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가슴에 청진기를 들이대면 헉헉대는 숨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릴 듯하다.  무더운 날이었다.  옆에 앉은 사람의 열기가 훅훅 느껴지는 듯했다.  간간이 불어 오는 바람마저 없었다면 호수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입만 뻐끔거리는 붕어처럼 길게 늘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권태에 지친 오후는 시간의 모노레일을 천천히 미끄러져 흐른다.  대책이 없었다.

 

뭔가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요즘 들어 부쩍 재미를 붙이고 있는 물리학책에도 도무지 눈길이 가지 않았다.  도서관에 들러서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빌렸다.  책을 들고 들뜬 마음으로 나오려는데 한 권만 빌리기는 뭔가 아쉬운 듯해서 다시 서가를 맴돌다가 찾아낸 책이 A.J.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였다.  한번쯤 읽은 기억이 있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두 권의 책을 빌려 도서관을 나섰다.

조금 더 있다가는 도서관 전체의 책을 탐낼까 두려웠다.  도서관 옆의 작은 공원에서 잠시 산책을 했다.  머리꼭지가 이글거리는 한낮의 더위 속에서도 아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는 이미 산책 나온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비집고 앉을 틈이 없어 보였다.  미련이 남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여전히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컴퓨터 열기도 무시하지 못하겠어서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제 여름의 초입인데 앞으로 견딜 일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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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 -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며
김제동 지음 / 위즈덤경향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인도의 영적 스승인 오쇼 라즈니쉬는 그의 책 <삶의 길 흰구름의 길>에서 이렇게 썼다.

"이기주의자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정치인이 될 것이다.  그들이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그 직업을 통해 그들은 정치인이 될 것이다.  정치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에고 간의 싸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다.  내가 우월해지려고 애쓰지 않을 때 나는 진정으로 우월하다.  그러나 이 우월함은 열등함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열등하다는 느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개그맨 김제동을 부를 때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말은 너무도 다양하다.

좋게는 '국민MC', '대한민국 최고의 입담꾼'에서부터 '소셜테이너' 또는 심하게는 '좌빨', '빨갱이'까지 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평가는 그야말로 극과극이다.  이러한 평가는 평가를 내리는 당사자들이 자신의 사상에 비추어 호불호를 말하는 것일 뿐 정확한 평가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시각을 달리하여 제3의 입장에서 김제동을 평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것은 김제동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던 변명을 내가 대신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서두에서 언급한 오쇼 라즈니쉬의 시각에서 그를 말하려고 한다.

 

오쇼는 세상을 보는 시각으로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정치적이라 함은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남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욕구를 이름이다.  즉, 남과 비교하여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끼면 상대방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려는 일체의 행위를 정치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인도 자신이 속한 종교가 타종교와 비교하여 열등하다고 느껴 타종교를 헐뜯고 비난한다면 그 또한 종교 안에서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이 정치적 행위를 하거나 정신병자가 되는 수밖에 없단다.  덧붙여서 정신병자는 정치인보다 덜 위험하다고도 했다.  최소한 정신병자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주장할 뿐 입증하거나 강제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 있더라도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정치적이라고도 했다.

 

남보다 우월해지려는 욕구가 없는 상태, 그렇다고 우월하다고 인식하지도 않는 상태를 '종교적'이라고 했다.  오쇼의 관점에서 보면 김제동은 오히려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 '정치적'이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종교적에 가깝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김제동이 본인 스스로 우월하다고 인식하는지 아닌지까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최소한 열등의식을 느껴 타인을 비난하고 헐뜯어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려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우리와 같은 범부의 입장에서 충분히 종교적이다.  그럼에도 그를 정치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그 사람이 정치적인 것이다.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 그 두번째 이야기인 이 책은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 중 내가 기억에 남았던 것은 딴지일보 총수인 김어준과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옮겨보면 이렇다.

 

김제동: 당당, 교만은 한 끗 차이야.  겸손과 비굴도 한 끗 차이지.  당당과 겸손, 교만과 비굴은 각각 세트잖아.  그런데 형은 당당한데 겸손하진 않아.

김어준: 나에겐 청소부나 대통령이나 똑같아.  그가 가진 권력으로 덕 볼 생각 없어.  내가 누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면 언제나 남세스러워.  그 정도 균형감각이나 염치는 있어.  난 염치를 중요하게 생각해.  그게 세상의 균형을 만드는 거거든.   (P.171)

 

다른 나라에서는 박물관에 가서야 찾을 수 있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반짝반짝 윤이 나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즐기고 덕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을 게 분명한데 말이다.  내가 알기로는 그것으로 덕 보는 직업군은 오직 시정잡배만도 못한 정.치.꾼.이 아닐까 한다.  최소한 이 책을 읽으면 김제동이 종교적에 가까우면 가까웠지 결코 정치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쉽게 판단하리라고 본다.  한글을 뗀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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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 박범신 논산일기
박범신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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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하고 벌이 날았다.  아니, 그런 듯 느꼈다.  아카시아 꽃잎이 오월의 파편처럼 등산로에 흩어지던 어느 날, 그 메마른 시간에 농부들은 여느 해처럼 씨를 뿌리고, 마른 하늘을 원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난 세월을 곰곰 되짚어가며 이쪽 논배미에 이른다.  무심한 세월이었다.  지나온 발자욱이 순간의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휑한 가슴에는 피죽바람이 분다. 

 

아침마다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는 산을 깎아 일군 비탈밭이 있다.

오늘도 습관처럼 산을 오르는데 사래 긴 밭에 가득 심어진 고구마에 일삼아 물을 주고 계신 어르신 한 분을 만났다.  차가 닿을 수 없으니 등산용 배낭에 물을 지고 날라다 그 넓은 밭의 농작물에 병아리 오줌만큼이라도 목을 축이게 하려면 오죽이나 힘들까마는 굽힌 허리는 펴질 줄 몰랐다.  한 시간 남짓 운동을 하고 내려올 때도 노인은 여전히 물통을 손에 쥐고 마른 땅에 물을 축이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자 그제서야,

"워낙 가물어야지요."하며, 일손을 놓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쩍쩍 갈라진 손바닥을 가로질러 흩어지는 푸른 담배 연기처럼 농부의 지난 세월이 바람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바닥 위에 올챙이가 하얗게 배를 뒤집고 가득히 죽어 있던 풍경이 아스라히 스쳐 지나갔다.  그의 삶에도 몇번쯤 지금처럼 마른 먼지 풀풀 날렸던 시간이 있었을 게다.  속만 바짝바짝 타들어가던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을게다.

 

유년기를 시골에서 보낸 사람은 누구나 애틋한 향수를 가슴에 묻고 산다.

잊고 싶을만치 어렵던 시절이 세월의 풍상에도 닳지 않는 석문(石紋)처럼 핏줄을 타고 흐르다 적당한 시간에 이르러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그리움.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나는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농부의 거친 손을 보며 아날로그적 감상을 서두에 적었다. 

 

소설가는 때로 감정적이다 못해 충동적일 때가 많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글로 배설하는 행위, 그것이 곧 소설이며, 시이며, 문학이다.  책에서 펼쳐지는 일상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야 독자는 크게 공감하는 법이다.  책에서는 항상 나와 크게 거리가 있는 신들의 세상을 접할 뿐이라면 어느 누가 책을 읽을 것이며,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쪼개려 들겠는가.  작가 박범신은 항상 그렇게 충동적이었고, 일반 독자와 충분히 닮아있었다.

 

"이제 내 문제를 알겠다.  쓸 때만 '생각'할 뿐 나의 일상은 거의 정서적 '충동'에 지배받는다.  감으로 결정하고 급한 맘으로 행동한다.  나는 바둑을 두지 못한다.  앞의 수를 내다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 생각하면서 쓰고, 충동적으로 일상을 운영한다.  이 나이까지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논산행을 결정한 것도 그렇다."   (P.184)

 

작가는 그렇게 2011년 어느 가을날 논산행을 결정했고, 그렇게 그는 떠났다.

고향이라는 패찰이 붙어있을지라도  그곳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고 그는 썼다.  새로운 시간의 레일을 따라 새로운 공간에 처음 온 것이라고도 했다.  어쩌면 그는 지나온 시간보다 남겨진 시간을 추억하는지도 모른다.  새로이 겪는 순간순간의 경험을 추억하기 위해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1980년대, 나는 작가 박범신이 소설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TV에 가끔 등장하는 인기없는 연예인쯤으로 생각했었다.  겉표지에 또렷한 그의 이름 석 자를 보면서도 TV 속의 그와 활자 속의 그를 짝짓지 못했었다.  내게는 그가 그렇게 멀리 떨어진 '누군가'였다.  이 책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TV에 가끔씩 얼굴을 비치던 예전의 그는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이미지를 많이 의식했던 듯하다.  그러나 페이스북에 올린 두서없는 글들을 모아 엮은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코 꾸미려 하지 않는 모습, 남들과 구별짓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곳곳에 보인다.  작가가 자신의 고향 논산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머물렀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물이 하는 소리를 들으려면 나를 낮추고 지우는 수밖에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선언하지 않고서 얻을 수 있는 사랑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가 집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나를 지워 빈집이 나의 주인이 되도록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말하고 나면, 비로소 어둔 밤도 어린 연인처럼 사랑스럽다.  어둠이 지금, 내가 없는 듯, 나를 자유로이 관통해 지나간다."   (P.111)

 

"논산일기 2011 겨울"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페북일기는 디지털 세대에 쓴 작가의 아날로그적 감상이다.  논산집에 적응하며 홀로 겪는 일상과 작가의 고향 이야기, 논산과 서울을 오가며 만난 사람들과 세태에 대한 단상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과 어우러져 탑정호를 스치는 바람의 노래처럼 감미롭다.  나는 작가의 노래를 그렇게 눈으로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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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2-06-15 14:38   좋아요 0 | URL
일상생활 속의 이야기와 함께 박범신 작가의 페북일기를 잘 결합시켜 주셨네요.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꼼쥐 2012-06-19 15:56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 급하게 올리느라 생각나는 대로 적은 듯해서...
 

무릇 책이든, 사람이든 그 인연은 따로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특정 시각, 특정 공간에서 만나는 각각의 대상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간에 만나야 할 사람(또는 사물)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고 생각할 때 세상에 우연은 없구나, 하는 섣부른 운명론자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각각의 인연에는  다 나름의 의미가 있었음을 그 인연이 한참 지나고서야 깨닫게 된다.

 

최근 네 권의 책이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하여 내 수중에 들어왔다.

책의 제목은 이랬다.  의학자 제프리 롱, 폴 페리의 『죽음 그후』, 소걀 린포체의『티베트의 지혜』, 알랭 드 보통의『불안』, 스캇 펙 박사의 소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이 그것이다.  얼핏 제목만 보면 전혀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책들이다.  나도 읽기 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머리 하나를 자르면 그 자리에 새로 두 개의 머리가 생겨난다는 히드라의 신화처럼 인연은 어디론가 달려가며 끝없이 가지를 치고, 지친 기색도 없이 다음 일정을 준비하곤 한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제망매가의 싯구처럼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한가지에 나고/가는 곳 모르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어느 작가는 현실이 마치 기차처럼 어디론가 달려가며 과거와 미래를 갈라 쏟아낸다고 했다.  그러나 인연은 희미한 의미만 남긴 채 구름처럼 이내 흩어지고만다.

 

내가 받았던 네 권의 책은 모두 하나의 주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마지막 장에 이르러 '죽음'을 다루고 있다)  우연치고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통상적인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네 권의 책이 내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따로 존재할 것만 같은, 내 삶이 지속하는 한 내 주위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듯한 미지의 존재에 대한 서늘한 두려움.

 

모든 판단에 앞서 '죽음'을 생각하고 결정을 내린다면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겠는가.  그러나 나와 같은 범부는 딱 거기까지이다.  그곳에서 단 한 발짝을 움직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내게는 그 용기가 없다. 

 

영국의 시인 T.S.엘리엇은 "겸손은 가장 얻기 어려운 미덕이다.  자기 자신을 높이 생각하려는 욕망만큼 여간해서 가라앉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 책을 읽고 리뷰를 쓰지는 않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려 한다.  항상 겸손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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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언젠가 다비드 르 브루통의 <걷기 예찬>을 읽고 감탄을 한 적이 있었다.  빼어난 글솜씨도 그러려니와 평소 걷기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 그 책은 그야말로 행복한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섯 번째 예찬 시리즈로 출간된 이 책은 또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김영하"하면 떠오르는 책이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이다.  그가 쓴 다른 책이 많음에도 나는 왜 이 책만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작가의 감성과 글이 주는 느낌이 내가 읽던 순간의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의 글은 현란하지 않아서 좋다.  무엇보다 작가가 자신의 감상에 매몰되지 않는 점이 그가 프로 작가로서의 저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나는 이 책의 작가를 모른다.  주제 사라마구를 제외하면 포르투갈 작가 중 생각나는 인물이 없다.  얼마 전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재미있게 읽은 탓인지 이 책의 제목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이들과 관련된 일이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면 열 일 제쳐 두고 넋을 놓곤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또 다른 버릇이다.    미국의 전도유망한 청년이 유괴된 일곱 명의 아이를 모두 구출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이야기란다.  네팔의 오지에도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빛나고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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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2-06-06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랄랄라 하우스를 읽고 싶으신 분들이 많으시네요.
저는 구판으로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김영하 작가의 책이어서 관심들이 많은 것같아요.
6월의 주목 신간도서를 작성해 주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꼼쥐 2012-06-12 15:40   좋아요 0 | URL
아~~~그러셨군요. 저는 아직 읽지 못해서...ㅎㅎ 이렇게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