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홀(The Sinkhole) : 지하 암석이 용해되거나 기존의 동굴이 붕괴되어 생긴 움푹 패인 웅덩이를 말한다.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되거나 지나친 양수(揚水)로 지하수의 수면이 내려가는 경우 동굴이 지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붕괴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깔때기 모양 혹은 원통 모양을 이룬다. 처음에는 싱크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찾아보니 예전에 석회동굴을 가르칠때 동굴이 붕괴되어 움푹 가라앉는 지형을 '돌리네', 이런 지형이 몰려있는 곳을 '카르스트'지형이라고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 기억이 난다. 석회암 지대에 잘 나타나는 것인데 아마도 이것을 말하는 듯 싶다. 하지만 실제로 과테말라에서 발생한 싱크홀은 석회암 지대가 아니라고 한다. 또 다른 재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이야기는 서울에 세워진 123층에 해당하는 거대한 '시저스 타워' 건물이 싱크홀로 사라져버리는 7일전부터 사건이 발생한 7일후까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물론 이곳도 석회암지대는 아니다. 과연 약해진 지반이 123층이라는 거대 건물을 견디어 낼수 있을까? 또 살짝이 거론되는 준공허가에서 나타나는 냄새나는 작태들이 보인다. 이도 역시 인재라는 사실이다. 과연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일까? 예전 5층 아파트에 살때 15층 아파트가 참으로 부러웠었는데.. 지금 14층 건물에 10층에 살고 있지만 요즘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들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다. 10층이면 좀 높은편에 속하는데.. 요즘은 제대로 높은 곳이라 명함도 못 내밀겠으니 말이다. 작년에는 해운대에서 고층 아파트에서 불이 났었다. 고층 사다리가 닫기도 힘든 곳에서.. 그래서 애먹었던 기억이 난다. 올해는 강변 테크노마트에 진동이 생겨 예전 삼풍백화점 처럼 붕괴되는 것이 아닌가 소동이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더 높은 건물만을 지으려 하고 있다. 과연 우리의 땅은 그 거대한 건물들을 견뎌낼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가? 나도 작가처럼 '성수대교 붕괴'라는 사건을 기억하고,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잠결에 무심코 들은 성수대교 붕괴, 그때 당시 난 도대체 어떤 나라에서 다리가 붕괴되나 했었다. 지금 내가 수시로 건너다니는 다리가 바로 성수대교다. 지금은 차선도 넓히고 해서 과연 과거에는 어떤 일이 있어냐 하는듯 그렇게 그곳에 있지만 중간이 끊어졌던 성수대교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삼풍백화점이 있던 자리도 수시로 다니는 곳이다. '백화점 붕괴'라는 거대한 문자가 TV 화면에 뜰때, 백화점이 왜 무너지는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믿을수 없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모두가 조금씩 괜찮겠지 라는 인간의 이기심들이 가지고 온 사건이 아닐까? 그리고 이제는 싱크홀이라는 이 소설의 주제가 된 것이 꼭 소설속의 이야기가 아닐수도 있다.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수 있는 재난일수도 있을것이다. 누구에게는 교만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는 '시저스타워'는 삶의 전부였고, 생활터전이었을테고, 꿈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저스타워'에 갇힌체 함께 추락한 그들은 내 가족일수도 있다. 내가, 혹은 내 가족이 당한일이 아니더라도 쉽사리 잊혀지면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교만을 벌하는 지구의 경고일수도 있다.
갑작스럽게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을 집어든건 얼마전 딸아이와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다녀와서이다.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한 역사속에 자랑스런 인물중 한분이라고 생각한다. 왼손의 약지를 끊으면서 조국의 독립을 원하셨던 분! 죽어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 싸우라고 당부하신 그분을 생각하면 요즘 우리들은 너무나도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시고 그자리에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으시면서도 한결같이 그 강직한 마음에는 어떤 변화를 잃치 않으시고 항상 당당하셨다. '당연히 너는 니 할일을 하였으니, 항소하여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지 말고 떳떳하게 죽으라'하신 그 어머니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토록 글을 못쓰게, 창씨개명을 통해서도 일본인을 만들려고 했던 그들은 이런 독립투사들이 우리에게 있기에 결국에는 우리를 그들의 온전한 식민지로 만들지 못했으리라 본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한없이 당시 독립투사들을 보기가 민망해진다.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희생해 가며 지켜내주신 나라란 말인가? 그 위에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지 않는지 싶다. 현재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저 효창원에 가묘만 있을뿐이다. 당시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일본인들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가족들에게 인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어디선가 방치되고 있다. 비록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고 있지는 못해도 그 영혼만이라도 편안하게 고국에서 편안히 잠드시길 빌어본다.
< 세계 명문가의 독서 교육 > 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독서교육'의 중요성을 알게되었다. 더욱이 이 책을 읽으면서 또한 '인문고전'독서의 중요성을 알게되었다. 솔직히 부끄럽게도 책을 많이 읽는편이라는 나 자신도 인문고전에 대해서는 인색했던 것 같다. 겨우 읽었던 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명심보감'이었다. 그것도 원문보다는 학생들에게 쉽게 읽히는 만화로 말이다. 근데, 솔직히 만화로 읽어도 '정치학'은 매우 어려웠다. 근데 읽으면서도 정확한 뜻은 알지 못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아~ 맞아'라는 동감할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어설피 읽어도 좋은 책이라는 것을 알겠는데, 사색까지 곁들이면 얼마나 좋은 효과가 나타날까 싶다. 더군다나 소문난 삼류학교 시카고 대학이 인문고전 독서교육의 광신도라고 할수 있는 로버타 허친스가 총장으로 취임한 후 2000년까지 무려 6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아무래도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貧者因書富 富者因書貴 가난한 사람은 독서로 부자가 되고, 부자는 독서로 귀하게 된다. 이 말을 가슴에 새겨야겠다. 자신을 귀하게 하고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여하에 달린 말 같기도 하다. 나도 몇년전에 딸아이의 논술실력을 위해 논술학원에 보낸적이 있었다. 좋은책은 전문선생님이 골라주시니 더할나위 없이 좋았지만 정해진 시간에 그 책만 읽느라고 도저히 다른 책들을 못읽었다. 정해진 기간내에 왜 읽지 못하느냐며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처럼 내가 조금더 고민하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다. 독서교육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아이의 독서교육에 방향을 잡으면서 함께 독서하고 함께 이야기하면 더 좋은 독서교육이 되었을텐데 말이다. 내가 조금만 더 부지런하게 행동하면 많은걸 얻을수 있을텐데 너무 편안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가끔 책을 들고 도서관이나 동네 까페에 가서 읽으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독서교육의 시작이 아닌가 싶다. 베스트셀러나 나의 관심분야에만 치우쳤던 내 독서방향을 좀 바꾸기로 했다. 흔히들 제목만 알고있는 고전을 직접 읽어보고 사색을 해야겠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독서를 했던 세종대왕처럼.. 물론, 내 뜻이 그분의 의지에 비할바는 아니겠지만 딸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작은 목표를 시작으로 인문고전을 열심히 독서해야겠다.
시집이라는 것을 마음을 무겁게 가지고 읽으면 안될것 같다. 그냥 흘러가는데로..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읽어내려가다 보면 무언가 마음에 와닿는것이 있지 않을까 싶다. 학생시절에 교과서에 나온 시를 공부할때면 함축적 의미며, 시인이 표현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밑줄치면서 외웠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시를 읽으면 왠지 피곤해지고 시를 읽기 싫어질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요즘 내게 '시'란, 마음 편하게 가볍게 읽을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굳이 암송하지 않더라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으면 눈여겨 두었다가 생각날때마다 찾아볼수 있는 그렇게 편안한 친구같았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 하루 >란 시집은 작가의 말 그대로 마치 '내 생애의 축소판'을 만들어 놓은것 같다. 그저 문득 멍하니 보내는 시간도 있고, 오늘은 무슨일이 일어날까 기대도 해보았다가, 행복하기도 한 하루, 외롭기만 했던 하루, 그리고 휴식같은 하루...가 오래 살지 않았지만 그 삶속에 다 같이 들어있는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은 누군가의 별이고 빛입니다. 세상의 중심입니다. 당신의 빛을 잃지 마세요" 라는 구절을 수첩에 적어봤다. 좋은 말들이 더 많긴 했지만 굳이 수첩에 적어놓은걸 다시 찾아보는 성격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적지는 않는다. 그저 맘속에 새겨놓고 혼자서 떠올리곤 하는게 훨씬더 적성에 맞는다. 특히나 이 시집이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귀여운 강아지 캐릭터에 일러스트가 시의 옆을 장식하고 있기때문이다. 어렸을적 팬시점에서 보았던 강아지... 그 강아지가 오늘 내 하루에 들어와 나를 토닥토닥 응원해줄것 같다.
< 마당을 나온 암탉 >에는 세 종류의 암탉이 있습니다. 하나는 철망에 갇힌 채 배부르게 먹고 품지도 못할 알을 낳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암탉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당에서 수탉과 병아리와 함께 만족스럽게 살면서 혹시라도 누가 끼어들어 그 생활을 흐트러뜨리지 않나 전전긍긍하는 암탉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알을 품어 병아리를 탄생시키겠다는 소망을 굳게 간직하고 결국은 실천하는 암탉입니다. - 김서정(아동문학 평론가) - 애니메이션으로 개봉되었기에 이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아이에게 영화보다는 먼저 책을 읽혀야겠다는 생각에 선택한 것인데, 이런 세심한 짜임새의 등장인물(?)들이 있는지 몰랐다. 과연 나는 어떤 암탉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알만 낳는 양계장 닭은 아닌것 같고 어쩜 마당에 사는 암탉을 꿈꾸는 '잎싹'이처럼 어떤 소망을 가지고 실천하는데는 못미치는 어쩡쩡한 닭은 아닐까 한다. 요즘 솔직히 느끼는 건데 아이들의 책을 읽으면서 배우는게 많은 것 같다. 동화작가들은 과연 정말로 아이들에게 이런 꿈과 희망과 교훈을 줘야지 하고 글을 쓰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꼭 무언가 하나쯤은 어른인 나도 배우기 때문이다. 이름도 예쁜 '잎싹'이는 보기에는 볼품없는 이제 더이상 알을 낳지 못하는 폐닭이지만 꼭 알을 품어 병아리를 탄생시키겠다는 굳의 의지를 갖고 살아간다. 어느날 우연하게 얻은 하얗고 뽀얀 알을 품으면서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그 곳에서 태어난 아이가 병아리가 아니고 자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냥꾼 족제비를 비롯 많은 위험으로부터 마지막까지 그 아이를 돌보면서 결국에 그들의 무리로 돌아가도록 힘을 실어준다. 그야말로 부모의 아무 조건없는 무한사랑이라고나 할까..(물론 아쉬운 부모들도 많은 세상이 되었고, 잎싹이에게 초록머리는 그야말로 입양아이긴 하지만..) 결국엔 결말은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하늘을 날고 싶다는 '잎싹'이의 소망이 이루어진것 같아서 마음이 찡하면서도 안심이 된다. 초록머리와 천년만년 살게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어쩌면 현실성이 떨어졌을꺼 같다. 보기에는 깃털도 빠져있고, 살도 오르지 않아 볼품없는 닭이지만 '잎싹'이의 깊은 모성애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