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 히틀러와 독일·미국의 자본가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질문의 책 27
자크 파월 지음, 박영록 옮김 / 오월의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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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출신의 역사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자크 R. 파월(혹은 자크 R. 포웰스)은 벨기에 겐트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에서도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오랫동안 파시즘 연구에 공을 들여왔고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학계에서 대표적인 수정주의적 역사학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가 집필한 대부분의 역사 주저가 양차대전을 다루고 있고, 그 가운데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 연구가 들어가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지난 2017년에 번역 출간된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에 이어 두번째 서평이기도 한데요. 개인적으로 그의 이 책은 앞선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와 제임스 Q. 위트먼의 ‘히틀러의 모델 미국’에 대한 훌륭한 보론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더욱이 2차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야욕으로 이해되는 기존의 대전사에 대해 상당히 반하는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기에 독자들의 면밀한 배경 지식이 요구되는 글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7년, “Big Business and Hitler”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먼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보다 간단히 자크 파월의 이 글을 소개해 드리자면, 지난 세계대공황의 혼란한 시기 이후, 독일과 미국의 거대 경제인들이 어떻게 히틀러의 파시즘을 지지하고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가에 대한 역사적 서술과 이 기업가들이 왜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파시즘과 같은 권위주의적 체제에 기울어갔는지에 대한 아주 가감없고 여실히 비판적인 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일독하는 내내, 전세계에 거대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이 사회 권력층이라고 불리우는 거대 기업가들이 어떤식으로 민주주의를 불신했고, 반대로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를 자신들의 최대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체제로 여겼는지에 대해 저자가 논하는 내내 실로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실체를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 기업인들은 당시 볼셰비즘을 유대인들과 연계시키고 히틀러가 그 처참한 반유대주의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을 분명 잘 알고 있으면서도 헨리 포드와 랜돌프 허스트와 같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들이 어떻게 그것에 동조했는지에 대해 마찬가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이 저명한 경제인들의 실체에 대해 여러분들은 또 어떻게 느끼실지 매우 궁금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군요.

이 책의 대략적인 서술 방향은 독일 재계인들에게 사실상 발탁되었다고 인정되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의 총수 이자 독일 파시즘의 화신인 히틀러의 행적과 앞선 경제인들과의 실체적인 관계를, 그리고 2부에서는 전시 경제를 밟아가고 있던 독일에 막대한 투자와 그에 따른 거대한 이권을 유지하고 있던 미국의 경제인들과 이들이 어떻게 히틀러의 독일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반적인 대전사의 접근과는 달리 자크 파월의 이 책은 그 궤가 사뭇 다르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당시 유럽과 미국의 분위기에서 소비에트에서 벌어진 혁명의 기운으로 인해 많은 자본가들이 공포에 떨었다는 점은 분명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만, 이들은 일정 이상의 금도를 넘어서는 오로지 자신들의 거대한 이익 창출에 골몰한 결과를 참혹한 대전에 이입하고 있었다는 것은 실로 이들이 비판받아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히틀러가 볼 때, 지난 1차대전의 결과는 “독일 내부의 적색 혁명론자들과 유대인이 등 뒤에서 칼을 꽂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힌덴부르크에 의해 히틀러는 ‘보헤미안 상병’이라고 일축되기도 했습니다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사업가와 은행가, 그리고 돈 많고 힘 있는 개인들의 재정 지원이 없었다면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이 대중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고 1929년 이후 독일 정치에서 히틀러의 부상에 대해 언급됩니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영국의 체임벌린을 필두로 당시 영국 지도층과 프랑스 엘리트 층이 히틀러와의 온건한 지원 관계를 유지하며, 뮌헨 협정을 영국이 손에 쥔 것은 단순히 체임벌린이 유약하고 순진했다는 기존의 학설과는 달리 체임벌린 자신이 히틀러의 지지자였다는 점을 파월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름뿐인 사회주의 노동당을 달았던 히틀러의 정당은 스스로가 지독한 민족주의자였으며, 또한 반유대주의적인 맹목적 믿음을 내면화하는 실체를 보이고 있었는데요. 이 반유대주의와 관련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헨리 포드의 연관성을 저자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헨리 포드가 1920년에 출간한 노골적인 반유대주의적 주장인 ‘국제유대인’을 히틀러가 수차례나 탐독했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미국 경제계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는지 드러내는 사례라고 분석됩니다. 히틀러가 포드의 이 책을 통해 “영감과 용기를 받았다”는 것은 후에 무차별적인 유대인 절멸에 이르렀다는 것은 정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런 히틀러와 동조하는 국내외에 세력에게 있어, “이들 파시스트와 필로파시스트는 자신들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애국심도 쉽게 접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이해됩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영국의 기업가와 은행가를 비롯한 지배층 대다수는 파시즘을 무척 선호했고,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히틀러가 동부 유럽을 삼키면서 이곳을 식민지화하고 이곳에 거주는 이등 시민들의 재산을 약탈해 독일 국내 경제를 부흥시키는데 사용했으며, 더욱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절멸수용소’에 있던 유대인 노동력들을 강제 노역에 처하게 함으로써, 이 파시즘의 권위주의가 어떤식으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기여했는지를 밝혀내고 있습니다. 2부에서 그려지는 당시의 미국 역시, 다수의 많은 경제인들이 백악관의 주인이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을 경멸해 마지 않았으며, 미국 재계의 주요 인사들 역시 파시즘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임과 동시에, “미국의 기업가와 은행가가 실제로 상당한 금액의 돈으로 히틀러를 후원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고 저자는 단언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 헨리 포드는 자신이 그동안 보여왔던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한 지지를 1939년 이후 사실상 철회하면서도 그 본심에는 일전에 행했던 아돌프 히틀러를 지지한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연합국과 나치 독일 어느 한 곳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로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디즘과 더불어 당시의 자본주의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이들 기업인들과 은행가들이 반사회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인식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는 점은 초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대전의 막바지까지 나치 독일이 전쟁의 지속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미국 기업들이 손수 고무와 석유를 지원하고, 특히 알루미늄이라는 전략적 원료를 ‘무한정 비축’ 할 수 있었던 건 대체로 엘코아라는 또다른 미국 기업 덕분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독일의 프리츠 티센과 햘마르 샤흐트와 미국의 헨리 포드, 월터 C. 티글, 이레네 듀퐁과 같은 양국의 기업인들이 가차없는 징발과 노예 노동력을 제공한 이 파시즘을 얼마나 선호했는지 대체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초기 자본주의에서 이들 기업인들의 상상도 못할 정치적 인식을 모든 자본가들의 일로 치부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자크 파월의 앞선 논저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의 주요한 결론이 왜 그런식으로 도출되었는지 충분히 이 글을 통해 함께 이해할 만했습니다. 자크 파월의 말대로 미국은 루즈벨트의 케인스식 대처 뿐만 아니라 이 거대한 대전에 의해 경제 위기를 벗어났으며, 영국에 제공한 무기대여법과 이를 통한 전쟁 물자 판매로 인해 이후의 ‘아메리카 드림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결코 부인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 여겨집니다.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자들이 있다는 역사적 경험은 인류가 결코 극복하기 힘든 딜레마로 남겨질 것은 매우 분명해 보이는데요. 이것이 역사적 진보라는 측면의 부산물인지는 모르겠으나 파월의 이 책이 얼만큼의 교훈을 제공하게 될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적정한 생활 수준을 누리도록 해줄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당시) 미국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과두제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뒤, 나치스와 협력해 또는 나치 독일에서 사업을 벌였던 제너럴모터스 등의 미국 기업들은 처벌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미 연합군의 폭격으로 자회사가 입은 손해까지 보상 받았다

(당시) 지식인들에게도 ‘위험한 계급’ 또는 ‘군중’에 대한 공포가 표출되었다

히틀러는 1926년에서 1927년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산업계 금융계 명사들 앞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표출했다

당시 재계의 구성원들은 국가 통제주의 (케인스식 경제)를 혐오했고, 이상적인 자유방임주의 세계에서는 자신들의 사업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데, 그 권한을 침해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지배층은 그들의 관점에서 성가신 민주주의 체제를 자신들이 원하는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프랑스 지배층이 굴욕적이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패배를 통해 독일에서 파시스트 ‘정권’을 ‘수입’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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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민주주의와 정치 주체 문제 - 존 듀이의 민주주의론
존 듀이 지음, 홍남기 옮김 / 씨아이알(CIR)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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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듀이는 미국 버몬트 주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및 교육학자로 당대와 뒤이어 후대에도 학문적 명성을 쌓은 학자입니다. 제가 단순히 학자라고 표현은 하고 있습니다만, 단순한 학자 이상의 지성인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는 정치철학자의 면모도 함께 부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는 토머스 페인과 거의 동등한 지적 및 학문적 위치를 미국 민주주의 역사와 정치에서 점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특히, 미국에서 탄생한 프래그머티즘과 관련된 그의 기여와 꽤 진보주의적인 교육론을 정립했던 것, 그리고 민주주의와 관련해 공중 piblic의 필요성과 이런 재교육화 된 공중이 정치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밝힌 광범위한 정치 이론은 그를 위대한 지성으로 규정하는 학문적 업적임에 분명합니다. 특히 세계 2차대전 이후, 주류 경제학과 보수 정치인들에게 유일한 규범이 된 개인주의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과 경고로도 유명한 인물이 아닌가 여기 이 글을 통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지난 1926년 1월 미국 오하이오 주 케니언 Kenyon 대학에서 이뤄진 강연의 결과물로서, 이듬해인 1927년에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간단히 책의 번역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데요. 역자가 이 글을 번역하기 위해 들인 노력이 꽤 지대하다는 점은 분명하나, 글의 문장이 기대만큼이나 수월히 읽혀지는 글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원전의 중요한 철학적, 사회학적 단어에 대해 원어를 첨부하고 부분적으로 괄호가 삽입되어 있는 점은 바로 앞선 문제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있는 경우이므로 이 정도의 언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번역된 이 책의 제목은 “현대 민주주의와 정치 주체의 문제”로 표명되어 있습니다만, 원제에 따라 정확한 제목은 “공중과 그 문제”가 정확한 표기일 것입니다. 물론 엄밀히 따지고 들자면, 번역된 제목이 완전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겁니다. 존 듀이 역시 자신의 이 글에서 “조직화된 공중”이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 반대의 경우에선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광범위한 정치철학적인 문법이기에 독자들은 어느 정도 절충하는 이해가 다소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주 간략하게 이 공중을 해석해 본다면, “공중의 조직화가 어느 정도 달성되어 공직자들이 구성되고 이에 공중의 이익을 돌보는 기능을 수행하게 하는 것”에 그 의미가 담겨있다고 여겨지는데요. 즉, 스스로 재교육의 단계에 이르고,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을 제어하며, 다수의 이익에 기여하는 아주 고양된 형태의 집합주의” 정도로도 해석할 수 있을겁니다. 여기서 집합주의는 일종의 개인주의 대 집합주의로서의 극명한 대비라기 보다는 개인적으로는 건전한 대중의 발전된 형태로서의 해석이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여기에서 ‘대중’과 ‘민중’ 그리고 ‘군중’과 ‘공중’의 정치 및 사회철학적인 본뜻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텐데요. 이에 존 듀이는 이 글에서 ‘군중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을 언급하며 이를 공중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대중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를 포함해 가브리엘 타르드 등이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정의를 내린바가 있습니다. 군중이 이 ‘개인과 개인들의 관계에 규합된 사람들’에 대한 가장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대중은 그 기본 의미나 사회철학적인 의미에서 다소 부정적이면서 가변적인 의미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존 듀이 이 글을 통해 규명하고자 하는 이 공중이 얼마나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자리매김했는지 글을 일독하면서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그런 인상을 받게 한 여러 문장들 가운데, 3장 마지막에 “민주적 공중은 여전히 완성되거나 조직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과 이 공중의 적절한 기준과 우리가 인정할 만한 수준의 조직화는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일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정하지 않고 있는 점은 ‘공중’을 면밀한 규모와 깊이에 있어 정의하기가 쉽지 않음을 명시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는데요. 또한, 6장의 ‘방법의 문제’에서는 이 공중과 민주주의의 형태들이 최소한 시민들의 활발한 토론과 동시에 이 시민들이 어느 정도의 지성적 수준을 갖춰야만 한다는 점에서 대중 정부 popular government 가 함의하는 ‘개선된 민주주의’에 대한 일면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킨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글의 처음 도입이라 볼 수 있는 1장에서는 공중의 행위가 아닌 “개인들에 의해 수행된 틀에 박힌, 충동적인, 그리고 무반성적인 행위들”에 대해 서술하고 “어떤 소수의 사람들이 대중적 힘을 이용하여 군중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끌고 정치적 기구를 지배하고 기업을 경영하는 등”의 공중과 전혀 반대되는 파급을 초래할 수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존 듀이는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은 개인들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사회적 연결 고리를 필수불가결하다고 인정하고 “인간이 이를 통해 정치적 동물로 정의된다”고 주장합니다. 확실히 이 점은 소수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결사체들의 존재 양식과 이러한 조건에서 분별력이 떨어지는 대중이나 군중이 국가 존재의 필요성까지 거부하게 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고 그는 경고합니다. 결국, 이와 반대되는 국가의 존재 이유란 수많은 공중들이 자신들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기여하고 행동하는 많은 정치적 활동과 의무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2장에서는 듀이 역시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아담 스미스의 기여에 따라 많은 경제인들이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의문을 갖고 거의 무정부주의적인 교리를 가진 군중들의 의도에 휩쓸리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국가는 해로운 집단들을 약화시키고 그것들의 수명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러한 서비를 수행하는 데 있어, 국가는 가치있는 연합의 개인들에게 더 큰 자유와 안전을 제공한다”는 이상적인 국가의 존재 목적론에 대한 겸허한 진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뒤이어, 3장의 ‘민주적 국가’에는 앞선 ‘부권주의적 문제’와 관련해 특정 개인의 자유를 공익을 위해 통제하고 이를 평등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가에 대한 면밀한 이해가 담겨져 있습니다. 민주적 국가에서 각각의 시민-유권자로서의 공중의 역할론과 “최선의 공공복리로 그들의 다른 욕망들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이 민주적 대의 정부의 합목적성은 민주주의의 큰 대의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물론 개인의 자유를 공공의 이익과 도덕적 환원 문제로 이해하며 이를 다룰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글 전반에서 듀이가 밝히는 대로 “민주주의는 수많은 비판을 먹고 사는 체제”이므로 이에 대한 다수의 공중에 의한 견실한 토론이 수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은 저 역시 강하게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대중 선거권과 다수결을 통해 개인이 제한받지 않는 주권을 갖고 있다”는 인식은 바로 앞선 부분의 근거가 될 것이고, 이렇게 전체적인 맥락에서 국가의 유해를 언급한 허버트 스펜서에 대한 비판과 오로지 금전-관계로만 결합된 사회 개념에 대한 토마스 칼라일의 인용은 이를 뒷받침한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우리의 계몽주의적 역사에서 과거, 인간의 진보와 권리의 증진에 기여했던 ‘개인주의’가 이 시기에 도달해서는 “개인주의 철학은 새로운 시대의 요구들을 충족하고 새로운 동인들을 이끌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고 듀이는 일침을 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보수주의가 개인주의와 결탁한 사조에 대해서도 분명한 비판을 첨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4장에서는 ‘가려진 공중’과 더불어 “민주적 정부의 기초로서 ‘개인주의’ 이론을 너무 심각하게 고려했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에 존 듀이는 공리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한계에 대해서도 인용하면서도 민주주의 내에서 아마도 법과 제도와 관련해 이 개인주의적 남용을 우려하고 있는 듯 한데요. 물론 억측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이 개인주의가 법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먼저 전제하고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기관들의 존재”등과 같은 법 외의 기반한 모든 이념과 기구 내지는 집단에 대해 확실한 경고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됩니다. 즉, 이러한 이해에 있어 유권자로서의 명백한 공중이 이를 감시하고 비판해야만 하며, 조직화되지 않는 공중들이 해당 사회에 만연할 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우리는 이 글에서 뿐만 아니라 많은 민주주의 담론서에서 그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선결되어야만 하는 앞선 민주적 요소에 반하는 것들 중에 사회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정치적 무관심주의’와 이를 조장하는 오락에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것과 시간 때우기 수단을 제공하는 일이 가장 높은 이윤을 거두게 되는 사회 구조에 대해서 존 듀이는 경고와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4장의 결론에서 “우리 시대의 모든 악을 증기, 전기, 기계 탓으로 돌리는 것”는 어리석은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많은 이상들이 손상되어 가는 도중에 도덕주의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무분별한 자본주의화는 모든 먹고 사는 문제를 악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사회를 오로지 경제 논리로 몰아세웠던 점은 잊지 말아야 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이 글에서 인용된 존 스튜어트 밀의 “어떤 사회적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여전히 인간들이다”의 의미대로 이 사회에 있는 우리가 더 나은 정치와 국가주의를 위해 열정을 갖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 민주주의적 가치를 계승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군중이 아니라 공중이 되어야만 하며, 스스로를 재교육하고 지식과 더욱 가까워지고, 우리 모두가 지성의 꿈을 꾸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고립된 개인이라는 이념, 인공적인 정치적 법칙과 자연적 경제적 법칙이라는 이념의 결과는 민주적 형태가 비틀리고 편향되고 왜곡되는 것”이라는 파행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리주의 경제 이론은 실천과 별개로, 민주적 정부 이론의 발달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 P93

만약 공중이 없다면 어떻게 그러한 공직자들이 공적인 공직자들일 수 있는가? - P115

우리가 국가에 대해 요구할 수 있는 최대치는 국가가 부당한 간섭을 하지 않고 사적 개인들의 아이디어 생산을 용인하는 것이다. - P65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허버트 스펜서는 이에 반대의 입장에 있었다 - P68

대화의 결과들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둘을 넘어 확대되어서 다른 많은 이들의 복지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 대화 행위는 공적인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단적으로 사회적 지식이 여러가지 사회과학 분과 학문으로 나뉘게 된 사실은 사회적 지식의 퇴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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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가격 - 돈에 갇힌 미디어와 언론, 그리고 민주주의를 구해낼 방법들
앙드레 쉬프랭 지음, 한창호 옮김 / 사회평론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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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35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으나 러시아계 유대인인 친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온 앙드레 쉬프랭은 출판업자였던 아버지의 가업을 사실상 이어 받으며, 미국 출판계에서 독립적인 명성을 쌓은 인물입니다. 그는 예일대와 켐브리지에서 학업을 마치고 바로 판테온 출판사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 인문사회과학 서적 출판을 위해 열을 올렸던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바로 그러한 취지에서 1990년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비영리 공익 출판사인 뉴 프레스 New Press의공동 창립인으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출판업에 종사했던 초년 시절에 그는 반전과 관련된 기획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 이후에 출판의 공익적 목적에 관심을 떴을 때는 서구 유럽의 출판문화와 출판계에 대한 비판을 담은 꾸준한 글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2011년에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영예로운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201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78세의 나이로 그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10년, “Words and Money”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저자가 결론에서 간단히 설명하고 있듯이, 출판과 언론을 포함한 ‘말의 세계’가 현재 어떠한 상황을 맞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장부터 4장은 유럽의 출판시장에 대한 분석을 다루고 있으며, 5장과 6장은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언론업계의 상황 그리고 르 몽드와 BBC를아우르는 유럽 언론계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꽤 상세한 진술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자인 쉬프랭은 우리의 ‘말의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 가운데 크게 다국적 자본의 위협에 따른 영리 우선주의와 인터넷 웹 기반의 발전에 따른 언론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른 수익 문제와 독자 기반의 감소 등을 이 글 전반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점으로 인해 (아마도 번역한 출판사가 타이틀화 한 것으로 보이는) 부제, ‘돈에 갇힌 미디어와 언론, 그리고 민주주의를 구해낼 방법들’과 얼마간의 적합한 관련이 있을지는 다소 의문입니다만 하여튼 이런 언론과 출판의 급격한 변화는 우리 정치에 있어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일전에 우리는 루퍼트 머독과 같은 미디어의 독점 자본이 등장한 광경을 목도한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머독의 등장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오로지 한쪽 방면(이를 테면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이익을 위해 헌신한 나머지 반대편의 영향력을 돈의 힘으로 억누른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에 이러한 거대 자본에 의한 언론 독점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한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결국 어느 한쪽의 손만을 가리켜 흔들어대는 골리앗 언론의 출현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민주주의에 있어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점은 매우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와 유사하게 현재 미국과 영국은 말할것도 없고 그 외의 유럽 출판계와 언론의 자본화 논리에 굴복하고 있는 상황은 그 자체로 유감스럽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자유주의적 이념에 다소 반하는 프랑스의 자국 문화에 대한 보조금 지급은 꽤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차원에서 프랑스가 핵을 보유한 국가이고 유럽 연합의 기득권을 독일과 양분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한 정책의 배경이 될 수 있겠으나,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이 국가가 자국 문화에 대한 보수적이면서 단호한 정책을 펼 수 있는 원동력이 존재한다는 점은 다른 국가들에게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저자인 쉬프랭은 이 지점에서 프랑스 문화 당국이 자국의 영화에 대해 투입하고 있는 보조금을 마찬가지로 출판업에도 제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에 대해 논의를 보입니다. 이를테면, 현재에도 거대 서점 체인과 공룡 출판사에 기를 죽이고 있는 도시의 영세 서점과 독립 출판사 및 작은 규모의 인문사회과학 출판사에 이들이 어느 시점까지 자립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서 지원을 하는 것은 바로 자국의 문화와 건전한 언론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지난 역사에서 이러한 관점에서 멀리 벗어났던, 1980년대의 미국과 영국의 신자유주의의 이행의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미국과 영국의 출판사들은, 신간이면서 가치있는 책들을 각각 1,000 ~ 1,500 부씩 사주는 지역 도서관에 의존할 수 있었던 적이 있다. 이런 예산은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 시절부터 여타 공공 프로그램 예산과 더불어 대폭 삭감되었다.”고 쉬프랭은 이를 경고의 취지로 밝힙니다.

또한, 이 글 4장에서 잠깐 언급하고 있듯이 지역의 공공 도서관에 직접적으로 관내의 중소 규모의 서점이 이들 도서관에 책을 공급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저자는 함께 고민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꽤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졌는데요.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는 출판 도매 업자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제외하고 도서관에 필요한 책을 공공 지원금으로 소규모 서점들에게서 지원을 받는 것은 꽤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물론 여기에서 관건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독서 인구와 이런 상황에서 별다른 대책을 보이지 않고 있는 공공 도서 정책의 현실적 갭을 얼마나 좁힐 수 있겠느냐의 문제일 겁니다. 물론 위르겐 하버마스의 경우처럼 사실상 신자유주의적 정부가 시민의 ‘우민화’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공공 도서관으로 대표되는 공적 학습 기반을 맨 뒷줄로 세우는 것은 분명 신자유주의적 기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찌됐든 시민이 스스로를 지식으로 단련해 정치요구에 나서는 것을 ‘피곤한 일’로 여기고 더욱이 심각한 부의 불평등 상황에서도 오히려 가진자들의 영합된 이익에 줄을 서고 더불어 민주주의가 거부하는 계급 정치에 힘을 쏟는 것은 현재의 전반적인 신자유주의의 이행 과정이 어떠한 결과로 나타났는지 명백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5장에서는 미국 내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견실한 언론사들의 문제와 이들 언론사들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고 있는 광고 수익의 점차적인 축소에 대해 비판과 그 대안을 함께 저자는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본사 신축에 6억 달러 이상을 쏟아 붓고 있는 ‘뉴욕 타임스’의 사례를 제외한다면 자본의 이익에 영합하는 경영화에 힘입어 언론사의 전문 인력들이 반수 이상으로 감원되고, 그에 따라 사주와 최고위층의 돈벌이에 힘쓰는 등 사실상의 금융 기업과 같은 구조화에 들어섰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것과는 반대로 꽤 건전한 사례로 제시되는 노르웨이 언론의 사례를 차치한다면 전반적으로 많은 민주주의 국가 내의 언론사들이 이러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이러한 가운데 프랑스 정부가 제안한 “18세의 모든 젊은이에게 1년 무료 구독 혜택”을 주어 잠재적 독자를 증대시키겠다는 점은 꽤 신선했는데요. 애초에 이들 젊은이들이 현재의 인터넷 기반의 웹 현실에 익숙한 나머지 이러한 인쇄 기반의 매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문제 의식은 우리도 고민해 봐야 되는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프랑스 정부가 나서 지원책을 제시하는 것은 공화주의를 탄생시킨 국가 다운 행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끝으로, 현재 구글이 진행하고 있는 독서물의 디지털화에 대해 이 글 결론에서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데요. 저는 단순한 몇줄 기사와 같은 이 구글의 사업에 대해 만약 이런식으로 구글이 지식에 있어 디지털화를 독점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의 지식 산업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우려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에서도 충분히 시장에서의 반독점에 반대하는 법령을 들어 구글과 같은 거대 웹 기반 기업들을 제어해야 하지만 빅 데이터와 같이 개인 정보의 무분별한 수집으로 인한 이들의 잇속 불리기에 대해 이제는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2009년 프랑스 파리에서 법원이 “구글이 도서를 발간한 출판사와 집필한 저자들의 승인없이 도서를 디지털화하고 초록을 온라인상에 게재함으로써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판시한 점과 “프랑스의 도서 전산화 프로그램의 중지”를 명령한 점은 우리 역시 관심을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사회의 공공재로서, 이들 거대 웹 기업들이 수많은 지식들을 돈벌이에 이용하고 나아가서는 지식의 독점에 이를 수 있는 잠재적인 위협을 초래하는 이러한 행적에 우리가 더 경계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보여집니다. 이처럼, 저자가 독자들에게 이 ‘말의 세계’의 본질과 변화에 대해 가감없이 제시하는 이 글의 목적은 꽤 분명하며, 결국 자본의 영향에 휩쓸려 가고 있는 언론과 출판을 제대로 시민의 버팀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보호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책을 다 일독하고 나서, 지난 2006년에 번역 출판된 로버트 맥체스니의 “부자 미디어 가난한 민주주의”의 재간행이 필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모쪼록 독자들을 위해 출판사의 재간행을 기대해 봅니다.

과거 미국과 영국의 출판사들은, 신간이면서 가치있는 책들을 각각 1,000 ~ 1,500 부씩 사주는 지역 도서관에 의존할 수 있었던 적이 있다. 이런 예산은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 시절부터 여타 공공 프로그램 예산과 더불어 대폭 삭감되었다. 71p

프랑스의 많은 극장에서 영화가 끝난 뒤 특히 정치적 메시지나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가 끝난 뒤 토론자리가 마련된다. 83p

기자들이 일간지에 심층기사를 쓸 수 없다는 무능력에 좌절감을 느껴왔다는 점과, 독자들도 똑같이 그런 심층기사를 읽을 수 없어 언짢아한다는 점이다. 1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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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 자유의 가능성 탐구
줄리언 바지니 지음, 서민아 옮김 / 스윙밴드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저자인 줄리언 바지니는 영국 내에서 꽤 유명한 대중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는 레딩 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뒤, 영국 내의 여러 방송 출연을 통해 철학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20여편이나 되는 철학 관련 서적의 집필은 그런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가디언 지 등을 비롯한 언론사에 칼럼을 쓰고 월스트리트 지와 관련해서는 북칼럼을 쓰는 등의 꾸준히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런 활동들 덕분에 국내에도 그의 이름을 접하는 독자들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글의 원제는 “Freedom Regained : The Posssibility of Free Will”로서, 지난 2015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년 뒤인 2017년 4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인간의 광범위한 자유의지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는 2부에서 소개하는 과학자들의 자유의지에 대한 뇌과학적인 접근에 대한 사실상의 비판과 이들 과학자들이 이 자유의지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도 함께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경과학연구에서 “우리의 행동은 의식적 사고, 욕구, 의도가 아니라 뇌에서 이루어지는 무의식적 과정에서 비롯하며, 이 단계는 대개 우리의 인식보다 앞선다”는 일종의 뇌에 의한 얼마간 규명되지 않은 부수적 신체 활동 내지는 신호 전달이라는 측면의 이해에 대한 얼마간의 반대 의견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전반적인 인류사의 접근에서 14세기 르네상스를 거쳐 이후 몇세기 후의 계몽주의에 이르러 인간의 자유와 관련된 중요한 철학적 담론으로 이 자유의지가 생겨나고 또한 인식적으로 강화되어 왔습니다. 특히 임마누엘 칸트가 천착한 이 자유와 이성에 대한 부분, 그리고 칸트의 뒤를 이어 학문적 연구를 지속해 온 많은 철학자들의 고유한 사상 등을 차치하더라도 단순히 인체 과학적인 측면에서 보이는 일관적인 단일한 해석으로는 자유의지와 자유 더 나아가서는 인간 정신에 대해 어느 정도의 정의를 내리기란 어렵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과학계의 전반적인 이해가 “자유의지에 관한 과학적 회의주의의 뿌리는 결정론이 아닌 유물론에 근거해 있다는 점”이 철학주의적 기반에서 과학에 대한 비판의 주된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이러한 ‘자유의지’에 대한 면밀한 해석을 위한 전제 조건에 이어, 바지니는 “자유의지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중요하고 긴급한 사안이다”라고 시급히 규정합니다. 이에 우리가 이 자유의지를 좀 더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저자는 “자유의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선택에 관해 논할 때 그게 우리 뇌나 정신, 우리의 이성적이거나 의식적인 자아에 의해 이루언지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버려야 한다”먼저 언급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의지는 우연의 산물이므로 역시나 그 의지에 대해 우리는 책임이 없다”는 2장의 기본 인식과 동일하다고 여겨집니다. 더욱이 우리가 이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이성을 갖고 있는 우리가 주어진 어떤 상황이나 결론을 위해 행하는 여러 선택들이 사실상 주체적이라기 보다는 주변의 상황과 환경이 시스템적으로 매우 한정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전반적인 과정이 정말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에 대해 회의를 갖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자유의지와 관련해 우리가 명심해야 될 부분은 진정한 자유의지는 “하지 않을 자유의지”까지도 포함한 것이라고 봐야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책에서 논의된 철학적 개념상 진정한 자유의지가 과연 존재할 것인가에 대해 저로서도 다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만 어찌됐든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와 자유의지에 대한 편협한 이해의 타파를 위해서도 전반적인 이들의 인식적 연결고리는 하나하나 파악해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진술 가운데에서 일찌기 스피노자는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와 욕구를 인식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고 의지하기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그 이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꿈조차 꾸지 않는다”며 꽤 단호하게 우리의 무지를 비판하고 있는데요. 제가 저자의 입을 빌어 앞서 언급해 드렸듯이 인간이 소위 자유의지를 행하는 이면에는 인간을 둘러싼 그 한정된 시스템적 한계로 인해 그것을 진정한 자유 내지는 자유의지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놓여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만족과 안식을 위해 면밀한 분석을 하지 못하고 그저 무지의 상태에서 스스로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자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뭇 고심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이러한 결정론적 이해가 “우리의 결정이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며, 단순히 우리의 결정이 바뀔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는 바지니의 결정론적 이해는 마찬가지로 귀담아 들어야 되는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어쩌면 이러한 현실에서 단적으로 성경에 인간에 대한 자유의지 개념이 전무하다는 점은 기독교적 교리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무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만 물론 이런 후자의 추측은 조금 과한 해석일 수도 있겠죠.

뒤이어 3부에서는 앞선 장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진면목을 살펴보고 이를 현실의 인간에 대입해보는 여러 과학적 예시와 이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서술해 나갑니다. 소위 인간에게 ‘폭력유전자’가 있는가에 대한 진술과 인간 사회에서 일부의 인간들이 폭력을 행하게 되는 매커니즘에 대한 여러 측면의 이해를 저자는 나름대로 면밀히 살펴보고 있는데요. 이것은 인간이 의식을 통제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와 무의식과의 관계 그리고 소위 통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폭력 행태에 대해 뇌과학자들과 신경학자들의 이론을 철학과 비교하여 분석하는데 집중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의식적 정신의 역할”이라는 주제에서 적잖은 생각을 해봤는데요. 마찬가지로 “의식적 숙고”에 대한 부분에서도 특히, 예술가와 안무가들의 창조력이 어떻게 뇌과정과 관련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한 전문가의 진술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이는 단순한 신체기관에 우리의 창조력이 관련되어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기도 했는데요. 인간의 정신 활동이 단순히 뇌의 전기 신호이거나 뇌세포의 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파악하는 과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인류가 그동안 쌓아올린 형이상학의 이론에서는 쉬이 인정하기 힘든 부분일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뭔가 고차원적인 영적인 활동의 일환으로 뭉뚱그려 해석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형이상학적인 측면을 넘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고유성이라고 봐도 무방할텐데요. 이 고유한 정신은 바지니가 특별히 다음과 언급하는 것과 같이 “인권과 사회적 대의를 위해 자신의 안녕이나 안전을 희생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이들은 특히 이러한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지 않고서는 삶의 존재 이유를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의식의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부류가 있는 반면에, 좀 더 고차원적인 신념과 가치에 대해 삶의 존재 의의를 기대는 사람도 있는 등의 그 인간들 가운데 일부와 일부를 구별하는 정말 대단한 존재라고도 생각됩니다. 이 부분을 차치한다면 기본적인 정신의 온전성을 위해 모두에게는 스스로의 교육과 정보의 취득이 중요할텐데요. “교육과 정보가 부족한 사람들은 부정적 자유는 많을지 모르지만, 긍정적 의미에서 자유의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한 점에서는 부족하다”고 보는 점이 이와 같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글의 대미에서 자신이 권하는 자유의 현실적 관점은 적절한 인간적 척도에서 자유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간략히 소개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자유의지라고 부를 만한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믿기 위해, 굳이 현대 서양의 자유의지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추가적으로 언급하고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와 자유의지를 다소 맹신하는 것을 경고하는 것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앞선 3부에서 “제약이 없는 자유란 있을수도 없고, 또한 존재해서도 안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전반적으로 앞선 장들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농밀한 철학적 분석과 근거를 저자가 훌륭히 제시했어도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란 도덕적 측면과 인간적인 척도에서 이해하는 수준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소 이해와 과도한 이해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절충점을 갖는 것이 이번 자유의지에 대한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개인적으로는 한번 더 이 책에 대한 정독이 필요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집단 죄의식이라는 부분과 관련해 바지니는 2007년 4월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한 조승희 총기난사 사건을 본문에 인용하고 있는데요. 많은 한국인들이 이 사건과 관련해 희생자들과 다른 미국인들에 대한 죄의식을 갖고 있다는 부분의 해석이었습니다. 당시 주미 한국 대사가 매일 한 명씩 희생자를 추모하며 32일 동안 단식을 한 것도 이 죄의식과 수치심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분석하는데요. 주미대사가 32일 동안 단식을 했다는 점도 약간 의외지만, 일부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많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체면에 대한 문제와 특히 우리가 미국에 갖는 부채의식을 빼고 이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다소 몰이해라고 여겨집니다.

교육과 정보가 부족한 사람들은 부정적 자유는 많을지 모르겠지만, 긍정적 의미에서 자유의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부족하다 156p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자유롭다는 것이다. 누구도 완벽하게 자유롭지 않으며 완벽한 자유에 이르지 못할테지만, 분명한 사실은 자유는 정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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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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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리노이 주 워케건 출신의 작가인 레이 브래드버리는 전세계 에 두터운 SF팬층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특히 연작 소설인 ‘화성 연대기 (The Martian Chronicles)’와 더불어 화씨 451 (Fahrenheit 451) 역시 미국 내에서 높은 판매고와 더불어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특히, 그는 대학 진학과 같은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오로지 도서관에서 읽고 쓰기를 반복하며 ‘자신 스스로를 교육’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이런 브래드버리의 간략한 일대기를 읽는 도중에 문득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고전을 막론하고 소설 리뷰를 쓰는게 정말 오랜만이기도 한데요. 가장 최근이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 장편이었으니, 조금 오래되기도 한 것 같습니다. 브래드버리의 이 화씨 451을 읽게 된 연유에는 지금 거의 다 읽어가는 줄리언 바지니의 ‘자유의지’에서 인용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더욱이 책을 불태우는 방화사들이 나온다는 문구에 조금 혹하기도 했는데요. 어쨌든 꽤 여운이 남는 뒷 느낌과 함께 이 책을 일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원제, ‘Fharenheit 451’로 지난 1953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여러 출판사 판본을 거쳐 2009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제가 구입한 책은 벌써 16쇄를 찍은 판본이었는데요. 이북으로 구매할까 헌책으로 구매할까 고민하다가 며칠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중고로 구입을 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은 브래드버리의 이 소설을 SF 혹은 디스토피아적 사회소설로 받아들이고 계실텐데요. 다만, 개인들의 자유로운 지식의 습득이 터부시되고 금지된다는 측면에서는 사회 저변에 깔린 반지성주의화를 비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지성인이란 말은 물론 들어도 마땅한 욕이 되었다”라든지, “이따위 책들에 나와있는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어없어진 작자들이야”, “사람들을 얽어매려고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따위의 불안한 물건들을 주면 안돼” 등과 같은 대사들은 매우 슬프게도 우리의 현실에게도 제법 적용될만한 수사라고도 느껴졌습니다. 사실 많은 일반인들 중에 책을 읽지 않는 대다수가 자신들과 다른 독서인들에게 갖는 매우 복잡한 감정을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시민들 혹은 대중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각자의 수준과 의도 및 인식에 맞는 무언가를 하기 마련입니다. 다만, 언제부턴가 일부에게는 독서라는게 매우 거리가 있는 것으로 취급되고 기피되는 것은 어찌됐든 사회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겁니다. 존 듀이는 시민들 스스로 자신을 위한 재교육이 민주주의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각자의 생계를 위한 목적이 먼저 충족되어야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 사회 구조로 계속 첨예화 되고 있어, 이것은 오로지 개인의 노력 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점도 분명해 보입니다.

다시 소설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주인공인 가이 몬태그가 방화사라는 직업으로 일종의 책을 불살라내는 일을 하면서 그동안 이행되어왔던 ‘개인들이 지식을 스스로 구하려고 하는 노력에 대해 사회적 봉쇄’에 대해 단편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변화의 틈에서 소설의 사건 진행과 나레이션이 시작됩니다. 이런 몬태그의 인식 변화를 불러 일으킨 매개가 된 것은 클라리세 매클런이라는 고등학생 나이의 어린 소녀였는데요. 그렇지만, 2부에서 몬태그가 마땅히 불살라버려야 하는 책들을 아내인 밀드레드 몰래 그 전부터 숨겨왔던 것으로 보아 클라리세와의 우연한 만남은 상황을 급진적인 전개를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몬태그가 속해 있는 사회가 그리 된 연유에는 1990년 이후 두 번이나 있었던 핵전쟁과 연관이 깊다고 추측되는데요. 시와 소설이 사람을 감상에 빠트려 자살에 이르게 한다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서술도 참혹한 전쟁 전후, 사회에 가중되는 압력 등을 고려해 본다면 생존을 위해 국가로 획일되는 사회구조를 수립의 목적으로 일정 부분 지식 말살에 전 국가적인 노력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부분 기술발전은 이뤄냈는지 벽면을 가득채우는 텔레비전이라든지 과속과 다름없는 쾌속으로 스피드 감을 맛볼 수 있는 자동차의 존재, 로봇개 등 이런 전체적인 상황으로 짐작해 보면 몬태그의 사회는 테크노크라트가 정점으로 대신 시민들에게는 어떠한 재교육과 지식 습득은 거부하는 정부 기조와 그러한 분위기에서 대중들 역시 동조하게 되는 이중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사회적 단면에 의해 개인화 된 인물이 바로 몬태그의 부인인 밀드레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거의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 하고 생각 자체를 아마도 두려워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요. 몬태그는 그런 자신의 아내에 대해 “자신의 아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2부에서 등장하는 파버 교수에게 살짝 언급하기도 합니다. “이 캄캄한 동굴 같은 신세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몬태그와는 달리 밀드레드는 아주 적절하게 그런 사회기조에 적응한 인물로 사실 여기에도 적응이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반 자포자기와 현실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인물로 그려지는데요. 결혼 생활을 한지 1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자신들이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기억도 못하는 이 부부는 바로 스스로들의 ‘현실의 벽’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이 전대의 수많은 인간들이 남긴 이 지식 유산들을 멸절의 대상으로 삼고 더욱이 이것들로 인한 사회가 나약해지거나 혼란스러워진다는 가정 하에 전면적으로 진행된 이러한 인간 개개인의 균질화는 마냥 이 소설을 디스토피아적 허구로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뒷맛이 좋지 않기도 합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그 자체로 허무맹랑한 일들이기 때문에 얼른 1984년이 왔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는 많은 미국인들이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지듯이 스토리 라인의 전면에 있는 몬태그를 포함한 방화사 부서를 제외하면 많은 이 시대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 만의 삶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단지 몬태그라는 인물 만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작은 실마리 삼아 손에 쥐고 있었지, 그 반대인 그의 상사 비티 서장이 자신은 충분히 이 세계를 인지할 만한 지식들을 머릿속에 집어 놓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현실에서 저항해내려고 하지 않고 몬태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자 했던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리에 지식이 있어도 그것을 행동에 옮길만한 의지가 전무하다면 그 수많은 지식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끝으로 이 몬태그라는 이름은 이 소설 속에서 하나의 단어만으로 등장을 하는데요. 3부에서 쫓기는 몬태그의 이름인 ‘가이’가 처음 삽입되는 것으로 보아 몬태그의 운명과 그의 진정한 이름인 ‘가이’의 드러남은 뭔가 극적으로도 느꼈습니다. 뒤이어 이어지는 또다른 핵전쟁의 불씨 등도 브래드버리가 삶을 살았던 1950년대의 핵전쟁의 공포가 어떠했는지 조금 짐작할 만했습니다. 그 시대에서는 핵무기 만큼 막강하고 공포스런 존재가 없었을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들을 책과 지식의 그림자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벌였던 구조화가 꽤 높은 개연성으로 다가오는 이유 때문에 읽는 내내 복잡한 심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쓸데없이 많은 사회과학 서적을 접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브래드버리의 숨겨진 뜻이라고도 여겨지는 “적지 않은 이들은 개개인들의 지식 습득과 책읽기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쉬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 삶에서의 독서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교육하고 진실을 찾는 일에 매진하시기를 오로지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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