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공연히 내세우는 구실' 또는 '잘못한 일에 대하여 구차스럽게 말하는 변명'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핑계는 결국 '정당하지 못한 일을 획책하는 사람의 자기합리화' 또는 '안 좋은 결과에 대한 책임 회피'임이 분명해진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유난히 화를 잘 내는 아이가 있다.

어느 날 나는 그 학생만 따로 불러 진지하게 물었다.  그렇게 화를 잘 내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그러나 내게 돌아온 답변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말이었다.  그 학생은 자신이 그동안 화를 자주 낸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학생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경중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그 학생과 비교하여 크게 낫다거나 모자르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때 학생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사람들은 어떤 일의 결과(주로 나쁜 결과가 해당되겠지만)에 대하여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안 좋은 일인 줄 알면서 행동할 때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핑계를 대곤 하지.  우리가 핑계나 변명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단다.  왜냐하면 핑계가 습관처럼 굳어지면 어떤 일의 결과를 초래했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지.  즉, 자신이 말한 핑계가 그 일의 원인이라고 자기 자신도 굳게 믿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야.  언제부턴가 자신의 말에 자신도 속게 된다는 뜻이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실패나 좌절을 겪을지라도 그 원인만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언제든 다시 일어 설 수 있지만 실패의 원인을 찾지 못하면 지난 시간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 언제든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단다.  이런 의미에서, 즉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핑계가 나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야.

더구나 우리가 하는 핑계의 대상이 늘면 늘수록 내가 화를 내야만 하는 대상도 비례하여 늘어나는 것도 문제란다.  혹시 아빠도 운전하시면서 화를 자주 내는 편이니?" 

 

아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렇다고 답했다.

"사실 나도 가끔은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가 있어.  내 앞으로 갑자기 끼어든 차로 인해 큰 사고가 날 뻔한 경우가 더러 있었거든.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가 서행운전을 했었거나 방어운전을 했었더라면 그 운전자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우고 화를 낼 이유는 없었던 듯해.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우지.  자, 그러면 보자.  만일 내가 문제의 원인을 '나의 실수'로 파악했더라면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화를 냈었을까?  주먹질 일보직전까지 말이야.  아마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이런 것처럼 책임을 다른 대상에게 돌리면 나는 그 대상에게 화가 나는 법이지.  날씨가 덥다고 화를 냈다면 그 대상은 '하느님'이 되어야 하나?  문제의 원인은 내가 체력적으로 약해서 더위를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일에 있어 결과가 안 좋은 이유는 대부분 그 원인이 내게 있단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한 편이니 그 원인이 내게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을 거야.  너가 그 동안 자주 화를 내었던 것도 사실 네가 그 원인을 잘못 파악했던 것이고, 네가 원인이라고 지목한 여러 대상들에게 한낱 분풀이를 한 것에 불과하단다.  실수나 실패를 통하여 배운다는 것은 일의 결과와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에 있는 법이지.  나는 너의 능력을 믿고, 앞으로는 네가 어떤 나쁜 결과에 직면하더라도 그 원인을 정확히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아이는 요즘 화를 내지 않는다.

내 앞이라서 조심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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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 미안할 때가 있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탈 때,

홀로 있는 빈 집에서 에어콘을 켤 때,

제 손으로 키우는 곡식도 없으면서 과한 밥상을 받을 때,

제 한 몸 건강하자고 온 산을 황폐하게 할 때, 또는 내 발 밑에서

의식하지 못한 순간 죽어가는 많은 생물들을 생각할 때,

순간순간 쓰레기를 만들 때,

 

적은 액수의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내밀며 힘들다고

엄살을 떨 때,

멀쩡한 옷도 많은데 유행만 좇아 눈이 멀 때,

기아에 허덕이는 지구인들을 보면서 모닝커피를 마실 때,

 

또는

약자의 억울함을 못 본 척 눈 감을 때, 혹은 분노하지 않고 외면할 때,

사랑이 중하다면서 냉정하게 돌아설 때,

과한 욕심으로 시간만 허비할 때,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나는 이럴 때,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마이크를 잡고 머리 숙여 대 우주인 사과라도 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사는 게 말할 수 없이 죄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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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한 더위가 목젖 근처에서 깔딱거렸다.

열에너지가 더해지면

분자 알갱이들은 더 분주하고

빠르게 움직인다는데

내 발걸음은 마냥 안단테 칸타빌레.

 

측근 비리로 대국민 사과를 하는 대통령

이번에는 청와대 뒷산을 오르지는 않은 듯.

하기야

한 푼의 병원비라도 아껴야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삼복의 더위애 일삼아 산을 오를까.

나는 오늘도 아침에 산을 올랐다, 병원비라도 아껴보려고.

 

퇴근길에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염천을 피해 서늘한 고요 한점 그리워서.

 

오늘처럼 더위가 등줄기를 타고

뻗쳐 오를 때는

어느 한 맺힌 사랑이 이다지도

뜨거운 것이냐?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랑밖에 몰랐던 순진한 백성들이

꾸역꾸역 또 하루를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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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섰을 때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태풍 카눈이 지나간 자리.

사람들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저마다의 우울을

낮은 빨랫줄에 널었다.

잗주름이 잡힌 우울은 바람에 펄럭이기만 할 뿐

시야에서 멀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짙은 구름은 사물의 그림자를 선명히 구획하지 못하고

한낮으로 갈수록 오히려 혼란만 가중된다. 

 

 

오전에는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벌어진 듯 머리를 맞대고

오글오글 모여 있던 내 의식들이 오후가 되자

너나 할 것 없이 '잠'을 처음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들 그쪽으로 우루루 몰려갔을을 때,

나는 그 중 몇이라도 붙잡으려고 헛힘만 쓰고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수한 의식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떠받치던

눈꺼풀은 그들이 사라지자 힘없이 닫혔다.

그럴 때 나는 마치 수확이 끝난 논에 군더더기처럼 세워진

허수아비의 느낌이었다.

 

그렇게 잠깐 졸았나보다.

지금은 구름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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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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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마다 리뷰를 남기는 것은 아니지만 리뷰를 써야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이 드는 책이 있다.  그것도 책에서 느꼈던 감동이 일상에 희석되지 않도록 서둘러 써야겠다고 말이다. 그런 느낌은 책을 공짜로 제공받았으므로 정해진 기한내에 써야 하는 의무감과는 다른 것이다.  채 쓰기도 전에 책에서 느꼈던 진한 감동이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스스로를 재촉하는지도 모른다.

 

내게 <빌뱅이 언덕>은 그런 책이었다.

권정생 선생의 산문집이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의 작가라고 하면 '아, 그 분!'하고 무릎을 칠 사람들이 대다수일 듯싶다.  그만큼 선생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아이가 있는 집에서 선생의 책 한두 권쯤 갖고 있지 않은 집도 드물 것이다.  우리집에도 아들녀석이 어릴 적에 읽었던 선생의 작품이 족히 서너 권은 넘을 듯싶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선생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잘 나가는 동화작가려니 생각했었다.  그게 다였다.

 

빈약한 정보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에야 선생의 삶을 조금 알게 되었다.

선생의 삶을 몇 마디 단어로 집약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느꼈던 선생의 삶은 가난과 질병, 지구 환경에 대한 염려와 조국 통일의 염원, 그리고 유년기에 만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물론 선생으로부터 동화를 떼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죽음도 그렇지만 가난이나 질병도 매한가지로 보편적 가난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닝 커피를 마시면서 가벼운 대홧거리로 나눌 수 있는 보편적 가난은 실존에서는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가볍게 치부할 수 있는 대화의 소재도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 가난은 질긴 목숨을 원망해야 하는 천형이자 오직 생명으로만 집중되는 삶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던 나는 일본에서 가난한 청소부의 아들로 태어나 경북 안동 조탑리 빌뱅이 언덕 토담집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독한 가난과 질병을 안고 살았던 선생의 실존에 목이 메었다.

 

자신의 병이 동생의 혼인에 방해될까봐 행려병자로 떠돌던 한 때, 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살던 시절,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소문과 추측으로만 헤아릴 수 있었던 둘째 형님에 대한 그리움 등 이 책의 1부에 실린 자전적 산문을 읽노라면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려왔다.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선생이 겪었던 두 번의 전쟁을 전후세대인 나는 알 길이 없다.  절대적 궁핍을 벗어나던 시기에 태어났으니 나의 가난은 선생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저리도록 아팠다.

 

어릴 적 신었던 짝짝이 장화 때문에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은 일로 장화만 보면 사고 싶었다던, 이름값만으로도 춥고 배고프지 않아도 될 때도 스스로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던 선생에게 당신의 하느님은 언제나 깨끗하고 넓은 예배당에서 대접받는 하느님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머무는 하느님이었다.  당산나무와 조화롭게 사는 그런 하느님이었다.

 

선생에게 통일은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통합이 아니다.  비록 나라는 작고 가난해도 평화롭게 한마음이 되어 사이좋게 사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소망했다.  한마음으로 뭉쳐 살면서 보고 싶은 사람을 언제든 볼 수 있는 나라, 나라가 갈라졌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겨레가 고통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조국을 꿈꾸었다.  자연이 아닌 인간에 의해 우리 겨레가 남북으로 갈라졌듯 문화생활이라는 도시적 삶은 자연을 병들게 하고 결국 인간의 생명마저 파괴한다고 선생은 말한다.

 

어린이의 시선으로 보면 지극히 단순하고 부드러워지는 삶이 등나무 덩굴처럼 억세고 복잡하게 변한 까닭은 분명 우리의 욕심이 사납게 자란 탓일 게다.  내가 바라는 삶은, 내가 희망하는 삶의 모습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나는 누군가의 생명을 취하여 내 삶을 윤택하게 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되짚어 본다.  선생이 가신 지 이제 5년, 내가 죽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꽃은 피고 새가 지저귈 것이라고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우리의 무기는 괭이와 호미와 낫이지 장갑차나 미사일, 핵폭탄이 절대 아닙니다.  가난하고 어질고,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겼던 우리였습니다.  너무 순해서 어리석어 보일 때도 있지만 분명 자기 주인만은 알아볼 수 있는 우리였습니다.  김 목사님, 제가 거듭 부탁하고 싶은 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리석고 순하기만 하면서도 제 주인의 모습을 똑똑히 구분해서 따라갈 줄 아는 똥개는 될지라도 들쥐 같은 백성은 절대 되지 말라고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P.306)

 

세상의 가난을 모두 모아 인구수 대로 나눈다 한들 그것을 보편적 가난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그런 가난이나 아픔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개별적 아픔과 실존을 살아갈 뿐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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