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더니 언제 그랬냐는듯 포근하다.
블로그에서도 뜸하던 사람들이 한 분 두 분 다시 돌아오고, 보지 못했던 이름들도 속속 올라오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봄은 꿈을 꾸는 계절이요, 알 수 없는 희망에 들뜨게 하는 계절인가 보다.  창밖으로는 노란 개나리를 닮은 유치원생들이 줄을 지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얼마전 한 블로거님의 글을 읽으며 문득 옛추억이 떠올랐었다.
모르긴 몰라도 소설가를 꿈꾸는 분일텐데 자신이 쓴 소설을 블로그에 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저 독자의 입장에서 읽었던 탓에 뭐라 평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분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긴 글을 쓰는 동안에는 진정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
 
아마 내가 대입 수능을 마친 고등학교 졸업 무렵이었을 것이다.
부모님과 떨어져 형들과 자취를 하고 있던 나는 기차 여행이 잦은 편이었다.
왜 그런 결심이 섰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어느날 문득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낯 모르는 사람들과 서먹한 얼굴로 서너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낸다는 것도 지루하고, 멍하니 창밖의 풍경에만 시선을 두는 것도 참으로 따분한 일이었나 보다.  무엇보다 입시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느낌이 나를 무언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수집’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기차를 타기 전에 항상 작은 메모 수첩과 연필을 챙겼고, ’오늘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하는 기대감으로 설레었다.
기차에 오르면 옆좌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사람의 인사에 한동안 의아해 하다가 궁금해서 묻곤 했었다.
"저를 아세요?" 하고.
그때마다 나는 동행하게 되어 반갑다며 나의 신분을 밝히고는 가슴 주머니에 고이 지참했던 수첩과 연필을 꺼내 들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옆좌석에 우연히 앉게된 동행인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사람들이 다들 순진했던지, 아니면 내 얼굴이 선량해 보였던 탓인지 싫다 않고 이야기 보따리를 선선히 풀어나갔다.
그 중 사오십대의 중년층은 내게 빼놓을 수 없는 고객(?)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하곤 했다.  
"내 얘기를 소설로 엮으면 모르긴 몰라도 한 트럭으로도 부족할거야."

나는 그들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깨알같이 수첩에 옮겨 적었다.
간혹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목적지를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했는지...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단편소설로 옮겨 우편으로 보내주겠노라고 하면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소를 손수 적어주며 꼭 부쳐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때로는 전화번호를 일러주며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는 분들도 더러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수첩에 적힌 이야기를 토대로 어떻게 글을 꾸밀까 하는 생각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이왕이면 그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내 자신의 역량으로 최대한 빛나게 해주고 싶었다.  나 스스로도 그분들의 삶을 같이 사는 느낌이었다.
한 작품이 완성되면 낡은 수동 타자기에 하얀 종이를 끼우고 혹시 오타라도 나지 않을까 조심조심 타이핑을 쳤다.  그렇게 정성을 들인 원고를 곱게 접어 편지봉투에 넣는 날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여행 횟수에 비례하여 내가 모은 이야기와 주소도 하나 둘 늘어만 갔다. 
나의 ’이야기 수집’은 내가 군에 입대하면서 끝이 났다.
이제는 연락도 끊겨 영영 뵐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가끔씩 그들이 그리워지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그때 들었던 이야기 한토막을 들려주곤 한다.
나도 이제 ’이야기 수집가’가 아닌 ’이야기 전달자’로 누군가에게 ’그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남보다 튀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1등만 기억하는 치열한 경쟁사회.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은 봄날에 피어나는 이름 모를 야생화처럼 튀지도, 별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은 왜 그렇게 기뻐했을까?
특별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던 것일까?  
밋밋하고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이야기가 하얀 종이 위에 활자로 살아난 모습을 보면 누군들 감동하지 않으랴.
튀지 않고, 기괴하지도 않은 그들의 잔잔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몇번의 이사로 그 이야기들은 대부분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내 가슴에는 여전히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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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의 거짓말 - 속지 않고 당하지 않는 재테크의 원칙
홍사황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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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지도, 읽지도 않는다.
아마도 다른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있다는 생각일테고 또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삶을 기록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본인은 부인할지 몰라도, 반이상은 허구이거나 과장일 것이라 짐작한다.

재테크 도서 리뷰에 웬 이야기 타령이냐고 의아할 것이다.
남자들의 대화에서 군대 얘기가 단골 메뉴이듯 재테크 분야에서 아무개의 성공담과 실패담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말하자면 군대와 재테크,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이  두 분야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는 많기도 할뿐더러 대개의 이야기 속에는 과장과 허풍이 난무한다는 점에서 둘은 너무도 닮아있다는 것이다.

EBS에서 수학을 강의하는 한 강사가 수학도 이야기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지금까지 수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덧붙여졌고 우리는 그 기나 긴 이야기들을 배우고 익힌다.  물리학이나 다른 학문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런 학문이 군대나 재테크 분야와 다른 것은 허풍이나 과장은 물론 한치의 오류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으며, 기록된 모든 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입증되었고, 마침내 많은 사람들로부터 설득력을 얻는다는 데 있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는 이유는 나도 한때 재테크 분야에서 전업 투자자(주로 주식)로 살았고, 대단치 않은 수익률에도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각지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곤 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발견한 공통점은 투자일지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으면 언젠가 일부는 망각의 늪에 쓰레기처럼 흩어지고 일부는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쓸모없이 기억의 용량만 차지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와 성공의 이면에 숨겨진 실패의 원인과 성공의 비결은 영원히 풀지 못할 것이다.
결국 재테크든 학문이든 한 분야에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오직 자신의 내부에 그 비책이 숨어있음을 사람들은 잘 모르는 듯하다.

이 책의 저자는 각종 재테크의 수단들, 이를테면 주식, 부동산, 저축, 보험 등을 망라하여 작게는 카드 포인트와 금융거래 수수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간과할지도 모르는 세세한 것들을 조목조목 다루고 있다.  너무나 자세하여 지루함을 느낄 정도로 그는 작은 것도 놓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재테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에 대한 자신의 원칙과 철학을 정립하고 이를 지키는 것이라고.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남의 이야기에는 혹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헌신짝처럼 가치없게 취급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내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비책이나 찾아 떠도는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실속없는 남의 이야기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곳에서 답을 찾으라고.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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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남기고 떠난 열두 사람 -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그 두 번째 이야기
오츠 슈이치 지음, 황소연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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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는 듯하다.
예전에는 작은 실패의 경험에도 세상을 향한 분노와 나 자신에 대한 한탄을 억제하지 못했었고, 믿지도 않던 신을 향해 분풀이 하듯 거친 독설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실패의 경험을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빈말이 아닌 진심으로 신에게 감사한다.  내가 충분히 견밀만한 높이에서 떨어뜨린 것도 고맙고, 죽음이라는 최후의 추락에 대비하여 미리 연습을 통해 준비하라는 신의 배려와 그 자비로움에 더욱 감사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더 높은 곳에 올랐다가 떨어졌더라면 그 충격을 결코 견디지 못했을 텐데 하는 안도감이 들곤 하는 것이다.  나의 욕심으로 본다면 끝없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했을텐데 사랑이 많은 신의 손길은 늘 그곳에서 멈추게 했다.

이것은 내가 즐겨 보는 높이뛰기나 장대높이뛰기 종목과 비슷하다.
나는 육상경기를 즐겨 보는 것은 아니지만 TV에서 높이뛰기나 장대높이뛰기를 중계하면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 종목의 매니아라고 말할 정도로 경기 규칙이나 출전 선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언제부터 이 종목의 경기를 즐겨 보게 되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우리네 삶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구나’하고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삶에서 가장 깊은 수렁으로 추락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본다면(죽음을 딱히 삶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추락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2010년 30만 독자의 마음속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되돌아보게 한 베스트셀러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의 저자 오츠 슈이치의 두 번째 이야기 <감동을 남기고 떠난 열두 사람>은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저자는 호스피스 전문의라는 조금은 독특한 직업을 가진 이로, 그는 현재 도쿄 마츠바라 얼번클리닉과 도호대 의료센터 오모리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말기 환자를 돌보고 있다. 아울러 저술, 강연 활동을 통해 완화의료와 생과 사의 문제 등 존엄한 죽음을 함께 생각하는 장을 마련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작가는 이 책에서 호스피스 전문의로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언행을 책으로 묶어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저자는 여자의 몸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자신만의 고유한 빛을 발견했던 사람, 행복한 언어를 남기고 떠난 사람, 낮춤의 언어를 남기고 사람, 교만했던 젊은 날을 뒤로 하고 이제는 낮춤의 자세로 인생을 바라본 사람, 마지막 순간까지 묵묵히 타인을 돕는 데서 기쁨을 찾았던 사람 등 마지막 길을 떠나는 ‘열한 사람’을 보면서 ‘참 아름다웠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마지막 열두 번째 이야기를 빈 페이지로 남겨 놓았다. 책의 제목과 다르게, 열한 사람만 나오는 이유는 뭘까. 작가의 실수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열두 번째 감동은 바로 당신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앞에 등장한 열한 사람처럼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남겨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지 않겠는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실패를 통하여 `작은 죽음'을 여러번 경험한다.
나는 이러한 실패가 나약한 인간이 죽음에 이르러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고자 신께서 미리 안배한 무한 사랑의 징표로 인식하고 있다.
인간을 끝없이 사랑하는 신의 섭리에 나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사랑 속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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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나를 몹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예상도 못한, 내가 뭐라 대답할 수도 없는 곤혹스러운 내용이었다.

"저...00이 엄만데요.  지금 전화 받기 괜찮으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말씀 하세요."
"우리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서 선생님 바쁘실텐데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전화드렸어요."
"네? 아니, 왜요?"

나는 책상의 전화벨이 울리는 것도 듣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업무 시간에는 가급적 업무 외적인 일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나의 결벽증에 가까운 성향도 그때는 작동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직원이 내 전화를 대신 받았고, 지금은 통화중이니 메모를 남겨달라며 전화를 끊을 때까지 넋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00이랑은 대화를 해보셨나요?"
"몇 개월 전부터 자퇴할 생각으로 여러 정보를 알아봤었나 봐요.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에서 꺼낸 말이라 말리지도 못하겠더라구요."

내가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그 학생은 유독 눈에 띄었다.
많지 않은 고등학생 중에 체구는 작지만 다부져 보였고, 유난히 말수가 적은 반면 한번 말을 꺼내면 딱 부러지게 끝을 맺는 학생이었다.
가끔, 내가 낮에 회사일로 지쳐있는 날이면 어떻게 알았는지 피곤해 보인다며 자신들 때문에 고생시켜 드려 죄송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에 의하면 성적도 반에서 1,2등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비록 몸은 피곤했지만 이렇게 정을 나눌 수 있는 학생들이 있어, 그리고 가르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학생이 있어 행복했는데...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이 내 숙소를 찾아온 그 학생에게 자퇴에 관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혼자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짠했다.
학생의 어머니 말씀으로는 내년 4월에 검정고시를 치르고 자신이 목표하는 대학에 반드시 입학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었단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그 학생의 고단한 삶이 직장일에 지친 내 어깨에 켜켜이 내려 앉는 밤이다.  
어느날이던가 학교의 분위기도 산만하고, 상위권 대학의 합격율도 그리 높지 않아 검정고시를 볼까 하는데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을 때 나는 왜 학생의 고민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학교를 그만두어도 여전히 내게 도움을 요청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껏 모교 프리미엄을 누리고 살았던 내가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으며, 검정고시라는 외롭고 힘든 길을 선택하려는 그 학생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으랴.
친구들과 함께 이 늦은 밤까지 묵묵히 책장을 넘기고 있는 학생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외로워 보인다.  내게 모교는 어떤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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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노진선 옮김 / 솟을북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인생의 전반기 그러니까 학창 시절에 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퍼즐조각의 조합 속에서 살았다.  극도로 궁핍한 가정 형편과는 달리 학교 성적은 늘 상위권에 머물렀고, 이러한 부조화는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 나에게 어느 한 쪽으로의 극단적인 편중(심리적 쏠림 또는 치우침)을 경험하게 했다.
성적만으로 치자면 나는 또래의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그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일단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인도의 하리잔처럼 친구들의 시야에서 슬금슬금 뒷꽁무니질을 해서는 냅다 달아나곤 했다.
이러한 부조화는 언젠가 나의 진짜 부모가 내 앞에 `짠’하고 나타나 궁궐같은 집으로 안내할 것만 같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도 그럭저럭 자리가 잡혀가자 나는 학창 시절 내가 누렸던 행운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가 원했던 사람과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사업이 서서히 내리막길을 질주할 때조차 내가 하는 일에 실패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 자신을 세뇌시켰다.
그러나 보란 듯이 인생 1막의 커튼이 드리워지고 이어지는 암전.
시간은 조용히 흐르고 관객들이 다음 2막을 숨죽여 기다리던 순간에 나는 `연극은 끝났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 인생에 2막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핸들을 잡지 않은 광란의 질주가 한동안 계속됐고,  미친개에게 물리고 싶지 않았던 관객들이 뿔뿔이 흩어져 텅 빈 객석이 되었을 때 인생 2막의 커튼이 다시 열렸다.  

이 책이 내 손 안에 들어온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마치 일어날 것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내 자신이 반쯤 매달린 듯한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암울했던 순간에 자신을 추스리고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를 여행함으로써 인생에서 노련한 배우로 거듭나는 과정을 세세히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대역배우로 사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자신 앞에 펼쳐진 인생의 주연으로 살고자 내면의 소리에 응답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렇게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로 일 년간의 여행을 떠난다. 그녀에게 여행은 상처난 영혼을 치유하는 치료의 행로이며, 인생의 균형을 찾으려는 고단한 역정이자, 30대 중반의 이혼녀가 자아를 찾아 떠나는 영적 탐색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면서부터 어렴풋한 행복이 싹트는 걸 느꼈다.  칠흑 같은 시기를 보낸 뒤에는 행복의 희미한 가능성이라도 감지되면 어떻게든 그 행복의 발목을 움켜쥐고 그것이 날 진창에서 일으켜줄 때까지 절대 손을 놓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이건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의무다.  우리는 삶을 부여받았고, 이 생애에서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뭔가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인간으로서의 권리)이다."  (P.181)

그녀의 여행 동기를 생각할 때 마땅히 우울하고 칙칙한 여정일 것 같다고?  천만에 말씀!
그녀의 위트와 유머는 독자들의 우울과 외로움을 굴비 엮듯 줄줄이 엮어 천 년은 견딜만한 두꺼운 납상자에 담아둘 듯하다.  그리고 톡톡 튀는 생생한 표현들은 또 어떤가.  마치 글자의 자모가 뿔뿔이 흩어져 독자들의 얼굴에 물방울을 튀기며 장난이라도 걸어올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것도 지루할 즈음이면 19금의 아슬아슬한 표현들이 심장을 뛰게 한다.

"강도를 쫓듯이 시간을 쫓는다면, 시간 역시 강도처럼 교묘히 빠져나갈 것이다.  언제나 우리보다 한 발짝 앞서 가고, 이름과 머리 색깔을 바꾸고, 우리가 최신 수색 영장을 들고 로비를 가로질러 달려가면 이미 모텔 뒷문으로 빠져나가버린다.  우리를 비웃듯 아직 타고 있는 담배 한 개비만 재떨이에 남긴 채."  (P.237)

이 책은 총 3부로 이탈리아에서 쾌락 추구에 관한 36개의 이야기, 인도에서의 신앙 추구에 관한 36개의 이야기, 인도네시아에서 균형 추구에 관한 36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가 서문에서 밝히듯 108개의 이야기는 108개의 염주알을 상징하는 것이며, 작가는 이러한 구성을 맘에 들어 하는 듯하다.
인생의 지혜를 담아낼 때 우리는 보통 엄숙해야 한다고 여기며, 그러한 표현이나 문체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그런 통념을 깨고,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솔직하게, 그러면서도 적절한 해학과 위트, 무엇보다도 그녀의 탁월한 표현력으로 자신이 깨달은 바를 잘 전달하고 있다.

"최근에 내 모습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을 생각해봤다.  그건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는 촌극에서 벗어난, 내가 늘 꿈꿔오던 내 모습이요, 내 삶이다.  지금 이렇게 되기까지 내가 참아왔던 모든 것들을 생각하니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러니까 더 젊고, 더 혼란스럽고, 더 힘들었던 그 기간 동안 앞으로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던 나를 끌어당겨주었던 건 이 행복하고, 균형잡힌 나, 조그만 인도네시아인의 낚싯배의 갑판에서 졸고있는 내가 아니었을까?"  (P.492)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보다 재밌고, 어느 명상가의 행복론보다 뛰어난 그녀의 여행기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으라고 큰 목소리로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더할 수 없는 행복과 위안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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