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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의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 천재 동양 철학자들의 생각의 향연을 듣다
이중텐 지음, 이지연 옮김 / 보아스 / 2015년 8월
평점 :
자유롭기에 '백가', 활약했기에 '쟁명'
-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이중톈, 2006.
"아마도 가장 먼저 한 사람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는 '제자백가(諸子百家)' 가운데 첫번째 인물이고,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기도 하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은 바로 그로 인해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종결되었다. 그는 선대의 유업을 계승해 발전시켜 미래를 개척했다. 또한 그는 새로운 기풍의 선구자이면서 뭇사람의 비판의 표적이었다. 넘어설 수 없지만 반드시 넘어서야 할 대상이었고, 말로 다 할수 없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누구일까? 바로 '공자'다."
-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머리말>, 이중톈, 2006.
왜 국역본 제목을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로 지었을까.
공자로부터 시작해서 유가와 묵가, 유가와 도가, 유가와 법가의 사상 비교를 서술한 책의 중간을 넘어설 때까지도 나는 궁금했다.
중국의 대중 역사학자 이중톈(易中天)의 [선진제자백가쟁명(先秦諸子百家爭鳴)](2006)은 '선진(先秦)', 즉 진(秦)의 중국 통일 이전인 춘추전국시대의 다양한 사상투쟁 과정을 서술하며 공자의 유가를 중심으로 한 '다양성의 조화'를 강조한 책이다.
이후 이중톈의 중국 통사 시리즈 6권인 [백가쟁명(百家爭鳴)](2014)에서는 그 특유의 서술기법에 따라 장황하지 않게 각 사상학파의 특징만 짚어서 설명하는 원숙함을 보여주게 되는데, 아마도 2006년에 이미 [선진제자백가쟁명]을 심도 깊게 쓴 바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중톈도 좋아하고, 명목상 '주간 문사철'이라 하여 '인문학'적 서평을 앞세운 내가, '인문학'이라는 제목에 끌려 읽게된 이 책의 우리말 제목이 왜 '인문학'인 건지 이 책의 <4장>까지 읽으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의아했던 거였다.
"... 그래서 만약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인도주의'를 체현한 것이고, '신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이성적 태도'의 발현이라고 한다면, '사람을 신으로 보는 것'은 '도덕정신'의 표현이다. '인도주의', '이성적 태도', '도덕정신' 이 세 가지를 합쳐 '인간을 근본으로 삼는 것(人本主義)'이라 한다."
-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5-2. 사람을 근본으로 삼다>, 이중톈, 2006.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쟁명(사상투쟁)의 시작은 공자의 '인애'와 '덕치'였다.
주나라 문명기초를 세운 주공 단을 동경하며 춘추 열국의 분열을 극복하려던 공자의 유가적 처방은 묵가와 도가, 법가 등에 의해 집중 포화를 받듯 반박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근 3백년에 걸친 '세기를 뛰어넘는 거대한 논쟁', 즉 '선진제자백가쟁명'이었던 것이다([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1-6>).
유가가 당시의 귀족을 대변하며 가까운 친족부터 사랑하면서 타인에게 획장하는 '인애(仁愛)'를 주장한 것에 반대하여, 묵가는 사해평등 원리에 기초한 '겸애(兼愛)'로 맞섰다. 그러나 수도승 같은 묵자의 삶과 주장은 '의협'과도 같아 높은 이상향을 제시했음에도 일반인들이 감히 실천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이중톈은 묵가가 '사회주의'적이기는 했다지만, "그의 사회주의는 빈곤의 사회주의, 공상의 사회주의, 전제적 사회주의"로서 빈곤과 공상, 전제독재는 사회주의가 될 수 없으므로 "그래서 묵자의 주장은 사회주의가 아니다(같은책, <6-2>)"라고 강조한다. 주나라보다 더 오랜 과거의 '겸애'와 '평등'을 동경했던 묵가는 지고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금욕했고 역설적으로 20세기 현대의 민주집중제 같은 고대의 전제적 독재권력을 상정했기에 사회주의적 지향에도 불구하고 진짜 사회주의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양주로부터 노자와 장자로 이어지는 도가는 한 발 더 나아가 태고적 원시 또는 씨족사회의 '완전평등사회'를 지향한다. 도가는 기본적으로 인류 문명 이래 뭔가 해보려는 일체의 노력들을 '유위(有爲)'로 보며, 이를 일체 거부하는 '무위(無爲)'의 삶을 지향한다. 공산주의의 역사유물론이 역사발전단계에서 최초의 '원시공산제'를 상정했던 것처럼 '완전평등'을 지향한 듯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도가의 주장은 '평등'보다는 '자유'였다. 문명이든 과학이든 진보든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 것이다. '무위'의 끝은 바로 철저한 개인의 '자유'다. '개인의 자유가 만인의 자유의 기본전제'가 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서의 이상사회를 그리는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처럼 오히려 도가가 묵가보다 더 '사회주의'적인 경향도 있다.
"...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기 서로 논쟁했던 이유... 첫째는 '사고의 성숙'이다. 사고력이 성숙됨으로써 봉건, 종법, 예악의 세 가지 중요한 제도를 창안해 이전 사람들과 다른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두번째는 '사회의 격변'이다. 국가제도, 정치제도, 사회제도, 그리고 문화제도 모두가 거대한 변화에 직면해 다수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이 필요했다. 세번째는 '사인(士人)의 부상'이다. 사상가를 배출할 수 있는 계층, 즉 '사인'들이 이미 존재했다. 이들은 이때 가장 자유롭고 가장 활약한 중심 역량이었다. 자유로웠기 때문에 '백가(百家)'가 존재할 수 있었고, 활약할 수 있었기에 '쟁명(爭鳴)'이 가능했던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5-5. 말단 귀족, 사인의 부상>, 이중톈, 2006.
이렇듯, 유가와 묵가, 도가는 그 사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랜 옛날을 동경하며 이상사회를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기에는 묵자와 맹자처럼 인간이 '선(善)'을 지향하거나 그 가능성을 담지한다는 기본전제가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후기의 법가는 이런 전제 자체를 뒤집는다. 우리가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로 알고 있는 이 전제는 이중톈에 의하면 그리 단순하지도 않고 막상 그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규정한 적도 없다지만, 공자와 맹자에 이어 제자백가의 3대 성인으로서 순자의 제자인 한비자가 집대성한 법가는 이상향 따위는 집어치우고 당장의 현실만을 보았다. 서로를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전국시대에는 오로지 군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권세와 술수, 제도와 법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의 민주적 '법치'와는 확연히 다른 기원전 중국 전국시대의 '법치'다. 이렇게 법가는 유가의 너그러운 '덕치'를 잔혹한 '법치'로 대체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중요한 주체가 하나 있다.
바로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사인(士人)'이었다.
이들은 왕족이나 귀족 같은 적자와 차자 등의 지배계급의 직계와 거리가 먼 서자 또는 방계로부터도 또 한참 더 내려온 후손들로서 세습 봉토도 없고, 부동산도 없으며, 농사나 상공업에도 종사할 수 없어 먹고 살기 위해 '지식'을 팔아야 하는 모종의 참모 또는 모사들이었다. 이렇게 선진시대 제자벡가의 모든 학파는 이런 '사인'들이 그 주체가 되었는데, 유가는 귀족선비 '문사', 묵가는 의협선비 '무사', 도가는 은둔선비 '은사', 그리고 법가는 군주의 참모 '모사'였던 것이다.
결국, 난세를 맞은 '지식인'들이 '제자백가쟁명'의 주인공들이었다. 이러한 지식인 선비 '사인'들은 다양성을 표현하는 '자유'로 인해 '백가(百家)'였으며, 국경을 건너고 나라를 초월하는 '활약'을 통해 '쟁명(爭鳴)'했다.
이제, 이 책의 <1장> 공자부터, <2장> 유가와 묵가, <3장> 유가와 도가를 거쳐 <4장> 유가와 법가의 '쟁명'과 그 사상적 차이를 읽다가 보니, 조금씩 [선진제자백가쟁명]에 담긴 '인문학'의 정체를 알게 된다.
즉, 사상이란 시대를 앞설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중국 고대 최초의 국가 하나라는 권력의 정당성을 위해 천명을 구했지만 아직 부족사회로서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인도주의'의 길을 열었고, 은(상)나라는 귀신을 믿은 나머지 '신을 사람처럼' 보았지만 '이성적 태도'의 시작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인간을 귀신에게 바치는 은나라의 '인신공양제'를 전격 폐지하고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세운 주나라 주공 단의 업적으로 비로소 '사람이 신처럼' 여겨지게 되는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도덕정신'과 '인문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중국 역사문명 단계가 그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선진제자백가쟁명]의 시작과 끝이라 할 수 있는 공자는 바로 이 주나라 문명, '인본주의' 또는 '인문주의'의 문을 열었던 '창시자' 주공 단의 부활을 꿈꾸었던 사람으로 중국 사상사에서 기원전에 이미 '르네상스(인문학의 재부흥)'를 재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역시, '인문학'의 끊임없는 부활을 시도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는 인류 역사가 존속되는 한 언제든 다시 등장하는 주요한 주제거리가 된다.
"... 선진(先秦) 제자(諸子)의 사상문화 유산을 총결... 묵가는 '사회'에 대한 관심을 두어 이상사회의 모습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평등, 호혜, 박애'다. 도가는 '인생'에 관심을 두어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바로 '진실, 자유, 관용'이다. 법가는 '국가'에 관심을 두어 치국의 이념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공개, 공평, 공정'이다. 유가는 '문화'에 관심을 두어 핵심 가치를 알려주었다. 그것은 바로 '인애, 정의, 자강'이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묵가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아름다운 이상을, 도가는 인생의 길을 제시하는 지혜의 결정을, 법가는 변혁에 대응하는 사상자원을, 유가는 민심을 모으는 가치체계를 남겼다. 이 모든 것이 인류의 정신적 자산이다. 우리가 이러한 유산을 '추상적으로 계승'할 때 인류의 '공동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공동의 이상'이란 바로 '조화'다."
-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6-6. 영원히 꺼지지 않을 위대한 정신의 횃불>, 이중톈, 2006.
이중톈은 [선진제자백가쟁명]을 총결산하면서 인류의 '공동의 이상'으로서 '조화'를 강조한다. 시대의 격변을 배경으로 한 사상의 다양성은 조화롭게 통일되어야 하는데, 그 방법론은 분석과 재해석을 통한 '추상적 계승'(같은책, <6-1>)인 것이다.
그렇게 이제,
이중톈의 [창시자(奠基者)](2013)를 펼칠 때가 되었나 보다.
아마도,
그곳에 중국 역사 속 '인문학'의 원초적 배경이 있을는지도 모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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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先秦諸子百家爭鳴)](2006), 이중톈(易中天), 이지연 옮김, <보아스>, 2015.
2. [백가쟁명(百家爭鳴) - 이중톈 중국사 6](2014),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5.
3.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이상수 지음, <길>, 2001.
4. [상나라 정벌(翦商/전상/Conquest of the Shang Dynasty)](2022), 리숴(李碩), 홍상훈 옮김, <글항아리>, 2024.
5. [창시자(奠基者;전기자) - 이중톈 중국사 3](2013),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