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언제가 나의 청춘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네요. 몇 개월후면 마흔이 되어버리는 아들둘을 키우는 아줌마인 제게 청춘 공백기는 스무살 갓 졸업했을때를 떠올리게 하는 책이었답니다. 대학 졸업하기 전 취업을 하고 싶었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남들 한다는 공무원 시험 공부도 해보고 공무원시험까지 치러보기는 했지만 이렇다할 성과없이 졸업을 하게 되고. 공무원시험 준비한다는 핑계로 미루던 취업도, 호기롭게 도전한 공부도 잘되지 않을때 불안함을 달래려 기간제로 일하기도 하다 결국 공무원이 공부를 접었던 시절. 청춘은 왠지 행복하고 즐거울꺼 같았지만 그시절의 내 기억이 행복하고 즐겁지만은 않았기에. 청춘이 주는 싱그러운 이미지가 내게는 발전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무리던 정체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는 것만 같아 슬픈 단어랍니다. 작가님의 소개글에서 보면 마치 내 마음이 들켜버린듯했답니다. 오랜 백수생활로 느끼는 무기력과 우울증이 공감되면서도 청춘 공백기라는 말이 왠지 기대되어졌답니다. 조금 느려서, 다른 아이들과 달라서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휴직을 하고 쉬고 있지만 휴직기간이 지나면 퇴사를 염두해 두고 있는 나의 일상 또한 백수생활과 다를바 없고, 무기력과 우울함은 마치 한세트라도 되는 냥 다가오니 하루에도 수십번 감정 기복이 생기는 나는 이제 마흔이 다가오는 이름 모를 공백기를 보내고 있다보니 청춘공백기는 나보다는 나은게 아닐까 하는 부러움마저도 들었답니다.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불행해. 매 순간이 행복하지는 않아. 다만 조금은 알 것 같아. 인생이라는 게 매 순간 가습 벅차게 행복할 수는 없다는 것을. p.45 항상 행복한 인생은 없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누군가가 매 순간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 순간들이 행복으로 다가오게 될까? 때로는 불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슬프기도 하기에 행복이라고 느끼는것은 아닐까. 누군가와 비교해서 나는 불행하다는 것이 아닌 온전히 나를 위한 행복을 느껴보고 싶어진다. 때로는 불행하고 슬프더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런 불행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것이기에. 마흔이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는 지금의 나는 괜시리 마흔이라는 나이가 마음을 뒤흔들고 있음을 느낀다. 30대와 40대의 경계에 놓인 지금 나는 왜그리도 마흔이라는 숫자에 흔들리는 것일까. 단순히 보면 별다를 껏 없을텐데도 두렵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안고 있기보다, 39살은 끝났지만(End) 내가 원하는 49살을 위해 계속 살아갈 것(And)이다. End와 And도 한끗차이이듯 내 마음의 차이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 다시 흔들리지 않을꺼라는 것을 장담할 수는 없다. 그 옛날 청춘의 시끌벅쩍함은 없지만 어쩌면 지금이 또 다른 나의 청춘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숨쉬고 살아가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순간이기에 지금의 청춘을 열심히 살아보아야겠다.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쓴 글입니다.
하세 세이슈의 신의 눈물을 받아 들었을때 책 표지의 곰이 눈에 들어왔다. 신의 눈물이라는 제목과의 연관성을 생각해보다 이내 포기하고 책을 펼쳤다. 책을 읽어보고 나서야 표지의 곰이 상징하는 의미를 알 수 있을꺼 같았다. 할아버지인 게이조와 살고 있는 유우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한다. 아이누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했던 괴롭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유우의 앞에 낯선 남자가 찾아온다. 할아버지인 게이조를 만나고 싶어하는 그 남자. 게이조는 나무를 구하러 산에 올라가 있어 낯선 남자의 방문이 유우에게는 무서움을 안겨주었다. 할아버지가 얼른 돌아오기를 바라는 유우다. 유우가 학교를 간 동안 몰래 찾아와 아뜰리에에 있는 나무 조각상을 본 오자키는 게이조의 제자가 되고 싶어한다. 오자키는 왜 그토록 게이조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게이조를 찾아나서기 전 오자키는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로 임시거처에 살게 된 어머니가 불곰 조각상을 아끼는 모습을 보았었다. 함께 살자는 오자키를 뒤로 하고 임시거처에서 살아가던 어머니가 갑작스레 죽게 되고, 그런 원망이 결국원전사고로 돌리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사고에 대한 보상도 사과도 없는 모습에 피해자들의 데모만 이어질뿐 그것이 제대로된 해결책이 아님을 느끼는 오자키. 그리고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불곰 조각상이 신경쓰였던 것일까? 결국 게이조를 찾아나서게 된다. 불곰 조각상과 마주하고 목조조각가가 되려는 오자키. "고향을 버린다는 건 가족을 버린다는 거다. 가족을 버린다는 건 오랜 시간 걸쳐 가꾸어온 문화와 관습, 신앙을 버린다는 거다." p.152 ~ p.153 아이누인족이라는 사실이 싫어서 집을 나갔던 자신의 여동생과 딸을 보면 고향을 버리고 가버린 이들에 대해 아파하고 원망하지만 자신만이라도 아이누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게이조. 그의 신념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아이누인족의 것이었던 숲은 어느새 사유지가 되어 함부로 나무를 베어올 수 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경찰서에 가기도 하지만 하나 남은 자신의 손녀 유우를 위해 숲의 주인에게 사과를 하기까지 하는 게이조. 고지식하지만 손녀를 사랑하는 여느 할아버지와 다를게 없는 모습이었다."망설이고 망설이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그게 인생이지 않을까." p.292 떠나고 싶은 곳에 대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은 오자키의 마음이었을까? 호숫가의 물안개를 보기 위해 새벽 일찍 유우를 데리고 가서 보여주기를 몇차례하여 함께 보기도 한다. 오자키는 유우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보지 못할 광경들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곳을 떠나려고 하는 유우에 대한 자책이 아닌, 유우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오빠같은 마음이랄까."그래. 내가 살아있든, 죽었든 아무래도 좋아. 유우가 신들의 품속에서 사는 삶을 선택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해. 자, 가자." p.349용서하자. 자신을 두고 떠난 부모님을 용서하자. 완고하고 무서웠떤 할아버지를 용서하자. 자신을 괴롭혔던 반 친구들을 용서하자. 계속 투정부리기만 했던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이자. p.442 유우와 게이조는 어느새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오자키가 아니었다면 가족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을 두사람을 변화시킨 오자키는 자신 또한 변해갔다. 자신이 알고 싶었던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되고 그 곳에 뿌리 내리고 싶어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죗값을 받으려는 오자키의 모습은 담담하면서도 가여웠다. 유우, 게이조, 오자키. 세사람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를 응원해본다.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쓴 글입니다.
말없이 자기 할 일만 똑부러지게 하던 아이, 그런 아이가 지금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p.88 자신이 할일을 알아서 찾아서 하고,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학원을 다니는 것에 불평없이 너무나도 조용한 아이 고대규. 그런 대규가 사라졌어요. 밤늦게 어디로 가는지 묻는 아주머니의 말에 버스를 타고 사라져버리는 대규예요. 항상 있어야 할 대규가 보이지 않고 선생님도 수업을 하시지 않고 손님이 왔다며 자리를 비운 그날. 희진은 대규가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선생님께 궁금해 했지만 선생님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대규가 사라지자 학교로 달려와 선생님 모르는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냐고 하는 대규의 아빠. 대규에게는 무슨일이 일어난걸까요? 희진과 아이들은 자신들이 대규에 대해서 아는 것을 하나씩 적어갑니다. 하지만 대규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지요. 대규가 살고 있는 곳 조차 몰랐으니까요. 예찬이가 희진이를 찾아와서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거예요. 희진은 예찬이 녹음해 두었다는 대화들과 과학 학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대규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하게 된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도 갚는다'는 말처럼 말한디에 상황이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한 실험에서 예쁘지 않지만 예쁘다고 계속 이야기 해주었더니 시간이 지나자 정말 표정도 바뀌고 예뻐지는 것을 확인한 실험이 있었어요. 좋은 말들만 해주어도 모자랄텐데 화내고 혼내다 보니 대규의 마음 속에서는 미움만이 자라났지요. 그런 대규의 상황을 보는 내내 반성하게 되었답니다. 매를 들고 때리는 것만이 학대가 아니고 말로 하는 것도 정서적인 학대에 해당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꺼 같아요. 대규가 자신의 마음을 부모님께 이야기 하고 희진이와 예찬이와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어, 이제 혼자가 아닌 모습을 보니 미소가 지어졌어요. 대규가 언제까지나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 보람을 느끼고 웃으면서 지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쓴 글입니다.
이 책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다들 반전이라며, 이런 이야기였어? 하는 듯한 반응의 글들을 많이 보았다. 거디가 책의 띠지에 조차 당당하게도 '단 한 글자도 놓치지 마라 모든 것이 복선이며 단서다! 속을 확률 100%의 반전 미스터리'라고 적혀 있기에 '난 속지 말아야지.'하며 책을 펼쳤다. 책을 처음 펼쳤을때는 내용보다는 다지마 도시유키 작가님의 모습이 더 미스터리했다. 이 작품이 마지막 소설이라기에 돌아가신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읽어나갔는데 마지막에서야 그 궁금증이 풀렸다. 한쪽 시력을 잃고 다른 한쪽의 시력도 잃게 되면 주위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가족들에게 편지를 남긴채 1989년 사라지셨다고 한다. 2022년 현재까지도 소식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작가님의 생애 마저도 미스터리로 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백합》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내용은 청소년 소설 그 자체였다. 여름 방학 동안 롯코산에 있는 아버지 친구의 별장에 놀러간 열네살 소년 스스무는 동갑인 가즈히코와 여름방학을 함께 보내게 된다. 둘이서 우연히 간 연못에서 만나게 된 가오루를 만나 둘은 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부잣집애 치고는 스스럼 없는 모습을 보인 가오루의 속 사정을 알게 된 스스무와 가즈히코는 어느새 가오루를 향한 마음이 자라고 있었다. 동정에서 비롯된 마음이리라 생각했던 가오루 또한 이둘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줄을 몰랐으리라. 가오루가 없어서다. 가오루가 없는 동안에 우리는 아무런 즐거움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날 하루가 얼른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시간은 평소보다 더 천천히 흘러갔다. p.111그렇게 둘은 가오루를 그리워하며 가오루와 함께 보내는 일상이 행복했다. 스스무의 짧은 일기와 함께 스스무가 이야기하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동시에 다른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나오면서 각자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시대도 다르고 접점도 없어보이는 이야기들은 마지막에 가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추리 미스터리라는 강한 반전을 기대한다면 너무나도 잔잔하게 다가올지도 모르지만, 부담없이 읽고 난 뒤에 '앗, 놓쳤네'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 반전을 선사한 《흑백합》이었다.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쓴 글입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작은 불행이 닥치면 왜 나에게 그런 불행이 다가왔을지에 대한 슬픔과 함께 다시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그럼에도 행복해지고 싶은 너에게》는 우리에게 마음의 위로가 되어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에세이이지만 내가 시를 읽고 있은 걸까 하는 착각을 들게 만드는 형식이라 색다르기도 했다.《그럼에도 행복해지고 싶은 너에게》는 6장으로 나뉘어져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1장. 안아주세요 - 나를 가장 사랑해야할 사람, 나에게 다가가기2장. 들여다보세요 - '나의 내면에 집중해보기3장. 행복하세요 -지금 행복할 수 있는 당신이 행복할 수 없는 까닭4장. 새겨보세요 - 지쳐있거나 망설이고 있는 당신을 읽깨우는 생각의 힘5장. 나아가세요 - 당신의 작은 변화가 이루어 낼 수 있는 놀라운 일들6장. 함께하세요 - 행복을 옥죄는 펴견에서 벗어나 세상과 소통하는 발걸음 여행에세이를 보다보면 그 곳에 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그 곳에 갔을때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느껴지던 감정들이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우리는 환상을 쫓아온것은 아닐까? 그곳에 도달한다면 마치 닿아서 행운의 순간을 만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야경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멀리서 보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저 속에 들어가면 나도 마치 그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을것 같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 곳에 가면 멀리서 보던 감상에 빠지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를 제일 먼저 사랑해야 할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때 비로소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된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 자신을 사랑하기가 쉬운 일은 아닌듯하다. 나도 그러한 사람이다. 내가 무언가를 했을때 성취욕을 얻기도 하지만 거기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다보면 자책하고 나 자신이 싫어지기도 한다. 특히 아이들을 혼내고 났을때는 정말이지 나 자신이 너무 싫어지는 것은 어쩔수 없다. 나를 향한 사랑이 가장 위대하고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작가님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쉽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행복해지고 싶은 너에게 에서는 김춘수의 <꽃>에 비유하여 존재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관심없던 것은 결국 나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고양이를 무서워하던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고양이들이 집에 반려묘를 키우면서 관심이 가게 되고 길을 걷다보면 고양이가 보이고, 고양이들이 무얼하나 관찰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행복을 알지 못하고 행운을 찾아다닌다. 수많은 세잎클로버들 속에서 몇개 되지 않는 네잎클로버를 찾아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행복은 곁에 있고 행운은 일회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그 행복을 눈치채지 못한채 놓치고 만다. 우리는 실패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는 존재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라는 말처럼 실패 후에 성공을 가져오더라도 그 실패를 이겨내지 못하면 결국 성공을 맛보지 못하리라. 우리가 겪은 실패에서도 우리는 배우게 될 것이고 배우고 한발 성장하게 될것이다. 그것을 다시 한번 느끼며 실패와 마주하더라도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비록 많이 갖고 있지는 않아도 나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간다면 많이 가진 사람보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것이지만, 많이 가졌음에도 더 많이 가지려고 아둥바둥 얽메이게 된다면 그것을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닐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왜 그토록 성공에 집착하고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일까? 성공하고 부자가 된다면 더 많이 누릴 수 있을꺼라는 착각에서 비롯된것이리라. 아무리 성공하고 부자가 되었다하더라도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할것이다. 《그럼에도 행복해지고 싶은 너에게》는 행복해지고 싶은 우리를 잠시 쉬어가도 된다고 이야기 해주는 듯하다. 잠시 쉬면서 나를 돌아보고 나를 사랑할 여유를 가지도록 해주는 책인거 같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서 슬픔에 빠지거나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보면 좋을 책이었다.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