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아침 기온이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9월에 출간된 에세이에는 제목만 읽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런 책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뜻한 느낌에는 사랑, 가족, 어머니 등등이 있지만 '슬픔'은 따뜻한가 하고 한참 고민한다.  '아무려면 어때.' 나는 너무도 쉽게 고민 같지 않은 고민을 놓아버린다.  가을 하늘이 너무 슬퍼서.  조락의 계절 가을이 가면 곧 겨울이 다가올테지.

 

<허삼관 매혈기>,<인생>, <형제> 등으로 유명한 작가 위화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 싶다.  위화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들었던 생각은 그의 글이 참 담백하다는 것과 슬픔을 저 깊은 심연으로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으로서 갖는 보편적인 감정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작가가 나와 같은 범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위화의 새책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에세이를 읽는 재미는 작가에 따라 크게 변한다.  이런 까닭에 인기 소설가의 산문집을 읽고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시인이 쓴 에세이에 실망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시인의 산문집에는 낱글자들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떨어지고, 때로는 균형을 잃고 위태위태 쓰러지지만 살아서 통통 튀는 낱글자의 몸짓에 그깟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시인의 산문집은 너무도 쉽게 읽힌다.  아쉬울 정도로.

 

 

 

 

 

 

 

판화가 이철수의 글을 읽노라면 그가 판화가인지, 작가인지, 아니면 구도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일 수도 있겠지만 판화에 새겨 넣은 짧은 글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을 더하여 그 끝에 닿을 수 없는 아득함이 느껴지곤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완서 작가의 책은 모두 읽었다.  내 독서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겠으나 슬픔의 밑바닥까지 가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후의 담담함', 나는 작가의 글에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오르가즘과 같았다.  기쁨의 극한을 성적 오르가즘에서 찾는다면 슬픔의 극한은 뭐라 말해야 할까?  방향은 서로 달라도 그 끝은 서로 통하는 것이겠지.  세상의 모든 끝에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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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 속도에서 깊이로 이끄는 슬로 리딩의 힘
이토 우지다카 지음, 이수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대학 시절 내 친구 L은 시인으로 등단하여 모 출판사에서 시집을 출간했었다.

그러나 친구의 시집은 거의 팔리지 않았고, 모르긴 몰라도 전국의 서점에서 반품된 책들이 출판사의 창고를 가득 채웠을 것이다.  친구는 책이 나온 지 얼마 후에 내게 와서 자신의 시를 몰라주는 독자들을 원망하며 넋두리 삼아 푸념을 했었다.  사실 친구의 시는 친구인 내가 읽어도 난해하기 짝이 없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친구에게 앞으로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면 안되겠냐고 했더니 도리어 친구는 내게 불같이 화를 냈었다.  친구의 주장인즉슨 이랬다.  시인마다 추구하는 시의 경향이 있고, 자신이 쓰는 시도 짧은 시간에 쉽게 쓰여진 시가 아니므로 독자도 그 시를 이해하려면 적어도 작가의 노력에 버금가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딴은 맞는 말이었지만 일반적인 독자에게 자신의 독서 스타일을 바꾸라고 말할 권리는 작가에게도 없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친구는 문학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라고 길길이 날뛰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눈치였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독서법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부분에서는 편협한 책읽기를 고집하고 있다.  가령 맘에 들지 않는 책은 몇 쪽 읽지도 않고 던져버린다든가 오탈자가 많으면 책의 내용까지 의심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무튼 한번 길들여진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오래 전 법정스님의 추천도서 목록에 올랐던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읽고는 '왜 스님은 이런 책을 추천도서에 올렸을까?'하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나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을 읽었을 때는 꽤나 만족했었다.

 

그 외에도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독서의 방법론이 아닌 책의 선택과 독서의 관점에 어떤 주관을 갖지 못했던 내게 도움을 준 책이었다.  글을 쓰는 것으로 업을 삼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처럼 수동적인 독서를 경험할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도움이 될 만한 많은 책을 통하여 자신의 독서법을 다듬고 보완하여 나름의 틀을 형서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리 큰 도서관이 아니더라도 독서에 관련된 책은 줄잡아 수십 권은 족히 될 것이다.  나같은 얼치기 독서가를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수동적 독서법에 관한 책은 넘치도록 많은 반면 아이들이나 부족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독서에 대한 강의(실천적 독서 또는 적극적 독서)를 목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에게 필요한 방법론을 제시해 주는 책은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도 논술이나 독서 교육을 전담하는 분들이야 많지만 어떤 소신이나 사명감을 갖고 그 방법론을 고민하는 분들은 찾기 어렵다.  물론 공교육의 제도권에서 국어를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그 틀을 깨기가 쉽지 않지만 사설 교육기관이나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조금 다르지 않을까?  그럼에도 교수법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는 듯하다.

 

주말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내가 갖고 있는 책도 빌려주고 읽어볼 만한 책도 소개하는 일을 두어 달 해본 경험에 의하면 그런 구태의연한 방법으로는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지도, 글쓰기에 흥미를 붙이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봉사의 차원에서 시작한 일이니 읽고 싶은 책만 빌려주고 내 할 일 다했노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장래와 희망에 대해 한번쯤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독서보다 더 좋은 것이 없겠다 싶어 내가 고집하던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그 방법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못쓰는 글이지만 내가 소설의 발단 부분만 쓰고 아이들로 하여금 그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여 말하도록 하고 그 중 가장 재밌는 내용을 그 다음 이야기로 채택하여 소설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물론 아이들은 스토리 라인만 내게 들려주고 쓰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담당한다.  이 수업에서 내가 의도하는 것은 몇 가지 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작가의 입장에서 글을 쓰다 보면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점과, 글쓰기에 대한 흥미 진작과 더불어 자신들이 쓴 것은 아니지만 한 편의 단편소설을 완성하면 그것에서 얻게 될 성취감 등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이니 그 결과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이들의 참여도나 열의, 또는 흥미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나는 주중에도 아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쓰느라 여가 시간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 책은 어쩌면 독서법을 찾는 수동적 독서가가 아닌 국어를 가르치는 능동적 독서가에게 필요한 책인지도 모른다.    일본 고베의 사립학교인 '나다'에 근무하던 하시모토 다케시 선생의 독특한 수업 방식을 집중 조명한 책으로 문고본 분량의 책 한 권을 무려 3년에 걸쳐 읽는 방식이다.  나카 간스케의 자전적 소설 <은수저>를 교과서 삼아 천천히, 그리고 깊이 음미하면서, 때로는 연괸된 내용을 찾아 '옆길로 새기'도 하면서 소설 한 권을 철저히 독파하는 것이다.

 

'단정하게 넘겨 빗은 올백 머리가 썩 잘 어울리는 그 국어선생님'은 아이들이 소설에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해 소설 속 주인공이 먹었던 막과자를 나눠주고, '축(丑)'이라는 글자에서 10간 12지를 이용한 육십갑자의 유래와 의미를 이끌어내고, 미술 수업과 연계하여 연을 직접 만들어 날려 보기도 한다.

 

"설령 빨리 읽어 나간다고 합시다.  여러분에게 뭐가 남을 것 같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내 수업은 속도를 다투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속독을 가르칠 생각도 없습니다.  그보다 다들 조금이라도 어렵다고 느낀 곳, 흥미로운 곳에서 스스로 옆길로 빠졌으면 좋겠습니다.  자꾸만 파고들어서 자신의 세계를 깊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천천히 갈 작정입니다."   (P.131)

 

한 학교에서 50년을 근무하고 지금은 은퇴하여 또 다른 교재를 준비하고 있다는 하시모토 다케시 선생의 열정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올해 7월에 100세가 되었다는 선생의 삶처럼 독서는 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인생의 지렛대가 되어야 한다.  설렁설렁 읽어 그 권수를 자랑할 일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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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노는 것을 마다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얄팍한 지갑을 생각할 때 마냥 들뜰 수만도

없는 노릇입니다.

 

일년 하시라도 장이 서는 요즘이야

물건이 귀해 목을 빼고 명절을

기다리던 우리네 어릴 적과는

많이 다르겠지요.

 

장에 간 엄마가 돌아올 시간만

이제야 저제야 하며

동구밖 멀리 시선을 두고 좌불안석이던

어린 날의 명절 전야는 이제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들고 간 선물 꾸러미에도

힐끗 눈길 한번이면 그뿐

물건 귀한 줄 모르는 요즘은

선물도 더이상 선물로서 대접받지 못합니다.

 

문자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은

오랜만의 만남도 감흥이 없나봅니다.

부모님의 귀향길에 자신들의 동행을

선심 쓰듯 합니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르면 이제

명절은 늙은 부모가 더 늙은 부모를 만나는

날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명절이면 일가친척의 덕담 속에

영혼이 한 뼘쯤 성숙하던

제 또래의 사촌들과 밤 새는 줄 모르던

일 년 내내 기다려지던

그런 날이었음을

까맣게 잊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웃 블로거분들 모두 즐거운 추석 명절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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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9-27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아이들에게 추석이란 어떤 의미일지 저도 궁금해지네요.
설날에는 설빔이라는게 있지만 추석에도 무슨 선물 안사주나, 제 아이도 그걸 기대하고 있더라고요 휴...
꼼쥐님도 추석 명절, 가족과 함께 잘 쉬셨으면 합니다.

꼼쥐 2012-10-04 14:35   좋아요 0 | URL
덕분에 추석 연휴를 잘 보냈습니다. 바쁘게 돌아다녀서인지 오늘따라 몸이 찌뿌듯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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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의 시간 - 도시락으로 만나는 가슴 따뜻한 인생 이야기
아베 나오미.아베 사토루 지음, 이은정 옮김 / 인디고(글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도시락'하고 나즉이 읊조리면 빈 양은 도시락을 경쾌하게 울리던 젓가락의 달그락거리는 울림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 듯하다.  생각해 보면 아주 오래전도 아닌데 요즘 아이들에게는 낯선 이름이 되어버린 도시락.  기술과 제도의 변화는 이렇듯 문화의 단절을 야기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이랴.  문화의 단절은 세대 간의 단절로 이어진다.  세월이 흘러도, 제도와 기술이 변해도, 조금쯤 불편하고 투박해도 변하지 않고 이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들이 있다.

 

도시락에 얽힌 추억이야 많지만 모두가 즐겁고 유쾌한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 내내 거의 모든 날들을 도시락과 함께 했으니 자긋지긋하기도 하련만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어 오히려 그리움의 대상이 된 것을 보면 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국민학교 시절, 노란 양은 도시락을 켜켜이 난로 위에 올려 놓고 혹시나 타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기도 했고, 부잣집 아이가 들고 온 보온 도시락에 시선을 빼앗기기도 했었다.  내가 부모님을 떠나 객지 생활을 시작한 것이 중학교 2학년부터이니 본격적인 도시락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나는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도시락을 싸는 일까지 도맡았다.  형과 함께 자취를 했지만 형보다 먼저 일어나곤 했던 내가 아침을, 형은 저녁을 책임지는 것으로 자연스레 배분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도시락을 두 개나 싸서 들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반찬통에서 김칫국물이 흘러 가방에는 언제나 퀴퀴한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날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가끔 눈비가 오는 날에 버스를 타면 가방을 받아준 여학생의 치마에 붉은 김칫국물 흔적을 남기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내 얼굴도 김칫국물처럼 붉게 물들었었다.  당연하게도 가방 속의 교과서며 공책도 귀퉁이는 온통 김칫국물에 젖어 시큼한 냄새를 하루 종일 맡아야 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도시락 쌀 일은 없어졌고 학교 대동제나 과 MT 자리에서는 가끔 학교앞 분식점에서 구매한 김밥 도시락을 맛도 모른 채 먹곤 했었다.  그렇게 도시락과는 차츰 멀어졌다.  도시락을 싸지 않는 그 순간부터 도시락을 들던 내 손아귀의 힘은 차츰 사위어 갔고 시나브로 세월이 마른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흩어져 갔다. 

 

오래 전 가고시마 현의 야쿠 섬을 방문했을 때 민박집 주인이 아침 일찍 산을 오르는 내게 들려주었던 도시락은 원시림에 낀 이끼처럼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했었다.  아베 나오미가 쓴 <도시락의 시간>을 읽으며 나는 그 순간을 생각했다.  월급쟁이, 해녀, 역무원 등 특별하지 않은 39명의 도시락 사진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신기하다.  도시락을 통해서 느림의 관계가 시작됐다.  자신의 도시락의 시간을 흔쾌히 또는 수줍게 공개해 주신 분들과 보이지 않는 끈이 생겨났다.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이것은 어쩌면 '도시락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닫는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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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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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좋았지.'하는 미련과 아쉬움이 잔디처럼 쑥쑥 자라나는 나이가 되면 웬만한 기억들은 아름다운 빛깔로 채색되기 마련이다.  조금은 생략되고 뒤틀릴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잘 꾸며진 추억들이 남겨진 삶을 지탱하는 자양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누구나 가슴 한가득 추억의 꾸러미들을 끌어 안고 사는가 보다.  그러나 생살을 찢는 듯한 아픈 기억은 저 무의식의 심연에 묻혀 정처없이 떠돌 수밖에 없음을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일부러 피한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음식이나 요리와 관련된 책을 읽었던 경험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유년 시절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곤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잊혀질 만도 하건만 그때의 기억은 트라우마처럼 남아 시간을 부표처럼 떠돌다가 가끔씩 마음을 훑고 지나갈 때면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로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은 내가 요즘의 어린 학생들에게 내 유년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면 '설마'하면서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곤 한다.  아이들은 내 얘기가 아주 오래 전, 조선시대의 어느 산골에서나 있을 듯한 이야기쯤으로 들리는 모양이다.  아니면 어느 책에서 읽었음직한 잔뜩 부풀려지고 과장된 시대적 상황으로 인식하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현 시대와는 동떨어진 고립된 삶을 살았던 듯하다.  그랬음에도 나는 내 또래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려니 하는 착각 속에서 살아왔고, 여러 책들을 읽고나서야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조차 대개는 나보다 나은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사실이 나를 몹시 당혹케 했고, 내 기억 속의 어린 내가 한없이 측은하고 안타깝기만했다.   

 

내 추억의 일부로서 음식을 기억하는 것은 극히 적다.  의식적으로라도 지우고 싶어서였겠지만 내게 있어 음식은 생존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도 까닭을 알 수 없지만 나의 아버지는 식사시간마다 어머니와 다투셨고 급기야는 매번 폭력으로 이어졌었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가족들은 최대한 빨리,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하며 숨 죽인 채로 자신 앞에 놓인 음식을 어떠한 맛도 느끼지 못하고 식사를 마쳐야 했다.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일종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공포가 스며든 음식.  모든 감각은 오직 다가올 공포에만 집중되고 음식을 통하여 즐겨야 할 맛의 축제는 사라진다.  여유가 없는 팍팍한 삶이었지만 내가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가난이나 배고픔이 결코 아니었다.  맷돌에 간 옥수수에 감자를 섞어 약간의 찰기를 더한 밥이 우리 가족의 주식이었다.  내가 쌀밥을 처음 먹어 본 것은 국민학교 일 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반찬이 더 있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때 먹었던 흰 쌀밥은 왜간장만으로도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작가 박찬일은 행복한 사람이다.  이 책에서 그는 유년 시절에 자신이 맛보았던 추억의 음식과 시칠리아 유학시절의 다양한 음식들, 그리고 자신이 읽었던 문학 작품 속의 맛을 소개하고 있다.  제목에서 말하듯 '추억의 절반은 맛'일지 모른다.  그러나 맛의 절반은 사랑이다.  어쩌면 맛의 전부는 사랑일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책을 읽는 내내 동그마니 외로운 내 유년의 아이는 그 형체마저 아스라히 멀어져만 가고 그 가억의 작은 조각이라도 부여잡고 싶었던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남은 페이지를 세어야만 했다.  사랑이 없는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는 오래도록 허방을 디딘 사람처럼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방황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추억하는 것은 즉물로서의 음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시간에 곁들여진 사랑의 분위기였다.  결국 맛의 절반은, 또는 전부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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