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은 없다 - 사회이동이 우리를 어떻게 호도하는가, 2021 7월 책씨앗 인문교양부분 추천도서
하다스 바이스 지음, 문혜림.고민지 옮김 / 산지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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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하다스 바이스는 이스라엘 출신의 문화인류학자이자 현재는 베를린훔볼트 대학의 아시아-아프리카 학과에서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 연구를 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녀는 미국 사회과학의 요람이라 불리우는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독일과 핀란드 등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던 이력을 갖고 있는데요. 이번에 ‘중산층은 없다‘라는 책은 거의 처음 출판되는 바이스의 논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녀는 경제인류학과 사회비판이론 및 자본주의의 금융화 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학자에게 경제학은 조금 상상하기 힘든 분야일 수도 있겠는데요. 다만, 이 책을 읽어보니 그녀가 왜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학이 인간 사회와 밀접한 학문이고 특히 인간의 역사적 변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왜 현 시대의 인간 사회가 과거와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에 어떻게 종속되었는지에 의문을 품고 이를 규명하는데 온 노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의 무리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녀의 학문적 진정성은 높이 살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은 원제, ˝We have never been middle class˝로 지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제목과 더불어 그녀가 이 책을 통해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점을 먼저 소개하고 싶은데요. 현재 우리가 익히 관념적으로 혹은 체제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중산층 혹은 중간계급‘이라는 용어 자체가 자본주의가 노동력을 근간으로 하는 시민들을 착취하고 이를 잉여 자본의 축적으로 이용하면서 그것에 대한 본질을 호도하기 위해 이와 같은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일관되게 논증되고 있습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 ˝중산층 이데올로기˝ 자체가 교묘하게 진보와 보수 그리고 좌와우 할 것 없이 사회정치적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여기에는 자본주의의 꽤 면밀한 작업이 동반되었다고 저자는 보는 듯 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이데올로기 자체가 강요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맥락으로 저자인 바이스는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이 중산층 middle class 은 현재의 전반적인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평범한 시민들의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자본의 축적과 잉여 가치의 지속적인 생산을 위해 이용되고 있어서 그에 따른 자본에 의한 사회적 작업을 면밀하게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으로 판단됩니다.

우리에게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프랭크 나이트는 금융 자본주의의 인정을 위해 ˝소유와 불확실성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강력한 논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즉, 오늘날의 금융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시장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대적으로 금융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홍보하면서 금융 자본주의에 의한 장미및 전망을 이론적 기반에서 정립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마찬가지로 밀턴 프리드먼 역시 이와 유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 체계는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을 분석하며 한스베르너 진이 꼬집은 ‘카지노 자본주의‘의 일면이라 봐도 지나치지 않아 보입니다. 그동안 저는 포스트 포드주의에 따른 자본주의의 금융화에 대해 인용을 자주 해왔는데요. 또한 자본주의 자체가 자아실현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체계로 시민들의 활발한 계급 이동을 원칙적으로는 옹호한 것으로 재생산 되어 왔습니다. 물론 현실은 이와는 매우 다르죠. 애초에 이 자본주의는 계급주의적 고착화를 용인하거나 긍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는 본래 자본주의의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 3장에서 이 시스템에 대한 대략의 얼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수많은 시민들이 교육을 통한 인적 자본의 투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회경제적 우위였습니다. 즉, 사회적 자원을 부모로부터 지원받아 그렇지 않은 다른 계층의 사람들보다 더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불평등한 전제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따라서 척 콜린스나 매트 스튜어트가 이 계급 세습에 대한 비판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의 견고한 교리와는 별개로 극심한 불평등을 양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능력주의 meritocracy 의 역설적 측면이라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흔히 수많은 부유층들이 자신들의 근면과 성실로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주입된 능력주의의 일면이며 실상은 사회적 자원과 인적 자본의 화려한 네트워크로 인한 결과물인데도 그것을 오로지 개인의 노력으로 치부하는 것은 오늘날 금융 자본주의의 불확실성을 감추려는 노력이라 손 치더라도 그것은 실질적으로 대다수의 시민을 기만하는 행위라 여겨집니다.

그런 연유로 이 글에서도 금융 자본주의의 시대의 도래는 ˝모두가 이익을 얻지 못한다˝는 체제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잉여 가치만을 위한 체제 우선이 금융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이익의 편중화는 더 노골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일부 시민들이 주식과 여러 금융 시장에서 기초적인 자본가의 위치를 경험할 수도 있으나 현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삶의 지표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인데요. 흔히 ˝포드에게 좋은 것이 미국에도 좋다˝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관념을 차치하더라도 1980년대 이후 소수의 자본가의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오도하게 만든 자들이 너무나 많았으며, 또한 이 글 4장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이러한 주의(主義)를 주장하는 자들이 도덕적 한계 뿐만 아니라 공익을 위한 정치 마저도 제거시키기에 이르자 사실상 민주주의가 쇠퇴하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입으로는 일절 내색하고 있지 않지만 민주주의 자체를 매우 불편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 자본주의적 체제 하에서 주도하는 세력 이라든지 계층이라든지 뭐라 부르던 간에 소수 엘리트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관점은 저들이 어떻게 자기들 입맛대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저자가 다시 강조하고 있듯, 시민들이 자신 스스로와 가족만을 위한 협소한 이익에 몰두하게 만들고 그것이 사회의 이익과 결부되어 있다는 식으로 오도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 왜곡된 관념이라 할 수 있을텐데요. 이렇게 주입된 소위 개인주의적 관념이 사회적 개선에 시민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하고 더욱이 여론을 파편화 시켜 시민들 내부에서 일상적으로 불협화음을 조장하게 만든 것은 고약한 현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결과적으로 현재 진행된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앞선 ‘중산층 이데올로기‘로 인한 소위 일부 국가에서의 중산층 확대의 현상을 분석한 후쿠야마의 이해는 명백하게도 이들 중산층 확대로 해석되는 국가들에게서 실질적으로 ˝민주주의적 요구 또는 민주주의의 확대˝의 목소리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서 중산층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떨어져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생각합니다. 소위 이들 중산층에게서 사회적 맥락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객관적인 도덕적 공동체‘의 개념을 분리시키고 다수의 시민들을 일개 개인들로 파편화 시켜 오로지 자신들의 문제에만 몰입하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차별적인 자본주의의 모순을 체념하게 만드는 것으로 작용되어 왔다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금융화가 내세우는 수많은 미사여구˝는 공공의 이익을 결여한 것은 기본으로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체제를 강고하게 만들면서 어떠한 개선이나 개혁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점에서 실로 우려할 만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자본주의가 정치의 영역을 잠식시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임에도 그것에 대한 아무런 의문을 표하지 않게 되는 현 시점의 중산층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사회 이동이라는 미명하게 시민들을 근본적으로 잠식하고 조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손에 넣을 수 없는 목표를 던져놓고 다수의 사람들을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이러한 체제 자체가 시민들의 비판적 인식을 성공적으로 제거했다는 점에서 금융 자본주의의 대단한 성공을 축하할 만하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랜들 콜린스가 부동산 금융화에 따른 배타적 금융 자본주의를 부채질 한 것이 신자유주의였음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나는 중산층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투자 주도의 자기 결정을 가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사회이동으로 돌림으로써, 노동 가치 저하와 이러한 저하로 인한 사람들의 고충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자유주의 사상의 주류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재산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어떤 것보다 많이, 그리고 더 잘 투자하도록 유혹한다는 것이 나의 논지이다

중산층의 몰락을 진단하면서 이를 실질임금 상승의 정체, 공적 지원의 감소, 일자리의 자동화, 보건 및 교육비용의 상승, 투기적 금융과 기업 이익의 무제약적인 힘, 금융 위기에의 취약성, 부당한 수수료의 불공평한 세금 부담 등에 기인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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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5 1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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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5 19: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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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유럽 선언 - 만국의 시민이여, 연대하라
콜린 크라우치 지음, 박상준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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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의해 우리의 민주주의가 사실상 후퇴한 상황을 비판한 ‘포스트 민주주의‘을 만들어낸 콜린 크라우치는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정치학자입니다. 그는 민주주의에 있어서 신자유주의적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를 기울여 온 학자로 런던 정경대(LSE)와 옥스포드를 거쳐 현 워릭 대학의 명예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력으로 크라우치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의 유럽 대학 연구소(EUI) 정치학과의 학장을 역임하고 이후 워릭 대학의 경영대학원에서 현재 유럽에서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관한 문제를 심도있게 연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크라우치와 관련해 다른 서평에서도 짧게 언급했지만 그의 ‘포스트 민주주의‘와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로 인해 영국 내부의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엄청난 공격을 받은 바가 있는데요. 저는 여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적지 않은 글들을 읽었음에도 크라우치 만큼 매우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비판을 가한 학자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을 비롯한 유럽 학계에서도 학자들간에 서로 이해관계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 분야에서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학자들에 대해 서슴없이 비판을 가하는 것을 보면 근래 보기 드문 학자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은 원제, ˝Social Europe : A Manifesto˝ 로 지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크라우치는 현시대 유럽의 가장 큰 문제를 1장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개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외국인 혐오 민족주의다˝라는 문장입니다. 약간의 논외로 저는 어떤 극우 유튜버의 재미난 책이 먼저 떠올랐습니다만 저자의 저 문장 자체가 현재의 유럽을 아주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1980년대 이후 떠오르는 샛별처럼 등장한 신자유주의에 의해 수많은 유럽의 진보 좌파들이 이 신자유주의적 이념을 벤치마킹하고 또한 그러한 사회화 과정에서 좌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한 결과를 초래한 사회적 역사가 있었습니다. 더 많은 시장과 그에 따른 간섭받지 않는 시장 자유를 주장한 신자유주의는 ‘이익의 추구‘라는 저들의 가치에 일종의 도덕적 의무를 성공적으로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제가 언급하고자 하는 핵심은 ˝신자유주의는 기껏해야 최소한의 자원만 갖춘 공공 서비스만 용납했고, 개개인에게는 각자도생의 이기적인 철학이 퍼지도록 부추겼다˝는 문장으로 대변될 수 있을텐데요. 크라우치의 논증대로라면 이러한 파괴적 신자유주의의 이행은 사회적 파편화를 초래했고 익히 아는 바대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과 더 나아가서는 정치에서 소외받은 자들의 분노가 포퓰리즘의 토양이 되는 결과를 양산했습니다. 저자인 크라우치는 이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역설을 소개하고 있기도 한데요. 현재 전세계가 코로나 사태에 직면해 시민들의 보건을 위해 분배되어야 하는 백신과 마스크와 같은 보호장구 등을 국가의 역할이 없었다면 소란없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공 의료의 의무를 시장이 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은 거의 허구에 가까우며 신자유주의자들의 그 허무맹랑한 이론 체계가 허버트 스펜서류의 사회 진화론에 있는 만큼 이들이 시민 다수의 안전과 건강에 주목하기 보다는 이 사태를 기화로 얼마나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겠는가에 집중했을 것이라 보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더욱이 크라우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재 유럽 내부에서 과거 히틀러에 대한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겪고 나서도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주의가 근절되지 않고 잔존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슬람 이민자들에 대한 도를 넘는 증오와 과거 유럽의 계몽주의적 역사와 사회 민주주의의적 가치에 위반되는 행동임에도 보수 우파와 많은 기독교 우파들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어하는 서유럽과 이미 이러한 기반을 닦고 있는 헝가리와 같은 동유럽의 정치적 변화는 실로 기형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이슬람인들이 유럽의 기독교를 ‘이슬람화‘시키려는 음모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있는데, 이들의 비정상적인 프로파간다가 결국 제2의 히틀러를 불러오게 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서 ‘세계화‘와 ‘자유로운 자본 이동‘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가 그들의 교조에 아주 상반되는 극우 포퓰리즘과 배타적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 배경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화학적으로 저 극단주의자들과 맞지 않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결탁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만 우리 정치에서도 이미 보수 우파와 신자유주의적 개발론자들이 아주 매끄럽게 결합한 것만큼 이와 같은 크라우치의 경고를 무슨 터무니없는 소설로 몰아 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날 신자유주의로 인한 문제는 전방위적인 이익화에 정치와 도덕을 제거한 나머지 이 고삐 풀린 망아지를 제어할 수단이 마땅치 않은 점에 있습니다. 이미 미국 의회에서는 ‘지구 환경 변화에 대한 문제‘를 환경론자들의 음모로 몰고가는 로비가 공격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중고등학교 과정에 기독교적 창조론에 입각한 과학 수업을 개시하기 위한 로비에 막대한 자금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권력이 다시 어느 정도 자신들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하여 정치 근간에 자신들의 입김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은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최소한의 계몽적 가치에 의거 엄격한 정교 분리와 독일과 같은 기독교 사회 민주주의 세력이 이를 잘 제어해 왔으나 전 유럽에 진보 좌파가 몰락하면서부터 이런 미래는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 봐야할 것입니다. 저는 교조와 교조는 서로 일맥상통한다는 말을 믿고 있는데요. 기독교 교조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교조는 서로간의 이익에 대한 의견 교환이 극우 포퓰리즘이라는 매개로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음모론적인 시각이 아니며 신자유주의가 스스로의 ‘소위 글로벌주의‘를 부분적으로 철회하게 된다면 이와 같은 정치적 결합이 터무니없는 상상만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주의가 노동자들의 고통을 더 요구하는 등의 사회 개혁과는 반대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으며, 이것 자체만으로도 신자유주의자들의 이익에 기본적으로 부합되는 것이며, 현재 유럽의 상황에서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인들을 성공적으로 축출해 내기 위해 민주주의적 다원주의를 무력화 시키기 위해선 신자유주의자들의 지원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에서 이들의 야합이 상상속의 일로만 끝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유럽이 과거의 사회 민주주의적 가치를 외면하고 이런식으로 나아갈 경우 종래에 다시 한번 파시즘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것에 저로서도 크게 공감하게 되었는데요. 이미 극우 포퓰리즘이 전혀 제거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고 코로나로 인해 배타적 민족주의가 들고 일어설 기반이 충분한 작금으로서 사회적 파행을 늦추기 위해선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토대가 저자의 말대로 개선될 필요성은 있어 보입니다. 즉, 이것은 신자유주의를 좀 더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것으로 변화시켜 저들이 더 많은 시장을 요구할 때, 우리는 더 많은 사회 보장책을 요구하는 것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크라우치는 요약하고 있는데요. 무엇보다 극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나서는 것보다 인간성을 가미시키는 것에 초점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동안 민주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공격이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고 이에 부역하는 많은 언론인들과 지식인들이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큼 시민들 스스로가 얼마만큼 행동에 나설 수 있을지가 성패의 관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2008년 이후에 이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있어야만 했으나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규제가 다시 미미해지면서 거대 부유층의 사적 로비가 사회적 자원을 등에 업고 많은 정부에 성공적으로 정책 회귀를 시킨 역사가 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가 그러했고 유럽 또한 미국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유지되는 상황으로 빠르게 전개가 되었습니다. 특히, 최근 영국의 브렉시트는 이를 아주 잘 대변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콜린 크라우치의 이 책은 1장과 2장이 신자유주의 비판의 날 것 그대로이면서 독자들에게 신자유주의가 어떤 식으로 우리의 권리와 정치를 훼손시켜 왔는지에 대한 서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나레이션은 특히 랑시에르 혹은 지젝은 갖고 있지 않은 매우 직설적인 어조를 담고 있어 에둘러 표현하는 다른 학자들과는 상이한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전혀 돌려 말하지 않는 그의 양심은 우리에겐 꽤 귀중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문득 인간은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독백이 자꾸 귓가에 맴도는 것은 크라우치와 제가 생각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론적 관점에서 약간 첨언을 드리자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와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의 자유주의는 완전히 다른 개체임을 밝혀둡니다. 왜곡된 관념의 자칭 우파 독서인들이 자유주의의 유산을 신자유주의가 이어 받았다고 하는데 크라우치의 이 글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유럽의 자유주의 좌파와 같이 앞선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맥락임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인간 진보와 그에 따른 사회적 운동 등 억압 받는 사람들의 권익을 위해 움직인 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와 비교하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인식입니다

두 개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외국인 혐오 민족주의다

신자유주의는 기껏해야 최소한의 자원만 갖춘 공공 서비스만 용납했고, 개개인에게는 각자도생의 이기적인 철학이 퍼지도록 부추겼다

대체로 정치적 우파는 외부인의 배제를 추구하는 모든 내부 집단들의 대표자로 정의되었다

가장 큰 위험은 새로운 형태의 국가사회주의, 나치 이데올로기가 등장할 것이라는 점이다

재분배적 과세와 공공 서비스 제공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은 가난이 대개 무기력과 게으름에 기인하며, 자칭 ‘노력해서‘ 성공한 부자들과 중산층들의 재산은 보호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유럽연합에서 교조적인 신자유주의가 부상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 불평등의 폐해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고 있다. 그래도 이 순간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설교하는 보다 이기적인 사회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좌파 및 중도 정치 세력들은 지금 이 순간을 포착할 필요가 있다

질서 있는 노동시장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적 기여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기업의 요구에 따라, 고용 보장 비용은 고용주로부터 국가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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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5-19 0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개인적인 고민과 문제때문이긴 한데, 유럽을 배회하는 그 두 유령...기독교 안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에서 문제의 핵심을 발견할 지도 모르겠네요. 리뷰 감사해요 ^^

베터라이프 2021-05-19 15:21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han22598님. 부족한 서평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독교 근본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을 짦게 언급했습니다만 미국에서는 상당부분 정치권력화가 이뤄진 상황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저들의 이해관계가 이미 사회적으로 연관이 깊어서 쉽게 철회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할 것 같아요. 제가 우려하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지금도 견제책이 거의 없다고 봐야하는데 여기에 다른 세력이 콩고물을 먹기 위해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탑승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조금 장황스럽게 썼습니다만 신자유주의의 비판과 유럽 상황을 폭넓게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크라우치의 이 책을 읽을 필요성이 있다 생각되네요. 좋은 독서되시기를 바랍니다 ^^

han22598 2021-05-20 05:12   좋아요 1 | URL
견제책이 없다는 점이 암울하네요.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결책까지는 아니더라도 새로운 방향이나 지향점 정도는 제시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저는 사실 잘 아는 부분이 아니지만, 새로운 자극의 일환으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초딩 2021-05-20 2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GAFAM 의 다섯 남자들만이 세금을 낼 날이 올거라고도 합니다. Google amazo facebook apple ms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그 단어가 참 좋지 않은것 같습니다. 찬양하는 건지 비꼬는건지 :-)
종의 다양성을 없애면 종이 멸망하듯이
신자유주의는 온 지구촌을 획일화 시키는 것 같습니다.
전주 한옥 마을도 여기가 명동인지 전주인지 모르게요. 그리고 그게 코로나 시대에 도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 같고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1-05-20 21:01   좋아요 1 | URL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가 획일적이고 제한적이라는 측면에서 차별적인데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도 있어요.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저항하지 못할 만큼 내면화가 너무 되어 있어서 경제에 좋은 거면 다 좋은거다 라는 식의 편의주의도 이에 한몫했지요. 거대 자본가들의 이익에 맞으니 신자유주의가 역사에서 퇴장하는 시기는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튼 모두가 체제와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직 갈길은 너무나 멀었습니다 ^^ 댓글 감사합니다 초딩님.

Comandante 2021-05-24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입니다. 양손 엄지 척척!

베터라이프 2021-05-24 20:46   좋아요 1 | URL
너무 부끄러운 글인데 이리 좋아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오장원님도 잘 지내시고 계시죠?
 
금융부패 주모자들 - 히로세 다카시 특강
히로세 다카시 지음, 허강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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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명문 대학인 와세다 대학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한 히로세 다카시는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나서게 됩니다. 이후 의학 번역으로 명성을 얻게 된 그는 전세계에 얽혀 있는 거대 자본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시민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핵 발전과 같은 원자력의 위험성을 폭로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게 됩니다. 특히, 그는 일본에서 거의 보기 힘든 1인 미디어의 대표격으로 기성 언론이 다루지 않는 권력과 그것에 기생하는 유착관계에 대해 실명으로 비판해 내는 활동을 지속해 왔는데요. 위키백과에서 그의 삶에 대한 이력을 보면서 이 사람에게 정말 생명의 위협은 없는 것인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적당히 이익에 굴복하여 사는 현대인들의 삶에서 이렇게 올곧은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저에게는 실로 믿을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는데요. 한편으론 종종 그의 글을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資本主義崩壊の首謀者たち˝로 지난 2009년 집영사에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7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매뉴얼 윌러스틴에 의하면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가 부시 행정부 시절의 네오콘의 무분별한 확장 개입이 어느 정도 원인이 되었다고 진단했었는데요. 또한, 일부 음모론자들은 이것이 유대인 금융 세력인 로스차일드 가(家)의 음모라고 보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걔중에서도 한가지 확실한 견해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의 무분별한 남발과 신용 평가 기관의 부패 그리고 이러한 연계가 미국 부동산의 거대한 거품을 초래했으며 이 상황에서도 미국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절제되지 않는 신용 생활을 지속했던 것이 원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파행이 오로지 미국 한 나라만의 문제였으면 큰 파급은 없었겠으나, 신자유주의에 의해 금융 자본의 국경이 사실상 붕괴되었던 시점에서 전세계의 경제가 무엇보다 연계되었던 상황이었기에 2008년 11월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의 ˝8조 달러˝ 증발은 유럽과 아시아에 막대한 영향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저자인 다카시는 이 파행적 결과물을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대책은 ˝이런 일련의 구제 조치가 진행된 시점에서 자유경쟁의 원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전에도 누누이 언급했듯이, 신자유주의의 기조를 맹목적으로 따르던 저 금융인들과 경제인들이 어떻게 국민의 세금으로 인한 구제 금융을 종래의 주장과 주의와 완전히 상반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대해 정말 간절하게 묻고 싶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사망을 선언하지 않고 다시 신자유주의의 완전 무결성을 외치고 있는 같은 범주의 동일한 자들을 보노라면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다카시도 대략 이 책을 통해 분석하고 있지만 과거 포스트 포드주의에 입각해 산업 전반의 변화와 자본주의가 금융주의로 변질되면서 이러한 시스템의 견고화를 한마디 말로 불식시키기란 어렵다는 것은 받아들여야 하겠죠. 다만, 언제까지 비상식적인 시스템을 방치해서 다수가 아닌 소수의 이익을 위해 불법적인 투기장으로 이끄는 것이 자본주의적 발전과 어떤 하등의 관계가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이런 저의 의문에 히로세 다카시는 2장에서 어느 정도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일전에 여러 호사가들이 과거 조지 W. 부시가 네오콘의 꼭두각시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폭로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도 사고력에 큰 의문을 갖고 있던 부시 대통령은 2005년 뉴올리언스 허리케인 사태에서 무능한 재난청 관료들을 방치하고 스스로도 늦장 대처를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미 연방 대통령이 단순히 인간적인 매력만으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님에도 그의 임기 내내 이러한 의문은 가시질 않았습니다. 반대로 오바마는 연방 대통령 취임 이전 이미 월스트리트의 공격적인 정치 자금으로 유명했고, 여러 연설을 통해 뉴욕 발 금융 위기에 대한 원인 제공자들의 법적 책임과 여러가지 규제책을 피력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전부 무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티모시 가이트너와 같은 자들이 금융계와 정치를 물타기 하면서 이러한 오바마 시기의 금융 엘리트와 정치 엘리트들의 야합은 그 사례를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증거가 많은데요. 라구람 라잔이 이 금융 엘리트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던 바가 있으며, 거대한 부를 소유한 부유층과 그들을 대신하는 투자 에이전트들 그리고 수많은 금융인들이 전세계 금융 시장을 돈을 뽑아 내는 수단으로 삼아 종국에는 정상 국가까지 돈으로 회유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조지 소로스가 이에 해당하는 인물일텐데요. 그는 1990년대에 영국 파운드화를 먹이 삼아 영란은행을 혼절시킨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에야 여러 번역서들과 공언무시와 같은 발언들로 인해 무슨 신자유주의의 건설적 비판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금융 엘리트들의 실체는 건전한 사회라든지, 시민들의 이익이나 국가 체제의 안정성 등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카지노 자본주의적인 자본 획득‘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애초에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불로소득‘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규제가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 전세계 금융 시장의 도덕적 해이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포드주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층의 폭발적인 재산 증식이 이 금융 시장의 발전과 함께 한 것이고 저들이 동원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수단들과 각계 각층의 인맥으로 인해 사실상 행정부 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여기에 복잡한 혼맥과 정치 인사들이 은퇴 이후 각종 금융계의 고문이나 명예 사장 등으로 취직해 사실상의 견고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애초에 강조했던 개인들간의 공정한 경쟁과 자유 시장의 접근성에 매우 반하는 결과임은 분명합니다. 19세기에 견고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변질된 자유주의의 바통을 이어 받은 신자유주의가 권력과 힘있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 더욱더 맹종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파행에 아무런 비판과 견제가 없다는 점이 오늘날 경제 시스템의 가장 큰 과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 서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조지 W. 부시의 ˝자유주의에 의한 경제발전과 번영이 자랑스럽다˝는 발언이 얼마나 단순하고 일면적인 평가인지 알 수 있게 합니다.

끝으로 현재 미국에서 금융 엘리트들과 정치 엘리트들간의 지속적인 협력에 따른 이들의 이해관계의 공유는 미국 시민들의 눈을 가리면서 이것이 자유 민주주의의 번영으로 가는 길임을 왜곡하고 있습니다만 애초에 건국의 아버지들이 정치 시스템으로서의 견고한 견제를 고민했다는 점에서 저들의 행보는 사실상의 과두제로 가는 길을 잘 닦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달러가 전세계의 기축 통화가 아니었으면 그런 막대한 군사비 지출 하에서 온전히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웠을 터인데, 이러한 환경을 사실상의 거품을 유발시켜 막대한 시세 차익을 기대하는 쪽으로 지속되고 있는 점은 매우 우려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경제인들에게 규제 자체가 무슨 지옥에서 온 거대한 악마의 수단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글래스-스티걸 법의 무력화로 인한 결과물과 서브 프라임 모기지의 적절한 규제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던 문제가 어떤 고통을 유발했는지 시민들이 아니라 저 금융 엘리트들이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막대한 미국 시민의 세금으로 막혔던 숨통을 다시 트이게 된 점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죠.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원칙적으로는 채권의 증권화에 있었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당시 심각한 수준이었던 미국 주택 시장의 거대한 거품이 원인이었습니다. 비슷하게 우리 나라 역시 호주와 스페인과 더불어 부동산 시장의 버블 상태에 놓여있는데요. 그동안 소위 갭투자로 짭짤하게 돈을 따는 그런 행위 혹은 경제 활동이 사실상 정상화가 되어야만 하는 과제임은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이런식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경제인들과 학자들의 반성과 비판적 조언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하루 빨리 이러한 자본주의에 이성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왜 그런 탐욕에 눈이 먼 무리들에게 우리 세금을 쏟아부으면서까지 돕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그런 말도 안되는 기업 룰이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끌어들여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 인간이란 생물의 숙명이고 자유주의의 길이다"라고 설파했던 인간들은 갑자기 아전인수식의 이상한 소리를 해대니 말이다

백주대낮에 아무 거리낌 없이 거짓 정보가 유포되어 주가는 올라가고, 거대 신용평가회사가 뒤를 봐주고, 경영자의 보너스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뛴 게 밝혀진 사실이다. 이는 누가 보아도 경약할 만한 월가 금융 부패의 정점이었다

중요한 것은, 서브프라임론 문제가 2007년 매스미디어에 떠들썩하게 보도되기 전부터 저 같은 문외한도 이 두 회사의 경영위기와 부동산 버블에 대해 눈치를 챘음에도, 미국 정부는 그 누구도 그들을 규제하지 않았음은 물론 다른 경제전문가들도 경고하지 않았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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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
이매뉴얼 월러스틴 외 지음, 성백용 옮김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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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 손꼽히는 사회학자 5인이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과 그에 대한 비판 그리고 앞으로 이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측한 이 논저는 소위 2008년 세계금융위기 혹은 대침체에 착안하여 쓴 글이기도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현재의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들로 인해 체제 전반의 위기를 느끼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다만, 최소한의 상식선에서 이러한 진단을 하고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반대로 무비판적인 자유시장 원리주의에 이미 몰입된 사람들은 현재의 자본주의가 대체 무슨 문제를 안고 있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는데요. 이런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이 자본주의에 대한 합리적이고 면밀한 분석은 그만큼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참여한 집필진인 총 5명의 사회학자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찍이 자본주의적 세계체제론을 분석한 이매뉴얼 윌러스틴, 개인적으로는 대니 로드릭과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다 여겨지는 랜들 콜린스, 특유의 군사학적인 관점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바라보고 있는 마이클 맨, 저명한 민족주의 이론가인 게오르기 데를루기얀, 비교 역사학과 실증 사회학의 거장인 크레이그 캘훈이 이들입니다. 이 책은 원제, ˝Does Capitalism Have a Future?˝로 지난 2013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4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간단하게 여기에 소개된 5인은 자본주의 체제 전반을 나름의 식견에 따라 다각도로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윌러스틴과 콜린스의 입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을 논하고 앞으로의 미래가 상당한 개혁이 없으면 암울하다는 전망으로 양자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으며, 다음 마이클 맨은 자본주의 체제가 급격하게 붕괴할 가능성을 먼저 부정하면서 대공황과 2008년 대침체를 기반으로 자본주의가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지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데를루기안은 과거 구소련 체제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오늘날 자본주의가 저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인가에 대해 분석하고 마지막 캘훈은 자본주의가 스스로 개혁된 상태로 온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자본주의 자체가 시장 경제이면서 동일하게 정치학적인 카테고리를 갖고 있다면서 이런 고리들이 꽤 견고한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윌러스틴이 세계제체론에 입각해 자본주의의 노정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부분에서 특유의 ‘헤게모니 사이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데올로기적 체제가 각자 수명을 갖고 태어나며 자본주의 역시 그것을 벗어나기란 어려우리라는 진단을 그는 내리고 있는데요. 자본주의 자체를 거대한 생명체로 여기는 학자들이 의외로 많은 것처럼 이것을 논외로 하더라도 어떠한 사상이나 체제 자체가 인간의 역사에서 영원히 존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학문적인 접근에서도 쉽게 긍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현재의 자본주의적 경제 기조의 위기가 어떻게 보면 미국의 헤게모니 쇠퇴와 연결이 될 수도 있을텐데요. 대략 46퍼센트에 이르는 미국의 국방비 지출과 반대로 사회 부문의 비용 투입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 전반의 사회 보장이 유수의 선진국들 가운데 최하를 걷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효율성을 부득 강조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은 수치입니다. 이에 마이클 맨은 ˝자유시장에 대한 호소가 자비로운 국가에 대한 호소보다 이데올로기 상으로 더 깊이 미국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미국인들이 신념 이상으로 내면화 되어있는 자유에 대한 믿음과 그 자유를 잣대로 자신들의 삶 마저 해석하는 이러한 특유의 관념적 상황은 미국의 자본주의가 어떠한 양상을 띄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 뉴욕발 세계금융위기에서 아마도 수많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질서 옹호론자들에 의해 ‘금융시장에서의 케인스주의적 대처‘를 한시적으로 수용하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맥락을 견고한 사회학적 틀의 변화로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경제학자들이 적극적인 국가 담론을 거부하며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강하게 옹호했던 얼마전의 주장이 문득 떠오릅니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시장 자체를 붕괴 상태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뭐랄까 이런 전개에 대한 아무런 자각이 없는 저 금융 엘리트들을 보노라면 다소 후안무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매뉴얼은 이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자본을 영원히 축적 가능하다는 점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뒤이어 논증되는 콜린스의 주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불평등의 심화 자체가 다수의 중간 계급을 몰락에 이르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과소 소비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혁명의 기운을 우려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내부부터 몰락하게 할 원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불평등의 심화와 금융 시장의 불안˝이라는 이 두 가지 사안은 미래의 자본주의를 어떤식으로든 변질시키는 위험요소라 할 수 있을텐데요. 상위 고소득 계층이나 이미 부유의 단계를 넘어선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의 안정이 최대로 중요한 요소이며, 콜린스의 주장대로 지금처럼 자본주의가 온라인 사업과 인터넷 혁명으로 종래와 달리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 이 새로운 테크노크라트들이 불평등의 문제를 등한시하게 됨으로써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종말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콜린스의 중요한 주장대로 중간 계층의 소멸내지는 몰락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건전성을 해치게 되리라는 것을 익히 전망하게 하는데요. 이처럼 사회의 건전성과 자본주의의 체제 유지는 매우 연관이 되어 있으며, 이것을 가소롭게 혹은 대단치 않게 보는 이들의 논법이 과연 스스로의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냐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윌러스틴과 콜린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순수한 종말로서가 아니라 여러 복합적 요인들로 인해 이 몰락이 가속화 될 수 있다고 보는데요. 핵무기에 따른 핵전쟁 가능성과 심각한 기후 변화로 인한 인간 삶의 위태로움이 자본주의 종말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사회적 격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혁명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자본을 축적하기를 바라는 탐욕의 자본주의가 지구와 인간 사회의 건전성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자멸에 이르는 것을 사실상 뜻하는데요. 특히 무지한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시장자유의 순수성‘이 끝내 자본주의를 비명에 이르게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정치사회적인 혁명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스스로 목줄을 졸랐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여기 콜린스의 예측과 거의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됩니다. 이 두사람과는 달리 마이클 맨은 ˝미래의 혁명적 변혁˝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자본주의가 내부 모순의 가능성을 크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종말을 고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근거로 현대 좌파의 세력이 매우 보잘 것 없으며, ˝좌파의 미래는 기껏해야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거나 자유주의가 아닐까 싶다˝며 이를 일축합니다. 사실 과거 신자유주의적 파고에 있어서 진보 좌파의 몰락 자체는 근본적으로 사회에 있어서 이익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지구가 아니라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것이겠죠. 마이클 맨의 앞선 결과론적인 견해로 좌파의 몰락을 분석하려 시도한다면 그야말로 오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마이클 맨은 핵무기와 어쩌면 연관성이 있을 민족주의를 자본주의 체제의 종말 보다도 더 위험 요소로 보고 있습니다만 이에 대한 진정성은 차치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대안을 그저 ‘네오파시즘적 이행‘으로 한발 물러서 이를 분석하는 것은 막연한 소설보다도 더 위험하다고 여겨집니다. ˝금융자본과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지대한 미국과 영국˝을 이해하면서, ˝이 신자유주의가 금융 자본이 뜻하는 대로 몸을 움직여 많은 나라들을 수렁에 빠지게 한 점˝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인류가 어떤 짓을 하던 자본주의를 벗어나기 힘들것이라는 틀에 박힌 주장은 통념으로는 그럴 수 있다쳐도 밀접한 대안이 되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 한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크레이그 캘훈은 ˝2008년 위기의 뿌리는 미국과 유럽에 집중되어 있었다˝ 분석하면서 더욱이 유럽에서는 반정치의 위협까지 존재했다고 덧붙입니다. 물론 이들 반정치 운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시장에서 정치를 퇴출시키는 교묘하고 대담한 전방위적인 작업에 있다고 봐야할텐데요. 앞선 마이클 맨의 주장대로 시장 경제를 부정하고 탈자본주의적 길에 들어서는 국가가 등장할 경우, 이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를 존속시키고 유지시키려는 다수의 국가들에 의해 봉쇄 내지는 북아프리카의 민주화 운동 시기에 프랑스와 영국이 개입했던 것처럼 진보와는 아주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본주의적 위기는 모순의 양상에 따라 어느 국가에서든 존재할 수 있지만 아예 탈자본주의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는 매우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전세계게 이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만약 예멘이나 콩고와 같은 국가에서 탈자본주의 운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국지적인 문제로 국한되겠지만 반대로 일본과 같은 국가에서 탈자본주의로 나아갈 경우 종래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연대해 일본에 개입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캘훈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가 어느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전세계적인 사회경제적 체제이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양대 기조에 해를 끼치려고 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그것의 실효성 여부를 떠나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100년 이후 급격한 기후 변화 때문에 세계 체제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고 필자들은 예측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가장 높은 시나리오는 자본주의 자체가 내부 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심각한 불평등 문제와 계급 간에 심대한 경제적 차이는 자본주의 스스로를 몰락하게 하는 요소이며, 이것에 대해 제대로 된 접근을 하지 않을 경우 자본주의를 몰락하게 하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 스스로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거듭 밝혀두고 싶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윌러스틴 역시 ‘도덕적 가치의 회복‘이라는 부분을 거듭 강조하고 있고 기술 관료들과 엘리트들이 사회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콜린스의 주장 역시 자본주의의 존속에 필요한 일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가운데 ‘핵전쟁에 따른 절멸‘이 인류 생존의 문제로 남아 있고 전쟁으로 인한 갈등 해결이라는 해법이 ‘상호확증파괴‘라는 지옥의 실현 가능성 때문에 핵전쟁의 발발을 방지하고 있지만 이를 반대로 뒤집어 보면 잃을 것이 없는 ‘실패 국가‘가 핵무기를 사용하게 될 환경이 조성된다면 이를 방치한 국제 체제의 무능으로 인해 비롯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대니 로드릭은 이미 국제 체제의 비규범성과 비민주화로 인해 언제나 이러한 위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요. 이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며 기존의 체제를 터무니 없이 맹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인류 전체가 항상 주지하고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진보주의의 일각에서 아직도 한국을 유독 남한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 출판사가 진보를 대변한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글 본문에서 남한과 한국을 동시에 표기하는 것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더불어 이딸리아나 에스빠냐 혹은 엘리뜨와 같이 과거 ‘종속 이론‘과 같은 논저에서 보여지는 단어 번역이 이 글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요. 그저 현재의 외래어 표기법을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 뿐입니다.

중도 자유주의는 세계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 사실상 유일하게 정당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에서 물러났다

오늘날 세계 앞에 놓인 문제는 자본의 끝없은 축적을 효율적으로 추구하는 능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정부들이 어떤 식으로 자본주의 체제을 개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로 경영되는 미래 세계가 반드시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묘사한 것처럼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한 감시와 독재국가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산업의 생산품들에 대한 열광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 전반에 걸쳐 개인 소비지출을 지탱하고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작동을 지속시키는 데 충분할까? 금융시장들이 밑바닥의 군소 참여자들을 착취하면서 점점 더 집중화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그렇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역사적 혁명들과 폭력의 다양한 양상이 최종적인 자본주의 위기에도 역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한결같다. 중간 계급의 기술적 대체가 지금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지역들에서 21세기 끝나기 전에 자본주의의 몰락을 몰고 오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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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지성인 - 개정판
에드워드W.사이드 지음, 전신욱.서봉섭 옮김 / 창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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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뒤흔들었던 명저,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인 에드워드 와디 사이드는 공공 지식으로서의 자신의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지식인입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계 미국인으로 프린스턴과 하버드를 거쳐 2003년까지 컬럼비아에서 후학을 지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이드는 중동과 관련된 미국의 외교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논저가 탄생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에드워드 사이드가 새뮤얼 헌팅턴과 완전 다른 대척점에 있는 학자로 이해되고 있는데요. 사회체제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을 지식인들이 가면 갈 수록 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책무를 다하는 지식인의 존재는 실로 귀중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의 이 글은 서문에도 간략히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1948년에 버틀란드 러셀이 주도한 영국 BBC의 리스 강좌 Reith Lecture 에 출연한 사이드의 강의를 묶어 출판한 된 것입니다. 따라서, ˝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이라는 원제로 지난 1993년에 처음 출판된 이 책은, 국내에는 1996년 초도 번역이 이뤄졌습니다. 이후 2011년, 개정판이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뒤에도 차차 다루겠지만 번역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정말 개정판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이 책의 편집 자체는 처참한 수준인데요. 단언컨대, 이 책을 펴낸 출판사의 편집 인원들이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편집 오류에 대해선 글을 마무리하고 따로 기록하겠습니다. 그리고 원제를 충실히 번역하지 않은 국내 번역본의 제목에 대해 비판을 하고 싶은데요. 글 전체의 문맥을 좀 더 완벽하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책 제목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번역 제목의 취지는 공감이 될 만한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만 책 판매고를 위해서인지 원제와 동떨어진 제목 번역은 한국 출판계의 자기들 스스로의 관행이었으니 제목 문제는 이쯤에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성인 Intecllectual 에 대한 쥘리앙 방다의 강고한 정의를 먼저 밝혀보자면, 그는 자신들의 말과 글에 권력에 의해 화형을 당할 각오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지성인 계층의 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할말을 할 수 있어야만 지성인의 책무를 다할 수 있다는 관점은 오늘날 사회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부분이라고 많은 분들이 그리 여기실텐데요.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에드워드 사이드가 글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그만큼 사회의 도덕성과 정의감이 상당 부분 쇠퇴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이상적인 목적 자체에 대한 현실 괴리라는 측면의 부정하는 사조 자체가 사회 전반에 너무나 강고하게 깔려있으며, 모든 각계 각층이 이 ‘현실적인 조건‘에 대해선 끊임없이 입아프도록 발언하면서도 앞으로 다음 세대나 혹은 인류 전체가 나아가야 될 방향을 규정하는 이상향에 대해서는 밑도끝도 없는 거부감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부정하기 힘든 현실일겁니다. 이와 관련해 사이드는 지성인이라는 부류가 ˝자유와 정의를 위해 행동할 의무˝가 있으며, 특히 재현 Representation 즉, 불의한 상태에 있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지식인들이 마땅히 이들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오늘날의 사회 전반을 분석해 보자면, 인류가 지난 역사에서 걸어왔던대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마땅히 보장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하는 부분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러한 노정 가운데 이 지식인들(앞선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는점에서 저는 지식인이라 지칭하겠습니다)은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쪽으로 타협하게 됩니다. 이 점과 관려해 저자는 5장에서 권력과 보다 밀착한 지성인들의 사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권력의 요구와 방향성에 스스로 순종하면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끊임없이 추종하는 현대의 지식인들의 자화상은 만약 쥘리앙 방다가 이를 목도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과거 장 폴 사르트르는 지식인들이 대학의 바깥에서 홀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했던 것은 그 자신의 도도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이익에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사이드는 이런 사르트르의 입장을 완전히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서 소개되고 있는 노엄 촘스키처럼 할말은 해야하고 누구 눈치도 볼 필요도 없이 비판은 서슴치 않는 그런 정신만은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듯 보였습니다.

따라서, 사이드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지성인의 과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성인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과업으로 추가해야 할 것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지성인이 자신의 국민들의 집단적 고통을 재현하고, 그 고통의 극심함을 입증하고, 고통의 지속적인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고통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의무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점이다˝라고 강조합니다. 현재의 세계가 권위적인 정부들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억압받고 있는 상황을 충분히 인지한다면 앞선 방다의 날선 주장은 결코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성인의 양심은 내가 아니라 다수의 계층이 핍박받고 고통을 받는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다는 목숨을 걸어야 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고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지성인들의 노정이 ˝인간의 자유와 지식을 발전시키는 것˝에 있다는 자체가 ˝여전히 변함없는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진정성을 갖추고 있다 생각됩니다. 지성인 개인의 권리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이 공익 앞에서 자신의 사익을 저울질하며 정치 전반을 반정치로 퇴행시킨 원동력이었다는 점에서 지성인이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사회의 미래 자체가 어떻게 될지는 무슨 아마겟돈과 같은 상상속의 산물이 아니라 충분히 파괴적인 결말을 예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정부와 하나가 된 지성인들의 맹종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등장합니다. 종전의 제임스 뷰캐넌과 같은 지식인이 CIA의 의도에 장단을 맞춰 칠레의 민주 정부를 전복시켜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세운 것은 의미심장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제3세계의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수행된 반게릴라 연구 가운데 일부의 경우는 은밀한 활동, 사보타지, 심지어는 노골적인 전쟁에 직접적으로 적용되었고, 도덕성과 정의 문제들은 그러한 계약들이 충족될 수 있도록 뒤로 제쳐졌다˝고 사이드는 이와 같이 강조합니다. 사실 이익을 앞세우는 행위의 전반적인 사조는 도덕성과 정의를 뒤안길로 내몰았고 그러한 행태 자체가 꽤 영리하고 존경받을만한 것으로 포장되어 왔습니다.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인물들의 이해는 바로 그러한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라이트 밀즈가 권력은 끊임없이 견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는 바로 그와 같은 파행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그 견제를 주도할 수 있는 자들은 지성인들이며, 그 의무에 대해 반감을 조장하거나 다른 말로 곡해시키는 자들은 거의 선동과 다름없다 여겨도 의미가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소위 전문화와 직업전문주의의 시대에 대해 사이드 특유의 통찰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말과 현실의 괴리˝는 차치하더라도 이 엘리트주의에 대한 맹신은 ‘전문지식을 다룬다‘는 전문 직업 계층의 입장과 발언을 가면갈 수록 맹신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가 고착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반엘리트주의자로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소위 그 분야에서의 리더라고 하는 자들이 허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수용하고 길들여진다˝는 사이드의 맥락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 엘리트주의에 있어서 다수의 보편성과 보편주의는 허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의 폐쇄성을 용인하는 것 자체가 특수성이라는 논법으로 사실상 사회의 계층화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자본주의는 계급주의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이념이었음에도 충분히 변질되어 왔으며, ˝잘 사는 자들의 이익˝, ˝고도로 교육받은 자들의 이익˝, ˝전문 직업에서 일하는 자들의 이익˝ 등 아주 노골적으로 주장되지는 않고 있지만 사회 전반이 이들의 이익을 거의 용인하고 있는 상황이며, 그것을 능력주의나 자아 실현 등으로 포장되어 교묘하게 자신들을 소수라 규정하고 다수의 횡포에 어떻게 맞설 수 있겠느냐로 사회적 발언 자체가 왜곡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권력 구조 자체가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부유층과 전문 직업 계층과 다수 시민들의 심각한 불균형적 상황을 그저 자본주의의 원초적 모습이다 혹은 그것이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점은 이미 사회가 모순의 심각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는 게 아닌가 판단해봅니다. 애초에 보수라고 불리웠던 자들이 초기 자본주의에서 극렬하게 저항했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지성인 뿐만 아니라 시민들 모두가 아마추어 정신을 갖고 사회를 비판하고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기도 합니다. 권력 자체를 지향함으로써 대다수 언론인들이 비판 의식을 결여한 작금의 상황은 자본과 결탁한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시민들이 자본주의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길들이는데 막대한 자금이 투하된 것이 한몫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지향 목표를 오로지 보유한 재산으로 평가받게 하는 탁월한 계산도 이바지했으며, 사익을 추구하는 것 자체에 대한 경계심을 상당히 유명무실하게 만듦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사회가 자본에 의해 건전해지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사회가 주체가 되어 자본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지만 엘빈 토플러의 말대로 자본이 전 세계의 제1 권력이 된 것은 절대 과장이 아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일전에 신자유주의의 파행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던 것은 유럽의 진보 좌파의 몰락이라고 언급했던 바가 있는데요.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시민과 좌파 사이의 조직적인 이간질은 차치하더라도 소수의 좌파가 스스로 이와 같은 거대한 파고를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모두 죽을 각오를 하고 저 파고에 대항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측면으로 봤을 때는 지나친 요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기도 합니다.


-본문 72페이지, 78페이지, 89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알베르 카뮈에 대한 통일되지 않은 호칭 (카뮤, 까뮈), 96 페이지에 등장한 헨리 키신저에 대한 성명 오타 (킨시저), 나중에는 키신저로 표기, 92페이지에서 93페이지에 레반트, 러반트의 통일되지 않은 지명 등 확실히 출판사의 편집인이 제대로 책을 검수하지 않은 점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불완전한 상태의 책을 개정판이라고 내는 처사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성인은 약하고 대변되지 못하는 자의 편에 속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에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지성인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과업으로 추가해야 할 것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지성인이 자신의 국민들의 집단적 고통을 재현하고, 그 고통의 극심함을 입증하고, 고통의 지속적인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고통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의무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권력으로부터 보상을 받은 그러한 전문직업인의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것은,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지성인이 기여해야 하는 분석과 판단에 있어서, 비판적이고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정신을 행사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느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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