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게임 -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
피터 홉커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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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vs. '볼샤야 이그라(Bolshaya Igra)'
- [그레이트 게임](1990), 피터 홉커크, 정영목 옮김, <사계절>, 2008.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그 출발선에는 1810년의 헨리 포팅어와 찰스 크리스티가 서 있고, 거의 100년 뒤의 프랜시스 영허즈번드가 마감을 한다. 이들에 맞선 러시아의 선수들도 영국인들에 전혀 뒤질 것이 없었는데, 이들은 용맹스러운 무라비요프와 은밀한 빗케비치에서 시작하여 가공할 그롬쳅스키와 교활한 바드마예프에서 끝이 난다... '볼샤야 이그라(Bolshaya Igra)'..."
- [그레이트 게임], <프롤로그>, 피터 홉커크, 1990.


1981년에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는 책으로 영국 도서 논픽션상을 수상한 피터 홉커크(1930~2014)는 1990년 소비에트러시아연방이 해체되던 시기에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21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알 카에다 '9.11 테러' 후 나토군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후인 2006년 개정판을 냈다.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지역은 2021년 미군의 철수를 계기로 다시금 '핫 이슈'가 되고 있다.

영국의 '중앙아시아' 전문 탐험가이자 작가였던 피터 홉커크는 러시아 '제국'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대영 '제국'의 신민이자, '그레이트 게임'의 '전진파'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충실한 계승자였다. 그는 20세기 중반 영국군의 장교로서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근무했으며 신문사의 통신원으로서 중앙아시아 일대를 두루 다니며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아마도 19세기에 태어났다면 '그레이트 게임'의 영국 선수들 중 하나가 되었을 피터 홉커크는 대놓고 영국을 옹호하지도, 적국 러시아를 비난하지도 않은 채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고자 한다. 1981년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돈황 유적을 약탈해 간 서양 탐험가들을 동양인이 부른 대로 '서양 악마들(Foreign Devils)'이라 칭하지만 그들의 '악행'을 비난하지 않는 것처럼, 1990년의 [그레이트 게임]에서는 영-러간 '제국주의' 전쟁의 서막을 소개하면서도 균형적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중간중간 모국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점은 어쩔 수 없는 개인들의 한계다. 요동과 한반도의 후예인 우리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식민사관'에 동조할 수 없는 그런 것과 같다.

19세기 영국의 여왕과 러시아의 차르는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 치열한 경쟁을 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근동의 오스만 투르크와 페르시아를 두고 벌인 크림전쟁과 같은 실제 유혈 전쟁도 있었고, 영국의 주요 식민지 인도 북부접경인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 일대를 두고 '첩보전쟁'을 이어갔다. 호전적인 부족들이 '칸'을 자처하며 할거하던 중앙아시아는 험한 지형과 약탈의 위험으로 인해 유럽인들의 지도에 공백 상태인 '미지의 땅'이었다. 러시아는 지속적인 남방정책을 추진했고 영국은 식민지 인도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를 광적으로 견제했다. 천년 전까지 동서양의 통로였던 '실크로드'는 해양 무역과 신대륙 시장의 확장 등으로 이미 끊긴 채 지도로 그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곳에 영국과 러시아의 모험심과 공명심 높은 젊은 장교들이 투입되는데, 피터 홉커크는 영국과 러시아의 소리없는 '제국주의' 전쟁을 배경으로 하되 미지의 세계에서 수없이 죽어간 젊은 탐험가들 개인을 중심으로 서술을 이어간다. 
그들의 조국이 벌이기 시작하던 '제국주의' 전쟁 자체가 세계지도를 펼치고 대자본들과 국가권력들이 벌이는 무모한 '도박'이었는데, 이 용감하고 대담한 젊은 스파이 개인들에게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모험은 한탕의 '큰 도박'이었다. 
영국인들에게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었도, 러시아인들에게는 '볼샤야 이그라(Bolshaya Igra : 큰 도박)'였다.


"번스와 맥노튼에게도, 또 코널리와 스토다트에게도 '그레이트 게임'은 끝이 났다. 모두 그들 자신이 열렬하게 옹호하고 또 입안한 '전진정책'의 희생자들이었다... 엘드라드 포팅어... 존 코널리 중위... 이렇게 해서 여섯명의 저명한 영국 선수들이 윌리엄 무어크로프트, 그리고 러시아 선수들인 그리보예도프와 빗케비치의 뒤를 이어 잇따라 '그레이트 게임'의 영웅들을 위해 마련된 '발할라'에 들어갔다. 물론 이들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 [그레이트 게임], <코널리와 스토다트의 최후>, 피터 홉커크, 1990.


러시아의 유라시아 정복욕을 잘 아는 프랑스 나폴레옹 1세는 이미 19세기 초에 중앙아시아를 장악하여 영국의 식민지 인도를 침략하고 유라시아를 프랑스와 러시아가 나눠먹자는 제안을 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와 등을 지고 아시아는 커녕 유럽에서 패퇴하고 있던 시기 영국의 주적은 러시아가 되었는데 1810년 찰스 크리스티 대위와 헨리 포팅어 중위가 순례자 복장을 하고 각각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었을 때 중앙아시아에서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은 시작되었다. 물론 러시아의 지리학자와 군인들은 수없이 다녀갔을지 모르지만 '그레이트 게임'은 영국이 인도 북부 국경을 넘고 펀자브 지역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한 이후부터 이야기가 된다. '제국'에 의해 아프가니스탄과 주변 지역의 정권이 좌우된다는 요소가 이 도박판의 주요 변수였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히바, 부하라는 물론, 옛 실크로드 상의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및 코칸트, 중국(청나라)으로 이어지는 카슈가르와 야르칸트 등의 '아미르(제후)' 군소국가에 상인이나 순례자로 잠입했다가 죽어간 피끓던 젊은 '선수들'을 생각한다. 이후 20세기 들어 좀더 동쪽으로 진출한 스벤 헤딘(스웨덴), 폰 르코크(독일), 오렐 스타인(영국), 폴 펠리오(프랑스), 랭던 워너(미국) 등 '실크로드의 악마들'은 비록 '제국주의'를 등에 업었지만 '학자'였다. '학자'나 '지식인'이 '제국주의'의 더 나쁜 첨병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인류 문명 보존의 '사명'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그레이트 게임'의 초기 첩보전에는 젊은 장교 뿐이었다. 전투에서 공을 세우지 못한 군인들의 공명심과 모험심이 주된 동력이었고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용어를 처음 썼던 아서 코널리 중위 또한 그칠 줄 모르는 모험 끝에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후 수많은 '선수'들이 기꺼이 '제국주의'의 제물이 되었는데, 물론 운좋게 살아남은 젊은 장교들은 보고서 기록의 책 출간과 장성 진급을 통해 '대박'이 났다. 피터 홉커크의 생생한 기록 또한 이 탐험가들의 기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국과 러시아의 위대한 모험가들은 용감하고 대담했으며 중앙아시아의 권력자 앞이나 경쟁자들 곁에서도 유연했고 또 의연했다.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고 밀어붙인 그들의 탐험정신은 결국 미지의 땅을 세계지도에 그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이 위대한 정신들은 '제국주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으니 본국의 정세에 따라 그들의 모험이 빛을 발할 수도, 조용히 사장될 수도 있었다. 영국의 강경 '매파'는 소위 '전진정책'을 지지한 '전진파'로서 '러시아 도깨비'에 대한 끊임없는 공포증으로 인도를 지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정권들을 조종하고 이들을 앞세워 중앙아시아를 영-러 전쟁판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들이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면 불나방 같은 젊은이들이 더 많이 첩보전장에서 죽어가거나 공적을 남겼다. 
그렇게 중앙아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또는 '볼샤야 이그라'는 땅따먹기 도박판이자 개인적 성공의 판돈도 걸렸던 한편, 치열하지만 소리없는 대규모 전쟁이었다.


"1907년 8월... '그레이트 게임'은 이제 급속하게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영국과 러시아간) 이 합의는 이 지역에서 양국의 입장 차이를 영원히 해소할 뿐 아니라 독일의 동진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또 앞으로는 러시아가 터키 해협들을 지배하고자 할 때 영국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제 영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독일이 그곳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1907년의 영-러 협약은 '그레이트 게임'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 [그레이트 게임], <게임종료>, 피터 홉커크, 1990.


결국 '그레이트 게임'을 종료시킨 것은 영국과 러시아의 야욕에 도전하는 새로운 '제국'의 등장이었다.
유럽에서 독일(프로이센)의 성장과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득세였다. 당시까지 미국은 구대륙에 대한 힘을 크게 미치지 못했고, 러시아 샹트페테르부르크와 친하게 지내려던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영국의 주요 경쟁자로 부상했다. 영국의 관심사는 예전 프랑스 나폴레옹이 시도했던 것처럼 아시아에 독일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되었으며 이를 위해 예전의 적이었던 러시아와 손을 잡는 것이었다. 때마침 러시아의 극동 함대는 1905년 일본에게 대패를 당했고(러-일전쟁), 소비에트 혁명운동의 시작('피의 일요일') 등 대내외적 난관으로 인해 러시아의 남방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황이 겹쳐 영국과 러시아 두 '제국'은 1907년 '그레이트 게임'을 종료시키는 데 합의하게 된다.

이후 유럽의 구세력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합스부르크 왕국을 앞세운 독일과 러시아가 '유럽의 병자'라 칭한 오스만 투르크의 부흥을 막고자 영국과 러시아는 한 진영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다. 
1차 대전의 결과로 러시아는 1917년 소비에트혁명을 야기했는데, 소비에트러시아연방은 이전 차르가 맺은 조약 일체를 부정했다. 그러므로 '그레이트 게임'의 종료 조건으로 러시아 차르가 인정했던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권은 무효화되었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왕국들은 사회주의 '혁명지대'로 바뀌었다. 1979년에야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빠져나갔을 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탈레반'이 득세했다지만, 이들은 아마도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앙아시아를 '세계지도'에 채워넣기 위해 잠입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 지역에서 살아가던 주역들이라는 점에는 틀림없다. '그레이트 게임'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이나 러시아가 장악할 수 없는지역이었고, 20세기의 소련도, 21세기의 미국도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지 못했다. 피터 홉커크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길 수 없는 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자신들이 선택한 전장에서는 과거의 막강한 전투능력을 조금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속하게 최신 전쟁기술까지 끌어안는"(이상, [그레이트 게임], <프롤로그>) 그들의 힘을 평가하고 있다. 이것이 '림랜드(주변부)'의 저력이다.

'탈레반'의 '인권탄압'은 전세계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는 맞다. 그러나 서방의 뉴스매체가 내보내는 정보가 과연 현실 사정을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 또한 의문스럽기도 하다. [유라시아 견문](2018)을 통해 이슬람사회의 독립적 역사와 그들의 '영성'을 강조한 이병한 원광대 교수는 해당 지역의 현장에서 지역언론은 '제국주의'적 국제언론의 논조와 큰 차이가 있다는 생생한 증언을 한다. 미군의 철수로 인해 '독립정권'을 세운 아프가니스탄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국제언론의 그것을 배경으로 하지는 않았는가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19~20세기 영국('시파워')과 러시아('랜드파워')의 소리없는 전쟁에 이어 20~21세기 미국의 '시파워(sea-power)'와 러시아 및 중국의 '랜드파워(land-power)'의 지정학적 대립은 여전히 가장자리 '림랜드(rim-land)'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고대 유목민들과 중세 몽골 제국 등이 활약하며 동서남북을 이어주던 이 주변부 '림랜드'는 오랜 동안 이슬람인들이 자취를 남기며 문명교류를 활발히 만들어간 지역이었다.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부침을 겪은 동아시아의 '림랜드'인 우리 요동-한반도인으로서 중앙아시아가 남의 역사 같지 않은 이유다.

한편으로, '시파워'와 '랜드파워'가 접속하는 가장자리 주변부의 우리 '림랜드' 요동-한반도 또한 중앙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처럼 '제국주의'가 결코 "이길 수 없는" 대상이라는 사실 또한 기억하기로 한다.
수천 년간 지역민인 우리들 외에 그 어떤 외부 세력도 한반도를 오롯이 지배하지는 못했다.

***

1.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On Secret Srevice in High Asia)](1990,2006), Peter Hopkirk, 정영목 옮김, <사계절>, 2008.
2. [실크로드의 악마들](1981), 피터 홉커크,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3. [유라시아 견문 2 - 히말라야에서 지중해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8.
4. [지정학의 힘], 김동기, <아카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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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 홀연히 사라진 4천 년 역사의 위대한 문명도시를 다시 만나다 더숲히스토리
카렌 라드너 지음, 서경의 옮김, 유흥태 감수 / 더숲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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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의 '프로토 타입'
- [바빌론의 역사](2020), 카렌 라드너, 서경의 옮김, <더숲>, 2021.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면서 남쪽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가는 지점은 이라크 남부에 위치한 광대한 범람원의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두 강은 많은 지류와 수로를 만나서 삼각주를 이룬다. 봄이 되면 자그로스산맥과 토로스산맥에서 눈과 얼음이 녹은 물이 평야에 이른다. 그리고 수로가 범람하면서 소중한 침전물이 함유된 진흙을 땅에 퇴적시킨다. 이는 천연비료 역할을 하여 곡류(보리와 밀)를 경작하고 대추야자를 재배하기 위한 최상의 환경을 조성한다.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없었다면 강우량이 적은 이곳은 아마도 사막이 되었을 것이다."
- [바빌론의 역사], <1. 바빌론의 시대와 공간>, 카렌 라드너, 2020.


인류 문명사의 '최초'를 생각한다.
'최초'의 문자, '최초'의 숫자, '최초'의 족장, '최초'의 국가, '최초'의 제국 등 '문명'을 이루는 제도와 문화의 '프로토 타입(proto-type)'이다. 
약 1만년 전 정착과 농경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큰 강물의 범람으로 비옥한 토지에 기반한 공동체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황하', '인더스강', '나일강'의 '4대 문명 발상지'로 지목된다. 이 중 대부분 문명의 '원형'인 '프로토 타입'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의 삼각주인 이른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그 '최초'의 시작점을 둔다.
이라크 지역 일대인 이 '중간 지대'는 동서남방의 각 문명이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그로 인해 점토 서판에 기록된 문자와 회계장부, 5천년 전 '최초'의 언어와 문자인 '수메르어'와 '최초'의 세습체제 '우루크' 왕조, 4천5백년 전 '아카드어'와 '최초'의 도시국가 '아카드', 4천년 전 히브리족의 조상인 '최초'의 족장 '아브람', 3천5백년 전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부터 북부중앙의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및 바빌로니아, 남부 '해상국가'들의 교류와 통혼을 통한 철기 문명의 발전, 배타적 유일신교의 원형인 마르두크로부터 '유대교'의 구약과 '최초'의 제국인 페르시아 문명 등 인류 문명의 '프로토 타입'이 바로 '중간 지대'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다.

4대 문명지인 큰 강은 범람하여 토지를 비옥하게 했는데, 유프라테스-티그리스-다얄라강 삼각주는 건조한 지대지만 상류의 자그로스산맥과 토로스산맥의 눈이 녹아내리는 봄에 범람하면서 옥토를 만든다고 한다. 이 지역을 이르는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이 자연범람과 관개를 위해 점성술(또는 천문학)과 "정교한 산수능력"을 발전시켰는데, 현재까지 시간과 날짜의 단위, 각도의 측량단위(360도)의 기준이 되는 '60진법'이 바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서 "도시 혁명"이 시작되면서 "촌락에서 도시로, 혈연사회에서 국가로 발전"된 사회체제는 "사회적 계층화, 기술의 전문화, 관료체제의 발달과 그에 따른 문자의 발명"(이상 같은책, <1장>)이 뒤따른다. 

메소포타미아의 대표적 도시는 '바빌론(Babylon)'이다. 우르와 우르크, 아카드, 아시리아의 아수르와 니네베도 있지만, '바빌로니아'의 정치적 중심도시 '바빌론'이 가장 유명하다. 1978년 보니엠의 노래 <By the Rivers of Babylon>에서 바빌론의 강가에서 떠올린 고향에 대한 향수는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이 일대 정복과정에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빌론으로 차출된 유대인 노동자들의 구슬픈 심정이 모티브다. [구약]의 <다니엘서>에 나오는 이 '바빌론 유수'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슬픔이었고, 바빌로니아 입장에서는 찬란했던 역사의 한 장이었겠다. 기원전 6~7세기경 아시리아로부터 바빌로니아를 다시 독립시키고 나아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면서 '공중정원' 등의 거대유적을 만들어낸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구약]의 '느부갓네살'이다. 

기원전 3천년대 최초의 도시국가 아카드 왕국의 총독 처소로 처음 언급된 '바빌론'은 '신의 문'이라는 뜻의 아카드어 '바빌림'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말이다. 바빌론은 그로부터 천년후 우르 왕국의 지방 중심지가 되었다가 기원전 18세기 그 유명한 함무라비 왕의 바빌로니아의 수도가 된다. 약 백년 후에는 북부의 히타이트 철기문명에 의해 파괴된 바빌로니아는 용병군대가 권력을 잡은 카시트왕조가 지역의 남부까지 장악했지만, 기원전 13세기 아시리아에 의해 정복된다. 기원전 12세기에 네부카드네자르 1세가 다시 바빌로니아를 복원하고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사르곤 왕이 바빌론의 왕이 되기도 했다. 이후 기원전 6~7세기 바빌론의 나보폴라사르와 위에 언급한 '바빌론 유수'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빌로니아의 재번영을 이끌었다.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가 '바빌론'을 중심으로 패권을 이어가던 열국시대였겠는데, 우리 동아시아식으로 보면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제가 복속시키기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바빌로니아-아시리아의 '남북국' 시대에 북방의 하타이트 철기인들이 대립과 병립을 하던 시대로 생각된다. 이 문명은 결국 기원전 331년, 마케도니아 왕인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나 유구한 문명의 역사를 이어온 바빌론 사람들은 바빌로니아가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일신 마르두크를 숭배하며 이어온 바빌론의 역사를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이 물려받아 지킬 것이라 생각했다. 알렉산더가 요절한 궁전은 이후 기원후 2세기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경건한 마음으로 찾아왔고, 19세기에 프로이센의 빌헬름 2세가 발굴단을 보냈으며 20세기 말까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대대적인 복원작업을 했다는데, 이 권력자들의 유적지 발굴과 복원 목적은 자신의 권력을 신성화하고 더욱 공고화하기 위함이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가혹했을 대대적 토목공사와 주변 민족민중들에 대한 잔혹한 착취는 결국 후대에게는 역사적 문명유적을 남긴다.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제국의 순행도로, 수양제의 대운하 뱃놀이가 당대 민중들의 고혈을 깊은 지하에 묻은 채 후대에게 주요한 역사문명 유산을 남기기도 했듯이 말이다.


"바빌론에 대한 카시트 왕조의 오랜 통치가 끝난 후 격동의 기원전 12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마르두크'는 바빌론의 왕위를 하사하는 땅의 주인이 되었다... '마르두크'가 왕위를 승계받는 자가 아니라 승리자에게 왕권을 하사한다는 개념은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새로운 개념이었다. 이로 인해 바빌론은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오랜 관습을 따르는 이웃왕국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바빌론의 새로운 개념은 누가 왕위에 오르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더 큰 융통성을 제공했으며, 이러한 실용적 탄력성은 정치적 주체의 역할을 하는 (마르두크의) 에산길라 신전 공동체와 함께 바빌론의 정치와 역사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바빌론의 왕은 전적으로 신(마르두크)에 의해 결정되며, 왕위에 오른 자는 바빌론 주민의 권리를 존중하는 의사로 발전했다."
- [바빌론의 역사], <5. 신이 바빌론의 왕을 정하다>, 카렌 라드너, 2020.


인류는 사회체제와 국가체계를 통해 계급지배의 역사를 유지했고, 이 과정에서 주요한 '인지 혁명'으로 '신'을 창조해 낸다. 동아시아는 오래 전부터 '하늘(天;텡그리)'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영웅들이 다들 '알'에서 태어난 이유도 '하늘'을 나는 '새'를 추앙했기 때문이다. 서방은 그리스 신화의 다신교와 샤머니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이분법 등이 산재했겠으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마르두크라는 어린 신이 바다 괴물을 물리치고는 세상의 문명을 재창조하며 '유일신'의 자리를 차지한다. 흡사 제우스가 티타노마키아 대전쟁을 통해 신의 세계를 장악한 것과 비슷하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마르두크'는 좀더 배타적이었는지 이후 이 지역에서 유래한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유일신'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 

마르두크는 세 번 바빌론을 떠나 납치당한다. 기원전 16세기 히타이트, 기원전 13세기 아시리아, 기원전 12세기 이란 남서부 엘람 왕국에 의해서다. '마르두크의 예언'에 따라 이 왕국들을 멸하고 다시 바빌론으로 돌아온 '마르두크'는 기원전 12세기경 바빌론에 '새로운 개념'을 정착시킨다. 즉, 왕위의 단순한 혈통적 계승을 넘어 '마르두크'로부터 '천명'을 받은 자가 권력을 잡는다는 신개념이었다.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었고 세속과 천상이 분리되기는 했으나 고대에 '과학'과 '철학'의 자리를 대신했던 '종교'와 '영성'을 공유한 다수 민중에 의해 권력자들이 교체될 수도 있는 '혁명'의 맹아 또한 배태하기 시작했다. 
"전적으로 신에 의해 결정"된 바빌론의 왕이 마르두크의 눈치를 보며 이 유일신이 보호해주는 이 다수 "바빌론 주민의 권리를 존중하는 의식으로 발전"(이상 같은책, <5장>)했다는 것은, 다수 민중들의 정서와 삶에 역행하는 권력자는 언제든 쫓겨날 수 있다는 '혁명'의 가능성이었다. 물론 지금으로부터 3천년 이전의 고대에는 히타이트-아시리아-바빌로니아-남부 해상국들의 열국의 쟁탈로 권력의 '수평 이동'의 형태였다. 이는 초한전쟁 이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나 우리의 삼국시대까지 보이던 권력이동과 왕조교체의 양상이었다. 아무튼, 유일신 마르두크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신개념'에 따라 바빌론은 아시리아에 의해 마르두크 신상을 빼앗긴 시기부터 이후 페르시아 지배기인 키루스와 다리우스, 크세르크세스 치하에서 끊임없이 반란을 시도했다. 마르두크에 의해 '신명'을 받은 다수의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 n세'들은 계속 반란을 시도했고 결국 페르시아 왕들에게 진압되었다. 기층 민중 출신의 반란으로 권력의 '수직 이동'의 '혁명'이 아닌 귀족과 왕족 중심의 '수평 이동' 쿠데타였지만, 마르두크를 믿는 다수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그 어떤 권력자도 '바빌론'의 왕을 자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의 공화정에서 '민주주의'라는 '유일신'을 두고 이뤄지는 권력투쟁의 원형, '프로토 타입(proto-type)'이다.

물론,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는 '바빌론'을 정복 후 '마르두크'를 버렸고,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또한 마르두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왕들과 알렉산더는 본인이 곧 신(神) 자체가 되고자 했다. 그러므로 정치와 권력의 요체였던 '마르두크'는 바빌론의 다수 민중들 몫으로 남을 수 있었다. 
권력자가 누가 되었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 '바빌론'은 인류 문명사의 원형, '프로토 타입'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다소 비약적이지만,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혁명'의 '프로토 타입' 또한 바빌론의 '마르두크'에서 추출해 볼 수 있겠다.


영국의 메소포타미아 역사 전문가 카렌 라드너(Karen Radner)는 2020년 잊혀진 바빌론의 역사를 대중적으로 짧게 소개한 책을 냈다. 원제인 [A Short History of Babylon]은 말 그대로 바빌론의 '약사(略史;short history)'로서 바빌론의 역사를 간략하게 읽어볼 수 있다.
19세기말부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약 20년 간 바빌론을 발굴한 독일의 고고학자 로베르토 콜데바이(Roberto Koldewey) 이야기가 더 궁금하긴 했으나, 고고학자들의 활약에 대해서는 다음 책으로 중근동에서 좀더 중앙아시아로 무대를 옮겨 치러진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피터 홉커크, 1990)을 통해 읽어볼 예정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고고학자'를 꿈꾸지는 않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내게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다.

고대근동 바빌론의 역사는 카렌 라드너의 마지막 말로 이만 정리하면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많은 별자리와 황도십이궁은 '바빌론'의 유산이다. 또한 '60진법'은 우리의 매순간을 시간, 날짜, 달과 연으로 구분하는 기초로 사용되고 있다. 다음번에 시간을 확인하게 되면 '바빌론'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 [바빌론의 역사], <9. 역사에서 사라지다>, 카렌 라드너, 2020.

***

1. [바빌론의 역사(A Short History of Babylon)](2020), Karen Radner, 서경의 옮김, 유흥태 감수, <더숲>, 2021.
2.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기원전 20세기), 김산해 지음, <휴머니스트>, 2005~2020.
3.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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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망 - 항우에서 한신까지
리카이위안 지음, 김영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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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전국시대 : 2] "초나라는 멸망한다"
- [초망(楚亡)](2015), 리카이위안,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1.


"수천 년 동안 '역사'는 중국인의 '종교'였다. 우리(중국인)에게 '성경'은 없지만 '고전'은 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비춰볼 수 있지만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시대의 흥망을 알 수 있다([묵자]). 자신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으므로 거울에 비춰봐야 한다. 당대의 사실로는 당대를 인식할 수 없으므로 '역사'에 비춰봐야 한다. 사마천은 또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세상을 살면서 옛날의 이치를 기록하는 것은 스스로를 비춰보기 위해서다'([사기], <고조공신후자연표>)... 위대한 사마천은 자신의 생명을 '역사'에 쏟아부어 일가의 언어를 저술하는 가운데서 영생을 얻었다. '역사'는 그의 종교였고, 그는 '역사'의 사제였다."
- [초망], <후기 : 역사는 우리의 종교>, 리카이위안, 2015.


기원전 206년, 진(秦) 나라가 멸망했다.
중국의 역사학자이자 문학박사 리카이위안은 '초한전쟁' 무대였던 진말한초의 시기를 '포스트-전국시대'로 규정하며 '진나라 붕괴(秦崩)'의 과정을 서술했다. '진시황에서 유방까지'의 이 '열전'은 '역사의 공백'을 메우려는 저자의 노력이다. 
사마천의 후예로서 그는 생생한 현장답사를 통해 고대 문헌이 말하지 않는 '공백'의 '역사'를 '문학'적 서사로 채운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모든 역사는 추측과 상상"([초망], <프롤로그>, <6-6>)이라고 말하는 리카이위안에게 "때로는 '문학'이 '사학'에 비해 훨씬 진실하다"([초망], <프롤로그>).

'역사'는 시대를 보는 '거울'이라는 말은 오래된 은유다. '유가'의 공자가 지은 [춘추]부터 [묵가]는 물론, 사마천의 [사기]와 [구당서]의 <위징전> 등의 내로라 하는 역사책들이 전하는 잠언이다. '유일신'의 '종교'적 전통이 없는 동아시아에서 '신'은 '하늘'이었다. 유교에서 '천인합일'은 동양사상 궁극의 목표였다. 인간과 구분되는 '천상'의 신이 아닌 인간과 함께 호흡하는 '귀신'을 섬기는 제사의 전통이 있다. 신과 인간의 이분법이 아닌 자연만물과 인간사회의 공존의 철학이기도 하다. 기후위기로 자연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지금,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인들에게 '역사'는 어쩌면 '종교' 대신이었고, 그만큼 '역사'라는 '거울'은 두고두고 닦아써야 했다. 그리고 고대 기원전 3세기의 중국역사를 [진붕(秦崩)](진나라의 붕괴)의 '거울'로 비춰보았다.
이제 '포스트-전국시대'에서 진(秦) 나라의 뒤를 이은 '초(楚) 나라의 멸망'을 살필 차례다.
드디어 [초망(楚亡)의 시간이다.


"(초 회왕)의제의 죽음은... 진나라 말기의 대란 이후 잠시 부활된 '포스트-전국시대'와 왕정복고 시대의 종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중국역사는 초나라와 한나라 양웅의 주도 아래 여러 제후국이 분쟁을 벌이는 시대로 접어든다... 이는 마치 전국시대 말기의 '합종연횡'이 재현된 것과 같았다. 새로운 초한전쟁의 역사에서 항우는 초나라를 계승하여 '합종책'의 패왕이 되었고, 유방은 진나라를 계승하여 '연횡책'의 맹주가 되었다... 고국의 옛주군 초 회왕의 정통을 계승하는 것은 천하쟁패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자 처리해야 할 난제였다."
- [초망], <2-6. 의제의 죽음>, 리카이위안, 2015.


초(楚) 나라의 멸망은 비단 유방과 겨루던 초 패왕 항우의 몰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나라가 6국을 병탄한 후에도 정복과 탄압을 그치지 않자 열국의 사람들은 진나라에 이를 갈았다.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시작되자 망국의 사람들은 복국을 외치며 '포스트-전국시대'를 열었는데, "진나라를 멸하는 것은 초나라"라는 참언처럼 반란군 지도자의 대부분은 초나라 사람이었다. 진승, 항우, 유방까지 모두 초나라 사람이었다. 그들이 '반진(反秦)'의 기치를 올렸을 때 반란군의 제도와 편제, 병력과 근거지 일체는 초나라의 그것이었다.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의 일족인 항씨 가문은 말할 것도 없고 '평민' 건달 출신인 유방도 그랬으며, 초 회왕(의제)이 선포했던 '포스트-전국시대'의 천하공약이자 계책으로서 '회왕의 약속(약조)' 또한 초나라 중심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초망(楚亡)]은 항우의 멸망이 아니라 '초나라 중심사상'의 종결이었다. 유방의 책사 장량은 물론 대장군 한신으로 인해 유방이 초나라의 근간에 진나라의 사상을 접목하면서 초나라가 지양된 것이 바로 [초망(楚亡)]의 실체였다.

장량은 이미 황석공으로부터 [태공병법]을 전수받은 이후 천하통일의 대전략을 고민했고 유방이라는 그릇에 그 방략을 담고자 했다. 천하를 양분하는 건곤일척의 '초한전쟁' 전선을 최초로 그려낸 인물은 아마도 장량일 것인데, 이를 군사적으로 제안한 인물은 바로 한신이었다. 


"'한중대(漢中對)'는 초나라와 한나라 쟁패의 역사적 기점이었다. 유방 집단은 이때부터 북상하여 삼진을 다시 평정하고, 동쪽으로 나아가 천하를 쟁패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후에 전개된 역사에 의거하여 살펴볼 때 '한중대'의 정확한 정책결정과 성공적인 추진력이야말로 유방 집단을 수동적 위치에서 주체적 위치로 전환시키고 연약함을 강력함으로 바꿔놓은 변곡점이었다. 나중에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천하를 쟁취한 토대는 바로 여기에서 마련된 셈이다. 이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중국역사에서 제시된 전략결정 중 성공적인 모범으로 '한중대'를 손꼽으면서 제갈량이 유비에게 답한 '융중대'에 비견하고 있다."
- [초망], <1-7. 한중대>, 리카이위안, 2015.


삼국지에서 유비는 '삼고초려' 후 '융중'에서 제갈량으로부터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계책을 듣는다. 삼국이 "솥발처럼" 서로 견제하며 자립하는 정세다. 유방보다 스물여덟살 정도 아래인 한신이 항우의 진영에서 나와 우여곡절 끝에 유방을 만나 기묘한 계책을 제시한 것이 훗날 '융중대'의 표본이 된 '한중대(漢中對)'였다. 소하와 하우영과의 면접 후 그들의 추천을 받았으나 유방은 신출내기 한신을 크게 중용하지 않았다. 항우처럼 자기를 중용하지 않은 유방에게 시위하듯 탈영을 하는 한신을 소하가 직접 다시 끌고오는 한바탕 쑈를 하고난 후 '한중'에서 한신이 유방에게 제시한 전략이 '한중대'다. 이를 전후로 소하의 적극 추천에 힘입어 한신은 스물셋의 나이에 유방군의 대장군이 된다. 아마도 '한중대'는 한신 개인의 의견이라기 보다는 한중에 갇혀 항우군에 비해 군사적 열세를 겪던 유방에게 장량과 소하 등의 중신들이 [손자병법] 등에 능한 '군사천재' 한신의 입을 빌려 제안한 대책이었을 것이다. 고립되었지만 풍족한 관서와 한중을 기반으로 관동의 항우와 동서로 대치하는 전선이 그어진 순간, 동남쪽의 초나라 문명은 이미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한신은 장량의 '천하양분지계(天下兩分之計)'를 바탕으로 유방이 관중을 나가 옛 진나라의 수도권인 삼진땅을 차지하는 '암도진창' 계책으로 '초한전쟁'의 천하양분을 실현하는 기반을 마련했고, 유방의 연합군이 항우군에게 몰살당할 때마다 신병을 보충해주는 화수분이었다. 유방이 팽성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 한신은 전장을 북방으로 확장시켜 대장군 본인이 옛 조나라와 위나라는 물론 연과 제까지 평정하고 항우의 북방을 위협하는 전략을 또 다시 제시하고 실현한다. 모사 괴통의 '천하삼분지계' 제안에도 불구하고 한신은 끝까지 '천하양분지계'를 고수하다가 '토사구팽' 당하고 만다.
장막에서 큰 그림을 그리는 기획자 장량도 위대하지만 이를 군사적으로 현실화하는 대장군 한신이 누구보다 공이 큰 이유다. 전투시 후방보급과 국정운영을 한 소하와 책사 장량, 군신 한신이 한나라 건국 '3걸'이 된 이유다.

한편, 한신처럼 항우의 진영에서 유방의 진영으로 온 모사 진평은 유방군의 첩보부대 책임자였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형양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음모꾼 진평의 이간책이 빛을 발하는데, [사기]에는 항우의 사자에게 항우의 스승과도 같은 책사 범증의 사자인 줄 착각했다면서 진수성찬을 허접한 음식으로 새로 세팅했다고 하나 이는 일화에 불과하다. 홍문연에서부터 항씨 가문과 범증의 정적관계를 알고 있는 진평이 항백과 범증을 이간질시켜 결국 항우로 하여금 범증을 내치게 만든 것이다. 범증은 초나라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의제를 지키고자 했고, 항씨는 초나라 왕족의 성인 웅씨를 항씨로 바꾸고자 했다. 그리고 결국 의제는 살해되고 범증 또한 숙청되었을 때, 초나라는 멸망했다. 초나라는 '포스트-전국시대'의 마지막 보루였다. 오래된 '전국시대'를 계승하는 구체제의 대표였다. 항우는 진나라 수도 함양을 도륙하고 불태운 후 기존 '전국시대' 제도를 본인이 패왕이 되는 '춘추시대'의 제도와 시간적으로 결합하면서 이후 '연합제국'의 과도기를 열었다. 항우의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유방은 진나라가 놓은 '제국'에 기초하여 초나라가 추진했던 기존 '전국시대'의 분봉을 결합하면서 '연합제국'을 열었다고 리카이위안은 평가한다([초망], <5-8. 유방이 정도에서 즉위하다>). 진시황의 진제국과 달리 유방의 전한은 황제가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수도권과 유씨 지방제후국의 '연합'이었다는 것이다.
초나라 사람 유방군이 초나라의 옛 제도를 무너뜨리고 새시대를 연 것이 바로 [초망]이다. 그렇게 "초나라는 멸망한다".


"[사기]와 [한서]의 <공신표>... 항우를 죽인 다섯 명의 기병 장수는 모두 옛 진나라 출신이며, 또 모두 옛 진나라 군대의 장수였다... 항우를 죽인 한나라 기병대 장수 5명이 모두 진나라 본토의 수도 내사지 출신이며 진나라 기병 장교 출신이라는 점을 <공신표>로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진나라 멸망 후 관중 지역에서 유방집단으로 편입한 사람들이다."
- [초망], <6-1. 누가 항우를 죽였나>, 리카이위안, 2015.


형양에서 초-한의 군대가 오래도록 대치하고 있을 때, 후공이라는 신비로운 모사가 항우를 찾아가 홍구를 사이로 양국이 천하를 나누고 휴전하자는 협정을 성사시킨다. 팽성대전의 참패 후 한나라는 진나라의 기병부대를 흡수하여 전력이 보강되었다. 초나라의 보병 중심 전술은 항우 기병대의 파괴력에 무력했다. 
리카이위안에 의하면 유방의 주력군은 최초 기의시 풍패의 유협집단인 '패현자제병' 3천을 기반으로 진승의 장초에 편입되었을 때 받은 탕군의 군사 6천, 항량 밑에 들어가 늘어난 5천을 모은 약 1만 명이었다. 초 회왕의 휘하에서 3만으로 늘어난 이 '탕사초인집단'은 유방이 '회왕의 약조'에 따라 관중에 들어갈 때의 주요 병력이었고 이후 한나라 건국 후 지배집단을 형성했다고 한다. 여기에 살상과 약탈을 삼가면서 진나라 관중지역의 민심을 얻은 유방에게 옛 진나라 군대가 세를 불려주는데, '탕사초인집단'이 똑같은 초나라 군대인 항우군으로부터 열세에서 우세로 전환된 계기가 바로 이 진나라 군대의 결합이었다. 북방의 흉노 및 서방 기마민족과 초원에서 전투를 벌이던 진나라 군대는 당시 유라시아 제국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했다고 한다. 초나라는 물론 예전의 열국과 망국 진나라의 '민심'을 얻고 '군심'까지 가세한 유방의 한나라 군대는 수차례 전투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미 '초-한' 대전쟁에서 이기고 있었다. 오강정에서 '하늘의 탓'이라며 31세에 자결한 항우의 시체를 갈기갈기 나누어 가진 장수 5명은 모두 진나라 사람들이었는데, 신안에서 진나라 사람 20만 명을 생매장하고 함양을 불태움으로써 '민심'을 잃은 항우에 대한 진나라 사람들의 깊은 원한을 알 수 있다.


"유방은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았고,
항우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 [초망], <2-10. 팽성전투를 돌아보다>, 리카이위안, 2015.


팽성대전에서 60만 연합군으로 10만 항우군에 대패한 유방은 그럼에도 기죽지 않았다. 겨우 한신의 군영에 살아돌아온 후 말 안장에 기대어 "나는 관동 등지의 땅을 여러분에게 봉토로 주고자 하는데 누가 나와 함께 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사기], <유후세가>)라고 물었다는 유방은 "보통사람의 경지를 초월한... 실로 심리적 강인함이 대단한 천재적 영수"([초망], <3-1. 유방의 강인함>)라고 리카이위안은 평한다. [삼국지]의 진수가 촉한의 유비를 "백절불굴", 즉 '백 번 꺾여도 굽히지 않는다'라고 평한 것처럼, 사마천을 잇는 역사가 리카이위안은 유방을 "심리적 강인함이 대단한 천재적 영수"로 정리한다. 관동으로 호기롭게 진출하다가 순식간에 60만을 잃고도 적장 항우가 차지하고 있는 그 관동 땅의 봉지분배를 논하는 멘탈이 어디 보통 사람의 그것이겠는가? '약법삼장' 등으로 얻은 '민심'의 지지와 대장군 한신은 물론 선봉장 영포, 후방유격부대 팽월 등의 '군심' 또한 유방 본인의 편이며, 이미 '민심'이 떠난 항우는 결코 유방 본인을 이길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겠다. 


"민심을 잃은 자는 천하를 잃는다!"
- [초망], <에필로그>, 리카이위안, 2015.


결국, "초나라는 멸망했다(초망)".
'포스트-전국시대'의 마지막 주자 초나라의 낡은 체제는 가고, '제국' 시대의 새로운 체제가 등장한다. 그러나 유방 집단이 개국한 한나라는 기존 진나라와 달랐다. 다스릴 능력도 없으면서 억압하기만 했던 진제국의 시행착오를 넘어 '포스트-전국시대'의 '초-한전쟁'을 겪으면서 구체제와 신체제를 결합한 '연합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그 기반은 말할 것도 없이 다수 민중의 '민심'이었다.

"초나라는 망했다(楚亡)"지만, 미흡하기는 해도 '민심'과 '혁명'의 역사는 [초망]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

1. [초망(楚亡) - 항우에서 한신까지](2015), 리카이위안,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1.
2. [진붕(秦崩) - 진시황에서 유방까지](2015), 리카이위안,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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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붕 秦崩 - 진시황에서 유방까지
리카이위안 지음, 이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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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전국시대 : 1] "진나라가 붕괴한다"
- [진붕(秦崩)](2015), 리카이위안,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21.


"유방은 동시대의 영웅호걸들과 함께 '전국시대'를 회복하고 왕정을 부활하며, 지나간 것을 이어받아 미래를 열고 옛것을 회복하고 혁신했다. 그들은 함께 '포스트-전국시대'의 역사국면을 열었다. '포스트-전국시대'에는 전국칠웅이 나라를 회복하고 합종연횡하면서 분쟁과 병립이 재현되었다... '포스트-전국시대'라는 이 새로운 관념 역시 또 다른 역사의 발견일 것이다."
- [진붕], <서문을 대신하여>, 리카이위안, 2015.


지난 세기말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우리말로 '후기-모더니즘' 정도로 번역되었다. '후기 인상주의'와 같이 어느 사조의 '후기'를 뜻하는 '포스트(post)'와 '근대성'의 모더니즘(modernism)'이 조합된 신사조였다.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이자 인상주의가 아니었고 '매너리즘' 등이 나타난 '후기' 르네상스도 르네상스만은 아니었다. '모더니즘'은 20세기 초 지난 세기와 구분되는 '근대성(modernity)'의 예술적 선언이었다. 지금에야 '근대성'이지만 그 당시는 '현대(modern)성'의 구현이었다. '모더니즘'은 말 그대로 고전적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새로운' 것의 포괄적인 표현이었다. 서구에서 1980년대부터 등장하여 1990년대에 우리 사회에 유입된 '포스트-모더니즘'은 정형화되던 '근대성'보다 더 새로운 '후기-근대(현대)주의'였다. 신세기를 앞두고 모든 규정과 틀을 거부하는 '현대성' 자체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자 '모더니즘'이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면 다른 체제로 이행하기 전 모든 '후기'의 양상이 그렇다. '양-질 전환' 법칙의 본질이다.


중국 역사학자이자 일본에서 문학을 전공한 리카이위안은 중국 각지를 현장답사하며 기원전 3세기 진-한 시대 역사를 문학적으로 서술한다. 2015년 [진붕(秦崩)]과 [초망(楚亡)] 세트로 진-한 교체기를 다루면서 [사기]의 사마천의 본을 받아 역사 서술에서 '문사철(文史哲)'을 소통시키고자 한다. 리카이위안에 의하면 "역사학의 본원은 '역사 서사'다"([진붕], <맺음말>). 2천년 전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역사적 사료인 문헌과 유물 등을 기본으로 역사가 침묵하는 사안들은 발로 찾는 현지 답사와 민간의 전설과 담론을 직접 취재하면서 '역사의 공백'을 메꿨다. 그렇게 풍부해진 역사 서사는 그 자체로 역사적 문헌자료가 되었고 이후 사가들의 고전이 되었다. 현대적 사마천이 되고자 하는 이 역사학자는 "발산 형식의 추리와 연쇄 형식의 연상" 및 "고대사 고증과 추리소설 간의 내재적 연계"를 통해 이미 장기판처럼 진부해진 '초한전쟁'을 복구하는데, 리카이위안에게 "역사학자는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혹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포와로와 같다"(이하 [진붕], <맺음말>). 또 다른 중국 역사학자로 중국통사를 집필 중인 이중텐 역시 역사 서술에서 '추리소설' 기법을 중시한다. 
'역사'의 서사에서 '철학'을 담기 위해서는 '문학'이 결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사철'이다.

리카이위안이 사마천의 길을 따라 새롭게 구성한 '초한지'의 키워드는 '포스트-전국시대'다. 진-한 교체기로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쟁패하던 시기는 이전 열국의 춘추전국 시대로부터 제국의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기였다. 진시황제에 의해 중국 역사 최초로 '제국'의 기반이 다져지는 신시대였음과 동시에 '전국시대'의 '포스트(post-)', 즉 '후기성' 또는 '말기성'의 향연이었다. 진시황 영정의 급사 후 진시황릉 부역자 진승과 오광이 대택향에서 반진의 깃발을 처음 올렸을 때, 15년 전 진나라에 의해 멸망된 '초, 제, 조, 위, 연, 한' 6국 사람들은 다시금 복국과 왕정복고를 위해 봉기하고 호응했다. 유방과 항우, 한신과 영포 등의 반란군 지도자들이 주로 초나라 출신이었지, 위표와 조헐 등은 망국의 귀족공자로서 열국의 독립을 통해 전국시대의 부활을 바랬다. 유방의 책사 장량은 '초한전쟁'을 거치면서 새로운 중앙집권식 제국 체제 구상을 정립하게 되지만 진제국이 무너지던 진말 시기에는 한(韓)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박랑사 진시황 테러를 시행하기도 하고 유방의 한(漢) 나라를 위해 일하면서도 고국인 한(韓)을 복국하기 위해 길을 떠나던 한(韓) 나라의 몰락 귀족이었다. 진승과 오광의 봉기로 '장초(楚)' 정권을 세운 진승 또한 리카이위안의 고증과 추리에 의하면 '진(陣)' 씨의 성으로 보아 춘추 열국 중 하나로 초나라에 의해 멸망한 진(陣) 나라의 왕족이었단다. 어떤 사가에 의하면 귀족이나 무관이 아니었기에 말을 잘 못타서 전장을 직접 지휘할 수 없었던 진승은 평민으로 자라서 말을 못 탔을 뿐 그 핏줄은 왕족이었다고 추리된다. '진시황에서 유방까지'를 부제로 한 [진붕] 다음으로 '항우에서 한신까지' 다룬 [초망]에서 저자는 한신의 성 '한(韓)' 씨를 증거로 그를 한(韓) 나라 왕족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마도 고대의 평민들은 성이 없었을 것인데 진말에 봉기한 군웅들은 각기 다 성씨가 있어 일반 평민보다는 몰락 귀족이나 왕족의 후예들이었을 수 있다. 죄수로서 얼굴에 먹칠을 한 구강왕 경포의 본명이 영포인데 그의 성 '영' 또한 오래전 춘추시대 '영' 땅의 후예였기에 그 땅의 '왕족'이었을 수 있다고 저자는 [초망]에서 추측하고 있다. 

[초망]은 [포스트-전국시대 : 2']를 통해 서평하고자 한다.


"통일제국 2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중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무장할거로써 대업을 이룬 영웅은 망탕산에서 흥기한 유방이었다. 이후 그의 발자취를 잇는 인물들이 잇달았다. 무장할거를 통해 대성공를 거둔 경우는 두말할 것 없이 징강산(정강산)의 마오쩌뚱이다... 망탕산이 징강산과 감응하여 통했다. 고금을 두루 훑어보면 역사의 연속과 반복은 바로 망탕산-징강산과 연결되어 감응한다."
- [진붕], <2-9. 망탕산이 징강산과 감응하여 통하다>, 리카이위안, 2015.


[진붕]의 주인공은 역시 유방이다. 
다른 반란군 세력들은 거의 망국의 귀족이나 왕족으로 추정된다는데, 유방(劉邦)은 그 '방(邦)'이라는 이름조차 제위에 오른 후 '나라'의 뜻으로 고상하게 지은 것이고 원래 초한전쟁터에서 한창 굴러먹을 때 이름은 '계(季)'였다. 유씨 집안의 '막내'라는 뜻으로 정식 이름조차 기록에 없던 평민이었다는 것이다. 사마천 [사기]의 <고조본기>에는 '계(季)'가 그의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고대에 '유(劉)'라는 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방의 부친 유태공은 패현 풍읍 일대의 자산가 또는 유지 정도 되었을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제업을 이룬 '평민' 지도자는 세 명인데, 그 시초가 한고조 유방이고 다음이 명태조 주원장이며 마지막이 중화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모택동(마오쩌뚱)이다. 마오쩌뚱 또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방과 같은 지역 자산가의 집안 출신이라 하니 오로지 주원장만이 하층 계급 출신 황제다. 유방은 한량이나 건달 같은 '유협' 출신이었으나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지역 보안관 같은 '정장'을 맡으면서 말단 관리의 세계로 진입하여 소하와 조참 같은 유능한 관료 인재를 만났고 이들은 번쾌, 하우영, 노관 등 유협 시절 동지들과 함께 한나라 제국의 지배집단을 형성한다. 주원장은 굶어죽지 않으려고 탁발승을 전전하던 진정한 흙수저였고 마오쩌뚱은 주은래처럼 유학은 못 갔지만 최소한의 배움은 받은 '식자층'에는 속했다. 이들로 대표되는 '혁명'의 전통은 통치계급과  피통치계급의 '수직이동'으로 나타났다. 리카이위안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래, 중국은 여러 나라가 전쟁을 벌이던 열국시대를 매듭짓고 왕조가 교체되는 제국시대로 진입했다"([진붕], <2-9>)면서 "열국시대에는 정권교체의 동력이 대부분 국외에서 비롯되었고, 권력은 통치계급 사이에서 '평행'으로 이동"한 반면, "제국시대에 정권교체의 동력은 주로 민간 사회의 무장폭력에서 나왔고, 권력은 통치계급과 피통치계급 간의 '수직'으로 이동했다"면서 "이것이 2천년 중화제국 정권교체의 기본특징을 형성했다"고 규정한다. 민중반란으로 혁명을 통해 권력을 교체한 역사는 유방의 '망탕산'과 마오쩌뚱의 '징강산'의 무장투쟁의 정신으로 "감응하여 통한다"(이하 [진붕], <2-9>).


"진승은 장초 정권을 세움으로써 포악한 진나라를 멸망시킬 대업을 열었다. 항우는 진나라 주력군을 소멸시키고 진나라 멸망의 운명을 결정했으며, 천하 분할의 기초를 마련했다. 유방은 관중을 공격해 진나라 정부가 투항하게 함으로써 최종의 제업을 성취했다... 사마천은 ([사기]) <진초지제월표>에 진나라 말의 난에서부터 한왕조 건립까지의 역사를 '진-초(秦-楚) 시기'로 간주했는데, 여기서 강조한 것은 진나라 말 역사에서 초나라와 초나라 사람의 독특한 지위와 역할이다."
- [진붕], <4-9.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은 반드시 초나라"라는 말의 참된 의미>, 리카이위안, 2015.


'포스트-전국시대'는 결국 '진-초 시기'였다. 반진의 선봉 초나라는 열국의 패국으로서 연합군을 형성하여 진나라에 복수하고 멸망시킨다는 것이다. 항우의 숙부 항량이 진나라 명장 장함에게 패한 후 항량이 세운 초 회왕이 친정에 나서면서 제일 먼저 관중을 평정하고 진나라 수도 함양을 정복한 자를 '진(秦) 왕'으로 정한다는 기원전 208년 '회왕의 약조'를 선포했다. 초나라의 전략은 각지의 '전국 7웅' 열국을 복국하면서 초나라가 '패업'을 달성한다는 것인 바, 진나라를 멸한 유방만 '진왕'이 되면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항우의 생각은 달랐다. '포스트-전국시대'의 대전략은 동의하되 초 회왕의 자리는 본인의 것이 되어야 했으며 '전국 7웅'을 갈가리 찢어 더 나누고 본인은 서초의 '패왕'이 되는 것이었다. 항우는 계속 자신을 견제하던 초 회왕의 심복인 대장군 송의를 죽이고 다소 독립적이던 제나라와의 동맹을 끊었으며 유방이 관중으로 진군하던 사이 40만 반진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의 주력군인 장함의 군대를 거록에서 물리쳤다. 그러나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함의 항복을 받고 60만 대군이 된 항우의 연합군은 진나라 사람들의 반항으로 진군이 지체되었으며 결국 신안에서 20만 진나라 투항군들을 살육하고 생매장함으로써 진나라 사람들의 철천지 원수가 되고 만다. 결국 '신안의 20만 생매장 사건'으로 항우는 진나라 수도 함양을 정복하고도 관서 지역에서 창업하지 못한 채 강동으로 '금의환향'하여 팽성을 수도로 '서초패왕'의 길을 택한다. 초나라 패왕 항우는 결코 진나라까지 정복할 수 없었다.

관서지역의 민심은 함양에 먼저 도착하여 '약법삼장'으로  진나라 사람들의 망국의 한을 어루만진 '한왕' 유방의 차지가 된다. 이제 '포스트-전국시대'의 정국은 다수 민중의 민심을 얻은 관서의 유방 한(漢) 나라와 각국 영지의 지도자들을 지배하려는 관동의 항우 초(楚) 나라의 건곤일척 천하쟁패의 양상으로 진화한다. 열국의 복고주의자들은 유방의 '연횡책'과 항우의 '합종책'을 두고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며 다시금 전국시대처럼 '합종연횡'을 재현했으나 관건은 더 이상 전국시대처럼 지배계급의 이익 보다는 '초한전쟁'에서 어느 편이 더 민심을 얻는가의 문제였다. 

유방의 책사 장량이 기획한 '전국시대'에서 '초-한 쟁패'로의 정국 이행은 '전국시대'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포스트-전국시대'의 정세에서 '팽성 대전'과 '형양 전투'를 거치며 수세에 몰린 유방으로 하여금 다수 민중의 민심과 군웅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결국 마지막 '해하의 전투'의 승리를 쟁취하게 만들었다.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결론은 '항우에서 한신으로' 이어지는 [초망]에서 다르는 주제이므로 다음에 살펴보기로 한다.
[진붕]의 결론은 '포스트-전국시대' 정세에서 '진나라 붕괴(진붕/秦崩)'의 원인이다.


"진나라 말의 역사... 후안무치한 영웅시대였다... 모두 음모와 모략 뿐이었다... 당시 역사 무대에서 각축을 벌이던 정치인물들은 단지 권력과 이익만을 따졌고 윤리도덕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들은 인생의 근본이 이익에 있다고 보았다. 이익이 있는 곳이 바로 행동이 있는 곳이었다. 이익은 도덕과 무관했고, 이익이 도덕과 충돌할 때는 도덕을 버렸다. 윤리도덕의 규범이 세워진 건 한왕조가 들어서고도 100년이 지나서다... 덮어놓고 진취와 발전만 추구한 게 사회의 불안을 초래... 오랫동안 공리주의를 받들어 실행한 반면 윤리도덕의 규범 및 인문교육 체계의 건설을 홀시... 진제국 멸망의 원인..."
- [진붕], <8-10. 진나라 멸망의 역사 교훈>, 리카이위안, 2015.


사실 진시황과 유방은 '동시대인'이었다. 진시황 영정은 유방보다 고작 세 살 많았다. 13세에 온갖 고난 끝에 진왕이 된 영정은 마흔 전에 중국을 통일하고 시황제가 되었으나 정복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채 민중들을 끊임없이 동원하고 괴롭히다가 50세에 죽었다. 유방은 50세가 거의 다 된 지금 나와 동갑인 48세에 봉기하여 50대 중반에 천하를 통일했다. 이들 세대는 모두 '천하'를 위한다는 '공리주의'를 앞세워 이익을 쫓던 '영웅 시대' 인물들이었다. 진나라 통일의 마지막 주역 이사는 유방보다 스무살 이상 많았고 전국시대의 틀을 깬 항우는 유방보다 스무살 이상 적었다. 진 2세 호해를 앞세워 부소와 몽염의 세력을 숙청하고 승상 이사까지 제거한 조고는 고증에 의하면 거세된 환관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진제국의 최고 관료였는데, 유방과 동갑인 조고는 유방이 관중에 진입한 후 2세 황제를 버리고 유방과 손잡으려고 했던 진말 '이익 최상주의자'의 전형이었다. 물론 부소라는 '도덕'을 버리고 호해라는 '이익'에 아첨하며 목숨을 부지하려던 이사는 그의 본보기였다. '법가'를 숭상했다는 진나라는 공손앙부터 여불위는 물론 이사와 조고까지 본인 스스로가 놓은 수에 본인이 걸려 넘어졌고, 진나라 자체의 운명도 그러했다. 열국을 짓밟고 민중을 잔인하게 억압하며 수탈했던 진나라는 이들 다수 피억압자들의 손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 선봉에 진나라를 향한 복수심이 가장 강했고 가장 광범위했던 초나라 사람들이 앞장섰을 뿐이다. "초나라에 '3호'가 남는다 할지라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은 반드시 초나라다"라는 참언에서 이르는 '3호', 즉 세 집은 바로 진승, 항우, 유방이었다([진붕], <4-9>).


'진-초-한(秦-楚-漢)' 이행기는 '전국시대'에서 '제국'으로 이행하는 첫 과도기였다. 리카이위안이 규정한 '포스트-전국시대'는 '전국시대'의 '후기'로서 '제국'을 본격적으로 열기 위한 준비기였다. 
진시황이 놓은 제국의 초석은 서초패왕 항우의 '논공행상' 전략을 통해 기존의 전국시대와 새로운 제국의 제도간 '시간적(통시적)' 접속을 시도했고, 한고조 유방은 반진의 선봉인 초나라에 갇힌 제도를 진나라의 그것과 '공간적(공시적)' 접속을 완수하면서 2천년 중국역사의 원형을 만들었다.


이렇게 '포스트-전국시대'의 이행기에서 "진나라가 붕괴한다(진붕)".
그리고 8년의 '초한전쟁'을 거쳐 "초나라가 멸망([초망])"하면서 '포스트-전국시대'는 막을 내린다.

[진붕] 이후 [초망]이 임박한다.

***

1. [진붕(秦崩) - 진시황에서 유방까지](2015), 리카이위안,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21.
2. [초망(楚亡) - 항우에서 한신까지](2015), 리카이위안,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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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3
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 지음, 박수민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차 세계대전의 진행사는 대부분 방대하고 분량도 많다. 독일 출신 유대인으로 미국의 군사역사학자인 게르하르트 와인버그의 이 책은 간략한 서술로 2차 세계대전의 전체를 조망하고 있어 추천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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