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짜라의 독서파일 01-나는 왜 이 책을 읽다 잠이 왔는가?

몇주간 글을 쓰지 않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나의 심각한 게으름때문이었다.
게으름이 뇌를 좀 먹고, 신경 전달을 방해하고,   

근육의 움직임을 막아버렸기에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만은 글을 써보려고 한다. 게으름이 지금도 내 뇌와 근육을 방해하고 있지만
오늘만은 글을 써야한다는 의지가 게으름에게 승리를 거두었기에  

드디어 글을 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한마디로 위의 글은 글을 안 쓴 것에 대한 비겁한 변명이다.^^;;)
 

게으름의 방해를 뚫고 썼기에, 나는 거창하게 짜라의 독서파일이라는 이름을 붙어보았다.
이것은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글을 써나가겠다는 의지표명이다.  

그러나 과연 내 의지대로 계속 써나갈지는
게으름이라는 고질병을 앓고 있는데다가, 감정의 기복도 심한 나이기에 심히 의심스럽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믿기에,  '작심삼일만은 안 돼!'라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에  

최소한 세번 이상은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더 이상도 쓸 수 있다.  

게으름의 습격만 없다면...

각설하고, 나는 오늘 독서파일 첫 번째 글로 최근에 화제를 모으고 있는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해 쓰고자 한다.
뜨겁다 못해 폭발 직전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 책을 독서파일 첫번째로 정한 이유는
뭔가 심각하거나 심오하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적이거나 의미심장한 이유때문은 아니다.
내가 이 책에 관한 글을 독서파일 첫번째로 정한 이유는  

내가 이 책을 읽다가 잠이 왔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잠이 왔다는 그 사소한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책에 관한 글을 쓰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도 '나는 왜 이 책을 읽다 잠이 왔는가?'로 정했다.
책을 읽다 잠이 온 이유에 관한 내적인 고찰이 주제이기에,  

이 글은 서평이나 리뷰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정의에 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나 정의로운 신념을 설파하거나 고취시키는  

고상한 목적과도 거리가 멀다.
나는 그저 내가 왜 이책을 읽다가 잠이 왔는지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오직 그것이 목적일 뿐이기에, 무엇을 생각하든 기대이하가 될 것이 뻔하기에,  

이 글을 읽으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이상한 인간은 이 책을 이렇게 읽었구나'라는  

정도만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책을 비평하거나 비판할 지식도,능력도,글빨도,철학도,역사의식과 창조적 생각도  

없는 인간이기에 이런 식의 글을 쓸 수 밖에 없음을 알려드린다.
그럼 이제부터 한번 글을 써 보려고 한다.

잠이 온 이유

1.육체적 원인- 그렇다. 잠은 지극히 육체적인 행동이다.  

육체적인 행동이기에 잠이 왔다는 건, 거기에 합당한
육체적인  원인이 분명히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걸 의식하고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내 육체적 상황을 생각해봤다.
그러니 잠을 잘 수 밖에 없는 육체적 원인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밤마다 미드와 헐리우드 블럭버스터와 일본 애니와 한국의 예능 프로와  

한국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보통은 적당한 수준에서 보다 말지만 이 책을 읽기 전날만은 무리를 했다.
대중적 상상력의 바다에서 헤엄치다 벌어진 이 무리한 행동은  

내 뇌가 그때 정상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며,
그 다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면이라는 늪속으로 내가 빠질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날 점심에 먹은 라면도 한 몫을 했다.  

최근 급격히 나빠진 위장이라는 장기가 점심때 먹은 라면의 소화를 거부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위장의 저항으로, 내 내장기관에 쓰이던 에너지 대다수는 위장에 쓰였다.
식곤증보다 더 무시무시한 위장으로의 에너지 집중은 나의 체력 소모를 과하게 했고,
거기에 뇌가 퍼 뜨린 수마의 유혹까지 더해져 나의 육체는 '정의란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는다고 해도 잠이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과연 육체적 원인만 잠이 오게 했을까? 아니, 그렇지만은 않다. 

2.내용적 원인

1)칸트
나는 칸트 평전을 돈 주고 사서, 줄을 그어가며, 메모를 해가며 읽었다.  

구토끼를 참으며 순수이성비판을 읽다가 gg쳤으며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나오는 주인공이 부러웠다.),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에서  

간신히 순수이성비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는 칸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봤으며,  

그 외의 각종 철학 입문서와 다른 학자들의 강의를 통해서 칸트를 만나고 또 만났다.

 



그래서 칸트는 내게 너무나 익숙하고, 진부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단계로 보면 이렇다.

칸트를 만나다.-아, 칸트 형님은 위대한 철학자이십니다.
칸트를 만나다.-칸트는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아직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칸트를 만나다.-칸트는 뛰어난 철학자다.
칸트를 만나다.-칸트의 철학은 뛰어나지만 분명히 문제점이 있다.
칸트를 만나다.-칸트의 말대로 살기는 너무나 어렵다.
칸트를 만나다.-아,이제 칸트 지겹다.
칸트를 만나다.-칸트에 대한 언급하고 싶지 않다.
칸트를- 칸트 그만 말해!!
칸-그만 말하라고
ㅋ-고마해라!!! 

이런 상황에서 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시 칸트를 만났다.  

몸은 잠을 원하고, 마이클 샌델은 역시 칸트의 이성과 도덕에 관해 말하고,  

나는 읽다가 정말 힘겹고도 힘겨웠다. 이러니 잠이 안 올수가 있겠는가!!

2)존 롤스
서양 철학에서 정의하면 존 롤스다. 존 롤스하면 정의다.  

정의하면 존 롤스고, 존 롤스하면 정의다.
이말은 거짓이 아니다. 진짜 서양 철학에서 정의하면 존 롤스고, 존 롤스는 정의다.



그러니까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존 롤스가 나올 것을 예감했다.
그런데 진짜 나오니 머리가 노래지기 시작했다.
다시한번 말하겠다. 서양 철학에서 존 롤스는 정의고, 정의하면 존 롤스다.  

그러니 존 롤스는 정의고, 정의하면 존 롤스다. 그러니까 존 롤스는 정의고...

 
*이 감상문은 미완성인데, 언제 다시 끝까지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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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기린
가노 도모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한 소녀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이 소설을 추리소설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더 읽으면 죽은 소녀가 친구에게 빙의된 것 같은 내용이 나순다.  

그 순간, 표지의 공포스러운 모습과 함께 '이거 공포소설 아냐?'하는  

두번째 오해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이 소설이 추리나 공포소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한 소녀의 죽음,  

그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 소녀의 죽음이 주변 인물들에게 미친 영향과
그로 인해 사람들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십대 소녀들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적 요소와  

십대 소녀의 삶을 그린 청소년 소설이기도 하며,  

단지 십대들만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 불확실성은 죽은 소녀의 삶 자체가 불확실하고 흔들리는 삶을 살았다는 것에서 기인하며,  

동시에 그녀의 주변인물 다수가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자명하다.

하지만 이렇게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소녀는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해  

다른 이들이 변화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든다.
소설 속 동화에 나오는 유리기린 처럼 언제 부서질지 모른채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소녀는
죽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유리기린인 자신을 산산이 부수고, 

찬란하게 빛나는 유리기린의 파편을 다른 이들의 가슴에 심는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이들을 새롭게 빛나게 만든다.
이 놀라운 행위는 한 사람의 죽음이 단지 죽는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다른 이들을 새롭게 살게 할 수 있다는 명제를 다시한번 실감하게 만든다.

죽음과 삶은 이어져 있고, 죽음을 통해 삶은 강한 힘을 얻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명제의 표본같은 유리기린 소녀가 남긴 여운.
<유리기린>을 읽는 것은 그 여운을 들이마시며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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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 대하여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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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나나에게는 연성 소설과 강성 소설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연성소설은 오컬트의 경향이 약하고, 극단적 설정이 약하다는 말.
강성 소설은 오컬트와 극단적 상황설정이 강하다는 의미.
그렇게 본다면 <그녀에 대하여>는 강성 소설이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 중에서 이 소설은 죽음의 경향이 강하고,  

심지어 주인공이 이미 죽어있는 상황.
최초로 유령 주인공을 내세운 소설이지만,
바나나는 언제나 그대로다.
언제나 그대로 그 자리에 서서 우리를 따스하게 안아주고,
삶과 사랑과 행복의 의미를 일상에서 찾게 해주는 치유의 전도사로서의 바나나는 여전하다.
그러니, 그녀여 슬퍼하지 마라.
그녀는 죽었지만, 슬픈 죽음이 아닌 행복하고 여유로운 죽음의 의미를 찾아서,
죽음을 삶으로 만들었으니.
그 모습에서 우리는 바나나의 소설을 읽을 때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치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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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자 오리하라 이치의 ○○자 시리즈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선영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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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예측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오리하라 이치의 재능은 살아 있다.
사회파의 거죽을 뒤집어쓴 서스펜스 소설 답게
사회의 모순을 파헤치는 모습에 속을 뻔 하다가
어느 순간 '아, 이 작품은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었지'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게 하는 소설.
원죄자는 억울한 누명을 쓴 게 맞지만 동시에 그것은 억울함에 그칠 뿐이지 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소설 등장인물 다수는 죄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그렇고 그런 존재들.
우리가 과연 누군가를 심판할 권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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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공놀이 노래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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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공놀이 노래
요코미조 세이시
451p

 


 

5.죽은 이복형에게 바치는 슬픈 추모의 노래
이 소설은 반드시 마지막의 해설까지 읽어야만 한다. 만약에 해설까지 읽지 않고, 단순히 평범한 추리소설로 여기고 책을 덮는다면 그건 반쪽짜리 독서에 불과할 것이다. 반드시 해설까지 읽어야만 이 소설이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어떤 의미이고, 그의 작품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도가와 란포의 명맥을 이어, 전후 일본의 정통추리소설에서 진가를 발휘한 요코미조 세이시는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의 할아버지로도 유명한 일본의 국민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로서 명성을 얻은 작가다. 여기까지 생각한다면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단순히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한편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해설까지 읽으면 이 소설이 작가의 가슴에 맺힌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 감정을 중심으로, <악마의 공놀이 노래>의 감상문을 추리 소설과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써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사랑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여기 유부남인 기이치로라는 남자가 있다. 마찬가지로 유부녀인 하마라는 여인이 있다. 둘은 각자의 가정이 있었지만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고,역시 운명처럼 각자의 가정을 버리고 사랑의 도주를 감행한다. 고베로 도망친 두 사람은 세이시라는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 그런데 기이치로의 본처와 그녀의 아들인 가나오는 그들과 달리 절망의 늪에 떨어져 삶이 망가져버린다. 기이치로의 본처는 기이치로가 자신을 버렸다는 배신감에 치를 떨다 자살하고, 아들인 가나오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생긴다. 혼자 남겨진 가나오. 하지만 가나오는 다시 아버지와 배다른 동생인 세이시와 만난다. 고베에서 살던 하마가 병에 걸려 죽고, 기이치로가 재혼을 했는데, 이 기이치로의 새부인인 아사에가 가나오와 세이시를 모두 거둬서 키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난 배다른 두 형제. 하지만 두 형제의 동거는 가나오가 젊은 나이에 '극단적 신경쇠약으로 인한 각기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불행한 결말로 끝맺는다.-

위의 글을 읽어보면, 요코미조 세이시가 가나오 모자에게 가지고 있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린 나는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것이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강한 열등감으로 남아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건 아닐까.'

요코미조 세이시는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가나오 모자에게 죄스러운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와 흡사한 이 감정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존재 자체가 가진 커다란 짐이자, 살아가면서 평생 마음에 붙어다닐 죄책감이 되어버린다. 

시간이 흘러 요코미조 세이시는 전후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명성을 이어가던 그는 일본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며 사회 자체가 변화하면서, 거기에 발맞춰 미스터리 소설계도 따라 변화화면서 고리타분한 작가가 되어 위기를 맞기 시작한다. 변화의 기로에서 요코미조 세이시는 가슴 깊숙이 감춰두었던 이야기를 작품으로 써낸다. 그 작품이 바로 <악마의 공놀이 노래>이다.

이복형과 그 어머니에 대한 추모의 감정을 담아 써내려간 소설 <악마의 공놀이 노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변화의 모색이 엿보이는 이 작품의 핵심에는 탐정인 긴다이치 코스케가 아니라 가나오라는 인물이 있다. 이복형인 가나오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이 인물은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엄청난 고통을 겪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잃는 지경에까지 처한다. 소설 속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이미 아버지를 잃은 그는, 귀수촌에 전해 내려오는 공놀이 노래의 가사에 따라 진행된 살인사건에 의해, 사랑하는 연인과 여동생과 어머니까지 모두 잃는다. 

피해자 몰살이라는 전매특허를 가진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와 피해자를 지키는데는 최악의 재능을 발휘하는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와 소설 속 범인이 합작해서 벌인 이 끔찍한 상황 앞에서 가나오는 현실의 가나오가 겪었을 법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 요코미조 세이시는 현실의 가나오에게는 전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 속에 묵혀두었던 말을 작중인물인 여배우로 성공한 오조라 유카리의 입을 빌려 소설 속 가나오에게 말한다.

'오빠, 여자인 저도 참고 견뎠으니 설마 어엿한 남자인 오빠가 견디지 못할 리 없어요. 강해지세요. 언제까지나 강하게 살아주세요.'

어쩌면 요코미조 세이시는 '강하게 살아 주세요.'라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른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생전에는 하지 못한 걸로 여겨지는 이 말을, 가슴 속에 깊숙이 감춰두었던 이 말을 위해 가나오는 그렇게 힘든 고난을 겪어야 했고, 소설 속 인물들은 죽어가야 했는지 모르겠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특유의 음습하고 어두운 분위기에다 작가 자신의 슬픔까지 더해져서 더욱더 슬퍼진 <악마의 공놀이 노래>라는 이복형에게 바치는 추모의 노래가 끝나고 나서 나는 생각에 잠긴다. 추리 소설을 이렇게 슬픈 가족소설처럼 읽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렇게 읽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너가 만약 요코미조 세이시처럼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 죄가 되는 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과연 이 질문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해야할까. 아니 우리 모두는 이 질문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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