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내용들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일깨울지 조그마한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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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는 ‘투데이‘라는 말(馬)과 ‘콜리‘라는 휴머노이드 로봇 기수(騎手)가 등장한다. 전반적인 서술의 관점은 국어시간에 배운 바에 따르면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중간중간 휴머노이드 로봇인 ‘콜리‘의 시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솔직히 맨 처음에 특정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이게 무슨 얘기지 하면서 의아해 하기만 했었는데, 뒤에 나오는 이야기 퍼즐들을 맞추어 나가면서 맨 앞에 나왔던 이야기의 상황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요즘 AI니 뭐니 하면서 인공지능과 관련된 것들이 많은 이슈가 되고 있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휴머노이드 로봇도 AI기술과 적접적으로 관련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소설에 나온 ‘콜리‘는 제작과정에서 특정한 칩이 잘못 삽입되어 일반적인 휴머노이드 로봇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일례로 자신이 타는 말인 ‘투데이‘와 교감을 하고자 한다거나, 언어 학습 분야에 있어서 다른 로봇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어휘를 알고 있다는 등의 특징이 있다.

아무튼 평범하지 않은 휴머노이드 로봇이지만 어찌됐든 ‘콜리‘는 인간의 기술에 의해 창조되었고,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투데이라는 말의 기수로 경마장에서 경주를 이기기 위한 역할에 충실하도록 교육받고 훈련받았다. 물론 이로 인한 성과도 있었다. 투데이가 신기록을 세우면서 경주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 이런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내던 투데이는 어느 순간 이러한 생활이 반복됨에 따른 반작용으로 인해 몸과 마음에 이상이 왔고, 심지어는 걷기조차 힘든 상황까지 맞이하게 된다. 매경기 진통제를 맞고 뛰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콜리는 투데이와의 교감을 통해 투데이의 이런 상태를 파악한다. 그리고 스스로 결단한다. 자기가 낙마해서라도 투데이를 살려야겠다고 말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독자인 내 머릿속에도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일단 말(馬)인 ‘투데이‘에게서는 과중한 업무에 치여서 치열하게 살던 인간이 어느순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갈되어버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소설 속에는 비록 말로 나오지만, 어쩌면 투데이는 이 시대를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모습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참 기묘하게도 이름이 ‘투데이‘인데 이것의 영어 뜻처럼 오늘 하루를 열심히 일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파도 참고 버티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말이다. 소설에 나온 캐릭터를 통해 뭔가 공감과 위로를 얻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이어서 휴머노이드 로봇인 ‘콜리‘를 보면서는 비록 진짜 사람은 아니지만 웬만한 사람보다도 더 인간적인 면이 느껴졌다. 자신이 타는 말인 투데이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교감으로 느끼고 스스로 낙마해서 투데이가 조금이라도 편안했으면 하는 그 마음은 자신을 희생해 상대방을 살리려고 했던 예수님의 사랑과도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여기 일일이 적진 않았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인간들은 그저 투데이와 콜리를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그저 이용해먹으려는 생각뿐인데, 오히려 로봇인 콜리가 인간이 가져야할 법한 마음과 생각을 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이는 어쩌면 요즘 사람들이 점점 더 인간성이라는 것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나타낸 건지도 모르겠다.

고통은 생명체만이 지닌 최고의 방어 프로그램이다. 고통이 인간을 살게 했고, 고통이 인간을 성장시켰다.

투데이는 흑마다. 빛이 반사되는 수면처럼 검은 털이 아름다운 암말이다.

역사적인 날. 나는 오늘을 그렇게 부르고 싶다.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날이란, 무언가를 처음 시작한 날을 의미할 때도 있었지만 기적이 일어난 날을 더 많이 칭했다. 기적. 오늘은 내 짧은 생애 두 번째로 기적이 일어난 날이었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등속운동을 유지하며 자신에게 다시 생긴 삶을 이어갈 것이다.

나는 정확한 수치와 계산에 의한 결괏값만을 산출한다. 내 미래에는 예측 오류란 없다.

약속은 참 편리했다. 약속 한 번으로 많은 소리가 낭비되지 않았다.

"한눈팔지 말고 앞에만 봐."

허벅지를 말 몸에 밀착시킨 후 상체를 앞으로 숙여 안장과 평형을 유지했다. 이를 ‘전경자세‘ 라고 한다

링크 구조 : 두 개 이상의 장치를 연결해 서로 상호작용하게 만든 구조. 링크구조를 사용하면 경량화가 가능하고 모터를 사용하지 않아 유격이 발생하지 않는다.

"고삐는 놓으면 안 돼."

규정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사회질서는 모두가 약속된 규정을 어기지 않아야 유지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늘은 매일, 매시간 색과 모양이 바뀌었다. 하늘은 파란 색이었지만 가끔 보라색이나 분홍색, 노란색, 회색이 섞이기도 했다.

세상에는 단어가 천 개의 천 배 정도 더 필요해 보였다. 동시에 걱정이 들었다. 혹시 세상에 이미 그만큼의 단어가 있는데 자신이 모르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단어들은 어디에서 알 수 있을까.

여기서 ‘좋아했다‘ 는 더 자주, 더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봤다는 뜻이다.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흐를 수 있는 물체라니.

콜리의 반응은 언제나 즉각적이었고 바라보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방에서는 하늘을 생각하지 않았고 경기장에서는 시간을 헤아리지 않았으며 말을 타고 있을 때에는 단어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재미있으니까."

몸이 공기와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무언가를 흡수하고, 분해하고, 배출하는 과정은 생명이 가진 특권이었다. 콜리의 몸은 그 어떤 것도 흡수하고, 분해하고, 배출하지 않는다. 콜리는 에너지를 몸에 쌓아두고, 형태를 전환하고, 소비하기를 반복한다.

호흡을 하면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생명은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투데이도 달릴 때에만 살아 있다. 투데이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투데이는 채찍을 맞을 때마다 더 빠르게 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투데이의 속은 고요해졌다. 콜리는 납득할 수 없었다. 행복하지 않다니. 투데이는 달려야 살아 있음을 느꼈지만 살아 있는 동안 행복하지 않게 되었다.

힘내, 조금만 더 가면 돼. 경기 도중 투데이에게 콜리가 속삭였다. 그럴 때마다 투데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파. 아파. 아파.

투데이는 그렇게 신기록을 경신한 지 3개월 만에 무너졌다. 속도는 막판에 떨어졌고 1등을 유지하던 투데이는 어느 순간부터 2등, 5등, 심지어 9등까지 밀려났다. 야유는 쏟아졌고 몸값은 떨어졌으며 관심은 사라졌다.

콜리는 뭐든 상관없었지만 관절이 아파 걷기 힘들어하는 투데이를 치료하지 않는 것은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콜리는 마주치는 사람마다 투데이에게 적절한 치료와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투데이는 서있기 힘든 몸으로도 당근을 진통제처럼 씹어 먹으며 경기에 나가야 했다.

이대로는 죽어.
콜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 관중석이 꽉 찬 늦여름의 경기에서 콜리는 스스로 낙마했다. 투데이가 콜리의 무게를 힘겨워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로에 선 이상 투데이는 멈추지 못할 것이며 이 상태로 완주했다가는 영영 다리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실격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콜리는 짧은 순간 완주해야 한다는 존재 이유와 투데이를 살려야 한다는 규칙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을 들여 후자를 선택했다. 투데이를 지켜야 한다.

투데이와 주로가 아닌 초원을 달릴 수 있다면 더 즐거웠을 텐데...

되도록 오랫동안 하늘만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쉬움과 형태가 같다고는 깨닫지 못한 채로 말이다.

"제 실수죠. 딴생각을 하면 안 됐는데 문득 하늘이 푸르다는 생각을 했어요. 날이 맑은 날 초원을 뛰고 있다는 상상을 했거든요. 스크린으로 보이는 가짜 말고 진짜요."

한 번 기회를 놓치니 두 번째는 영 쉽지 않았다.

간절하게 원했다면 진작 뛰어나갔어야 했다. 지금 이 생각이 들기도 전에 말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끊임없이 낯선 것에 도전하는 거잖아."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데.

결국 이 세상은 수지타산이 얼마만큼 맞느냐로 돌아가는 것인데,

오지랖부리며 생각하지 말자. 짜증 나면 짜증 나는 거지 초기 비용을 자신이 왜 따지고 있나 싶었다.

발붙여 사는 동안에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 거라면 계속 열심히 사는 수밖에. 이것도 짜증 나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어쩐지 다시는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바다를 보고 와서 마음이 후련해졌다

조금만 덜 근면 성실하고 겁이 없었으면 경마에 돈을 걸어보는 건데, 그 주위를 맴돌다 자라면서 보게 된 건 억만장자가 되어 나가는 이들보다 그나마 있던 돈까지 죄다 잃고 쫓기듯 나오는 이들이 더 많다는 현실이었다.

"언니는 왜 그렇게 유니폼을 좋아해요?" ...(중략)...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좋잖아.

시설을 빠르게 업그레이드시킨 경마장이었지만 그만큼 가장 기초적인 곳들이 허술했다.

모든 것은 상황이 맞아야 이뤄진다고,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초원과 비슷한 환경으로 꾸몄다고 할지라도 초원은 아니었다.

그리움을 느끼려면 그리워할 대상이 분명하게 존재해야 했다.

갇혀 있지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 문명 사회 이후 쌓아온 말들의 기억 DNA는 초원보다 마방에 더 많을 것 같았다.

아픈 건 금방 치료될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아.

"여기 사람들은 나한테 관심이 너무 많아. 그 관심을 다 돈으로 주면 얼마나 좋아."

"너 이 정도도 귀찮아했다가는 정말로 도태된다."

연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몸통의 반이 부서져 폐기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기수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밤잠까지 내쫓으며 머리에 꽉 들어찬 ‘존재‘를 어떻게 쉽게 보낼 수 있겠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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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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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장강명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저자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와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심도있게 고민하고 생각해본 흔적들을 작품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특별히 이 작품에선 아직 사회에 발을 내딛지 않은 젊은 세대 혹은 사회초년생의 고뇌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잘 풀어낸 듯하다. 완독후에도 독자들이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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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일일이 얘기할 순 없지만 이야기 속에 숨겨져있던 것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상황이 급속도로 전개되고 묘한 긴장감이 흘러서 읽는 맛이 느껴졌다. 간만에 몰입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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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끝까지 읽고나서 개인적으로는 뭔가 속시원하다는 느낌보다는 이래저래 생각해볼 것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마지막에 나온 작가의 말에서도 ‘소설 속 등장인물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작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만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볼거리를 적절한 방식으로 던져줬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 책에 추천사를 써준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남겨줘서 독자인 내가 이 작품을 그래도 허투루로 읽진 않았구나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별도로 독서토론을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만약 이 작품을 완독한 독자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토론을 한다면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와 생각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할 때는 허우적거리는 손을 잡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이라도 서슴지 않을 인간

일어날 수 있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대응 계획과 백업 플랜을 준비하는 능력

별마로천문대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산봉우리에 있었다.

그 옛날 소년 왕은 이곳에서 여러 차례 ㅈㅅ을 강요당했다. 청령포에서, 나는 3년 안에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퇴로가 끊겨버려 후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ㅈㅅ선언을 이기려면 세연이나 세화 못지않은 정교함과 치밀함으로 꽉 짜인 논리를 준비하고, 이벤트를 계획하고, 마케팅을 벌여야 한다. 그런 작업들을 진행하는 중에 언젠가는 사표를 제출해야 할 시점이 올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머릿 속이 텅 빈 상태였다. 다만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서 생활에 기반을 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먼 바다에서 공기가 태양에너지를 듬뿍 받아 힘을 키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열대성저기압은 갑자기 태풍으로 발달해 육지를 향하고 강한 비바람으로 그 존재를 과시한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단 인간의 생명에 암묵적으로 금전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그 가치는 얼마나 될까?

위험한 직업과 덜 위험한 직업의 임금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에 어떤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는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이 임금 차이는 학력, 경력 등 임금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소들을 배제하고 계산해야 한다. 이런 방법을 사용한 연구들은 대체로 사람의 생명이 100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기암 환자들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을 거쳐 마지막에 수용의 단계에 접어든다고 하는데, 재키는 자신이 아직도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산만한 정신상태로 죽음을 맞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죽음은 도피가 아닌가?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 속의 인물에게도 모두 운이 따르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시대였다. 1000년 전이거나 일제강점기거나 아니면 독재시대거나.

아무리 추잡한 것이라도 멀리서 내려다보면 그런대로 참을 수 있다.

재키는 살아있는 모든 것이 불쌍해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후의 순간에도 그녀의 마음은 평안해지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도 가라앉지 않았다.

재키는 마지막 순간에도 연쇄살인마처럼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만 연민을 느꼈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ㅈㅅ한 유명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베르테르 효과‘

‘언젠가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허락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

이 책이 다루는 가능성은 20대를 옹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위대한 과업이란 철저히 개인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위대하다는 개념이 변질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위대함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고, 스토리텔링 기법으로만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젊은이들에게는 과업을 찾는 일이 바로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길이다.

사람은 적수가 누구인지 알 때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 게 된다. _새뮤얼 헌팅턴

20대를 정의하는 각종 담론이 대체로 공허한 이유는 그 청년세대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과업을 찾는 것이 바로 지금의 20대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인지도 모르겠다.

장편소설을 쓰는 작업은 마라톤 풀코스 완주와 비슷했다. 처음 시작할 때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자신이 없었던 게 그랬고, 매번 3분의 1지점 쯤에서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게 그랬다.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게 두 가지 있다. ‘계속 쓰다 보면 끝까지 쓸 수 있다‘ 는 것과 ‘계속 쓰면 점점 나아진다‘ 는 것이다. 3분의 2 지점을 통과하면 그다음부터는 저절로 끝까지 가게 된다는 점도 글쓰기와 마라톤의 공통점이다.

‘위대함‘은 실제로는 별 중요한 의미가 없는, 고리타분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다른 뜻을 교묘하게 섞어놓은 단어에 불과합니다. ‘역사의 흐름이 바뀔 때 우연히 해당 장소에 있을 것‘ , 그리고 ‘개인의 한계라고 알려진 선을 넘을 것‘ 입니다.

위대함은 삶의 목표로 추구하기에 적당한 가치가 아닙니다.

저는 현대에 대단히 중요한 과업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업과 무관하게 사람이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무가치하다고 무시하는 일에 매달려 끝내 의미를 찾아내고야 마는

"꼭 랠리를 완주하세요. 어떤 숨은 선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는 마릴린 맨슨의 앨범 <메커니컬 애니멀스> 의 첫 곡입니다. ...(중략)... ‘코마 화이트‘는 같은 앨범의 마지막 곡입니다.

비극과 재앙은 그처럼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ㅈㅅ이 비인간적이라면,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팽창해 젊은이들을 궁지로 내모는 자본주의의 욕망은 인간적인 것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 _아도르노

문제적 작품은 모두에게 동의받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것인가.

당대 문학은 현재 살아가는 삶의 지형도를 그림으로써 더 나은 삶의 길을 가늠하는 일이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중요한 것은 그 좌표를 통해 방향을 설정하고 길을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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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이미 다 완성되어 더이상 새롭게 변할 것이 없고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완성된 사회‘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완성된 줄로만 알았던 사회도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부조리함과 개선해야 할 것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것들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들을 모색하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회에 대한 저항을 위해 택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ㅈㅅ‘ 이다.

솔직히 ‘ㅈㅅ‘이라는 말의 어감자체가 굉장히 부정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에 독자인 나는 이 페이퍼를 쓰면서도 모음을 제외한 초성만 쓰는 것을 양해바란다.

다만 본문을 읽다보면 이 ‘ㅈㅅ‘을 택하는 그들 나름의 논리가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읽으면서 그들의 행위에는 솔직한 심정으로 동의하는 것이 어렵지만, 독자인 나도 그들의 생각과 의도, 취지 같은 것은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이제 4분의 3정도 읽고 있는데, 뒤에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저자가 독자들에게 진정으로 말하고자하는 바에 대해 좀 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기대해본다.

한 세대가 주도권을 갖게 됐다는 것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냥 그 세대가 중장년층이 되어 각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그 세대가 사회구조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재 사회는 결코 정체된 것이 아니며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단순히 ‘완성‘이라는 개념을 서로 달리 쓰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맨눈으로 보면 다 굳어서 더 움직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불안정하게 흐르고 있는 물질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유리죠. 그렇다고 유리를 액체라고 해야 하나요?

제 생각에 ㅈㅅ선언은 이를테면 헵번스타일이라든가, 로큰롤과 같은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자기주장을 펼치는 표현 방법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기를 의도하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목표나 책임감은 없습니다.

연쇄살인범 중 일부는 자신을 신으로 착각해 자신과 타인의 목숨을 ‘관장‘해야 한다고 여긴다 ...(중략)... 그들은 남이 자신의 목숨에 손대는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다.

연쇄살인범이 어릴 때 보이는 세 가지 징후가 있다고 한다. 야뇨증, 방화, 동물 학대가 그것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방법으로 죽어야만 이게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어."

투쟁의 수단이나 삶을 완결시키는 방법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자신이 맞이하려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올라온 사람의 절반 정도가 그냥 내려간다."

육체를 의지로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형 선고가 죄수들에게 기괴하게 삶에 대한 집착을 부추긴다고 들었다. 우리 모두가 사형선고를 받고 태어나는 셈인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다.

이번에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겠지.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재키는 존 F. 케네디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애칭이다.

소크라테스는 미망인이 된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한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의 미들 네임이다.

하비는 케네디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왈드의 미들 네임이다. 오스왈드는 잭 루비에게 살해당한다.

제리 헤인스는 케네디의 암살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사람이다.

메리 무어맨은 케네디 암살 목격자 중 한 사람이다.

처음부터 재키, 소크라테스, 재프루더, 루비, 하비, 제리, 메리라는 이름을 영어로 구글 검색창에 입력하면 쉽게 답이 나왔을 문제였던 것이다. 위키피디아에는 ‘케네디 암살의 목격자들‘ 이라는 카테고리까지 있으니까.

케네디는 하나의 상징물이며, 오직 상징으로서만 기능하는 존재고, 그 상징은 그의 죽음과 분리되지 않는다.

선박왕 오나시스와 같은 대부호도, 재클린 오나시스와 같은 명사도, 후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신들과 케네디가 붙어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에이브러햄 재프루더나 리 하비 오스왈드, 잭 루비, 제리 헤인스, 메리 무어맨과 같은 보통 사람들은 케네디와의 관계가 아니었더라면 후대 사람들에게 언급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케네디도 찰스 맨슨과 비슷했다. 별 내용도 없는 연설을 하고 강한 개인적 매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매료시켰으며, 불멸성을 얻어 현대의 아이콘이 됐다.

읽는 이의 가슴에 호소하는 산문시를 두고 입증되지 않은 논리라든가 객관적인 데이터가 없다든가 하는 식으로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 선언에 맞서려면 이 선언과 같은 수준에서 직관적이고 가슴에 와닿는 반박 논리를 펼쳐야 한다. 곳곳의 빈틈을 공격해봐야 핵심을 놓친 트집 잡기처럼 보일 뿐인데, 그게 여러 언론사의 논설위원들이 저지르는 오류였다.

귀신은 함부로 마음을 열지 않는 수줍음 많은 처녀였으며, 현실과 타협할 줄 모르는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다. 처녀귀신은 꿈을 간직한 순수한 영혼이었지만, 죽은 뒤에야 그 꿈을 이룬 소망의 존재, 비운의 주인공이다.

죽음 그 자체와 아무도 자신의 뒤를 따르지 않아 자신의 죽음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리는 상황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두려운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부정해오던 절대자에게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의연하게 구는 것이 가장 자발적인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

‘제자들‘을 자기와 같은 결론으로 유도해 다짐을 받고, 의지를 북돋워주고 흔들리지 않게 하는 데에는 엄청난 감정적 에너지가 필요했다.

이미 결혼을 결심할 때 세연과의 약속은 저버린 거야. 세연과 한 약속만 지켜야 하고 예식장에서 한 약속은 안 지켜도 되나?

ㅈㅅ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좋은 음악이나 그림, 음식을 즐기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본능적인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만드는 기술을 갈고 닦는 데에는 왜 우리가 그걸 해야 하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애써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 그러니 그런 일을 하면서 보내는 삶에도 가치는 있는 거야.

‘인정에 대한 욕구‘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패배나 사회변혁이 없어도 적절한 수준에서 채워질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앞의 세대라고 해서 그 사람 중 어느 누구 한 명이 자기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것은 아니잖아. 그네들이 가진 자부심도 하나하나 쪼개놓고 보면 나도 가방 하나 들고 해외출장 나가봤다, 밤새워 일해봤다, 거리에서 돌 던져봤다, 그런 일들 아닌가.

ㅈㅅ선언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ㅈㅅ선언은 내가 야망이 없는 시시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ㅈㅅ선언을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야망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얘기에는 더더구나 찬성할 수 없다. 내가 ㅈㅅ선언에 반대하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다.

ㅈㅅ선언은 잘못됐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적절한 반론을 찾지 못하는 사이에 그 선언은 역병처럼 번지고 있었고, 감염자 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더더욱 야망이 없는 시시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막고 싶었다.

‘야심이 너무 큰 나머지 자기 자신이 그 야심의 희생물이 되어버렸다‘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고,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누군가 어른스럽게 삶을 사는 법을 세연에게 보여줬어야 했다. 불행히도 우리 주위에는, 아니 한국 사회 전체에 그렇게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7급 공무원으로서 나는 재미없고 불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이런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고 해서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주거나 세상을 바꿀 업적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ㅈㅅ선언을 허황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 선언을 제대로 반박하려면 반대로 멋있게 사는 법을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지금의 생활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음은 차분한데 심장은 왜이리 뛰는 걸까. 도망치려면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어.

나는 왜 세연이 물을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궁금했다. 문학작품 속에서 물은 생명과 재생의 이미지가 아니던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하기라도 했나?

"그 계획은 잘못됐어.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 우습게 여기는 생각이 정말 옳은 거라고 믿어?"
"어차피 다들 시시한 인생이잖아."

"내가 연락하지 않았다고 해서 죽어도 괜찮은 건 아니잖아."

언니는 유리 같은 사람이었어. 날카롭지만 깨지기도 쉬웠지.

뭔가 함정이 있음을 직감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건 일흔 살이 넘어서였어. 그런데 넬슨 만델라가 예순 살 때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 상황은 그냥 절망스럽기만 했어.

정말 위대한 생각은 말이지,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한테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어. 그래도 위대한 정신이라면 그 고독을 견뎌내지.

지금 세상은 너희들이 결론지은 것만큼 결코 완벽한 게 아냐.

나도 따라 뛰어들었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이것은 내가 기다려온 죽음의 방식이다. 선로에 뛰어든 어린아이를 구하려다 지하철에 치여 죽는 것을 내가 얼마나 바랐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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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전직 절대자는 아카데미 펫 관리자 08 전직 절대자는 아카데미 펫 관리자 8
말랑부들 / ARC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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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생을 물 위에 떠다니며 흘러가는 낙엽에 빗대어 표현한 장면이었다. 본문에선 이것을 제3자의 시선과 낙엽 자체의 시선 이렇게 2가지로 살펴보는데, 이를 통해 한걸음 떨어져서 넓은 시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스스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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