이미 시대는 군주 1인이 아니라 다수 대중 또는 그들의 대표들이 이끄는 '공화국'의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3

기원전 9세기 고대 중국 주나라 폭군 여왕(厲王)이 '국인'들의 반란으로 쫓겨난 후 각각 평민들과 귀족들의 추대를 받은 '공(共)'과 '화(和)' 두 재상이 지도했던 짧은 기간을 '공화(共和)'로 불렀고 동양에서는 '왕이 없는 시기'를 의미하는 정치체제가 바로 '공화'였다. 서양은 '제국'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귀족과 평민의 '양원(兩院)'이 왕권과 함께 지배하는 체제인 'Republic'으로 나타났는데 로마 '황제'의 명목상 임무는 '공화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근대 이전에는 '군주정'이 표방하던 '공공성(公共性)'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다수 민중의 요구가 '공공성'의 모습으로 '공화정(Republic)'을 출현시켰으며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군주정'과 '공화정'은 대립된 정치체제로 정립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한 세기 전 영국 '명예혁명'과 달리 왕을 처형한 후 다른 왕족으로 대체하지 않았다. 왕이 없어진 자리는 '국민'의 대표들인 '국민의회'가 차지했는데, 군주나 귀족의 '욕망'을 인간 일반의 '이성'으로 대체한 '계몽주의'가 사상적 토대였다. 
정치적으로는 한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1776년 미국 독립전쟁에서 그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상가가 있다. 바로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 1737 ~ 1809)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38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반영투쟁'을 넘어 아메리카가 '왕이 없는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급진적 독립투쟁를 호소한다. 당시 워싱턴 총사령관부터 다수 아메리카 이주민들은 영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지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독학으로 여러 책들과 사상을 연구한 페인은 1776년 초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짧은 팜플렛으로 '군주정'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한 '공화정' 미국을 선언하고 있다. 그의 [상식]은 이후 미국 '독립선언문'의 기본 골격이 되는데, 그의 '상식'은 '왕의 나라'가 아닌 인간의 보편적 자유권이자 시민권인 '자유'와 '평등'의 인권에 기초한 '인민의 나라'다. 당시 다수 아메리카 인민들조차 전제군주를 '상식'으로 여겼고 그것이 '이성'적 판단이라 주장했으나 토머스 페인은 왕이 아닌 다수 인민, 보편적 인간의 기본권을 '이성'이라, 그것이 바로 '상식'이라 줄곧 주장한다. 결국, 오랜 혁명의 시간을 지나 다수가 주인인 '인민주권국가'는 전제정치의 무지한 신념을 무너뜨리고 모든 인류를 '개종'했다.
'상식'이 독재자를 몰아내고 다수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다.


"프랑스 국민이 혁명을 일으킨 것은 루이 16세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전제적 국가원리에 반대해서였다. 그 기원은 루이 16세가 아니라, 수세기 전의 근원적 제도에 있었다... 그리고 위기가 닥쳤을 때는 단호한 각오로 행동하든가, 아니면 전혀 행동하지 않든가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토머스 페인, [인권 1부], <2장. 프랑스혁명은 원리를 위한 투쟁이다>, 1791.


유럽 대륙에서 영국과 오랜 앙숙이던 프랑스는 정치체제 지지 여부를 떠나 아메리카 대륙의 반영국 독립투쟁을 지원한다. 프랑스 귀족인 라파예트 후작은 미국 독립전쟁에 지원하여 전공을 세우기도 했으며 토머스 페인과 교류도 했다. 프랑스에서 선출되지 않은 정치기구인 귀족들의 '명사회'에서 정치현안을 논의할 때 라파예트 후작은 '국민의회' 형식을 주장했고 루이 16세가 '삼부회'를 어쩔 수 없이 소집했다가 왕족과 귀족들의 반발로 다시 무력화시킬 때 '제3신분(평민)'의 대표들은 "죽을 때까지 흩어지지 말자" 호소하며 '테니스코트 서약'을 했다. 
1787년 프랑스로 가지 못하고 고국인 영국으로 다시 돌아간 토머스 페인은 에드먼드 버크라는 하원의원과도 교류하였다. 2년 후인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버크의 공격은 당연히 '군주정' 체제 내 '개혁'의 입장, 즉 전통적인 '마그나 카르타'식 입헌군주제의 관점이었다. '전제군주'를 증오하고 귀족들을 경멸하며 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을 사상적으로 기초했으며 보편적 인권사상을 설파하던 페인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군주정'이 '상식'이 아니며 '인권'에 기초한 보편사상으로 국가의 기원을 규명하고 다수의 복지를 증진하는 새로운 '공화국'을 위한 혁명은 단지 왕 한 사람이나 몇몇 귀족가문에 대한 투쟁이 아닌 인류의 보편적 '인권'이라는 '원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내용으로 영국 보수주의자 버크에 대한 반박글을 [인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다. 페인의 [인권]에 의하면 왕을 몰아내거나 처형해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필연이다.


사실 토머스 페인의 이 저서는 오래된 글이기도 하고 지금은 너무도 '상식'적인 '인권' 이야기를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어 읽기 지루하기도 한 책이다. 
[인권 1부]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페인 나름대로 정리한 장들은 역사책 읽듯 재미있기도 했으나 [인권 2부]의 세금 관련 장들은 지금과는 맞지 않는 데이터라 별 감흥이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18세기 당시 '국제적 혁명가'로서 토머스 페인의 결론은 다시금 되짚어볼 만 하다.

첫째, '군주정'과 '귀족정'에 대한 증오와 경멸. 
'군주국'인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왕과 귀족들의 무능한 세습체제에 대한 토머스 페인의 증오는 극에 달한다. 경멸의 표현 또한 노골적이고 시원시원하다. 일본에서 천왕을 암살하려 한 아나키스트 박열의 동지인 20세기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나 영국 여왕에게 무릎 꿇기를 거부한 21세기 노동당수 제레미 코빈 보다 몇 백 년 앞선 인간 자유의지의 선언이다. 다수 민중에게 진정한 '애국'은 '혁명'이다.
페인은 물론 현대의 우리의 '상식'에도 반하는 '소수지배체제'는 결코 '공공성'을 담보할 수 없으며 다수의 의지를 대표하는 '공화정'만이 '공공성'의 정치를 집행할 수 있다. 페인에게 최고 정치체제는 '대의민주주의'였고 이는 지난 20세기까지 우리의 '상식'이었다. 이제는 '공공성'을 더욱 확대하는 정치체제는 '대의제'라는 '대리주의'를 넘어서야 하지만, 한편으로 극단적 '포퓰리즘'도 경계해야 한다. '공공성'을 담지 못한 '포퓰리즘'과 파시즘적 '영웅주의'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둘째, 다수의 '복지'와 '노동', 그리고 국가.
18세기는 '노동계급'이나 사회주의 사상이 '평등'을 내걸기 전이며 이제 고작 종교적 신권과 정치적 왕권에 반발한 인류 보편인권 사상이 '계몽주의'의 이름으로 한창 등장하던 시기였다. 우리는 이를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본다. 원래부터 강도나 악당, 찬탈자와 같은 전제군주국이 전쟁과 약탈로 민중을 대놓고 수탈했으니 18세기 자유주의 이념은 '작은 정부'와 '감세'를 주요하게 주장할 수 밖에 없었다. 다수 민중의 '노동'을 통해 생산된 부를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 쓸데없는 정복전쟁에 탕진하지 말고 빈민구제와 아동이나 노인에 대한 복지, 보편교육에 제대로 활용하기만 해도 당시 '군주정'이 걷는 막대한 세금을 줄이면서도 다수를 위한 국가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 18세기 [인권 2부]에서 페인이 주장한 결론이다. 물론 지금은 '공화국'의 정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으므로 '자유주의'의 '작은 정부'와 '감세정책'은 그 자체로 '공공성'을 포기한 소수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주장일 뿐이다. 현재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는 정치경제적으로는 자본의 '자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또한 그 사상의 역사로부터 고찰해야 하는 것이다. '국제적 혁명사상가' 토머스 페인이 '작은 정부'와 '감세'를 주장한 이유는 소수의 사적인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노동하는 다수 민중의 보편적 인권과 복지, 그리고 국제적 평화'를 전제로 했던 것이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86

이 정도로도 '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 그 사상 이전에, '공공성'을 위한 '공화국'의 역사를 함께 생각해볼 만한 토머스 페인의 팜플렛 [상식, 인권]이 정치사상사에서 '고전(古典)'이 될만한 충분한 이유다.


'시간'이라는 '역사'는 '이성'이라는 당대 '철학'보다 더 많은 '상식'과 '인권'을 옹호하고 증명한다.


"승패를 초월한 고결한 긍지로써 나는 '인권'을 옹호한다... 미국과 프랑스의 두 혁명... 그 두 보기에서 분명한 것은, 혁명의 진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가장 큰 세력은 '이성'과 '공동이익(공공성)'이라는 점이다."
- 토머스 페인, [인권 2부], <5장>, 1792.


***

1. [상식(Common Sense), 인권(Rights of Man)](18세기), Thomas Paine, 박홍규 옮김, <필맥>, 2004.
2. [프랑스 혁명사 3부작](19세기), 칼 마르크스, 임지현/이종훈 옮김, <소나무>, 1987.
3.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 김동춘 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한울아카데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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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사회와 그 적들 김소진 문학전집 2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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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영혼이 깃든 곳 - 김소진을 추억하며.
- 김소진 소설집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솔>, 1993.


"'얘야, 이게 무슨 소리니? 어디서 비행기 떴나 보다.'
놀라움에 휘둥그래진 눈동자가 부딪쳐 왔다. 민홍은 백태가 낀 듯 부유스름한 철원네의 눈동자와 맞닥뜨리자 금세 자신의 눈동자로 껄끄러운 이물질이 스멀스멀 몰려들어 덩달아 시야가 부예지는 느낌을 받았다. 민홍은 눈을 씀벅거리며 고개를 바투 쳐들었다. 철원네의 등 뒤를 곧이라도 덮칠 듯 기우듬하게 서 있는 허름한 진보랏빛 비키니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 김소진, <쥐잡기>, 같은책, 1991.


군입대 전인 1995년 3학년 1학기,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망상에 빠져 있을 때 내 손에는 한 권의 소설책이 들려 있었다.
서른 두 살의 소설가 김소진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93)이었다.

1991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쥐잡기>로 등단한 김소진은 6.25 때 월남한 아버지와 어머니 '철원네'의 신산한 삶으로부터 시작된 어린 시절의 '원체험'을 토대로 1980년대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한 운동권 대학생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첫 작품 <쥐잡기>는 전쟁통에 포로수용소에서 천장의 쥐를 따라 가다가 남쪽을 택한 아버지와 남한의 풍요와 성장에도 소외되던 집안, 독재자를 잡겠다고 화염병이나 던지던 대학생 아들이 고작 '철원네'의 구멍가게에 사는 쥐 조차도 못 잡는 어찌 보면 아주 슬프고도 비루한 이야기를 순우리말 단어들과 함께 그려낸다.

3개월 후인 1991년 3월에 발표한 <키 작은 쑥부쟁이>는 어린 시절 '쑥부쟁이'로 불리던 작은 소녀의 삶과 역시 비루한 그녀의 운동권 대학생 딸 이야기다. 1991년 1월 아버지 이야기로 등단 후 바로 어머니 이야기를 푸는 것을 봐도 김소진 '원체험'의 근원이 부모의 신산한 삶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등단 전부터 써 놓은 습작들 중 신중하게 선별했을 게다.

1991년 가을에는 그 해 봄 우리 학교 김귀정 열사 투쟁을 배경으로 '밥풀떼기'로 불리던 도시빈민들이 '주류' 민주시민들로부터 배척되는 내용을 [열린 사회와 적들]로 그려낸다. 칼 포퍼의 거창한 담론이 아닌, '열린' 공간에서 '닫힌' 제도화로 선을 긋던 그 '열린 사회'의 '민주시민'들과 그 '적들'인 '밥풀떼기'들의 대비가 역시 웃기고도 슬프게 담겨진다.

그렇게 소설가 김소진의 주인공들은 '열린' 주류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김소진이 등단한 1991년의 고등학생 나는 학창시절 줄곧 '주류'에 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들 말을 잘 듣기 싫어 제대로 말도 섞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사고치고 다니지도 않아서 선생님들이나 나나 서로에 대한 관심 따위 없었다. 나는 앞자리에서 시험문제 맞춰보는 '범생이들'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노는 애'도 아니었다. 아마도 수많은 다수 중 눈에 잘 안 띄는 하나였을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각자 중학 시절 친구들을 데리고 철봉대 밑에서 모였다. 이른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경희고 31회 졸업 '철봉파'였다.

우리는 야간자율학습 시작전 모이고 '야자' 끝나고 모여서 철봉과 평행봉을 했다. 나름대로 아주 건전한 '운동모임'이었는데, 조직 외에서는 "저 새끼들 뭐냐"는 식의 경계하는 시선도 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그때 이미 그저그런 약자들은 일단 모여야 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다. 1990년대 초, 그 당시는 '왕따'라는 개념도 없었고 신체의 일부와 같은 몽둥이를 깜빡 두고 수업 들어와 기분 상하신 선생님부터 우리를 싸대기로 교실 한바퀴 돌리는 게 다반사라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학폭'이 사회문제가 아니라 그냥 등교와 함께 시작되는 일상이었던 시절이라 모르긴 해도 '철봉파' 아니었으면 졸업 한참 후 "내가 지금 말로 왕따였구나" 추억할 놈이 한둘 아니었을 거다.
'범생이'도 '노는애'도 아닌 '철봉파'는 건드려봐야 별 거 없었겠으나 굳이 건드리는 애도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정상'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을터, 우리 조직과 친구들의 정신상태가 지금도 이상하다 싶은 경우도 없지는 않은데, 어른이 된 후 언젠가 처자식 대동하고 옛날 아빠 살던 동네와 초중고등학교를 우연히 돌아보던 중 그 '기원'을 추적하기도 했다.

선배나 강자들한테 끌려가던 추억의 경희대 크라운관 부근 '돌다방'은 그저 백면서생이었던 나로서는 철봉대보다도 추억이 없으나, 어린시절 동네 뒷산 '고황산'에서 동네형들한테 맞으면서 백원짜리 털리던 중 저 멀리 바라보던 고딕양식의 성당같은 건물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다 완공된 듯 하여 둘러보았는데, '인류사회재건', 문화세계창달', '밝은사회구현' 등의 구호와 함께 비둘기가 날아가는 부조와 괴벨스스럽게 횃불 들고 나팔 부는 동상들은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문구의 어깨띠를 둘렀더랬다.
경악한 나는 대체 뭐하는 곳인가 문을 열려고 했는데 자재도 완전 싸구려인데다가 조악한 스테인드 글래스가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 고딕건물, '평화의 전당'이라면서 월계수 잎을 문 비둘기 몇 마리 날리고 있었다.

이 사학재단 이거 완전 싸이코 냄새 난다 싶어 나는 '철봉파' 친구들 단톡방에 보고했다. 

"친구들아, 아마도 정신세계 이상한 사쿠라들에게 우리의 어린 영혼을 맡겼던 것 같다."

충격의 그 와중에도 대망과 선망의 '경희여고' 유적지는 백만년만에 발굴해냈고. 

우리들의 어린 영혼이 깃든 곳.
그 시절 철봉대는 비록 사쿠라들한테 유린당했으나, 졸업때 최종 명단 '15명'은 '주류'든 아니든 관계없이 지금도 건재하다.


"- 모르지, 맹탕 헷것이 눈에 보였는지두.
아버지의 늘쩡한 목소리가 귓전에 달라붙었다. 민홍은 찬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골목 저편에서 비닐봉지와 함께 다가온 바람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마리칼을 달싹이고 갔다. 민홍은 입을 굳게 다물어보었다. 그냥 그렇게 서 있고 싶었다. 불끈 쥐어본 주먹에는 연탄집게가 알맞춤하게 들어 있었다. 왠지 느꺼운 감정이 밀려오면서 저만치서 채 시작되지도 않은 겨울의 출구가 보이는 듯 했다. 그쪽은 맨발이었다."
- 김소진, <쥐잡기>, 같은책, 1991.


1997년, 군복무 중 소설가 김소진이 요절했다는 소식을 신문기사로 읽었을 때, 잠깐 눈물이 흘렀던가, 모르겠다. 머릿속에 '소설쓰기' 밖에 없었던 스물세살의 나는 아마도 많이 슬펐을 것이고 무언가 인생에서 큰 게 하나 빠져나간 심정이었을 텐데, 존경하는 고인께는 정말 미안하게도 그의 소설이 더 이상 변하지 않을 것임에 조금은 안도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주류 제도권'에 들어선 김소진은 이미 1996 ~ 1997년에는 <쥐잡기>에 실패한 어리숙한 운동권 대학생도, 도시빈민을 아마도 연민하면서도 담담히 묘사하던 신문기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지난 후, 여전히 비루하고 '열린 주류'에 끼지 못하던 스물일곱의 나는 <쥐잡기>를 실패한 소설 속 청년처럼 맨발로, 겨울바람 앞에 서 있었고, 여전히 김소진을 잊지 못한 채 그를 따라 써보려 했지만 내용은 진짜로 비루해진 이야기를 묶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하고는 마지막 교문을 나섰다.
어린 영혼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그 때 나간 교문은 내가 사회로 처음 들어가는 입구였다.

내 어린 영혼이 깃든 곳이 어디였는 지도 모른 채, "맹탕 헛 것이 보였는 지도 모르는" 그 아련한 시간이 내게서도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쥐잡기(1991), 김소진 소설집, <솔>,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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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과 문신 - 한국 중세의 무신 정권
에드워드 슐츠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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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권력'에 대하여
- [무신과 문신](2000), 에드워드 슐츠, 김범 옮김, <글항아리>, 2014.




"최씨 정권의 치명적 결함은 문신과 유교를 육성했지만 자신의 체제를 위한 새로운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문신의 지도력은 점차 구조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확립했고 무신의 이상을 무시했다. 그들의 유교적 신념-정통성은 국왕에게 있다는 생각을 포함해-은 지속적인 최씨 지배에 관련된 반감이 거스를 수 없이 급속해지는 현상에 반영되었다. 몽골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 없이, 최씨 정권과 무신 정권은 고려의 문치적 전통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 [무신과 문신], <9장. 최씨 정권의 난제>, 에드워드 슐츠, 2000.


고려 개국 후 과거시험을 통해 출사한 '문신(文臣)'이 왕조의 지배관료였다. 우리가 '장군'으로 알고 있는 윤관이나 강감찬은 모두 '문신'이었다. 여진이나 거란과 전투를 치른 건 '무신(武臣)'인 군인들이었으나 이 전쟁을 지휘한 것은 '문신'이었다. 
고려 지배층 또한 '문반'과 '무반'의 '양반'이었으나 '문치시대'를 연 고려에서 '무신'은 상대적으로 차별받았다. 고려의 과거시험도 문신관료를 선발하는 '문과(명경/제술과)'와 승려를 뽑는 '승과', 기술직 '잡과'는 있었으나 '무과'는 출세의 길로 인정받지 못했다. 고려는 초기부터 '문신'과 '무신'의 대립과 갈등을 줄곧 뿌리고 있었다. 그나마 무과에서조차 차별받던 서경(평양)에서 일어난 묘청의 난을 진압한 것도 [삼국사기]를 쓴 '문신' 김부식이었다. 12세기에 고려의 '문신'은 완전히 승리했다.


한국사를 전공한 하와이대학 에드워드 슐츠(Edward J. Schultz) 교수는 1970년대에 한국에서 공부하던 중, 당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을 보고 본인의 전공인 한국 중세사에서 '무신정권'을 연구하기로 한다. 
한국사에서 고려시대(918~1392)는 삼국시대와 조선을 잇는 시기로 학문적 대상 외에는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못 받았으나 조선말까지 1천 년간 '문치시대'의 짧지 않은 전통을 지녔다. 1170년부터 1세기 동안 존속한 '무신정권'은 일종의 '변칙'으로 여겨졌다. 역사적 의미는 없이 살인과 학살로 이어진 야만의 시대로 인식되던 중 1980년대 김당택 교수 등의 연구로 본격화되었고 미국의 한국사학자인 슐츠는 [무신과 문신(Generals and Scholars)]이라는 연구서를 냈다.

고려 의종은 집권 초반에 문반을 견제하기 위해 '견룡군'이라는 왕실 친위대를 각별히 대했으나 환관내시가 득세하면서 견룡군 또한 홀대를 받는다. 1170년 '무신의 난'은 그 동안 누적된 문무 차별에 대한 반란이었으나 이를 이끈 정중부는 오래된 무신집안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 한참이 지난 후 조선왕조 전주 이씨의 오랜 방계조상이 된 이의방이나 출신이 낮은 이고는 같은 견룡군의 상장군이었던 정중부를 앞세워야 뿌리깊은 문치주의 속에서 반대파 문신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신의 난 직후 무차별적 문신숙청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문신권력에 붙어 무신들을 박해한 문신들은 제거되었으나 중서문하성과 추밀원(이하 재추)으로 대표되는 문신관료기구를 제끼고 권력의 최고 합의기구가 된 중방에는 다수 문신도 참여했다. 이후 경주의 노비 출신이었던 이의민은 철저하게 사리사욕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다가 무신집안 출신 최충헌 장군에게 암살되지만 무신의 난은 권력운용에는 미흡했어도 문신과 무신이 동등하게 정권에 참여한 중요한 계기를 만든다.
무신집안 출신이었고 음서를 통해 문신으로 첫 관료생활을 시작한 장군 최충헌이 60년간 '최씨 정권'을 세웠을 때는 엄밀히 따지면 '무신정권'은 아니었다.

정중부와 경대승, 최충헌 등은 문신과 무신의 균형을 통해 고려를 지배하려 했고, 이의방과 이고, 이의민 등은 무신의 우세와 무력을 통한 지배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귀족정치의 배경에서 한미한 가문은 문신들의 지지를 얻기 힘들었던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의종을 결국 시해한 이의민은 오로지 무예 실력으로 출세한 자였고 국가의 '공공성' 자체를 모른 채 국가를 사익 추구의 도구로만 여겼다. 대기업 사장님 출신 대통령 이명박과 같다. 야차와 같은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는 거사 직후 바로 고려왕에게 보고하며 고려의 합법성과 정통성에 의지하고 심지어 무신 최충헌 장군은 고려를 개혁할 '봉사10조'까지 제출한다. 고려태조 왕건의 '훈요10조'를 상기시킴은 물론 신라 문신 최치원과 고려 문신 최승로를 따랐다. 물론, 고려의 토지개혁과 불교개혁 등의 심오한 내용을 망라했던 최충헌의 '봉사10조' 또한 사문서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최충헌 정권은 문신을 우대했고 유학과 문학을 장려했으며 과거시험을 통한 문신관료 배출을 확대했다. 
고려 최고의 천재라는 [동국이상국집]과 [동명왕편]의 이규보도 최씨 정권이 키운 문신이었으며, '단군'을 시조로 기록한 일연 국사의 [삼국유사]가 지어진 때도 바로 이 시기였다.


"보수적 인물인 최충헌은 문반 지배층을 행정에 복귀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유교 이념을 후원해 왕정을 계속 인정하겠다는 생각을 확인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합의제 기구에 계속 의존하고 사회적 해방을 제한해 사회질서를 동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최충헌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공적/사적 기구를 모두 활용하는 혁신적인 '이중 조직'을 발전시켰다. 최씨 정권이 고려를 통치한 기간에 전통에서 벗어난 사례는 여럿 있었다. 무신 집정에게 충성하는 사병은 곧 관군을 대체해 권력을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세력이 되었다. 최충헌과 그의 가족은 이런 새 질서를 지배했다. 최씨 집정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들은 문객(門客)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비슷한 충성관계가 그 밖의 군사와 지도자 사이에서도 발전했다."
- [무신과 문신], <머리말>, 에드워드 슐츠.


최충헌이 세운 60년 '최씨 정권'의 몰락은 그 자체의 모순으로 잠재해 있었다. 기본적으로 스스로 왕이 될 수 없었던 중국과의 대외정세를 배경으로 '왕권'의 '공적기구'를 인정하면서 '최씨'의 '사적기구'를 병립시킨 '이중적 행정(슐츠, 같은책)'과 그로 인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괴리가 근본 문제였다.

'무신정변'의 혼란을 진압한 최충헌은 문/무반의 균형을 통해 비교적 안정적 국정운영을 한 것으로 슐츠 교수는 평가하고 있다. 최충헌 본인은 허수아비 왕들을 갈아치우면서 '교정도감'과 '도방', '정방', '야별초' 등의 사적 기구를 통해 권력을 이어갔고 그의 아들 최우 또한 아버지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집정을 했다. 최항과 최의 등 최우의 후계자들에 이르러 최씨 정권은 본격적으로 무너지는데, 공적으로는 토지개혁을 하고 사적으로는 진주와 전라지역의 곡창지대, 강화도 등의 대토지 소유 확대한 '이중성', 이의민 같은 천민노비 출신의 사회진출을 억압하고 만적의 난 등 노비반란을 잔인하게 탄압한 반면 본인에게 충성하는 천민은 승진시키는 '이중성', 불교종파 교종을 억압하면서 선종을 지원했지만 불교의 부정부패를 키운 '이중성' 등이 더욱 역동적으로 기능한다. 최씨가 무너진 후 무신정변 마지막 집정 김준은 노비 출신이었다. 
결국, 최씨 정권이 앞에 내세우기는 했으나 그들의 '사적 권력'으로 억압되고 무력화된 '공적 권력', 즉 고려왕조는 몽골에 복속되면서 다시는 '공적 권력'이 되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한편,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까지 25년 간 몽골에게 저항했는데, 이 역시 '항몽투쟁'이라기 보다는 '사적 권력'을 지키려는 '생존투쟁'에 가깝다.'공적 권력'인 고려왕조는 한반도 지배를 위해 존속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사적 권력' 최씨 집안은 멸족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삼별초 항쟁 또한 그시작은 '사적 권력'에 대한 충성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 몽골의 '제국'적 실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정미7적', '을사5적' 따위 등 우리 근대사의 친일 지배계급 보다 낫다고 볼 수는 있겠다.

'안정된' 권력자였던 최충헌과 최우가 왕이 되기를 포기한 이유를 슐츠는 중국과의 대외정세로 본다. 한반도의 왕조교체는 당시 중국에 강력한 통일정권이 있을 때는 불가능했다는 것인데, 고려 개국 시 중국은 5대10국이었고, 조선은 원-명 교체기였기에 가능했다. 아마도 금나라가 강대하지 않았다면 고려와 조선 사이에 '최씨 왕국'이 잠시 존재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최충헌과 최우에게는 불교 선종 외에 지배이념이 약했다. 고려의 개국이념이 후삼국 혼란기에 불교를 기반한 풍수지리설이었다면 조선의 개국이념은 당시에는 진보적이었던 성리학적 '민본사상'이었다.
최충헌의 선종은 정치이념이 될 수 없었고, 그들의 유학사상은 결국 최고집정자 1인이 사라지면 함께 흩어지면서 결국 고려왕조의 '공적 권력'을 찾아갈 수 밖에 없는 문신의 지배사상이었다.


오래전 '왕조시대'에서 '공공성(公共性)'을 담보하는 유일하고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군주제'였다. 근대에 들어서야 '공화제'가 정치개념으로 정립되고 왕을 단두대에 세우지만, 우리 역사만 해도 20세기에 들어서야 '왕이 없는 세상'을 알게 되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현대의 군주'로 대중적 (진보)정치정당을 호명했지만 지금의 '군주'는 단연 대다수 '민중'이다. 이 다수가 지도하는 '공화국'이야말로 '공공성'을 실현하는 최고의 정치권력이다. 공익이 아닌 사익에 기반한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공공성'이다.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의 배경에도 최충헌 시대처럼 '이중 권력'이 있었으나, 세상을 바꾼 것은 노쇠하거나 쇠약해진 소수의 '국가'가 아니라 '공공성'을 담보한 다수 대중의 소비에트였다. 
무신정변기 '이중 권력' 중 '최씨 정권'은 '공공성'과 거리가 매우 먼 '사익추구집단'에 불과했으며, 이의민과의 차이는 개인이 다 해 먹느냐 집안이 다 해 먹으냐는 규모의 차이였다.

예나 지금이나, '공공성'을 둘러싼 국가권력과 시민사회 간 '이중 권력'의 투쟁이 되어야 사회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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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과 문신(Generals and Scholars : Military Rule in Medieval Korea)](2000), Edward J. Schultz, 김범 옮김, <글항아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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