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의 시대 - 통제하다 평화롭다 불안하다
아르망 마틀라르 지음, 전용희 옮김 / 알마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벨기에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진보주의 학자로 알려진 아르망 마틀라르는 미디어와 문화 및 커뮤니케이션을 주제로 특히, 역사와 세계화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지식인입니다. 그는 미국의 록펠러 재단과 연계된 피노체트 정권 이전의 칠레의 제도 개혁에 자문 위원으로 나섰으나, 1973년 미국 리처드 닉슨 정권에 의해 자행된 칠레 군부의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 이후, 칠레에서 추방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의 이력을 통해 살펴보면 자유주의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후 벨기에가 아닌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37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학업을 다시 이어가, 노력끝에 파리 8대학의 방문 학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파리8 대학의 정보통신학과의 정교수가 되었으며, 1983년과 1997년 사이에는 프랑스 렌2 대학의 정보통신학과에서 교수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97년부터 2004년까지 파리 8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다 2004년 9월부터 동 대학의 명예교수를 맡고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La Globalisation De La Surveillance"로 지난 2007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이 글은 현재 국내에서 절판된 상황입니다.

국역된 책의 제목으로 인해, 글을 읽기전에는 9.11 테러 이후에 불어닥친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안보 강화를 다룬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요. 사실 이 글의 정확한 요점은 "오늘날 점차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안보에 대한 인식과 과거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이어진 다수에 의한 권리 및 그에 따른 공화주의"가 미국과 같은 헤게모니 국가에 의해 어떻게 침탈당했는지를 여러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는데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업의 이익과 그것을 보장하고자 하는 국가의 안보 함의와 이것이 각국의 정치 지형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분석하는 광범위한 안보에 대한 본질을 추구하는 일종의 르포르타주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글에는 알제리 독립 시기에 자행되었던 알제리인들에 대한 프랑스 군부의 조직적인 납치와 고문, 그리고 그것을 지원하던 각종 조직과 시설 등을 다루면서, 비슷한 맥락으로 미국이 국가 안보와 국익을 매개로 자행했던 라틴 아메리카 등에서의 조직적인 군사적 개입 및 CIA와 같은 안보 조직에 의한 작전 등을 거의 가감없이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에드먼드 버크의 초기 사상에서도 기인한 것이지만, 무질서한 대중들에 의한 사회 체제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권력층의 요구는 통제와 질서의 붕괴 가능성에 따라 안보 개념이 탄생한 것으로 1장과 2장의 논증을 통해 저자는 규명하고 있는데요. 가브리엘 타르드와 귀스타브 르 봉에 의해 확산되었던 '조직된 대중' 혹은 '무질서한 군중'에 의해 사회 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는 당시 지식인들과 지배 계급의 공포는 현재 우리가 짐작하게 되는 공포보다 지대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지금도 사회 질서와 체제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기존의 질서 자체를 수호하고자 하는 테크노크라트와 엘리트들이 이러한 관념을 견고하게 지지하는 것도 분명합니다. 이것에는 저들의 사활적 이익이 체제적 안전이라는 틀안에 교묘히 숨겨져 있습니다만 그것을 떠나 설사 체제 자체가 건전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저들의 우려를 동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자유 세계의 리더라는 미국과 현재의 이 체제를 같이 고민하고 만들었던 서구 유럽 국가들이 자유주의적인 이론적 토대하에 '현실적인 살'을 갖다 붙인 것이 지금까지 국제 체제가 만들어진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국내 정치적 환경에서 저들이 자신들의 침해받지 않는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 공화주의와 민주적 절차를 절충해 받아들인 것이지만, 헌법의 존재 의미를 되도록이면 언급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현재의 안보에 대한 주요 국가들의 사회 제도와 그 태도의 기본적 인식에 있어서 전자와 같은 유사한 궤를 같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헌법이 먼저냐, 체제가 먼저이냐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물론 이것을 후자가의 입장이 이데올로기화 되어 변질된 자유주의적 인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 보이는 분석과 마찬가지로 위의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안보와 이익을 위해 타국과 국제 체제에 능동적으로 개입할 필요성에 대해선 다소 주저했던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즈음에서 소위 현실적 맥락의 보수주의라고 부를 수 없는 보수주의자들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죠. 이처럼 자신들의 국가 체제에 있어서 현재의 토대를 지키려고 하는 일차적인 요구가 처음에는 타국에 - 미국에 있어서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대해 명분 없이 개입하는 것을 꺼려했으나, 이 보수주의자가 아닌 자들에 의해 환경 자체가 백팔십도 변하게 됩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냉전시기의 이 보수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그 가운데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들도 있었지만, 당시의 소위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자들은 명확히 말하자면 거의 '반공주의자'에 가까웠습니다. 즉, 민주적 가치에서 흔히 이해하고 있듯이, 정치에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결코 균질화될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을 넘어 사회 전반의 건전한 비판에도 이'공포의 레드'를 노골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저자인 아르망 마틀라르는 이 글의 6장에서, "매카시즘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같이 강력한 보수주의"라는 표현으로 이를 수식하고 있었는데요. 저자의 이러한 인식에 충분히 동의를 하게 됩니다. 최소한의 부조리를 개혁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면서,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기존의 지배 엘리트들이 다수의 대중이 모인 그 '집합체'를 본질적으로 혐오하고, 잊지도 않은 혁명의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사회 비판의 목소리를 철지난 이상주의로 몰아왔는데요. 이 철저한 반공에 대한 노스텔지어는 지금도 강한 생존성을 갖고 있다 여겨집니다. 물론 시민의 자유를 포함한 민주주의에서도 충분한 함의를 갖고 있는 '자유주의'에 대해 저 역시 크게 긍정하고 있습니다만, 저 반공주의자들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지칭하는 자들)에 의해 규정된 자유(소수 기득권의 자유과 자유 시장 담론)와 다수 시민들의 자유가 그 맥락이 다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모두의 자유를 함의하는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안보 욕망이 오늘날 국가 체제 안정과 주변의 정치적 안정이라는 미명하에 196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소수 힘있는 국가들에 의해 -특히 미국-  조직적인 군사적 개입 등을 나타난 것입니다.

이 글의 4장에서는 앞선 국가들의 안보 정책을 총괄하는 '비대해진 안보 조직'에 대한 성역화를 먼저 꼽아 볼 수 있겠는데요. 미국의 CIA와 같은 경우 무조건 의회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긴 하지만, 이 정보 조직들은 기어코 헌법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동안 CIA는 테러리스트로 오인해, 프랑스와 미국의 시민권자를 납치한 경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의회와 사법 조직이 마땅히 경고하고 응징해야 했음에도, 이들에게는 아직도 치외법권적인 안전망이 존재합니다. 사실 이 뿐만 아니라 이들이 장차 시민들을 억업하거나 형식상은 민주주의이나 거의 '과두제에 준하는' 체제에서 시민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이것은 합리적인 의심을 갖을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정보 조직에 대한 명확한 정치적 견제가 이뤄지고 있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직화 된 과정들이 과거 안보에 대한 프로파간다의 확립과 카를 슈미트와 같은 '예외 법칙'을 주장한 지식인들에 의해 마련되었는데요. 더욱이 이 슈미트의 논리들은 이후,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주권 국가' 혹은 '종속 국가'에 별다른 도덕적 자책감이 없이 군사력을 투입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안보가 위협받는 비상한 시기이니 마찬가지로 비상한 작전과 개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이죠.

다음, 8장에서도 논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시장과 그에 따른 세계화에 따라 국가의 체제 안보는 더욱 중요한 관념이 되었습니다.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오늘날과 같은 긴밀히 연결된 시대에는 주변 국가 뿐만 아니라 견고하게 구축된 체체 전체의 안전이 중요하게 되었는데요. 신자유주의 시기에 정치가 경제의 시녀가 된 것을 차치하더라도, 주요 경제국들이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 막대한 국방력을 투입하게 된 연유에는 이러한 자신들의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2001년 9월 이후 더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유 시장과 무역을 위한 미국의 강조는 '중동 테러리즘의 축출'과 더불어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대로 자유 민주주의는 좀 더 다원성을 지각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동등한 시민들의 권리 또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가 믿었던 체제입니다. 그런데 테러리즘의 시기라는 명목하에 안보 조직이 정치의 장이나 시민의 활동의 분야에 까지, 그 합법성을 운운하며 따지고 들려 하고 있으니 그 자체로 민주주의적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다수는 현재의 미국 정치가 민주주의하에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있으니 전자와 같은 터무니 없는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특히 우리의 민주주의가 소위 '정치적 톨레랑스'를 잃은지 이미 오래된 상황이면서, 또한 정치에서 신자유주의가 득세한지 40여년이 넘었기에 이것을 마냥 안심하면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칠레에서 추방된 경험을 익히 겪었기 때문에, 안보에 대한 맥락이 어떤식으로 왜곡될 수 있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10장에서 논하고 있는 "시민 보호의 취약성"은 단순히 부풀려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요. 유럽 연합이 2001년 이후 개인정보 수집과 관리에 대한 공격적인 대책을 신속하게 통과시킨 것은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러한 이행 가운데, 우리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을 구분하고 더 나아가 유럽의 이민자들을 테러리즘의 배후로 인식해, 이들에 대한 시민권과 관련된 가혹한 조치를 시작한 것은 우리에게도 시시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유대인을 비롯한 비 게르만계 주변 이웃의 시민권을 침해하면서 이들을 격리시킨 나치 독일의 사례를 보면, 이와 같은 반이민주의와 그에 따른 강력한 안보 함의는 다소 우려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민들의 안전이 국가의 일부 조직에 의해 인질로 잡힌 경우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더욱이 고도화 되어 가고 있는 네트워크 시대에 개인 정보와 기본 권리가 기업과 국가 조직에 들어가 있는 상황은 헌법의 유명무실화를 통해 달성되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는 좀 더 현실적인 시민들에 의한 국가와 국가가 주도하는 안보 정책의 현실적인 견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일종의 중립적인 민간 감시 기구를 만들어서 헌법이 이들에 대한 법적인 감찰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각국의 안보에 대한 매파가 득세하지 않도록 진정한 자유주의자들이 정치 일선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받고 있으며, 작금의 세태 자체가 다음 세대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정치 환경의 개선과 무엇이 민주 국가에서 제일 필요하고 시급한 것인지를 공화주의와 헌법에 입각해, 다시금 고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철지난 이상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모두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여겨지는데요. 또한, 이 지점에서 지배 엘리틀이 다수 시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자각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안전사회는 18세기 후반 이후 스코틀랜드 출신의 계몽주의자 애덤 스미스와 중농학파의 수장 프랑수아 케네가 초석을 쌓은 자유주의와 혼합된 형태다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군중에 대한 토론은 언론 자유와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통해 획득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표현법을 실천할 수 있게 하는 징조였다

귀스타브 르 봉의 의견에 따르면, 군중은 프랑스대혁명과 함께 시작된 평등주의에 대한 망상이 승리하면서 불거져 나온 것에 불과했다

가브리엘 타르드는 ‘여론과 군중‘에서 군중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다시 강조한다

이 같은 조치는 1798년에 시작된 ‘외국인 단속법과 치안유지법 Alien and Sedition Acts‘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 법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평화 유지를 명분으로 수천 명의 미국인을 구속하고 독일 출신 미국 시민권자들의 워싱턴 출입을 금지하는 것은 물로 근방 5킬로미터 내에 접근하는 것까지 차단했다

테크노크라시라는 용어는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활동하던 윌리엄 헨리 스미스가 1919년 잡지 산업 경영 Industrial Management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들의 기대와 맞물려 진행되고 있는 "영원한 전쟁"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발터 밴야민은 1930년,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에게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라틴아메리카를 부차적 국가로 분류했다. 그 원인은 19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적 코드와 "정복 없는 미국의 원정문화"에서 나타난다

1954년 8월 4일. 르몽드 Le Monde에서 샤를 라쉬로이는 온건한 민주주의의 프로파간다가 그들의 타깃 중 10분의 9를 벗어난다고 말했다. 반면 엄격하고 강력한 수평 구조의 계급사회에 편입된 프로파간다는 최대의 효과를 보장한다고 설명했다

쿠바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크고 작은 혁명의 움직임이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속출하면서 미국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남반구의 안전을 위해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 간 군사협조 시스템 계획을 재가동시켰다

2년 후, 미국 정보기관들과 닉슨 대통령에게 국가안전보장에 관해 고문 역할을 했던 헨리 키신저와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의 정보부장관들은 납치와 강제 실종 그리고 고문이 자행된 ‘콘도르 Condor 작전‘을 실행했다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는가? 라는 물음은 점점 더 절박한 방식으로 서방 국가 지도자들과 기자, 연구원 그리고 대중에게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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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의 문화
노암 촘스키 지음, 홍건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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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전에 작고한 하워드 진과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살아있는 양심으로 일컬어지는 노엄 촘스키는 스스로 열렬한 민주주의자이자 사회 비평과 및 정치 운동가로 본업인 인지 과학과 언어학 분야와 비견될 정도로 폭넓은 명성을 얻은 지식인입니다. 저는 다행히도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촘스키를 보며, 지그문트 바우만도 지금 생존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만큼 노엄 촘스키는 이 세계와 인류를 위해 더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촘스키의 간단한 약력은 쓰지 않을까 하는데요.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제국 미국'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제가 자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만 기간은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지만, CIA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은 지식인으로서 현재의 미국 기득권층과 엘리트 지배 세력들이 그를 얼마나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혹자들은 흔히 노엄 촘스키를 가리켜 '사회주의자'라고 애써 폄하하려고 드는데요. 이것은 그의 글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자들의 폄훼이고, 그는 네오콘이나 보수 우파, 티파티 누구보다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그 확대를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세계 다수의 진보 좌파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한 부분인데요. 냉전 이후 자유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를 삭제하고 싶은 엘리트 세력과 기득권 지배층들의 노골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이나 일삼는 것에 비하면, 그의 양심은 최소한 대다수 시민을 향해 있다 봐도 분명해 보입니다. 하여튼 이 정도에서 그에 대한 소개는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이 글은 원제, "Culture of Terrorism"으로 지난 198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2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절판이 되어 국내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데요. 판권의 문제이든 에이전시의 문제이든 간에 잘 해결되어 모쪼록 재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원제와 거의 동일한 의미인 이 글의 국역 제목과 관련해, 많은 독자분들은 이것을 어떻게 미국과 연관시킬 수 있는지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어쩌면 제목으로 인해 9.11 테러를 연상시키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이 책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건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의 추악한 "이란-콘트라 사건"입니다. 리처드 닉슨의 불명예스런 퇴진과 마찬가지로 레이건을 백악관에서 쫓겨나가게 할 뻔한 이 최악의 스캔들은 레이건의 사망 이후,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분위기와 그것을 주도하는 정치가들 및 일부 지식인들의 의해 조직적으로 묻혀졌던 감이 있습니다. 많은 이론가들이나 시민들은 한 정치인의 공과 과를 되도록이면 분리해서 평가하는 것이 옳다는 식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것에 대해 제가 따로 판단을 할 필요는 없겠으나, 이 사건은 명백히 당시 레이건 행정부의 과(過)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많은 공화당 지지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이 이란-콘트라 사건을 평가하거나 파헤치는 지식인이나 시민들을 '사회주의자'로 매도해 왔는데요.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그에 따른 비판을 촘스키의 장점인 '사건을 밑바닥까지 파헤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입증해 내고 있는데요. 저는 두 가지 부분에 있어서, 이 글을 별 다섯개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현존하는 이란-콘트라 사건의 아주 명확한 분석이자, 깊이 있는 일종의 '논문적 르포르타주'로서, 그 가치가 지대하고 둘째로는 엘리트 지배 체제를 더욱 강고히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존하려 하는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정책이 어떻게 미국 외교와 국제 정치의 본질이 되었는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어 어떤 국제 정치학자들의 논저들보다 매우 '현실적'이라는 점을 높이 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레이건 행정부 시절의 정치 스캔들인 이란-콘트라 사건은 1979년, 중남미 니카라과에서 민중혁명에 의해 무너진 우익 독재 정권인 소모사 정부 사태와 관련해 미국 정부가 벌인 불법적인(국제 협약 파기, 의회 정치를 무력화 시키고, 불법 송금과 주권국의 주권 침해 등) 지원이 주가 되었던 왜곡된 밀실 정치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뒤이어 살펴보겠지만 이 사건은 자신의 앞마당에서 초래되는 사회주의 혁명의 공포에 대한 미국 정부의 니카라과 개입으로 대변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이것은 그동안 대내외에 알려진 매우 명목적인 입장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저자인 촘스키는 1장부터 3장까지, 미국이 스스로 '자유 민주주의 국가'임을 내세우면서도 CIA에 의한 조작 개입과 용병들을 통해 진행된 타국에 대한 무력 진입 및 그러한 불법적인 논리가 바로 '미국 외교 정책'의 본질임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워드 진이 일찍부터 인정한 부분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것인데요. 즉,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경찰 국가라는 하워드 진의 인식 말입니다. 그리고 촘스키는 이를 넘어 더 중요한 통찰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수도 없이 강조하고 부르짖는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가 초등학생이라도 알만한 시민들에 대한 의무, 민주적 절차, 공개되어야 하는 정책적 행위 등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 그리고 '자신의 앞마당은 오로지 자신들의 것'이라는 이 이데올로기를 누구 눈치도 볼 것 없이 자행했던 미국 정부의 어두운 일면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기주의를 명백하게 옹호하고 있는 미국 내의 저 보수주의자들이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는 촘스키의 비판과 함께, "비밀기록과 공식문건에서 드러나듯이, 미국 정부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미국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요구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일련의 공세적 함의들이 미국 외교와 그 권력의 숨겨진 본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데올로기는 분명한 선한 가치들로 위장되어 있기 마련이다"는 버틀란드 러셀의 언급과 유사하게도 미국의 대외 정책은 저 자유 민주주의라는 미사여구로 그동안 점철되어 왔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유 민주주의로 자신들의 노골적인 이익과 더불어 사적 기업들의 경제적 이익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과 관련된 촘스키의 주제 의식은 미국은 이란-콘트라 사건을 포함해, 자신들의 국익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공세적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식의 엘리트주의적인 테러리즘 문화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언론과 여러 글들을 통해, 이란-콘트라 사건의 주역으로 알려진 올리버 노스는 겉으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촘스키의 이 글에서는 그조차 허수아비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배후가 백악관과 CIA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이 상당합니다. 당시 니카라과의 우익 반군인 콘트라가 벌인 추악한 군사작전인 '무고한 농민을 비롯한 민간인 학살'이 백악관에서 검증된 군사적 성과라고 자화자찬하는 관료들의 언행들을 낱낱이 살펴볼 수가 있는데요. 그 주역들이 스스로 자화자찬한 이면에는 전례에 따른 선입견과 그리고 여러 사건들로 인해 미국 정부 혹은 관료들이 "공산주의자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일관된 논리이기도 했는데요. 물론 저 노련한 정책 당국자들이 다수의 가난하고 억압받던 하위 계층의 소위 민주적 열망이 '폭발적인 공산주의 혁명의 불씨'로 전개 될 수 있다고 확신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소련의 사주를 받는 저 민중들을 전부 제거하고, 종래대로 미국의 말을 잘 듣는 보수 우익들을 다시 정권으로 돌리고자 했던 것인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최근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나왔던 "과연 미국이 가만히 있겠느냐"와 묘하게 오버랩 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냉전의 시기가 매우 비상한 때였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최근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강제된 민주주의적 이식이 여러 계층과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다양한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그처럼 강조하는 이 민주주의가 이제야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초보 민주 국가' 들에게 미국의 정책(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간에)이 유독 그들에게 가혹했다는 것은 촘스키도 역시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국익에 거슬린다고 해서 초보 민주 국가가 아닌 꽤 견고하고 뿌리 내린 기성의 민주주의 국가를 CIA의 작전으로 무너뜨린 사례가 있는지는 저로서도 확실하지 않은데요. 오히려 한국과 대만과 같은 권위주의 독재 정권을 옹호하고 지원함으로써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 합치된다는 식으로 자위했던 최근까지의 독트린(?) 역사가 존재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미국으로 기억되고 지금까지도 미국에 대한 보은의 필요성을 느끼는 한국인들이 많습니다만, 여기에 베트남전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레이건과 지미 카터, 그 이전의 케네디 정부를 되새김질 해봐도 우리의 사정과는 다르게 이 아름다운 미국이 얼마나 불법적으로 군을 투입하고 작전을 펼쳤는지, 이것은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촘스키의 이 글이 단순히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추악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으로 국한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라이트 밀스가 언급한대로, "엘리트 지배 계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시민들에 의한 정치, 민주적 절차와 합법성 그리고 권력간의 균형과 이를 통해 실현시킬 수 있는 시민 다수의 권리가 경우에 따라 전부 무력화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게 됩니다. 현재 미국은 이러한 노골적인 현실에 있는 것이 거의 명백해 보이는데요. 저들이 진정으로 과두제를 열고 싶어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이러한 맥락 가운데 그동안의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러한 정치적 결과의 실현 가능성을 더욱 가깝게 만든 것도 거의 확실합니다. 이에 촘스키는 "미국인들에 대한 신자유주의화는 이미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폭로하고 있었는데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시민의 권리를 축소하는 지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거의 야합과 가까운 결합'이 미국의 지배 계층이 바라는 이익과 합치되는 과정이었고 자본의 광범위한 이익과 관련된 민주주의의 제한과 축소 필요성은 실질적으로 증명된 논저들이 수를 셀수 없을 만큼 많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힘의 투사 내지는 소위 '은밀한 작전'과 보수 독재 혁명을 지원하는 행태의 이린-콘트라 사건 그리고 따로 언급되고 있는 과테말라의 경우와도 미국의 그같은 개입이 바라는 목적이 앞선 진술들을 통해 분명하고 입증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미국의 정치적 본질을 가감없이 다루면서 통찰하고 있는 것이 이 글의 8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대개 정치신학 용어들이 그렇듯이 '민주주의'란 말이 지는 두 가지 의미, 즉 그것의 사전적 의미와 교리를 주입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기술적 의미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언급은 "미국의 경우. 이 '민주주의'는 미국 투자자들의 이익에 부응하는 부류의 사람들의 정치체제를 지배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는 것을 뜻한다"고 촘스키는 강조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정치 및 이데올로기 체제가 경제의 통제 아래 있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성취되었다"고 마찬가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논지가 이 글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요. 미국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매커니즘으로 국가가 돌아가고 있었고, 이것에 대한 반론은 특히 대외적인 측면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의 군사적 지출과 군비 증강을 전혀 반대하지 않는 이유일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더 바라고 있기까지 하지요.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왜곡으로 점절된 정치적 이데올로기 상황에서 언론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13장에서 이 '지유 언론'에 대한 본질을 동일선상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 자유 언론들이 이미 본질적으로 권력에 포획된 상황으로 심지어 '보수주의'가 아닌 '겉으로만 보수주의 행세'를 하고 있는 정치 세력들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 실정이며, 어느새부턴가 언론들이 민주주의를 입에 담는 것을 기피하고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들 자유 언론들, 역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라 자본에 종속된 경우도 많고, 강고한 이익론에 입각해 주주의 이익에 헌신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민주적 수호의 대의적 명분 마저 종속되어 버린 상황입니다. 이를테면, 언론인들 사이에 "개인의 이익과 대의를 균형있게 갖춘다"는 완벽하게 자위하는 명분 같은 것들 말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맥락은, 앞선 이란-콘트라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데 있어 동원되기도 하였는데요. 의회의 청문회 조차도 당시 공화당 의원들에 의해 백악관을 보호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노력했고, 일부의 탐사 보도 언론인들을 제외하면 다수의 언론들이 본질적으로 핵심을 파고들어 비판을 가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정부의 앞잡이나 되었던 자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아닌 일개 니카라과인들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중요하냐는 저변의 논법들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끝으로, 촘스키는 국제 협력 시대의 중요한 협정인 '파리 협정'을 제시하면서 미국이 이를 어떻게 무시했으며, 국제 합의를 얼마나 휴지 조각처럼 여겼는지를 거의 2장 분량의 글을 통해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는 그만큼의 힘과 군사력을 갖고 있는 패권 국가가 효율적으로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그 힘을 투사하고 싶은 욕구가 분명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괴벨스와 같은 경우처럼 국민을 프로파간다의 노예로 만들어 민주주의와는 다른 체제를 이중 삼중으로 구축하는 것도 물론 현시대에서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닙니다. 하지만 시민의 존재 가치와 이들의 단합된 응집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도 실상은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직은 많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네트워크 시대에 시민들의 요구와는 매우 상반되게 흘러가는 정ㅊ적 분위기와 노골적인 이데올로기 기구라고 할 수 있는 정보 기구들이 안보 구축이라는 미명하에 민주주의를 무력화 시킬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은 작금의 시대는 어쩌면 우리에게 시급하게 중요한 분기점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있어서 많은 기업들이 하나도 어떠한 의견을 내비치지 않았다"는 로버트 커트너의 언급은 이처럼 중요하다 볼 수 있습니다. 기업들의 지배적인 이익이 민주주의의 강화된 시기에서는 실효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촘스키도 아직은 권력이 시민들을 두랴워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우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국가의 권력에 대한 그릇된 욕망을 견제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우리, 시민이라는 것은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다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훗날 혹은 가까운 미래에 촘스키 일독을 시작하게 될 수 있는 여러 독서인들은 제일 먼저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권유 드려봅니다.

-이렇게 훌륭한 글을 이처럼 얄팍한 서평으로 대체하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미국의 요구에 고분고분한 권위주의 독재 정부와 자신들의 생존과 독립성, 고유한 주권을 위해 노력하는 민주적 정부, 이 양자에 대한 명확한 미국의 정치적 태도가 이란-콘트라 사건을 일으킨 진정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미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가 아닌 보수주의자들의 전반적인 대결 구도를 인식한다면, 저 보수주의가 아닌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의 인식적 범주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대외 정책, 경제, 국내 정치 등에 있어서 쓸모없는 맹탕이기 때문에, 이를 대체적으로 경멸합니다. 이들은 여기에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불신하고 경멸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저들의 기본 인식 구조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 보수주의가 아닌 보수주의자들은 일종의 테크노크라트이자 신자유주의자들 그리고 기득권주의자들이 혼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이것은 꽤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세탁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본질을 시민들이 놓치고 있으니 특히 신자유주의적 담론의 확대와 그 이행에 따라 이러한 왜곡이 더욱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처하기 위해 계속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설득해야 하는데, 정치적 해결은 미국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며 적의 배신에 의해 무산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이 바로 그런 설득의 근거가 된다

미국은 "중앙아메리카의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특히 1980년대에, 이 지역에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가 싹틀 수 있는 가능성을 말살하는 데 골몰했다

자신에 대한 자의적인 무지의 교리는 그 뿌리가 워낙 깊어, 지난 10개월 동안 최대관심사였던 새로운 이야기들은 레이건 행정부가 극적인 전환을 약속한 날부터 즉각 그 효력을 잃어버렸다

레이건 정부 아래서 엘살바도르에서의 사망자 수는 5만 명을 넘었고, 과테말라에서는 근 10만명에 달했다

1982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인해 발생한 2만이 넘는 사망자 (대부분 시민이었던)를 보탤 수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보수주의"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동적인 징고이즘‘, 혹은 그보다 더 심한 용어로 불러야 적당하다. 미국 정치계 내에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거의 없다

미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면서 국내에서의 위대한 사회 건설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케네디의 "신자유주의적"후예들은 깨닫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의 광범한 지지 아래 적색공포 작전은 노동운동과 정치적 반대를 무력화시키고 기업의 힘을 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선량한 의도‘에 대한 신념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 다른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에 대한 미국 개입의 역사기록에도 불구하고 손상받는 일이 없다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동안 영국의 힘을 이용해 영국의 전통적인 세력권을 넘겨받고 있을 때, 영국의 외무성 관리들은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가면을 꿰뚫어 보았다

오늘날 마오이즘과 현대 신지유주의, 신보수주의의 기묘한 결합 내에서는 자연스런 일이다

즉 미국은 국제법, 국제사법재판소, 국제연합, 혹은 그 밖의 다른 국제기구와 같은 온갖 허섭스레기와는 상관없는 무법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이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콘트라의 우두머리 아돌프 카렐로를 "CIA의 충성스런 병사이자 인질로서, 장점이라곤 코카콜라 판매원이었다는 것밖에 없는 인물"로 묘사한다

나아가, 온갖 비밀계획에 관한 문서기록과 함께 공식적인 해설 역시 잘 설명해주듯이, 현실세계는 과거의 방식을 따르는 편이나. 그래서 미국이 행해온 개입의 진상이 밝혀진다고 했을 때 그것이 미국 사회 내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예측 가능하다. 미국의 식자층은, 그들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한, 그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알게 되는 일은 없다

공식적인 견해에 따르면, 국내적으로는 온갖 술수를 다 부리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투기사업에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니카라과는 히틀러식의 국가이다

하지만 그(올리버 노스)가 민주주의에 대한 심한 경멸을 아주 분명히 드러내 보여준 의회증언 이전이라도 하더라도, 그가 민주주의 - 니카라과의 민주주의든 미국의 민주주의든 - 에 대해 염려했으며, 그가 민주주의란 말의 의미에 대해 알고 있다는 증거라든가, 혹은 콘트라 지도부나 미국 정부가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혹은 가진적이 있다는 증거가 도대체 있기라도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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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외교는 도덕적인가 - 루스벨트부터 트럼프까지
조지프 나이 지음, 황재호 옮김 / 명인문화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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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새뮤얼 나이 주니어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고 있는 국제정치학자입니다. 그는 현실 정치와 이론 간에 거의 치우치지 않은 많은 경험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학자로서나 혹은 정치인으로서 이러한 균형적인 경험은 유익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프린스턴을 거쳐, 명예로운 로즈 장학금으로 옥스포드에서 수학하고 이후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게 됩니다. 나이는 1964년부터 하버드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여 1985년부터 1990년까지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국제 문제 센터의 이사로 경력을 쌓게 됩니다. 뒤이어 1994년부터 1995년까지 당시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제 안보 담당 차관보를 역임하고, 이후 국부부의 공로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헨리 키신저와 달리 국제정치에서 자유주의적인 해결 방안을 추구하는 학자이자 관료로 알려져 있는데요. 특히, 이 글에서도 간략하게 나오지만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세계에 확장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대외 기조가 자유주의적 정책하에서 국제 무대에서 합의와 신뢰의 구축이라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 다수의 현실주의자들이 공격하는 자유주의적 정책의 성과물이라고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행정부의 도덕적 원칙을 분석해보는 가운데, 조지 W. 부시 시절의 공격적 현실주의적 입장을 천명했던 네오콘의 부류들과 확실히 상반되는 견해를 그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비판과 이러한 인식의 지점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그의 노작을 통해 전공자들과 일반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 보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이의 이 글이 꽤 의미있는 연구물이라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Do Morals Matter? : President and Foreign Policy from FDR to Trump"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최근에 번역된 이 책과 관련해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요. 제본된 책 중간에 3칸의 흑색 표시가 전 페이지에 걸쳐 너무 도드라지게 표시되어 있어서 가편집된 상태의 미완성본을 돈주고 구매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인쇄소의 문제로 추측되는데요. 구매한 입장에서는 다소 불쾌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자인 조지프 나이는 책의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 국제 외교 정책에서의 도덕주의와 관련해, "도덕적 외교 정책은 의도 대 결과의 문제가 아니고, 유럽 계몽주의 전통의 임마누엘 칸트의 입을 빌어, "기본적인 가치들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설사 자유주의적 순진함으로 매도된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도덕적 의무는 인식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의 외교 정책을 단순히 다른 국가들이 최대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정책과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 글의 7장인 조지 H. W. 부시와 관련된 인식에서. 냉전 시기에 소련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세력균형 상황이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자만심을 제어할 수 있었다"고 언급되는데요. 이처럼 이는 초강대국인 미국의 외교에 있어서 적절한 세력 균형이 자신들의 국익에 부합되었다는 의견입니다. 더욱이 미소 양국 간에 보유한 핵무기로 인한 상호 확증 파괴 (MAD) 가능성이 역설적으로 40여년간의 번영을 이끌어 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전후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 부터 최근의 트럼프의 백악관까지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는 CIA와 특수군을 동원해 여러 국가들의 정치에 개입한 것"은 암울한 역사의 한 단락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결국 어느 정도는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적 기조가 서로 경직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최종 결정권자(이를테면 대통령)의 면밀하고 예민한 감각이 있어야만 할 텐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조지프 나이는 상황 지능과 감성 지능 등을 이용하여, 각 시기의 대통령들의 공과를 꽤 정밀한 객관성으로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우선 나이의 이 글에서 다른 여타 글들과 비교해, 크게 고유성을 갖고 있는 분석이라면, 프랭클린 루스벨트부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까지 각 대통령의 임기내 정책들과 평가에 대해 나름의 '윤리적 성적표'를 제시하고 부분이었습니다. 대표적인 현실주의자들인 조지 케넌과 미어셰이머 혹은 키신저 등과는 저자인 나이와는 조금 구별되는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하지만 나이가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자유주의적 이상주의를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의 국익과 관련해서는 선후의 판단을 들어 무리가 되더라도 미국에게 유익한 결과물을 안긴 정책들에 대해선 긍정하고 있고, 지미 카터와 같은 경우 진솔하고 도덕적인 대통령의 품성과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당시 국제 외교의 여러 이슈들에 있어서 그저 단순히 순진한 측면만 내보인 카터를 어느 정도 비판하면서 논점에 대한 균형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할 지점은 많은 현실주의자들이 공격해 마지않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의 도덕적 원칙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대체로 무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최소한의 도덕적 원칙을 갖고 있어야만 미국의 정책적 결정에 있어 일종의 국제적 명분을 얻을 수 있다고 저자는 첨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과거 빌 클린턴 대통령의 보스니아 사태와 소말리아에 대한 외교적 무능에 있어 당시 유럽 국가들이 적잖게 그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반증으로 제시할 수도 있는데요. 자유시장이나 민주주의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일정한 원칙을 강조하는 미국의 지도층과 향유된 권력이 이것을 시시때때로 어떠한 원칙 없이 즉흥적으로,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국제 여론과 미국의 동맹국들이 이를 긍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국제 제도와 그러한 원칙들을 조율하고 결정한 미국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비대칭 동맹들이 미국의 정책에 일희일비하고 심지어는 냉전이 시작된 시기에 미국이 과거의 고립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실로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후에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서 당시 한국 전쟁과 같은 공산주의 세력의 도발에 전혀 망설임 없이 최대한 시급하게 개입하게 되었던 진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미국 외교사에 있어 가장 중대한 시점으로 여겨지는 베트남 전(戰) 발발과 미국의 참전과 관련해, 케네디 행정부 부터 존슨 그리고 닉슨 시기까지 후에 제한된 국력을 투사할 수밖에 없었던 냉전시기, 더 빠른 베트남 전쟁에서의 탈출이 그만큼 지연된 것은 저자가 판단하기에도 아쉬운 부분으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닉슨 행정부 시기, 헨리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와의 기적적인 회담과 당시 중공에 대한 미국의 대화 의지가 마찬가지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냉전 종식과 꽤 설득력 있게 양자 간의 연계가 글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키신저보다 닉슨이 중공의 개방을 먼저 포착했다는 것은 그만큼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그가 비도덕적인 공작 정치로 자신의 임기를 도중에 끝낼때까지 닉슨은 공산권에 대한 명확한 의지를 갖고 있던 대통령이었습니다. 이처럼 각기 백악관의 주인들에게선 그들의 두드러진 개성 만큼이나 참모를 대하는 태도, 각료에 대한 인선, 국민을 재교육시키는 태도라든지, 여론에 대한 입장 등 선출되고 나서의 통치 스타일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나이는 대통령들에 대한 사생활적인 부분에서부터 출생과 가족 관계의 분석으로 이 행정부의 수반이 어떠한 도덕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박한 시각이 글 전반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이 부분은 이 글의 특징적인 부분이기도 한데요.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당시 존슨 대통령의 비도덕적인 통킹만 사건으로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개입은 사실상 실패로 귀결되었습니다. 고립과 개입이라는 미국 외교사의 주요한 국제 정치적 수단으로 제시되고 있는 '과거 윌슨 대통령의 자유주의'와 관련해서도, 이 베트남 전쟁의 성격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갖고 있습니다. 존슨 자신이 주창하는 미국의 '위대한 사회'를 위해 이 베트남 전쟁을 이용했다는 것은 분명 주지된 사실이기도 한데요. 처음에 반대에 입장에 있던 그가 도덕적 원칙을 저버리면서까지 앞선 정치적 술수에 몰입한 것은 그와 미국에 있어 불행한 일이기도 했는데요.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 내의 전반적인 반전 여론을 나이는 거의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1950년대 초반의 '매카시즘의 광풍'과도 같은 심각한 국론 분열을 야기시켰습니다. 적절한 예시인지는 모르겠으나 '레이건이 사뭇 중요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카터는 레이건의 케이스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고 분석하고, 물론 존슨이 카터와는 다른 류의 대통령이었지만 지도자가 최소한의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황이거나, 견실한 참모들의 조언을 제대로 듣지도 않는 경우에서 어떠한 결과가 초래할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가정이지만 베트남 전쟁에서의 보다 이른 탈출이 시도되었다면 이후 냉전의 양상도 그만큼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로널드 레이건과 관련해서도 이 글에서 몇가지 흥미로운 부분이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우선 심각한 정치적 스캔들이었던 이란-콘트라 사건에 있어서 그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닉슨처럼 마땅한 정치적 후과를 받지 않은 것은 일종의 불공평한 일이기도 할텐데요. 이 이란-콘트라 사건을 그의 거대한 업적에 비해 눈곱만큼도 안되는 과오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국내외에 아직도 많기 때문에 이러한 대통령의 비도덕적인 개입을 그저 과업으로 넘어가려는 행태라고 생각됩니다.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역사적으로 큰 기여를 한 로널드 레이건의 업적이야 대단한 것이지만, 콘트라 사건에 연루된 모든 자들에게 사법적 처벌을 회피하게 하는 사면권을 임기 말에 쥐어준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레이건과 관련된 글의 6장에서 레이건이 이 콘트라 사건을 언론에 공개하는 것을 동의했다고 나이가 언급하고 있는데, 당시 콘트라 사건은 레이건 행정부의 거의 기밀 사항이 아니었던가요. 이 부분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냉전의 종식과 관련해 레이건 특유의 공갈과도 같은 압박으로 소련을 화해의 장으로 나오게 만들고, 대 소련 정책에 대한 그의 실용주의적인 해법은 충분히 긍정적인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칠레와 그레나다, 파나마 등에 불법적으로 개입하고 동티모르를 침략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을 지지한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그러한 외교적 맥락들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미국의 거대한 선명성인 선(善)의 정치와는 사뭇 맞지 않아 보이는데요. 더군다나 조지 H. W. 부시 시절의 파나마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생포하기 위해 주권 국가에 불법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한 당시 행정부의 결정에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인정하는 나이의 진술은 역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미국처럼 사활적 이익을 중요시하는 국가에게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조금 철지난 논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도덕적 관념을 지닌 대통령이 무능한 정책과 무의미한 결단(이를테면 지미 카터 행정부)을 갖고 있었다는 식의 이분법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일 텐데요. 사실 장황하게 글을 썼습니다만, 외교 무대에서 일견 전세계의 일극 국가라 할지라도 도덕적 명분과 본보기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미국과 같은 비대칭 동맹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국가는 자신들의 국익과 다수 동맹들에게 있어서 최소한의 명분을 갖고 국제 체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물론 외교 자체가 독립된 고유한 권리로서 미국이 이를 이끌어 나간다고 공언할 수는 없지만 세계 민주주의의 맏형으로서 정치적 결정과 관련해, 최소한의 도덕적 함의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실주의와 자유주의간에 모두가 동의하는 공통된 인식을 서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그것은 민주주의 혹은 인권과 합의 정신 및 국제적 제도에 대한 신뢰 등을 말합니다.

과거 존 코널리 재무장관은 동맹국들에게 "달러는 우리의 통화이지만, 곧 너희의 문제"라고 발언한 바가 있습니다. 일개 재무장관의 오만함은 둘째치더라도, 그가 언급하는 것은 당면한 국제적 현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은 기대를 안고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의 실패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혹자는 오바마를 가리켜 "지미 카터보다도 무능한 인사"라고 혹평을 하기도 합니다. 임기 초기에 국민들과 주변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발언을 많이 했던 오바마는 그래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도 많이 비교 되기도 하였습니다. 중동에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그의 임기에서 리비아에 대한 신중한 개입과 자신이 주도하는 미국의 국제 정치가 과연 어떻게 외부에 비쳐질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이 중동의 민주화에 국제사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견 그의 심사숙고가 꽤 신중하게 보였습니다만 중동에서의 민주화 혁명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의 정치적 한계로 보여집니다. 나이의 의견대로 오바마의 독트린 자체가 "멍청한 행동은 하지마라"라고 요약된다면, 이후 그의 무능으로 인해 초래된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탄생은 미국 국내의 정치 상황에서 매우 극심한 정치 불신을 야기시킨 결과물이기도 한데요. 너무나 많은 것을 고려한 나머지 필요한 결정을 적절한 시기에 내리지 못한 그의 우유부단함은 경제적 문제에서 대부분 실패를 맛본 지미 카터와 유사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미국의 평론가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기 자체를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태도 자체가 실로 무의미한 일이다. 그가 평범한 정치인도 아닐 뿐더러, 그의 가슴에 무슨 대의나 선에 대한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정치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언급한 내용이 문득 기억이 났습니다. 저자인 나이의 언급대로 트럼프는 스스로 정치나 국제 외교에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전혀 배울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야말로 처참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 트럼프 행정부의 관료나 측근들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특출나는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짐작대로 자신의 이권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 자신의 딸과 사위 등을 통해 이를 증명시킨 바가 있습니다. 트럼프는 왜곡된 포퓰리즘 정치인이자, 신자유주의에 매우 걸맞는 사익 추구의 완성형 인간으로 당시 미국 정치가 도덕적인 가치에 있어, 엘리트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에 비해 상대적으로 몰락한 상황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한 국가의 무모한 일방주의 만큼이나 국내 정치에 있어 만연된 개인주의와 사익 추구는 거의 도덕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글 초입에 강조되는 도덕적 원칙과 관련해, 현재 미국은 과도한 자유주의적 담론 등으로 인해 시장 자유를 옹호하는 신자유주의를 제외한다면 대체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담론이 전무한 것은 명백합니다. 그래서 저자인 나이가 "미국 국민들에게는 오로지 신자유주의 뿐이다"라고 언급했던 것인데요. 사실 경제적 자유와 이를 바탕으로 한 신자유주의의 득세가 설사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독성을 제거할 시간은 그들에게 충분히 주어졌다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에 대한 필요한 의지는 거의 전무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과거 네오콘과 신자유주의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미국의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 강요되어 온 그러한 국제 외교 전반이 타협과 원만한 합의를 실종하고 그것을 가속화시키기 위한 국방력 향상과 방산 업체의 이익 증대까지 이런 주도적인 메커니즘이 40년 이상 미국 사회에서 강화된 것은 익히 주지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전반적인 국제 체제가 세계화와 그에 따른 시장 자유를 위해 그동안 산파의 역할을 해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이렇게 고착화된 환경에서 나이는 도덕주의적이고 윤리적인 원칙의 실효성을 앞으로 있을 중국과의 대결과 혹여 있을 국제 무대의 무질서를 제시하며 어쩌면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힘을 외교에 투사할 수 있는 그러한 정책과 수단들에 있어 미국이 필요에 따라 국제 규범을 어기고 일방적인 군사력을 투입하고 주권 국가에 개입한 역사들을 나이와 같은 정치 이론가들이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면 그의 아이디어는 거의 유명무실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정책적 결과를 세계의 국가들에게 알리면서 미국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 도덕적 원칙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면 차라리 한스 모겐소와 같은 철저한 현실주의 논법을 더 연구하는 것이 미국에게 더 유용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에게 도덕적 원칙은 인간성을 규정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권력의 속성에 있어서도 더 나아가 더 많은 국가들의 원리 원칙에 있어서도 이 도덕은 애써 무시받을 정도로 쓸모 없는 것은 아닐겁니다. 이 부분은 역시 나이도 거듭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자인 나이는 좀 더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도덕주의적 원칙을 새롭게 제시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이 글이 미국 외교사의 한 영역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어 보였습니다만 더불어 그만큼 한계도 이처럼 명확하다고 생각되는데요. 미국과 같은 강대국에게 도덕이 국제정치와 외교에서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유명무실한 가정으로 전락한다면 이것을 초래한 노골적인 힘의 투사를 현실적으로 뒷받침하는 국방력과 정보력 등으로 화살을 돌려야 할까요. 자신들이 보유한 힘 앞에서 절제를 보이지 않고 쉽게 가려고 하는 백악관 수장의 개인적 특성으로 치부하기에는 미국이 가진 힘이 정말 무시무시한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무정부 상황의 국제정치를 과연 민주주의적 합의로 나아가는 것을 미국이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먼저 결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민주주의와 도덕은 서로 긴밀히 소통하고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오바마 행정부를 다룬 글의 8장에서 나이는 "국제금융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그의 조치는 세계적인 공황과 불황을 막은 결정적인 행동이었지만, 실업률이 증가하는 가운데에서 은행들을 살린 것은 대중들의 불만을 야기했다"고 진술하고 있었는데요. 기존의 국제금융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 없이 그저 파급의 측면에서 미온에 방지한 오바마의 결정을 막연하게 존중하며, 한편으론 대중의 불만이라는 언급으로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모양새가 나이의 여러 분석과 평가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었습니다. 오바마가 월 스트리트로부터 막대한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국제금융체제가 별반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읽혀져 저는 뭔가 안타까웠는데요. 그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노후 연금 놀이를 했던 CEO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책임이 있는 자들, 어느 누구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을 비평하나 없이 그저 진술로 때우는 것은 심히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대중들이 왜, 어떤 부분에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 최소한의 앞뒤 맥락 정도는 삽입해야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가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과테말라, 이란, 그리고 일부 정부들이 전복에 개입했던 외교적 결정들은 윤리적 정당성에 의문을 남겼다

마찬가지로,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1960년대 이후 전개되어온 깊은 인종적, 이념적, 문화적 분열의 결과가 반영된 것이다

외교정책에 있어 진정한 선택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국의 이익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도덕성이 외교정책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극단적인 현실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미국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정책을 생각할 때, 미국의 대통령들은 선한 가치를 표방하는 것과 함께 이를 성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세계정치의 제도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오늘날 세계정부는 존재하지 않지만, 세계 통치를 위한 어느 정도의 세계 거버넌스 기반이 구축된 상태이나, 국제사회에서의 무정부 상태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강압과 강제력의 수준은 지역적 선택과 권리를 제한하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아이젠하워는 CIA 국장 덜레스가 여러 국가에서 암살 시도를 포함한 은밀한 행동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는데 이는 양극체계의 냉전에서 가능한 한 공산주의 진전을 막아야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플로리다 해안에서 90마일 떨어진 쿠바에 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베를린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존슨은 ‘위대한 사회‘의 법제화가 자신의 유산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이것 때문에 존슨은 의도적으로 국민들을 기만하고, 전쟁에 대해서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코널리는 동맹국들에게 "달러는 우리의 통화이지만, 곧 너희의 문제"라는 유명한 발언을 했다

레이건은 정말로 냉전을 끝냈는가? 그의 언변과 소련을 압박한 군비 증강은 부분적으로 그 결과에 기여했지만, 레이건의 진정한 기술은 공격적인 수사를 실제적인 협상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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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4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베터라이프 2021-09-18 21:40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석 연휴 끝나고 한번 연락 드리겠습니다.
 
분별없는 열정 - 20세기 정치 참여 지식인들의 초상, 개정증보판
마크 릴라 지음, 서유경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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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마크 릴라는 미시간 대학을 졸업하고 후에 하버드 케네디 스쿨을 다니는 동안 저널리즘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후 공공 정책 석사를 수여받고, 1990년에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게 됩니다. 그는 근래 미국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정치학자로 종종 대중매체에도 등장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요. 특히 마크 릴라는 서구 유럽의 계몽주의 연구에 대한 미국 내 권위자이며 동시에 극단주의 정치에 대해 냉엄한 비판을 하고 있는 학자기이도 합니다. 그는 2007년부터 컬럼비아 대학의 인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저명한 언론사들에 꾸준히 자신의 글을 기고하고 있고 철학과 정치학을 동시에 연구했던 지식인으로서 미국 정치와 더불어 인간에 대한 정치적 연구 및 철학적 담론을 분석하는 데 정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원제, "The Reckless Mind : Intellectuals in Politics"로 지난 200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2년 초도 번역을 거쳐 2018년에 개정판을 다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독한 판은 2018년 9월에 나온 개정판입니다.

마크 릴라의 이 글은 뉴욕 서평과 타임스 문학 부록에 수록된 글들을 한데 모아 출간한 것이기도 한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사상적 인물들의 삶의 자취는 1920년부터 파시즘과 그로인한 세계 제2차대전의 발발까지, 당시 근대주의의 극심한 침몰과 사회에 만연된 회의주의와 또한 그런 인간 정신의 종말을 현대에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저 사상가들의 내밀한 인생 역정과 소위 '사상적 휩쓸림'을 통해 객관적으로 분석해 낸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과거 역사의 잔인한 퇴보라 할 수 있는 전체주의와 관련해, 각자가 다른 행보를 보이고 극명한 영향의 일환으로 각기 상이한 해석과 결과를 보이게 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슈미트, 극단적인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발터 벤야민의 비극적 종말, 유쾌한 헤겔주의자였던 프랑스의 이방인 알렉상드르 코제프, 니체주의의 한계에 직면했다고 봐야하는 미셸 푸코 그리고 끝내는 신자유주의까지 해체하려고 들었던 자크 데리다까지 사회학이나 정치학 혹은 철학을 통해 독자들이 한번쯤은 그 이름과 명성을 들어봤을 법한 인물들을 마크 릴라는 그 혼란스런 시대적 과오를 동시에 살펴보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창궐한 파시즘의 시대'에 몰입하여 과연 일개 개인으로서 어떠한 삶으로 살았을지 호기심을 곁들이며 상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때는 어떻게 보면 유럽 대부분이 인간성 말살의 시대에 놓여있었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야스퍼스 그리고 한나 아렌트를 다룬 1장과 히틀러의 나치즘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카를 슈미트의 2장과 삶의 압박과 반대로 깊은 감수성을 가진 발터 벤야민의 비극을 다룬 3장 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웠는데요. '이방인' 알렉상드르 코제프를 다룬 4장은 레오 스트라우스 때문에 좀 더 집중했고 5장인 푸코와 다음 6장인 데리다는 큰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평이하게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철학과 정치를 엄밀히 구분하고자 했던 마르틴 하이데거는 익히 알려진 대로 '반유대주의자'였습니다. 어쩌면 이 사실을 처음 접하는 분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제자였던 한나 아렌트와의 짧은 사랑(초기의 서신 교환의 내용을 보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죠)과 스스로 고유하게 사유한 사상의 성과 측면에서 하이데거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고 느꼈던 카를 야스퍼스가 진심을 다해 평생동안 그와 교류를 해왔던 행적들이 절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저는 하이데거에 대한 야스퍼스의 글들을 통해, 인간 하이데거가 다소 교활하다고 느끼게 되었는데요. 나치에 대한 부역과 관련해 말을 바꾼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치에 대한 스스로의 발언이 후에도 명확하지 않다는 점은 양심에 위반되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회피하려는 의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상을 적잖이 받았습니다. 물론 2장의 주인공이랄 할 수 있는 카를 슈미트에 비하면 하이데거의 이런 태도는 다소 애교로 느껴질만 한데요. 그럼에도 마르틴 하이데거는 당시 철학계에서 형이상학 전반에 분명한 족적을 남긴 대가이며, 근현대의 철학에서 그를 빼놓고서는 시대와 학문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는 한나 아렌트가 스스로 겸허한 '정치 이론가'로 규명하는데 있어 하이데거의 손꼽히는 철학적 업적들이 존재했기에 그녀가 하이데거를 단순한 매료를 넘어 존경했던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범인들과 평범한 여자의 입장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아렌트와 같은 태도는 보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사상적 대가들의 학문적인 성취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소수의 수용자라는 입장에서 하이데거와 아렌트가 유사한 형태가 아닌가 짐작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단순히 이분법이나 선악의 문제가 아닌 '파시즘의 부역'과 관련해 하이데거의 꾸준한 회피 시도는 그가 자신의 평판에 있어서 교활하다고 밖에 볼 수 없었는데요. 마땅한 학문적 성취와 반사회적인 인간으로서의 혹은 정치적인 행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는 통합을 해서 살펴보던 따로 구분을 해보던 간에 확실히 어려운 문제임은 분명합니다.

이에 반해, 카를 슈미트는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자유주의를 혐오하면서, 그 이면에 자유주의에 전도된 자본주의가 인간 사회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수 있다는 것을 특별히 전제하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그는 여러 사람에 의해 자신의 결단주의가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대략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치에 부역하는 것을 정당화 시킵니다. 앞선 하이데거가 성공적인 나치의 이론을 설파하는 이론가로서 잠정적으로 실패했다고 봐야한다면 여기 카를 슈미트는 완전히 반대의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히틀러의 정치적 예외 현상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이를 엄정한 결단으로 봤던 슈미트는 생애 말년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저자는 "2차대전이 끝난 뒤 슈미트는 비굴한 인생을 살았다.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자기연민으로 가득한 비망록에 개인적인 울분을 토로했다"고 덧붙이고 있었는데요. 슈미트의 사상을 옹호했던 레오 스트라우스와 "대화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독일인"이라고 밝혔던 알렉상드르 코제프를 제외한다면 그의 생애 말년은 외로운 섬과도 같았다 볼 수 있습니다. 지금에서야 좌파와 우파, 모두에 의해 그의 사상이 주목받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양쪽의 적극적인 연구와 인용은 60년전 전까지만 해도 다소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 다수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엄중한 결단이 때론 필요할 수 있다는 그의 핵심적인 주장들이 지금의 시대에는 상당히 거부감이 있는 논법임에도 혁명의 준하는 어떠한 심각한 비상 상황을 설정해 해석하고, 자유주의의 전반적인 위기가 도래할 시에 그의 이론들을 되짚어 나가며, 민주주의의 나아갈 방향을 역설적으로 제시받을 수 있다는 부분은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저는 자본주의의 오판을 경고하는 데 있어도 카를 슈미트의 글이 일정 부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방만한 개인주의를 배경으로 오늘날 비판없는 자본주의의 융성이 바로 슈미트의 일침을 가할 지점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우려스러운 부분은 극단주의 정치의 시발점인 극우주의자들이 민주주의 토대를 '결단주의'적으로 해체하기 위해 이론적인 측면에서 슈미트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은 이론의 오용이라고 해야할까요. 아니면 해석의 문제라고 해야할까요.

어린 시절, 한나 아렌트 짧은 글을 통해 잠시 발터 벤야민의 비극적인 종말을 접했던 저는 다시금 마크 릴라의 글을 보며, 벤야민의 행적에 거듭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벤야민이 영국에 있던 전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면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과거 빈곤했던 그가 창피를 무릅쓰고 전처의 하숙집에 머물렀음에도 왜 영국으로 오라는 재차 권유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지 특별한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러한 상황은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한편으론 개인의 불행을 넘어 역사의 참혹함이라고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들때 여러모로 후원을 했던 아도르노에 대해 그 호의는 충분히 고마운 부분이지만, 학문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복잡한 관계였던 두 사람의 행적 또한 독자의 입장에서 복잡한 심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스스로가 학문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충돌하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철회하거나 절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특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양심의 문제를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있어 어려운 문제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애인을 만나러 간 모스크바에 만연된 스탈린주의를 그토록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던 그가 시대의 대안으로 받아들이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라는 판단이 듭니다. 이미 자유와 역사의 진보라는 대안에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명확하게 밝혀진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끝으로, 20세기에 등장했던 이데올로기들이 개인의 삶과 그 개인들의 의지조차도 무시하고 강요했다는 점에서 이것이 정치와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충분히 분석되고 비판되어야 하는 것이 일종의 당위라고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면 개인들의 평범한 삶을 얼마나 충분히 보장할 수 있겠느냐가 정치의 선결 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대의를 갖고 있지 않아도 자유롭게 또한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이 국가와 제도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을 망각한 슈미트의 '적과 아'의 개념은 마찬가지로 히틀러에 의해 전 유럽을 지옥으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멀쩡한 얼굴로 웹상에서 '반유대주의'를 외치는 자들도 이와 비슷한 사고라고 여겨지느데요. '무지의 죄'는 절대로 처벌되어선 안된다는 관념을 차치하더라도 저자인 마크 릴라가 언급하는 지난 세기 동안의 '지식인의 책임'이 무의미한 용어가 되었다고 진술하는 것에 지금의 현실과 당시의 역사가 비극적으로 맞물려 있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등장하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수준 낮은 지식인들을 그렇게 경멸했던 것일까요. 고차원적인 지식과 사유를 만들어낸다고 믿는 지식인들이 스스로의 책무는 별로 관심이 없는 시대는 과연 어떻게 귀결될지 몹시 궁금해지는 저녁입니다.



-본문 37페이지에 대괄호 하나가 홀로 삽입되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47페이지에 띄어쓰기가 잘못된 문장이 있었습니다. 개정판을 내면서 이렇게 수정을 안한건 조금 믿겨지기가 어려웠습니다.

-마크 릴라는 나치 독일의 시기에 슈미트가 '도덕의 최저점'에 있었다고 꽤 비판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상가들을 경애하는 많은 이들이 계속해서 그 사람들의 정치적 분별없음을 무시하거나 정당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도 그들을 선정하는 중요하는 고려사항이었다

이제 이 여인(한나 아렌트)은 마침내 한 사람에게만 "확고부동의 헌신"을 바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하이데거는 죄의식을 토로하면서도 자신의 연구 작업을 위해서 (당분간)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아렌트를 설득했다

하이데거는 유대인 동료들과 모든 관계를 청산했는데, 그중에는 스승인 에드문드 후설도 들어 있었다

야스퍼스는 친구고 아렌트는 연인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하이데거가 자력으로 진정한 의미의 ‘철학함‘을 재생시킨 사상가임을 굳게 믿고 경애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에서 나치즘과 관련된 주제는 하이데거가 1950년 3월에 스스로 언급할 때까지 완전히 배제되었다

나치는 슈미트가 히틀러의 행위에 사법적 지위를 부여하리라는 희망을 품은 게 분명한데, 결국 실망하지 않았다

슈미트는 히틀러의 처신이 ‘그 자체로 지고한 정의‘라고 주장하는 악명 높고 영향력이 있는 글을 발표했다

슈미트는 바이마르공화국 정치의 혼돈은 자유주의자들 스스로 극우와 극좌 노선에 선 적들과 충돌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거의 200년 동안 자유주의 사상의 주창자들은 슈미트 같은 반대자들과 대치해 왔다

코제브와 스트라우스는 고대 철학과 근대의 ‘지혜‘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우리가 정치적으로 사유하며 살아가는 방향을 찾는 데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했다

어째서 때때로 모호하고 늘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던 사상가의 저서와 발언이, 20세기 지식인이 살아온 삶의 지형에서 이미 하나의 기념물이 되어버린 뒤에도 그렇듯 강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아마 가장 중요한 이유는 푸코를 찬양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푸코는 단순히 저자 이상의 다른 무엇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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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의 시대 - 페미니즘은 끝났다는 모함에 관하여
크리스틴 J. 앤더슨 지음, 김청아.이덕균 옮김 / 나름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휴스턴 다운타운 대학 (UHD)의 인종 연구 센터의 심리학 교수이자 연구원인 크리스틴 J. 앤더슨은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UC 산타크루즈)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양성 평등과 사회 심리학 및 여성 심리학 등을 연구해 오고 있는데요. 그녀는 아직까진 해당 연구에서 신진 학자로 알려져 있고, 스스로 여성학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팔로우수가 이제 220명이 넘는 그녀의 트위터에도 잠시 방문을 해보기도 했는데요. 다만, 위키 백과에서도 저자에 대한 자료가 등재되어 있지 않고 웹 상에서도 특별한 정보가 나오지 않아 저자에 대한 소개는 아무래도 이정도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원제 "Modern Misogyny : Anti-Femnisim In A Post-Feminism Era"로 지난 2015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쉽지 않은 논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매끄러운 번역을 해주신 두 분의 역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번역된 글의 부제인 "페미니즘은 끝났다"는 것에 대한 반론이 이 글의 주요한 논점이 아니라, "그동안 여성들의 권리가 충분히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도달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전통적인 성역할과 남성들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외모 치장과 전통적인 순종허는 여성상을 추구할 것"을 주장하는 '포스트 페미니즘'에 대한 매우 상세한 반론이라 할 수 있겟습니다. 바로 1장과 2장이 그런 내용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준비되어 있는데요. 먼저, 저자가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포스트 페미니즘과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저역시 저자인 앤더슨의 논증을 통해 이해한, 그녀의 주장이 매우 설득력이 높다고 여겨졌습니다. 1장 도입에서, 저자는 "포스트 페미니즘은 특히 198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서 널리 퍼진 신자유주의와 잘 어울린다"고 언급하고 이는 다음 2장에서 논증될 "9.11 테러 이후 신자유주의가 교묘하게 공공 분야의 지출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 시민들의 권리를 축소하고, 고통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과거 전통주의적인 여성성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포스트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는 발을 맞춰왔다고 요약되고 있습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여성주의 운동 자체가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적 이념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며, 이를 확대해보면 결국 여성들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이해와 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관념체계 자체가 우리의 민주주의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포스트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여성들의 전통적인 성역할에의 복귀와 강요는 앞선 진술대로 신자유주의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요. 2장에서 상세하게 논증되고 있는 '비상 상황'에서, "전쟁 기간의 시민권은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사치가 된다"는 언급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즉, 이 부분에서 신자유주의는 진보주의 운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이 당시 어떻게 신자유주의가 신보수주의(네오콘)와 결합이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될만 합니다. 일전에 데이비드 코츠의 주장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은 유독 국가의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 대해서 만큼은 매우 관대한 편인데요. 아마도 이 지점에서 네오콘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의 야합이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더불어, 이미 1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어떻게 신자유주의가 포스트 페미니즘과 연결되는지 저자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약하시키고 신자유주의의 금과옥조인 이윤, 사유화, 개인주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필수요소라 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시장을 중시하는 문화를 일상생활 전반에 뿌리는 내리는 것, 복지 '개혁'(빈곤층 지원 축소)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이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 덕을 볼 수 있는 일종의 소비자 시민권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특권 혹은 특권층에 관한 부분은 4장, 남성의 종말과 소년의 위기에서 다루고 있는데요. 그것은 "강한 특권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온갖 좋은 것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시장 자유라는 명목으로 시민 절대 다수에게 강요했던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실상은 특권층과 기득권 계급 및 엘리트들을 위한 비타협적 관념 체계로 이는 민주주의적 이념인 평등에 반하는 것이고,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계급 정치를 용인하지 않는 기본적인 골자를 위해하는 것으로 그동안 평범한 노동자들마저 이런 논리에 세뇌되어 왔다는 것이 그동안의 수많은 연구로 밝혀진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시 페미니즘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 자체는 좀 더 사회적 맥락에서 여성들의 권리에 대해 이해하고, 인종을 가리지 않는 여성 전체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자도 3장에서 '남성 혐오'를 내포하고 있는 극단주의와 극단주의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대체로 3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있는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에 대해 대체로 '중립적인 인식' 갖고 있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또한, "페미니즘의 주장에 동의하는 많은 여성은 페미니즘이 부정적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칭하길 꺼린다고 알려져 있다"는 진술은 페미니즘 운동 자체가 얼마나 외부에서 왜곡해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는데요. 사실 페미니즘은 소년 시절부터 주입되는 '남성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강요' 방지한다는 점에서 남성들에게 유익하고 아무 이유 없이 대다수 여성을 적대시하는 분위기를 이성적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충분히 기여를 할 수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여러 주장들 가운데 주의깊게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높은 교육을 받고 인정을 받는 성공한 여성들조차도 심지어 남성들의 연애 요구와 섹스 요구에 응해야만 한다는 포스트 페미니즘의 주장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이미 여성들의 권리가 충분히 궤도에 올랐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 전통주의적인 여성성에 여성들은 집중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성이었는데요. 전반적으로 현재 미국에서 일고 있는 "남성이 원하는 연애를 하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적대감"이 이것에 기반한다고 생각됩니다. 첨단 과학의 발달과 합리적인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현재의 세기에 아직도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이토록 무시하는 행태가 있다는 것이 실로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하였습니다. 과거처럼 여성들이 익히 알면서도 고분고분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남성들이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종래처럼 여성들과 성소수자들, 유색 여성들의 권리를 '백인 여성들의 권리' 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만인이 긍정하는 인권법과 사회 체제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인데요.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극단적인 혐오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지 작금의 시점은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선, 유색 인종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대해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이 글 1장과 2장에서 꽤 논의되고 있는 사항이 있는데요.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이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이들을 백인 여성들 만큼이나 사회에서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미국 사회에서 인종주의적 편견은 아직도 타파되지 않은 상황이고, 4천만이 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도를 넘는 태도와 선입견은 아직도 여전한 편입니다. 더 심한 말로,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을 소위 '창녀' 취급을 하면서, 반대로 백인 여성의 인권은 예외로 취급한다든지, 고학력 전문직 백인 여성들의 권리와 그렇지 않은 서비스 직종과 '파트 타임 잡'에 있는 여성들의 인권을 예외취급하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포스트 페미니즘의 노골적인 구분법입니다. 이는 제도권 교육을 받은 많은 미국 남성들에 의해서도 이러한 시각을 볼 수 있기도 한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여성, 즉 능력있고 사회에 귀감이 되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대부분 미움을 받는다"는 분석을 하고 있는 5장에서는 남성들에 대해 대체로 고분고분 하지 않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에 대한 원초적인 반감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높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남성을 혐오하거나 남성과의 연애를 회의적으로 볼 것이라는 일부 주장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남성들의 보살핌을 받는 존재들이라는 인식 아래, 좀 더 남성들에게 고분고분해질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광범위하게 오랫동안 진행된 민주적 사회에서 과연 이러한 왜곡된 가치 체계들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인가는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남녀간의 입장차이나 어떤 대결 구도에 집중해 이를 일종의 중화하고 개변시키는 어떤 당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남녀 평등의 기본 가치와 사회적 약자와 성소수자, 인종소수자들에 대한 권리 문제는 염연히 민주주의가 마땅히 보장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과 한 묶음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처음 글 도입부에서 저자는 포스트 페미니즘이 여성의 몸을 성애화하고 대상화 하고 있다고 폭로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거의 벗다시피 한 여성의 몸을 즐기는 것이 다시금 괜찮은 일이 되어버린 상황"을 스스로 반성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1장에서 하이힐을 신고 추는 '폴댄스'의 사회적 의미와 더불어 "자신의 몸을 과시할 준비가 돼 있는 여성은 누구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에 많은 젊은 여성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는 저자의 놀라운 언급이 있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몸을 성상품화하고 이를 확대시키는 것이 여성들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즉 몸이라도 팔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득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념과 동시에 포스트 페미니즘이 그러한 상황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여기에 인용되고 있는 국제적 패션 브랜드들이 강간이 묘사되는 사진 구도와 여성의 눈빛을 흐릿하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것으로 묘사해, 성적 대상화를 하고 있는 광고들의 본질이 바로 오늘날 소비 자본주의의 속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이처럼 뿌리깊은 반페미니즘에 대한 사회경제적 맥락과 그것을 조장하는 포스트 페미니즘을 분석한 이 글의 통찰은 충분히 높은 설득력을 갖고 있다 생각되었습니다.


-포스트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의 야합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사회를 균질화시키고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노골적인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절대 잘못되지 않았다는 믿음과 그러한 배경 가운데 자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담론이 마땅히 시민 다수가 따라야만 한다는 그들만의 당위를 완전무결성과 같은 것으로 주장함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판단은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적인 거부가 사회내에서 좌파의 몰락 내지는 유명무실화를 추구했던 지난 40여년간의 신자유주의자들의 행적과 구조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특히 198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서 널리 퍼진 신자유주의와 잘 어울린다

반대로 포스트 페미니즘은 마치 모든 여성이 백인 중간계급 아니면 상류계급 이성애 여성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시장을 중시하는 문화를 일상생활 전반에 뿌리내리는 것, 복지 ‘개혁‘(빈곤층 지원 축소)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이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 덕을 볼 수 있는 일종의 소비자 시민권을 장려하는 것이다

개인주의 경향은 자아도취, 비대한 자아, 특권 의식,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나르시시즘에 관한 심리학 연구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광고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석한 결과, 슬프게도 현대 여성들이 10년이나 20년 전보다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더 가까이 수용하고, 불쾌함을 덜 느낀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자신의 몸을 과시할 준비가 돼 있는 여성은 누구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에 젊은 여성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약화시키고 신자유주의의 금과옥조인 이윤, 사유화, 개인주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필수요소라 할 수 있다

(군에서) 남성의 성적 접근을 거부한 여성 병사들은 레즈비언이라고 고발당했고 동성애 행위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페미니스트를 "남자 까는 여자"라고 부르는 것은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문자 그대로 폭력을 당하는 시스템의 문제를 보이지 않게 만들고, 대신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 때문에 남자들의 기분이 상하는 것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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