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하나 잊지 말자는 것이다 - 만화로 읽는 나혜석
유승하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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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까짓 계집이 뭘 해?”

 

만날 기회도 자료도 많지 않아서 익숙한 이름만큼 궁금한 나혜석을 만화로 만나게 될 줄 몰랐다. 기쁘고 반가운 조우다. 창작이란 경이롭다. 멈춘 시간을 포착된 벽화 같은 자료들을 살려 내어, 그 사람을 만나게 한다. 언젠가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으려나 즐거운 상상도 하게 한다.



 

말간 풍경보다 언제나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삶의 풍경을 더 잘 보는 화가 나혜석의 그림들에는, 온갖 노동을 감당해야 했던 여성의 사실적인 노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 시선은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은 오늘에 지지 않고 내일을 보며 똑바로 살아간 사람만이 갖는 힘이다.

 

우리는 아무도 살아본 적 없는, 새 시대를 만들어가는 개척자들이니까.”

 

나혜석과 친우들이 그 시절에 만들고 싶었던 새 시대는 2025년에도 충분히 실현되지 못했다. 육아 출산은 아직도 여성만의 일 인양 정책에서도 인식에서도 차별 받는다. 평등한 노동으로 차려진 평화로운 식사도 귀하기만 하다.

 

나는 내 나라를 잃었지만 잃어버린 그 나라에서 여자는 인간 대접을 못 받았어. 다시 나라를 찾는다면 여성들도 평등하면 좋겠구나.”



 

여성은 아직 평등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그 존엄을 존중받지 못하고, 소유물로서 친밀한 관계의 남성들에게 맞거나 죽임 당한다. 비난 받는 것으로 우리의 역사를 채우겠다는 당시의 결심은, 협박과 비난을 감수하는 오늘의 여성들과 연대한다.

 

연말을 망친 내란의 밤들, 빛을 밝혀, 광장에 모여, 내란을 막고 탄핵시킨 이들이 있다. 그때 나눈 이야기들은 나혜석이 바라던 세상, “모두가 평등 평화를 누리며 온세상 차별 없이 모든 생명의 귀함을 아는 세상과 많이 닮았다.

 

좌절할 이유는 없다. 매일 한 명씩 살해당하는 현실에도, 많은 나혜석들은 여전히 없는 길을 만들어, 한걸음씩 나아간다. 그러니 제자리로 돌아간다거나 회복을 바란다는 말은 사양이다. 단 한걸음도 뒤로는 이전으로는 가지 않는다. 오직 앞으로 미래로 새롭게 만든 곳으로 계속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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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
앨러스테어 레이놀즈 지음, 이동윤 옮김 / 푸른숲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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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뇌가 욕망만 충분하다면 거의 무엇이든 눈에 보이도록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천체물리학자의 과학소설, 혼자 내적 친밀감을 느끼며, 작가가 어떻게 공간을 eversion(전환)할 것인지 기대가 컸다. 무대 배경 스크립트처럼 묘사가 촘촘한 첫 장을 읽으며, 50부작 정도의 드라마로 보면 좋겠단 생각부터 들었다. 공간에 관한 내 상상력의 한계가 아쉬웠다.

 

얇지 않지만 가벼운 책이 줄어드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아껴 읽고 싶었다. 바람과 다르게 장면은 휙휙 흘러갔다.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구,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명체, 가본 적도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지구 중심부... 마침내 하강(?) 비행하기 시작했을 때는 두근두근했다.

 

인간이 완전히 낯선 무언가를 목격하면 어떤 인지가 가능할까. 수학자 뒤팽의 반응은 수학적일까. 주인공의 이름은 왜 코드code일까. 전환eversion이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의 메시지는?

 

항상 번개가 친다.”

 

물론 이런 형태의 집중은 인지에 톡톡 충격을 주듯 배치된 힌트(?)들로 인해서, 꿈에서 깨어나 또 다른 꿈을 꾸듯, 혹은 깨었다고 믿었지만 아직 꿈을 꾸는 중인 듯, 모호하게 알 듯한 경험으로 새곤 했다. 읽는 것만으로 내 의식에 인셉션기술*이 심어지는 듯했다. * 영화 <인셉션> 생각을 심는 기술.

 

간절한 바람은 결함일까.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무엇일까.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속이는 일, 거짓말의 진화적 효용은 무엇일까.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SF 소설을 읽고 통곡도 하는 팬이지만, 어두운 우주의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같은 질문들을 만날 때면, 끝없이 서글퍼지고 만다. 존재한다는 것은 반짝이는 고역이다. 해체와 소멸을 향해가는 모든 시간을 삶이라고 부르는 순간들이 서럽다. 진실과 아름다움의 향하는 방향이 늘 같지 않아서 서늘하다.

 

딱 하나 당신만큼은 진짜이기를 바랐는데.”

 

끝없이 읽고 싶은 작품이라 오래 품었다. 스포일링이 없이 쓰느라 정보도 뜬금도 없는 글이 된 것 같다. 여름의 혼곤한 잠 속에서, 이 작품의 세계로 들어가는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 언젠가 50부작 드라마로 좀 만들어 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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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다 죽은 여자들 - 가장 조용한 참사, 교제폭력을 말하다
경향신문 여성서사아카이브 플랫 지음 / 동녘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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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이 나올 때까지 어떻게든 내가 살아야 할 것 같아서.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이 대한민국에서 믿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책 제목만 봐도 해당 범죄 사건들이 떠오르는 현실이 끔찍하다. 불완전한 통계로도 헤어지다 죽은 여자들의 수는 대량 살상 재해 수준이다. 관련 주제의 글을 읽을 때면 속보(빠른 걸음) 수준으로 심장이 뛴다. 극우 폭력 남성성이 정치권력도 되는 한국 사회, 더 미룰 여지없이 제대로 알고 알리고 바꿔야한다.




 

교제폭력은 단순한 폭행이 아니에요. 연인 사이에서만 알 수 있는 정보를 악용해 상대방을 착취한 겁니다.”

 

모르지는 않다고 생각한 주제임에도, 모르는 내용들이 적지 않았다. 책의 형태가 된 기록은 이렇게 중요하다. 끔찍한 범죄에 감정이 요동치는 상태로 만나게 되는 기사보다 좀 더 차분하게 읽고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돕는다.

 

스토킹 범죄에서는 지속성, 반복성이 중요한데, 한번 연락을 받게 되면 이전에 있었던 행위는 모두 리셋되는 현실이 답답합니다.”

 

더구나 이 힘든 문제를 연구하고 기록하고 이슈를 제기하고 지적하고 분석하고 법과 제도의 개선, 사회인식의 변화와 피해자 연대까지 함께 하는 분들이 많다는 점이 큰 힘과 용기를 준다. 두려움이 가라앉는다. 퇴직 이후로 미뤄둔 일들이 너무 많지만, ‘성폭력 전문 상담원 교육 과정도 목록에 적어 둔다.

 

다수의 살인 사건 피해자는 남성인데, 살인 사건 가해자의 범위를 친밀한 파트너로 좁히면 80% 이상의 피해자가 여성이기에 이를 젠더화된 범죄라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모두가 귀중한 기록이고 분석인데, 다 소개할 수 없어 안타깝다. 부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주시기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련 이슈를 제기하고 서명해 주시기를. 변화가 있을 때까지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정폭력이든 교제폭력이든 남성 파트너가 여성 피해자를 지속적으로 폭행하다가 사망에 이른 경우 대부분 형법상 폭행치사, 상해치사가 적용된다. 계속 맞던 여성이 남성 파트너를 살해한 경우엔 계획 살인으로 중형이 선고되는 것과 대조된다.”

 

한국의 사법체계가 왜 피고인을 처벌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피해자의 억울함과 유족의 아픔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지, 다른 폭력과 다른 교제폭력의 특성이 무엇인지, “현재 국내에는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 따로 처벌할 법적 근거도, 양형 기준도 없는지, 교제폭력에 대한 수사 매뉴얼은 어떤 전면적 개선이 필요한지, 국회 청원 이후 20257월 현재까지 여전히 관련 법 개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폭행 이후에도 이리저리 얻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치욕스럽다고 느꼈고, 차라리 신고를 안 했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피해자와 가족들과 조력자의 이름은 모두 실명이고 가해자는 모두 익명인 이유를 곱씹으며, 개인의 일탈이 아닌 젠더 위계에 따른 범죄의 핵심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알려야 한다. “법안 개정이냐, 신설이냐 하는 방법론적 논의 외에 여성에 대한 폭력을 포괄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 정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전국에서 데이트폭력, 교제폭력으로 죽은 사람들 가족 한번 모아보세요. 이게 다른 사회적 참사들하고 무슨 차이가 있어요? 똑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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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우체국
호리카와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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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옅어지는, 때론 상관없어지는 여름밤에, 여전히 찾고 싶은 분실물이 궁금하고 간절해질 때 펼쳐 읽기 시작했다. 휴가 중 독서라서 더 좋았다.

 

도텐 우체국은 정말 이곳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만 선택해. 도텐 우체국이 선택한 사람만 올 수 있어.”

 

미야자키 하야오(みやざきはやお, 宮崎駿)의 세계관을 좋아해서, 애니미즘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과학전공자로서는 세계관의 충돌 같기도 하지만, 일신론보다는 범신론이, 지구생물의 기본 구성 원소들이 동일하다는 측면에서 더 설득력이 있다. 모두 신이란 건 모두 신이 아니란 말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취업준비생이 물건 찾는 특기(?)로 마침내 취직한 곳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놓인 우체국이란 것이 재밌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사연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고생이 뒤따를 것이 애틋했다. 그럼에도 읽기 시작하면 영상처럼 펼쳐지는 상상 속 풍경에 금세 빠져들고 만다.

 

내가 있을 자리가 현실인지 환상인지조차 알 수 없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사별이 어떤 경험인지 배우고 애도를 마치지도 못했다. 아버지 1주기가 다가오는 시기라서, 먹먹한 기분으로 차오르는 슬픔을 누르며 읽기도 했다. 사후세계가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있으면 좋겠단 생각마저 드는 그리움에 서글픔이 차오른다.

 

그래서일까... 괴기스럽거나 무섭지 않고, 다들 애틋하고 가엽다. 죽기 전에 억울함이 남지 않도록 살지 못하는 인류 역사와 현실이 더 안타깝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짓들을 저지르며, 함께 사는 삶을 망가뜨리는 산 사람들이 늘 악귀보다 무섭다.

 

가까운 사람이 죽을 때마다 세상의 무상함을 느껴.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차근차근 정이 든 도텐 우체국에 근무하던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 궁금했는데, 다행히 결말 이후에 에필로그가 있다. 내용을 보니 안도가 되면서 숨 쉬기가 편해진다. 살아보면 사라지듯 날아가 버리는 세월, 앞으로의 만남들을 더 반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덕분에 더위도 잠시 잊고, 무심하게 즐거웠다. 다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만들어지길, 억울함도 후회도 더 적은 삶이 더 많아지길 끝까지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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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찢남의 인생 정식
조광효 지음 / 책깃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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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고 조금 투박하긴 해도 체면치레하지 않는 솔직함, 냉혹한 현실에 자존심을 굽히지 않겠다는 꼿꼿함 (...) 나는 유독 힙합이 좋았다. 생각해보니 요리도 이런 게 좋다.”

 

전 회를 다 보는 드라마는 많아야 한 해에 한 작품 정도라서, 엄청난 흥행을 했다는 <흑백요리사>도 시청 전이다. 취향 중에서도 음식에 관한 것은 고유하고 사적인 것인데, 승패를 가르는 것이 큰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이벤트보다 루틴이, 요리보다 조리가, 일상으로 지속되는 삶에서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맛있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인간만이 하는 요리라는 행위와 문화가 지나치게 소란스럽다고도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망설임과 기다림 대신 행동으로 옮기는 비범함 - 부럽다 - 을 지녔지만, 그 시간들이 지극히 평범하고 친근해서 이 책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 흔한 재료로 맛있게 만드는 요리들이 좋다.

 

나는 취사병으로 군 복무를 하면서 조리 노동의 숭고한 가치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전문가가 무척 쉽게 휘뚜루 한다고 해서, 비전문가 독자가 재현하는 건 어렵다. 가능하면 채식이 더 좋고, 진한 양념이 잘 맞지 않은 입맛이라서 취향 차이도 적지 않지만, 덕분에 떡볶이를 두 번이나 만들었다.

 

고추장 양념을 좋아하지 않고 정제설탕 맛이 싫어서, 한국인이라면 모두 그리워하는 추억에 여전히 선호한다는 떡볶이에 대한 애호가 나는 거의 없다. 그래도 책 덕분에 만들어본 비건 떡볶이 두 종류를 맛보는 건 의외로 즐거웠다.

 

요리에도 영감이 필요하고, 책에서 발견하는 크고 작은 영감만큼 재밌고 반짝이는 건 없다.”

 

솔직담백하고 에너지 넘치는 이야기를 통해 전해진 에너지 덕분인 듯하다. 실화인데 너무 웃긴 내용 덕분에 크게 웃었으니 고맙기도 하다. 만화가 요리의 처럼 곁들어진 구성이 좋아서 탐나는 레시피들 - 차예단, 감자만두, 오이지 등 - 도 챙겨두었다.

 

저자가 기쁘다고 재밌다고 즐겁다고 행복하다고 거듭 적어두어서, 그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나도 기분이 폴폴 가벼워졌다. 누군가를 위해 부지런을 떠는 그 시간이 기쁘고, 만드는 과정이 재밌고 즐겁게, 주방에서 머무는 오랜 시간이 행복하고.

 

저자는 인생, 참 재밌다고 거침없이 전한다. 유쾌해서 좋다. 그 유쾌함에 버무려진 양념들이 모든 낯설고 두려운 순간들을 경험한 선택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참 좋다. 영상으로 만날 조광효요리사도 무척 반가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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