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 중국사 11 : 위진풍도 이중톈 중국사 11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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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의 전공, '제2제국'
- [위진풍도] / [남조와 북조] / [수당의 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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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제국인 진한은 441년이고 제2제국인 수당은 326년이며 제3제국인 송원은 416년, 제4제국인 명청은 543년이다. 그 밖의 369년은 분류가 불가능해 별도로 취급할 수 밖에 없다.
그 369년은 바로 위진남북조다."
- [수당의 정국], <1장. 수양제>, 이중톈, 2015.


2006년 중국중앙텔레비전방송(CCTV)의 인문강연 프로그램인 '백가강단'에서 '한나라 시대의 풍운아들'이라는 주제로 인기를 끌고는 이를 [삼국지를 품평하다(品三国)/국역:삼국지 강의/2007)]라는 책으로 펴내 '삼국지 르네상스'를 이끈 '중국 최고 인기 역사고전해설가' 이중톈(이중텐:易中天)은 2013년 5월부터 '이중톈의 중국사'를 집필하고 있단다. 순환을 의미하는 '완전한 수'인 '3'의 배수를 좋아하는 중국인답게 총 6부작에 각 부 6권의 시리즈로서 중국 '삼황오제'의 '선조'부터 등소평 시대까지 총 '36권(6부X6권)'으로 계획되었는데, 6가지 계략당 각 6가지 계책으로 구성된 '36계'가 연상된다. '6X6=36'이나 '9X9=81' 또는 손오공의 '일흔두(3X24=72)가지 도술' 따위 민간에 떠도는 숱한 '3'의 배수들은 사실 구체적 숫자가 아니라 "무한히 많다"는 뜻이다. 아무튼 방송이나 강연을 통한 '무한한' 돈벌이를 포기하고 시골에 틀어박혀 집필에 전념하는 이중톈은 '분기당 2권 출간'의 애초 목표에는 미치지 못한다지만 2018년 현재 중국에서는 20권 정도 냈다고 한다. 우리는 2021년 현재 13권 [수당의 정국]까지 번역되어 나왔다.
1947년생으로 일흔이 넘은 유명 역사학자 이중톈은 '돈벌이'는 포기했지만 추리소설을 틈틈이 읽는 것은 포기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의 특이한 '중국사' 글쓰기의 특징은 "간결하고 단순한 문체", 그리고 "추리소설과 시나리오 기법"이다. [사기], [한서], [삼국지], [진서], [당서], [자치통감] 등의 문헌이나 문물 고증을 통해 '역사서'로서 당연히도 엄밀하고 사실적인 서술을 지향하지만 역사의 순서를 설명하느라 사실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는다. 논문이 아니므로 모든 것을 담기 위해 모든 역사적 사료들을 늘어놓고 분류하지 않는다. 내가 읽기로는 일종의 '문화사'로 그 시대의 특징을 정의하려는 목표로 수렴하기 위해 '추리소설'이나 '시나리오'처럼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그러므로 독자는 둘 중 하나일 테다.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이미 알고 있든지, 그런 사소한 일들은 관심없고 각 시대의 특징만 파악하든지.

원래 미학자인 이중톈의 전공은 '위진남북조와 수당의 역사문화'라고 한다. 중국사는 사마천 [사기]로 방향을 잡고 진수의 [삼국지]와 증선지의 [십팔사략]으로 충분하다 생각하는 나는,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를 읽을 마음은 없었다. 다만 [삼국지 강의]로 역사 '르네상스'를 '재부흥'시켰던 그가 본인의 '전공'에 해당되는 시기의 이야기들은 과연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 시작은 [위진풍도(魏晉風度)]다. 

그는 중국의 역사시대를 진시황 통일 전 춘추전국 시대까지의 '방국시대' 즉 지방국가 또는 열국의 시대와 진한부터 명청까지 통일왕조의 '제국시대'와 신해혁명 이후의 '공화국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약 2천년을 아우르는 '제국시대'는 또 다시 1~4제국으로 나뉘는데, 진나라와 한나라는 '제1제국', 수나라와 당나라는 '제2제국', 송나라와 원나라는 '제3제국', 명나라와 청나라는 '제4제국'이다. 이 중 이중톈의 전공은 '제2제국' 수-당 시대에 해당되는데, 이를 예고하는 시기가 '오호십육국'과 '위진남북조' 시대이며, 이 시대를 설명하는 문화적 풍류가 바로 '위진풍도'인 것이다.


"춘추전국의 결과로 첫 번째 제국('제1제국'), 즉 진한과 한나라 문명이 탄생했다. 위진남북조의 결과는 두 번째 제국('제2제국' 수당)과 당나라 문명의 탄생이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두 문명을 비교하여 위진은 춘추에 해당하고 남북조는 전국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주나라의 착오는 제도... 한나라의 골칫거리는 문화... 그래서 춘추전국 이후에 탄생한 것은 새 제도였고, 위진남북조 이후에 탄생한 것은 새 문화였다. 한나라 문명과 비교하여 당나라 문명은 한층 개방성과 포용성을 갖췄으며 유교숭배도 유, 불, 도의 삼교합류로 바뀌었다. 물론 국가적 사상과 주류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유학이었다.
이것이 바로 위진남북조의 역할이었다."
- [위진풍도], <5장. 가치관>, 이중톈, 2015.


후한 말기 '삼국지'의 난세를 거쳐 사마의 집안이 치밀한 준비를 통해 창업한 진(晉)은 중앙집권의 군현제를 정착시킨 진한 '제1제국'의 업적을 뒤집어 다시금 사마씨 왕자들에게 분봉을 하는 '봉건제'를 채택함으로써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는데, 진무제 사마염의 할아버지 사마의라는 인물 자체가 '국가'나 '공공성'보다는 가문의 생존을 우선시했던 '사(士)족 집단'의 기원이었다. 이들 사마씨 왕자들은 황권을 두고 서로 죽고 죽이는 '팔왕의 난'을 거쳐 이들에 기생하는 '사족'들을 낳았고 반란의 전투력은 사방의 이민족 '용병'들의 군사적 응집을 도왔으며 결국 북방의 '대기근'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4세기에 북방 유목민들이 서방의 지중해와 중앙의 '중간 지대' 및 동방의 '중원'으로 비슷한 시기에 대거 이동할 때, 동아시아의 남쪽으로 쫓기면서 '패수' 아래 강남지방에 '사족 집단'이 중심이 되는 중국의 '남조'를 이어간다. 장안과 낙양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중원'으로서 북쪽은 이후로 약 한세기 넘게 흉노, 갈, 저, 강, 선비족의 '다섯 오랑캐(5호)'가 16국'(이중톈은 '18국')을 번갈아 세우다가 결국 선비족의 '북위'가 통일하고, 사마씨의 '서진'이 망하고 '사족'들과 달아나 자리잡은 남쪽에서는 동진-유송-남제-양-진(陳)의 단명왕조와 대립하는 '남북조' 시대가 또 한세기 이상 지속된다. 이 당시 정착화되려는 유목민족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북쪽 절반을 갱신해간 한편, 무능과 사치향락의 극치를 보여주던 강남의 '사족'들은 술과 약물, 고담준론과 시로 세월을 보내며 '위진남북조'의 문화를 형성했는데, 당대의 잘생긴 '사족' 출신 귀족 남성들은 기존의 '남성적' 영웅호걸의 이미지와는 달리 화장을 하고 '여성화'된 연약하거나 혹은 병약한 스타일로 연예인 못지 않은 유행을 선도했단다. 원래 풍체가 당당했던 제갈량이 잘생긴 미남에 하얀 피부를 지닌 것으로 묘사된 [삼국지연의]의 문학적 표현은 아마도 이런 '위진풍도'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남조의 '사족(士族)'들은 지위는 높으나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실질적인 실무를 맡은 한단계 아래 '서족(庶族)'들이 실력과 신망을 쌓아 남조의 새로운 왕조를 거듭 개창하였으나 귀족적이고 사치한 강남 '사족' 중심의 '풍도'에 지배당해 결국 북쪽을 완전 통일한 '선비화된 한족' 수문제 양견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이데올로기는 유교가 주가 되고 불교와 도교를 함께 받아들이는 형태가 돼야 했다...
북주 무제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다른 이들도 틀리지는 않았다. 사실 (북위) 태무제가 도교를 신봉한 것도, 양 무제가 불문에 귀의한 것도, 그리고 북주 무제가 유학을 추종한 것도 모두 미래에 삼교(유-불-도)가 합류해 장기간 공존하게 되는 것에 대한 준비였다. 그 세 황제는 모두 열린 마음과 긴 안목을 가진 채 자신이 어느 민족에 속하는지 괘념치 않았고 심지어 민족의 이익에 위배되는 일도 서슴지 않고 행했다. 그래서 수문제 양견이 다시 한족 성으로 돌아와 불교를 믿기 시작했을 때 더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새 문명이 도래했다."
- [남조와 북조], <5장. 새 문명의 재창조>, 이중톈, 2015.


이중톈의 표현에 의하면 '기생충'이나 '암세포'와 같은 '사족'들의 '풍류'가 만연하던 '위진풍도'의 "혼란과 분열은 새로운 조합을 의미할 뿐이며 그 조합의 전제는 융합([위진풍도], <5장>)"이라면서, 이중톈은 '남북조'로의 필연적 이행을 말한다. '5호16국'의 '혼란'과 '분열'은 사실상 중국 문명의 업그레이드 전환기였고 통일제국을 향한 남조와 북조의 끊임없는 노력은 기왕에 '중원'에 국한되어 있던 '제1제국'의 시야를 넓혔다. 강남 지역은 '삼국지' 손권의 오나라의 중흥에도 불구하고 중원에서 보기에 '오랑캐'의 땅이었으나 '위진풍도' 덕분에 비로소 '문화'적으로 개화되었고 '오랑캐'에게 빼앗긴 북방의 '중원'은 열심히 '혼혈(hybrid)'을 거듭했다. 이중톈은 "남북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중국 문화도 없다([남조와 북조])"고 말한다. 북조는 결국 선비족의 승리로 탁발(척발)씨의 '북위'가 통일했다. 태무제 탁발도는 도교를 기반으로 유교와 불교를 융합하기도 했으나 불교를 중시하던 태자 탁발황 세력과 대립하며 불교를 금지하는 '대법난(446년)'을 일으키기도 했고, 남조 양나라의 무제는 불자를 자처하며 공자와 노자(신선)를 부처의 제자로 만들려고 했다지만 결국 이데올로기적으로 유-불-도의 '삼교' 융합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적극 시도된 것 또한 '위진풍도'라 할 수 있겠다. 

탁발씨의 북위가 선비화된 한족 고씨의 동위와 한족화된 선비족 우문씨의 서위로 또 다시 분열되었을 때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이어졌고 문명화가 다소 늦었던 북주의 무제가 유교를 중심으로 불교와 도교를 융합한 지배이데올로기 정립과 국가제도의 혁신을 통해 북방 재통일의 기반을 다지다가 죽고, 그의 사위인 선비족 이름 '보륙가 나라연'이 자신의 한족 성을 되찾아 '양견'이 되었을 때는 이미 선비족을 위시한 '5호'와 한족의 '혼혈'이 한창 때였을 것이다. 북주-북제-남진의 '삼국시대'를 잠시 거쳐 수문제 양견이 중국을 다시 통일했을 때 중국은 '제1제국' 당시의 중국이 아니었다. 연간 등강수량 800밀리미터 기준선인 회하와 진령의 '북위 33도'는 중국의 남북을 가르는 선이라는데, 이를 넘어 남진을 멸한 수나라의 대원수는 수문제의 둘째아들인 스무살 양광, 즉 훗날의 수양제였다. 그는 남조 진나라 마지막 황제 진숙보를 폐하면서 혼폭의 군주라는 뜻의 '양(煬)'이라 불렀다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이 후대인 당나라에 의해 '수 양(煬)제'로 불리게 된다.

대운하를 파고 무리한 순행과 원정을 일삼으며 고구려를 계속 점령하려다가 멸망한 수나라는 수문제 양견의 '개황'의 치세에는 중국 역사 그 어느 때보다 부유했고 빠르게 전란을 딛고 안정을 찾았다. 수양제는 아버지를 죽이고 태자 자리를 빼앗아 황제가 되었다는 의혹을 계속 받았고 사치와 향락, 무리한 정벌로 수나라를 망하게 한 '혼폭'한 군주 '양(煬)'이 되었으나 기실 당나라 '정관의 치'를 열었다는 당태종은 그의 판박이였다. 그들 둘은 '쿠데타'를 통해 황제가 되었고 고구려 정벌을 무리하게 시도한 점이 똑같았다. 그들의 쿠데타는 기존 황태자의 기반이었던 '관농(관중-농서) 세력'에 반발한 새로운 세력의 정치 노선투쟁이었다. 남진을 멸하고 강남 출신 배우자를 얻은 수양제는 기존 장안 일대를 중심으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과 투쟁하여 승리했고 남북을 잇는 대운하를 완성하여 중국 대륙내 문화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지속된 원정으로 수도인 장안 세력의 지지가 취약했던 당태종 이세민은 역시 기득권 세력인 황태자 이건성을 비롯한 형제들을 죽이고는 지역적 '패도(霸道)'가 아닌 전국적 '왕도(王道)'를 실현한다면서 위징과 함께 '정관의 치'를 연다. 그리고는 서쪽의 돌궐을 장악하여 '천카간'의 명예를 얻고 당나라의 문화적 영토를 서역까지 넓히면서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물론 동쪽의 고구려 원정은 수나라처럼 실패하였으나 결국 후대에 이르러 고구려에 대한 '원한'은 풀고야 말지만 이 '제국'은 지역적 영토를 넓히자 마자 얼마 안 가 '안사(안록산-사사명)의 난'이라는 내분으로 무너지는 역사의 경향적 '법칙'을 재차 증명한다.
수양제 양광이 없었다면 당태종 이세민도 없었다는 게 이중톈의 시각이다. 다만, 수양제와 당태종의 결정적 차이는 양제에게 민중들은 안중에도 없었던 반면, 수나라 말기 '반란'으로 일어섰고 현무문의 '쿠데타'로 등극한 당태종은 민중들의 눈치를 보는 척이라도 하는 '인의'의 '왕도'를 지향했던 점이었다. 


"당나라인... 그들은 우세했고 우월했지만 우월감은 없었다... 문명은 사유재산이 아니고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실로 '대국의 풍모'였다.
이제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농업제국은 원래 확장성이 있었으며 수당은 또 혼혈왕조인데다 중국 문화의 우세까지 겸하여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세계성을 띤 문명을 창조해낸 3대 원인이었다. 비잔틴, 아랍과 함께 3대 제국이 되기에 충분했다."
- [수당의 정국], <5장. 세계 제국>, 이중톈, 2015.


이중톈의 '제2제국' 수-당 시대는 '위진풍도'에 기반한 혼혈과 융합, 남북조의 확장과 소통에 기반한 '세계 제국'이었다. 
당나라는 사방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당대의 '대국'으로서 이곳을 중심으로 융합되고 발전한 문화가 각 지역으로 이륙하는 "문화의 항공모함"([수당의 정국], <5장>)이라는 표현까지 쓴다.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70대의 역사학자로서 '마지막 사명'과 같은 중국사 집필의 목적지가 '하나의 중국'이겠거니 생각하면 뭐 특별하달 것은 없겠다. 다만, 수당 시대의 '3성6부'의 중앙집권 정부 제도의 정착과 찰거와 천거 등 오래된 관리 선발제도와 차별된 과거 시험 도입 등의 제도적 역할, '한족 우위'의 신화를 벗어나 '혼혈(hybrid)'을 거쳐서야 한단계 문명이 진보할 수 있었다는 계보학적 관점은 수긍할 만 하다. 서방의 고대 로마나 당나라, 현대의 미국과 같은 '세계 제국'의 공통점일 수도 있겠는데, 이중톈은 중국 한나라와 동서로마, 당나라와 비잔틴 동로마 등을 지속적으로 비교하며 나름의 세계사적 '역사법칙'을 증명하기도 한다. 

중국인 이중톈의 '중국사' 중 '제2제국' 이전 이야기들은 별로 읽고 싶지는 않다. 그의 문체가 재미있기는 해도 굳이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 선상에서 펼쳐질 그들 선조들 얘기를 읽을 필요성은 못 느낀다. 또한 "황제 아래 만민이 평등"하므로 "제국에는 계급이 없다"는 식의 이중톈의 관점은 인류 역사에서 '제국'이 가장 합리적인 체제였다는 식으로 보는 유발 하라리 같은 시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왕이 없는 '공화국'의 정치체제를 가장 선호하는 나는 '제국'의 긍정성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하여 이중톈의 '제2제국'을 들여다 보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간결한 문체와 추리소설 기법"으로 재생되는 역사는 그 자체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

1.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2. [남조와 북조 - 이중톈 중국사 12](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0.
3. [수당의 정국 - 이중톈 중국사 13](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1.
4. [삼국지강의(品三国)](2006), 이중톈, 김성배/양휘웅 옮김, <김영사>, 2007.

* [빛나는 세계 제국 : 수당시대], 게가사와 야스노리(氣賀澤保規), 2014.
: 이중톈이 [수당의 정국]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 일본 메이지대 동아시아 석각문물연구소장 게가사와 야스노리의 위 책은 국내 번역되면 읽어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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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리커버 개정판) - 국내 최초 수메르어·악카드어 원전 통합 번역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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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의 '문자', 인류 최초의 '사상'적 문헌
-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휴머니스트>, 2005~2020.



"조지 스미스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지 12년 뒤(1872년)에 서판을 해독한 내용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로써 그는 종교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 놓았다...
물론 '홍수 서판'의 중요성은 비단 종교의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홍수 서판'은 문학의 역사에도 중요한 증거자료다. 스미스의 '홍수 서판'은 기원전 7세기에 나왔으나 이제 우리는 원래 그보다 1,000년 앞서 기록된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야기를 전하는 이들이 그 홍수 이야기를 세계문학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서사시인 저 유명한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로 엮은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길가메시는 불사의 삶과 자각을 찾아 웅대한 여정에 오르는 영웅이다. 그는 악마와 괴물들을 만나 싸우며 온갖 역경을 극복한다. 그러다 후대의 서사시 영웅들처럼 마침내 자신의 본성과 유한한 운명이라는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하기에 이른다. 스미스의 '서판'은 이 이야기 가운데 열한째 장에 지나지 않는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훌륭한 이야기의 요소를 모두 갖췄을 뿐 아니라 문자기록의 역사에서 일대 전환점을 이루기도 한다... 
이야기는 대개 말이나 노랫말 형태로 기억을 통해 전승됐다. 그러다가 4,000년 전쯤에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이야기가 점차 기록으로 남기 시작했다... 문자는 이야기의 저작권을 공동체에서 개인에게로 이양했다. 더욱이 기록된 문서는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특정 양식의 이야기가 더 많은 언어로 쉽게 전해질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기록된 문학은 '세계 문학'으로 부상했다... 여기 이 스미스의 '홍수 서판'에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가 출현하면서 문자는 사실을 기록하는 수단에서 사상을 연구하는 수단으로 옮겨갔다."
-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16. 홍수 서판(700~600 BC), 대영박물관.


인류 문명사에서 '최초'를 떠올려 본다. 
'최초'의 문자, '최초'의 숫자, '최초'의 족장, '최초'의 국가, '최초'의 제국 등. 정착과 농경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큰 강물의 범람으로 비옥한 토지에 기반한 공동체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황하', '인더스강', '나일강'의 '4대 문명 발상지'로 기억된다. 이 중 대부분의 '최초' 문명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의 삼각주인 이른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비롯된다. 이라크 지역 일대인 이 '중간 지대'는 동서남방의 각 문명이 교차하는 지대였을 것이다. 그로 인해 점토 서판에 기록된 문자와 회계장부, 5천년 전 '최초'의 언어와 문자인 '수메르어'와 '최초'의 세습체제 '우루크' 왕조, 4천5백년 전 '아카드어'와 '최초'의 도시국가 '아카드', 4천년 전 히브리족의 조상인 '최초'의 족장 '아브람', 3천5백년 전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과 아시리아와 바빌론을 유린한 히타이트의 철기 문명, 배타적 유일신교의 최고봉인 '유대교'의 구약과 '최초'의 제국인 페르시아 문명 등 인류 문명의 프로토 타입이 바로 '중간 지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다. 아마도 '우루크'의 후예인 '이라크'가 지역의 맹주를 자처하며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 배경도 그러한 '자부심'에 기초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외세에 의해 유린당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라크박물관'은 '대영박물관' 못지 않은 위엄을 갖추었지 않았을까.


1860년대 대영박물관 인근 인쇄소의 도제로 일하던 조지 스미스(Georgy Smith : 1840~1876)라는 청년은 점심시간만 되면 박물관에 와서 오래된 점토 서판을 들여다 보았단다. 이를 지켜본 비문 발굴자이자 설형문자 해독자인 헨리 롤린슨 경이 스미스에게 본인의 연구방으로 들어올 수 있는 특혜를 주었고 결국 조지 스미스는 서른 두살에 인류 문명에 한 획을 긋는 서판 하나를 '최초'로 읽어 내려간다. 이 서판이 바로 기원전 7~8세기에 쓰인 '홍수 서판'이었다. 구약 '창세기'에나 존재하던 신의 징벌로서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전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서 기록된 증거였고, 이 기록의 '문자'로 인해 가능해진 인류 서사의 향연과 '세계 문학'의 발견이었다. 
19세기 당시는 찰스 다윈으로 대표되는 '생물학'으로서 근대 과학의 발전이 정점을 향하던 시절이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물리학'과 18세기의 '화학'에 이은 이 과학의 진격은 기존 종교와 신화에만 의지하던 인류 문명을 한 단계 질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일종의 '문헌고고학' 분야의 과학자로서 스미스는 점토 서판의 해독을 통해 수천년 전 '대홍수'의 자연적 재앙을 증명했고 이후 인류 '최초'의 대서사시인 '길가메시(길가메쉬:Gilgamesh)' 이야기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가 1872년에 처음 읽어내린 '홍수 서판'은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의 열한번 째 장이었던 것이다. 


"길가메쉬(길가메시)가 '멀리 있는 자' 우트나피쉬팀에게 말했다.

'우트나피쉬팀이여. 제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당신 모습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저와 같습니다!... 말해주십시오. 어떻게 당신이 신들의 회합에 나설 수 있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영생을 얻게 되었는지를!'

'길가메쉬, 내가 너에게 숨겨진 사실을 말해주리라. 신들의 비밀을 네게 말해주리라! 너도 분명히 알고 있는 슈루파크라는 도시가 유프라테스 강둑에 있었지. 정말로 오래된 도시였고, 그곳에 신들이 살고 있었다네. 위대한 신들이 사람에게 홍수로 벌을 주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지혜의 왕자 에아가... 그들이 나눈 대화를 갈대 담에 대고 반복해서 말했지... 오, 슈루파크의 사람이여... 집을 부수고 배를 만들어라! 재산을 포기하고 생명을 찾아라! 소유물을 내버리고 생명을 유지하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배에 태우고..."

-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21. 우트나피쉬팀의 홍수 이야기', 김산해.


구약 <창세기>에 신은 노아에게 전나무로 배를 만들어 암수 생명체 한 쌍씩 싣고 숨으면 40일 간 밤낮으로 큰 비를 내려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쓸어버리겠다고 경고했다는데, 이는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들이 탐욕해지는 당시 현실에서 대홍수라는 대재난이 '신의 징벌'이었다는 종교신화적 전설이었다. '홍수서판'에 의하면 또 다른 신이 또 다른 인간에게 경고한 내용이 히브리어 성경보다 더 오래된 수메르어 또는 아카드어 문자로 기록된 바, 이는 아마도 오래전 언제쯤 대홍수의 자연재해로 그 일대의 인류 문명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그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현자(賢者)' 또는 '반신(半神)' 같은 존재로 대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약의 '노아'는 우루크 왕 길가메시 서사시의 '우트나피시팀', 수메르의 '지우수드라' 등으로 등장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최초 세습왕조 '우루크'의 5대 왕이었던 기원전 2천8백년의 '길가메시'는 키가 5미터에 짐승같은 완력의 지배자로서 세상 모든 새색시들과 먼저 동침하는 흡사 중세 영주의 '초야권'을 앞서 행세하던 폭군이었다. 세상 누구도 그를 제압할 수 없었는데 이를 본 수메르의 신은 '엔키두'라는 또 다른 짐승을 창조한다. '엔키두'라는 이 짐승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같은 '최초'의 인류 같은 느낌인데, '우루크' 왕조의 자손인 길가메시는 '반신반인'이었다. 어머니는 농경문화에서 너무도 중요한 들소의 신 '닌순'이었다. 신은 이 '반신반인'의 폭정을 막기 위해 진정한 인간 '엔키두'를 창조하고 당시 '비너스'와 같은 '샴하트'를 보내 동침을 시켜 '엔키두'를 문명화한다. 이제 '섹스'를 통해 진짜 인간으로 진화한 '엔키두'는 '길가메시'와 똑같은 용모와 힘으로 이 폭군 길가메시와 대적하고 건곤일척의 대회전 후 친구가 된 둘은 함께 모험을 떠나게 된다. 길가메시의 또 다른 모습으로서 엔키두는 삼나무 숲의 산신 '훔바바'에게 도전하려는 무모한 길가메시에게 지속적으로 신중함을 권유하다가 결국 따라나서서는 중도에 포기하려는 길가메시에게 끝까지 과업을 완수할 것을 종용하는데, 결국 엔키두와 함께 온갖 모험을 겪으면서 더욱 강해진 '반신반인' 길가메시는 '인간' 엔키두의 죽음을 보며 '영생', 즉 죽지 않는 삶을 찾아 왕좌까지 내던지고 또 다른 모험을 한다는 이야기가 [길가메시 서사시]다. 결론적으로 신으로부터 왕의 권력은 부여받았으되 '영생'은 허락받지 못한 길가메시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대홍수' 속에서 살아남아 인류 문명을 보전시킨 현인 '우트나피시팀(지우수드라)'을 찾아가 '영생'의 '신'이 되는 방도를 묻지만 답을 얻지 못한다.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지 못한 길가메시는 결국 '슬퍼하지도, 절망하지도, 의기소침하지도 말라'는 신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절망과 의기소침과 분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 '서사시'의 기록자는 그럼에도 "길가메쉬, 쿨아바의 주님. 당신을 칭송하는 일은 즐겁습니다!"(같은책, '23. 길가메쉬의 죽음')라며 이 서사시를 끝맺는다.


[사피엔스]의 '빅 히스토리언' 유발 하라리는 현대와 미래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능력과 수명은 연장될 것이며 결국 '인간'으로서 '사피엔스(Sapiens)'는 '영생(永生:eternal life)'을 구하여 스스로 신(神:Deus)으로서 '호모 데우스(Homo Deus)'가 된다는 장대한 계획을 '길가메시 프로젝트(Gilgamesh Project)'라 명명한다. 과학은 설령 실패할지라도, 또는 악마의 힘을 빌어서라도 그 목표를 향한 실험을 끝까지 밀어 붙인다. 나치의 파시즘적 광기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과학자들은 전쟁기술을 발전시켰고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인류를 죽인 이 과학기술의 힘으로 지금을 사는 우리는 현대문명의 풍요와 편의를 한껏 누리고 있다.

황하 문명에서 나온 다양한 인간군상과 집단들과 사상들의 쟁투를 거쳐 동아시아 문명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도 역시, 오래전 메소포타미아 '중간 지대'의 강력한 권력자 길가메시처럼 '영생'을 꿈꾸었다. 그러나 오히려 욕심과 '과로'가 심해 그의 통일제국 진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했고 덕분에 고대의 '도술가'들은 진시황에게 사기는 쳤어도 당시의 '과학'이었을 '음양학'과 '도술학' 등을 한층 발전시켰을 수도 있겠다. 중세에 '영생'을 연구한 신비주의적 연금술은 이후 화학의 발전에 기여했다지 않은가.

하인리히 슐리만에게 고대 그리스 문명 발굴의 꿈을 꾸게 했던 2천8백년 전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나 1천2백년 전 게르만족 영웅 서사시 [베어울프]보다 훨씬 전인 약 4천년 전에 인류 최초의 문자로 기록된 '세계 문학'의 시초인 [길가메시 서사시]는 '죽음'이라는 숙명과 그 앞에서의 공포를 딛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려는 인간의지를 인류라는 종(種)에게 심어준 최초의 '사상적 문헌'이다.


***

1.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기원전 20세기), 김산해 지음, <휴머니스트>, 2005~2020.
2.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닐 맥그리거(대영박물관장), 김미경 옮김, <다산초당>, 2014.
3.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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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 대영박물관과 BBC가 함께 펴낸
닐 맥그리거 지음, 강미경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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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의 '문자', 인류 최초의 '사상'적 문헌
-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휴머니스트>, 2005~2020.



"조지 스미스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지 12년 뒤(1872년)에 서판을 해독한 내용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로써 그는 종교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 놓았다...
물론 '홍수 서판'의 중요성은 비단 종교의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홍수 서판'은 문학의 역사에도 중요한 증거자료다. 스미스의 '홍수 서판'은 기원전 7세기에 나왔으나 이제 우리는 원래 그보다 1,000년 앞서 기록된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야기를 전하는 이들이 그 홍수 이야기를 세계문학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서사시인 저 유명한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로 엮은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길가메시는 불사의 삶과 자각을 찾아 웅대한 여정에 오르는 영웅이다. 그는 악마와 괴물들을 만나 싸우며 온갖 역경을 극복한다. 그러다 후대의 서사시 영웅들처럼 마침내 자신의 본성과 유한한 운명이라는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하기에 이른다. 스미스의 '서판'은 이 이야기 가운데 열한째 장에 지나지 않는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훌륭한 이야기의 요소를 모두 갖췄을 뿐 아니라 문자기록의 역사에서 일대 전환점을 이루기도 한다... 
이야기는 대개 말이나 노랫말 형태로 기억을 통해 전승됐다. 그러다가 4,000년 전쯤에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이야기가 점차 기록으로 남기 시작했다... 문자는 이야기의 저작권을 공동체에서 개인에게로 이양했다. 더욱이 기록된 문서는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특정 양식의 이야기가 더 많은 언어로 쉽게 전해질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기록된 문학은 '세계 문학'으로 부상했다... 여기 이 스미스의 '홍수 서판'에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가 출현하면서 문자는 사실을 기록하는 수단에서 사상을 연구하는 수단으로 옮겨갔다."
-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16. 홍수 서판(700~600 BC), 대영박물관.


인류 문명사에서 '최초'를 떠올려 본다. 
'최초'의 문자, '최초'의 숫자, '최초'의 족장, '최초'의 국가, '최초'의 제국 등. 정착과 농경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큰 강물의 범람으로 비옥한 토지에 기반한 공동체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황하', '인더스강', '나일강'의 '4대 문명 발상지'로 기억된다. 이 중 대부분의 '최초' 문명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의 삼각주인 이른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비롯된다. 이라크 지역 일대인 이 '중간 지대'는 동서남방의 각 문명이 교차하는 지대였을 것이다. 그로 인해 점토 서판에 기록된 문자와 회계장부, 5천년 전 '최초'의 언어와 문자인 '수메르어'와 '최초'의 세습체제 '우루크' 왕조, 4천5백년 전 '아카드어'와 '최초'의 도시국가 '아카드', 4천년 전 히브리족의 조상인 '최초'의 족장 '아브람', 3천5백년 전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과 아시리아와 바빌론을 유린한 히타이트의 철기 문명, 배타적 유일신교의 최고봉인 '유대교'의 구약과 '최초'의 제국인 페르시아 문명 등 인류 문명의 프로토 타입이 바로 '중간 지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다. 아마도 '우루크'의 후예인 '이라크'가 지역의 맹주를 자처하며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 배경도 그러한 '자부심'에 기초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외세에 의해 유린당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라크박물관'은 '대영박물관' 못지 않은 위엄을 갖추었지 않았을까.


1860년대 대영박물관 인근 인쇄소의 도제로 일하던 조지 스미스(Georgy Smith : 1840~1876)라는 청년은 점심시간만 되면 박물관에 와서 오래된 점토 서판을 들여다 보았단다. 이를 지켜본 비문 발굴자이자 설형문자 해독자인 헨리 롤린슨 경이 스미스에게 본인의 연구방으로 들어올 수 있는 특혜를 주었고 결국 조지 스미스는 서른 두살에 인류 문명에 한 획을 긋는 서판 하나를 '최초'로 읽어 내려간다. 이 서판이 바로 기원전 7~8세기에 쓰인 '홍수 서판'이었다. 구약 '창세기'에나 존재하던 신의 징벌로서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전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서 기록된 증거였고, 이 기록의 '문자'로 인해 가능해진 인류 서사의 향연과 '세계 문학'의 발견이었다. 
19세기 당시는 찰스 다윈으로 대표되는 '생물학'으로서 근대 과학의 발전이 정점을 향하던 시절이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물리학'과 18세기의 '화학'에 이은 이 과학의 진격은 기존 종교와 신화에만 의지하던 인류 문명을 한 단계 질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일종의 '문헌고고학' 분야의 과학자로서 스미스는 점토 서판의 해독을 통해 수천년 전 '대홍수'의 자연적 재앙을 증명했고 이후 인류 '최초'의 대서사시인 '길가메시(길가메쉬:Gilgamesh)' 이야기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가 1872년에 처음 읽어내린 '홍수 서판'은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의 열한번 째 장이었던 것이다. 


"길가메쉬(길가메시)가 '멀리 있는 자' 우트나피쉬팀에게 말했다.

'우트나피쉬팀이여. 제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당신 모습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저와 같습니다!... 말해주십시오. 어떻게 당신이 신들의 회합에 나설 수 있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영생을 얻게 되었는지를!'

'길가메쉬, 내가 너에게 숨겨진 사실을 말해주리라. 신들의 비밀을 네게 말해주리라! 너도 분명히 알고 있는 슈루파크라는 도시가 유프라테스 강둑에 있었지. 정말로 오래된 도시였고, 그곳에 신들이 살고 있었다네. 위대한 신들이 사람에게 홍수로 벌을 주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지혜의 왕자 에아가... 그들이 나눈 대화를 갈대 담에 대고 반복해서 말했지... 오, 슈루파크의 사람이여... 집을 부수고 배를 만들어라! 재산을 포기하고 생명을 찾아라! 소유물을 내버리고 생명을 유지하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배에 태우고..."

-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21. 우트나피쉬팀의 홍수 이야기', 김산해.


구약 <창세기>에 신은 노아에게 전나무로 배를 만들어 암수 생명체 한 쌍씩 싣고 숨으면 40일 간 밤낮으로 큰 비를 내려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쓸어버리겠다고 경고했다는데, 이는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들이 탐욕해지는 당시 현실에서 대홍수라는 대재난이 '신의 징벌'이었다는 종교신화적 전설이었다. '홍수서판'에 의하면 또 다른 신이 또 다른 인간에게 경고한 내용이 히브리어 성경보다 더 오래된 수메르어 또는 아카드어 문자로 기록된 바, 이는 아마도 오래전 언제쯤 대홍수의 자연재해로 그 일대의 인류 문명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그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현자(賢者)' 또는 '반신(半神)' 같은 존재로 대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약의 '노아'는 우루크 왕 길가메시 서사시의 '우트나피시팀', 수메르의 '지우수드라' 등으로 등장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최초 세습왕조 '우루크'의 5대 왕이었던 기원전 2천8백년의 '길가메시'는 키가 5미터에 짐승같은 완력의 지배자로서 세상 모든 새색시들과 먼저 동침하는 흡사 중세 영주의 '초야권'을 앞서 행세하던 폭군이었다. 세상 누구도 그를 제압할 수 없었는데 이를 본 수메르의 신은 '엔키두'라는 또 다른 짐승을 창조한다. '엔키두'라는 이 짐승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같은 '최초'의 인류 같은 느낌인데, '우루크' 왕조의 자손인 길가메시는 '반신반인'이었다. 어머니는 농경문화에서 너무도 중요한 들소의 신 '닌순'이었다. 신은 이 '반신반인'의 폭정을 막기 위해 진정한 인간 '엔키두'를 창조하고 당시 '비너스'와 같은 '샴하트'를 보내 동침을 시켜 '엔키두'를 문명화한다. 이제 '섹스'를 통해 진짜 인간으로 진화한 '엔키두'는 '길가메시'와 똑같은 용모와 힘으로 이 폭군 길가메시와 대적하고 건곤일척의 대회전 후 친구가 된 둘은 함께 모험을 떠나게 된다. 길가메시의 또 다른 모습으로서 엔키두는 삼나무 숲의 산신 '훔바바'에게 도전하려는 무모한 길가메시에게 지속적으로 신중함을 권유하다가 결국 따라나서서는 중도에 포기하려는 길가메시에게 끝까지 과업을 완수할 것을 종용하는데, 결국 엔키두와 함께 온갖 모험을 겪으면서 더욱 강해진 '반신반인' 길가메시는 '인간' 엔키두의 죽음을 보며 '영생', 즉 죽지 않는 삶을 찾아 왕좌까지 내던지고 또 다른 모험을 한다는 이야기가 [길가메시 서사시]다. 결론적으로 신으로부터 왕의 권력은 부여받았으되 '영생'은 허락받지 못한 길가메시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대홍수' 속에서 살아남아 인류 문명을 보전시킨 현인 '우트나피시팀(지우수드라)'을 찾아가 '영생'의 '신'이 되는 방도를 묻지만 답을 얻지 못한다.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지 못한 길가메시는 결국 '슬퍼하지도, 절망하지도, 의기소침하지도 말라'는 신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절망과 의기소침과 분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 '서사시'의 기록자는 그럼에도 "길가메쉬, 쿨아바의 주님. 당신을 칭송하는 일은 즐겁습니다!"(같은책, '23. 길가메쉬의 죽음')라며 이 서사시를 끝맺는다.


[사피엔스]의 '빅 히스토리언' 유발 하라리는 현대와 미래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능력과 수명은 연장될 것이며 결국 '인간'으로서 '사피엔스(Sapiens)'는 '영생(永生:eternal life)'을 구하여 스스로 신(神:Deus)으로서 '호모 데우스(Homo Deus)'가 된다는 장대한 계획을 '길가메시 프로젝트(Gilgamesh Project)'라 명명한다. 과학은 설령 실패할지라도, 또는 악마의 힘을 빌어서라도 그 목표를 향한 실험을 끝까지 밀어 붙인다. 나치의 파시즘적 광기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과학자들은 전쟁기술을 발전시켰고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인류를 죽인 이 과학기술의 힘으로 지금을 사는 우리는 현대문명의 풍요와 편의를 한껏 누리고 있다.

황하 문명에서 나온 다양한 인간군상과 집단들과 사상들의 쟁투를 거쳐 동아시아 문명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도 역시, 오래전 메소포타미아 '중간 지대'의 강력한 권력자 길가메시처럼 '영생'을 꿈꾸었다. 그러나 오히려 욕심과 '과로'가 심해 그의 통일제국 진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했고 덕분에 고대의 '도술가'들은 진시황에게 사기는 쳤어도 당시의 '과학'이었을 '음양학'과 '도술학' 등을 한층 발전시켰을 수도 있겠다. 중세에 '영생'을 연구한 신비주의적 연금술은 이후 화학의 발전에 기여했다지 않은가.

하인리히 슐리만에게 고대 그리스 문명 발굴의 꿈을 꾸게 했던 2천8백년 전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나 1천2백년 전 게르만족 영웅 서사시 [베어울프]보다 훨씬 전인 약 4천년 전에 인류 최초의 문자로 기록된 '세계 문학'의 시초인 [길가메시 서사시]는 '죽음'이라는 숙명과 그 앞에서의 공포를 딛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려는 인간의지를 인류라는 종(種)에게 심어준 최초의 '사상적 문헌'이다.


***

1.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기원전 20세기), 김산해 지음, <휴머니스트>, 2005~2020.
2.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닐 맥그리거(대영박물관장), 김미경 옮김, <다산초당>, 2014.
3.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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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소년 완전판 1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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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박못 '20세기 소년'과 일본 만화
- [소년 공작왕]과 [북두의 권], [20세기 소년]과 이토 준지 '공포 만화'


어찌 보면 '20세기 소년'인 나는, 20세기에 청소년기와 이십대를 몽땅 보내면서 대부분의 세계관을 지난 세기에 이미 '완성'했다. 맞는지 틀린지가 아니다. '신문명'으로 당최 수정되지 않는 내 생각의 기본 뿌리, 즉 나의 '세계관'과 나의 '철학' 일체는 '20세기'의 그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신문명의 새시대를 따라 나의 생각과 생활을 혁신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에 수백 번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내 나름의 가치관을 교체하고 싶지는 않다. 
어찌 보면 '신문명의 배교자'인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원만하게 어울리기 위해 '신문명 과학'이라는 종교를 믿는 척 하지만 진심으로 추앙할 마음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내 진심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수차례 명상해 보고 내린 나 자신에 관한 잠정 결론이다. 이제 중년에 접어들어 '꼰대'가 되어도 당연시될 나이가 되어 대놓고 '커밍 아웃'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를 아는 사람들은 '신문명'에 기민하게 따라가지 못하고 유행에 둔감한 내 성정을 보고 이미 그리 나를 평가했겠지만 정작 얼마 전까지의 젊은 나는 그런 판정에 불복하곤 했다. "나도 당신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다 같을 수 있겠는가.

나는 1980년대 이전의 기억이란 것이 별로 없을 1974년 갑인년 '푸른 범'띠다. 내가 그 해 태어났다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짧은 시간이나마 살아오면서 지켜본 결과 나는 1974년생이 삼촌격인 1958년 무술년생 '58년 개띠' 못지 않게 향후 우리 사회에서 기염을 토할 것으로 예상한다. 내 주변에서 보았을 때 '73년생 소띠'나 '75년생 토끼띠'는 전반적으로 순해보였을 정도로 내 동갑들의 기가 세 보였다. 나이 들어 가면이 두꺼워진 지금이 아니라 거의 벌거숭이 인격에 가까웠던 20대 초반까지의 내 주변을 되새겨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의견이지만, 난 지난 2017년 '장미 대선'의 15명 대선후보 중 1/3 정도가 '74 갑인년 범띠'였다는 사실을 하나의 상징적 근거로 든다. 


나는 '일본 만화'를 부러 찾아서 보지 않는다. 흥미가 없다기 보다는 한 번 빠지면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아 시절 TV에서 어른들이 틀어준 '어린이 명작동화'부터 청소년기 의식주와 같았던 오락실의 게임들이 전부 일본에서 만든 것이었으니 지금껏 이미 너무 많이 보기도 했겠다. 내가 좋아했던 영국소설 [보물섬](로버트 스티븐슨/1883년)의 이미지도 데자키 오사무의 1979년작 TV 방영판 일본 만화영화로 남아있다. 국산 태권브이(1976년)가 지구를 분명히 지키고 있는데도 나는 사실 일본산 마징가Z(1972년)와 그레이트 마징가(1974년)를 더 좋아했다. 


"세상에는 명(明)과 암(暗) 두 종류의 다른 세력이 있는데, 명(明)은 광명이니 선(善)이고 이(理)이며, 암(暗)은 암흑이니 악(惡)이고 욕(欲)이라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은 대립 항쟁을 하는데, 초제(初際), 중제(中際), 후제(後際)의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초제 단계에는 천지가 없고 명암만 있을 뿐, 명의 성질인 지혜와 암의 성질인 ‘치우(痴愚)’가 대립 상태를 이룬다. 중제 단계에는 암의 세력이 발전하고 확대되어 명의 세력을 압박하고 멋대로 내쫓아 대환(大患)이 만들어진다. 이때에 바로 명왕이 세상에 나와서 투쟁을 거쳐 암흑을 내쫓는다. 후제 단계에는 명과의 암의 이종(二宗)이 각각 제자리로 돌아가 명은 대명(大明)으로 돌아가고 암은 적암(積暗)으로 돌아가게 된다. 초제는 명암 대립으로서 과거이고, 중제는 명암 투쟁으로서 현재이며, 후제는 명암 복위로서 미래인 것이다…"
- [주원장전], <1-2. 유랑청년-행각승>, 오함, 1949.


고등학교 때 문방구 해적판으로 불법유통되던 일본 만화 중 가장 즐겨본 건 오기노 마코토의 [소년 공작왕](1985년)이었다. 친구들은 남성미 철철 넘치는 [북두의 권](하라 테츠오/1983년)에 더 열광하며 연속 주먹을 날리거나 손가락으로 혈을 찌르고는 "넌 이미 죽어 있다"는 대사를 읊고 돌아서곤 했지만, 나는 [공작왕]의 배경인 밀교(密敎)와 성배(聖杯), 나치의 악마적 부활과 이를 막는 지옥신(地獄神)의 강림(降臨) 등과 같은 신비적 요소에 더 빠져들기 일쑤였다. 선악(善惡)과 명암(明暗)이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 현실, 악마를 처단하는 것이 천상의 존재가 아니라 지옥(명부;冥府)의 '공작명왕(孔雀明王)'이라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3세기경 페르시아의 '마니교(摩尼敎)'는 서방의 기독교와 인도의 '조로아스터교', 불교 등의 교리가 결합하여 창시되었는데 이는 '명(明)교'의 기원이다. 중국 원나라 말기 '명태조' 주원장은 이 '명교'와 백련교 등의 혼합 이데올로기를 지도이념으로 한 '홍건(紅巾)' 농민반란군에서 '한(漢)족 독립투쟁'을 통해 명(明)나라를 건국한다. 고대로부터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양의 종교가 서로 섞이면서 '미륵불(彌勒佛)'이나 '명왕(明王)' 같은 초인적 '구세주(救世主)'를 앞세워 부조리한 세상을 뒤집어 엎고 다수 민중의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것이 이러한 민간신앙으로서 '밀교(密敎)'의 역사이기도 하다. 태권브이는 한없이 착했으나 마징가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공작명왕'은 지옥에 살았으니 동아시아 왕조 말기에 농민반란의 종교이자 혁명이념으로 등장한 마니교나 백련교, 명교나 미륵불하생교 등의 '구세주'는 '하느님'의 대리자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치열한 계급투쟁을 통해 악마의 피를 손에 묻혀야 하는 존재였는데, 실제 마니교가 뿌리인 명교에서 '선악'과 '명암'은 처절한 전쟁을 치르지만 결국에는 서로를 뿌리뽑는 게 아니라 서로 대체하며 공존하는 '변증법'적 관계다. [주원장전](1949년)을 쓴 중국의 역사학자 오함은 이런 고대 밀교의 이론적 한계로 인해 역사 속 농민전쟁이 '혁명'을 끝까지 밀어부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혁명(革命)'과 '개혁(改革)'에 관한 인류의 오래된 숙제이기도 하리라. 
애초에 '밝음'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 가능했다. 독일 철학자 헤겔(G.W.F.Hegel)은 어딘가에서 "철학은 형식은 다르나 그 내용에서 종교와 같다"고 규정했다는데,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는 사유를 근본으로 하는 기원전의 '조로아스터교' 이래의 모든 종교는 '명암'과 '선악'의 명확한 구분을 기본 전제로 한다. 이분법적인 종교적 사유의 기원인 '조로아스터교(배화교/拜火敎)'가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불(火)'을 숭배한 이유 또한 '불'이 태초의 '어둠'을 밀어내는 '밝음'의 표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초의 '어둠'이 없었다면 '밝음'도 없었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서양의 근대 관념론을 집대성한 헤겔의 거대한 변증법 체계의 시작과 끝도 이와 같다. 동양의 유학(儒學)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한 성리학(性理學) 또한 '리/기(理氣論)', '체/용(體用論)','성/명(性命論)', '심/성(心性論)', '미발/이발(未發/已發論)', '지/행(知行論)', '격물/치지(格物致知論)' 등의 대립쌍들이 주요 개념을 이룬다. 이 대립개념이 '일원론(一元論)'인가 '이원론(二元論)'인가 하는 논쟁은 이후 철학의 발전과정이었다. 
종교든 철학이든 인류의 사유에서 '선악'과 '명암'은 이분법적 관계이면서도 서로의 다른 얼굴이었다.


"형이상학적 우주론의 이론체계... 최종의 완성은 주희의 '리기일원론(理氣一元論)'... '리기(理氣)'는 성리학의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성리학자들이 비록 자연계의 최종적인 근원을 찾고자 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존재를 강조하지 않고 그것의 속성과 기능 그리고 그것의 전개과정을 더욱 강조했다... 성리학에 나타난 '변증법(辨證法)'적 사유의 특징은 여기에서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성리학자들은 이 (관계적) 개념들을 통해 '대립'과 '통일'의 '변증사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립'과 '통일' 가운데 '통일'을 결정적 요소로 간주하여 모든 '대립'은 결국 '합일(合一)'에 이른다고 생각하였다."
- [성리학의 개념들], '1부. 리기론(理氣論) - 총론', 몽배원, 1989.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몽배원 박사는 성리학의 개념쌍들은 '대립'을 통해 결국 '통일'에 이르는 '변증법'적 관계임을 유학의 계보학적 추적을 통해 증명하려는데, 20세기 '과학적 사회주의' 철학사상가답게 궁극의 '통일'과 '합일'의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21세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등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에 따라 '통일'될 일 없이 끊임없이 '대립'하는 세기로 접어든지 오래 되었다. 
20세기말의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21세기도 이미 1/5이 지나고 있다. 이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은 더 이상 '통일'의 '총체성'이 아닌, '대립'의 '영속성'만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이유로 아마도 현대철학은 다시 '명암'과 '선악'의 이분법이자 서로의 다른 얼굴이었던 그 태초의 시원으로 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만화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복잡하고 신비로운 소재들이 많았기 때문 아닐까 싶은데, 굳이 찾아서 읽지 않음에도 약 15년 전 쯤 동네 비디오와 책 대여점에서 마지막으로 빌려 읽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1999~2007)은 [소년 공작왕]과 함께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만화다. 록밴드의 노래에서 모티브를 딴 제목이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한참 잊힌 후 재연되는 이야기, 열심히 읽고 다시 들춰봐도 가면쓴 '친구'가 누구였는지 심증은 가되 물증을 못 찾은 복잡한 구성 등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이후 영화화된 [20세기 소년] CD까지 구입하여 여러 번 돌려보기 했으나 나는 결국 '친구'의 물증을 찾지 못했다. 
이토 준지의 '공포 만화'의 기괴함과 토미에의 신비로운 마력의 잔상 또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미지다. 현실의 악마를 물리는 퇴마승려 '공작왕'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는 지옥(명부)의 문을 열어야 했고, 인류가 망친 암울한 지구의 미래에서 '북두의 권' 계승자는 '구세주 전설'의 표현이었다. '토미에'라는 미소녀로 상징되는 현실의 치명적 악을 숭상하는 인간의 기괴함은 이토 준지 이상으로 무섭게 그릴 수는 없어 나는 어지간하면 야밤에 포털사이트에 검색어로 떠올리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 같아 집어들었던 [20세기 소년]은 소년적 감성의 현실우화 같으면서도 복잡미묘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내게 일본만화는 '혼돈' 속에서 가끔 피우고 마는 고대 '밀교'적 아편이다.


어김없이 '종말론'이나 '휴거', 'Y2k' 등이 난무했고 그럼에도 아무일 없이 찾아왔던 새로운 밀레니엄 21세기도 4분의 1이 지나고 있다. 아마도 나는 22세기를 보지는 못하리라. 결국 내가 이 세상에서 본 시간은 20세기와 21세기 일부가 될테지만, 운좋게도 두 세기를 거치면서 왠지 20세기를 다 살아본 것 같은 느낌으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21세기만 살아보았을 후배들을 앞에 두고 무슨 '현자(賢者)'라고 되는 듯 20세기의 혁명과 전쟁 등 모든 역동적이고 격변적이었던 역사적 사건을 마치 겪어보기나 한 것처럼 구라나 쳐보려고 책이나 읽으며 '역사'를 운운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 늙어 지금의 '태극기 할아버지' 같은 '꼰대'가 될 상이다. 남은 생 살면서 극히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20세기와 21세기 일부를 스쳐가는 과정에서 앞선 20세기는 책으로나마 '역사'로 알 수 있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21세기 후반부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빼도 박도 못할 '20세기 소년'으로.


***

1. [20세기 소년], 우리사와 나오키, 1999~2007.
2. [소년 공작왕(孔雀王)], 오기노 마코토, 1985.
3. [북두(北斗)의 권(拳)], 하라 테츠오, 1983.
4. [이토 준지 공포 만화 컬렉션], 이토 준지, 1987.
5. [주원장전(朱元璋傳)](1949), 오함 지음, 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2003.
6. [성리학의 개념들](1989), 몽배원 지음, 홍원식 외 옮김, <예문서원>, 2008.
7.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6),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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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화질] 공작왕 17권 (완결) 공작왕 17
GTENT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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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박못 '20세기 소년'과 일본 만화
- [소년 공작왕]과 [북두의 권], [20세기 소년]과 이토 준지 '공포 만화'


어찌 보면 '20세기 소년'인 나는, 20세기에 청소년기와 이십대를 몽땅 보내면서 대부분의 세계관을 지난 세기에 이미 '완성'했다. 맞는지 틀린지가 아니다. '신문명'으로 당최 수정되지 않는 내 생각의 기본 뿌리, 즉 나의 '세계관'과 나의 '철학' 일체는 '20세기'의 그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신문명의 새시대를 따라 나의 생각과 생활을 혁신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에 수백 번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내 나름의 가치관을 교체하고 싶지는 않다. 
어찌 보면 '신문명의 배교자'인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원만하게 어울리기 위해 '신문명 과학'이라는 종교를 믿는 척 하지만 진심으로 추앙할 마음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내 진심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수차례 명상해 보고 내린 나 자신에 관한 잠정 결론이다. 이제 중년에 접어들어 '꼰대'가 되어도 당연시될 나이가 되어 대놓고 '커밍 아웃'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를 아는 사람들은 '신문명'에 기민하게 따라가지 못하고 유행에 둔감한 내 성정을 보고 이미 그리 나를 평가했겠지만 정작 얼마 전까지의 젊은 나는 그런 판정에 불복하곤 했다. "나도 당신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다 같을 수 있겠는가.

나는 1980년대 이전의 기억이란 것이 별로 없을 1974년 갑인년 '푸른 범'띠다. 내가 그 해 태어났다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짧은 시간이나마 살아오면서 지켜본 결과 나는 1974년생이 삼촌격인 1958년 무술년생 '58년 개띠' 못지 않게 향후 우리 사회에서 기염을 토할 것으로 예상한다. 내 주변에서 보았을 때 '73년생 소띠'나 '75년생 토끼띠'는 전반적으로 순해보였을 정도로 내 동갑들의 기가 세 보였다. 나이 들어 가면이 두꺼워진 지금이 아니라 거의 벌거숭이 인격에 가까웠던 20대 초반까지의 내 주변을 되새겨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의견이지만, 난 지난 2017년 '장미 대선'의 15명 대선후보 중 1/3 정도가 '74 갑인년 범띠'였다는 사실을 하나의 상징적 근거로 든다. 


나는 '일본 만화'를 부러 찾아서 보지 않는다. 흥미가 없다기 보다는 한 번 빠지면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아 시절 TV에서 어른들이 틀어준 '어린이 명작동화'부터 청소년기 의식주와 같았던 오락실의 게임들이 전부 일본에서 만든 것이었으니 지금껏 이미 너무 많이 보기도 했겠다. 내가 좋아했던 영국소설 [보물섬](로버트 스티븐슨/1883년)의 이미지도 데자키 오사무의 1979년작 TV 방영판 일본 만화영화로 남아있다. 국산 태권브이(1976년)가 지구를 분명히 지키고 있는데도 나는 사실 일본산 마징가Z(1972년)와 그레이트 마징가(1974년)를 더 좋아했다. 


"세상에는 명(明)과 암(暗) 두 종류의 다른 세력이 있는데, 명(明)은 광명이니 선(善)이고 이(理)이며, 암(暗)은 암흑이니 악(惡)이고 욕(欲)이라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은 대립 항쟁을 하는데, 초제(初際), 중제(中際), 후제(後際)의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초제 단계에는 천지가 없고 명암만 있을 뿐, 명의 성질인 지혜와 암의 성질인 ‘치우(痴愚)’가 대립 상태를 이룬다. 중제 단계에는 암의 세력이 발전하고 확대되어 명의 세력을 압박하고 멋대로 내쫓아 대환(大患)이 만들어진다. 이때에 바로 명왕이 세상에 나와서 투쟁을 거쳐 암흑을 내쫓는다. 후제 단계에는 명과의 암의 이종(二宗)이 각각 제자리로 돌아가 명은 대명(大明)으로 돌아가고 암은 적암(積暗)으로 돌아가게 된다. 초제는 명암 대립으로서 과거이고, 중제는 명암 투쟁으로서 현재이며, 후제는 명암 복위로서 미래인 것이다…"
- [주원장전], <1-2. 유랑청년-행각승>, 오함, 1949.


고등학교 때 문방구 해적판으로 불법유통되던 일본 만화 중 가장 즐겨본 건 오기노 마코토의 [소년 공작왕](1985년)이었다. 친구들은 남성미 철철 넘치는 [북두의 권](하라 테츠오/1983년)에 더 열광하며 연속 주먹을 날리거나 손가락으로 혈을 찌르고는 "넌 이미 죽어 있다"는 대사를 읊고 돌아서곤 했지만, 나는 [공작왕]의 배경인 밀교(密敎)와 성배(聖杯), 나치의 악마적 부활과 이를 막는 지옥신(地獄神)의 강림(降臨) 등과 같은 신비적 요소에 더 빠져들기 일쑤였다. 선악(善惡)과 명암(明暗)이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 현실, 악마를 처단하는 것이 천상의 존재가 아니라 지옥(명부;冥府)의 '공작명왕(孔雀明王)'이라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3세기경 페르시아의 '마니교(摩尼敎)'는 서방의 기독교와 인도의 '조로아스터교', 불교 등의 교리가 결합하여 창시되었는데 이는 '명(明)교'의 기원이다. 중국 원나라 말기 '명태조' 주원장은 이 '명교'와 백련교 등의 혼합 이데올로기를 지도이념으로 한 '홍건(紅巾)' 농민반란군에서 '한(漢)족 독립투쟁'을 통해 명(明)나라를 건국한다. 고대로부터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양의 종교가 서로 섞이면서 '미륵불(彌勒佛)'이나 '명왕(明王)' 같은 초인적 '구세주(救世主)'를 앞세워 부조리한 세상을 뒤집어 엎고 다수 민중의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것이 이러한 민간신앙으로서 '밀교(密敎)'의 역사이기도 하다. 태권브이는 한없이 착했으나 마징가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공작명왕'은 지옥에 살았으니 동아시아 왕조 말기에 농민반란의 종교이자 혁명이념으로 등장한 마니교나 백련교, 명교나 미륵불하생교 등의 '구세주'는 '하느님'의 대리자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치열한 계급투쟁을 통해 악마의 피를 손에 묻혀야 하는 존재였는데, 실제 마니교가 뿌리인 명교에서 '선악'과 '명암'은 처절한 전쟁을 치르지만 결국에는 서로를 뿌리뽑는 게 아니라 서로 대체하며 공존하는 '변증법'적 관계다. [주원장전](1949년)을 쓴 중국의 역사학자 오함은 이런 고대 밀교의 이론적 한계로 인해 역사 속 농민전쟁이 '혁명'을 끝까지 밀어부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혁명(革命)'과 '개혁(改革)'에 관한 인류의 오래된 숙제이기도 하리라. 
애초에 '밝음'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 가능했다. 독일 철학자 헤겔(G.W.F.Hegel)은 어딘가에서 "철학은 형식은 다르나 그 내용에서 종교와 같다"고 규정했다는데,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는 사유를 근본으로 하는 기원전의 '조로아스터교' 이래의 모든 종교는 '명암'과 '선악'의 명확한 구분을 기본 전제로 한다. 이분법적인 종교적 사유의 기원인 '조로아스터교(배화교/拜火敎)'가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불(火)'을 숭배한 이유 또한 '불'이 태초의 '어둠'을 밀어내는 '밝음'의 표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초의 '어둠'이 없었다면 '밝음'도 없었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서양의 근대 관념론을 집대성한 헤겔의 거대한 변증법 체계의 시작과 끝도 이와 같다. 동양의 유학(儒學)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한 성리학(性理學) 또한 '리/기(理氣論)', '체/용(體用論)','성/명(性命論)', '심/성(心性論)', '미발/이발(未發/已發論)', '지/행(知行論)', '격물/치지(格物致知論)' 등의 대립쌍들이 주요 개념을 이룬다. 이 대립개념이 '일원론(一元論)'인가 '이원론(二元論)'인가 하는 논쟁은 이후 철학의 발전과정이었다. 
종교든 철학이든 인류의 사유에서 '선악'과 '명암'은 이분법적 관계이면서도 서로의 다른 얼굴이었다.


"형이상학적 우주론의 이론체계... 최종의 완성은 주희의 '리기일원론(理氣一元論)'... '리기(理氣)'는 성리학의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성리학자들이 비록 자연계의 최종적인 근원을 찾고자 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존재를 강조하지 않고 그것의 속성과 기능 그리고 그것의 전개과정을 더욱 강조했다... 성리학에 나타난 '변증법(辨證法)'적 사유의 특징은 여기에서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성리학자들은 이 (관계적) 개념들을 통해 '대립'과 '통일'의 '변증사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립'과 '통일' 가운데 '통일'을 결정적 요소로 간주하여 모든 '대립'은 결국 '합일(合一)'에 이른다고 생각하였다."
- [성리학의 개념들], '1부. 리기론(理氣論) - 총론', 몽배원, 1989.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몽배원 박사는 성리학의 개념쌍들은 '대립'을 통해 결국 '통일'에 이르는 '변증법'적 관계임을 유학의 계보학적 추적을 통해 증명하려는데, 20세기 '과학적 사회주의' 철학사상가답게 궁극의 '통일'과 '합일'의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21세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등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에 따라 '통일'될 일 없이 끊임없이 '대립'하는 세기로 접어든지 오래 되었다. 
20세기말의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21세기도 이미 1/5이 지나고 있다. 이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은 더 이상 '통일'의 '총체성'이 아닌, '대립'의 '영속성'만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이유로 아마도 현대철학은 다시 '명암'과 '선악'의 이분법이자 서로의 다른 얼굴이었던 그 태초의 시원으로 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만화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복잡하고 신비로운 소재들이 많았기 때문 아닐까 싶은데, 굳이 찾아서 읽지 않음에도 약 15년 전 쯤 동네 비디오와 책 대여점에서 마지막으로 빌려 읽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1999~2007)은 [소년 공작왕]과 함께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만화다. 록밴드의 노래에서 모티브를 딴 제목이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한참 잊힌 후 재연되는 이야기, 열심히 읽고 다시 들춰봐도 가면쓴 '친구'가 누구였는지 심증은 가되 물증을 못 찾은 복잡한 구성 등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이후 영화화된 [20세기 소년] CD까지 구입하여 여러 번 돌려보기 했으나 나는 결국 '친구'의 물증을 찾지 못했다. 
이토 준지의 '공포 만화'의 기괴함과 토미에의 신비로운 마력의 잔상 또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미지다. 현실의 악마를 물리는 퇴마승려 '공작왕'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는 지옥(명부)의 문을 열어야 했고, 인류가 망친 암울한 지구의 미래에서 '북두의 권' 계승자는 '구세주 전설'의 표현이었다. '토미에'라는 미소녀로 상징되는 현실의 치명적 악을 숭상하는 인간의 기괴함은 이토 준지 이상으로 무섭게 그릴 수는 없어 나는 어지간하면 야밤에 포털사이트에 검색어로 떠올리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 같아 집어들었던 [20세기 소년]은 소년적 감성의 현실우화 같으면서도 복잡미묘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내게 일본만화는 '혼돈' 속에서 가끔 피우고 마는 고대 '밀교'적 아편이다.


어김없이 '종말론'이나 '휴거', 'Y2k' 등이 난무했고 그럼에도 아무일 없이 찾아왔던 새로운 밀레니엄 21세기도 4분의 1이 지나고 있다. 아마도 나는 22세기를 보지는 못하리라. 결국 내가 이 세상에서 본 시간은 20세기와 21세기 일부가 될테지만, 운좋게도 두 세기를 거치면서 왠지 20세기를 다 살아본 것 같은 느낌으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21세기만 살아보았을 후배들을 앞에 두고 무슨 '현자(賢者)'라고 되는 듯 20세기의 혁명과 전쟁 등 모든 역동적이고 격변적이었던 역사적 사건을 마치 겪어보기나 한 것처럼 구라나 쳐보려고 책이나 읽으며 '역사'를 운운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 늙어 지금의 '태극기 할아버지' 같은 '꼰대'가 될 상이다. 남은 생 살면서 극히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20세기와 21세기 일부를 스쳐가는 과정에서 앞선 20세기는 책으로나마 '역사'로 알 수 있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21세기 후반부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빼도 박도 못할 '20세기 소년'으로.


***

1. [20세기 소년], 우리사와 나오키, 1999~2007.
2. [소년 공작왕(孔雀王)], 오기노 마코토, 1985.
3. [북두(北斗)의 권(拳)], 하라 테츠오, 1983.
4. [이토 준지 공포 만화 컬렉션], 이토 준지, 1987.
5. [주원장전(朱元璋傳)](1949), 오함 지음, 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2003.
6. [성리학의 개념들](1989), 몽배원 지음, 홍원식 외 옮김, <예문서원>, 2008.
7.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6),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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