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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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래, 죽음에 대해서.

그런데 내가 죽음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일단 이렇게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혼자 있다.

나는 내가 언제 도착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주 오래되어서, 혹은 아직 오지 않아서.

그럼에도 이미 여기 혼자.

그럼에도 단 한 번도 혼자가 되지 못한 채로.

슬프다고 말하면 슬픔이 달아날까 겁이 난다.

무섭다고 말하면 말해지지 않은 무서움에 사로잡힐까 겁이 난다.

겁에 질린 내가 가장 위협적인 것으로 거듭난다.

이 모든 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긋지긋하다

죽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면서 죽고 싶다는 열망이 의심받을까 죽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일이.

죽지 않겠다는 말로 죽고 싶은 마음을 이해받으려는 비겁함이.

죽는 일에 실패할까 죽기를 시도하지 못하게 하는 망설임이.

빠져나올 수 없는 진창에 빠지면 정말로 죽어버리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이.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단번에 죽을 방법을 궁리하는 일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서 진짜로 두렵지 않을 때를 기다리는 일이.

지긋지긋하다.

이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긋지긋하다.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죽을 수 있다는 확신이 무너질까 거듭 죽고 싶다 생각하는 일이.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여전히 때를 기다리는 일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면서 참고 있어서 참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는 일이.

하염없는 유예 속에서 미련 없이 끝장내리라 다짐하는 일이.

비우고 비운 다음에도 의미가 나를 향해 침투하는 일이.

이런 말을 하고 나면 이 모든 게 유순해지는 경험이 정말로 지긋지긋하다.

이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지금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지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장 아메리 [자유죽음]

 

설득하지 않으려하는 태도는 감사한 일이다. 다만 작가가 끈질기게 매끄럽게 들려주는 언제 끝날지 도무지 모르겠는, 끝났다 싶으면 다른 변주가 시작되는 ‘죽음’이라는 주제의 연주는 각 장에 함께 실린 피아노곡들과 더불어 다채롭고 어둡고 깊고 날카롭게 화음을 발산한다. 그리고 그 내용들에게서 눈을 떼는 일은 쉽지 않다.

 

나는 이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마음을 다잡고 가다듬어 이 책이 이끄는 심연으로 딸려 들어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하며 읽어 나갔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기사화된 여러 다양한 매체들이 감상자들에게 실제로 충격적일만큼 강렬하게 영향을 미쳐서 직접 행동으로 나아간 무시무시한 사례들을 상기하며 절대 그런 ‘경우’가 되지 않겠다고 삶의 의지를 말 그대로 태워 올렸다.

 

단순하고 명백한 답이 존재하는 지의 여부도 알 수 없고, 오롯이 혼자 자신 안에 갇혀서 치열하게 반복해야 하는 싸움인 경우, 필요한 도움을 바라기도 어렵고 언제 끝나는지도 알 수 없어 피로도가 훨씬 더 크고 힘겨울 터이다. 선명한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방향을 알 수 없이 사방으로 분열하는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일은 상상으로도 지치고 숨 가쁘다. 어떤 의미로 살아가는 일은 멈추지 않는 여러 고통을 느끼고 직면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좀 더 정직하게 그 일상을 들여다보면 그런 식으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에 잡혀 살다가 문 밖에서 기회를 엿보던 죽음에게 결국엔 따라잡혀 소설이 끝나 듯 삶도 끝난다고 생각하면, 그건 절망일까, 그래도 희망이고 위안일까.

 

“나는 당신이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끝없이 죽음을,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이 고백은 새삼스레 더욱 뭉클하다. 각 장의 피아노곡 연주처럼 이야기 또한 유려하게 흐른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의 도착지가 작가의 이 한 마디라는 생각이 든다.

 

“삶이 정체되어 있다는 감정에는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현실적 조력이 필요하고, 그 조력 없이 개인의 의지는 자주 무력해진다. 나는 내 의지만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니고, 내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게 섣부른 희망으로 전달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이 말은 남겨 두고 싶다. 평생 변하지 않는대도 괜찮다. 그러나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어쩌면 인류 공통의 증상처럼 작가도 가끔은 급격한 불안과 긴장을 느끼고 일상의 많은 시간을 학습된 무기력과 싸우는 데에 소모한다고 한다. 나도 그러하고 내 지인들도 그러하다. 그리고 미처 이야기를 듣지 못한 다른 이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한 삶의 길에서 작가는 글쓰기를 즐거움으로 받아 들여, 운명에 따라붙는 잔혹성이 아니라 오히려 혹독한 삶에 파묻혀 자신을 파괴하지 않도록 붙드는 이유로 삼는다.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쓴다,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

 

“자기 안에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물론 이 책이 길을 제시해주지는 않겠지만, 본인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걸 느꼈으면 좋겠어요. 물론 자기가 느끼는 고통은 고유한 고통이죠. 다른 것들과 비교될 수 없는 고통이지만, 이와 유사한 종류의 감정들을 사람들이 많이 느끼고 산다는 것. 그게 위안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요.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는 사람, 아주 힘들어하고 자기 자신에 빠져들어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읽어 줬으면 좋겠어요.”

 

반어와 역설이 가득한 문장들이 작가인지 주인공인지 두 사람 모두인지의 내면에 폐쇄적으로 들어가 있는 느낌, 그 문장들이 그려내는 풍경이 얼핏 보였다가 곧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로 바뀐다. 비록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정제된 문장으로 써나간다.

 

이제야 고백컨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95

 

내용과 문장이 철저할 정도로 숨김없이 표현되어 압도되는 즈음에 위의 문장이 등장한다. 끝까지 감당하고 읽는 가는 독자의 몫이 된다. 어쩌면 작가는 이를 짐작하고 마지막에 작가의 말을 상당히 길에 실었을 지도 모른다. 혹시 자신의 엄중한 상황으로부터의 피난처로서 혹은 위안이나 구원으로서 이 글을 택했다면 그런 종류의 역할을 없다. 적어도 작가는 독자들을 자신의 감정을 쏟아 부을 쓰레기통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독자는 오히려 서운할 수도 안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허구가 아니다. 당신을 볼 수 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여기에 있다. 과잉의 고통이 있다. 119

 

나이를 먹는다고 사는 일이, 시대가 덜 힘겨워지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일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다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을지라도 버티고 견디고 살아가야 한다. 설사 그 고통 속에 끊임없이 변주되는 음악이 들릴지라도 말이다. 참 어렵다. 기력이 다한 낙엽처럼 쓸쓸히 자신의 삶을 읊조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혹시나 열렬하게 죽고 싶기도 하지만 그만큼 살고 싶은 심정을 지닌다는 것은.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도중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삶. 135

21장은 소제목에도 내용 전체에도 가로줄이 그어져 있다. 목차를 볼 때에도 그랬지만 심장이 달칵거리며 겁이 난다. 일말의 익숙한 희망도 없는 죽음에 관한 도무지 자비 없는 이야기.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마음이 서늘해서 뜨거운 커피를 자꾸만 내려 마셨다.

 

십 대에 암수술을 하고 꽤나 감성적일 뿐 아니라 진지해져 있던 그 시기도, 대학원 때 <죽음에 관한 철학> 강의를 받으며 발제발표를 하고 나니, 지도교수가 “너희들은 젊어서인지 이런 주제를 전혀 이해 못하는구나.”하신…… 살짝 발끈했던 그러나 실제 나이가 들어간다는 일이 느끼게 해주는 죽음에 대한 늘 떨리는 미세한 불안과 확인을, 그때는 정말 전혀 몰랐던 것이 사실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새삼 든다.

 

어쩌겠는가, 이만큼 확실히 보장된 미래 사실도 없고, 시기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일이 살아가는 일의 정체인 것을. 그래서 가끔은 가족, 친구, 지인, 타인 누구에게도 아무런 기대도 원망도 판단도 보류되는 일이 종종 있다. 나이가 들어 성품이 너그러워지고 유순해진 것이 아니라, 매일이 마지막일지 모르는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12월 31일, 유독 상세 내용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살아가버린 2019년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다시 2020년 또한 단 1분도 잠깐 멈춤을 할 수 없이 흘러갈 것이다.

 

벌써 내년을 빌어주는 마음 착한 이들의 문자들이 도착하고 있다.

 

즐겁고 신나고 맘껏 유명세를 누릴 작품들을 쓰는 점점 더 영리해지는 양지의 작가들도 사방에 가득한데, 마치 직업윤리에 철저하게 부응하는 양심고백을 하듯 이런 글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던 천희란 작가의 일상은 따뜻하고 가볍고 포근하고 웃음이 자주 머무르는 그런 것이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3개월을 내 안에 오래 감춰둔 두려움과 충격과 즐거움을 꺼내 볼 수 있도록 함께 한 소설Q 시리즈에 다시 한 번 경애의 마음을 보냅니다.

​매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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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 2 - 만화로 떠나는 벨에뽀끄 시대 세계 근대사 여행 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 2
신일용 지음 / 밥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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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벨르 에뽀끄>를 영상으로 가장 매력적으로 만난 것은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단 한 작품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알랜]의 영화에서이다. 함께 본 오랜 친구와도 각자의 벨 에뽀끄가 달라서 그러냐며 새삼스레 서로를 이해한 적이 있다. 나는 언제나 세심하게 제정된 법이 더 많은 현대가 덜 야만적이라고 생각해서 잠시 가볼 수는 있겠지만 과거로 돌아가서 살고 싶지는 않다. 물론 단순히 내가 과거로 관광 차 돌아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세계대전정도를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이런 사적 선택과는 별개로 분명 이 시대는 현재까지, 어쩌면 더 먼 미래까지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문화사조들이 생겨나고 발전한 시대임이 분명하고, 너무나 유명해서 익숙하기까지 한 스타 예술가들이 등장해서 인상주의라는 다채로운 사조를 시대와 더불어 더욱 화려하게 펼쳐낸다.

 

한편 시점을 달리해서 본다면, 유럽의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는 그들에게만 아름다운시대였을 뿐, 다른 세계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확장 정책으로 인한 유혈사태들이 정리된 이후 본격적으로 착취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물론 내부적으로도 계급/계층/빈부 갈등이 심화되어, 피카소가 사랑에 빠져들던 빠리의 몽마르뜨에서 빠리꼬뮌의 전사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피를 흘리고 있었고, 무려 해가지지 않는 영광의 제국빅토리아 왕조 치하 영국의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는 자국 노동자들을 한계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결과 아나키스트들의 봉기와 테러가 연이어 일어나고 마르크시즘이 태동하고 이를 응용/오용/남용한 레닌의 인류사 최초의 공산혁명실험이 시작된 시기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가 메이지 유신으로 자력으로 근대화의 길로 나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통한의 시기이기도 하다.

 

인물 중심이 아니라 개별 인물에 대해 내가 원하는 만큼(?)의 자세한 에피소드를 발견할 수는 없지만 시대의 분위기를 통시적으로 볼 수 있는 흐름이 원하는 바라 만족스러웠다. 예술문화사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고 양식 또한 어떠했는지 결합해서 보여주는 이야기라 한 영역이 다른 영역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예시로 연결해서 들려준다.

 

유럽의 근대사 이야기이긴 하지만 고립된 자국만의 역사란 불가능한 것이기에, 이 시기의 중요한 사건들이 미친 영향을 대한민국의 정치제도와 사회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활용해볼 수 있고, 의외로 이런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대한민국의 근대사가 아니라 얼마 전 뉴스보도에서 이해한 한국사회의 현재진행형 문제들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독자들 개별 해석에 따라 달라질 것임이 분명하겠지만). 마침 2권의 마지막 부분들은 여러 나라의 정치적 인물들이 등장하고 전쟁 전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시작된다. 어리석고 탐욕스런 비극으로의 거대하고 파괴적일 뿐인 전쟁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3권을 통해 더 자세히 설명될 모양이다.


만화책이라는 형식으로 다룬 역사이지만 내용이 즐겁게 감사하게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치밀하고 알차다(과문한 나의 인상일 뿐일 수도 있다). 유럽, 아시아 그리고 필요한 다른 나라의 역사를 함께 검토한 작업을 거쳐 만들어진 책이라는 느낌이다. 자연스럽게 이런 드넓은 시야를 가지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도한 기업인 출신의 작가에 대해 궁금해진다.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지식의 생산량을 늘려서 저서와 같은 구체적인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이런 이들과 마주치면, “정말 내게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라면 기억에 남겠지.”란 태도로 대부분의 경험들을 흘려보내는 게으른 존재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늘 부럽다.

 

한 가지 재밌었던 점은 글에 드러난 저자의 말버릇이다. ‘잠깐 옆으로 샜다.’ 처음 들을 때는 모르고 넘어 갔지만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아하! 저자의 사고 패턴이 조금 파악되는 듯하다. 전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연상 작용이 아주 활발하다는 것! 그래서 이 책은 다채롭고 풍부하고 떠들썩하게 재미있다. 또한 깔끔하게 자신이 내린 결론으로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라고 마지막에 물음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생각을 낯설게 느끼게 하고 헤집어 볼 기회를 제공한다. 혹은 재미난 사족처럼 다른 예화를 덧붙인다.

 

언제나 깔끔하고 산뜻하게 마무리되는 관광보다는 낯설고 돌발 상황이 없지 않은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저자의 연상방식도 마무리방식도 참 마음에 든다. 마치 런던과 빠리에 가더라도 환하고 떠들썩한 광장이 아니라 골목 사이로 자연스럽게 들어가 거기 사는 이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한가한 시간이 되면 역사 속의 배경으로 환기하고 상상해보는 여유를 가지는 여행. 근대사에 관심이 적은 분들에게는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으나, 가끔 두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밤늦도록 근대사 장면들에 놀라며 떨리며 감정이입하며 시간을 보낸 내 시대에 관심과 애착을 가진 독자로서는 개별 사건들에 대한 가치의 현대성 효용성 따위를 따지는 거만한 후대들의 질문들을 잠시 덮어 두고서 나만의 평화로운 비동시적인 동시성의 세계에 머물러 본다. 맘 편하게.

 

2019년 겨울, 그리고 12월이 한 때의 연착도 없이 지워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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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할머니, 미생물, 그리고 사랑 - - 한 인간의 삶을 통해 고찰한 인문·생물학적 생장에세이
이낙원 지음 / 밥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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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안에 들어 있는 무언가가 호흡하는 모든 것을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고 믿는다.

 

호흡기내과 의사로서의 경력에서 비롯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인식을 그대로 선명하게 보여주는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할머니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역사적 생물’로 그려지고, 그런 할머니의 존재는 저자의 마음속에 별과 사랑으로 새겨져 저자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하나의 단순한 후손이 아니라 다소 생소한 명칭인 ‘생장체’로서 스스로와 우주를 마주하게 하는 전개로 나아간다.

 

시간이 가면 바뀌는 것들이 있다. 후임자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영역이 줄어들고, 또 넘겨줘야 하는 것들이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리의 물리적인 몸 그 자체이다. 언젠가 몸 자체를 후임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시는 조부모님과 함께 산 조손들의 기억은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다. 나는 정기적으로 찾아뵙는 쪽이었지만 모두 소천하신 지금도 만남의 모든 기억들은 언제나 언제나 환한 빛과 따뜻한 볕과 그리운 음식 향들로 떠오른다. 언제나 기다려주고 반겨주는 존재. 실재로 그러했든 아니든...... 그렇게 기억되는 존재들은 드물고 살아가는 일은 그런 존재가 엄청 귀하다는 것을 죽도록 쓸쓸하게 절감하는 경험을 포함한다는 것을...... 한 겨울 칼바람에 얼어붙은 듯이 멍하니 깨달았던 지난 기억에 늘 마음이 시리다.

 

참 이상하고 더 서러운 것이 그렇게 조부모님들이 돌아가신 후에는, 이전에 역시나 따뜻한 추억들로 채워지고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공간이었던 본가의 집들도 마당도 나무들도 하물며 공기도 하나같이 생명의 빛을 잃고, 아무리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도 싸늘하니 어딘가가 망가지고 무너져간 경험이다. 아무리 과거란 미화되기 마련이라 할지라도 과장 없이 솔직하게 심정을 토로하자면, 그렇게 나는 완벽하게 행복했던 그 시기를 지나 돌아갈 옛 집도 그리운 분들도 잃고 심리적으로는 불안과 걱정이 많은 가난한 어른이 되어 뜻밖에 사회적 고아 같은 기분으로 늙어가고 있다.

 

할머니의 음식은 일용할 양식이었지만, 단순한 포만감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이상이었다……. 내가 먹었던 그 모든 것들은 내 기억 속에, 그리고 내 몸을 이루는 세포와 식성과 정서 속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할머니들의 인생사를 얘기하는 데에는 당연한 듯이 ‘파란만장’이란 표현이 등장하기에 사전까지 찾아보았다. 딱히 저 적확한 표현이 생각나진 않지만, ‘파란만장’ 정도로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할머니들의 인생 얘기에 한 자리 끼어들지도 못하겠다 싶게 사전적 의미가 공허하긴 했다. 다사다난 억척같이 살아내다 보답과 보람과 영화는커녕 인생무상의 결말을 보는 분들이 얼마나 많으실지……. 떠들썩한 지가 꽤 오래 되었지만 아직 유투브도 책도 접하지 않은, 그렇지만 피할 수 없어 이런저런 내용들이 무척 익숙해진, 2019년 베스트셀러임이 분명할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역시 [별, 할머니, 미생물 그리고 사랑]과 ‘파란만장’이나 ‘다사나단’에서 궤를 같이하는 내용이 많을 것이다.

 

늘 한결같은 애정, 근검절약 정신, 부지런함, 이타성. 왜 대개의 할머니는 비슷했을까? 중략. 절약과 헌신이라는 이 품성의 절반 이상은 시대가 강요한 성품일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전후의 가난 속에서 자식을 길러내는 여성으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 시대 할머니들의 성품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자랐고, 전쟁 후에 자녀를 길렀고, 근대 산업화시기에 할머니가 되었다. 인류 역사상 이토록 가파른 언덕을 올라간 세대가 또 있을까.

 

예전에 유달리 피곤했던 어느 날, 조부모님 얘기를 들으면서 재밌기보다는 ‘아, 저 이야기는 200번쯤 듣는 것 같아......’하고 시큰둥 흘려들었던 게 여태 기억이 난다. 살다보면 그런 ‘진짜 이야기들’을 들을 기회가 귀한 건 줄 모르고,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역사가 절로 움직거리고 마음도 더불어 움직이는 그런 이야기인 줄 모르고. 가사문학을 즐겨 낭독하시던 조모의 음성을 어느 날 녹취한 짧은 분량 말고는 이제 그분들의 음성은 영영 들을 수 없다...... 라고 쓰는데 눈물이 차오른다.

 

이렇게 조부모님 얘기로 징징거려도 가여울 나이는 이미 한참 지났는데,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성장의 시기를 한참 넘어 부모님도 잘 돌아볼 줄 알아야하는 시기임이 분명한데, 누구에게나 남은 시간이 얼마나 짧을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인데, 아직도 갈무리 못하고 짜증을 부리는 나를 보자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 ‘내 짜증을 남에게 알게 하지 말라’를 새해 결심으로 올리고 만방에 공표해서 그 부끄러움에라도 기대 철딱서니 없는 짓을 그쳐보자 했는데, 아무리 잘 봐줘야 조금 어조가 덜 상스러워진 듯하기도……. 그 정도.

 


어떻게 읽은 책인지 정리가 안 된다. 감정이 엉클어졌는데, 동서고금 가족을 연상시키거나 환기시키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게 복잡한 작용을 하는 건 분명하다. 그냥 그 상태로 정리되는 건 다시 주워 담고 안 되면 다른 결심을 하고 그래야겠다.

 

오래된 기억을 조용히 하나하나 찾아내어 차분히 옮겨 적은 그리운 이야기 한 가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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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스토리콜렉터 79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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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시라도 빨리 이 집에서 떠나는 게 좋아. 그리고 집 뒤로 펼쳐진 사사 숲에는 절대로 가면 안 돼!

 

다른 시리즈를 읽지 않아서 캐릭터들이 어떤 느낌인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유마’는 애틋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비해 감이 좋고 논리적이다. 아이답게 철없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특하다기보다는 가여운 마음이 먼저 든다. 하지만 그런 내 느낌과는 별개로 유마 캐릭터는 내가 내민 손이 민망할 정도로 적어도 나보다 몇 배는 강한 캐릭터이다.

 

폐소공포증이 있어 동굴탐험은 꿈도 꾸지 않는 나로서는 유마가 나무 굴속에서 벌이는 추격전 장면에서 숨 가쁨과 폐소공포증이 숨 가쁜 느낌이 생생할 정도로 들려왔다. 독자로서의 내가 그 폐쇄된 공간에서 공포에 질려 있는 와중에 주인공은 성장하고 변화하여 충분히 현실적이지만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운 결말로 나아간다.

 

항상 묘하게 으스스했다. 휑뎅그렁해서 어쩐지 오싹했다...... 우리 가족 외에 또 누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부터 귀신은 무섭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살면서 제일 무서운 건 역시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에서도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어쩌면 본인도 스스로 알 수 없는 사람의 복잡한 심리와 계산이 낳은 공포가 한 밤의 어둠보다 깊다. 이 소설도 얼핏 집이라는 ‘공간’이 사건의 배경으로서 강력한 역할을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집보다는 집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관계가 더 중요하고 주인공 유마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변칙적인 요소들로 작용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영향들을 모두 그러모아 유마는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게 되는데, 문화의 탓인지 작가의 의도적인 구성인지 주로 남성 캐릭터들에만 집중되고 여성캐릭터들의 존재는 배경 처리인 듯 수동적이다.

 

아버지가 쓰고 싶었던 건 순문학이었다. 지금도 순문학이 무엇인지 유마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짐작컨대 관능소설은 여기 포함되지 않을 터였다.

 

첫 번째 남성캐릭터인 친아버지 세토 마사오. 추구했던 순문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의문사로 사망한다. 관능소설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만은 담당했으나 실패한 인생에 가깝다. 유마에게는 창의적인 직업을 가졌던 아버지로서 동경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존재이다.

 

소설을 써서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면 훌륭한 직업이라 할 수 있지. 반대로 그러지 못하면 아무리 창조적인 일이라 해도 직업이라 할 수 없어.

 

두 번째 새아버지 세토 도모히데. 무역회사 중역으로 성공한 인물의 예이지만,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고 본인을 자랑스러워하며 유마의 친부를 폄하하고 유마와 어머니 관계를 악화시키는 역할이다. ‘혈육, 친자식’에 애정과 집착이 있음을 숨기지 않는 성격으로 유마를 진심으로 가족으로 여기지는 않는 듯하며 장기 출장에 임신한 아내만을 데려가는 경악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잘된 일 아니냐. 발음은 똑같지만, 우리 성씨에는 ‘처세’라는 뜻도 있거든. 너도 장차 처세에 능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세 번째 삼촌 세토 도모노리. 실질적 관계를 맺지 못한 두 사람의 아버지들과 달리 유마가 적극적으로 따르는 남성 어른이다. 하지만 허세가 가득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로서 사기꾼의 기질도 많은 듯하다. 의부와 친형제이지만 소위 말하는 인생에서 실패한 형편이고 의외로 유마는 그의 실패한 처세에서 배워서 성공하게 되니 어쩌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랄 수 있다.

 

미처 읽지 않은 작가의 전작들에는 악령에 씌어 꼭두각시가 된 심성이 나약한 인간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마가]를 읽고 나면 그 소설들은 전혀 무섭지 않을 듯도 하다. 이 소설에서는 귀신에게 이용당하기는커녕 귀신을 악용하는 짓들을 자행하는 귀신보다 섬뜩하고 잔인한 인간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인간은 욕심이 많고 혹은 욕심이 많은 인간은 이기적이고 짜증스럽게도 나쁜 머리가 발달했지만 다행이 끝까지 완벽하진 못하고 실수를 해서 범죄를 들키게 된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아이들을 생각하니 소설이라지만 참……. 가독성이 좋아서 별 불만이 없었는데 마지막 반전 “헉!” 덕분에 손발이 시리고 뒷목이 서늘하다. 독특하고 흥미롭고 지루할 틈 없는 소설이다.

 

여기는 유마가 알고 있는, 이른바 자연의 숲이 아니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았다는 의미에서는 완전한 자연 상태지만 또 한편으로는 강렬한 원시성이 느껴졌다. 인간의 존재 따윈 애초에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로 가득했다. 유마가 아는 숲과는 명백히 다른 공간이었다. 이계, 다시 말해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세계’에 성급하게 발을 들이고 말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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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쉽고 그럴싸한 요리책 - 파워블로거 벨루가가 알려주는 간단하고 맛있는 레시피
최해정 지음 / 미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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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법이나 요리법을 열심히 찾아본 경험이 많다고 할 수 없는 지라 상대평가는 어렵지만, 이 책의 엄청난 분량의 요리법들에 한번 놀라고, 많은 요리법이 어쨌든 내가 느끼기에 ‘이 정도로 쉽다니!’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뚝딱! 뚝딱! 요리가 완성되어 차려지는 속도가 느껴질 정도로 간단한 것만은 명백하다. 경력이 오래된 파워 주부님들에게는 감히 한 말씀도 올릴 수 없지만 특히 집 안에 퍼지거나 머무는 음식 냄새 양념 냄새에 인내심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로서는, 그런 점들도 고려한 간단 깔끔 뚝딱 조리법들이 가장 반가웠다. 더 큰 장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색과 모양이 내공이 깊은 요리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아직 몇 개 따라 해보지 못했지만, <꽁치 무조림>이란 명칭을 보시라! 담음새도 요리 실력만큼 좋으신 듯 내공 가득 뚝배기에 담겨 있다. 생선 손질은 그야말로 천지개벽할 일이 아니면 엄두가 안 나는 처지라 통조림을 활용한 생선요리라면 1차 안심! 그리고 가을 겨울 무가 한창 맛있는 지금 절대 지나칠 수 없는 메뉴이다. 코다리 무조림을 먹어도 무조림만 먹는 나로서는 귀한 생선 요리이자 반가운 메뉴이다. 벨루가님이 만드신 것을 시식해보지 못해 맛을 제대로 따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충분히 맛있었으니 1차로서는 성공!^^ 실패 없는 기본 조리법을 바탕으로 해서 양념을 아주 조금씩 달리하면 독자 개인의 입맛을 찾아내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두번째로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들기름 느타리 가지찜>. 들기름 소비량이 끝없이 늘어나는 내 입맛이 슬슬 심각하게 걱정되는 시점이긴 하지만, 역시 늦가을 반찬 메뉴로 참 좋을 듯하다. 가지는 여름 내내 너무 많이 먹어서, 버섯 3종과 약간 분량씩의 색색 채소들을 채 썰어 곁들였더니 버섯의 졸깃하고 들기름의 부드러우면서도 향긋한 조화가 채수의 향과 더불어 정말 좋다. 화력 조절과 요리 시간만 잘 지키면 정말 맛있는 일품 요리를 완성시킬 수 있다. 대단하신 벨루가님!

 

그리고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 흐리고 젖은 일요일, 메뉴 중에 궁금증을 자아내던 <모듬찌개(모둠인지 모듬인지 확실히 모르겠어서, 벨루가님과 출판사가 ‘모듬’이라 기록하셨으니 따라 표현합니다)>를 시도해보았다. 그 결과! 이럴 수가……. 지난 주 친구가 꼭 먹고 싶다고 해서 음식 맛 깔끔하기로 유명한(종목 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심지어 건강식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한다.) 송탄부대찌개 전문점에서 먹은 부대찌개 전골과 충격적으로 유사한 맛이 났다.

 


음……. 그래서 건강식?! 아무튼 앞으로도 이 명칭만은 오래도록 사랑하고 애착을 유지할 듯하다. <모듬찌개> 이 얼마나 영리한 명명인가. 이 흥분을 잊지 않는다면 재료들을 달리한 모듬찌개 시리즈가 얼마나 갈 수 있나 기록해보고도 싶다. ^^

 

 

뜻밖에 선물을 주신 벨루가님의 요리책 출간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함께 보내 주신 우드스푼……. 너무나 예술적인 공예 기술을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어 장식으로 모셔둘 듯합니다.

추후에 시도해본 요리 중 재미난 일, 감동 받은 일 뭔가 나눌 얘깃거리가 있으면 다시 올려 보겠습니다.

앞으로의 더 많은 승승장구를 늘 응원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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