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
로베르트 미지크 지음, 오공훈 옮김 / 그러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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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이 글의 저자 로버트 미지크는 1989년 ‘아르바이터 차이퉁’을 거쳐 92년부터 97년까지 프로필의 독일 베를린 특파원을 역임한 좌파 언론인입니다.또한, 그 이후에도 팔터, 프라이탁, 융에 벨트, 노이에 도이칠란트,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및 자이트 지에 기사와 칼럼을 기고 하는 등 오스트리아와 독일 양국에서 비판적인 언론인으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흔히 좌파 지식인이라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던 분야인 비디오 블로그에 자신의 정치 비디오쇼인 “FS 미지크”를 운영하고 있기도 한데요. 스스로를 말하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성격이라고 겸손을 담고 있지만,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대로 지식은 단순히 앎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에 그 스스로 몸소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저에게는 미지크와 관련해 얼마전 “고장난 자본주의”에 이어 두번째 서평이기도 한데요. 구글에서는 오스트리아에 출판된 그의 책이 여럿 검색이 되는데, 조만간 그의 다른 책도 국내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Was Linke Denke”로 지난 2015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6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저자인 미지크가 책의 결말에서 이 책의 취지에 대해 “좌파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로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국문으로 번역된 이 책의 제목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는 상당히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 제목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오만하게 느껴질 수 있기도 한데요. 물론 독자들의 눈에 쉽게 들어오게 하려는 의도야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이런 시도는 조금 지양해야 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다시 본래 글로 들와서, 저는 여기에다 “소위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좌파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지금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좀 더 드러난 의도라 여겨집니다. 아주 단순한 구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구체적 담론을 드러내는 매우 진지한 논저라기 보다는 ‘좌파의 생각’ 그리고 이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사고, 인식 등이 꽤 단순하고 설득적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미지크 본인 뿐만 아니라, 번역가의 노력도 이에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래서 번역 역시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세계의 자본주의가 최근 한차례의 심각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경제적 이데올로기와 체제로서 대안이 없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신자유주의와 한몸이 되면서 이 틈에 정치가 들어올 자리는 분명 없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마거렛 대처의 말대로 “대안은 없다”는 식의 맹목주의적 믿음이 과연 모두에게 합당한 결과를 낳았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이 신자유주의적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기 위해 진보주의와 좌파의 지리멸렬이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연유에는 아마도 샹탈 무페의 “좌파가 일반 시민들과 유리되어 있었다”는 해석대로 그 원인의 일부가 설명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 미지크는 “1980년대의 좌파에 경도된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은 스스로 의문을 갖고 수많은 서적을 읽으며, 사고를 확장하고 사색하는 일에 몰두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사회에 해악이 되지는 않았다”고 돌아보고 오히려 이러한 학생들은 분명 소수였지만 주변에서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고 그는 회상합니다. 더불어 “생각과 이론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우리가 계속 깨어 있도록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그즈음 도래한 포스트 모더니즘에 분개하고, 다 같이 치열하게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했으며 그것이 사회와 지배논리에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던 이들의 모습이기도 했다고 돌이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미지크는 우리의 자본주의가 모두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나아갔고 어떤 부분은 후퇴했다고 특히, 좌파는 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오늘날 내면화된 자본주의가 개인의 창의력과 성취욕, 개성에 있어 이바지한 부분은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식대로 냉전 이후의 세계 유일의 무결점 이념이라는 식의 해석은 물론 과도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애초에 우리가 좀 더 건전한 자본주의를 기대한다면, 미지크의 주장대로 “좌파에게도 적당한 표를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겠죠. 그전까지는 많은 좌파는 혁명 담론에 매몰되어 현실적으로 거의 가능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다른 좌파와의 갈등도 심화시켜 왔습니다. 수많은 연결된 시민들과의 연대를 그동안 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들이 존재합니다만 1장에서 표명한 대로 좌파가 여러 사람들과의 연대에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 점은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와 연계해서도 매우 중요한 행동 양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예전처럼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의 의견 교환이 구시대물이라고 하지만, 이미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세계에서 토론하고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온라인상에서의 수많은 사람들과의 연결 만큼이나 오프라인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끊임없는 의구심과 의문을 갖고 많은 지적 탐구를 병행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부속품’이 되지 않는 길임은 명확해 보입니다.

다음, 우리의 비판, 좌파의 비판은 이렇습니다. 저자인 미지크의 말대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반대하기, 흠잡기를 일컫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방식의 해부, 개념에 대한 분석, 전제 근거와 비난에 대한 분석, 숙고와 이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오로지 비판만 있었으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패착이 숨겨져 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에 근거한 이런 비판 인식이 자본주의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선명성을 견지하는 좌파들의 도덕적 측면’이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우월감을 가져다 주웠을 뿐, 좌파 자체가 시민들과 괴리되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우리의 노동을 어떤식으로 규정지어야 할지에 대해 폭넓은 의견 제시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개개인의 개성의 표출이라는 명목으로 과도한 소비 지상주의에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하지 못했던 것은 ‘좌파의 정신’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들 주변에서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만드는 증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시민 개개인들의 삶이 전체적인 체제의 측면에서 ‘품위있는 삶과 마땅한 행복 그리고 도덕적 건전성’을 마땅히 답보해야 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프레카리아트’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당시에 좌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역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지크가 강조하는 대로 푸코가 우리가 얼마나 권력에 취약한지에 대해 예견했던 것은 뭔가 계시로까지 여겨지기도 합니다. 자본주의가 있는 그대로 여러 모순을 안고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체제의 권력과 또한, 그 체제의 권력 마저도 누가 휘두르고 있는지 불명확한 시대에 우리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권력에 대한 사안은 매우 복잡하다”는 그의 평가는 이렇게 정확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권력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는 찾을 수가 없으며, 마땅한 시민의 권력을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트들의 야합에서 빨리 되찾아야만 하는 당위를 이 글 6장과 7장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인간 소외’를 좌파 역시 짐작해 냈지만,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스스로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심각한 인종주의적 오류에 빠져 있었고, 자신들의 역사 이외에는 다른 역사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충격이기까지 했는데요. ‘이 겹겹으로 축적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히려 인간 소외와 식민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화해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봤습니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화해는 이처럼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고 봐야하겠죠.

이처럼, 좌파가 관심을 가지로 지켜봐야 될 사회의 여러 이면은 아직도 많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이 글의 결론에서 “의문을 품으며 우리는 전진한다”는 끝맺음은 다음 세대의 좌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어떠한 믿음이라도 최소한 세번 정도는 의심해야 한다”는 어떤 비범한 개인의 통찰은 앞선 미지크의 논법과도 매우 부합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저자인 미지크의 숨겨진 의도가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그가 왜 좌파일 수 밖에 없는지는 이 글을 통해 약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럴때는 그와 같은 용기가 매우 부럽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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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의 정치학 -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절대숫자
로렌조 피오라몬티 지음, 김현우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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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탈리아 로마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인 로렌조 피오라몬티는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프리토리아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일하고 있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헤르티 커버넌스 스쿨의 연구원이면서 동시에 뉴욕 타임즈 및 가디언 지 등에 칼럼을 기고 하고 있는 정치경제학 계통의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관계로 현지의 지역 경제에 관심이 많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연구 분야 중 하나인 전반적인 GDP 경제학이 세계의 다른 빈곤 국가들에게 어떻게 별다른 소용이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학자적 호기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의 중요한 주제장인 3장, ‘GDP 퇴위를 위한 지구적 모색’에서 GDP와 아프리카 및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GDP 사조에 따른 부작용 사례들과 상대적으로 빈곤국인 부탄과 코스타리카 국민들의 행복 지수 등을 제시하며 실질적으로 이 GDP가 시민의 안녕과 삶의 질을 설명해주는 지표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13년에 “Gross Domestic Problem”이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현재 피오라몬티의 이 책은 절판된 상태인데요. 책의 재간행을 앞두고 있는건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다른 번역본은 아직 판매되는 것으로 보아 꽤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자인 피오라몬티가 본문에 언급한 중요한 문장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시장 메커니즘은 상황에 따른 가격 조정을 통해 희소한 자원을 대체하도록 인도하고 발명가와 기업가들이 다양한 기술적 해법들을 개발하도록 촉진함으로써, 결국 붕괴를 예방하게 할 것이라고 보았다”는 일종의 평가는 꽤 명백한 결론을 갖고 있습니다. 일찍이 멜서스가 낙태와 과감한 인구 계획 및 전쟁 상황을 경제상황에서 이용하자고 주장했던 것과 같이 효율성과 효용 및 경제 시스템하에서의 인간과 사회를 사실상 부속으로 취급한 것은 일련의 경제학 발전과정에서 매우 무분별하게 인용되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애덤 스미스도 자신의 그 유명한 논저가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무조건적인 합리성을 보장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특히 2008년에 일어났던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가 당시에 고도화된 금융 시장을 선도했던 경제 엘리트들이 과연 합리적이었는지는 모든 경제학자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자 역시 GDP의 도덕적인 측면이 전무하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 있고, 성장 일변도의 경제적 논법이 겉으로 보이는 규모의 경제는 키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일면에는 수많은 문제점을 근대 이전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키워 왔다는 것은 모두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짧은 분량의 서론과 1장에서는 어쩌면 냉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GDP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간략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시 계획의 일환으로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마련한 쿠즈네츠의 이 경제 도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가 대공황을 벗어나는데 기여를 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전까지는 전년이나 10년전의 통합적인 경제적 지표가 불분명해 당시 기준으로 내각에서 어떠한 정책을 수립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인정될 만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쿠즈네프의 역할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가 1941년에 “국민소득의 계측은 항상 암묵적인 또는 명시적인 가치판단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과정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인정했습니다. 이 부분이 그가 갖고 있던 GDP에 대한 부정이라고 볼 필요는 없으나, 한가지 명확해 보이는 것은 2차대전 이후 권력층과 엘리트들에 의해 자신들이 주도한 경제 정책의 당위성을 보장해주는 지표로 이 GDP를 이용해 왔으며, 소위 양적인 측면의 외형적 성장이 그 내실이 어떠하던 간에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 이용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르티아 센과 더불어 GDP에 비판적인 세르주 라투슈 역시 “이 GDP에 대한 믿음”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저자인 피오라몬티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경제가 2퍼센트 또는 3퍼센트 성장할 때 마다, 우리의 삶의 질 역시 같은 정도로 향상되는가?”라고 말이죠. 여기서 GDP 수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권력의 지배의 도구로 널리 쓰였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정부가 민주주의적 가치를 잘 떠받든다 하더라도 경제에 있어서는 경제 자체와 정치간에는 범접할 수 없는 경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행은 근대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이것이 시민의 삶 깊숙이 들어오자 마자 시장을 마땅히 견제해야 하는 정치의 역할이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이를테면 경제적 합리주의에 입각해 이윤을 얻는 활동 모두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유일주의 말이죠. 물론 자유 경제 시스템하에서 기업과 개인이 경제 활동을 하면서 이윤을 얻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만, 수많은 개인들의 체제를 뒤흔들지 않는 이윤 추구는 마땅히 지켜볼 만하나,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과 거의 반독적점 지위를 악용하는 기업들의 매우 쥐어짜내는 이윤 추구와 영리활동 그리고 반면에 사회적 책무를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 이러한 자본과 경제의 고삐풀린 이행은 아마도 현재의 많은 문제를 촉발시킨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게임을 지배하는 것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라는 것”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며, “재화와 서비스에 지불되는 가격들이 경쟁 시장이라는 틀 속에서 반드시 결정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앞선 서술한 측면에 들어맞는 이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GDP로 해석되는 경제 담론에서 “사람의 마모에 대한 경제적 적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과 “한 사람의 노동가치를 과연 경제적으로 측정할 수 있겠는가”와 “GDP에서는 소위 ‘역량의 고갈’이라는 지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GDP를 설명하는 수많은 기업들의 잘못된 관행등과 로비 움직임과 같은 것들을 여기에서 더 서술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현재 지속적으로 시민의 삶을 측정할 수 있는 세계 공통적인 지표를 특히,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다음 단계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에서는 총수입계정체계 TISA와 물질적 삶의 질 지수 PQLI 및 국제적인 인간 고통지수 HSI 등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티글리츠와 아마르티아 센의 공동 작업 등도 꽤 개선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여기에서 문제는 이러한 연구 작업과 개선 움직임이 어떤 소수의 단체나 초도 단계에서 시도되는 것보다 현재 세계 주류 경제학에 있는 학자들이 “그 시장의 합리성” 문제를 다시 저울위에 올려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오바마 행정부 때 세계은행 총재로 추대받은 김용이 성장 지상주의자들과 여러 언론에서 비판 받았던 것을 고려해봤을 때, 아직도 주류와 다수 시민들의 요구와 해석에는 그 견해차가 상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보통의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해석수단과 도표와 숫자들로 증명에만 힘썼던 나머지 현실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다고 비판한 것은 귀담아 들을만합니다. 더욱이 이들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 대한 비전문가들의 비판을 매우 억울해 여겨왔던 것을 비추어 봤을 때, 과연 이들에게 다수의 이익이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해 다소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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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자유주의 양심 현대의 고전 12
마이클 하워드 지음, 안두환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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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의해 “영국의 위대한 역사가”라는 평가를 받은 전쟁사가 마이클 하워드는 옥스포드 대학의 치첼리 전쟁사 교수를 역임하고 미국 예일대의 러벳 해군 역사학 교수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런던 킹스 칼리지의 전쟁 연구 담당 교수로서도 명성을 떨치기도 했는데요. 마찬가지로 영국 내에서 양차대전에 대한 연구로도 명성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잉글랜드 버크셔에 소재한 웰링턴 대학을 거쳐 옥스포드에서 수학한 그는 앞선 대학 교수와 연구자의 이력을 통해 유럽 전체 학계에서도 전쟁사 분야에 혁혁한 성과를 올린 학자였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그는 2019년 11월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요. 97세에 이르렀던 나이를 생각하면 노환으로 숨을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렇게 노련한 학자가 세상을 등진 것은 어찌됐든 매우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이 책은 지난 1977년 초도 출판되어, 최근인 2008년에 일종의 개정판으로 신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원제는 “War and the Liberal Conscience”로 국내에는 2018년 10월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특히 “마이클 하워드의 전쟁과 국제정치 3부작”이라는 시리즈로 그 가운데 ‘평화의 발명’은 절판인 상태지만, 나머지 ‘유럽사 속의 전쟁’과 이 책은 현재 시중에서 구하실 수 있습니다.

처음 책장을 넘기면서, 앞쪽에 문고판 서문이 있길래 처음에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색인을 포함해 약 478페이지의 분량이 어떻게 문고판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었는데요. 결국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주를 포함한 원래의 본문은 203페이지고, (아마도) 옮긴이가 특별히 수록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인명색인이 250여페이지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위키백과에서 찾아 보기 힘든 고트프리트 헤르더와 같은 인물의 상세 정보가 있어 일종의 보론으로 충분히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봐도 일견 무방해 보이기도 했는데요. 다만, 이 ‘전쟁과 자유주의 양심’이 먼저인지, 아니면 그에 따른 ‘인물 색인’이 먼저인지는 분량상 불확실해 보이긴 합니다만 보는 분들에 따라서 출판사의 이런 분량 추가는 마냥 즐거워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추가된 분량 때문에 그만큼 책가격이 올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와서, 마이클 하워드가 이 책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주제는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던 15세기 이후의 자유주의가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치에서 어떠한 결과를 낳았고, 이들이 혐오해 마지 않았던 군비경쟁과 세력 균형보다 못한 파급을 초래한 것을 꽤 객관적으로 비평”하고자 하는 목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앞선 결과물은 칼 포퍼의 몇줄 통찰과도 상당히 일치하는데요. 천국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결과적으로는 사회의 지옥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이죠. 더불어, 여기에는 칼 포퍼 역시 자유주의를 신봉한 학자라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점인데요. 뭐 거창하게 역사의 장난이라는 것으로 뭉뚱그려 쓸 필요는 아마 없을겁니다. 이어서 전제 권력에 의한 개인의 자유 증대라는 가치의 15세기 자유주의 태동은 유럽의 일반 전제 군주들이 상업적인 목적이나 자신의 위신을 위해 혹은 복잡한 혼맥에 따른 요인 등으로 당시 국민들의 의사와는 다르게 전쟁에 뛰어들게 됨으로써, 이러한 전쟁을 방지하고 어떻게 하면 평화를 구축할 수 있겠느냐에 대한 기본성찰과 그에 따른 평화의 일반적인 이론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1장과 2장에 등장하는 에라스무스와 벤담, 밀, 루소 등의 발자취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열렬한 계몽주의자였던 몽테스키외 조차도 “군주정의 정신은 전쟁과 지배의 확대에 있다”는 평가 또한 동일한 범주안에 있는 해석일겁니다. 이러한 이념의 발전 가운데 임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영구 평화론’에서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시민이 되는 국제 사회로의 발돋움으로 공화주의적 헌정 체제에서의 책임 있는 정부가 주가 되는 정체”가 평화 상태의 구축에 필요한 요소로 꼽은 바가 있습니다. 물론 저자인 마이클 하워드 역시 사실상 민주주의와 이를 따르는 국가들이 더 많아져야 국제정치가 평화로울 수 있다고 동의하고 있는데요. 다만, 5장 파시즘의 도래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1943년 당시 히틀러에게 체코의 할양을 승인했던 “뮌헨 회담”을 지지하는 소위 자유주의적 양심이 히틀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었는지는 매우 명백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구별되어야 할 점은 정치를 주도하는 영국의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이때의 평화를 반겨했으나, 다수의 시민들은 이에 대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점은 뭔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국제주의적 이상주의에 탐닉했던 우드로 윌슨과 그의 추종자들이 고안한 국제 연맹 체제가 1935년 이탈리아가 같은 국제 연맹 회원국인 에티오피아에 대해 야욕을 드러냈을 때, 영국이 주도한 협의체가 이탈리아에 에티오피아 할양을 승인한 이 아비시니아 위기와 그 이전인 1933년 동유럽 소수 민족의 자치와 민족주의를 무시한 4국 회담이 어떠한 결론에 이르렀는지 역시 자명합니다. “집단 안보의 유일한 보장책은 여론의 힘”이라는 벤담의 견해가 얼마나 순진무구했는지는 “일본의 만주 침공과 독일에서 히틀러의 등극은 아비시니아 위기 이전부터 이미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 암시했다”는 저자의 판단에도 예측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정권이 군사력을 증대하고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을 일종의 비도덕적인 문제로 폄하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에서 증대되었던 민족주의적 위기는 아직은 세계가 “평화보다는 자유가 더 필요하다”는 뼈아픈 현실을 드러내었다고 여겨집니다. 즉, 권력의 주체라고 불리거나 이를 뒷받침하는 자유주의적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세력 균형 자체를 도덕적으로 혐오했으면서도 외형적으로는 그것을 답습해 나갔다는 점은 이론과 현실은 엄청난 격차를 보인다는 증명이겠죠. 개인의 자유라는 기본적인 개념과 이를 확대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종의 보기 힘들었던 개혁적 상황이 그러한 이상적인 상태를 고려하더라도 무조건 평화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는 점도 역사의 비참함인지 아니면 그 자유주의 양심의 순진함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종전 이후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승전국들이 독일을 국가 상태로 나둬야 하냐는 불확실한 두려움에도 독일을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개조시킨다는 의지는 꽤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국제정치학적 지점에서 독일을 영국과 프랑스의 방파제로 만든다는 핵심이 들어가 있었지만, 결국엔 제국주의적 대결에 지나지 않았다는 2차대전의 비판에도 스탈린의 소련을 제외한 승전국은 자유 민주주의가 독일에 필요하다는 공감대에 긍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고 있듯이 시민이 주가 되는 공화주의적 정부들이 평화 구축에 도움이 된다는 이념에 동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논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선 3장의 1차대전과 관련해서 저자가 일부 역사가들이 오도하고 있는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대결 내지는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대결에서 비롯되었다는 오해를 비판하고 “적어도 유럽 대륙에서는 평화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전쟁을 더 치러야만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는 해석은 꽤 의미심장하기도 합니다. 1차대전을 뭔가 이념대전으로 매몰시키지 않고 국가간의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자유주의적 열정과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은 1차대전 전후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과거 E. H. 카가 1차대전 즈음에 흘렀던 전쟁에 대한 낭만주의적 태도와 동경은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가 역사를 통해 대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시기의 각 국가들간의 광적인 군비 경쟁이 최소한의 갈등의 조절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연유가 아닌가 짐작해 보기도 하는데요. 따라서, 국력 확장의 시기에서 서로간의 이해하는 군축의 필요성과 갈등을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동등한 국가들간의 협력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지난 1차대전의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계몽주의적 담론의 확대와 시민 사회의 자유를 함양시켰던 자유주의 자체의 이념은 충분히 근대의 맥락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무분별한 이상주의에 근거해 윌슨의 국제적 협력주의를 허무하게 끝내게 되었고, 특히 당시에 부상하고 있던 동유럽과 유럽 각지의 민족주의를 백안시한 점은 자유주의의 패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민족주의가 자유주의와 함께 갈 수 있겠는가에 대한 꽤 면밀한 논의가 있어야만 했으나, 이성이 없는 민족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민족주의를 확대하고 강화하는 것이 결국 유럽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크나큰 실책입니다. 물론 1차대전 이후 급격하게 붕괴한 세계 경제 상황에도 대전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혐오스런 전체주의를 잉태했던 것은 자유주의만의 문제는 아니겠으나, 한편으로는 얼마나 순진함에 가득차 있었는지는 이것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개인 뿐만 아니라 민족의 생존 문제는 그것의 영향력이 지대할 수 밖에 없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고 과연 ‘국가 이성’이라는 것이 실존할 것인가에 대해 뭔가 깊은 고찰이 더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보다 이성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객관적인 근대와 자유주의를 바라보고자 하는 한 역사학자의 이 글은 단순한 전쟁사가의 논법이라기 보다는 꽤 노련한 철학자의 연구물로 느껴질 정도로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곧 마이클 하워드의 번역된 다른 글도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만큼 시대의 이성과 시민들의 합리성 그리고 자유에 대한 전반적인 양심에 대해 역사적 기록으로 탐구해 볼 수 있는 훌륭한 글이 아니었나 판단해봅니다.




-156페이지의 헨리 모겐도는 헨리 모겐소로 수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173페이지의 뮌헨 협정과 관련된 문장에서 뮌헨 옆에 ‘협정’의 표기가 없었습니다. 양장본으로 만든 이 책에 이런 자잘한 편집 오류를 수정하지 않은 것은 매번 하는 말이지만 실망스런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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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홀로코스트 - 개정판
로버트 S. 위스트리치 지음, 송충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1945년 카자흐스탄에서 폴란드 유대인 출신의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을 지닌 부모에게서 태어난 로버트 솔로먼 위스트리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소재한 헤브루 대학의 유럽 및 유대인 역사를 가르치는 학자였는데요. 지난 2015년 5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유대인과 반유대주의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학자로 이름을 올리며, 이러한 연구에 온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영국 켐브리지와 런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뒤이어 하버드, 브랜다이스, 옥스포드 등의 교환 교수를 거치면서 그는 반유대주의 연구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이 책 역시 그의 학자적 양심과 연구의 한가운데 있는 논저로 저로서는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매우 차분하고 진지한 어조로 제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 그리고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꽤 존경받을 만하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이 책은 원제, “Hitler and the Holocaust”로 2004년 출간되었는데, 국내에도 마찬가지로 2004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제가 구한 판본은 개정판으로 지난 2011년 출간된 것입니다.

흔히 일반인들 가운데 몇몇은 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자행된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관련해 과연 히틀러가 여러가지 정신적인 문제로 그야말로 ‘미친 짓’을 벌인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공식적으로 추계된 600만이라는 죄없는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짓 자체가 정상적인 행동의 산물이라고 이해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많은 유럽의 전문가들에 의해 아돌프 히틀러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에 초점이 맞춰지기도 했으나, 역시 제 예상대로 그는 매우 멀쩡한 인간이었습니다. 물론 저 멀쩡하다는 범주를 어느 정도까지 국한해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의 의견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어찌됐든 한 국가의 전쟁 수행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던 권력가가 아예 맛이 갔다는 식으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일일겁니다. 히틀러 특유의 과대망상과 강박증이 저자인 위스트리치에 의해 소개되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전반적인 정신 이상의 근거로 쓰여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선 이 책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몇가지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하는데요. 먼저 14세기 이후부터 유럽에는 아주 뿌리깊은 ‘반유대주의적 풍토’가 만연했으며, 뒤에 등장하는 히틀러는 이를 아주 교묘하게 이용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 당시 독일 국적을 갖고 있던 많은 유대인들이 ‘독일 제국’을 위해 참전했으며, 독일 각지에 퍼져 살고 있던 유대인 공동체가 스스로도 독일사회에 잘 적응했고 18세기를 거치며 불안했던 반유대주의적 기조에 거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봤다는 점입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말하면, 독일에 국한된 유대인들이 나름 독일 사회에 적응을 잘했다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런 1차 대전의 참전 결과를 낳았던 아돌프 히틀러는 힌덴부르크를 내세워 친위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내심을 드러내게 됩니다. 바로 “선택된 민족은 둘일 수는 없는 것”이라는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 말입니다. 히틀러는 내부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해결을 준비하는 1941년 전까지는 자신의 이러한 반유대주의적 증오와 적개심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최종적으로는 스스로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유대인 절멸’을 승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Endlosung, 그리고 절멸 Vernichtung”이라는 단어로 함축할 수 있을텐데요. 즉, 이 글의 4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와 같이 히틀러는 연합군을 유대인의 사주를 받은 세력으로 규정하고 연합국이 독일에 퍼부은 공습에 비하면 유대인들을 절멸 시킨것은 매우 인간적인 것이었고, 이는 “아리안족”에 대한 “유대인의 침략행위”로 받아들인 점은 뭔가 기괴하고 광기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위스트리치가 밝히는 이러한 히틀러의 광기에는 근간의 소련에서 일어났던 볼셰비즘 혁명에는 유대인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세계의 암덩어리이자 전염병인 이 볼셰비즘을 분쇄하는 지상 최후의 명령이 나치 독일에 주어졌다는 일종의 단일대오가 있습니다. 히틀러의 제3제국이 최종적으로 소련을 분쇄하는 것에 대해 어떤 사명감을 갖고 있었는지는 불명확하나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나치즘이 공산주의의 박멸을 목표로 정치적 테제를 표명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동주의적 나치즘이 곧이곧대로 볼셰비즘의 대항마로 빗대는 것은 무리가 있으나, 독일 내부에서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로 시작되는 침략 전쟁의 구실이 되었으니 실로 아이러니한 부분입니다. 선을 구축한 악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전부 거악이라고 찌르는 꼴이니 역시 인지부조화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런 볼셰비즘과 유대인의 한몸통이라는 곡해를 바탕으로 히틀러와 괴링, 하이드리히 등이 매우 철저하고 잔인하게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것은 어떠한 철학적 기준을 들이댄다 하더라도 보통 인간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장에 보여지는 로마 카톨릭의 나치에 의한 유대인 절멸에 대한 애매한 태도, 그리고 “피를 부른 나치의 반유대주의가 저지른 이 처참한 광경을 알고서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거의 모든 개신교 및 가톨릭 성직자가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는 서술은 그 시대의 종교적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시대적으로 매우 불행한 일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권력 고위층들이 모인 ‘반제 회의’에서 히틀러가 전면적인 유대인 절멸 계획을 창안하고 이를 수행하면서 폴란드, 체코, 헝가리,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이탈리아 등 거의 유럽 전체가 유대인 절멸에 부역한 역사는 독일의 제3제국을 악의 집합이라고 통칭하더라도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 나치에 투항한 것처럼 인간의 권력적 속성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한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근대가 어느 인종의 말살로 귀결되는 것으로 세기의 종말을 고한 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산업 사회에서 비롯된 어지러운 사회적 신분의 유동성을 재규정하려는 필사의 노력인 것과 같은 철학적 담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개인적으로 어려운 부분이나, 이 홀로코스트가 우리의 근대를 아예 뒤엎어 버린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심지어 이런 나치에 자발적으로 부역한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점도 이것이 단순하게 총과 칼을 들고 위협하는 중대한 악의 총체에 일개 인간이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모든 이들의 권력으로부터 비롯된 이 전체주의가 어떻게 일개 ‘비정상적인 권력가’에 의해 이처럼 비인간성과 종말을 함께 표출할 수 있는지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혹은 민족적으로 오래된 편견과 통념에 근거한 신념이 어떤식으로 인류를 절망에 빠트렸는지 결국 그것의 모든 것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후에 1964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붙잡힌 아이히만이 “오로지 기술적인 부분에서 어떻게 하면 신속하고 쉽게 유대인들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에 몰입했다는 것에서 우리는 수백만의 인명을 말살한 이들의 진정한 배후가 무엇이었느냐에 대해 진정 탐구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와 수많은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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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중의 탄생 - 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
군터 게바우어.스벤 뤼커 지음, 염정용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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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공저자 중 한명인 군터 제바우어는 독일 팀멘도르퍼 슈트란트 출신으로 2012년 은퇴한 이후, 베를린 자유대학의 명예 교수로 자리하고 있는데요. 그는 베를린 공과대학과 카를르수에 공과 대학을 거쳤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 국제 스포츠 철학 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주요한 관심사는 사회철학과 스포츠철학, 언어 이론, 인간한 등인데요. 특히 프랑스의 파리, 스트라스부르 및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초청 교수로도 활동했습니다. 다른 공저자인 스벤 뤼커는 2010년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저작자이자 철학 강사로 일하고 있는데요. 특히 뤼커의 박사 논문은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인문학 최고 논문에 수여하는 에른스트 로이터 상의 영예를 누린 바가 있습니다. 그는 철학과 역사학, 근대 이론 및 대중이론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저술 활동에 매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Vom Sog Der Massen Und Der Neuen MAcht Der Einzelnen” 이라는 원제로 2019년 출간되어, 국내에는 21세기북스를 통해 올해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논의에 앞서 여기에 논증되고 있는 3장, ‘이중 대중’과 4장, ‘포퓰리즘’ 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위의 4장은 지난 2017년에 번역 출판된 얀 베르너 뮐러의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의 훌륭한 보론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특히 뮐러의 논저가 분석하는 “포퓰리스트들에게 어떤 이들이 자신들이 강조하는 ‘국민’에 속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들 포퓰리스트들이 구분한 ‘적과 아’의 개념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며, 자신들에 대한 성찰은 전혀 없이 피아 구분으로 사실상 민주주의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얻은 한가지의 통찰은 포퓰리즘 자체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이 다른 시민과 시민들 사이에 대화와 토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측면에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은 실로 중요한 것이어서 공저자들의 학문적 노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기존의 대중에 대한 연구자들이었던 귀스타브 르 봉과 가브리엘 타르트 그리고 오르테 이 가세트 등이 피력했던 이론들이 인식상 지금의 시대와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공저자들이 현재의 경향과 ‘이러한 대중들’이 어떤 형태와 영향력의 표출로 이어지는지 여러 사례들로 살펴보고, 문화와 종교까지 갈음하는 꽤 방대한 결과물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단순히 자유주의 담론에서 해석되었던 “유일성을 가진 개인”이라는 관념이 대중에 참여하는 개인과 인간들에 대한 사실상의 두려움으로 르 봉과 타르드의 대중론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정치사회적으로 경우에 따라서 “국민”의 개념이 확실하게 실체화되지 못한 경우도 분명 존재하는 것처럼 각 개인들의 자유와 권리라는 개념을 일반적인 지식인들이나 상류층이 이를 인정하면서도 “과연 무리를 이룬 개인들, 즉 이 대중이 얼마나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요구할 것인가?”에 대한 앞선 이들의 두려움이 카를 슈미트와 같은 현상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도 슈미트는 인용되기도 하는데요. 제가 보기에 정치적 상황에서 적아 구분을 명확히 하는 슈미트의 논법은 그것의 본질을 떠나 역설적이게도 우파들에 의해 변질되어 자신들의 의견과 다른 계층의 시민들을 역사속에서 무참히 적으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계몽주의와 함께 발전한 우리의 공화주의가 일견 자유라는 명목으로 슈미트에 의해 부정된 것이며, 이러한 명맥이 우파 포퓰리즘에 이어져 현재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즉, 현재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의 유럽 우익 포퓰리즘이 미국의 티파티 운동의 구호처럼 “좌파를 격멸하자”는 식으로 애용되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도널드 트럼프가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자신을 지지하는 지지층에게 “총을 들고 나서서 싸워라”라는 식으로 (물론 이들이 총을 들고 나서지는 않았지만) 일개 선동 정치가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근간을 해치는지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2장에서 르 봉의 입을 빌어 말하는 정신적 감염에 대해 “대중의 구성원들이 과연 ‘현대의 미개인’으로 변하는 것”에 완전히 얼토당토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는 어렵습니다. 뒤이어 3장에서 저자가 인용하는 2017년에 함부르크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 암약한 무정부주의자들인 ‘검은 복면단’의 사례는 이처럼 꽤 위험한 사례이기도 한데요. 마누엘 카스텔은 일반 시민들이 행동에 나설 때, 맨처음 주저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공권력’의 존재를 먼저 들었습니다. 확실히 자신들의 정치를 위해 나서야만 하는 상황에서 잔잔한 호수를 파국에 이르게 하는 거대한 돌덩어리처럼 단순한 공권력과의 대결에서 유혈이 낭자하는 폭력시위로 언제든 상황이 위태롭게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국가 공권력과의 대치는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헌법을 수호할 의무를 가진 지도자가 헌법을 수호하지 않고 오히려 국민을 억압하는 경우도 수도 없이 많았기에, 대중이 오로지 혁명을 바랄뿐이다라는 논법은 여건상 이치에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치 대중은 아무리 다양화된다 하더라도 대표자들에게 파괴의 잠재력이 있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이 대표자들 뿐만 아니라, 대중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또다른 ‘선량한’ 대중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양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는 해석은 대중의 정치 활동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갖게 하는 장치로서도 기능합니다. 저는 일반 대중정치론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 엘리트와 기득권층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쌓아올린 각자의 기반을 필히 체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강하게 기존의 시스템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매시대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지옥일지 모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더할 나위없이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나딘 고디머의 한줄 문장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실 이 쯤에서 중요한 점은 이 대중과 대중정치를 파극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부정만 할 것이냐 아니면 “모두가 공감하는 단호한 결의”아래 정치를 개선하는데 쓰이게 할 것인가의 논법에는 오로지 우리가 그 심판자로 서있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어, 3장과 4장은 대중에 대한 분석의 인식 강화판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카를 슈미트의 적아 개념이 완벽히 들어맞는 ‘이중 대중’은 자신들 이외의 다른 대척점을 만들어 강력한 대결을 추구하면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그 지점에서 찾는 것으로 오로지 자신들은 옳고 저들은 틀리다의 논법과 아예 일치하기도 합니다. 반대편의 사람들을 자신들의 존재 이유로 삼는 논법은 매우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그리했었죠. 앞선 2장에서 “대중 유형의 개인들이 더이상 열성적으로 지도자에게 매달리지 않는다”는 현재의 모습이 물론 그러한 점에 대해 반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뒤에 4장에서 이 이중 대중이 포퓰리즘과 어떻게 결탁하고 있는지 꽤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적이 비로소 나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 “포퓰리즘에서 말하는 우리들과 그 적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에 대해 긍정하는 말은 하지 않고, 남들에 대해 부정하는 말을 한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이 ‘거짓 언론’에 둘러싸여 있다고 판단하며, 박해받고, 속고, 경멸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등의 일례들과 함께 이중 대중과 포퓰리즘과의 상관 관계가 4장에서 규명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이 본래의 것과 따라서 ‘진정한 국민’을 확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시민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구분하고, 자신들의 편에 속하지 않는 시민들을 적으로 규정,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의 악으로 단죄하는 것입니다. 뭔가 로마 카톨릭 시대의 속세 규정법 같습니다만, 이러한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선동 정치인들이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드러나고 있어 대중의 행동 양식과 이해에 관한 지금보다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한나 아렌트는 ‘대중의 정치적 출현 공간’에 대해 위르겐 하버마스와 비슷한 입장의 의견을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옹호하는 민주주의에서의 공동체에 이르기 위해선 대중들의 무모하고 왜곡된 쾌락을 불식시켜 ‘폐쇄적 대중’에 이르지 않기를 경계해야만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꽤 이상주의적 관점입니다만 다수 대중의 정보를 팔면서도 현실 정치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거대 SNS 기업의 행태와 자신이 능동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상당히 시스템에 종속된 대중의 출현은 급히 우려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과거에는 존 듀이의 논법식으로 교육과 자기 절제, 관심사에 대한 꾸준한 의견 제기 등이 현실 정치에 건전한 담론이 될 수 있었으나, 현대의 개인들과 대중은 너무나 복잡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인식은 이 책의 7장과 8장에서 좀 더 자세히 논의되어 있습니다만 단순히 외부로 돌출되어 어리석은 소속감에 몸을 맡겨 다시 자유로운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대중은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건전한 공동체주의가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로 제 역할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며, 앞으로 대중들이 과연 어떠한 역사의 족적을 남기게 될지는 전부 우리 스스로에게 달린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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