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오멘 : 스틸북 한정판
리처드 도너 감독, 그레고리 펙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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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컬트의 시작, [오멘]
- [오멘, 저주의 시작], 아카샤 스티븐슨, 2024.


1.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 알고 보니 영화가 먼저였다.

영어 과목을 좋아해서 세상 모든 단어들을 우리말과 영어로 함께 외워대던 시절이었으니, 분명 중고등학교 청소년기였을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디오 테잎을 빌려 영화를 보았던 것 같으니,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이었을 거다.
내가 '오멘(omen;징조)'이라는 영어단어 뜻을 그 소설과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을테니 고등학생이었던 1990~1992년 사이의 일이었을 게다.

당시 고등학교 '철봉파' 친구들은 토요일 학교 끝나면 철봉대 밑에서 놀다가 가끔 집이 비는 친구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먹고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를 빌려 보기도 했다. 
쟝르는 주로 공포영화였는데, 미성년자인 우리들은 대놓고 성인영화를 빌릴 깜냥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13일의 금요일'이나 '나이트메어' 같은 미국 슬래셔 무비들에는 불문율처럼 섹스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래 20세기 소년이었던 우리들 어릴 적에는 워낙 관련 자료(사진/영상 등)를 구하기 어렵기도 해서 그랬는지 적나라한 거보다 살짝 나오는 게 더 좋다더라 하는, 그 무슨 말도 안되는 위안이 돌기도 했다.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섹스를 심지어 우리와 같은 나이에 마친 미국의 7080 슬래셔 무비 속 남녀는 여지 없이 영화 속 주인공 악마한테 처단당했다. 우리들이 그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 이유는, 순결을 해친 자들을 저주하는 종교적 엄숙함은 아니었고 아주 심플한 질투심이었을 뿐이었지만.

어느 토요일 오후에 내가 영화 [오멘](1976)을 빌려보자 했던 건 그러나 동정남의 시기심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역시 종교적 경건함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마 얼마 전 우연히 빌려 읽었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라 영화로도 한 번 봤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거고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남녀상열지사가 나오지 않아 실망했을 친구들과 달리 나는 놀라고 말았다.

이유인 즉슨, 영화 내용이 소설과 정확히 똑같았기 때문이었는데, 본래 소설이 원작인 영화는 각색이 되어 세부 내용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고, 그 때는 몰랐지만 소설 [오멘]의 원작이 영화였다는 사실을 아직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설 [오멘]은 영화의 원작이 아니라,
영화 [오멘]의 극본을 소설화했던 거였다.


2.

소설을 읽던 당시 나의 상상력을 자극한 장면은 주인공인 악마의 아버지인 로버트 쏜을 도와 악마 데미안을 제거하려던 기자 제닝스가 죽던 장면이었다.
유리가 깨지는 장면과 그 중 한 유리조각으로 목이 잘리는 상황인데 소설과 영화가 겹쳐지면서 내게는 유리로 된 온실 같은 곳에 갇혀 무너지는 하우스의 유리 조각 세례를 받다가 목이 잘리는 이미지로 오래도록 기억된다. [오멘] 1편(1976)을 다시 보니 공사장에서 화물차가 밀려 날아든 유리가 제닝스의 목을 먼저 치고 뒷쪽의 유리창을 박살내면서 유리 파편이 흩날리는 장면이었지만, 아무튼 오래전 당시의 내 기억에 영화가 소설 속 그 상황을 영상으로 아주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더랬다. 물론 원래는 그 영화 장면 또는 극본을 나중에 소설로 묘사한 것이었지만.

영화 [오멘(The Omen)]은 1976년에 리처드 도너 감독과 극작가 데이비드 셀쳐가 함께 만들었고, 이후 셀쳐는 영화를 소설화했다. 내가 먼저 읽은 게 그 소설이었던 것 같다.

원작 [오멘]은 사탄의 아들을 미국 정부의 유력 정치인의 아들로 만들려는 악의 세력과 서서히 주변을 죽음으로 뒤덮고 파멸시키면서 자라는 순수해 보이는 아이를 제거하려는 세속의 아버지(로버트 쏜)와 신부(브레넌), 기자(제닝스) 등의 희생을 그린다. 물론 사탄의 자식 데미안을 없애려는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데미안은 10대([오멘2])와 청장년([오멘3])을 거쳐 세계를 장악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하다.
선악의 구분이 다소 불분명한 지금의 현세가 이를 증명한다.

물론 이건 나의 말이 아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 <요한 계시록>의 환상과 예언은 수천년 동안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으나, 각 시대별로 그 특성을 지닌 채 끊임없이 반복되고 소환된다.

2024년에 영화 [오멘]도 다른 수많은 작품들처럼 '프리퀄'로 재탄생한다. 
1976년의 [오멘] 1편은 악마의 징표인 '666'을 암시하며 6월 6일 6시에 데미안이 태어나면서 시작하는데, 2024년의 [오멘]은 '저주의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하여 데미안이 태어나는 과정과 아이가 바뀌는 경위를 밝히며 끝난다. 
[오멘, 저주의 시작(The First Omen)](2024)의 마지막 대사는, 사탄으로 태어날 그 아이의 이름을 처음으로 밝히는, "데미안"이다.
[배트맨 비긴즈]와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 [킹스맨, 퍼스트 에이젼트] 등을 생각하면 된다.

[오멘](1976), [오멘 2](1979), [오멘 3](1981) 등은 사탄의 자식이 탄생한 배경 보다는 기왕의 이런 현실과 그 속에서 악마의 아들 데미안이 성장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다 보니 속편들은 절대로 1편을 넘어설 수 없었다. 나는 2편과 3편을 보았지만 지금은 내용이 0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단 하나, 악마의 자식답게 데미안은 본인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도 세계를 파멸시킨다는 것, 사탄의 신봉자들이 알아서 모이고 자발적으로 희생하며 스스로 악을 행하면서 데미안의 의지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오멘, 저주의 시작](2024)은 자체의 복잡한 플롯도 있다. 전술한 [오멘](1976)에서 기자 제닝스의 최후를 장식한 유리 파편 세례를 오마쥬 한 듯 영화 첫 장면에서 사탄의 자식 탄생을 고해한 신부의 죽음은 하늘로부터 스테인드 글래스의 파편 세례로 예견되고 지목된 사탄 자식의 어미는 반전을 통해 애초에 지목된 여자아이 카틀리나가 아니라 주인공 초급 수녀 마가릿임이 드러난다. 이 어미들의 특징은 무녀와 같이 각자의 '신기(神氣)'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애초에 가톨릭의 유일신(神)에게 의탁될 수 없거나 그러기를 끝내 거부하는 존재를 의미할 수 있겠다.

한편, [오멘, 저주의 시작]에서 사탄의 자식 탄생을 저지하려는 브레넌 신부는 주인공이자 궁극의 어미인 마거릿 신부에게 악마의 귀환 배경을 설명하면서 원작이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리퀄'의 연사가 되어준다.

아마도 데미안은 1971년생 돼지띠 되시겠는데, 로마 주재 미국 대사 로버트 쏜의 아들이 사산되고 바로 데미안으로 바뀌는 시공간이 바로 1971년 로마였다. 1971년의 유럽은 아직 1968년 신좌파 혁명의 물결이 거세던 때였고 당시의 젊은 세대는 가톨릭을 포함한 기득권 일체의 권위를 거부하던 시절이었다. 영화는 파문당한 신부 브레넌의 입을 통해 시대의 혼돈이 아닌 기존의 가톨릭이 오히려 악마를 소환했다고 말한다. 즉, 기존 권위에 저항하는 세력의 '악마화'가 아니라, 기득권으로 다시 통합하기 위해 가톨릭 극단주의자들이 사탄의 자식을 불러 다시금 선악의 이분법 전쟁을 공고히 하면서 가톨릭의 안위를 꾀한다는 무서운 음모를 전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 절대악으로서 적을 계속 생산해대는 거대 보수양당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멘], 그 '저주의 시작'은 지옥의 악마가 아니라 속세 또는 현세 가톨릭의 생존투쟁이었던 거다.


3.

[오멘] 소설에서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장면은 소설 초반에 애기 데미안의 유모가 데미안의 생일날 잔치에서 '널 위한 선물'이라고 독백하면서 건물에서 목매어 공개자살하는 장면인데 소설에는 삽화가 아닌 실사 장면의 흑백사진이 삽입되어 있었다. 역시 영화가 먼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난 몰랐기에 상상이 아닌 실사로 접한 듯 생생했다.
1976년 [오멘] 원작에서 이미 나온 장면이었고, 2024년 [오멘, 저주의 시작]의 초반부에서 역시 미스터리한 한 수녀의 공개 분신자살로 오마쥬된다. 나중에 만들어진 영화지만 이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프리퀄'로서 나중의 유모 공개자살을 예견하기도 한다.

또한, 6월 6일 6시에 나오다가 사산된 아들을 대체한 아버지 로버트 쏜이 주변 사람들이 계속 죽어 나가면서 브레넌 신부의 경고를 듣기로 하고는 데미안의 머리통 가마에서 '666' 표식을 찾아본 후 직접 데미안을 죽이려 했던 외로운 고투와 인간적 고뇌도 인상깊고 성당에서 존속살해 현행범으로 사살되는 장면은 고등학생이었던 당시의 내게 큰 안타까움으로 남았다. 유력자 가문의 후세로 살아남은 데미안이 부친의 장례식에서 남기는 미소의 영화 마지막 장면은 역시 속편을 예고하는 장치였지만 내 인생 첫 오컬트 영화의 대미로서 손색이 없었다.

나는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영화 쟝르가 '오컬트'다. 장재현 감독의 [검은 사제들](2015)과 [사바하](2019), [파묘](2024)는 아직도 내게는 최고의 영화다. 현문섭 감독의 [사흘](2024)이 아무리 나를 슬프게 했어도 오컬트 쟝르에 대한 나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는 없다. 

내 오컬트의 시작,
단연 [오멘(The Omen)](1976~2024)이다.

***

1. [오멘, 저주의 시작(The First Omen)], 아카샤 스티븐슨, 2024.
2. [오멘(The Omen)], 리처드 도너 연출, 그레고리 펙 주연, <20세기폭스>, 1976.
3. [오멘 2], 돈 테일러, 1979.
4. [오멘 3], 그레이엄 베이커, 1981.
5. [일곱 봉인의 비밀 - 요한묵시록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배은주, <분도출판사>, 2022.
6. [신좌파의 상상력 -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 카치아피카스, 이재원/이종태 옮김, <이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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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현대인을 위한 고전 다시 읽기 1
김영 옮김 / 청아출판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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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 [논어], 김영 평역, 2014. /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양승렬, 2024


"사회가 혼란해지자 몇몇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위한 대책과 사상을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학파로 구분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는 많은 스승을, '백가'는 다양한 학파를 뜻합니다. 이들 중에서 이른 시기에 사람들에게 크게 인정받으며 우뚝 선 사람이 '공자'였습니다. 공자가 유명세를 떨치자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학설을 주장하며 스승을 자처했습니다. 그 중에는 비상식적인 내용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들을 '이단(異端)'으로 지칭했습니다."
-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2-37>, 양승렬, 2024.


중국 춘추전국시대 분열의 역사적 시작점은 다양성의 시작이기도 했다. 바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이었다. 분열과 혼란의 시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과 사상, 시대개척의 대책들이 발전했다. 
중국의 긴 역사에서 대륙통일의 반복이 그들의 지향점이었다면, 그 시간의 1/3은 분열과 혼란의 시간들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를, 5호16국 시대는 '다문명'의 충돌과 혼합을, 5대10국은 한 단계 진보하는 거대문명의 중간 분열 과정을, 현대 국공내전은 진보사상의 승리를 드러내기도 했다.

중국 문명에서 '다양성'의 출발은 기원전의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였고, 그 시작은 바로 '공자'였다.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
- [논어(論語)], <2편. 위정>

기원전 5세기 공자의 유가는 수세기 전 주나라의 예법에 따른 정치사회를 추구했고, 그 기본은 현실 정치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인간들의 내면적 성품인 '인의(仁義)'를 기반으로 '덕치(德治)'의 정치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주의적이면서 한편으로 현실주의적 사상이었다. 이것이 '유교(儒敎)'가 아닌 '유가(儒家)'다. 이러한 '유가' 사상에 대한 반박으로 쟁명한 사상들이 '제자백가'였고, 공자는 '인의'와 '덕치'를 가볍게 여기는 다른 사상들을 '이단(異端)'이라 하여 "열심히 외쳐봐야 해로울 뿐(攻乎異端, 斯害也已)"이라고 하였다.


"[논어]는 공자가 제자 및 당시 사람들과 응답한 것, 제자들이 서로 나눈 대화와 스승의 말을 접해 들은 것을 제자들이 각기 기록하였다가 공자가 죽은 뒤 문인들이 서로 모아 논찬한 것인데, 그래서 이 책을 [논어(論語)]라 한다."
- [한서], <예문지>, 반고.


국문학자 김영 교수가 2014년 편역한 [논어] <서장>에 나오는 반고의 [한서] <예문지>가 설명한 [논어]다. 공자는 비슷한 시기 서양의 소크라테스처럼 글을 남기지 않고 '말'을 남겼다. 소크라테스가 제자 플라톤의 저서로 남았듯, 공자의 말씀도 3천명에 이르렀다는 수많은 제자와 문인들의 기록인 [논어]로 남았다. 

[논어(論語)]는 스승이자 선현이며 군자의 모범으로서 공자의 '말(語)'을 후학들이 '논평(論)'한다는 의미로 총 20편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공자가 가장 중요한 기본태도로 삼았던 배움에 관한 <1편. 학이>부터 그 다음의 중요한 실천인 정치를 <2편. 위정>에서 다룬다. 제자들과의 다양한 대화는 <3. 팔일>, <4. 이인>,<5. 공야장>, <6. 옹야>, <7. 술이>, <8. 태백>, <9. 자한>, <10. 향당>, <11. 선진>, <12. 안연>, <13. 자로>, <14. 헌문>, <15. 위령공>, <16. 계씨>, <17. 양화>, <18. 미자>, <19. 자장>을 거쳐 마지막편 <20. 요왈>로 마무리된다.


"[논어]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소재가 '말과 실천'입니다. 말은 늘 조심히 바르게 하고 행동이 앞서야 한다는 가르침이 반복됩니다... [논어]를 구조적으로 살펴 보면 가장 첫 문장은 배우고 익히는 실천의 즐거움을 말하고, 마지막 문장은 말의 중요성으로 끝납니다."
-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2-57>, 양승렬, 2024.


[논어]에는 공자가 가장 앞세운 '인(仁)'이 100번 넘게 나온다고 하는데, 이를 기반으로 '지식'이나 '배움'을 아우르는 '학(學)'과, 그것이 경지에 오른 이상적 '군자(君子)', 이들의 '말과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정치'가 핵심 주제어라고 할 수 있겠다.

[논어]의 첫 문장은 다음의 유명한 글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논어], <1편. 학이>

때때로 혹은 수시로, 아니면 때에 알맞게 배우면 좋고, 친구가 멀다 않고 오면 즐거운데, 남이 몰라준다 서운해하지 않는 군자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선행기언, 이후종지(先行其言, 而後從之)"
- [논어], <2편. 위정>

그 다음으로 이 군자가 말을 앞세우지 않고 당당히 실천하면서 그에 따라 말을 하는 모습은 공자가 살던 혼란한 시대 '정치'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시지기불가이위지자여(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 [논어], <14편. 헌문>

이런 공자를 당대 사람들은, 현실에서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실천하려는 사람(知其不可而爲之者)"으로 칭한다.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 [논어], <12편. 안연>

이런 사람은 "자신을 이겨내고 '예'를 중시(克己復禮)"하면서 '인(仁)'을 실천한다.

"아욕인, 사인지의(我欲仁, 斯仁至矣)"
- [논어], <7편. 술이>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 속에서 바로 닿는" 것이 역시 '인'이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 [논어], <2편. 위정>

'군자'는 그렇다고 모든 걸 아는 척 하지 않는다. 공자는 고지식하다는 선입견과 달리 말을 아끼고 실천을 중시하며 겸손하게 평생  배움의 태도를 견지했다고 한다. 공자에게 '지식'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솔직히 모른다 하는 것(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이었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 [논어], <1편. 학이>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
- [논어], <15편. 위령공>

그러므로, 공자에게 '과오'는 "즉시 인정하고 고쳐야 하는 것(過則勿憚改)'이었으며, 그렇지 못한 것 자체가 '과오'였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 [논어], <15편. 위령공>

'극기복례' 못지 않게 유명한 [논어]의 가르침이 "내게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인데, 이 또한 '군자'의 중요한 실천 덕목이다.

그러나 공자 자신을 비롯하여 '군자'는 완성형이 아니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늘 공부하고 배우며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한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논어], <2편. 위정>

"생각없이 공부만 하면 어둡고(學而不思則罔), 배움없이 잔머리만 굴리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

"군자태이불교, 소인교이불태(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 [논어], <13편. 자로>

그렇게 '군자'는 언제 어디서든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면서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게 되는데, 이런 '군자(君子)'와 정반대로 사는 사람들은 '소인(小人)'이 된다.

"군자유어의, 소인유어리(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 [논어], <4편. 이인>

'인'을 실천하는 군자는 항상 '의(義)'를 염두에 두고 깨우치려 애쓰는 반면, 소인배들은 항상 '이익(利)'만을 앞세운다.

안중근 의사가 잘린 손가락 인장을 찍은 [논어] 인용글은 "이익 앞에서 의로움을 보라(見利思義)"는 문장이었다. 그는 식민 현실에 처할 "나라의 위기를 보며 목숨을 바쳤다(見危授命)".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 [논어], <14편. 헌문>

어려운 가정형편에 15세에 공부를 시작했으나 30세에 인격적으로 독립(而立:이립)하고 40세에는 흔들림 없던(不惑:불혹) 공자, 50세 천명을 알고(知天命:지천명), 60세에는 유연함의 극치를 이룬(耳順:이순) 후 70세 인생 말년에 무엇을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은(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 그가 했던 또 하나의 멋진 문장이 있다.

"지자불혹, 인자불우, 용자불구(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
- [논어], <9편. 자한>

'지인용(知仁勇)'을 갖춘 '군자'는 '흔들림 없고(不惑)', '근심 없이(不憂)', 두려움 없는(不懼)' 사람이라는데, 참으로 이상주의적이다. 이는 맹자가 계승하고자 했던 공자 사상의 요체라 할 수 있다.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
- [논어], <16편. 계씨>

내가 [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 위 문장인데, 군자가 실천하는 정치는 결국 "부족함이 아닌 공평하지 못함을 근심(不患寡而患不均)"하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이다.

작가 양승렬 선생은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을 소재로 하여 [논어]의 가르침을 2부 20장 총 64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공자의 2,500년 동안의 가르침은 물론 조선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논어]를 깨우친 작가 본인의 교훈이 어우러져 홀로 머리맡에 두고 하루 한 편, 한 문장씩 곱씹어볼 만한 좋은 책이다.

***

1. [논어(論語)](기원전 5세기~), 김영 평역, <청아출판사>, 2014.
2.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양승렬, <한빛비즈>, 2024.
3. [백가쟁명(百家爭鳴) - 이중톈 중국사 6](2014),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5.
4. [맹자(孟子)], 조관희 평역, <청아출판사>, 2014.
5. [불변과 만변(不變與萬變)](2021), 거젠슝, 김영문 옮김, <역사산책>,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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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 세상의 기준에 좌절하지 않는 어른의 생활법
양승렬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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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 [논어], 김영 평역, 2014. /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양승렬, 2024


"사회가 혼란해지자 몇몇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위한 대책과 사상을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학파로 구분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는 많은 스승을, '백가'는 다양한 학파를 뜻합니다. 이들 중에서 이른 시기에 사람들에게 크게 인정받으며 우뚝 선 사람이 '공자'였습니다. 공자가 유명세를 떨치자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학설을 주장하며 스승을 자처했습니다. 그 중에는 비상식적인 내용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들을 '이단(異端)'으로 지칭했습니다."
-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2-37>, 양승렬, 2024.


중국 춘추전국시대 분열의 역사적 시작점은 다양성의 시작이기도 했다. 바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이었다. 분열과 혼란의 시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과 사상, 시대개척의 대책들이 발전했다. 
중국의 긴 역사에서 대륙통일의 반복이 그들의 지향점이었다면, 그 시간의 1/3은 분열과 혼란의 시간들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를, 5호16국 시대는 '다문명'의 충돌과 혼합을, 5대10국은 한 단계 진보하는 거대문명의 중간 분열 과정을, 현대 국공내전은 진보사상의 승리를 드러내기도 했다.

중국 문명에서 '다양성'의 출발은 기원전의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였고, 그 시작은 바로 '공자'였다.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
- [논어(論語)], <2편. 위정>

기원전 5세기 공자의 유가는 수세기 전 주나라의 예법에 따른 정치사회를 추구했고, 그 기본은 현실 정치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인간들의 내면적 성품인 '인의(仁義)'를 기반으로 '덕치(德治)'의 정치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주의적이면서 한편으로 현실주의적 사상이었다. 이것이 '유교(儒敎)'가 아닌 '유가(儒家)'다. 이러한 '유가' 사상에 대한 반박으로 쟁명한 사상들이 '제자백가'였고, 공자는 '인의'와 '덕치'를 가볍게 여기는 다른 사상들을 '이단(異端)'이라 하여 "열심히 외쳐봐야 해로울 뿐(攻乎異端, 斯害也已)"이라고 하였다.


"[논어]는 공자가 제자 및 당시 사람들과 응답한 것, 제자들이 서로 나눈 대화와 스승의 말을 접해 들은 것을 제자들이 각기 기록하였다가 공자가 죽은 뒤 문인들이 서로 모아 논찬한 것인데, 그래서 이 책을 [논어(論語)]라 한다."
- [한서], <예문지>, 반고.


국문학자 김영 교수가 2014년 편역한 [논어] <서장>에 나오는 반고의 [한서] <예문지>가 설명한 [논어]다. 공자는 비슷한 시기 서양의 소크라테스처럼 글을 남기지 않고 '말'을 남겼다. 소크라테스가 제자 플라톤의 저서로 남았듯, 공자의 말씀도 3천명에 이르렀다는 수많은 제자와 문인들의 기록인 [논어]로 남았다. 

[논어(論語)]는 스승이자 선현이며 군자의 모범으로서 공자의 '말(語)'을 후학들이 '논평(論)'한다는 의미로 총 20편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공자가 가장 중요한 기본태도로 삼았던 배움에 관한 <1편. 학이>부터 그 다음의 중요한 실천인 정치를 <2편. 위정>에서 다룬다. 제자들과의 다양한 대화는 <3. 팔일>, <4. 이인>,<5. 공야장>, <6. 옹야>, <7. 술이>, <8. 태백>, <9. 자한>, <10. 향당>, <11. 선진>, <12. 안연>, <13. 자로>, <14. 헌문>, <15. 위령공>, <16. 계씨>, <17. 양화>, <18. 미자>, <19. 자장>을 거쳐 마지막편 <20. 요왈>로 마무리된다.


"[논어]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소재가 '말과 실천'입니다. 말은 늘 조심히 바르게 하고 행동이 앞서야 한다는 가르침이 반복됩니다... [논어]를 구조적으로 살펴 보면 가장 첫 문장은 배우고 익히는 실천의 즐거움을 말하고, 마지막 문장은 말의 중요성으로 끝납니다."
-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2-57>, 양승렬, 2024.


[논어]에는 공자가 가장 앞세운 '인(仁)'이 100번 넘게 나온다고 하는데, 이를 기반으로 '지식'이나 '배움'을 아우르는 '학(學)'과, 그것이 경지에 오른 이상적 '군자(君子)', 이들의 '말과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정치'가 핵심 주제어라고 할 수 있겠다.

[논어]의 첫 문장은 다음의 유명한 글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논어], <1편. 학이>

때때로 혹은 수시로, 아니면 때에 알맞게 배우면 좋고, 친구가 멀다 않고 오면 즐거운데, 남이 몰라준다 서운해하지 않는 군자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선행기언, 이후종지(先行其言, 而後從之)"
- [논어], <2편. 위정>

그 다음으로 이 군자가 말을 앞세우지 않고 당당히 실천하면서 그에 따라 말을 하는 모습은 공자가 살던 혼란한 시대 '정치'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시지기불가이위지자여(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 [논어], <14편. 헌문>

이런 공자를 당대 사람들은, 현실에서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실천하려는 사람(知其不可而爲之者)"으로 칭한다.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 [논어], <12편. 안연>

이런 사람은 "자신을 이겨내고 '예'를 중시(克己復禮)"하면서 '인(仁)'을 실천한다.

"아욕인, 사인지의(我欲仁, 斯仁至矣)"
- [논어], <7편. 술이>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 속에서 바로 닿는" 것이 역시 '인'이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 [논어], <2편. 위정>

'군자'는 그렇다고 모든 걸 아는 척 하지 않는다. 공자는 고지식하다는 선입견과 달리 말을 아끼고 실천을 중시하며 겸손하게 평생  배움의 태도를 견지했다고 한다. 공자에게 '지식'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솔직히 모른다 하는 것(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이었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 [논어], <1편. 학이>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
- [논어], <15편. 위령공>

그러므로, 공자에게 '과오'는 "즉시 인정하고 고쳐야 하는 것(過則勿憚改)'이었으며, 그렇지 못한 것 자체가 '과오'였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 [논어], <15편. 위령공>

'극기복례' 못지 않게 유명한 [논어]의 가르침이 "내게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인데, 이 또한 '군자'의 중요한 실천 덕목이다.

그러나 공자 자신을 비롯하여 '군자'는 완성형이 아니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늘 공부하고 배우며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한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논어], <2편. 위정>

"생각없이 공부만 하면 어둡고(學而不思則罔), 배움없이 잔머리만 굴리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

"군자태이불교, 소인교이불태(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 [논어], <13편. 자로>

그렇게 '군자'는 언제 어디서든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면서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게 되는데, 이런 '군자(君子)'와 정반대로 사는 사람들은 '소인(小人)'이 된다.

"군자유어의, 소인유어리(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 [논어], <4편. 이인>

'인'을 실천하는 군자는 항상 '의(義)'를 염두에 두고 깨우치려 애쓰는 반면, 소인배들은 항상 '이익(利)'만을 앞세운다.

안중근 의사가 잘린 손가락 인장을 찍은 [논어] 인용글은 "이익 앞에서 의로움을 보라(見利思義)"는 문장이었다. 그는 식민 현실에 처할 "나라의 위기를 보며 목숨을 바쳤다(見危授命)".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 [논어], <14편. 헌문>

어려운 가정형편에 15세에 공부를 시작했으나 30세에 인격적으로 독립(而立:이립)하고 40세에는 흔들림 없던(不惑:불혹) 공자, 50세 천명을 알고(知天命:지천명), 60세에는 유연함의 극치를 이룬(耳順:이순) 후 70세 인생 말년에 무엇을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은(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 그가 했던 또 하나의 멋진 문장이 있다.

"지자불혹, 인자불우, 용자불구(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
- [논어], <9편. 자한>

'지인용(知仁勇)'을 갖춘 '군자'는 '흔들림 없고(不惑)', '근심 없이(不憂)', 두려움 없는(不懼)' 사람이라는데, 참으로 이상주의적이다. 이는 맹자가 계승하고자 했던 공자 사상의 요체라 할 수 있다.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
- [논어], <16편. 계씨>

내가 [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 위 문장인데, 군자가 실천하는 정치는 결국 "부족함이 아닌 공평하지 못함을 근심(不患寡而患不均)"하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이다.

작가 양승렬 선생은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을 소재로 하여 [논어]의 가르침을 2부 20장 총 64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공자의 2,500년 동안의 가르침은 물론 조선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논어]를 깨우친 작가 본인의 교훈이 어우러져 홀로 머리맡에 두고 하루 한 편, 한 문장씩 곱씹어볼 만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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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어(論語)](기원전 5세기~), 김영 평역, <청아출판사>, 2014.
2.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양승렬, <한빛비즈>, 2024.
3. [백가쟁명(百家爭鳴) - 이중톈 중국사 6](2014),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5.
4. [맹자(孟子)], 조관희 평역, <청아출판사>, 2014.
5. [불변과 만변(不變與萬變)](2021), 거젠슝, 김영문 옮김, <역사산책>,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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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6 : 백가쟁명 이중톈 중국사 6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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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 비판'은 '비판의 무기'를 대신할 수 없다
- [백가쟁명], 이중톈, 2014.


"그런데 노선의 선택은 아주 분명했다. 대체적으로 도가는 천도(天道)를, 묵가는 제도(帝道)를, 유가는 왕도(王道)를, 법가는 패도(覇道)를 중시했다. 천도를 중시하여 태곳적으로 돌아가려 했고 제도를 중시하여 요순시대로 돌아가려 했으며 왕도를 중시하여 상나라, 주나라 시대로 돌아가려 했다. 이것들은 모두 과거로의 회귀였다. 오직 패도를 중시해야 다가오는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법가가 승리를 거뒀다."
- [백가쟁명], <6. 제도와 인성>, 이중톈, 2014.


중국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중국의 역사에서 '유년기'를 지난 '청춘기' 정도 될 수 있겠다. 주나라로부터 '국가' 문명을 매개로 덕치와 예치의 제도적 틀이 갖춰졌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사상이 다양해지고 혼란해지기도 했던 '사춘기' 같기도 했다.

춘추시대의 낭만과 덕망은 '유가'의 시조인 공자의 눈에는 혼돈과 분열의 시대였기에 오래 전 통일의 시대 주나라를 이상으로 삼아 주공단이 정초한 '덕치(德治)'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지만, 이미 '이익'에 눈을 뜬 분열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은 공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기원전의 수백년에 걸친 이 치열한 사상투쟁이 공자 이후의 묵자와 노자 및 장자의 공자에 대한 반박으로부터 촉발되었다는 말이다.

공자는 '인(仁)', 즉 '사랑'에 기반한 인간관계와 '덕(德)'으로 다스려지는 사회를 꿈꾸었지만, 
노동과 자치를 중시한 묵자는 공자의 '인애'가 신분제 질서에 갇힌 '사랑'이라면서 남녀노소와 국경을 초월한 '겸애'로 대체하며 '평등'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이에 노자는 더 나아가 '물'과 같은 유연함과 '무위'로써 자연과 합일을 추구했고 장자는 '소요유'를 통해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극단의 '자유'를 중시했다.
맹자는 공자의 '인'에 더하여 '의(義)', 즉 정의로운 '대장부'의 삶을 통해 공자를 계승했다.
반면 순자는 전국시대 백가쟁명의 총아로서 인간의 악을 방비하는 '법가'를 예비하면서 공자를 이어가고자 했다.
그렇게 춘추전국시대 백가쟁명의 마무리는 '법가'의 대명사 한비자가 맡게 된다.

'괴력난신'의 귀신도, 전지전능한 종교적 신도 믿지 않고 오로지 현세적 인간관계로서 정치만을 중시한 공자는 '인의'와 '덕치'를 강조한 '이상주의자'로서 "안되는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실천하고자 했던(知其不可而爲之;지기불가이위지-[논어])" 불세출의 사상가였지만 제후귀족 중심의 신분제를 벗어나지 못한 다분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공자를 비판한 묵가의 묵자는 '노동'에 기반하며 차별없는 '겸애'를 실천하는 노동단체를 중심으로 한 군주국가를 건설하자는 일종의 기원전의 '사회주의'로 분류될 수 있다.
당시로서 유일한 국가권력 형태로서 군주제를 역시 지향하되 '무위',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군주를 말한 노자와, 이런 것 저런 것 다 필요 없이 극단의 자유를 주장한 장자는 두 가지 형태의 '무정부주의'의 면모도 보인다.
공자를 두 방향으로 계승한 맹자와 순자를 거쳐 한비자는 세상 가장 못 믿을 것이 '인간'임을 설파하며 '법'과 '제도'로서 인간 사회의 처절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며 그 주체로서 강력한 군국주의를 강조한 '국가주의자'였다.


"법가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동은 커녕 소강도 이미 지나가버려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단지 세상을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만 있어도 성공이었다. 그러면 누가 다스릴 것인가? 군왕이 다스리는 것이 옳았다. 또한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법에 따라 다스려야 했다."
- [백가쟁명], <2. 이상적인 사회>, 이중톈, 2014.


'중국사 시리즈' 통사 36권을 집필 중인 중국의 대중역사가 이중톈도 중국의 '사춘기' 또는 '청춘기'로서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을 피해갈 수 없다. 다만, 이중톈 답게 군더더기 없이 요점과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추리소설을 엮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 제6권 [백가쟁명(百家爭鳴)](2014)은 유가는 무엇이고 묵가와 도가, 그리고 법가는 무엇인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그 사상들의 정의와 기원 등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라 치면 수백수천 페이지를 써도 모자랄 것이며 대중역사서가 될 수도 없을게다. 이중톈은 다만, '백가쟁명'의 문을 연 공자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서 '인애'와 '덕치'의 사상을 주장했고, 이를 반박한 묵자의 '사회주의'는 '겸애'와 '노동'을, 다른 한편의 '무정부주의' 노자와 장자는 '무위'와 '자유'를 통해 공자가 시작한 유가 사상이라는 '무기'에 대한 '비판'을 행했다는 식으로 역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상대를 죽여야만 나의 생존이 보장되는 전국시대에 들어 선 후, 공자의 뒤를 이어 유가의 전통을 계승하는 맹자는 '선을 지향'하는 사회를 꿈꾸는 정의로운 대장부였지만, 이런 맹자의 '이상주의'를 비판하며 인간의 본래적인 '악을 방비'하는 사회제도를 주장하는 순자를 거친 한비자는 법가의 '집대성자'([백가쟁명], <6장>)로서 전국시대의 끝장과 함께 '백가쟁명'을 마무리한다.

기원전 6세기 공자의 유가가 '백가쟁명'의 시작이었다면, 기원전 3세기 법가의 '한비자'는 그 길고 긴 사상투쟁의 끝이었다.


"한비가 서민의 검을 든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한비는 전국시대 말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때 역사는 이미 귀족과 군자의 시대에서 평민과 소인의 시대로 바뀐 상태였다. '이상주의'가 잦아들고 '공리주의'와 '실용주의'가 대두되었다, 상앙에서 한비를 거쳐 결국 법가가 우위를 점하고 새로운 시대의 대변인이 된 것은 그런 시대정신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이상주의'는 언제나 필수 불가결했다. 사실상 꼭 실현될 보장이 없었던 그 이상들이 역설적으로 중국 문명이 아시리아 문명과 로마 문명처럼 제국의 붕괴와 함께 쇠망하는 일이 없도록 보장했다."
- [백가쟁명], <1. 세상을 구원하라>, 이중톈, 2014.


전국시대 분열의 종말과 함께 진시황의 중국 최초 통일과 한나라의 통일국가 문명 정초 과정에서, 그렇다면 법가의 '승리'가 과연 '덕치'와 '법치'의 대립으로 정리된 '백가쟁명'의 결론이었을까.

공자와 묵자, 노자/장자는 각자의 주장을 통해 오랜 옛날의 '좋은 시절'로 돌아가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묵자가 돌아가고 싶어했던 요순시대든, 공자가 꿈꾼 주공의 덕이든, 노장자의 자연적인 원시사회든, 이 모든 지향점들은 '과거'에 불과했다. 이익투쟁도 모르고 도둑도 없던 그 '대동사회'는 이중톈에 의하면 사회발전이 더디었으니 이익이랄 것도 없었고 물자도 부족했으니 훔칠 것도 없는 말 그대로 '옛날 옛적'이었던 것이다.  반면, 서로 죽이거나 죽어야 하는 전국시대에는 극단적인 이익투쟁의 문명시대로서 당시의 형벌 위주의 '법치'로서 인간 사회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양면삼도(兩面三刀-[한비자])'가 필요한 시대였다. '양면삼도'의 '양면(兩面)'은 '상'과 '벌'이고, '삼도(三刀)'는 '권세'와 '권모술수', 그리고 '법'이다. 처절하고 잔혹한 전국시대를 끝낸 것은 유가와 묵가, 도가의 '과거'가 아니라 법가와 병가의 '현실'과 '미래'였다.

그러나 이중톈은 말한다.
'백가쟁명'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법가와 병가, 술가와 같은 '양면삼도'적 현실과 그들이 대비한 '미래'가 분명 존재하지만,
'인의예지'와 '덕치'라는 '이상주의'가 중국문화의 흐름 속에 도도히 흐른다고 말이다.

일본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교환양식D'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역사로서, 평등하고 자유로웠던 원시 상태인 '교환양식A'로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다. '자본-네이션(민족/인민)-스테이트(국가)'의 교환양식 역사에서의 현재적 '삼위일체' 요소들이 융합된 '미래'의 형태로 복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자백가의 '백가쟁명'식 사상투쟁 또한 그렇다.
현재의 구체적 치열함을 기반으로 하면서 인류 역사가 일궈온 과거의 '이상주의'를 복원하는 미래가 유보되는 한, '덕치(德治)'와 '법치(法治)'가 대립하는 '백가쟁명'의 결과 또한 아직 오지 않은 지속되는 미래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무기의 비판'도 '비판의 무기'를 대신할 수없다. 치국의 논쟁을 예로 든다면, (전제주의인) 진시황과 한무제가 제자백가의 칼과 권한을 빼앗았어도 문제는 진정으로 해결되지 못했다. 안 그랬으면 훗날 (민권혁명인) 신해혁명이 일어났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300년 간의 '백가쟁명'은 사실상 결론을 내지 못했다."
- [백가쟁명], <6. 제도와 인성>, 이중톈, 2014.

***

1. [백가쟁명(百家爭鳴) - 이중톈 중국사 6](2014),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5.
2.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이상수 지음, <길>, 2001.
3. [세계사의 구조 -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2015),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김, <비고>,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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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2 : 국가 이중톈 중국사 2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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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론'적 '키워드'로 본 '국가론'
- [국가], 이중톈, 2013.


"국가의 비밀은 바로 '도시'에 있다... 
'자유'는 '도시'의 특징이었다...
새로운 유형의 거주지가 필요했다. '안전'도 보장되고 충분한 '자유'도 누릴 수 있는.
그런 새로운 거주지는 바로 '도시'였다... 시민들의 관계는 혈연을 초월했다...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두 가지가 새롭게 생겨났다. 하나는 가족, 씨족, 부족을 초월한 '공공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관계된 '공공업무'였다... '공공규범'이 바로 '법률'이고, 공공권력은 '공권력'이며, '공공기관'은 '국가(國家)'다... 따라서 국가와 국민에게 가장 중대한 일은 어떻게 공권력을 다루느냐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을 누가 누구에게 주고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것이다."
- [국가], <2. 도시는 말한다>, 이중톈, 2013.


이것이 중국 역사학자 이중톈의 '국가론'이다. 

'자유'와 '안전'을 추구하는 '인간'이 '가족'과 '씨족(부족)'을 초월한 '시민'이 되면서 '공공'적 '권력' 관계인 '공권력'을 어떻게 위임하고 또 다루는가에 관한 이론. 
결론은 '문명의 전화'인 '문화'의 대표적 매개로서 '국가(國家)'의 기원에 관한 이론이다.

이중톈은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와 인도 및 미국까지 동서고금을 횡단하며 중국의 '국가론'을 정립하고자 하는데, 그의 '중국사 이야기' 제2편인 이 책 [국가(國家)](2013)는 본격적인 중국의 국가 문명인 주나라 이전인 하나라와 상(은)나라의 고대 원시 부족연맹국가 단계까지의 이야기다.

원래 나는 중국의 대중역사가 이중톈의 '중국사 이야기' 제2권인 [국가]까지 읽을 생각은 없었다. 
'공적 권력'인 '국가'와 '사적 권력'인 '자본',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더더욱 강고해지는 '독점 자본'의 결합으로서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를 살아온 나의 '국가론'은, 경제적 관계인 하부구조가 정치사회적 상부구조인 '국가'를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구성체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람시와 알튀세르 등으로부터 진화한 현대 마르크스주의 경향처럼 하부구조인 경제체제에 대한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립성'이 강조되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역사가 진보한다는 어느 정도의 '경제결정론'적 '국가론'이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천재적인 마르크스보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자연변증법'과 같이 우주만물에 적용하고 역사유물론을 '사회구성체론'과 '역사발전단계론'과 같이 도식화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대중적 노동자 철학으로 정식화함으로써 다수 노동계급을 기존의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이던 '고전철학'의 진정한 상속자로 규정했던 엥겔스를 더 좋아하기도 했다. 
19세기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엥겔스)은 구체적 현실에 기반한 '실천철학(그람시)' 또는 '새로운 철학적 실천(알튀세르)'의 분기점이었다.

그러던 중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2010)을 읽으면서 사회구성체적 '상부구조'만이 아니라 독립적 사회구성 요소로서의 '국가론'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었고, 아마도 이중톈이라면 '초월론'적 이동(횡단)비평인 '트랜스크리틱'으로 '국가론'을 설명해줄 것 같았다.

중국인 이중톈이 서술하는 '국가론'의 결론은 결국, 현대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인 '인의'와 '덕치'의 유가 이념에 기반한 중국 문명의 전파다. 
그러나 그의 책 [국가]를 통해 내가 읽어낸 것은 각종의 '초월론'적 '키워드(핵심어)'로 엮어낸 문명전파의 도구로서 '국가론'이었다.


"... 종교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첫째는, '안전'한 느낌이다. 신의 도움과 비호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유'로운 느낌이다. 진정한 믿음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는, '아이덴티티'다.
... 종교는 국경없는 '국가'다."
- [국가], <4. 종교를 거부하다>, 이중톈, 2013.


이중톈은 사회구성체론처럼 역사 흐름의 '경제적' 배경 같은 것을 바탕에 깔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식의 '구체적 현실'보다는, 마치 칸트식의 '선험적' 또는 '초월론'적 개념을 중심으로 '국가'의 기원을 추적한다.

그 구체적 현실의 역사를 초월하여 원래부터 존재한 듯 이중톈에 의해 선별된 [국가]의 '키워드(핵심어)'들을 나열하면 이렇다.

'자유'와 '안전', '부락'과 '도시', '독립'과 '평등', '종교'와 '과학', '샤머니즘'과 '토템', 민주주의'와 '법치', 그리고 '인간'.

씨족과 부락이라는 혈연집단을 이루던 인간들이 '자유'와 '안전'을 추구하며 '도시'를 형성하고, 그 도시들로 모이는 과정에서, 기존의 혈연적 조직을 떠나 개인들 간의 수많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인간'들은 비로소 '부족(씨족)민'이 아닌 '시민'이 되는데, 이런 '도시'의 성벽과 영토경계선을 기준으로 초기 '국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상형문자인 한자에서, '지역'과 '영역'을 의미하던 '역(或)'이 도시성벽 테두리를 뜻하는 '구(나라 국/에워쌀 위;囗)'와 합쳐져 '국가(國)'가 되었다.

어느 시대나 '도시'를 보면 '국가'가 보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시 종교인 '샤머니즘'과 '토템'은 특정 국가의 상징으로 전화된다.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는 다신교의 형태로, 중국의 경우는 종교나 신이 아닌 조상으로. 그리고 현대 국가는 법률의 형태로.

중국에서 '샤머니즘'은 '예악(禮樂)'이 되어 '예(禮)'는 '안전'과 '질서'를, '악(樂)'은 '자유'를 상징했단다. 또한 중국에서 '토템'은 하나라의 '들소'와 은(상)나라의 '새(제비)'를 거쳐 종교나 신이 아닌 '하늘(天)'로 진화되었다. 이렇게 '국가'가 '천하'라는 거대한 '가정'이 된 중국에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조상'으로부터 '조국(祖國)'이 유래된다.
이 '종교'의 키워드는 동양의 중국 한나라로부터 유학의 '조상'과 '하늘'로 정초된 한편, 동시기 서양의 로마에서는 '법률(로마법)'로 자리를 잡는데, 이것이 현대 '국가'의 핵심어인 '법치주의'의 기원이다.

이중톈은 '중국사 이야기' 제9편 [두 한나라와 두 로마](2014)를 통해 '트랜스크리틱'한 국가 문명을 다시금 서술하기도 했다.

이중톈에 의하면 이 모든 이데올로기들은 인간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비록 그리스 소도시국가에서만 우연히 나타난 형태였지만, 이중톈은 '민주주의'는 "인류 보편적 인성과 가치에 부합"하기에 "언젠가 결국 모습을 드러낸다"([국가], <3장>)고 말한다.
18세기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현대 국가 문명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민주주의'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중톈의 중국사 서술은 진부한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전혀 식상하지 않다.
마치 추리소설 기법처럼 작은 실마리를 쫓아 거대한 역사적 실체의 비밀을 추적하는 식이다.

그의 '국가론' 또한 마찬가지다.
위에서 열거한 '형이상학'적이고, '선험적'인 듯, '초월론적 가상'인 듯한 핵심 '키워드' 개념들을 쫓고 횡단하며 서로 엮어내는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국가'의 비밀을 파헤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토템은 과연 어떻게 '법'으로 변한 것일까?
그 비밀은 '인간'에게 있다...
... 인격이 법률에서 표현한 것은 바로 '권리', 즉 '신분권'이었다... 시민권이 없으면 로마인이 아니고 자유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었다. 이것이 '아이덴티티'의 실현을 가능하게 했다. 한 자유인이 시민권을 부여받기만 하면 로마인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것은 국가의 통치를 용이하게 만들기도 했다."
- [국가], <5. 토템이여 안녕>, 이중톈, 2013.


그러나 나는,
이중톈의 재미진 중국사 시리즈 제3권 [창시자]를 아직 읽을 생각은 없다.
[창시자]는 중국의 본격적인 국가 문명의 '창시자'인 주나라 주공 단의 이야기라는데, 은(상)나라의 인신공양 문명을 문화적으로 대체한 [주역]의 비밀을 담은 이 장대한 이야기는 리숴의 [전상(翦商)](2022)을 통해 충분히 읽었다.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중국 국가문명의 시작 이야기를, 이미 다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이중톈이 과연 어떻게 서술했을지 문득 궁금해질 때,
그 때가 이중톈의 중국사 이야기 제3권 [창시자]를 펼쳐볼 참이다.

***

1. [국가(國家) - 이중톈 중국사 2](2013),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3.
2.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F. Engels,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3.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1884), F. Engels. 김대웅 옮김, <아침>, 1987.
4. [트랜스크리틱](2010), 가라타니 고진, 윤인로 옮김, <비고>, 2024.
5.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사우>, 2020.
6.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7. [두 한(漢)나라와 두 로마(Roma) - 이중톈 중국사 9](2014), 이중톈, 한수희 옮김, <글항아리>, 2016.
8. [상나라 정벌(翦商/전상/Conquest of the Shang Dynasty)](2022), 리숴(李碩), 홍상훈 옮김, <글항아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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