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권리 - 디지털 시대의 원형감옥, 당신은 자유로운가?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 지음, 구본권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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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빅토어 마이어 쉰베르거는 오스트리아 젤암시 출신으로 현재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인터넷 연구소의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7년동안 법학을 공부했고, 이후 하버드 대학과 런던정경대를 거쳐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10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대니얼 솔로브와 비슷한 학문적 관심사인 네트워크 프라이버시, 인터넷 규제, 가상 세계에서의 거버넌스 구축 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의 또 다른 논저인 "데이터 자본주의"가 2018년에 파이낸셜 타임즈와 골드만 삭스가 공동으로 수여하는 올해의 비즈니스 북 어워드를 수상한 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Delete : The Virtue of Forgetting in the Digital Age"로 지난 200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지난 2011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이 글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여기 쉰베르거의 이 글은, 현재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에 소위, 디지털 메모리 Digital Memory가 어떻게 인간의 망각을 방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명사를 비롯 현실 전반의 인식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설명해보면 인간은 누구나 사회에서 망각을 당할 권리, 즉 잊혀질 권리가 있으며,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로 글 전반에서 부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쉰베르거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대니얼 솔로브와는 사뭇 다른 구성으로 되어 있어 약간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상이한 두 개의 주제를 인위적으로 합쳐 놓은 것 같은 인상이 들어 약간이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즉, 1장에서 보여지듯이, 인터넷에 의해 강제로 기억된 보통 사람들의 행적들이 어떻게 이들의 삶을 파괴하는지에 대한 가감없는 르포르타주로 예상되었는데요. 하지만 실상은 인류의 문명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했던 '기억'과 기록에 대한 서사를 위한 목적의 2장이 과연 문맥상 필요했는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인상 때문인지 쇤베르거의 이 책이 '인터넷으로 과도하게 연결된 우리의 삶의 본질'이라는 고찰을 위해 다소 현실 인식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기도 했는데요. 물론 글이 나온 때가 2009년임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는 '노출된 우리의 프라이버시 문제'와 더불어 '과도하게 기억되고 있는 오늘날의 누적된 기억 매커니즘'에 대한 보다 명확한 나레이션이 마찬가지로 미흡해 보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웹 2.0의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더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내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들에 의해 강제로 노출되고 있는데요. 글 서두에서 소개되고 있는 스테이시 스나이더와 앤드류 펠드마의 사례는 개인들의 지난 행적들이 강제로 미래인 현재에 불필요하고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작점을 통해 본격적으로 르포르타주의 형식에서, 좀 더 현실적인 서술의 기법으로 글이 이어지리라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의 논조와 주제 의식은 대체로 평이하게 논증되고 인용된 사례 역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부분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구글이 막대한 저장장치를 이용해 전세계 개인들의 '검색 결과물'과 여러 사적인 디지털 기억들을 무차별적으로 저장해 왔고 이것은 마땅히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시민들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초기 자기 테이프부터 시작한 이 디지털 저장 장치의 혁신적인 기술 발전이 애초에 네트워크 시대의 빠른 연결성을 감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광섬유를 비롯한 인터넷 통신망의 획기적인 발전 그리고 그에 따른 전세계 이용자들의 '디지털 자취들'의 무차별적인 저장이 윤리적인 문제와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민주주의하에서 우리는 시민이자 소비자"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과거 기억들이 디지털화가 되어 통제력을 잃게 되는 현재의 상황이 'AI의 탄생의 디스토피아적 가능성' 보다도 우려스러운 상황임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쉰베르거 역시 이러한 사태와 관련해, 법과 제도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을 시민들이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사실상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5장의 6가지 대안들은 그런 측면에서 각자가 고찰해 볼 필요는 있지만 저자의 평가대로 이 대안들 자체가 직접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실효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다소 불확실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글에서 읽은 내용이지만, 미국 FBI가 안면 인식 데이터를 600만 건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체제 자체가 설사 민주주의라 할지라도 정부가 시민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원한다는 점에서 '시민의 자유' 라는 측면에서 마땅히 상충되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조지 오웰이 예견한 살 떨리는 디스토피아는 아예 허망한 것이 아님을 이쯤에서 짐작할 수 있는데요. 저자는 글 5장에서, "아마존이 추천 도서를 제공하고, 구글이 좀 더 맞춤 검색 결과를 제공하는 혜택"을 과연 시민들이 포기할 수 있겠는가를 그럼에도 되묻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효율적 차원에서의 맥락은 아닐텐데요. 시민들이 자신들의 '디지털 풋프린트'를 어느 정도 용인하에 구글과 같은 인터넷 기업에 양도하고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자신의 소비와 정보 획득의 효율로서, 대체 어느 정도의 제한선까지 이를 수용할 수 있겠느냐가 앞으로 토론해야 될 부분이기도 한데요. 물론 이 책에선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국가 안보'라는 차원에서 어느 정권이든 시민들의 개인 정보에 접근하려는 욕구가 과거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점령한 네덜란드의 인적 정보를 낱낱이 뒤져 자신들의 의도대로 유대인들을 걸러낸 사례로 미루어 봤을 때, 정권이 다루는 시민들의 개인 정보 자체가 어느 정도 이러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생각됩니다. 사실 현재의 미국을 이러한 시민들의 사적 정보를 정보 당국이 소유하고자 하는 '시스템적 초기 시기'라고 규정했을 경우 미국의 사법 당국이 정보 당국의 이러한 의도를 시민의 이익과 사회의 공익을 위해 칼같이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시민이 민주주의 하에서 사법 제도를 신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독일계 변호사를 테러리스트로 오인해 멋대로 구금한 FBI의 사례를 보더라도 그런 오판은 개인의 삶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맨 서두에서 언급한 두 명의 미국 시민에 관한 일련의 '주홍글씨' 사건은 이들이 과거에 실수로 디지털적으로 영원히 낙인을 받을 것을 뜻합니다. 현재 미국의 교육계에선 청소년들에게 '페이스 북'과 같은 곳에 자신의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개하려는 행동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격이 갖춰지기 전인 청소년 시기에 남긴 글이나 행적들이 성인이 되어서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디지털 시대가 모든 평범한 인간의 '망각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개인 정보들은 복제되어서 더욱 확산될 수 있다는 면에서 일개 개인이 겪을 고초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는데요. 물론 그렇다고 저자의 의견대로 민주사회의 시민이 스스로 '자기 검열'이라는 기재에 막혀, 미처 할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은 방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내가 말한 의견이 사람들에게 공격 받을 것을 고려해, 의견 자체가 양심의 문제가 아닌 자기 검열에 떡하니 걸리게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슬픈 일일텐데요. 또한, 이것은 일전에 하버마스가 강조한 시민의 발언과 사회 비판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유사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이 과도한 '디지털 메모리'가 네트워크 시대의 기민한 연결 시대의 아무도 원하지 않는 암울한 측면으로서 강화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쇤베르거는 이런 저의 관점과는 다르게 인간의 자연스런 망각 작용이 디지털 메모리에 의한 과도한 기억 축적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 자체가 피폐화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일반적인 '프라이버시 문제'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디지털 시대의 소위 많은 혜택들을 온전히 거부하지 않는 차원에서의 기업과 소비자들 간의 신사 협정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쇤베르거는 판단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체제 내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 프라이버시'와 개인의 삶의 보호가 동시에 가능할 수 있을지는 정부와 정보 당국 및 인터넷 기업에 대한 시민과 여론의 면밀한 견제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사법 당국이 이 시민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설사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미국이라 할지라도 대테러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다수 시민의 개인 정보들을 열람한 정보 당국의 선례와 같은 것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미국 의회내에 지금과는 다른 정보 당국을 견제하기 위한 강력한 소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언제나 미국의 민주주의가 건실하고 튼튼해야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이 이를 보고 건전한 정치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불거진 민간 의료 보험 문제를 개인의 자유로 강력하게 국한시켜버린 미국 시민들이 자신들의 프라이버시 문제도 똑같은 맥락으로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저는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미국 시민들의 앞날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다는 것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과거로부터 강제로 기억된 디지털 메모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에도 부정적 영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거대 인터넷 기업과 시민간에 불협화음이 상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시민의 프라이버시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어서 구글과 같은 기업들이 주도하는 시민들의 개인 정보 축적을 제도적인 측면에서 제어할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했던 모든 행동이, 그것이 위법이든 합법이든 간에 항상 현재 상태로 존재한다면 사고와 판단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과거의 행동들에서 분리할 수 있을 것인가?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에 이메일을 도입했을 때, 몇 년 뒤 케네스 스타 특별 검사가 자신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일상과 보좌진들이 보낸 이메일까지 낱낱이 드러나도록 마구 조사할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 골치 아픈 일은 미국의 건강보험 회사들의 3분의 2가 건강보험 가입 신청자들을 걸러내기 위해 이들의 과거 처방 기록에 디지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여러 해 전에 각기 다른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된 정보에 제3자가 접근하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정보 권력을 재분배하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종종 권력을 빼앗기는 사람들의 명확한 동의나 인지 없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으로 어떻게 우리가 양식 있는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한 사람이 여러 해에 걸쳐서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고 얼마나 진화했는지 이해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누군가의 가치관과 사고, 그의 인격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우리가 보여준 모든 개인정보가 시간이 없는 콜라주일 때,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람을 오늘날 아는 것처럼 행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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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나보다 덜 내는가 - 불공정한 시대의 부와 분배에 관하여
이매뉴얼 사에즈.게이브리얼 저크먼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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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공저자중 한 사람인 이매뉴얼 사에즈(혹은 에마뉘엘 사에즈)는 본래 프랑스인으로 미국으로 귀화한 경제학자입니다. 특히 그는 근래들어 세인들에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경제학자인 토마스 피케티와 공동으로 연구에 착수하기도 하였습니다. 1999년에 MIT에서 경제학과 관련해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사에즈는 소수에 의한 부의 편중과 소득 불평등 및 자본 소득에 대한 과세 함의에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그는 무엇보다 조세 정의 및 현재 미국의 조세 제도 개혁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2009년에 그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공공 경제학 분야에서의 기여를 인정받아 수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소재한 버클리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공저자중 다른 한 사람인 게이브리얼 저크먼(혹은 가브리엘 주먼)은 프랑스 엘리트 교육의 요람인 그랑제꼴 grandes écoles 가운데, 미셸 푸코와 장폴 사르트르, 레몽 아롱, 토마 피케티,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 등이 수학한 에꼴 노멀 파리-사클레이(이전의 ENS, 고등사범학교)를 수료하고 이후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 EHESS와 파리경제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갑니다. 그는 전세계 조세 피난처에 대한 문제와 공공 경제학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는데요. 주크먼도 또한 경제 불평등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앞선 사에즈와 마찬가지로 버클리 경제학과에서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공저자의 연구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원제, "The Triumph Of Injustice : How the Rich Dodge Taxes and How to Make Them Pay"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주류 경제학에서 이 두 사람과 같은 학자들이 조세 평등 및 조세 정의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 것이 매우 보기 드문 케이스라는 걸 먼저 밝혀두고자 합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자본에 의한 소득이 20%에 달해도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은 이 자본 수입에 대한 과세를 반대하고 있는 실정인데요. 이들의 주장은 꽤 단일대오적인 상황입니다. 다들 익히 아시다시피 이들은 "경제에 적잖은 악영향을 끼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어차피 글 뒷부분에서 논증하게 되겠지만 두 공저자들은 '자본 과세'에 대해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는데요. 이 책은 단순히 자본 과세의 명분 쌓기로만 그치지 않고 꽤 견실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 경제학 전공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왠만하면 일독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이렇게 엘리트 교육을 받은 학자들이 민주주의적 가치와 공익을 수호하기 위해 이처럼 훌륭한 이론적 근거의 연구물을 생산해 냈다는 점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대략 1976년경까지, 당시의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수식어에 맞게 조세 정의에 있어서 확고한 자본주의적 국가였습니다. 특히, 글 3장에서 논증되고 있는 1988년 1월 1일부로 이러한 조세 정의 국가라는 수식어가 전면적으로 퇴색하게 되는데요. 당시 로널드 레이건에 의한 세금개혁법은 최상위 부유층에 대한 과세 후퇴로서, 여기에는 당시 민주당 상원 의원이었던, "테드 케네디, 엘 고어, 존 케리, 조 바이든 등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해 동의에 한 표를 던졌다"고 진술됩니다. 이 레이건식의 세금개혁은 실질 세율을 낮추는 것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의도대로 철저하게 세금 회피를 바로 잡겠다는 의도까지 포함된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의 진실은 이 개혁(?) 이후, 미국에서 조세 피난처에 따른 법인세 회피가 암묵적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기 new era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에 두 공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논증의 뒷받침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 하에서 충분히 이러한 조세 회피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글 6장과 7장에서의 논증이 이와 같은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면 이 지점에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더 풀어보겠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미국은 정의로운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투표권을 가진 시민들에 의해 사실상 정부가 구성되지요. 즉, 투표로 구성된 정부에게는 마땅한 합법적 권한이 있는데요. 일전에 제임스 뷰캐넌에 바로 반대에 있는 사회학자 존 롤스가 이 '조세권'이 민주적 정부 그리고 이 정부를 합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마땅한 권리이자 가치라고 증명했습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말하면, 조세에 저항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에 저항하는 이치가 되는것이죠. 몇가지 더 이론적 근거를 댈 수 있지만 글이 늘어질 것 같아 일단 이 정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시 앞선 진술로 돌아가서, 두 공저자가 마땅히 인정하는 대로 미국의 워싱턴 연방 행정부는 마땅히 조세 제도 자체를 개혁할 권한과 권리 그리고 의지를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전에 미국의 사회학자인 토마스 프랭크와 마틴 길렌스는 "유권자의 선택으로 탄생한 행정부가 그 유권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에 대해 뭔가 체념하듯 언급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물론 이 비슷한 취지의 문장이 이 글에서도 등장하는데요. 여기에서 공저자들은 '이 유권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치적 행동'은 현재의 미국 금권 정치와 연결시킵니다. 보수와 극우를 넘나들며 돈을 뿌리고 있는 코크 형제의 300억달러의 로비 자금은 이를 명백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미국 금권 정치의 매커니즘은 글 3장에서도 있듯이, "공화당은 남북전쟁 이전의 남부에서 사용하던 조세 반대 레토릭을 부활시키고 현대화하여 미국의 고소득층을 결집시키고 남부의 백인들과 묶어 지지층을 만들어냈다"고 진술됩니다. 뭐 지금에야 월스트리트가 미 연방 대통령 켐페인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양 당에 같이 정치 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마찬가지로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는 부유층들 역시 정치권에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행정부에 돈을 투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정치를 자신들의 안전망에 가두고, 다수에 의한 횡포라는 측면에서 무지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게 그 리스크를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인 맥락은 이렇습니다만, 공저자들은 역사에서 루즈벨트 행정부의 사례를 들며, "민주주의는 언제나 금권 정치에 승리했다"고 유권자들에게 일종의 희망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미국과 거의 상관없는 저조차 미국의 금권 정치는 이미 민주주의를 극심하게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요. 여기에서 민주주의가 금권 정치에 승리하게 될지의 여부를 떠나서, 이미 도널드 트럼프 시기에 법인세율을 인하한 것은 그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런 위험요소의 정치인이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다는 정치적 선례를 남겼다는 측면에서 미국 민주주의가 이미 훼손당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더욱이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을 매개로 유권자의 분노를 통해 워싱턴에 입성한 트럼프가 기존 체제에 대한 개혁없이 오히려 부유층의 이익을 위해, 또한 스스로 막대한 부자이기도 한 그의 미국 조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그러한 감세 정책이 이미 미국 정치에 타격을 입혔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두 저자들은 아직은 파국에 이르지 않았다고 보는 것 같았습니다.

피케티 뿐만 아니라 다른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를 주장하는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두 저자 역시, 이 만연한 경제적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유층에 대한 실질적 과세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 자료들은 루즈벨트 시기부터 최근까지의 조세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입증하고 있었는데요. 특히, 아일랜드와 버진 아일랜드, 버뮤다 등에 소득세 회피를 위한 다국적 기업들의 페이퍼 컴퍼니 설립을 국제 공조, 그러니까 G20 만이라도 조세 형평성이라는 공감대로 그 법인이 주요한 소득을 올리고 있는 G20 회원구들 중, 두 국가 혹은 세 국가에서 간략하게 합산된 조세 징수를 논의해보자고 제안하고 있었는데요. 이를테면 다국적 기업 'US 타이어'가 30퍼센트에 이르는 법인세를 회피하기 위해 다른 국가에 본사를 이전시키거나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다면 해당 국가에서 나머지 부분의 과세를 거둘 수 있게 협의 내지는 제도적 합의를 해보자는 맥락입니다. 사실 이러한 해석은 이 글에서 논의되고 있는 아일랜드의 사례처럼, 애플이 조세 회피를 위해 아일랜드에 역외 회사를 두고 있는것과 같은 현실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과 6장에서 조세 회피의 천국으로 여겨지는 아일랜드는 일종의 '주권 거래'를 한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법인세를 낮게 유지하게 되는 그 정치적 맥락이 어떻든 간에, 해당 기업의 본사가 위치한 본국의 조세 제도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어떻게 보면 범죄 행위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근래 미국 당국이 스위스에 소재한 은행들의 주요 고객들의 명단을 요구하는 실력 행사에 나섰듯이, 아일랜드 당국이 그 동안 자신들의 국가 수입을 위해 벌여온 그 같은 당근책(?)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국가간의 조세 협의를 통해 양자간 서로 이익에 근접할 수 있다고 보이는데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조세 제도 자체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국가의 조세 제도에 대한 거부가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철지난 음모론 정도로 치부되어 왔는데요. 미국 각계 각층에서의 부유층과 기업들의 자본세에 대한 요구가 있었을 때, 기업들에 대한 자본세 징수는 경제적으로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일반 노동자들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주장되었지만, 실상은 자본세는 막대한 자본 수입을 거두고 있는 행위자들에게, 직접적인 소득세 증가는 수입이 적은 노동자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으로 자본세가 노동자들에게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증거 따위는 없다고 글 전반에서 논증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본세 논쟁은 마치 신자유주의의 허망한 경제 논법인 낙수 효과 trickle down와 매우 닮아 있는데요. 자본세 논의를 막기 위해 현재 막대한 로비 자금이 미국 정치권에 투하되고 있다는 점은 실상 세계화의 진실된 측면이라고 여겨집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막대한 자본을 소유한 부유층과 기업들만의 이익이 되었지, 거창하지 않은 노동 수입에 의존하는 다수의 시민들에게는 전혀 이익이 되지 않았다는 저자들의 주장과 동일합니다. 바로 이 세계화가 지금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했고, 프레카리아트, 이민 문제, 인종 차별, 극우 포퓰리즘 등의 세계 곳곳에 반민주주의적 파급을 초래한 중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에서 자유 시장 이론가들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말하는, "시장이 인간의 이기심을 제어하며, 이를 올바른 쪽으로 공익에 이르게 한다"는 노름판의 야바위꾼만도 못한 주장을 현재는 믿을 분들이 거의 없겠지만, 이 세계화와 이로 인한 막대한 자본 수입은 부유층들의 손쉬운 부의 재창출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막대한 자본을 소유한 워렌 버핏이 2000만 달러 남짓의 세금을 내면서, 자신은 당국의 조세 정책에 마땅히 협조하고 있다고 그렇지 않은 도널드 트럼프에 빗대어 윤리적 우위를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몇 백억 달러를 소유한 버핏과 같은 케이스에 몇천만 달러의 세금 납입은 그 자체로 세금 관련 변호사들과 같은 그의 수월한 사회적 자원의 결과물이기도 하죠. 버핏이 트럼프 따위에 비해서는 도덕적 명분을 갖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버핏의 사례는 로널드 레이건이 구축한 세금 개혁의 여실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부가가치세가 전무한 미국 세법에서 법인세와 소득세는 실질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더욱이 의료 보험과 같은 사회 보장 제도가 민간에 공개된 시점에서 이들 민간 보험들이 전혀 경쟁을 하지 않고 있다는 두 저자들의 분석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명인 토머스 제퍼슨이 다수에 의한 소수의 권리를 억압하게 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그것을 건국의 토대로 삼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부분은 현재의 미국 내 자유주의자들이 "세금은 도둑질이다"라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내뱉을 수 있는 훌륭한 자유주의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 건국의 기초가 유럽의 귀족들과 부유층에 의한 사실상의 과두제를 회피하기 위한 정치적 작업이라고 이해한다면 작금의 미국의 현실은 앞선 가치에 거의 이율배반적인 것이라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과연 미국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적 가치가 제대로 발휘될 수 있을지에 대해 미리 회의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림짐작 갈길이 먼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미국의 대다수 시민들이 주장하는 '자신들을 위한 자유'가 허망에 이르지 않도록 "모두에게 동등한 자유"를 외쳐야 할텐데, 조세 제도에 대한 건전한 함의 조차도 사회주의로 몰고가는 자들이 너무나 많으니, 일개 동맹국의 국민으로서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훌륭한 번역에 비해 글 150페이지에 있는 오타 한 곳은 실망스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선거로 뽑은 대표자들이 소수 기득권층의 수입을 올려 주기 위한 방향으로 조세 제도를 바꾸고 있다면, 민주적 제도에 대한 신념이 과연 남아날 수 있을까?

억만 장자들이 그들의 소득에 대해 낮은 세율을 부담하는 첫번째 이유는 그들의 소득 대부분이 개인소득세의 과세 대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우리는 소수의 슈퍼리치가 나라 전체의 부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해야 한다. 미국의 제도가 소수의 이익집단에게 포섭당할 만큼 약하지 않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보스턴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민주주의는 언제나 금권정치를 이겼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사실 1950년대에 세상은 부자에게 유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건 당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공화당은 남북전쟁 이전의 남부에서 사용하던 조세 반대 레토릭을 부활시키고 현대화하여 미국의 고소득층을 결집시키고 남부의 백인들과 묶어 지지층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레이건 시대의 세법 개정이 불평등을 폭증시킨 핵심적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그것을 일종의 빛나는 성과물로 여기고 있는 듯 하다

품속에 은밀히 공화당 당원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제학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전문가로서 띤 임무라도 되는 양 레이건 세법 개정의 미덕을 홍보하고 다녔다

누진세의 죽음은 민주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에 조세 회피와 탈세를 통제하기 위한 전략을 개발해냈고 그 전략은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자유주의자들은 "세금은 도둑질"이라는 신조를 되살려냈고, 따라서 탈세는 도덕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이는 흔히 실질과세의 원칙이라고 하는데, 그에 따르면 세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 외에 다른 그 어떤 목적도 없는 금융 거래는 무엇이 됐건 불법이라는 것이다

최상위 구간 세율을 낮춰 주면 사람들이 조세에 순응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런 소리는 현실 앞에 무력하게 짓밟힐 뿐이었다

금융 산업에 대한 규제가 줄어들고 불평등이 늘어남에 따라, 탈세 산업 역시 전에 없을 정도로 막강해졌고, 동시에 슈퍼리치들을 상대로 점점 더 집중되어 갔다

이런 세계관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세계화라는 것이 그 주된 승리자들, 즉 거대 다국적기업의 소유주들에게는 점점 더 낮은 세율을 적용하고 세계화의 혜택을 못 받는 노동계급의 가족들에게는 더 높은 세금을 물리는 것을 뜻한다면, 세계화에는 미래가 없을 것이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다국적기업들이 과거에 비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으며, 그러한 목적을 위해 공장과 사무실을 기꺼이 이전하기도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부유세에 반대하는 흔한 레퍼토리인 유동성 문제에 대한 좋은 반박이 되기도 한다.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 엄청난 부자들이 세금을 낼 만큼 충분한 소득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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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1-07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앗!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

베터라이프 2021-11-07 18: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초딩님 ^^ 저도 지금에서야 확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간 어떨떨한 기분입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11-07 1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1-11-07 18:18   좋아요 1 | URL
새로운 책을 읽을때마다 마침 읽은 사람 란에 거의 이름이 있으시던 thkang1001님이시군요 ^^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댓글 남겨주신것도 감사드려요

thkang1001 2021-11-07 1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 저야말로 베터라이프님께서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신 데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시라이 사토시 지음, 오시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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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 도쿄 출신의 사상가이자 정치학자인 시라이 사토시는 지난 2017년 번역 출간한 '영속패전론'이라는 논저로 유명한데요. 당시에 일본인 학자가 종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직접적으로 패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간단한 이력으로는 1977년생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 학사를 그리고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를 수여받았는데요. 이후에 이쿠루 상을 비롯 이시바시 탄잔상, 가도카와 재단 예술상을 수상한 바가 있습니다. 제가 그와 관련한 기사를 많이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극우 정치를 지지하는 지식인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 약간 민족주의적 의식이 느껴지긴 했지만 크게 우려할 만한 부분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외에는 다소 젊은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공동 저작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출간했고 몇 번의 티비 출연도 감행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2014년에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토론에 출연한 것은 꽤 인상적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글은 원제, "武器としての「資本論」"으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1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시라이 사토시는 글의 서두에서 자신의 전공 분야로서 그동안 연구한 마르크스의 자본론 연구를 일반 독자들에게 보다 알기 쉽게 소개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다는 취지로 밝히고 있었는데요. 전세계 대다수의 국가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기에 일반 시민이 '자본론'에 대한 기본적인 의의나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동안 반공과 그 체제에 따른 연유로 한동안 자본론이 금서로 지정되기도 하였는데요. 저에게는 이러한 지난 역사가 자본주의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할 수 없다는 반공 정부의 의지로 느껴져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가 역사의 장막으로 사라지는 것보다 인류 문명이 종말을 맞는게 더 빠를 것이라는 금언이 요즘의 시대에 딱 맞는 표현이라고 여겨지는데요. 시라시 사토시의 이 글에서도 당연히 언급되고 있지만, 인간의 삶, 사회 구조, 정치 체제, 국가의 역할 등 인류가 쌓아올린 토대 전부를 오로지 '시장 자유'로 몰고 가는 맹렬한 신자유주의적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거의 부정할 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물론 무지의 차원에서인지 현실 무감각의 극치라는 소산에서 나오는 인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혹자들은 신자유주의 자체가 실체가 없는 유령과도 같은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이브리드 자본주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자본주의 시즌 3' 이렇게 불러야 할까요?

마르크스가 생전에 제대로 된 돈을 벌어본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가 예견했던 자본주의 혹은 자본제 자체가 인간의 삶을 자본의 종속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의외로 통찰력이 발휘된 것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내 자신조차 상품으로 팔 수 있는 현란한 시대에서 상품 생산과 판매 그리고 숱한 잉여 상품의 확대라는 오늘날 대중 소비사회와 맥락을 같이하는 자본주의적 기본 인식을 과연 우리가 비판 없이 일종의 교조로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모두가 비판적 인식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기에 시라이 사토시는 '자본주의'라는 단어보다는 자본제라는 말을 더 선호하고 있었는데요. 자본주의라고 말하면 그 의미가 구체적이 되지 않을 수 있기에 자본제라고 지칭하는 것에 저역시 꽤 긍정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다룬 글 4장의 말미에서, 사토시는 "인간은 자본에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그렇죠. 인간은 자본주의의 최적화되어 있다거나 자본주의를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이전 포디즘이 인정했던 최소한의 시민과 노동자들의 안전 장치조차 당위로서의 자본 축적이라는 미명하에 사회를 재구조화하게 되었던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인간이 만든 체제 위에 군림하게 됩니다. 제가 그동안 이 신자유주의를 뭔가 다크 판타지의 괴물로 해석될 만큼 그 '악의 선명성'을 자주 읊어대기도 했는데요.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공격을 하거나 비판을 할 수가 없다는 식으로 이 하이브리드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자들의 논리들이 사실상 민주주의가 마땅히 자본주의를 제한할 수 있어야만 하는 정치적 함의를 무력화시킨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 위에 위치할 수 없다는 당위이며,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이념은 다수 시민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시라이 사토시는 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작은 정부, 민영화, 규제 완화, 경쟁 원리"와 같은 키워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통렬한 해석대로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사고를, 감성을, 감각을 바꿨다"는 주장에 긍정하게 됩니다. 사실 모두가 알다시피 자본이 축적되는 것은 거의 무한대로 작용됩니다. 단순히 개인의 이기심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키고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이런 기존의 담론들과는 명백하게 배치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결국 1980년대 이후 국가 차원에서 배타적 부를 갖고 있는 자들의 더할나위 없는 부의 증대를 용인하고, 그러한 대중 소비사회를 촉진시켜 인간의 삶 자체를 사실상 변질시킨 것에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오 네그리는 "인간의 삶이 노동에 처해졌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로 7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부분이지만, 인간의 노동력 제공이 본래의 삶을 위한 것에서 자본주의적 이익에 더 규합되는 쪽으로 왜곡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의 일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체제 자체를 마땅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함에도 사회에 무비판적으로 자본에 봉사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아진 상황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저자인 사토시 역시 맹목적인 신자유주의화에 의해 시민이 혁명에 이르는 길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시민의 기본적 권리와 스스로의 삶에 대한 통제를 잃게 만드면서까지 노동력을 쥐어짜면서 고스란히 갖다 바치며 자본에 봉사하는 이러한 체제 자체가 과연 어떠한 공익이 존재하는지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전의 포디즘 체제에서는 그나마 자본주의가 인간성을 갖고 있었다고 단순히 긍정할 수는 없지만 겨우 존재했던 사회경제적 배려조차도 앞선 진술과 같이 시민들에게 휴지조각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시 경제학을 연구하고 있는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시장 논리에 대해 각종 이론을 갖추고 있는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의 맹목성, 그러니까 자본의 축적을 위해서는 어느것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그 희생 논리에 대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이러한 체제가 이끌고 있는 사회가 완전히 파국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체제 전반이 어떤 식으로 시민과 인간의 삶에 더 가혹하게 도움이 되지 않을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발달 단계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봉건제가 걸림돌이 되어 러시아의 농노 해방과 같은 일련의 사회 변혁이 이뤄졌던 것은 그것이 얻어 걸린 것이라 할지라도 적당히 의미가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시민의 자아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도 꽤 긍정합니다. 그동안의 기술발전이 시민의 건강과 삶의 개선에 이바지한 것도 충분히 공감이 될 만한 부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과거 역사에서 자본주의가 아무리 중대한 체제적 목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미래에 도래할지 모르는 고도화 된 AI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듯이, 그것이 우리를 이끄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거세당한 국가 담론의 문제라든지, 복지 국가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시민 안전에 대한 요구가 허버트 스펜서에 의한 것처럼 거부당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이 글 11장에서도 제한없는 자본 축적을 원하는 자본가들과 그 반대에 있는 시민들간에 전쟁이 도래할지도 모르는 것은 사회 체제와 시민 안전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일이 됩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적 제한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과거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승리가 되어야지, 자본주의만의 승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비해 보다 자유롭고 진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찌 철지난 자본론 이야기냐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있을겁니다. 누군가에겐 지금의 세상이 천국과 다름없다는 말의 극한이 뭐 어떤건지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만, 저자인 시라이 사토시가 말하는 우리가 자본론을 알아야하는 그 이유의 이면에는 자본제가 어떤식으로 체제의 우위로서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시민들이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에 의한 인간의 종속이라든지, 성상품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권력 지배, 비대칭적인 계급적 이해와 같은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19세기의 인물의 통찰력으로 살펴보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겁니다. 이에 대해 시라이 사토시도 금세기를 살아보지도 않은 마르크스의 해석과 이해가 지금에도 충분히 의미가 될 수 있다고 긍정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 삼권 분립처럼, 경제권력-정치권력-시민권력이 거의 동일하게 균형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이 날로 거세져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글 중간에, 마땅한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사고를 제압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상품은 애초에 부와 동의어이며 영원한 것으로 취급받게 된다. 이는 아직 상품화 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도 남김 없이 상품화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 옆에서 서서 능력이 없어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지 못하면 임금이 깎여도 당연하다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라고 수긍하는 사람은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에 지배당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자본에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결과 예전에는 반체제 문화의 텃밭으로 인식되던 노동자 계급 문화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이제 노동자가 아닌 태만한 빈곤층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성립해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기 위해서는 ‘구매할 수 있는 노동력‘이 있어야 한다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면 자본주의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수단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에 자본은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거나 인건비를 삭감하는 형태로 무리하게 잉여가치를 생산하려 한다. 그 부작용이 사회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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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6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26 0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의무란 무엇인가 - 마스크 시대의 정치학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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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솔링겐 출신으로 대학 강단의 학자일 뿐만 아니라, ZDF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방송을 하고 있는 대중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일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퀼른 대학에서 수학하고, 1997년에 도미해 전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언론 관련 펠로우쉽인 시카고 트리뷴의 아서 에프 번스 펠로우쉽을 수료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문학 관련 글을 비롯,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 생물학적인 관점 및 심리학적인 측면의 논픽션 글을 작업하기도 하였는데요. 본래 그는 철학 주제의 글을 쓰고 있지만, 2009년 봄에 독일 정론지 슈피겔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그의 논픽션 글이 올라왔던 것으로 보아 대중 철학자 혹은 대중 지식인으서의 면모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Von Der Pflicht : Eine Betrachtung"으로 2021년 3월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 서두에서 저자인 프레히트는 자신을 "정치에 관심이 많은 철학자"로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정치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철학자가 과연 진정한 철학자로 불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비슷한 대답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실 정치와 관련해, 대표적으로 지난 2019년 11월 이후, 선진적이고 존경받을 만한 서구 유럽의 자유 민주주의의 실상이 이 펜데믹 사태로 인해 전세계에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저자 자신과 같은 많은 유럽인들이 이 코로나 사태를, "빌 게이츠와 중국 당국 그리고 거대 제약회사가 담합한 비열한 동맹의 결과"라고 터무니 없이 이를 맹신한 증거가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를 물밑에서 좌지우지 하는 '딥 스테이트'와 같은 그림자 정부의 음모라고 확신하는 이들 유럽인들은 그런 인식화의 과정에서 "보건 사태에 따른 국가의 개입을, 국가 스스로가 시민의 기본권을 영구히 침탈히기 위한 계획"이라 받아들이고 다시 유럽에 파시즘이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한 그 일련의 과신(?)의 과정을 저자가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이 글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자인 프레히트가 이 글 2장에서 인정하고 있듯이, 국가는 "시민들에게 있어 자연 상태와 같은 계약 이전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시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꽤 단호하게 "시민은 국가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는 당위로서 인정되고 있는데요. 이 부분과 맞물려, 조안 C.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에 착안해, 자신의 독일이 이러한 "돌봄 국가"라는 의무에 충실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의무론을 먼저 언급합니다. 여기에 시민들의 의무론 또한 마찬가지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일텐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 현재의 전 유럽인들이 정치적으로 "시민이 누려야 할 기본권리"에 대해서만 빠삭하고 반대로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될 의무"에 있어서는 이들이 21세기가 한참 지난 즈음에야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이라고 일침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즉, 소위 자유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던 시민들이 "국가가 헌법을 무력화해서 시민권을 억압하고 이어 독재 국가로 나아갈 것"이라는 제2의 파시즘 도래를 근거없이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사회와 다른 시민들을 위해 지켜야 할 이 "의무"를 망각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한데요. 이처럼 3장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국가에 의한 기본권 제한에 대한 공포'를 먼저 주장하기 이전에, "국가가 시민을 서로로부터 보호하는 데 의무를 다했는가? 그리고 코로나와 비교했을 때 여전히 무시되거나 진지하게 취급받지 않고 있는 다른 위험이나 위기에 대해 국가가 의무를 망각하지 않고 있는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고 저자는 마찬가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민들이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와 동일한 맥락의 '국가 주도의 시민 보호'를 파시즘의 도래라는 식으로 오판하게 된 연유에는 저자 역시, 자본주의의 재산권 보호나 이익 추구와 같은 매우 기능적인 측면의 강화와 그동안 만연된 시민들의 '자유로운 이기심 추구라'는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큰 영향을 끼친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프레히트 역시 글에서 토크빌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점철된 사회가" 민주주의에 과연 어떠한 파급을 끼칠 것인가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일련의 '토크빌의 딜레마'로 이해되고 있었는데요. 과거 칸트주의적 입장에서 본연의 인간이 어떤 권력이나 정치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혁명적인 가치론과 더불어 개인의 자유 역시, "제일 먼저 다른 사람의 권리를 고려하는 것이 먼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더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혹은 좀 더 노골적으로 개념화된 신자유주의가 "무엇보다 자신의 이익 먼저 챙길 것"을 올바른 경제적 인간의 전형으로 규정했기 때문일 겁니다. 또한, 이는 과거 오래된 사회적 가치라는 전통주의적 입장에서 선회해, 포드식 후기 자본주의 그 즈음에, "강자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약자를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민족을 최적화한다는 이념이 19세기에 전유럽을 휩쓴 것"은 어쩌면 높은 확률로 허버트 스펜서의 공로일수도 있습니다. 사회진화론과 자본주의의 성공적인 결탁 자체를 사실 누구도 언급하길 꺼려하고 있으나, 결국 신자유주의에 이식된 것은 매우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의 결론에 이르게 되는 5장에서, 저자는 앞선 논증을 간략히, 다음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민주적 시민 의식과 자본주의적으로 배양된 이기심이 단순히 보완 관계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힘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현재의 많은 유럽인들이 '시민의 기본 권리'를 마땅히 쟁취해야만 하는 이기심 정도로 여길수도 있습니다. 시민의 권리는 이기심 따위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어찌됐든 공화주의에 입각한 자유 민주주의의 오래된 뼈대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의문이 드는 것은 왜 다른것도 아닌 그들이 주장하는 기본권 즉, "마스크를 안 쓸 권리,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할 권리, 국가가 시민들의 이성을 존중할 권리" 등이 왜 이슬람 혐오와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를 일삼던 자들에게서 더 많이 나오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과 관련해서 저자인 프레히트는 건전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면 시민들의 합리적 이성과 도덕적 분별력을 신뢰해야 한다고 기본적 인식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정치를 시녀로 만들고 나서, 시민의 도덕적 분별력은 18세기보다 더 멀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정치가 시장 근본주의의 보조적 역할로 전락하면서 아마 그즈음부터 정치에 대한 불신과 함께, 개인 이기심의 극대화에 있어 거추장스러운 도덕적 가치를 우리 스스로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면 현재의 보건 의료에 따른 국가의 개입 선언이 흡사 카를 슈미트식의 헌법의 무력화나 제2의 히틀러를 유럽에 재탄생 시킬것이라는 가정은 거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미 국가의 역할과 기본적인 기능론들이 신자유주의와 같은 시장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무력화 된지 오래이며, 데이비트 코츠의 의견대로 더 많은 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국방비 지출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으로 국가의 역할론 자체가 제한된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1990년대 공산권의 붕괴로 인해 후쿠야마는 그것을 역사의 종언이라고 다소 감격해 했지만, 그의 보수주의적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이후 자유 민주주의의 더 많은 확대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근본주의가 초래된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근 몇년간의 고도화된 네트워크화로 인해, 사실상 국가는 시민들의 적절한 감시에 놓여있다고 여길수도 있을텐데요. 물론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미국 CIA와 같은 안보 당국이 자신들의 임의대로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펜데믹의 출현은 그것조차도 쉽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국가들의 실질적 자원이 현재 보건 관리에 투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시기에 단순히 마스크를 쓰지 않을 권리를 아주 공개적인 정치적 토론에 부쳐야 할지는 그 결론이 명백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앞선 왜곡된 믿음에 대해 로크의 "신념 독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지금과 같은 시기는 무엇보다 시민들의 도덕적 변별력을 부활시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즈음에서 편협한 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평소에 자주 인용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마지막 호소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손잡고 무덤으로 가기 전에,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야만 한다"



-프레히트의 이 글은 특히, 4장 "시민의 의무와 탈도덕화"가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번 펜데믹 사태로 인한 국가의 전방위적인 보건 개입에 대해 과거 '복지국가로의 함의'로 이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데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대처조차도 본래대로 저들은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어합니다.  

자유주의 국가는 한편으론 자신이 시민에게 보장한 자유가 내적으로, 그러니까 개인의 도덕적 실체와 사회적 동질성을 통해 적절히 조절될 때에만 존속할 수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그런 서사적 모티브의 단골손님은 독재에 대한 꿈이다. 정치인들은 늘 독재를 꿈꾼다는 것이다

하필 네오 나치와 제국 시민 같은 파시스트들과 나란히 행진하면서 파시즘을 경고하는 것도 어리석은 자기 모순이 아니라 비상한 시대적 명령이다

도덕적 행동은 항상 타인의 권리는 지키는 일과 맥락이 닿아있다. 그에 대한 핵심적 인식은 19세기의 빌헬름 폰 훔볼트나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명확히 표현되었다

강자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약자를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민족을 최적화한다는 이념은 19세기 후반에 강력히 대두되었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제기되어야 할 물음은 국가가 약자 보호의 조치를 통해 시민의 일상적인 삶에 개입하고 기본권을 일시적, 부분적으로 제한할 권리가 있느냐, 혹은 그럴 의무가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암울한 시대에 누구도 특정 목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원칙은 한마디로 혁명적이었다

따라서 코로나19에 대한 국가 대응이 적절했느냐의 물음은 두 가지 측면에서 던져질 수 있다. 첫째, 시민을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하고, 그와 동시에 시민을 서로로부터 보호하는 데 국가는 의무를 다했는가? 둘째, 코로나와 비교할 때 여전히 무시되거나 진지하게 취급받지 않고 있는 다른 위험이나 위기에 대해서는 국가가 의무를 망각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런 진실에 매몰된 분노는 5G 통신탑을 불태우는 행동으로까지 나아간다. 코로나19가 5G 전파에서 생성되거나 전파를 통해 확산된다는 음모론에 사로잡힌 영국인들이 벌인 행동이다

약자 보호를 위한 국가의 보건 조치에 노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놓고 과도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뵈켄푀르테가 국가 운영에 필수적이라고 했던 <개인의 도덕적 실체>는 오늘날 상황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민주적 시민 의식과 자본주의적으로 배양된 이기심이 단순히 보완 관계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힘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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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0 1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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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0 1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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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0 23: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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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19: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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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의 취약성 -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로빈 디앤젤로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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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진 디앤젤로는 미국내에서 '백인성'연구로 저명한 학자이자, 인종주의에 대한 백인들의 모호성 및 묵인에 대한 문제를 다룬 '백인의 취약성' 등을 고안한 사회학자입니다. 그녀는 1991년 미국 시애틀 대학에서 역사학 학위를 받은 뒤, 2004년 워싱턴 대학에서 다문화 교육과 관련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게 됩니다. 노동자 계급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 오히려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밝힌 그녀는 현재 워싱턴 대학의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점차 확대되고 있는 다양성 교육과 관련해, 미국의 인종주의가 과거에 비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한편, 그녀는 이러한 연유에 미국 건국 이후부터 백인 남성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백인 계급의 이익이라는 사회적 관념이 제도화되었고 이것의 근본이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쯤에서 보면 역설적이게도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에 대한 세계인의 이미지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모두가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주제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White Fragility"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흔히 미국은 개념적으로 다원화된 국가이며, 이러한 체제를 견고한 민주주의가 뒷받침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뉴스와 그외 여러 논저들로 미국 사회가 심각한 인종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거의 모두가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이 글의 저자는 이러한 인종적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이 현재 다수 백인들에게 있다고 전제하고, 일부 극우주의자들과 인종주의자들 혹은 백인우월주의자들에 의해 일반적인 정치 무대 위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로 인해 견고하게 내면화되어 있는 인종주의가 꿈쩍도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현재의 사회가 다수 백인들에게는 특별히 문제가 없다는 인식하에 지금도 인종 문제가 나아지고 있다는 터무니 없는 믿음과 백인은 대부분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하에 그럼에도 자신들은 이미 인종주의를 제도적 차원에서 내면화하고 있는 실정에서 이 인종주의 자체를 자의든 타의든 언급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저자는 '백인의 취약성'으로 해석하는데 글 전반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피터 칼레로의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흑인들이 직업적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등의 백인들의 흑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은 상당히 뿌리 깊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는 백인 엘리트들이 규정하고 확대시킨 '백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될 권리'와 관련해, 건국의 아버지들조차도 과거의 타성에 젖어 인종의 차이에 있어서 백인이 더 우월하다는 관념을 내재화시킨 결과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데요. 그러면서 다수 백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와 그것을 바탕으로 고도화 되어 심지어 이데올로기화 된 '능력주의'에 있어, 흑인들이 스스로를 교육하지 않고 성공하지 못하는 건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고 믿고 있는 백인들의 그러한 관념체계는 저자의 언급대로 일종의 '암묵적 편향'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즉, 미국 사회가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상황은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다수 백인들의 가치 체계가 바로 앞선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를 맹신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데요. 뭐 이것을 단순한 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제 자체의 무결점성을 비롯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 체제 자체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타고난 재능이 없거나 자격이 없거나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진술과 이것이 작동시키는 건 "불평등한 체제로서 인종주의를 감추는 이데올로기로 작용되어 왔다"는 것을 저자 스스로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가진 부로 상위권에 속해 있는 계층의 일원들이 지금의 체제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인식이고, 백인 다수들이 미국 사회 체제의 일면들이 그렇게 나쁘다는 것이냐로 반문하게 되는 진정한 연유일 겁니다.

과거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노예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벌였던 정치적 로비라든지, "흑인이 마땅히 노예에 처해져야 한다" - 개인적으로 이 문장을 쓰면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삶이 노동에 처해졌다"는 문장이 떠올라 혼자 웃고 말았습니다 - 는 당위를 만들어내기 위해 당시 노예주들이 노력했다는 것은 꽤 유명하기도 한데요. 이처럼 백인들의 인종적 편견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된 역사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지금에야 여러 매스컴을 통해, 노골적인 인종주의 편견을 가진 백인은 나쁜 백인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흑인들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하며 비웃는 것에 대해 전혀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경우처럼 사회학자인 저자가 논하고 있는대로 다수의 백인들은 인종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즉, 저자의 의견대로 백인이 흑인과 같은 유색인들의 입장에서 미국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는 인종적 편견을 포착하고 그것이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백인들 스스로 인정하고 개선시켜 나가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바로 이 부분에 있어 '백인의 취약성'이라는 사회적 언어가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글 초입에서 이미 "우리에게 편향이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그런 편향을 검증하거나 바로 잡지 않게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다수의 흑인들이 있는 장소나 거리에 갈때 백인들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고 합니다. 이것은 학교-교도소라는 파이프라인을 타고 상대적으로 더 많이 수감되어 있는 흑인사회의 현실, 자신이 멕시코계 라티노일 경우 백인에 비해 더 많은 형량을 받게 되는 현재의 미국 사법 시스템의 문제로 봤을 때, 이러한 암묵적 편향은 미국 사회에 지대하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물론 어처구니 없는 "백인은 인종주의적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대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순진한 백인'이라는 논법으로 이 인종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과거에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은 누구보다 인종주의적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과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는데요. 다른 인종에 비해 확연한 교육의 기회와 고용의 인센티브 더불어 사회 진출의 우위라는 측면에서 백인들이 누리고 있는 권리는 매우 지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에야 이런 현실에 눈을 감고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티파티'들이 있기도 합니다만 저자의 강조대로 미국 사회 체제 전반이 제도적으로 인종주의적 편견을 강화시켜왔고, 진지하고 현명한 백인은 이 인종 문제를 결코 입밖으로 내뱉지 않는다는 일종의 금언이 현재 대부분의 백인들이 내면화시킨 상황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청담동과 대치동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의 부동산 문제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제도화된 권리를 누리고 있는 자들이 반대편에 있는 상황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꺼내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은 그런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정색하며 언급하는 것이현재 일개 시민으로서의 백인들의 기본적인 관념 체계라 보여집니다.

끝으로 이 책은 사회학적인 논증과 더불어 르포르타주와 같은 여러 사례들이 뒷받침되어 있는 꽤 견실한 글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현재 미국의 개인주의적이고 능력주의적인 맹신 혹은 이데올로기화가 사회적으로 내면화되어 있어 이 인종주의 문제 조차도 개인적 문제로 축소시킬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다수 시민의 평등과 안녕을 강조하는 정치 이념으로서 세계 민주주의의 제일 국가라고 여겨지는 미국이 '백인 우월주의 국가'로 그려지는 것은 실로 미국에 각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일개 한국인으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저 역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절대선에 근접한 것이라고 세뇌를 받았기에 내심 관련 서적들을 접했으면서도 실제 미국 사회를 겪어본 것이 아니기에 그저 긴가민가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근래 미국 사회의 단면이 꽤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 조차 제대로 보장할 수 없는 미국의 현실은 실로 씁쓸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엉뚱한 소리겠지만 한편으론 이래서 미국인들이 평등을 좋아하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국제 사회에 미국이 부르짖는 인권의 개념은 지금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주의와 관련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닌가 글 말미에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개인주의는 개개인의 성공을 막는 근본적인 장애물 따위는 없으며 실패는 사회 구조의 결과가 아니라 개성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백인은 우리의 인종 프레임에 관해 숙고하기를 유독 힘들어하는데, 인종적 관점을 갖는 것은 곧 편향되는 것이라고 배우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믿음은 우리의 편향을 보호할 뿐인데, 우리에게 편향이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그런 편향을 검증하거나 바로 잡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지배 계급은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국 가난한 백인 노동 계급에 완전한 백인 지위를 부여했다. 가난한 백인이 자신들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을 갖게 되면 더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덜 집중할 터였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체제로서의 인종주의를 감추는 이데올로기들은 아마도 가장 강력한 인종적 구속력일 텐데, 일단 인종 위계에서 우리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나면 설령 우리에게 불리하다 해도 자연스럽 의심하기 어려운 처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인성을 백인이라는 존재의 모든 측면 - 단순한 신체적 차이를 넘어 사회에서 백인으로 규정된다는 것의 의미와 그에 따른 물질적 이첨과 관련이 있는 측면들 - 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백인 인종 프레임의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백인이 문화와 성취의 면에서 우월한 존재로, 유색인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성과의 면에서 제대로 백인보다 떨어지는 존재로 여겨진다. 또 국가를 운영하는 능력에서 유색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진다

흑인을 범죄와 연관짓는 백인의 굳은 확신은 현실을 왜곡하고 역사상 흑인과 백인 사이에 존재해온 위협의 실제 방향을 뒤집는다

그렇더라도 나는 인종주의에 기반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종주의의 구속력에 영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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