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들은 숨길 수 있는 한 숨기는 것이 좋다고.
방에 있으면 시간이 예전보다 빠르게 흐르는 듯했다.
콜리는 이 집에 사는 인간들을 한 명, 한 명 살폈다. 전부 다르고 독특한, 이를테면 파랑노랑 하늘이거나 분홍보라, 초록빨강의 하늘같은 인간들이었다. 천 개 이상의 댠어를 알고 있었다면 이 인간들을 표현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을 텐데.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중략)...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중략)...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를 하나씩 떼어내는 거지. 다 사라질 때까지."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거야."
보경은 콜리에게 사사로운 것까지 내뱉은 자신의 말을 후회했는데, 그때 거부감이 한 꺼풀 벗겨졌다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콜리는 보았다. 자신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냈다며 말을 무르는 보경의 표정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소량의 편안함을 발견했다. 콜리는 이를 통해 한 가지 방법을 습득했다. 대화다. 대화를 많이 할수록 보경에게 깔려 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표피같이 얇게 한 꺼풀씩 벗겨졌다.
콜리는 에너지를 얻는 수단이 외부에 있지만 모든 생명은 에너지 동력원이 몸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면 생명은 쉬어야 한다. 에너지를 회복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잠을 자는 것이나 식사를 하는 것이다.
콜리는 연재가 하는 말들, 제 몸이 될 부분들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유독 빛나는 연재의 눈을 보았다. 사람은 아주 가끔, 스스로 빛을 낸다.
인간이 필요로 하지 않으면 죽었다. 복희가 말했던 이 행성에서의 동물들의 위치였다.
살아가며 맞닥뜨리게 되는 난관은 은혜가 뛰어넘거나 비껴갈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웠다. 아예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가야만 했다. 그렇게 많은 길들이 막혔다.
은혜는 현재까지 무수히 많은 난관에 부딪혀 돌고 돌아 이곳까지 오지 않았는가. 이 길의 끝을 알 수도 없고, 알게 된다고 한들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길로.
정말로 한계가 없다면 한계라는 것조차 모르지 않았을까.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지만 은혜는 사람이 피곤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하지는 않아. 꼭 같을 필요는 없잖아. 그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너도 나도 알아서 잘 살아갈 수 있는데.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도움받지 못하면 살아가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는 게 꼴 보기가 싫다."
"나는 왜 굳이 그렇게 멋있게 살아서 내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이제 와서? 지금까지는 뭘 하고 있었는데?‘
민주는 말들의 관리인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마방에 갇힌 또 다른 말이었다.
사회는 개개인이 촘촘히 연결된 시스템이었고 그 선은 서로의 목을 감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끊어야 할 때 연결된 선을 과감하게 끊어야 하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죽이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민주의 속마음과 달리 입은 자꾸 진실만을 말했다.
"이 세상에서, 아니 이 우주에서 사람만 이렇게 잔인한 거 같아요."
보경이 은혜에게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이 사소한 불편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은혜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너의 정상성은 괜찮은 것이고, 그것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은혜도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보경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가끔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음을 확인시키는 차갑고 날카로운 창살 같다는 것을.
휠체어 덕분에 걷지 못하던 이들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게 아니라, 버스와 지하철, 인도, 계단, 에스컬레이터 때문에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이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면 애초에 생겨나지도,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켰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각자 살아갈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정상의‘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다.
형제는 태어나면서부터 한정적인 사랑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 관계였다. 시간적 여유가 아무리 충분하다고 해도 사랑을 둘로 나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경쟁구도를 만들었다. 형제는 관심을 차지하기 위한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성장했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관계였을 때를 말했다.
은혜는 연재의 무조건적인 순응이 결국 관심받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음을 알았다.
그런 것이라고 설명해도 보경은 제멋대로 받아들일 것이 뻔했다. 그리고 괴로워하겠지. 그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침묵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침묵이 건너고 건너 연재의 족쇄가 될 줄은, 정말이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은혜의 마음 속에서 불신과 희망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만큼 완벽한 해결방법은 없을 것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세상에는 어떤 고통이나 슬픔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누구도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되겠지.
"행복만이 유일하게 과거를 이길 수 있어요."
은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힘없고 겁 많은 어른으로 자라난 것이 창피했다. 네가 그토록 아끼던 그 말이 연골이 닳았다는 이유로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을 보고만 있으므로.
"저는 기억이 아니라 저장을 해요. 저장은 삭제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죠."
"...퇴근했으니 카페인보다는 알코올이 낫지 않을까요."
지금으로서는 대책이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렇다면 복희도 투데이를 위해 조금 더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우리 과 농담 중에 앞으로 수의사가 되려면 기계과를 가야 된다는 말이 있거든요."
"테드 창의 소설 중에 소프트웨어가 반려동물을 대신하는 소설이 있거든요. ...(중략)... 아무튼 소설 속에서 인공지능 객체가 생물의 진화를 모델링한 유전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어요. 발달할 수 있는 거죠. 발전이기도 하고요. 아프지 않고, 죽지 않는 애들이요. 가끔 고장은 나겠지만."
공업용 휴머노이드가 보급되고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사이버 범죄를 전부 잡아냈다 ...(중략)... 조직 하나만으로 그 장기를 똑같이 만들어냈다
"언젠가는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시기가 올까 봐 두려워요." ...(중략)... "물론 빠른 시일 내에는 아니겠지만 아주 먼 미래에요. 짐승이 이 행성을 포기하게 되는 거요. 이곳에서는 더는 살 수 없다고 판단한 동물의 유전자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거예요.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좁은 울타리에 갇혀 착취당하는 삶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유전자가 생존의 수단으로 죽음을 택할지도 모르잖아요."
기술의 발달과 멸망의 속도가 같다. 사람들이 조금만 더, 매일 뉴스에 나오는 새로운 기술과 우리가 맞이할 미래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만, 사라져가고 학대받는 동물들에게 관심을 나눠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우리가 불행한 미래를 상상하기 때문에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믿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는 상상보다 늘 나을 거예요. 예를 들면 동물이 사라지고 인공지능을 키우는 시대가 도래하는 대신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인간이 부재하는 시간 동안 동물을 돌봐주겠죠. 동물의 영양 상태를 매일 체크해서 필요한 영양소도 알려주고요."
"그래도 저는 조금 무서워요. 아프지 않게 동물을 죽일 수 있는 수의사가 될까 봐요."
"방금 전 불행한 상상이 불행한 미래를 피할 수 있게 한다면서요. 그렇다면 선생님은 동물을 살리는 선생님이 되시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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