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구하는 거요. 그건 아낀다는 뜻이래요."
"바다에 빠지면 누구를 가장 먼저 구할거냐는 질문이 나왔어요. 그게 소중한 사람의 순위를 매길 때 사용되던데... 그런데 참 이상한 비유예요. 왜 꼭 절망의 상황에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요?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누구에게 먼저 줄 거냐는 비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좋아하는 걸 나누는 건 쉽게 할 수 있잖아. 근데 절박한 상황에서 구할 수 있는 건 특별한 사람이 아닌 이상 잘 못 해."
그려놓은 모델을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했고 3D로 바꿔보기도 하며 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작지만 큰 혁명을 상상했다.
연재는 무언가에 열중할 때 빛나는 인간이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빛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투데이가 뛸 때와 같아요, 지금." ...(중략)... "행복해하고 있어요. 투데이가 뛸 때처럼 당신도요."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살아 있다는 건 호흡을 한다는 건데, 호흡은 진동으로 느낄 수 있어요. 그 진동이 큰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행복이라는 건 결국 자신이 느끼지 못하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단어 아닌가.
"저는 호흡을 못 하지만 간접적으로 느껴요. 옆에 있는 당신이 행복하면 저도 행복해져요. 저를 행복하게 하고 싶으시다면 당신이 행복해지면 돼요. 괜찮지 않나요?"
"옆 사람이 불행한 건?" "그건 못 느껴요." "왜?" "제가 느끼려고 노력하지 않으니까요."
"내가 외면한다고 외면할 수 있는 게 아니던데."
"가족들의 불행을 마주본다는 건 내가 외면했던 내 불행을 마주 보는 거랑 같거든."
콜리에게는 지난 일인 것처럼 말했지만 아직도 연재는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이 흐름을 끊고 불행을 대면할 수 있는지 방법을 몰랐다.
"밥 먹으면 식곤증으로 졸려서 공부할 때 힘들어."
숨이 없는데 어떻게 욕망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늘을 보고 싶다는 콜리의 욕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만큼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
투데이는 달릴 때 행복한 아이다. 태어나서 줄곧 주로를 달리는 것밖에 하지 못한 말은 결국 달림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 동안 마방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관절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주로를 달리는 것이 투데이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몇 주를 마방에만 갇혀 있던 투데이가 며칠 전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서는 것조차 힘들 거라던 복희의 말과 달리 투데이는 기쁨의 울음을 쏟으며 주로를 활보했다. 물론 짧은 시간이었고 그 후에는 고통에 무너졌으나 마방에 있었을 때와 달리 웃고 있었다. 투데이는 웃고 있음이 확실했다. 콜리의 말이 맞았다. 수 만개의 바늘이 찌르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평생을 달려 온 투데이는 달리는 것이 더 행복했다.
주로를 보고 달리지 않는 연습을 해야 했다. 오로지 경기에 출전할 수 있을 만큼의 속도. 빠르게 달리지 않아도 그 현장에 서 있을 수 있는 속도. 완주를 하더라도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을 수 있는 속도.
"고칠 게 보이지 않으면 고치지 않아도 괜찮아요."
"왜 그런 것들이 있는 건가요?" "너는 모든 것에 꼭 이유가 다 필요해?" ...(중략)... "세상에 모든 것들에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기수가 되기 위해서이고 인간이 저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도 이유가 있어서예요. 무의미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 휴머노이드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기야 몇 세기를 보내며 인간이 차근차근 쌓았던 지식을 한번에 압축해 만든 존재였으니 인간 개개인보다 뛰어난 건 당연했다.
"틀렸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세상에는 원래 이유가 없었어. 인간들이 이유를 가져다 붙인 거지. 그러니까 순서를 따지자면 이유 없이 생겨난 게 먼저야."
"누구라도 틀려. 원래 살아가는 건 틀림의 연속이야."
콜리는 자신을 살아 있다고 표현해준 것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당신도 저를 그냥 데리고 온 건가요? 이유 없이요?" ...(중략)... "응, 그냥 데리고 왔어." "고마워요. 저도 당신이 그냥 좋아요."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낯선 것에 도전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나요? 인간에게는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능이 있나요?"
"내가 너를 친하게 생각하듯이 너도 나를 친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연재는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숱한 시간동안 이해받지 못해 상처 입은 날들이 쌓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 터였다.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과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모두에게 존재했다. 적어도 연재는 그렇게 생각했고, 이해받기를 포기했다.
이해에는 한계가 있고, 횟수가 있고, 마지노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이해해주던 사람은 어느 순간 상대방의 이기심을 지적했다. "그런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몇 번씩 그렇게 가면 우리는 뭐가 돼?"
이해받기를 포기한다는 건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연재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면 저렇구나, 하고 말았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지 싫어해서 그러는지 따위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이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해졌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적어도 지수를 만나기 전까지, 연재의 세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였다. 적막이기도 했다. 지수는 연재에게 강풍으로 불어왔다. 잠잠했던 연재의 돛을 한 방에 날렸다.
"네가 로봇광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로봇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지. 너보다 콜리가 더 인간적이겠다."
"내가 더는 못 온다고 해도 너는 알았어가 아니라 아쉽다고 했었어야지. 아쉬웠으면. 물론 네가 아쉽지 않았으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때..."
아쉽다.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은 지 오래되서 완전히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쉬움에는 약간의 설움이 섞여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아쉽다는 단어를 꺼내면서, 아쉬움에 면역되지 않은 마음이 설움에 정복당하는 듯했다.
인간에게는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내를 알 수 있는 기능이 아예 없다. 다들 있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집을 더 신경써야 하는 사람들은 밖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다고. 그냥 무감각해진대. 상처받지 않으려고 달팽이집으로 들어가는 거랑 똑같다고 그랬어."
세상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된다. 오직 연재가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다면.
"내가 너를 그냥 데리고 왔다고 했잖아. 사실 그거 거짓말이야."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연재가 이것만은 콜리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이 다 망가진 채로 건초더미에 누워서 나한테 하늘이 예뻤다고 말하는 네가 불쌍했어. 그리고 순간 내가 너를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도 들었어. 그대로 내버려두면 너는 사라지겠지만 내가 데리고 오면 사라지지 않으니까. 같잖은 연민이지. 그래도 후회 안 해. 나는 내가 좋아했던 걸 그동안 싫어한다고 믿고 살았는데, 아니더라고. 너 만지면서 알게 됐어. 그리고 지금 내 말에는 대답하지 마. 명령이야."
콜리는 연재의 명령을 지켰지만 처음으로 명령을 어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충동이 몸체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났는지, 콜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속에서 무언가 어긋남을 느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연재를 방해할 수 없어 가만 충동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두렵지 않았다. 떨리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지만.
"언니는 자유롭고 싶은 거지?" "나는 이미 자유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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