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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푸드 -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소울 시리즈 Soul Series 1
성석제 외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언제부터 어른이 되었던 걸까?'하는 그런...   같은 색으로 칠해진 벽의 한 귀퉁이처럼 그 경계마저 모호한 어느 지점에 동그마니 서 있을 때부터 나는 어른이었다.  아니, 어쩌면  흙먼지가 쓸려 금방 씻겨놓은 아가의 젖살처럼 뽀얀 마당에 뒤뚱뒤뚱 발자국을 찍던 그 시절부터 나는 어른이었는지도 모른다.  땅에 쓰인 발자국 편지의 흔적을 따라 몇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나는 그새 어른이 되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비가 되었다.  종종종… 외줄로 난 그 길을 따라 훌쩍 미래로 날아온 듯한 느낌.  당혹스럽다.  그 길에서는 늘 엄마가 삼시세끼 긇여내던 된장국 냄새가 난다.

 

이 책을 읽기 한참 전.  아마 올해 초쯤이었나 보다. 나는 되르테 쉬퍼가 쓴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읽었었다.  (http://blog.aladin.co.kr/760404134/4658747)최고급 레스토랑의 인정받는 수석요리사였던 루프레히트 슈미트씨는 채워지지 않는 삶의 허기 때문에 호스피스 병동의 요리사가 되었고, 그는 삶의 마지막 여정을 걷고 있는 그 병동의 환자들을 위해 추억의 요리를 준비한다.  호스피스 ‘로이히트포이어’에서 11년간 근무하며 인생의 마지막 요리를 준비해주었던 요리사 루프레히트 슈미트씨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였던 되르테 쉬퍼는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그것이 내가 읽은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 읽었던 한 귀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인생의 날을 늘려줄 수는 없지만, 남은 날들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는 있습니다."라는 문장.  나를 보호하고, 나를 표현하고,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주었던 내 육신에 대한 마지막 감사의 인사.  육신과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에 육신이 기억하는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는 행위는 얼마나 숭고한가.  나는 지금도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소울 푸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소제목만 옮겨 보면 이렇다.  굳이 이렇게 하는 까닭은 소제목만 읽어도 그 내용을 대강 어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먹밥의 맛_ 백영옥, 내 친구가 만드는 과자, 이브콘_ 조진국, 당신의 첫 피자는 어떤 맛이었나요?_ 서유미,연애는 한 그릇의 카레라이스_ 안은영, 햄버거에 대한 명상_ 이화정, 온몸을 깨우는 매콤함, 빨계떡_ 박상, 영혼의 거처_ 성석제, 지금 익숙한 것을 처음 만났을 때_ 한창훈, 수제비와 비틀즈_ 김창완, 엄마표 된장찌개_ 이충걸, 남쪽 나라에서 온 사나이_ 이우일, 달밧, 내 영혼의 다이어트_ 정박미경, 라면은, 완전식품이다_ 김어준, 토스카나의 수프를 추천하네_ 박찬일, 퓨전, 길에서 얻은 음식_ 노익상, 바닷내가 나는 밤이면_ 황교익, 커피향 엄마를 기억하세요?_ 이지민, 커피, 벗어날 수 없는_ 조동섭, 혼자 마시는 술_ 차유진, 재즈, 와인 그리고 박사님_ 남무성, 삶이 담긴 술잔_ 강병인.  도합 21명이다.

 

삶이 팍팍할수록 옛것이 그리운 법.  세상이라는 수레바퀴는 냉정하고 비열하게 한치의 자비심도 없이 흘러만 가고, 나는 그리움을 안주 삼아 농익은 막걸리 잔이라도 기울이고 싶다.  그때처럼 까마득하던 막걸리 심부름길에, 아무런 걱정도 없이 봄이 부르는 향기에 넋을 놓고 싶다.  오전에 푸슬푸슬 내리던 눈도 소리도 없이 잦아들고 까만 어둠이 세상의 모든 것인 양 단조롭다.

 

어릴 적 자주 부르던 노래를 잊지 못하 듯, 오늘은 문득 아주 오래도록 맡았던 엄마의 체취가 몹시도 그립다.  뜬금없는 안부전화에 내 목소리가 젖어있었나 보다.  뭔 일 있냐는 물음에, 그 전화선을 타고 젖은 짚섶에 앉아 푸성귀를 손질하던 어머니의 거친 손이 영상처럼 펼쳐진다.  나는 언제부터 어른이 되었는지, 군것질거리가 귀하던 시절, 콩 서리에 밤이 새는 줄도 몰랐던 그 기억들도, 그때의 음식들도 세월따라 차츰 잊혀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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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속절없이 세월만 간다고 푸념아닌 푸념을 한다.

그래서일까? 한 해를 마감하는 매년 이맘때면 이틀이 멀다하고 술을 마신다.  술이라도 먹고 흠뻑 취하면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회색 신사('모모'에 나오는)의 출현을 알코올 에너지를 빌어 막아볼 수 있으려니 하는 억지와도 같은 주장이 술꾼들의 간을 두배쯤 부풀려 놓는다.  오지 않을 회색 신사를 기다리며 비장한 결의를 다지는 듯한 그들의 표정은 자못 진지하다.  진지하다 못해 제 풀에 제가 쓰러질 즈음이면 게게 풀린 눈으로 모모를 찾는다.  자신의 인생 역정을 차분히 들어줄 상대가 필요한 시간.  모모는 출장 마사지라도 간 것인지 밤새 보이지 않았다.  자정을 넘길 무렵,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화의식에 돌입한다.  먼저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오래된 정화의식을 본떠 자신의 속을 남김없이 비우기.  사람들 발길이 드문 신성한 곳을 찾아 무릎을 꿇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먹은 음식물을 다 토한다.  일행은 그 신성한 의식을 지켜보며 등을 토닥여준다.  자신을 대신해 고통을 감수하는 예수를 생각하며.

 

때로는 오지 않는 회색 신사에게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회색 전봇대를 붙들고 드잡이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시체놀이라도 하려는지 큰 대자로 누워 요지부동의 자세로 추위를 이기는 사람도 있다.  설산에서 고행한 석가세존도 그랬을까.  나는 그 모든 의식을 맨정신으로 지켜보며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환상에 빠져든다.  세상의 성인이란 성인은 모두 한순간에 아이로 깜짝변신을 한 듯한 착각.  몇 첨 남지 않은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까맣게 타들어가는, 그야말로 뼈와 살이 타는 밤이다.  나는 문득 포장마차의 닝닝한 우동을 그리워한다.

 

나는 그 밤에 성석제의 <칼과 황홀>을 읽었다.

내가 처음 읽었던 그의 작품은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였다.  작가의 성격이 고스란히 글에 투영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지극히 낙천적이거나, 지극히 비관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대개의 경우 작가는 자신의 성격을 은밀히 감춘다.  자신의 글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작가의 성격이 극단과 맞닿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성석제의 글은 구수한 입담으로 배꼽을 쥐게 한다.  아마도 <칼과 황홀>을 다 읽은 독자라면 자신의 몸무게가 20그램쯤(배꼽 무게) 줄어들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문학동네 인터넷 카페에 연재했던 글에 몇 대목을 더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고, 1부는 '하루 세 번의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끼니와 밥상을 다루었고, 2부에서는 '마음의 노독을 풀어준다'는 표현으로 술 이야기를 담고 있다.  3부는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라는 제목에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데 찻상과 후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글의 말미에는 맛지도와 함께 작가의 말이 실려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제 먹을 복은 다 타고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워낙에 없던 시절이었다.  허기를 달랠만한 것이면 뭐든 먹었던 시절.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먹었던 흰쌀밥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잡곡이 섞이지 않은 하얀 쌀밥에 반찬도 없이 왜간장과 김을 얹어 먹었던 그 밥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음식의 맛은 훗날 추억에 버무려져 더 맛깔난 음식으로 차려질지 모른다.  성석제의 <칼과 황홀>은 결국 음식에 얽힌 사람들과 에피소드의 귀결이다.  나는 '재미는 그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에서 나온다'는 말을 닳도록 할 때가 있다.  성석제의 유별난 맛기행은 바로 낙천적인 그의 성격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런지...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겪고 만나고 맛보고 느끼는 것이 결국 내가 태어난 곳, 자라난 곳, 가장 가까운 사람에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삶의 근간이 되는 그런 것들이 없다면 나는 세상을 지각할 기본적인 도구가 없는 셈으로 정말 줏대도 정신도 없이 황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오후의 나른한 권태가 밀려오는 시간.  나는 에스프레소의 진한 커피향에 끌려 후배의 커피숍에 들러 이 글을 쓴다.  내게 필요한 것은 각성제로서의 커피가 아닌 후배의 가벼운 미소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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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는 사내의 인사이동이 있었다.

직장생활이란 게 다 그렇지만 매년 연례행사처럼 치뤄지는 인사이동 시기가 다가오면 미리부터 '카더라'식의 루머와 설이 나돌고 그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모습도 눈에 띄곤 한다.  나도 물론 평범한 직장인인지라 예외일 리 없다.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 누군가의 '카더라 통신'이 중계되기라도 할라치면 진행자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새라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듣게 마련인데 다 듣고 돌아서는 모습에서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긴장과 기대 속에 사내 게시판이 구멍이 날 지경에 이르면 공고문이 나붙는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환호와 한숨소리.  웬만한 야구장의 응원 열기가 이보다 더할까.

흥분과 실망이 교차하는 왁자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저녁 어둠이 내리는 퇴근 시각이 다가오면 여지없이 회식자리가 펼쳐진다.  기분 좋다고 내는 승진턱이야 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즐거운 기분으로 참석할 수 있다지만, 승진에서 탈락한 우리의 '떨거지' 그룹은 어깨를 웅크리고 한겨울의 칼바람을 맞아야 한다.  가끔 부서에서는 승진에서 탈락한 그들을 위해 '위로주'를 사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찌 술로 달래질 성질의 것이던가.

 

나는 승진 축하 자리보다는 진급 탈락자들을 위한 위로 회식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각별히 챙기는 인류애의 발로에서 그러는 것도 아니요, 그들 앞에서 우쭐하거나 거드름을 피우려고 그러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들과 섞여 술자리를 갖다 보면 '세상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다들 거나하게 취하면 내일 당장 사표를 쓰고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사람과, 내가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느냐며 큰소리 치는 사람과, 갑자기 흐느껴 우는 사람 등등 그 모습도 제각각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낄 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승승장구하는 시기에는 그 사람의 본성을 알기 어렵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가리기 위해, 또는 속상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술기운을 빌어 어렵사리 푸는 그들의 큰소리는 애잔하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모습이라고 웅변하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서 소박한 소시민의 따뜻한 정감을 느낀다.

 

자리이동이 있었던지라 업무 인수인계로 한 달이 어찌 흘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연말이면 왜 그리 회식자리가 많던지...  술을 못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12월과 1월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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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8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른 12월과 1월이 지나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꼼쥐님 회사에서는 한 바탕 칼바람이 불었군요. 인생은 고스톱과 같다더니, 누가 또 피박을 쓰고 광박을 쓰는지 그건 피해갈 수 없나봐요. 저도 술을 잘 못하는데 미래에 회식자리 없는 일을 알아봐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그런 일이 있을까요? 작가라면 또 모르지만 ㅎㅎ) 오늘 날이 많이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길 :)

꼼쥐 2011-12-09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도 밤새 회식자리에 끌려다녔더니 하루 종일 피곤하네요. 음주가무가 최대의 약점인 저는 연말연시에는 중노동에 시달립니다. 음주가무 중 한두 개라도 잘하는 게 있어야 조금 덜 힘들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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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라고 정확히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일 년의 마지막 달에 지병처럼 앓았던 휑한 느낌이 이제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유난 떨지 않고 담담하기.  내 청춘의 끝무렵에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나 내 마음이라고 어찌 내맘대로만 할 수 있던가?  나는 여전히 시린 가슴을 안고 연초의 계획을 하나 둘 끄집어 내어 자학과 같은 자책과 함께 효용을 다한 그것들을 폐기처분했다.  그리고 새 세상이라도 열리는 양 새해의 첫 날을 기다렸다.  나는 중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12월 내내 가슴 한켠에 커다란 돌덩이를 달고 살았다.  12월 마지막 날, 석방을 기다리는 수인처럼 나는 그 밀리는 고속도로를 뚫고 일출을 보러 떠났다.  일 년을 헛 산 죄인의 반성문이자 죄사함을 향한 골고다 언덕과 같은 그 길에서 나는 습관처럼 안도하곤 했다. 

나의 게으름이 연례행사로 굳어진 일출여행에 일대 반기를 들면서 나는 더는 새해 계획도, 12월의 가슴앓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청춘의 시절이 빠르게 흘렀고, 평범한 일상처럼 담담한 눈길로 12월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12월에 꼭 읽어야지 하는 책도, 1월에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도 내게는 없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책을 고른다. 

1995년에 출간된 신경숙의 첫 산문집이 재출간되었다.  그녀의 글에서는 푸른색 잉크가 스펀지에 스미듯 짙푸른 슬픔이 뚝뚝 흐를 것만 같은 원형질의 설움이 묻어난다.  중독성 짙은 슬픔과 깊은 허무의 칼끝이 독자의 마음을 몇 번 헤집고 만신창이가 된 가슴을 진정시킬 즈음이면 글은 끝난다.  잔인하다.  그렇게 여기면서도 어김없이 그녀의 작품에 손이 가는 '이해불가'의 습성.  서른세 살의 나이에 작가는 어떤 아픔을 품었던 것일까?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과 마주할 때가 있다.  결코 짧지 않은 인생길에 그보다 더한 일인들 왜 없으랴마는 우리들 모두는 막막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칠 때면 슬쩍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리라.  그러나 오래된 장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듯 하나의 업을 천직으로 알고 꿋꿋이 견뎌온 삶이 그 향기가 더하지 않을까?   작가도 나와 생각이 비슷했나보다.  세월의 잔물결보다 더 위대한 화가가 어디 있으랴. 

 

 

 

칭찬 일색인 작품은 잘 읽지 않는다.  오래된 나만의 독서 편향은 쉬이 바뀌지 않있다.  그 이면에는 독서 후의 실망스러움에 대한 공포가 첫째요, 출판사의 알량한 광고에 결코 속지 않겠다는 나의 오만과 자존심이 그 둘째라 하겠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잘 훈련된 나의 독서 고집에도 불구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언제나 예외로 자리하고 있다.  문학을 전공하지도, 그렇다고 독서 경험이 풍부하지도 않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종의 지적 허영이나 과장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아무튼 하루키의 작품은 언제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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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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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기 시작한 것은 꽤나 오래 전의 일이다.
내 돈 주고 사서 읽었던 것은 아니고 지인에게 빌려 읽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이런 종류의 책-독서가 목적이 아닌 독서 목록을 수집하고자 하는 수단으로서의 책-을 구입하는 데 내 돈을 주고 산다는 것이 은근히 아깝다는 얄팍한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한 권으로 끝나겠거니 했던 책이 점차 권수를 더하는 바람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처하고 말았다.  지인은 더 이상 책을 사지 않았고 누군가의 독서일기를 몰래 엿보던 묘한 즐거움(또는 관음증)은 끊기 힘든 유혹이 되었다.  그렇게 사 모은 책이 이 책을 더하여 도합 여덟 권에 이른다.  책 수집가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단 한번에 끝까지 읽지 못한다.
생각날 때마다 그저 야금야금 읽는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 자란 사람들은 다 이해하겠지만 누군가로부터 받은 사탕 몇 알을 자신만 아는 장소에 숨겨두고는 달콤한 것이 간절할 때만 몰래 가서 몇 모금 핥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내가 책을 아껴 읽는 것은 이것과 사뭇 다르다.  독서일기 한 권에는 줄잡아 수십 권의 책이 소개되는 까닭에 책 욕심이 많은 나는 그 중 적어도 이삼십 권의 책을 사들일테고 그것은 고스란히 내 손길도 닿지 않은 채 묵은 책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돈도 돈이려니와 책 한 권을 읽음으로써 예상치도 못한 전집 한 질 분량의 책이 늘어나면 나는 한동안 독서에 대한 부담감으로 책을 읽지 못하는 처지에 처하곤 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웬만한 사람이면 그런 경험을 서너 번 겪고 나면 그런 못된 버릇이 고쳐질만도 하련만 나의 경우에는 너무도 쉽게 잊혀지니 고칠 기회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야금야금 읽기'다.
책의 구매를 일정한 기간으로 나누어 소비의 분산을 꾀하자는 나의 얄팍한 속셈은 그럭저럭 성공한 듯 보인다.  충동구매로 인한 책의 대량반입은 사라졌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은 나의 습관이 언제든 고개를 들고 나를 노려보게 되리라는 막연한 불안감은 지울 수 없다.

 이 책은 지금까지 써왔던 장정일의 스타일과 많이 다른 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전에 발간 된 그의 책들을 살펴보면 자신의 일상 이야기와 전형적인 일기형식이었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방법으로 풀어내어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책읽기의 방법과 주제를 주로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장정일의 독서를 통한 세상읽기는 배배 꼬인 그의 심사를 번번이 드러낸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2부 우리는 과거로부터 얼마나 멀어졌을까"를 제외하면 부의 구별이 무의미해 보인다.  단지 작가의 자의적 분류였거나, 출판사의 편의적 구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하기야 어떤 순서로 놓여지든 한 작가가 쓴 서평이 달라질 리도 없을 것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으며 매번 드는 생각은 그의 독서 탐닉은 참 대단하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니 그 정도는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당위성에 빗댄 질문을 한다면 뭐라 변명할 말도 없지만, 그런 당위성마저 지키지 않는 얼치기 작가가 세상에는 쌔고 쌨다. 

 300쪽이 조금 넘는 책 한 권을 장장 두 달에 걸쳐 다 읽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책도 어지간히 싫어하는 사람이군' 하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하다.
오늘은 빼곡히 적은 독서목록을 들고 아들녀석과 도서관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비는 개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둡다.  점심을 먹고 나도 이제 슬슬 나갈 채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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